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7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5/04
    어제 술한잔 하다...(2)
    간장 오타맨...
  2. 2005/04/28
    읽기위해 퍼나른다. 4(노동미디어행사 강연내용)(1)
    간장 오타맨...
  3. 2005/04/28
    읽기위해 퍼나른다. 3(진보네트워크 세미나)
    간장 오타맨...
  4. 2005/04/28
    읽기위해 퍼나른다.2
    간장 오타맨...
  5. 2005/04/27
    읽기위해 퍼나른다.(4)
    간장 오타맨...

어제 술한잔 하다...

  • 등록일
    2005/05/04 17:12
  • 수정일
    2005/05/04 17:12
마음이 어제 무거웠다. 같이 함께하고자 하였던 동지가 고국으로 갔다는 소식... 이유를 알고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 없이 떠났다는 말이 나에게 있어서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러운데로 함께 논의하고 이겨냈으면 좋았으련만, 그 고민을 갖고 고국으로 갔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야 그가 떠났음을 알게되었다. 무거움과 이후 어떻게 이주노동자 사업을 전개할지 약간은 고민된다. 이전 힘차게 전개되었던 사업들이 조금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부담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함께 그들의 고민들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제일 고민이 되고 부담이 된다. 이전 함께 만들어나갈때는 몰랐던 그 어려움이 하나둘 밀려온다. 그렇다고 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직 남아서 투쟁을 힘차게 전개하고자 하는 동지들이 있기에 희망이라 생각해 본다. 이후 어떻게 만들고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제 나누며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둘 해나가야 겠다. 다시금 이러한 일들이 없었으면 한다. 단속추방 당해 출국당하는 이들만 보아도 힘겨운데.... 스스로 고국으로 고민을 나누지 못하고 간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희망은 이러한 소소한 것들을 딛고 피는 작지만 소중한 열매이기에... 이 고민들 이제 말이 아니라 하나둘 천천히 묶어 나가야 겠다. 이제 힘겨운이라는 허물을 하나둘 툭툭 털며 함께하는 좋은 일들만을 상상하며, 힘차게 일을 전개하여야 겠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 본다. 다들 힘내기를.... *** 어제의 술한잔 석별의 정을 나누지 못한 마음의 부담을 덜기위한 뒷풀이였다. 남겨진 이들에게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줘 미안하게 생각한다. 다들 힘내고 힘겹게 만들어낸 이주노동자 독자노조 MTU의 힘찬 깃발을 나부끼기를 바램해 본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읽기위해 퍼나른다. 4(노동미디어행사 강연내용)

  • 등록일
    2005/04/28 17:55
  • 수정일
    2005/04/28 17:55
정보혁명과 정치경제학 강남훈(한신대학교 사회과학부) 정치경제학의 핵심 내용 자본주의: 자본의 운동이 중심이 되는 경제. 자본이란 무엇인가? 자기증식하는 가치 M ... M' 잉여가치 획득이 목적 자본의 운동은 시장 안에서는 모순이다. 노동력 상품. 잉여노동이 잉여가치의 원천. 잉여가치 생산의 방법: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잉여가치의 축적: 자본축적 상대적 과잉인구 이윤율 저하 정보혁명으로 인하여 정치경제학은 낡은 것이 되었나 지식기반경제(knowledge-based economies)는 “지식과 정보의 생산, 분배, 사용에 직접적으로 기초”하고 있으면서 “고기술 투자, 고기술 산업, 고숙련 노동 및 그와 연관된 생산성 이득 등이 증가하는 추세” OECD, The Knowledge-Based Economy, Paris, 1996. 를 보이는 경제로 정의할 수 있다. 혹은 “지식과 정보의 창출, 확산, 활용이 모든 경제활동에 핵심이 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부가가치 창출과 기업과 개인의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경제” 장석인,「지식기반경제」, 박우희 외,『기술경제학 개론』,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를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첫째, 과거에는 토지, 노동, 자본 등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였는데, 지식기반경제에서는 지식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되었다. 같은 말이지만, 과거에는 노동이나 자본이 가장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는데, 이제는 지식이 가장 중요한 부의 원천이 되었다. 써로우는 노동가치론은 노동이 가장 중요했던 시대에 타당한 이론이기 때문에 지식이 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Lester Thurow, Building Wealth: the new rules for individuals, companies, and nations in a knowledge-based economy, Harper Collins, 1999; 한기찬 역,『지식의 지배』, 생각의 나무, 2001. 이러한 주장은 써로우뿐만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지식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자원이다. 전통적인 생산요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Peter Drucker, Post-Capitalist Society, Harperbusiness, 1993; 이재규 역,『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한국경제신문사, 1993. “불확실한 경제에서 항구적인 경쟁 우위의 유일하게 확실한 원천은 지식이다.” I. Nonaka/H. Takeuchi, The Knowledge Creating Company: How Japanese Companies Create the Dynamics of Innov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장은영 역,『지식창조기업』, 세종서적, 1998.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빌 게이츠(Bill Gates)가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된 것은 노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둘째, 과거의 경제에서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었는데, 지식기반경제에서는 수확체증이나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제법칙이 적용된다. 지식은 많이 사용할수록, 또한 여러 사람이 나누어 쓸수록 가치가 커진다. 