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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3/15
    <따리> 티벳가는 일행을 만나다(10)
    제이리
  2. 2006/03/14
    <징홍> 조짐이 이상하다(4)
    제이리
  3. 2006/02/22
    <므앙씽> 므앙씽 가는 길은 멀다(13)
    제이리
  4. 2006/02/22
    <농키아우> 시간을 죽이다(5)
    제이리
  5. 2006/02/22
    <루앙프라방> 여기는 라오스가 아니다(6)
    제이리
  6. 2006/02/22
    <폰사완> 항아리 평원을 가다.(2)
    제이리
  7. 2006/02/05
    <바고> 5달러 사기치다 아니 사기당한건가(8)
    제이리
  8. 2006/02/05
    <만달레이> 헌돈은 돈이 아니다(7)
    제이리
  9. 2006/02/05
    <시뽀> 뭉그니를 때려주고 싶다.(4)
    제이리
  10. 2006/02/05
    <인레호수> 미쉘.. 모자를 벗지 말든지^^(6)
    제이리

<따리> 티벳가는 일행을 만나다

징홍에서 따리까지는 버스로 18시간이 걸린다. 다행이라면 앉아가는 버스가 아니라 누워 가는 버스라는 점일텐데 이 또한 단점이 있으니 지독한 발냄새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버스를 경험해 본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인데다 심지어 강제로 양말을 나눠 주기도 한다는 주인장의 언급까지 고려해 보면 그 정도가 보통은 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조금 가라앉은 것 같은 체기가 버스에 오르니 좀더 심해진다. 뭐 발냄새는 각오를 한 탓이지 아님 후각이라는 게 워낙 금새 익숙해지는 탓인지 그저 견딜만하다. 버스를 탄 시간은 오후 4시 30분, 정상적으로 도착한다 해도 담날 아침 10시 30분 도착 예정이다. 열여덟 시간을 내리 잘 수는 없으니 해가 질 때까지는 창밖이나 바라보기로 한다. 그저 배가 지금보다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저녁도 굶고 아침도 굶고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버스는 연착없이 터미널에 도착해준다.

 

이놈의 따리행 버스는 예외없이 따리가 아닌 근처에 새로 생긴 신도시인 샤관에 사람을 내려주는데 샤관이냐고 물으니 기사는 따리라고 박박 우긴다. 그래 행적 구역상 여기도 따리인가 보다 그냥 수긍해 주기로 한다. 미리 알아둔 대로 터미널 앞에서 4번 버스를 타고 40분쯤 가니 따리 고성이 나온다. 이곳에서도 역시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인 넘버3를 찾아간다. 이 곳에서 10년간 넘버3를 경영하던 문씨 아저씨는 게스트하우스를 처분하고 리장 근처의 옥룡설산으로 거처를 옮기셨다고 하고 이곳은 제임스라는 한국 아저씨가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새로 오픈 했다는 숙소는 두 달이 채 안 지나서 그런지 다녀 본 어느 곳 보다 깔끔하다. 비록 도미토리이긴 해도 공용 욕실 등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침대도 개인등이며 칸막이 등이 달려 있어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되는 점도 맘에 든다. 게다가 침대에는 전기장판도 깔려 있다. 그래 이제 더운 곳에서 추운 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제 티벳 올라가는 길에 들어서면 훨씬 더 추워질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아닌 게 아니라 한낮을 제외하고는 제법 추운 기운이 느껴진다.

 

도미토리 한구석에 짐을 풀고 나니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나무야>에서 만났던 쿤밍에서 차공부 한다던 원섭씨와 리장으로 떠났던 화사동료 세 명이 따리로 내려온 것이다. 이삼일만에 다시 만나니 십년지기라도 만난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삽겹살을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결국 따리에서도 그냥 뒹굴거리다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담날은 원섭씨가 한국에서 찻집을 내는데 필요한 소품이 필요하다고 해 따라 나선다. 따리를 중국의 인사동이라고 표현한 누구의 글이 떠오른다. 잠시 다녀 본 따리 시내는 인사동 같기도 하고 그냥 거대한 영화세트장 같기도 하다. 대체 사람들은 어디 사는 거야.. 투덜거리며 온통 상점뿐인 거리를 헤집고 다닌다. 그래도 여기는 리장보다는 나아요. 같이 따라 나선 회사 동료 셋 중 청일점인 노과장의 말이다. 리장은 여기보다 사람도 더 많고 상점도 더 많고 진짜 영화세트장 같다니까요.. 한다. 뭐 그래도 도시는 예뻐요. 하는데 웬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다.


귀찮아서 사진도 안 찍었다. 올릴 사진이 없다ㅠㅠ

 

이틀이 지나고 다시 모두들 다음 도시로 떠난다. 그래도 따리 뒤에 있는 창산은 한 번 올라 줘야지 싶어 그냥 하루를 더 머물기로 한다. 창산은 해발이 사천미터가 넘는다는 따리 북쪽에 있는 산인데-하긴 따리 자체의 해발이 이천이 넘는다- 대부분 꼭대기까지 가기보단 산중턱에 나 있는 긴 산책로를 한 번 걸어주는 것으로 트레킹을 마감한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는데다 그걸 타기 싫으면 말을 타고 오를 수도 있고 일단 올라가기만하면 11km에 이르는 등산로가 아니 산책로가 완전히 포장되어 있어 비오는 날도 문제없이 갈 수 있다는 쉬운 코스이다. 숙소에 같이 묵었던 한국인 몇몇과 산을 오른다. 말타는 게 걷는 거 보다 더 힘들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를 탄다. 그리고 쭉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산 위에서는 따리 시내뿐 아니라 멀리 얼하이 호수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내려오는 길은 그냥 걸어서 내려온다. 이곳 따리의 산은 진달래며 민들레가 벌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완연한 봄산이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논밭에도 푸른색의 채소며 노란 유채가 한창이다. 아.. 서울도 봄이겠구나 잠시 아득해진다.


 창산의 운유로, 평탄한 길이다.


창산에서 내려다 본 따리, 멀리 얼하이 호수가 보인다.


벌써 봄꽃이 피기 시작한다.

 

트레킹을 하고 내려와 내일은 리장으로 가야지.. 하고 있는데 한국 남자 하나가 체크인을 한다. 마침 내 옆 침대다. 어디서 오셨어요? 했더니 쿤밍에서 오는 길인데 티벳가는 길이란다. 아싸!! 나랑 행선지가 같은 사람을 드디어 만난 거다. 어떻게 가실건데요? 했더니 그냥 버스타고 간단다. 거기 퍼밋 없이는 육로로 못가잖아요? 했더니 그래도 그냥 갈 거란다. 안되면 트럭 히치라도 할 거란다. 잘 됐다 싶어 같이 가자고 한다. 그 친구도 흔쾌이 오케이다. 다만 자기는 이전에 운남을 두 번이나 여행해서 따리니 리장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 리장에 그리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한다. 그래요. 그럼 리장에서 이틀만 자고 가죠 한다. 아.. 호도협도 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같은 비수기에 티벳 가는 일행을 만나기는 쉽냐 말이다. 게다가 이 친구.. 술 무척이나 좋아한단다. 따리도 안들리려다 한국사람하고 술이나 마실려고 들렸다니 말 다했다^^. 저녁에 같이 술 한잔하고 다음날 따리를 떠난다. 이 친구 덕에 따리에서는 그래도 사흘 밖에 안 머물렀다. 병이 나아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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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홍> 조짐이 이상하다

 

징홍에 있는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 <나무야>에 짐을 풀고 나니 갑자기 맥이 풀린다. 집이 나갔다고는 하지만 몇 가지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데다 만약 한국에 가면.. 하고 마냥 미뤄두었던 일들도 이것저것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도무지 그 일들이 뭔지도 잘 정리가 안되는 게 머릿속만 복잡하다. 다행히 숙소에는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아님 징홍이 운남의 주요 여행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여행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며칠 복잡한 맘이며 지친 몸이나 추슬러야겠다 싶어 하루 이틀을 게스트 하우스에서 빈둥거린다. <나무야>의 여주인인 선영씨가 가져다 놓은 구슬 꿰는 일이나 거들며 수다나 떤다. 역시.. 단순노동이 체질인 듯 구슬만 꿰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루가 흘러간다^^

 

그래도 어디론가 움직여야지 싶어 가방 깊숙이 넣어 두었던 론리 플레닛 쪼가리-분철했다^^-를 다시 꺼내 징홍과 징홍 주변의 갈만한 곳을 살펴봐도 그리 내키는 곳이 없다. 마침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에 주변의 소수 민족인 하니족 마을에 다녀오는 프로그램이 있다면서 같이 가겠느냐고 누가 물어온다. 옆방에 묵고 있는 아이 셋과 함께 여행하는 일가족의 아빠다. 사실 고산족이나 소수민족 투어는 더이상 가보고 싶은 맘은 없지만 그냥 일반적인 투어 프로그램이 아니라 숙소 스탭인 하니족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라는 점과 숙소 주인인 선영씨가 소수 민족을 돕고 있는데 그 마을로 간다는 점 등에 마음이 끌려 다녀오기로 한다.

