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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소의재 풍성한 삶이여

<출발하기 전>

처음부터 망설이던 길이었다.
'갈까? 아..이번 연말은 정말 조용히 좀 보내고 싶은데. 지리산까지, 차타고 사람들과 술마시고. 휴~. 그런데 어머님과 아버님이 우리에게 배푸신게 얼만데, 연말 가기 전에 찾아뵈어야 할텐데. 에고, 그냥 갈까.'

오락가락 하는 마음을 붙잡은 것은 세상만사 끝나던날 지리산에서부터 서울까지 바리바리 사갖고 온 두분을 뵙고선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아, 참 내가 가려는 그곳은 '소의재(少義齋)' 작은 의리도 저버리지 않는 집이다. 87년 2월 20일 꽃같은 젊음을 세상을 위해 바친 박선영 열사의 부모님이 '피맺힌 역사가 흐르고 있는' 지리산 자락에 손수 지은 집이다.

<12월 23일>

서울에 일보러 오셨던 어머님을 모시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봉고에는 박선영 열사와 같이 활동했던 사실을 확인하면서 딸처럼 두분을 모시는 혜경언니와 남편이자 사무처 선배인 운전기사 꼬실이형, 해솔이, 사무처 왕언니인 자영언니, 만화가 도단이 언니, 나 요렇게 옹기종기 앉아서 출발했다.
밤 12쯤 지나서 소의재에 도착하니 아버님이 반갑게 맞으셨다.

"워메, 빨리 도착혔네. 소주한잔 혀야지."

어머니는 "방이 워처고롬 차갑냐. 아가 춥쟈? 워쩐디야."라며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신다.

어느새 어머니 손끝에서 한상 차려졌다. 아버지는 "소주만한 술이 없다." 보혜소주 패트병을 꺼내셨다. 다른 술은 안드시는데 우리가 사간 술도 드셨다. 40년을 교단에 계셨던 분이라서 한사람한사람 이름을 물어보시고는 금새 외우셨다.

한참을 말씀을 하시다가 "빨치산들이 뭔 노래를 불렀어? 투쟁가여. 그라고 군대에서는 왜 4분의 4박자 행진곡을 부르는지 아남? 그것이 사람들을 모아서 힘을 돋구게 하는 것이여. 천막 농성할쩍에 나가 노래가사를 써서 붙여놓고 갈치기도 했거든.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한곡 불러볼란다."

'민들레처럼'을 참 곱게도 부르셨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서 소년의 눈빛, 소년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머님의 투쟁사는 짧은 몇줄로 쓸 수가 없다. 지금까지도 긴장을 놓지 않고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온몸을 다바치고 있으시니.

미문화원 방화사건 재판장에서 기소문을 찢어버려서 구속되고 8개월여의 감옥생활을 하셨다. 그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반수들한테 목욕하는 시간을 10분 줬는데. 그걸 갖고 싸우고. 밥주는 것으로도 싸우고, 으메 감옥에서도 바뻐"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아닌 것을 들으면서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는 자지러졌다.
감옥에서도 바쁘다는 어머니.

"사람들이 나보고 선영이 귀신이 들렸다고 허데. 나는 선영이 이름으로 싸워서 이길 것이여."

아버님은 연신 요즘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하신다.

"그 하나님은 참 요상허지. 안그냐? 사람을 좋은 사람은 좋게만 허고, 나쁜 사람은 나쁘게만 혀면 될 것이지. 요래저래 왔다갔다 혀서 헷갈리게 하잖여?"

무슨 말씀인가 했더니 "지들이 그렇게 말하면 그런 갑다허고 그냥 있으면 될것인디, 저것들이 왜저런디야라면서 또 대꾸하게 나를 만드셨으니. 하나님이란 양반이 참 요상허다 그쟈." 하하하하하....