셋째, 경제 내에서 지식산업의 비중이 증가하고, 기업을 비롯해서 사회의 모든 조직은 지식의 창출과 보급이라는 관점에서 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지식노동자(knowledge worker)로 전환하게 된다. 넷째, 지식기반경제는 점점 더 세계화(globalization)되어 가는 경제이다. 경제가 세계화되어 감에 따라 지식이 전 세계로 확산(spill-over)되고, 지구 전체에서 부가 증가하게 된다. 지식이 부의 원천이라는 말은 애매한 말이다. 지식도 노동의 한 속성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상품의 부가가치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선의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같은 말이지만, 상품의 판매가격 중에서 인건비를 포함한 제조비용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을 가리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유럽시장에서 30불에 판매되는 배낭이 베트남에서 제조될 때 그 원가는 불과 1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뿐만 아니라 자본투입량도 감소하고 있다. 미국회사들의 경우 25년 전에 비하여 1달러 판매를 위하여 필요한 유형자산(tangible asset)이 20%나 감소하였다고 한다. Alan Burton-Jones, Knowledge Capitalism, Oxford, 1999. 정보혁명의 의의 정보혁명의 핵심발명은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컴퓨터는 디지털 형태로 정보를 처리, 저장하는 장치이고, 인터넷은 정보를 전달하는 네트워크의 한 종류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보면 정보혁명은 디지털과 네트워크라는 두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초기 경제부처 장관들 사이에서 ‘디지털 경제’와 ‘인터넷 경제’ 중 어떤 것이 올바른 용어이냐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과기처 장관은 ‘디지털 경제’가 올바르다고 주장하였고, 정통부 장관은 ‘인터넷 경제’가 올바르다고 주장하였다.(매일경제, 2000. 2. 4) 장관들은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이 장에서는 디지털과 네트워크라는 정보혁명의 두 가지 요소를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분석해 보려고 한다. 디지털 신비스럽고 기술학적인 측면에 치우친 주장들까지 제시되고 있다. 네그로폰테는 아날로그 원자인 아톰(atom)과 디지털 원자인 비트(bit)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트는 색깔도, 무게도 없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 그것은 정보의 DNA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원자적 요소이다.” Nicholas Negroponte, 앞의 책, 15쪽. 디지털이란 정보를 비트의 묶음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비트란 0 아니면 1의 값을 갖는 단위를 말한다. 원래 아날로그(analog)가 전압이나 전류처럼 연속적으로 변하는 양을 의미하는 말이라면 디지털(digital)이란 손가락이나 발가락의 수처럼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양을 의미한다. 하나의 비트는 0 아니면 1 두 가지 값뿐이지만, 비트를 묶으면 모든 수를 비트로 표시할 수 있다. 자연수는 10진수를 2진수로 바꾸고, 필요한 만큼 비트를 묶어서 표현하면 된다. 예를 들어 5라는 숫자는 비트 세 개를 묶어서 101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생활하는 세계에서는 숫자가 아닌 정보들이 압도적이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숫자 형태로 주어지는 정보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날로그 형태로 주어진 정보이다. 우리가 디지털화한다고 하는 것은 아날로그 형태로 주어진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변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냄새든 감정이든 인격이든 모든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디지털 형태로 주어지지 않은 정보를 디지털화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보가 디지털로 표현되는 과정에 대한 예를 몇 가지 들어 보면 분명해진다. 우선 문자를 생각해 보자. 문자를 디지털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어떻게 디지털로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ㄱ’을 ‘001’로, ‘ㅏ’를 ‘101’로 표현하기로 약속하였다면 ‘가’는 ‘001101’로 표현하면 될 것이다. 음악의 경우에도 도를 ‘001’로 표현하고 레는 ‘010’으로 표현한다는 식의 약속이 이미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디지털 형태의 정보는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로 동일한 내용의 정보를 저장하는 크기가 줄어든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둘째로 디지털 형태의 자료는 자연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물질에 저장될 수 있고 거의 모든 물질을 통하여 전달될 수 있다. 이것은 디지털화된 자료는 0과 1만으로 표현되므로, 어떤 물질이 그것을 저장하거나 전달할 수 있으려면 인간이 그 물질의 두 가지 상태를 구별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공관이나 반도체뿐만 아니라 자석, 단백질, 탄소, 양자까지도 모두 저장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전화선뿐만 아니라 전기선, 전파, 케이블, 공기, 빛까지도 모두 전달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에 모든 사물을 포괄 ․ 귀속시키는 음양설에 따르면 만물에는 두 가지 상태가 있으므로, 디지털 데이터를 저장하고 전송할 수 있다. 셋째로 디지털 형태의 자료는 혼합되고 압축되며, 암호화될 수 있다. 넷째로, 디지털 자료는 컴퓨터에 의해서 처리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결국 디지털화 한다는 것은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으로 컴퓨터가 바로 이렇게 엄청난 성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디지털 형식으로 자료를 처리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 컴퓨터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는 부울(George Boole)의 부울 대수학(Boolean algibra)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George Boole, 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 Being an Essay Towards a Calculus of Deductive Reasoning, 1847.