 

담날 아침 일찍 나서보니 옆방의 부부와 아이 셋, 나랑 같은 방을 쓰던 청도에서 유학하고 있는 여학생 둘, 그리고 회사에서 연수차 북경에 왔다가 여행 중인 회사 동료 셋 그리고 주인인 선영씨까지 모두 12명이나 되는 대부대다. 여느 투어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대중 교통수단을 타고 움직인다.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가서 근교 도시인 멍하이로 다시 멍하이에서 하니족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어느 산길에 내려 30분을 걸어가니 드디어 마을이 보인다. 그냥 마을이다. 맘이 놓인다. 최소한 소수 민족 마을을 빙자한 관광지는 아닌 듯싶다. 그저 어릴 적 외가집에나 가듯 마중 나온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선다. 중국의 마을들은 지붕이 기와라 그런지 그냥 우리나라 어느 시골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하루를 묵었던 하니족 마을의 숙소


마을 전경

 

프로그램도 소박하다. 마을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마을 어귀 뒷산에서 참게를 잡으러 간다. 제법 큰 개울인가 했더니 조그만 실개천이다. 그래도 아이들 셋은 신나게 논다. 참게를 잡아다가-뭐, 우리는 한 마리로 못잡고 주인 아주머니와 그 딸래미가 다 잡긴 했지만- 장작불에 구워서 대나무밥이랑 역시 대나무통에 삶은 계란과 함께 먹는다. 참게 밑에 깔아 함께 구운 돌미나리의 향이 향긋하다. 논밭이 눈앞에 펼쳐진 전경이며 야트막한 산들이 그저  우리나라 어느 교외에 하루쯤 나들이 나온 것만 같다. 저녁에는 숯불을 피워 구운 돼지고기와 함께 맥주며 중국술인 바이주가 한순배씩 돈다. 사람들과도 적당히 친해지고 그래.. 한국 사람들하고 트레킹을 하니 이런 게 좋구나 싶은 맘이 든다.


굽기 전 참게


대나무밥을 만드는 주인 부부

 

그리고 나선 다시 게스트 하우스에서 뒹굴거린다. 떠나야 하는데 웬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제법 친해진 일행들은 아침마다 오늘도 안 나가요? 하며 놀리는데 아.. 예.. 뭐 별로 갈 데도 없고.. 하면서도 뭘 하는지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결국 유학생 친구둘이 쿤밍으로 떠나고, 회사 동료 셋이 리장으로 떠나고, 일가족 다섯이 태국으로 떠난 뒤에야 슬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리로 가는 버스를 끊어 놓고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에 잠이 깬다. 머리가 어질어질한게 뱃속이 울렁거린다. 저녁에 먹은 사발면이 잘못된 모양인지 속이 영 거북하다. 후레쉬를 꺼내들고 배낭 어딘가에 넣어둔 소화제를 꺼내 먹고 다시 잠을 청한다. 아침에 일어나도 상태는 그대로다. 전날 체크인한 한의대생 친구가 이리저리 맥을 집더니 체한 것 같다더니 양약으로는 안된다며 한방 소화제를 사다 준다. 역시 룸메이트는 잘 만나고 볼일이다^^ 결국 따리가는 버스를 하루 연기하고 선영씨가 끓여준 죽으로 하루를 연명한다.

 

결국 징홍에 8일이나 머무른 셈이다. 여행하고 처음으로 아무 것도 보지 않은 채 그 도시를 떠난다. 여행하기 전 1년 4개월을 여행하고 돌아 온 하우아시아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한달, 6개월 그리고 1년 되는 때가 고비라고.. 한번씩 내가 뭐하러 여행하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무기력해지는 시기가 그때인데 그때는 빨리 환경을 바꿔주는 게 좋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여행 시작한지 어언 6개월이 되어 간다. 돌이켜보면 베트남 넘어가기 전 쿤밍에서 내가 뭐하는 짓이지.. 하며 꽤나 우울했던 것도 여행 시작하고 약 한달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게 장기여행 증후군인가 싶으면서도 설마.. 하며 버스를 탄다. 


하니족 마을에서 찍은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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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앙씽> 므앙씽 가는 길은 멀다

 

보트를 타고 농키아누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트럭 버스를 탄다. 최종목적지는 라오스 최북단에 있는 므앙씽이라는 곳이지만 일단 당일에 도착은 어려울 것 같고 루앙남타에서 하루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 일찍 므앙씽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러나 농키아누에서 루앙남타로 가는 버스 역시 없다. 일단 우돔싸이로 가서 갈아타야 한다는데 루앙남타도 거의 저녁이나 되야 도착할 것 같다. 우돔싸이행 트럭버스는 농키아우나 므앙응오이에서 지내다 나온 서양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한동안 서로의 여행루트를 묻는 여행지 질문들이 오가고 이런저런 수다가 계속된다. 뭐 나름대로 유쾌하게 우돔싸이까지는 무사히 도착한다. 우돔싸이에서도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여행자가 루앙남타행 버스로 갈아탄다.


갈아탄 버스는 트럭 버스가 아니라 조그만 미니버스이다. 루앙남타까지는 다섯시간 가량 걸리는데 점심도 거르고 달려온 여행자들은 빵이며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들고 버스에 오른다. 현지인들이 먼저 예닐곱명 자리에 앉아 있어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서양애들은 보조 의자나 바닥에 앉거나 두어 명은 서서 간다. 우돔싸이에서 오는 중에 나름 친해진 인간들이 대놓고 떠들기 시작한다. 우돔싸이에서 오는 버스야 전부가 여행자였으니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여긴 현지인들도 잇는데 좀 심하다 싶다. 그 중에 맥주를 마시는 일행이 생기더니 아예 버스가 설 때마다 맥주를 더 사온다. 버스는 점점 소란스러워 가고 급기야 몇몇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비틀즈까지는 그래도 들어주겠는데 미국 군가로 추정되는 노래를 부를 때는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된다. 이 새끼들은 무슨 여행자 버스타고 투어가는 줄 아는 모양이다. 한국말도 열 번도 미친놈들을 중얼거렸지만 차마 영어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 분을 삭히고 있는데 듣다 못한 영국인 아저씨 하나가 일어나 한 소리한다. 이건 현지 버스고 여긴 현지인들도 타고 있다. 현지인들을 존중한다면 이제 조용히 해라. 탈 때부터 계속 떠들고 노래 부르고 이래서 되겠냐 뭐 이런 소린데 아 이걸 내가 알아듣다니 대견하다. 근데 거기까지 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니네 미국인들은.. 하며 오버해 버리신 거다. 결국 열받은 미국애하고 둘이 싸우는 통에 버스는 더 소란스러워져 버렸으니 에구 내 팔자야..



므앙씽 가는길


아침 먹고 출발한 게 아홉신데 루앙남타에 도착한 건 밤 아홉시다. 그새 먹은 거라곤 우돔싸이 정류장에서 바게뜨 하나 사 먹은 게 고작인데도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도 없다. 루앙남타 터미널에서 에라 인간들아 제발 내일 므앙씽에서는 보지 말자하며 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잡는다. 도무지 아무 것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숙소에 따뜻한 물이 나와 샤워를 하고는 그대로 뻗어 버린다. 그래도 아침엔 일찍 눈이 떠진다. 배가 몹시 고프다. 잽싸게 아침을 먹고 므앙씽행 버스를 탄다. 라오스에서 가게 되는 마지막 도시다. 므앙씽에서 이틀쯤 머물다가 다시 루앙남타로 내려와 중국 국경을 넘는 것이 라오스의 마지막 일정인 것이다.


