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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투쟁, 긴싸움을 끝낸 창곤이형에게

오래전 썼던 이글을 다시 읽자니..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난다.
300일 넘는 시간 동안 성곡성당에 갖혀있다 집에 돌아온 대우자동차 노조 쟁의국장이었던 창곤이형은 많이 아프다. 지금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암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이들 셋을 기르는 순이언니는 그래도 힘든 기색없이 웃었다.
사람들은 긴박한 싸움의 자리에는 관심이 있었도, 그자리가 끝나면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내후년쯤 복직 될 것도 같다고 하는데, 패배한 공장에서는 어떤 싸움도 제대로 되지가 않고..서로 침묵만 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괴롭다.
아래는 창곤이형이 성당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썼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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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곤이형.

대자 싸움을 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긴 시간이 지났는데, 그동안 몇번의 편지구절도 생각해보았지만 안하던 짓 한다는 쑥스러움에 그만 접어두었어요.
이제 정리하고 떠나는 길에서야 왜 그때 편지 한번 못했을까 후회를 합니다.


처음 형과 술을 마시던 날, 기억하시나요?
99년 6월이었을 거예요. 노문센터 준비위원 총회를 끝내고, 미친듯이 술을 먹은 대오가 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한강변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꽃다지 사무실로 가서 잠들었던 그날입니다.

영등포 공원인지, 여의도 공원인지 그 어디메쯤 지나고 있을 때, 노문센터에 들어오진 1달 밖에 안되어서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형이 이렇게 말했어요.

"일단 이거다 싶을때 열심히 하고, 만약에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뒤도, 사람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 미련도 두지 말고."

그때는 이제 갓 들어온 새내기 문화일꾼에게 떠날때 얘기를 하는 것에 당황해서 눈만 깜빡 거렸습니다만, 요즘은 형의 투쟁에서 또 우리의 삶에서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는 말입니다.

99년에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노동문화 박람회를 하고 창립대회를 통해 노문센터가 정식 발족을 했습니다. 그리고 형은 노문센터 회계감사가 되었지요. 일에서 뿐만 아니라 인천에 가끔 놀러갈때 변하지 않는 웃음이 있었고, 나는 창곤이형 팬할거라고 선배들에게 공언하곤 했었어요.

어떤 큰 힘에 좌지우지 하지 않고, 늘 그 모습으로 평화로운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가르치지도 훈계하지도 않지만 잔잔한 감동으로 찡하게 만들어요.

그러던 2000년 대우자동차노조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형이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아, 그리고 그다음이 이렇게 될줄은 몰랐죠. 선배들은 짐작했을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단지 형이 문화부장이 아니라 쟁의국장이 된 것이 못내 서운했을 뿐이지요.

대우자동차의 해외매각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부평공장이 사라지고 대량해고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바쁘게 투쟁일정이 돌아가기 시작했죠.

아직 공장점거에 들어가기 전이라 집회에 나왔던 형이 잠시 숨돌리며 사무실에 들러선 담배 한대 피면서 정신없다고 말하면서도 그웃음은 여전했어요.

겨울로 접어들면서 행보는 빨라졌어요. 공장 점거농성, 그 끝에 공권력 투입. 작년 2월의 눈보라 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공권력 투입이 되기 전날이었나?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던 그 식당에 저도 참가해서 사진을 찍고, 순희언니와 형의 애기들을 만났어요. 물론 형이 무대에서 사회를 보는 모습도 보았지요. 그날은 뭐랄까, 폭풍이 치기 전의 고요함, 알 수 없는 고조된 실내공기. 허탈함도 패배감도 아닌 사람들의 얼굴들이 영화의 한 컷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을려구요. 그동안 형의 세번째 아들이 태어나고, 순희언니는 혼자서 아이 낳고...아니 아이를 들춰 업고 길거리로 나섰던 언니와 가대위 분들의 모습도 오래오래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분기별로 한두번씩은 형을 만나러 갔었네요. 여름에는 모기에 뜯기면서 산곡성당 소나무 아래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고, 일일주점, 송년의 밤에서는 막걸리 한잔 나누면서 언제쯤 밖에서 만날까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어요.

무엇보다, 노문센터가 창립되고 나서 진행했던 메이데이 문화행동의 날, 세상만사, 노동만화전, 노동문화 사랑방 등등을 진행하면서 행사 당일이 되면 늘 형 생각이 났어요. 분명히
오고싶어할 텐데 못오는구나 가슴 아프고.

제일 가슴 아팠던 날은, 사무실 집들이 하던 날이었어요. 형이 직접 간판을 만들어 주마 약속했었는데 다들 그 생각에 목이 매였지요. 그뒤에 형을 만났을 때 집들이 잘했냐는 말에 우리는 간판 만들어 주기로 한 약속 지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어요.

창환이형이 형이 불구속으로 나왔다는 말을 전해주었어요. 기뻐하면서도 구속된 분들 때문에 아주 좋다고만은 못하겠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조금만 아이들과 언니 곁에서 좀만 쉬고, 같이 공연장도 가고, 행사도 같이 진행하고..
새로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싸움을 이제 가까이에서 함께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요.

아! 마지막으로 형, 지난 1년 열심히 하셨어요. 누구보다 순희언니, 그 마음 고생을 누가 알겠어요? 두분께 소주 한잔 따라 드립니다.

(2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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