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것이 1947년이니까 발상의 전환 이후 100년이 걸린 셈이다. 이렇게 디지털 형태로 변환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변환하겠다는 약속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약속은 흔히 표준(standard) 이라고 불리고 형식(format)이라고도 불린다. 표준이나 형식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도 있고 제도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표준이나 형식이 존재해야지만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디지털이라는 기술의 근저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술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변하기 위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먼저 변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디지털이라는 기술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은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을 추가함으로써, 예를 들어 혼합비트, 압축비트, 암호비트 등 비트의 비트를 계속 덧붙임으로써,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 정보혁명의 두 번째 요소는 네트워크(network)이다. 네트워크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넓은 의미에서는 정보사용자(발신자 및 수신자)와 정보전달체계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좁은 의미에서는 정보전달체계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리눅스 사용자들의 네트워크’라고 할 때에는 전자의 의미에 가깝고, ‘방송망’, ‘통신망’ 등이라고 할 때에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다. 정보전달체계는 정보를 전달하는 경로(channel, link)와 노드(node, switch) 및 그 작용에 대한 통제(control)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드는 경로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한 장치이다. 네트워크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보전달에 관한 약속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모스 부호와 같이 신호의 의미를 미리 정해둔다든지, 자기의 말이 끝나면 ‘오버’ 등의 말을 끝에 덧붙여 자기 말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등의 약속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들 사이의 통신에 관한 약속을 일반적으로 통신규약(protocol)이라고 부른다. 인터넷은 TCP/IP(Transmission Control Protocol/Internet Protocol)라는 프로토콜에 입각해서 전 세계의 컴퓨터들을 연결한 네트워크로 정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보혁명의 두 번째 요소인 네트워크의 경우에서도 그 기술의 근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네트워크에서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 혹은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y)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재화의 가치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에 의존할 때” 발생하는 효과로 정의된다. Hal R. Varian, "Market Structure in the Network age," in Erik Brynjolfsson/Brian Kahin, eds., Understanding the Digital Economy: Data, Tools, and Research, MIT Press, 2000, p. 143. 이메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이메일의 가치가 늘어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서술 중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앞뒤 맥락으로 보아 소비자에 대한 가치, 혹은 소비자가 느끼는 가치를 말하는 것이므로 정치경제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에 해당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네트워크효과를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네트워크의 사용가치가 증가하는 효과”로 정의하려고 한다. 네트워크효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효과가 합해져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콘텐츠효과(contents effect)가 있다. 콘텐츠효과란 접속자가 늘어나면 정보의 양과 질이 늘어남으로써 사용가치가 커지는 효과이다. 네트워크에 한 명의 접속자가 늘어나면 정보소비자뿐만 아니라 정보생산자가 한 명 늘어나므로 콘텐츠도 그만큼 늘어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효과는 대략 접속자의 수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접속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의사소통 경로가 늘어나서 네트워크의 사용가치가 커지는 효과가 있다. 이것을 경로효과(channel effect)라고 불러 보자. n명의 접속자 사이에 전달자를 사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의사소통 경로는 개를 만들 수 있으므로, 접속자의 수가 커질 때 경로효과를 통한 사용가치는 접속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네트워크의 가치는 접속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멧칼페(Metcalfe)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멧칼페의 법칙은 바로 이러한 경로효과를 고려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는 네트워크 내에서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사용가치가 증가하는 공동체효과(community effect)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디지털과 네트워크라는 정보혁명의 두 가지 요소는 인간 관계에서 출현한 것일 뿐 거기에는 한 점의 신비스러움도 없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 어떨까? “비트는 냄새도 색깔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트로부터 냄새를 맡고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 사람들이 냄새를 맡고 색깔을 구별하는 방법에 관하여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보혁명의 창세기는 “태초에 약속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정보혁명과 가치관계 정보상품의 가치 정보상품 중에서는 첫 단위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다음 단위부터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주류경제학의 용어를 빌리면, 고정비용은 매우 크고, 한계비용은 0에 가까운 상품을 말한다. 