그러나 므앙씽에 도착하자마자 막막한 느낌이 든다. 도대체 여기에 왜 왔단 말인가.. 아름답다는 경치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나마 므앙응오이는 앞에 강이라도 있고, 방갈로에 해먹이라도 있었건만 여긴 그냥 조그만 마을이다. 주변엔 순 논들 천지고.. 논이라면야 한국에서도 수없이 봐오지 않았냐 말이다. 그래도 행여나 무척 재밌거나 무척 아름다운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 대충 투어리즘 오피스에 가 봐도 고산족 마을로 가는 트레킹 프로그랜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이제 고산족도 싫고 트레킹은 더더욱 싫다^^. 뭐 특별하게는 마을에 사우나가 두어 곳 잇는 모양인데 한국에서도 답답해 못 들어가는 사우나를 이 더운 나라에 까지 와서 갈 수야 없지 않은가 말이다. 므앙씽에 이틀쯤 머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음날 중국으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래도 왕창 남는 오후 시간에는 밀린 라오스 여행기나 정리한다. 그나마 낮에도 전기가 들어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숙소 옥상에서 본 므앙씽 전경


저녁 무렵의 시장 앞


다음날도 고된 여정이다. 아침 7시경에 일어나 터미널까지 걸어가 8시 출발인 루앙님타행 트럭버스를 탄다. 므앙씽에서 루앙남타까지 버스로 2시간-이라지만 중간에 버스가 고장나 40분을 지체해 2시간 40분 걸렸다-, 계속해서 루앙남타에서 국경도시인 보텐까지 역시 2시간-이라지만 역시 비포장과 포장이 이어지는 도로를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며 2시간 30분은 달려야 한다-, 라오스 국경을 넘어 트럭을 타고 다시 중국 국경 도시인 모한으로 이동, 입국절차를 마치고 다시 기다리고 있는 멍라행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이라지만 중간의 도로 공사 구간에서 차를 막아 2시간 걸렸다-, 다시 멍라에서 징홍행 버스를 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북부터미널로 이동해 징홍행 버스를 타고 4시간 30분을 달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한 시간은 9시 50분이다. 시차 1시간을 제외하더라도 대충 13시간 가량 걸린 셈인데 차와 차의 연결 시간이 촉박하여 거의 하루종일 굶고 다녔다는 거 아닌가-그나마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너무 늦어 식사는 안 된다는ㅠㅠ-


하루 걸러 하루 꼴로 열 몇 시간씩, 것도 말이 버스지 실제로는 ㅠ트럭 뒤에 앉아 덜컹거리고 다니다 보니 삭신이 쑤신다. 다행히 징홍에 도착해 확인한 메일에는 집이 나갔다는 반가운 소식이 와 있다. 한국에 갈 거라 생각했다가 못가게 되서 서운한 맘은 들지만 이래저래 번거롭지 않게 된 셈이다. 이곳 징홍에 있는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었으니 어디 가서 마사지나 받으며 한 며칠 쉬었다가 천천히 북부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젠 일정에 쫓기지 않아도 되니 갑자기 마음이 느긋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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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키아우> 시간을 죽이다

 

<몇 년 전 왕위앙이 그랬듯 여행자의 입과 입을 통해 아름다움이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흐드러진 자연을 보는 일 이외에는 별 것이 없는 이곳은 라오스 북부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트레블 게릴라에 나온 농키아누에 대한 설명이다. 자연을 보는 일 외에는 별 것이 없는.. 헉 무서운 말이다. 그야말로 아무 할 일이 없는 곳이라는 뜻인데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인다. 특히 다음 행선지인 므앙씽도 <평화롭고 조용한 자연 풍경만큼이나 아직은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므앙씽은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면 순박함과 아름다움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라는 표현으로 봤을 땐 할 일 없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인데 심심하다고 죄 피해간다면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야 할 판이다. 그래 내가 또 언제 라오스에 오겠어.. 하며 하루쯤 심심함을 견뎌 주기로 한다.


농키아우는 사실 농키아우와 므앙응오이를 합쳐서 편하게 부르는 말인데 므앙응오이는 농키아우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쯤 더 들어가는 곳에 있다. 아침에 루앙프라방에서 출발하여 농키아누에 도착하니 12시경이다. 므앙응오이로 가는 배는 2시에나 있다니 잠시 농키아우를 둘러보기로 한다. 뭐 흐드러진 자연이라더니 그저 대성리 비슷하다. 갑자기 무지 심심할 거란 예감이 확 들면서 그나마 전기가 들어온다는 이 마을에 그냥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둘러 게스트 하우스 몇 군데를 둘러본다. 경치가 가장 좋다는 선셋게스트하우스는 이미 풀이다. 방갈로를 더 짓는지 하루종일 전기톱 소리와 망치 소리가 요란한데도 풀인걸 보면 론리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대체 농키아우까지 와서 하루 종일 전기톱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심정은 뭔지 궁금하다^^. 그 옆에 있는 파라다이스뱀부 방갈로에 가 본다. 위치 좋은 방갈로는 4불이고, 2불짜리 방은 발코니도 없이 어두침침하다. 게다가 방안에 전기 코트도 없다. 그냥 므앙응오이로 가자고 맘을 바꿔 먹는다. 



므앙응오이 가는 길


므앙응오이의 방갈로


점심을 먹고 므앙응오이로 가는 배를 탄다. 주변 경관이 대성리 버전에서 내린천 버전으로 바뀔 무렵 배는 므앙응오이에 닿는다. 강가로 난 언덕 위로 방갈로가 즐비하게 서 있다. 중심거리가 300미터가 안되는 동네에 게스트하우스가 18개나 있다니 그럴 만도 하다. 배에서 내리자 동네 꼬마란 꼬마는 다 모여 든다. 이 동네 꼬마치고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애가 없다는데 말솜씨도 어른 찜쪄먹는다. 어디서 왔냐고 일일이 물어보고 그 나라말로 인사하고 방의 종류부터 가격까지 일사천리로 내뱉는다. 이 동네 방갈로는 대충 2불 정도인 모양이다. 한 꼬마를 따라 어떤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또 다른 꼬마가 1불짜리 방 있단다. 잠시 혹 했으나 싼 게 비지떡이다 싶어 그냥 앞서가는 꼬마를 따라 들어간다. 앞에 강도 흐르고, 방은 방이 분명하고, 발코니도 있고, 발코니에는 해먹도 걸려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다. 그래 방갈로가 다 그렇지 뭐 하면서 그냥 묵기로 한다. 짐을 풀고 300미터가 안되는 거리를 걷고, 이른 저녁을 먹고 나니 해가 진다. 어라.. 전기 코드는 없어도 전기가 들어오네.. 그럼 인도가이드북이라도 읽을까 하는데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발전기가 꺼진다. 시간을 보니 7시 42분, 그냥 잠을 청한다.



숙소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당연하게도 다음날 아침에는 일찍 눈이 떠진다. 일찍 잔 탓도 있지만 곳곳에서 울어대는 닭울음소리 때문이라도 더는 잘 수 없을 것 같다. 이곳 날씨는 북부라서 그런지, 강가라서 그런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함을 넘어 제법 추운 기운이 느껴지는데 해만 뜨면 찌는 듯한 더위가 이어지는 그야말로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날씨다. 제법 쌀쌀한 아침 기운을 느끼면서 시간 죽이기에 들어간다. 아침을 먹고 조금 쉬다가 닭들이 잠잠한 틈을 타 한숨을 더 자준다. 그리곤 해먹에 누워 전자 사전에 있는 테트리스-내가 아는 거의 유일한 오락이다, 오델로, 지뢰찾기 등등의 게임이 더 있으나 할 줄을 모르니 그림의 떡이다-를 두어 시간 한다. 열두시 반이 조금 넘어 있다. 그리곤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다시 해먹에 누워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한글 서적인 인도가이드북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다. 그도 지치면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며 한국에 남아 재미나게 놀고 있을 인간들 생각에 잠시 빠진다. 그러다 잠시 존다. 이제 네 시다. 좀만 버티면 된다. 다시 300미터의 거리를 걷고 이번엔 강변도 한 번 걸어준다. 움직였으니 샤워를 하고 다시 이른 저녁을 먹는다. 다시 해가 진다. 최후의 보루인 노트북을 켠다. 배터리 수명이 다할 때 이것저것 정리하니 한시간반 가량이 지난다. 다시 발전기가 꺼진다. 어둠 속이다. 오늘은 어제처럼 쉽게 잠이 들질 않는다. 낮잠을 너무 잔 탓이다. MP3 배터리가 다 할 때까지 음악을 듣는다. 시계는 어느새 10시를 넘어선다. 그래도 잠이 안 온다. 미치겠다. 다시는 전기 안 들어오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아야지 다짐하다 잠이 든다.