새벽 5시까지 끊어지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자락에 파묻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일주일의 반이상을 밖에서 싸우는 어머니 덕분에 퇴직 후 소의재를 지키고, 지역 농민회의 젊은이들과 등산 모임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적적하실게다. 사람들 찾아오라고 넓게 지은 집에 늘 혼자 계시다가 찾아온 이들과 얘기를 하시면 밤이 새도록 즐겁기만 하신가 보다.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같은 두분, 박선영 열사를 기억하고 두분의 삶을 같이 살고 싶어해서 찾아온 이들의 친부모가 되어주시는 두분이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로 들려주시는 10여년의 삶을 녹음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12월 25일 마지막날>

눈을 뜨니 아버지는 벌써 산악모임에 나가셨다.

아침부터 애기처럼 나는 칭얼거렸다. 섬진강에 가보자고. 대학시절에도 광주, 여수로 돌면서도 결국 시간이 모자라서 섬진강에 가보질 못했다.

어머니는 같이 나가시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울갈 때 챙겨줄 것을 장만해야 하는 갈등에 휩쌓이셨다. 아참, 사위가 왔으니 씨암닭도 한 마리 잡아야 쓰겄는데...

어제, 그저께 만들어 둔 것 먹겠다는 우리의 얘기는 역시 흘려버리시고 백숙을 끓이기 시작하셨다. 닭이 익었을 무렵 또 일하실까봐 어머니를 모시고 섬진강으로 갔다.

옥빛 물결, 반짝이는 금모래라는 표현이 딱이다. 매화마을을 지나서 잠시 정차했다.
모래사장에 뛰다가 자빠진 나를 보고 선배들을 대놓고 웃음을 참지 않았다.

오는 길에 화개사도 들렀다. 큰 절인데도 단청을 칠하지 않아 소박해보이는 절이다. 30분 1시간에 휙 돌아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어서 아쉬운 나마 돌아섰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을까, 뵙고 가야할텐데...아직 안오셨나보다.
닭백숙을 송구스럽게 받아 먹기 시작할 즈음 통일이와 가을이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오셨나 보다" 빵빵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아직 안갔구나." 기분좋게 한잔 걸치셨나보다.

"전화를 했는데 안받아서 야들이 가버렸구나 했지. 그래서 사람들한테 나는 쓸쓸한 집으로 돌아가야 헌다고 했는데..요럼코롬 니들이 있으니까 참말로 기분이 좋다. 이별주 한잔 혀야제?"

어제 어머니도 함께 올라가기로 했었는데 오전에 일정이 바뀌어서 우리만 올라가게 된 것을 아버지는 모르셨나보다.

아버지와 이별주 한잔을 주거니 받거니, 방명록에 이름석자와 가슴에 새긴 말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느새 서울 가는 아그들의 먹거리를 챙기시기 시작한다. 어찌나 빠른지 말릴 틈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우리를 보시면서 아버지는 "참, 열심히 살았다. 참말로 열심히 살았어." 하신다. 아버지는 그 말씀 끝에 혜경언니를 안으시며 "니가 선영이여, 니가. 선영이가 살아 돌아왔어."하신다. 나는 돌아보면 엄두가 나질 않아 묵묵히 그릇을 닦았다.

내년 2월 20일은 박선영 열사의 15주기이다. 혜경언니가 박선영 열사의 애창곡인 '의연한 산하'와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부르기로 했고, 주변의 작곡가들을 조직해서 노래를 한곡 만드는데 힘을 더하겠다고 약속했다.

집을 나서는 우리를 아버지는 꼭 한번씩 안아주셨다.
이렇게 섭섭할 수가 창문으로 다시 어머님 손을 맞잡으니, "아가, 엉덩짝 괜찮으냐? 어이고..섭섭해서 어쩌냐" 하신다.

그렇게 다시 서울로 오면서,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운동은 더불어 하는 것인디. 사람들이 잘 몰라. 더불어 해야되는디. 그러면 못 이룰 것이 없어야."

(200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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