소프트웨어라든지 CD에 담겨진 음악이라든지 DVD에 담겨진 영화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디지털화된 정보상품은 거의 모두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상품에 대해서는 노동가치론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정보상품을 추가로 생산하는 데 아무런 노동도 들지 않는데, 어떻게 노동가치론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류동민,「 디지털 네트워크경제의 특성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노동가치론연구회 워킹페이퍼』, 2000. 투하노동이 0인 경우, 즉 한계비용이 0인 경우를 생각하여 보자. 이 경우에는 주류경제학에 따르더라도 가격이 0이 된다. 경쟁시장에서는 한계생산비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가치가 0인 상품의 가격이 0이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상품의 가격이 0으로 되는 것은 단기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가격이 0인 상태가 장기간 계속된다면 그 정보상품은 정상적으로 재생산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자본이 그 분야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법칙은 재생산비용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가치대로 판매되면 그 상품이 정상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치법칙대로 판매되는데도 정상적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이 문제는 정보상품의 단위 개념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와 같은 정보상품은 상당히 많은 개발비를 들여서 하나의 버전(version)을 생산한다. 상당한 노동이 투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한 한 버전의 여러 카피(copy)를 판매하는 것이다. 개발비를 제대로 회수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한 카피의 가격이 얼마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카피의 가격에 판매량을 곱한 값이 얼마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렇게 분석해 보면, 정보상품은 카피가 단위가 아니라 버전을 단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상품의 단위는 카피가 아니라 버전이다. 정보상품의 가치는 한 카피가 아니라 한 버전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다. 하나의 버전의 가치가 여러 카피에 나누어서 실현되는 것이다. 정보상품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한 카피당 가격과 더불어 카피의 판매량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수요자가 적은 특용소프트웨어의 경우, 값이 비싸고 수요자가 많은 범용소프트웨어의 경우 값이 싼 것도 가치법칙 발현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버전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그 정보상품은 정상적으로 재생산될 것이다. 이와 같이 버전을 단위로 보면 가치법칙을 정보상품에 적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정보상품의 이윤 노동가치론이 정보상품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들을 제대로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 동안 가치론 논쟁의 결론과 같이 노동가치론을 잉여가치에 의해서 이윤을 설명하려는 이론으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정보상품의 이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문제의 핵심은 노동가치와 관계없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보상품의 막대한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있다. 노동가치론에서는 가치를 초과하는 초과이윤의 원천으로서 세 가지 요소를 들 수 있다. 첫 번째 요소가 특별잉여가치이고, 두 번째 요소가 지대이며, 세 번째 요소가 독점이윤이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정보상품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무차별하게 독점이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독점이윤이란 “생산물의 가격이 생산가격이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매자의 구매욕과 지불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Karl Marxl(1894), Capital, Vol. III; 김수행 역,『자본론』, 제3권, 비봉출판사, 1990, 953쪽. 이 부분은 가치가 생산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자본이나 소비자들로부터 가치가 이전되는 부분을 말한다. 모든 이윤을 독점이윤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정보혁명으로 인하여 경제 전체에서 이윤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독점이윤이란 한 부분의 잉여가치가 다른 부분으로 이전되어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혁명이란 다른 부분의 잉여를 재분배하고 수탈하는 것에 불과한 기생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노동가치론에서는 정보상품의 가격과 가치 사이에 독점이윤이라는 성분뿐만 아니라 다른 성질의 가격 성분들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대와 특별잉여가치이다. 이 장에서 지대라고 하는 것은 차액지대를 의미한다. 