므앙응오이의 중심거리


므앙응오이 강변


다음날 하루에 한 번 있다는 배를 놓칠세라 일찌감치 짐을 싼다. 이틀 만에 나간다니 주인 아줌마가 서운해한다. 하긴 나처럼 삼시 세때 꼬박 게스트하우스 식당에서 먹는 착한 손님이 어디 있단 말이냐^^ 저기 전기만 들어와도.. 할 수도 없어 그냥 웃는다. 아침을 먹고 계산서를 받아든다. 이곳은 보트를 타는 것 외에 따로 도망갈 방법이 없어서인지 방값이며 음식값을 나갈 때 한꺼번에 계산한다. 이틀자고, 다섯끼 먹고, 커피도 마시고, 쉐이크도 마시고 -맥주는 안 마셨다. 화장실 갈 일이 꿈만 같아서- 총 합계가 89,000낍이다. 뭐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8,900원 되겠다. 광화문에서 스파게티 한 그릇 먹을 돈으로 이틀을 자고 먹고 마신 셈이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여튼 배를 타고 나오는 맘이 날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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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프라방> 여기는 라오스가 아니다

 

비엥싸이 가는 것 보다 약간 낫다 뿐이지 루앙프라방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라오스 북부는 온통 산악 지형인지 도무지 평평한 도로가 보이질 않는다. 끊임없이 비오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던 버스는 그래도 8시간 만에 루앙프라방에 도착한다. 루앙프라방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두 번째 오는 도시가 조금이라도 맘이 편한 이유는 그나마 지리를 좀 안다는 건데 그전에는 여행자 버스를 타고 와 게스트하우스 골목에 내렸던 탓에 터미널에 내리니 똑같이 낯선 곳이다. 여러 명이 같이 타는 트럭 버스가 다운타운까지 만낍-천원-에 간다며 말을 건네 온다. 루앙프라방의 크기나 론리의 지도에 따르면 시내와 그리 먼 곳 같지는 않는데 도무지 흥정이 되질 않는다. 그래, 200원 깍아서 부자되겠냐 싶어 그냥 올라탄다.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멀지 많은 강가에 차를 세워 준다. 거리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이전에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가 괜찮았던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 본다. 게스트 하우스는 그대로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방값이 10불이란다. 분명 3년-햇수로 3년이지 만으로 2년 조금 더 된 것 같은데-전에 4불 하던 곳이었는데.. 그나마 풀이란다. 주변 게스트하우스도 거의 마찬가지다. 강가에 있는 집들은 죄다 10불이고 어떤 곳은 15불까지 부른다. 태국을 제외하고 다녀본 중 최강의 가격이다. 에효.. 그나마 뒷골목을 뒤져 6불짜리 방을 찾아낸다.



해가 지는 메콩강


루앙프라방에 오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강변에 즐비한 레스토랑에서 맥주나 마시면서 해지는 모습이나 한가하게 바라보는 일이었다. 비엔티안에도 강 주변에 맥주집이 있긴 하지만강폭이 넓은 탓인지 건기인 이즈음에는 물도 잘 보이지 않는데다 뭐랄까 분위기가 매우 로컬스러운데 반해 루앙프라방은 제법 노천카페 느낌이 난다고나 할까. 여튼 첫 날은 강변에서 맥주나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술값은 그리 많이 오르지 않은 것 같다^^. 막상 다음날이 되니 별 할 일이 없다. 주변에 있는 땀짱 동굴이니 꽝씨 폭포니 하는 곳은 이미 다녀 온 곳들이고.. 뭘 할까 고민하다 막상 루앙프라방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라는 데 사원이라고 씨엥통 하나 밖에 안 다녀왔다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드디어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뒤져보니 론리에도 워킹투어라는 하루 코스의 사원 답사 프로그램이 제시되어 있다. 론리의 지령에 따르면 아침에 시장을 구경하라는데.. 음 이전에 봤으니 생략! 글구 지금은 아침도 지났잖아.. 하면서 시장 다음으로 가라는 두 개의 사원을 둘러본다. 이 두 사원을 보고 나니 사원에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다. 뭐 별로 오래 된 것 같지도 않은데 양식이나 특징은 잘 모르겠고 아무런 감흥이 없더라는 얘기다. 에이.. 사원 구경은 포기하고 강변을 따라 시내를 한 바퀴 걷는다.


메콩 강변의 카페

 


승복이 널려 있는 사원 앞마당


다시 오후가 고스란히 남는다. 인터넷이나 하고 점심을 먹어도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이번엔 시내 한복판에 있는 왕궁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전에 왔을 때 시간이 없어 못 가본 곳이다. 그때는 그걸 못 보고 가야 하는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는데 막상 시간이 이리 많이 남는데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미적미적 거리다 들어간 왕궁박물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1975년 라오스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때 까지 존재했다는 씨사봉 왕가의 유물이 전시된 곳이다. 하긴 그때까지 여기가 왕궁이었고 거기에 집기며 옷, 유물들을 전시해 두었으니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여튼 아직까지 왕이 있는 태국이나 캄보디아를 제외하면 미얀마나 베트남은 식민지시절 이전에 이미 왕가가 무너진 반면 1975년까지 왕이 있었던 탓인지 비교적 궁전의 형태나 집기들도 온전하고 심지어 왕실 일가의 가족사진도 걸려 있어 이 사람들 지금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프랑스쯤으로 망명해서 잘 먹고 잘 살지 싶은데.. 아닌지도 모르겠고..   



루앙프라방 강변


한때는 왕궁이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인 왕궁박물관


저녁에는 야시장이나 둘러본다. 이 야시장은 주변의 고산족들이 만들 수제품을 주로 판매하는 곳으로 베트남의 박하 시장, 치앙마이의 나이트 바자와 함께 본 중에는 규모도 있고 제법 눈길이 가는 물건들도 많은 곳이다. 아.. 혹시 한국에 가야 한다면 선물을 사야하나 싶어 유심히 이것저것 살펴본다. 역시 시장 구경은 살 거라는 마음이 있을 때 해야 더 재미있는 법이다. 한참을 둘러보다 문득 돈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태국에서 밧을 남길 때 딱 라오스에서 쓸 돈 정도만 남겨 낍으로 환전했던 것이다. 달러도 재환전하기가 번거로워서 미얀마에서 쓰고 남은 얼마 안 되는 돈만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는데다 여기는 ATM도 안되는 나라가 아닌가.. 그래 아직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선물은 무슨.. 무겁기만 하고.. 꼭 사야 되면 중국 가서 사면 되지 뭐.. 하면서도 몇 가지 물건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루앙프라방 야시장

 

갑자기 시장 구경이 재미없어져 밥이나 먹으러 간다. 반찬 이것저것 골라 밥 위에 얹어 먹는 시장통의 500원짜리 밥집에 앉으려는데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한다. 방콕의 한국인 숙소에서 잠시 스친 어린 여학생이다. 여행 올 때 같이 태사랑에서 만난 일행과 일정이 안 맞아 헤어지고 혼자 다니고 있단다. 마침 내 다음 행선지인 농키아누에 다녀왔다고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맥주나 한잔 할래요? 했더니 맥주 좋아하는데 돈이 없단다. 쇼핑이 취미라 이것저것 너무 많이 사는 통에 한달 일정에 13일밖에 안 지났는데 지금 얼마 밖에 안 남았다며 이걸로 캄보디아까지 갈 수 있을까요? 되묻는다. 지금처럼 다니면 될 것도 같은데.. 했더니 안돼요, 50불은 남겨서 리바이스 청바지랑 사 갖고 가야 되는데.. 한다. 귀엽다. 그냥 맥주 한 잔 사주겠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가끔 단기 여행자들에게 맥주 한 잔씩 얻어먹은 기억은 나는데 여행 다니면서 누구한테 뭐 사준 적도 없는 것 같다. 일차를 하고 강변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번에는 자기가 산단다. 돈 없다며? 하며 그냥 맥주값을 낸다.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 느즈막히 숙소로 돌아와 잠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담배갑에 돌돌 말린 2000낍짜리 하나가 들어 있다. 화장실 간 사이 그 친구가 넣어 두었나 보다. 거듭 귀엽다. 이름은 송아나, 86년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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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사완> 항아리 평원을 가다.

 

미얀마에서 태국에 도착한 날이 1월 30일 월요일. 태국으로 넘어오면서 그 다음날인 31일에 중국 비자를 신청하고 비자를 받는 대로 라오스로 넘어가 한 열흘 라오스 북부를 둘러본 뒤 중국으로 들어가면 대략 2월 중순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기간이라면 대충 춘절도 끝나 있을 거고 혹 2월 말에 한국에 들어가더라도 한 보름쯤 운남을 둘러 볼 시간적 여유도 있을 거란 계산도 함께 해 둔 터였다. 하지만 중국의 춘절 기간엔 대사관도 쉰다는 생각은 왜 진작 못했던 것인지 그 사실을 비자 받으러 방콕주재 중국대사관까지 가서야 깨닫는다. 중국대사관은 2월 6일에나 문을 연단다. 결국 방콕에서 6일이나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라오스로 넘어와 다시 비자를 받기까지 4일을 빈둥거리니 비엔티안을 떠나는 날이 이미 2월 10일이다. 라오스 북부를 열흘 만에 둘러본대도 중국에 들어가는 날은 20일 전후, 대충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간다 해도 2월 말까지 징홍-다리-리장-중덴의 운남 여정은 도무지 견적이 나오질 않는다.


