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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밤중의 추격전

버스간에서 신촌 어귀를 지나가다보면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다가 골목길에서의 추격전이 생각이 났다.
3학년때였나..소주한잔 걸치고 친구 자취방에 한잔 더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던 중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골목길을 질러 가면 빨리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새까만 새벽에 열심히 뛰었다. 무서웠다. 인간의 소리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술김인데도 등에 땀이 한줄기 타고 내릴 정도로..
갑자기 뒤에서 나와 똑같이 뛰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봤더니 왠 남자가 열심히 나를 쫓아 오고 있었다.
'헉..이럴 수가..설마..내가 여자로 보여서 쫓아오나..그럴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지만 짧은 커트에 운동화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으면 그냥 쓱 보면 완전히 건장한 총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심하면서도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싶어서 열심히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저기요! 잠깐만요" 점잖지만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
못들은 척 다시 뛰었다. 다시 그남자가 애처롭게..
"저기요..잠시만요.."
우뚝...멈춰서서 돌아봤다.
"왜요?"(경상도 억양으로 날카롭게..왜자에 힘을 줘야 한다.)
남자가 고개를 푹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술에 맛탱이가 간 정도는 아닌 듯한데..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한데요..술한잔 안할래요..보아하니..저랑 처지가 비슷한 것 같은데.."
순간 스토리가 읽혔다. 이남자가 실연당했나 보다..순간 화가 확 났다..
밤길이 무서워서 막 뛰어가는 나를 보고..자기식으로 해석하다니..멀쩡한 애인이 있는 사람한테..
"지금 친구방에 술마시러 가는 길이고..애인도 있어요." 딱잘라 말했더니..
다시 불쌍하게 고개를 푹 숙이며 "그래요? 죄송합니다." 돌아섰다.
그 꼴이 불쌍해서..나도 한마디 해줬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너무 기운빼지 마소. 술 못마셔줘서 미안해요."
그러자..그남자가 나를 쳐다보면 90도로 인사를 꾸벅했다.
"고맙습니다."
그 새벽의 웃기지도 않은 사연을 가지고 밤새 술마시면서 친구랑 깔갈 넘어갔는데..가끔 그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싶고..그렁그렁 눈물고인 눈이 생각이 난다..

<200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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