절대지대는 자본주의적 토지소유 자체에서 발생하는 지대이므로 토지소유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정보상품의 경우에 절대지대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특별잉여가치와 지대는 모두 개별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여기서는 가치와 생산가격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추상수준에서 논의하고 있다. 생산가격의 개념을 도입한다면, 지대란 개별비용가격과 일반비용가격의 차이(Karl Marxl(1894), Capital, Vol. III; 김수행 역,『자본론』, 제3권, 793-794쪽)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는 “초과이윤의 원인이 자본 그것―자본사용량의 차이든 자본의 보다 능률적인 사용이든―에 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생산분야의 모든 자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투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같은 책, 796쪽. 반대로 지대의 경우에는 초과이윤의 원천이 “기계나 석탄 등등과 같이 노동이 생산할 수 있는 생산물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토지의 특정한 자연조건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같은 책, 797쪽. 물론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도 자연력을 이용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증기기관을 처음 도입한 자본의 경우 증기력이라는 자연력을 이용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같은 책, 797쪽. 그러나 이 때의 자연력은 동일한 생산분야의 모든 자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이다. 지대의 경우에는 자연력의 독점에서 발생한다. 이와 같이 개별 자본이 가진 우월한 생산성의 원천이 자본 자체(노동력을 포함하여)에 있느냐 자본 바깥에 있느냐에 따라서 특별잉여가치와 지대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독점과 달리, 특별잉여가치와 지대는 모두 가치법칙에 따라서 교환이 된다.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는 다른 자본이 아직 그만한 생산력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가 저하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지대의 경우에는 다른 자본이 그만큼 유리한 생산조건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가 개별가치 수준으로 낮아질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잉여가치와 지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동태적인 과정에서의 차이이다. 특별잉여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점차 소멸한다. 다른 자본이 똑같은 생산방법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대의 경우에는 시간이 간다고 소멸하지 않는다. 다른 자본이 똑같은 생산조건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는 자본 간의 경쟁에 의해서 사회적 가치가 점점 낮아지지만, 지대의 경우에는 사회적 가치가 낮아지지 않는다. 특별잉여가치는 사회적 가치를 낮추어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지만, 지대의 경우에는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특별잉여가치는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지대는 허위의 사회적 가치(가공의 사회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Karl Marxl(1894), Capital, Vol. III; 김수행 역,『자본론』, 제3권. 허위의 사회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비옥도가 높은 토지에서는 5시간에 쌀 한 가마가 생산되고, 열등한 토지에서는 10시간에 쌀 한 가마가 생산된다고 가정해 보자. 사회적인 쌀 수요가 두 가마라고 가정한다. 이 때 토지가 사적으로 소유되어 있다면 열등한 토지의 재생산비를 보장해 주어야 하므로 쌀 한 가마는 10시간의 가치를 가지게 되고, 우등지에서는 5시간의 지대가 발생하게 된다. 사회 전체로 보면 쌀 두 가마에 대하여 20시간의 노동을 지불하게 된다. 그러나 토지를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면 20시간이 아니라 15시간의 노동만 지불하면 두 가마의 쌀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두 경우를 비교하여 보면 5시간의 노동은 가치이기는 하지만, 허위의 가치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하나 지대와 관련하여 유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지대를 농업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으로 좁게 한정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지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공업에서의 지대를 예로 들고 있다. 폭포 근처에 위치한 공장은 에너지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책. 또한 일상생활에서는 상업에서의 지대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 중심부에 가게를 열면 손님이 많이 와서 다른 곳에 위치한 가게보다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초과이윤은 곧 지대로 전환될 것이다. 상업에서의 지대를 생각해 보면 생산비가 절약되는 경우뿐만 아니라 판매량이 증가하는 경우에도 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대는 주택임대와 같이 소비행위를 매개로 하여 발생하는 지대를 포함시킬 수 있다. 소비를 매개로 한 지대는 자본의 힘으로 재생산하기 힘든 공간적, 사회적, 문화적 이유로 소비자에게 더 많은 사용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 때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대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본의 생산력과 관계가 없는, 따라서 자본의 힘으로 재생산하기 힘든 조건으로 인하여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조금 뒤에 살펴보겠지만, 자본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할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은 잘 존재하지 않는다. 