그래도 뭐 어찌 되겠지.. 하며 중국 비자를 받아들자마자 떠날 준비를 한다. 일반적으로 라오스 북부는 방비엥을 지나 루앙프라방을 둘러보고 훼이싸이를 거쳐 태국으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루트는 삼년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 이번에는 동북부로 방향을 잡는다. 폰사완.. 항아리 평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항아리 평원이란 폰사완을 중심으로 몇 군데 지역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돌항아리들이 널려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큰 것은 6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약 2000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은 하고 있지만 그 용도나 쓰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모양인데 곡식을 저장하는 것이라는 설에서 술을 빚었던 것이라설, 제의적인 목적에서 사용되었으리라는 설까지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어 자칭(?)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이런 돌항아리들이 널려 있다.


비엔티안에서 폰사완까지는 버스로 약 10시간 가량 걸리는데 이상하게도 밤버스가 없어 아침 일찍 버스를 탄다. 대충 서너 시간을 지나니 밤버스가 없는 이유를 짐작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한계령 올라가는 듯한 길을 거의 예닐곱 시간을 간다. 뭐 계속 올라가는 건 아니고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데 처음 두어 시간은 경치에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없이 가다가 서너 시간이 지나니 녹초가 된다. 말은 VIP버스지만 90년대 우리나라에서 굴러 다녔을 좌석버스는 이미 그 수명은 지난 듯 하다. 결국 폰사완을 30km 남겨두고 버스가 선다. 라오스 남부에서 한 번, 미얀마에서 한 번, 이번이 세 번째다. 누군가의 여행 무용담 중에 라오스에서 차가 퍼져 외딴 마을에서 하루밤 묵었는데 경치가 끝내줬다나 어쨌다나 하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지만 글쎄 외딴 마을에서 밤을 새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도 별 수 있나.. 뭐 차 없으면 도리 없지.. 약간 불안한 맘으로 기다리는데 이삼십분이 흐르고 누군가, 어디선가 기름을 사와서 채워 넣으니 버스가 다시 출발한다. 아니, 무슨 버스가 기름도 안 넣고 다니냔 말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 운행하는 렌트카도 아니고 하루 한번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로컬 버스가 이래도 되는지 어이가 없다.


여튼 아침 7시 30분에 떠난 버스가 폰사완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5시 10분. 론리 지도에는 터미널이 바로 시내 중심가에 있었는데 그새 이전을 했는지 게스트하우스까지는 4km가 넘는다며 무료 픽업이니 제각기 자기 게스트하우스로 가자는 호객꾼들이 즐비하다. 픽업이 무료라지만 그게 진짜로 무료겠는가, 픽업타고 가면 3불짜리 방이 4불짜리로 변신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결국 1불내고 툭툭 타고가 3불짜리 방에 묵나, 무료 픽업타고 가 3불짜리 방 4불에 묵나 그게 그거니 좀 더 편한 쪽을 택하는 거다. 버텨봐야 득 될 것도 없어 가격이 적당한 한 곳을 찍어 따라 나선다. 뭐 방은 싼 방이 으레 그렇듯 상태는 썩 좋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에 싸고 좋은 방이란 없는 법이다^^. 내친 김에 다음날 항아리 평원 투어까지 신청해놓고 나니 주위가 어느새 어두워져 있다. 



폰사완 가는길. 굽이굽이 고개길이다.


폰사완은 라오스의 씨엥쾅이라는 지역에 있는 곳인데 이 씨엥쾅이란 지역은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집중 폭격을 받았던 곳이라고 한다. 언젠가 보았던 TV다큐멘터리-제목도 잊혀지지 않는다. <폭탄의 땅 라오스>였다네-에서 본 바에 의하면 이곳이 그 유명한 호치민 레일의 중심지였다는데 미군이 이곳을 차단하기 무려 6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지형이 산인데다 우기가 되면 거의 정글로 변하는 이곳을 공격하는 데는 폭격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는데 그 당시 거의 10여 년간 폭격이 지속되었다니 그 참혹함이야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 참혹함은 당시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후유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그 많은 포탄 중에 수많은 불발탄들이 아직도 곳곳에 묻혀 있어 땅을 개간할 수도, 건물을 지을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개발은 늦어지고 라오스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 이곳 주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발탄을 파내거나 폭탄의 잔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일 년에도 수십 명씩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불발탄이 터져 팔다리가 잘리거나, 실명이 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그나마 폰사완 시내는 관광지라 특별히 다른 곳과의 차이를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폰사완 주변에 있다는 항아리 평원은 현재 갈 수 있는 곳만 사이트1, 사이트2, 사이트3의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갈 수 있다는 것은 그 지역이 불발탄이며 지뢰를 제거해 안전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이드북 등에서는 그 지역 내에서도 일정한 거리 안에서만 움직일 것을 경고해 두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항아리 평원 내에도 곳곳에 폭탄이 터진 자리가 아직 메워지지 않은 채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크다는 사이트1을 먼저 방문한다. 모두 334개의 정체모를 돌항아리가 널려 있다는 곳이다. 큰 것이 6톤이라는 얘기지 보통의 것들을 까치발을 하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의 크기다. 어쨌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고 인공적인 구조물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이거 만들고, 나르느라고 힘없는 사람 꽤나 죽어나갔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그런 생각은 왕창 큰 구조물들-그것이 사원이거나 파고다거나 아님 왕궁이거나 간에-을  대하면 늘 드는 걸 보면 아마 전생에 이거 만드는 사람이었지, 만들라고 시킨 사람은 아니었던 듯 싶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이제 잡초만 무성하다.


원래는 항아리에 뚜껑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사이트2와 사이트3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사이트2에서 사이트3까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약 한 시간 걸으면 갈 수 있다는데  가이드 겸 운전기사 왈 걸어가고 싶은 사람은 걸어가도 좋단다. 20대로 보이는 프랑스 청년 둘이 걸어가겠다고 나선다. 시간은 오전 11경, 잠시 고민하다 이럴 때 잘못 걸으면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냥 차에 올라탄다. 이제 자중해야 하는 나이인 것이다^^. 사이트 세 개를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4시간 남짓.. 크게 특별한 볼거리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세 사이트를 오가면서 보는 주변의 경관은 라오스의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을 보여주는데 풀 한포기없는 붉은 평원이 저 멀리 산 밑까지 이어지는 특이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사막은 아닌 것이 제법 붉은 황토빛 흙으로 덮여 있는데 왜 풀이 안 자라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이트2와 3을 잇는 고개길


부서진 항아리 사이로 나무가 자란다.


항아리 평원 투어를 마치고 나니 딱히 할일이 없어 그냥 짐을 싼다. 원래 다음 행선지는 폰사완에서 동북쪽으로 더 들어가야 하는 생각했던 비엥싸이라는 곳이었다. 뭐 라오스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휴양지라나 하는 곳인데 이곳을 가려면 네다섯 시간 버스를 타고 남능이라는 곳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쌈느아라는 곳까지 네다섯 시간을 간 뒤, 다시 트럭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들어가야 한다기에 그냥 포기한다. 새로운 휴양지 아니라 뭐래도 이제 하루 열 시간 이상 낮버스 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들어가기면 하면 되는 것도 아니고 되짚어 나와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도무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루앙프라방으로 향한다. 폰사완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건기임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버스터미널에는 아.. 저거 아직도 굴러다니나 싶은 버스가 서 있다. 그 버스란다. 에휴..  그래도 오랜만에 비 오는 걸 보니 운치 있네 해가며 창가에 기대 음악을 들으며 주접을 떠는데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창가에 고여 있던 빗물이 내 자리로 왕창 흘러든다. 인생이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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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고> 5달러 사기치다 아니 사기당한건가

 

일행이 아침에 떠나고 나는 밤버스라 만달레이 성이나 보러 간다. 10불짜리 입장료가 아까워서라도 하나라도 더 볼 요량이었는데 볼 것 아무것도 없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만달레이 성은 그런대로 볼 만이다. 한 면이 3킬로미터나 되는 이 넓은 성은 식민지시대와 이차대전 그리고 현재 미얀마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사시설로 이용해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만 그나마 중앙의 왕궁은 어설프게나마 복원을 해 미얀마 왕조의 왕궁의 모습을 짐작아니마 할 수 있게 해 놓은 곳이다.


