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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기차타고 부산으로

영등포역으로

노래마라톤이 끝나고 새벽까지 술마시다가..뭔가 뒤틀렸었는지..
혼자 새벽길 터벅터벅 걸어 집에 가다가 펑펑 울다가..친구가 보고 싶어서..그냥 영등포역으로 갔네요..불꽃같았던 내친구..내일 모레면 애엄마가 되는 내친구..그아이가 사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60% 술기운이고..40%는 눈빛으로 알아주는 친구가 보고싶다는 마음이었죠..

그 친구는 노래패였고..나는 교지 편집위원이었어요..

활동하는 방식도 하나에서 열까지 달랐고..표현하는 방식도 달랐고..술먹으면서 그 술집을 장악하는 것이 그아이가 속해있는 노래패였다면..우리는 조근조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밤을 새는 스타일이죠..쉽게 격해지거나..감정을 마구 드러내거나..정해진 룰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그래야 한학기를 버티면서 책을 만들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노래패는 다르죠? 잘 아시죠?
서로를 조금씩 부러워했답니다. 무대공포증, 두눈들이 나에게 와서 박히면..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어버버 거리는 나는..무대위에서 수많은 대중앞에서 거침없이 표현하는 그 친구..그 힘으로 사람을 조직하는 활달한 성격..그게 너무너무 부러웠고..그친구는 감정과 사람관계에 마구 휘둘리거나 생각이 왔다갔다 하지 않고 하나를 향해서..조금씩조금씩 채워가기 위해서 책을 읽고..글을 쓰고(되지도 않는 글이지만) 고민하는 내가 부러웠다고 하더군요.

노동자가 된 내친구..

우리는 졸업을 했어요. 나는 서울로 와서 직장생활하다 쫓겨나고 고민끝에 노동문화단체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게 되었고..내친구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가 되었습니다.
울먹거리며 전화통화를 하던 날은 재능교육교사노조를 만들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던 어떤 날이었습니다. 내친구가 경주지역에서 열심히 노조건설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죠.
상투적이지만 정말로 자랑스러웠어요. 자기가 서있는 그자리에서 투쟁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노동자가 되는 것! 친구 왈.."선희야..요즘은 진짜로 살맛난데이..너무너무 즐겁고..살아있는 것 같다." 이말은 참으로 고전이죠? 고전은 몇세기가 지나도 진리에 가깝게 살아있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하자..그아이는 니가 활동하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고..
둘이서 아이들처럼 울먹울먹 거렸습니다.
그리고 그아이는 너무나 착하디 착한, 형과 결혼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했어요..

눈을 뜨니 구포를 지나가고 있었고..아~하..큰일났다..눈앞에 오늘 해야할 일들이 전기불처럼 지나치고..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이며..나는 뭐라고 할까..아이고...조금만 덜 취했어도..으흑흑
그래도 어쩌겠어요..부산에 와버린 것을..친구에게 전화를 했죠..
"동주야..여기 구포다..너거 집은 부산역에서 머나?"
"뭐~어..니 부산왔나?" 놀란 친구의 목소리와 활당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서면에서 만나기로 했죠..
그리고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렸습니다..저만치 서서 나를 쳐다보면서 피식 웃는 산만한 배를 하고 있는 친구가..처음으로 던진말..
"미친년."
밥을 먹고..찻집에 앉아서..수다를 떨기 시작했죠..남편얘기..시댁 얘기..주변에 보이는 학교 사람들 얘기..내가 사는 얘기..
그중에 문득 친구가 "내가 가르치던 애 아빠가 민주노총 쟁의국장인데 서울에 가있고..의문사.." 말을 잘랐습니다.
"성호형? 박성호?" 하하..노문센터 박성호 회계감사님의 아이들이었어요..세상이 이렇게 좁아도 될까 모르겠어요..덕분에 성호형 집안 얘기도 들었네요..
친구는 여전히 불꽃처럼 살고 있어요. 시댁의 가부장적인 생활방식에도 과감히 칼날을 들이대고..남편에게도 당당하게 집안일을 자기 일로서 하게 하고..아이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게 하고..
내친구들..지가 힘들다고 끙끙거리다가 훌쩍 도망쳐서 저를 찾아온 나를, 그렇게 사는 일이 대단하다고..오히려 고개를 숙여보이는 친구앞에 쑥스럽지요..히히..
몇일 뒤면 엄마가 되는 그아이와 올해가 가면 서른이 되는 나는 처음 만났던 94년 여름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풍경이 그리웠나 봅니다. 몇시간을 얘기해도 끝날 것 같지 않게 목이 쉬도록 수다를 떨고..왠종일 같이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즐겁기만 한..오후의 풍경이요..
그리고 부른 배를 슬슬 만지는 내손 끝에 느껴지는 온기..작은 움직임..임산부의 배는 경이로움 그자체입니다. 골초인 엄마가 담배를 끊도록 만든 아이라서...더 대단하지요. 흐흐...

그뒤에

다시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선로에 서있는 철도노동자들에게 마음으로 인사하고.. 사실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꼬실이형에게 먼저 전화를 했어요..혼났죠..나에게는 이유가 있지만..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까..명확하니까..변명도 하지 않고..잘못했다고..
그리고..이러지 말아야겠어요..뒷수습이 힘든 것보다 부끄러워서..창피해서..하지 말아야겠어요..다음에는 당당하게 휴가 갈래요..라고 말하고 댕겨와야겠어요...

(200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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