바다에서도 쌀을 재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건을 만드는 데에 많은 비용이 든다면,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을 확보한 자본에 비해서 불리한 조건에 놓이게 될 것이고, 지대가 발생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정보상품의 경우 발생하는 지대의 전형적인 예로서는 네트워크 효과로부터 발생하는 지대를 들 수 있다. 큰 네트워크의 소유자는 작은 네트워크의 소유자에 비하여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정의한 바에 따르면, 이와 같은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서 발생하는 초과이윤은 지대의 일종이 된다. 네트워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지대가 높아지는 것은 도시 중심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땅값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다른 지대의 하나로서 브랜드 효과(brand effect)를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브랜드 효과를 ‘동질적인 제품이나 서비스가 브랜드로 인하여 평균적인 시장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되거나 더 많이 판매되어 수익이 증가하는 효과’로 정의해 보려고 한다. 자본의 생산력과는 상관없이 소비자가 부여하는 속성 때문에 높은 수익을 올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만큼은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브랜드 효과는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다른 자본과의 경쟁의 결과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형성된 브랜드 효과는 상당한 기간 동안 유지되는 것이 보통이며, 브랜드의 명성이 유지되는 한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시중심부에 가게를 차린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대수익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네트워크 효과와 브랜드 효과는 소비자들의 주목(attention)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네트워크 효과는 소비자들이 네트워크에 많이 접속함으로써 생기는 효과인데, 소비자들이 많이 접속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소비자들의 주목을 끌어야 한다. 인터넷 쇼핑몰의 예를 들자면 인터넷에 존재하는 수많은 쇼핑몰 중에서 소비자들의 주목을 끄는 소수의 쇼핑몰만이 충분한 네트워크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브랜드 효과도 일단 소비자의 주목을 끌어야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정보사회가 도래하면 정보의 풍요가 주목의 빈곤을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주목의 경제학을 제창하는 사이먼(H. Simon)이나 골드하버 Michael H. Goldhaber, "The Attention Economy and the Net," First Monday, Vol. 4, No. 2, 1997. 등의 주장을 정치경제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바로 정보혁명으로 인한 지대 형성의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지대가 주로 비옥도와 위치에 의해서 형성된 데 반해서, 정보혁명으로 인한 지대는 주로 주목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정보상품의 가격에는 이 세 가지 구성성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판매하는 윈도우XP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윈도우의 가격에는 타 기업이 당장 모방하기 힘든 기술격차에서 발생하는 특별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타판이나 패치판을 유상으로 판매한다든지, 여러 가지 응용프로그램을 운영체제에 끼워팔고, API를 늦게 공개하거나 공개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오피스를 지원하고,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란 운영체제에서 응용프로그램(application program)을 위하여 제공하는 함수를 말한다. 언어로 비유하자면, 윈도우에서 제공하는 단어라고 해 보면 어떨까? 윈도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작용하는 응용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API를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는 자기 회사의 오피스 개발자에게 API를 먼저 알려준다든지 아예 다른 개발자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오피스를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윈도우XP보다 먼저 출시된 오피스XP에는 아직 출시되지도 않은 윈도우XP에서 제공하는 기능을 활용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는 오피스XP는 앞으로 출시될 윈도우XP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선전을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다른 회사의 오피스 프로그램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피스 프로그램과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개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1만 단어나 되는데, 다른 오피스 개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1천 단어에 불과하다면 누가 자기의 생각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바탕화면에서 경쟁 회사의 아이콘을 설치하지 않는 조건으로 제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배타적 거래를 강요하는 행위 등등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독점이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비싸더라도 윈도우를 구매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다 윈도우를 쓰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일종의 네트워크 효과로서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초과수익은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보상품의 이윤을 구성하는 세 구성 성분 사이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정보상품의 이윤 중에서 어디까지가 독점이윤이고 어디까지가 지대이며 어디까지가 특별잉여가치인지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적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구분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식노동과 보통노동: 지식기반경제에 대한 비판 지식노동과 보통노동: 지식기반경제에 대한 함의 사슴과 해리라는 노동가치론의 가장 단순한 모형을 검토함으로써 가치법칙의 형성과정과 의미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간단한 사슴과 해리의 모형에 기초해서 논의를 전개시키지만, 단순상품생산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로 한다. 