미얀마에서 마지막 밤버스가 될 바고행 버스는 예상대로라면 새벽 5시에는 바고에 도착해있어야 하는데 정신없이 자다가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그냥 신작로 한 가운데 서 있다. 언제 퍼졌는지도 모르겠는데 여튼 차가 퍼져 어디서 보내주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이다. 필리핀에서 선교사 공부를 했다는 아저씨의 통역에 의하면 한 시간쯤 뒤면 버스가 올 것이도 여기는 양곤에서 150칼로 떨어진 곳인데 아마 바고는 그 중간쯤일 거라고 한다. 에효.. 원래 바고에 도착해 황금바위가 있다는 짜익티요로 가려는 계획은 일단 무산이 되고 길가에 앉아 마냥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퍼져 길가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한시간 반이 지나 버스가 오긴 왔는데 나야 선교사 아저씨가 챙겨 줘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일부는 서서 간다. 게다가 차비를 또 내란다. 이게 말이 되나 싶어 따지려는데 현지인들이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차비를 건네준다. 나만 바가지 씌우는 것도 아니고 현지인들도 암말 안하고 내는데 싶어 그냥 돈을 내고 말긴 했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시스템이다, 하긴 미얀마는 차의 수입이 거의 규제되다시피 해 심하게는 이차대전 때나 굴려다녔을 법한 차들도 종종 눈에 띄는데 그간 차가 안 퍼진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차가 바고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무려 7시간 연착인데도 돈은 돈대로 더 내고, 누구한테도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를 못 들어봤다는 거 아닌가. 나 아무리 한국이 좋네 싫네 해도 이럴 땐 정밀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결국 일정을 바꿔 바고 시내를 먼저 돌아본다. 자전거를 타도 될만한 동네인데 지도가 없어 그냥 사이카로 돌아본다. 바고 역시 사원 전부를 보는데 10달러인데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입장료 없는 사원만 둘러보고 5시 넘어 직원들이 퇴근하면 주요 사원을 보라고 되어 잇다. 하지만 주요 사원은 한시간 안에 보기 어려운데다 입장료는 별로 아까워하는 성격이 아니라 그냥 입장권을 끊어야 겠다 생각하고 행선지를 말해 놓았는데 이 사이카 기사 계속 자기한테 10달러를 달란다. 미쳤냐? 넌 내가 호구로 보이냐? 싫다. 필요하면 다이렉트로 직접 내겠다 했더니 드디어 속내를 드러낸다. 어차피 10달러는 정부가 먹는 돈이니 자기에게 다른 사람에게 받은 입장권이 있으니 너랑 나랑 5달러씩 나눠가지잖다. 근데 그 입장료라고 꺼내는 걸 보니 유효기간이 자난 입장료이다. 이거 기간 지났다고 했더니 어쨌든 니가 가고 싶은데 다 무료로 들어가게 해 주면 나중에 너는 나한테 5달러를 주면된다고 해서 에라.. 속지 뭐 하고 오케이한다. 결국 어떤 파고다는 직원이 퇴근한 듯 보이고, 어떤 파고다는 원래 입장료가 없는 듯 보이고, 어떤 파고다는 옆문으로 살짝 들어갔다 나오고 등등의 편법으로 보고 싶은 곳은 모두 무료로 들어갔다 나오는데 성공한다. 뭐 좀 찝찝하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5달러를 건네준다. 뭐 왠지 속은 것 같은게 사기를 친 건지 당한 건지 알수가 없다. 

 


바고의 한 승원에서.. 뭔가 외우느라 정신이 없다.


담배 만드는 가내 공장.. 이런 어린 아이들도 하루종일 담배를 만다.


마지막으로 석양을 보러 올라 간 힌타공 파고다에는 낫공양 준비가 한창이다. 낫은 이 나라 특유의 정령신앙이 불교와 결합해 생긴 것으로 우리  나라의 절에 산신을 모시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싸이카 기사가 짧은 영어로 가끔 이파고다에서는 댄스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해서 파고다에서 웬 댄스 하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우리나라 굿판 비슷한 것이 열린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오늘은 준비만 하고 내일하고 모레 이틀동안 열린다는 것으로 봐서는 제법 큰 굿판인 모양이다, 짜익티요 갔다가 돌아오면 두어 시간 구경도 할 수 있을 듯도 싶다.


다음날은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근처에 있는 짜익티요에 다녀온다. 짜익티요는 우리나라 설악산에 있는 흔들바위처럼 비스듬하게 서 있는 바위로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떨어져야 하는데 안 떨어져 영험하다고 해 바위에 탑을 세우고 금칠을 해 모셔둔 곳인데 미얀마의 쉐다곤파고다, 만달레이의 마하무니 파고다와 함께 미얀마 불교의 3대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외국인들에게는 론리 미얀마편 표지 사진 덕에 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산밑에서 정부가 운용하는 트럭을 타고 40여분을 올라가다가-2.5톤 트럭에 무려 60여명을 태운다-다시 70도 경사의 가파른 길을 40여분 걸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가파른  길을 걷는 건 질색이지만 바고에서도 양곤에서도 딱히 더 할일이 남아있지 않아 그냥 가보기로 한다.


짜익티요 파고다


다른 각도로 보면 이렇다


아니게 아니라 산길은 심하게 가파르다. 그래도 바위 주변은 제법 공원처럼 만들어 놓아 금칠한 바위보다 그 바위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셋을 보고 다시 40분을 걸어 픽업타는 곳으로 내려오니 7시에 떠난다는 마지막 픽업은 7시반이나 되어 70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을 태우고 불빛하나 없는 산길을 미친 듯이 달린다. 다리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데 무슨 청룡열차라도 타는 것 같다. 아 이러다 차라도 전복되면 떼죽음인데 대체 정부에서 운영한다는 트럭이 이래도 되나 투덜대다가 내려 시계를 보니 올라갈 때 40분 걸렸던 길을 18분만에 내려 왔다. 아무래도 운전기사가 정상은 아닌 듯 싶다.


짜익티요는 일찌감치 관광지가 되어서 그런지 미얀마 특유의 다정다감함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바가지 씌우려는 찬절만 가득한 곳이다. 언젠가 미얀마 다른 지역도 모두 이곳처럼 변하겠구나 싶은 게 마음이 쓸쓸해진다. 산 밑에서 하루밤을 자고 다시 바고로 돌아와 이번에는 자전거를 빌려타고 낫공양 하는 곳으로 다시 가본다. 점심 먹고 다시 시작했다는데 벌써 굿판이 한창이다. 장고 비슷한 북이며 징이 딱 우리 나라 굿판이다. 도착해보니 큰 무당으로 보이는 사람의 사설이 한창인데 차이가 있다면 큰무당이 여장을 한 남자이다. 계속해서 여장한 남자들이 나와 춤을 추면 신도로 보이는 할머니가 돈을 옷에다 걸어주기도 하고 음식상을 주기도 하는 것까지 거의 굿과 흡사하다. 그래도 외국인이라고 들어가서 사진 몇장을 찍어도 별 제지는 없다. 내친김에 그냥 눌러앉아 구경도 한다. 굿은 4시경에나 끝이 난다.


정령신인 낫에게 바치는 제단이 차려져 있다


춤추는 무당 언니 아니 오빠^^


간만에 즐거운 구경을 마치고 양곤으로 가는 버스를 예약한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항공권 리컨펌을 위해서는 늦어도 열두시까지는 양곤에 도착해야 한다. 그리고는 딱히 할일은 없다. 그냥 하루밤을 자고 방콕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다. 방콕에서는 바로 라오스로 갈 예정이니 라오스에서 열흘 그리고 운남에서 보름을 보내고 나면 티벳으로 갈지 한국에 한 번 들어가게 될지 윤곽이 잡힐 것이다. 지금 생각으론 한 번 갔다와도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그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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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레이> 헌돈은 돈이 아니다

 

미얀마 제2의 도시만달레이는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인 공파웅 왕조가 영국에게 무너지기까지 미얀마의 수도였던 곳으로 볼거리가 굉장히 많은 곳이지만 복잡한 시내와 매연 덕분에 여행자들이 그리 오래 머무르는 곳은 아니라고 한다. 나 역시 하루 만에 매연을 피해 나왔던 교장선생님의 경험과 시뽀에 가기 전 새벽에 잠시 느꼈던 매연의 괴로움으로 그리 오래 머물 생각이 있었던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착한 시간이 저녁이다 보니 그래도 두 밤은 자야겠다 생각하다가 결국 사흘이나 머문 곳이 되었다.


물론 공기는 무지 나쁘긴 하지만 뭐 죽을 만큼은 아닌 것이 관광지가 주로 만달레이 외곽에 있어 저녁에만 잠시 괴로우면 되는데다가 내가 흡연자라 그런지 어지간한 공기는 그럭저럭 견딜 만 하더라는 것이다. 첫날 오전에는 밍군을 다녀온다. 밍군은 만달레이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쯤 가야 하는 곳인데 밍군힐이라는 거대한 파고다가 완성조차 못한 채 서 있는 곳이다. 완성되었다면 150미터나 되었을 거라는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이 파고다는 공파웅 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도파야 왕의 명으로 건설d;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역이 만만치 않았던지 일꾼들을 잡으려고 인도로 도망가게 되거 이를 잡으려고 인도 국경을 칩입했다 영국군에게 침략의 빌미를 주게 되고 결국 공파웅 왕조는 영국 식민지가 됨으로써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의 구조물로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 꼭대기에 오르면 만달레이 시가지까지 보인다고 한다.


밍군힐에 있는 밍군파고다


밍군에서 만난 꼬마 스님들


원래는 만달레이 근교의 밍군을 오전에 다녀왔다가 오후에는 다시 아마라푸라라는 또다른 외곽에 있다는 우베인 다리에서 선셋을 보는 것이 일정이었는데 밍군가는 선착장까지 태워다준 기사 왈 오후에는 그냥 만달레이 시내를 둘러보고 내일 하루 종일 차를 대절해 사가잉, 인와, 아마라푸라 지역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하루에 다 둘러볼 수 있냐니까 그렇단다. 어..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일행들에게 얘기를 건네 본다. 다음날 널널하게 시내나 보려고 했다가 급하게 일정을 바꾸어 오후에 만달레이 시내를 돌기로 한다. 만달레이 시내 역시 전부 보는 데는 10불인데 선셋을 보려는 만달레이힐은 무료라 결국 사원 3개보자고 10불을 내는 모양이 되어 잠시 망설인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가장 아름답디는 목조 건물인 쉐난도 승원 앞에서 맘이 바꾼다. 나 저거 보고 들어가서 싶은데요.. 저두요 뭐 이리 되어 그냥 10불짜리 입장권을 사는 데는 동의가 되었는데..


표 파는 공무원이 입장료로 낸 달러를 돌려준다. 이유인 즉슨 뉴머니로 달라는 것이다. 즉 새 돈만 받겠다는 건데 사실 우리가 가져간 달러들이야 다 뉴머니 아닌가 밀이다. 그걸  숙소에 내면 뉴머니든 올드머니든 주는 대로 거슬러 받는 건데 찢어지거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약간 낡은 돈도 안 받겠다니 게다가 지들 나라 돈도 아니고 남의 나라 돈을 나 참 정말 어이가 없는 나라다. 그래서 새 돈 없다니까 짯으로 내라는데 환율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외국인 전용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들이 대체 누구 빽으로 앉아 있는 건지 영어 한 마디를 못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결국 옆에 있던 다른 미얀마인이 영어로 설명해 준다. 애들한테 이래야 소용없다. 헌 돈은 은행에서 받지를 앉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에휴 내가 졌다.. 하면서 결국 일행에게 새 돈을 바꿔서 낸다. 이 나라는 정부나 관료만 아니면 정말 다닐만한 나란데 꼭 그런 것들이 가끔씩 열 받게 한다. 

 

쉐난도 승원과 불경을 대리석판에 새겨 모두 판마다 모두 탑을 세워 보관햇다는두개의 파고다를 보고 나니 시간이 어느새 5시를 넘어 있다. 만달레이힐에서 석양을 볼려면 시간이 많지 않아 거의 천개가 된다는 계단을 뛰다시피 오른다. 헉헉거리며 도착하니 아직 해는 지지 않았는데 멀리 시가지가 온통 매연으로 덮혀 있다, 결국 해는 시커먼 매연 뒤로 넘어가고 만다.


쉐난도 승원, 목조 건물인데 건물 자체가 에술품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만달레이힐에서의 선셋, 저 거뭇거뭇한 것이 매연이다.


다음날은 만달레이 외곽을 돌아본다. 말은 택시인데 정체는 조그만한 트럭인 이름뿐인 택시에 앉아서 간다. 사가잉힐을 먼저 둘러보고 인와 지역은 호스카로 그리고 아마라푸라 지역은 우베인 다리에 선셋을 보러간다. 우베인 다리는 베인이라는 사람이 티크로 만들었다는 1.2킬로에 이르는 다리인데 주변의 경관 어우러져 매우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사가힝힐에서, 우베인다리에서 영어공부가 하고 싶은 미얀마 백성들이 끊임없이 말을 붙인다. 성의껏 대답은 해 주지만 참 니 영어나 내 영어나 영어가 객지에서 고생한다 싶다. 그래도 두어시간씩 붙어서 사원에 대해 설명도 해주고 이메일 주소도 적어주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내 그렇게 환경 좋은데서 살면서 영어 공부 하나도 안 하고 뭐 하며 살았는지 조금 미안함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베인 다리에서 본 전경


우베인 다리


선셋을 보고 돌아와 커플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커플은 바간으로 나는 양곤 근처의 바고로 떠난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식사다. 여행 다니다 보면 대체로 일정이 맞으면 같이 다니긴 하지만 마음이 맞기가 쉽지 않은데 이 커플과는 참 편안하게 다닌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는 법, 그저 담담하게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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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뽀> 뭉그니를 때려주고 싶다.

 

새벽에 만달레이에서 갈아탄 버스는 다시 여섯시간을 달려 시뽀에 우리는 내려준다. 인레호수에서 6시차를 탔으니 꼬박 20시간이 걸린 셈이다. 특히 만달레이에서 시뽀까지 오는 버스는 전직이 일본의 유치원 버스였던 모양인데 버스의 뒤며 바닥이며 할 것 없이 짐과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 엽기 그 자체의 버스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뭉그니의 미얀마 여행기>에 따르면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긴 했지만- 아주 널널한 곳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곳이라고 되어 있어 한적하게 쉬기에 좋은 곳 일거라는 기대를 하며 그 엽기적인 버스까지 타는 수고를 감수했건만 웬걸.. 한적한 곳이란 한적한 곳은 죄다 지나서 내려주는 곳이 번다하기 이를 데 없더라는 얘기다. 물론 도시의 번다함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한적한 시골을 기대했던 탓인지 첫눈에 이게 웬일 하면서 놀란 것이 사실이다.


시뽀행 버스.. 바닥은 토마토며 맥주로 가득 차 발 뻗을 곳도 없다.


그래도 오는 길이 너무 힘들어 한 사흘은 머무르기로 한다. 다음날 챨스게스트하우스의 챨스 할아버지를 따라 보트투어를 나간다. 챨스게스트하우스는 이 챨스할아버지의 트레킹으로 유명한 곳인데 사람이 많으면 보트투어를 해서 한 사람 숫자대로 돈을 나눠 내고 사람이 없으면 그냥 무료로 찰스할아버지 뒤를 따라 주변 마을 다니는 트레킹이 날마다 진행된다고 한다. 마침 트레킹을 신청한 사람이 8명이나 되어 보트 투어를 나선다. 이 곳 시뽀는 제법 높은 산중인데도 강이 흐르고 그 강을 따라 한참을 가니 어떤 마을에 당도한다. 마을을 다니며 파파야 농장에서는 파파야를, 파인애플 농장에서는 파인애플을 먹고 근처 승원에도 들러 놀다가 점심 먹고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이다.


파파야 농장에서.. 이것이 파파야 나무다.


다음날을 그저 시장 구경이나 다니다 강 건너 사원에 일몰을 보러 올라간다. 산 밑까지 한시간을 걸어가 다시 산밑에서 20분쯤 오르니 파이브 부다힐이라는 사원이 나온다, 이 사원에 오르니 시뽀 전경이 발아래 보이며 멀리 해 지는 모습이 멋지게 펼쳐진다. 시뽀에서는 해지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하고 내일은 만달레이로 떠나기로 하고 시뽀에서 중간 지점인 핀우린 구간만 기차를 타기로 한다. 원래 시뽀를 떠나는 기차가 만달레이까지 가기는 하지만 11시간이나 걸리기 때문에 여섯 시간쯤은 기차를 타고 중간에 내려 좀 빠른 픽업을 이용해 만달레이로 가기로 한 것이다, 원래 올 때처럼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긴 한데 그 버스를 다시 탄다는 사실도 끔찍하고, 미얀마에서 기차를 한 번 타 보고 싶기도 하고 또 이 구간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곡테익 철교를 지난다고 하니 그 철교도 볼 겸해서 기차를 타기로 한 것이다. 시뽀에서 날마다 저녁을 먹던 미스터푸드에서 마지막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이곳 시뽀는 9시면 정전이 되는 전기 사정으로 인해 미얀마 여행 중 가장 잠을 많이 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푹 자다가는 곳이 되었다.


파이브 부다힐에서.. 선셋 사진은 이제 좀 지겨운 듯 해서리..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곡테익 철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철교는 어딘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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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레호수> 미쉘.. 모자를 벗지 말든지^^

 

깔로에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미얀마 여행의 백미라는 인레호수로 떠난다. 인레호수는 워낙 큰 호수라 호수의 오른쪽 상단부에 자리 잡고 있는 냐웅쉐라는 마을에 방을 잡고 주로 보트로 돌아보게 되어 있다. 깔로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는 중간에 쉐냐웅이라는 갈림길에 우리를 내려놓고 떠난다. 이곳부터 냐웅쉐까지는 다시 택시를 타야 한다. 네 분의 선생님이 한차를 타시고 나는 다음 출발하는 차를 타고 갔는데도 같은 숙소에서 다시 만난다. 여튼 가이드북의 힘은 대단하다^^. 어쨌듯 숙소를 잡고 여장을 풀어도 시간은 11시 남짓이다. 어느새 선생님 중 한 분이 문을 두드린다. 주영씨도 내일 보트투어 할거죠? 아 네.. 했더니 어느 새 보트 투어는 그저 돈만 내면 알아서 할 수 있게 섭외까지 마쳐 놓으셨단다. 가끔 일행을 잘 만나면 여행이 이리 편해지기도 한다^^


세 분의 여선생님들은 벌써 어느 마을엔가 선다는 장구경하러 나가시고 나는 그저 방에서 빈둥거리다 오후에 교장선생님과 카누를 탄다. 호수 전체를 둘러보는 보트 투어와 달리 조그만 카누를 타고 수로 사이를 두어시간 다니다가 일몰을 보고 오는 것이다. 카누가 수상 가옥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흘러 수로 사이를 가로지른다. 어느 지역쯤에서 사공이 호수 위에 핀 연꽃을 한송이 꺾어서 건네준다. 모터가 달린 요란한 보트와는 달리 손으로 때로는 발로 젓는 카누는 저녁 나절의 수로 위를 평화롭게 흘러간다.


인레 호수 위의 수상 가옥들


다음날 시작한 보트투어는 먼저 호수 주변에 돌아가며 선다는 장이 열리는 곳부터 방문한다. 상당히 춥다는 소문을 듣고 긴팔에 운동화까지 신었건만 호수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다. 시장을 거쳐 몇군데 기념품 가게를 들러 당도한 곳은 인떼인이라는 곳이다. 그저 가이드북에는 호수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투어비를 조금 더 내야하는 곳으로 돈을 더 주고서라도 가볼만하다고만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기원전 2세기경에 만들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전탑군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누가 어떤 용도로 세웠는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데 거의 방치상태로 있기는 해도 기원전 2세기 경의 유물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아직 이곳까지 돌볼 여력은 없는 건지 여기저기 허물어져 가는 탑 사이를, 그 탑에서 떨어져 나왔을 것이 분명한 돌들을 밟으며 걷다가 문득 이게 얼마나 오래 버티어줄까 하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인떼인의 유적들


인레호수는 워낙 넓어 어떤 곳은 물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어떤 곳은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넓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압권은 일명 플로팅가든이라는 수상정원인데 물위에 떠 있는 좁은 공간에 토마토며 꽃같은 수상 식물들을 가꿔 내다파는 곳이다. 이 땅위에는 사람이 올라설 수도 있는데 진흙이나 이끼를 밟고 서 있는 것처럼 좀 쿨렁거리기는 해도 사람이 걸어다니는 데 큰 지장이 없다. 이곳에서는 해초같은 것을 썩혀 거름으로 쓰기도 한다고 한다. 인떼인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뒤 플로팅 가든이며 사원들을 돌아보니 하루가 간다. 세분 선생님들을 그날 저녁으로 만달레이로 떠나는 일정이다. 정말 일정 하나는 빡세게 짜 오신 모양이다.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


플로팅 가든, 재배한 꽃을 수확하고 있다.


서둘러 만달레이로, 양곤으로 떠나는 선생님들과 헤어지고 다음날은 자전거를 타고 마을들을 천천히 돌아본다. 갈대라고만 생각했던 하얀 꽃들이 핀 밭이 알고 보니 사탕 수수밭이란다. 하얀 꽃들을 피워 올린 사탕수수밭들 사이로 난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탄 어떤 서양 남자가 영어할 줄 아냐고 묻는다. 잠시 자전거에서 내렸더니 이 친구 론리플래닛에서 돈을 대고 마을 사람들이 노동력을 대어 만들었다는 다리가 있는 마을을 찾아가다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나도 거기에 가는 길인데 대충 11킬로 쯤 되니 아직 한 시간은 더 가야 할 것 같다고 대답하자 이 친구 다시 자전거를 돌려 뒤를 쫓아온다. 스위스 사람이라는 데 이름이 미쉘이란다. 뭐 베트남 사람은 자기를 미셀이라고 불러서 맘이 상했는데 너는 발음이 좋다나 어쨌다나 수작이다. 미쉘이나 미셀이나 그게 그거구만.. 근데 이 친구 나한테 영어할 줄 아냐고 물은 게 무색할 지경으로 영어를 못한다. 참 노란 머리에 파란 눈에 흰 피부가 영어를 못하니 것도 보통 괴로운 일은 아니겠다 싶다. 이럭저럭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리에 당도한다.


일몰을 보고나니 어두워져 그냥 보트에 자전거를 싣고 돌아가기로 한다. 어디에 묵고 있냐니까 호수 옆에 있는 내가 눈독을 들였으나 가격이 비싸 침만 흘리던 그 방갈로에 묵고 있단다. -에휴.. 유로화 쓰는 나라에서 태어나든지 했어야 하는데^^-  그러더니 자기랑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한다. 사실 보트를 타기 전까지 보인 호의로 볼 때 밥 먹자는 소리 정도는 할 것 같았고 뭐 그러면 대충 먹어 줄 용의도 있었으나 이 친구 보트를 타자 부는 바람 때문에 모자를 벗는데 헉.. 내가 절대로 용서 안하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니 이른바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전까지 30대 중반의 아저씨는 온데간데 없고 갑자기 50대로 변신한 사람이 보트에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궁해도 대머리는.. 쩝 결국 사양하고 혼자 밥먹으러 간다. 그러나 미얀마 여행은 혼자 다닐 팔자는 아닌 모양인지 깔로에서 만난 커플을 다시 만난다. 신원 미상, 연령 미상의 이 커플은 그 다음 일정이 나랑 똑같아 자연스럽게 일행이 된다. 일행복은 있으되 아저씨 아님 커플이라니.. 도대체 대한민국 남자들은 혼자 여행 안다니고 다 뭐 하는지 모르겠다^^.


문제의 론리플래닛 다리.. 여기까진 분위기 괜찮았다니..


다음날은 커플과 자전거를 타고 온천을 다녀온다, 원래 혼자라면 자전거로 찍고만 오려고 했는데 일행이 있으니 같이 온천에 들어간다. 대중탕은 1불, 와국인 전용탕은 3불 추가라는데 구경하러 들어간 전용탕에 마침 아무도 없어 그냥 룽지를 빌려 입고 셋이서 들어간다. 햇살이 따가운데 온천에 들어가 있으니 처음엔 좋다가 점점 힘들어진다. 게다가 더운물이라 때가 부는지 온 몸이 가렵다. 그렇다고 온천에서 때를 밀수도 없고 그냥  퉁퉁 불려서 샤워만 한다. 그래도 간만에 더운물에 몸을 담궈서 그런지 제법 개운하다. 돌아가는 길은 다시 보트를 탄다. 혼자 다니면 부담이 될 텐데 셋이서 나눠 내니 그리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제 수영복 사진을 기다리시는 분들께 바칩니다. 대략 이 사진으로 만족해주시기를^^  


다시 밤버스 탈 준비를 하고 떠난다. 다음 도시는 시뽀.. 만달레이에 들러서 다시 6시간가량 버스나 기차를 타야 도착하는 곳이다. 미얀마 최장시간 버스 여행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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