다만, 가치 차원의 추상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할 것이므로 평균이윤율이 성립되어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평균이윤율을 고려하여 생산가격대로 교환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가치법칙이나 이 논문의 주요한 결론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먼저 단순한 유통과정에서는 잉여가치가 창출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확인해 보자.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Karl Marx(1867), Capital, Vol. I; 김수행 역,『자본론』, 제1권, 비봉출판사, 1994, 제5장. 우선 상인들이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으로는 잉여가치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상인이 100원의 가치가 있는 것을 110원에 판다고 하면, 상품을 판매할 때에는 10원의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구매할 때에는 10원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판매자로서는 이득을 보지만 구매자로서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판매는 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계급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상인이 40원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50원에 속여서 팔았다면, 다른 상인은 50원의 가치를 가진 상품을 40원에 판 것이므로 총가치는 90원으로 변화가 없고, 다만 가치의 배분만이 달라진 것이다. 만약 등가물끼리 서로 교환된다면 아무런 잉여가치도 발생하지 않으며, 또 비등가물끼리 서로 교환된다고 하더라도 잉여가치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유통 즉 상품교환은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책, 205쪽. 이 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만약 A 장소에서는 사슴을 100원에 파는데, B 장소에서는 110원에 판다고 해 보자. 논의를 단순하게 하기 위하여 운송비나 보관비는 들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A 장소에서 100원에 사슴을 사서 B장소에서 110원에 팔면 10원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단순한 유통을 통해서 10원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유통을 통한 재정거래(裁定, arbitrage)라고 할 수 있다. 재정거래란, 노동가치론의 맥락에서는, 노동을 제공하지 않고서도 혹은 제공한 노동 이상으로 가치를 획득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재정거래를 흔히 차익거래라고도 부르는데, 두 종류의 증권 시장에서 (내재)가치가 같은 증권의 가격이 서로 다를 때에 그 증권을 반대로 매매함으로써 위험을 전혀 부담하지 않고 차익을 얻는 거래를 말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손쉬운 재정거래를 통하여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누구나 다 이러한 재정거래를 하려고 할 것이다. 그 결과 A 장소에서는 누구나 사슴을 사려고 하니까 사슴 값이 점점 올라가게 되고 B 장소에서는 누구나 다 사슴을 팔려고 하니까 사슴 값이 점점 내려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어 결국 A 장소와 B 장소에서 사슴의 가격은 같아지게 된다. 그리고 재정거래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다. 두 지역에서 사슴 값이 같아지면 유통을 통한 이득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된다. 흔히 이러한 조건을 무재정조건(no arbitrage condition)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보면 유통을 통한 재정거래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물일가의 법칙이 성립하고, 유통 영역에서 무재정조건이 충족되면 유통과정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슴의 가격이 왜 200원이나 300원이 아니라 100원이 되었는가라는 문제, 즉 가치대로의 교환을 설명해 보기로 하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산을 명시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사슴을 잡는 데는 5시간의 노동이 필요하고 해리를 잡는 데는 10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사람들이 해리보다는 사슴을 더 좋아해서 사슴 한 마리와 해리 한 마리가 1:1로 교환되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 것인가? 5시간 걸려서 사슴 한 마리를 잡고 그것을 가지고 시장에 가서 해리 한 마리와 교환하는 사람은 10시간 걸려서 해리 한 마리를 잡는 사람에 비해서 5시간의 노동만큼 이득을 보게 된다. 이것은 생산을 통한 재정 거래라고 부를 수 있다. 누구나 다 위와 같은 생산을 통한 재정거래를 하려고 하므로 시장에서 사슴의 공급은 증가하여 그 값이 점점 싸지게 되고 해리의 공급은 감소하여 그 값이 점점 비싸지게 된다. 결국에는 재정거래의 가능성은 사라져 버리고 사슴과 해리가 2:1의 비율로 교환될 것이다. 지금까지 분석을 통해서 시장에서 왜 사슴과 해리가 가치대로 교환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글에서는 평균이윤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평균이윤이 문제의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가치대로 교환되지 않는 경우에는 생산을 통한 재정거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치법칙은 추상적인 법칙이 아니라,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통해서 시장에서 관철되는 법칙인 것이다. 추상적 인간노동(abstract human labour)이 가치실체라는 명제의 의미에 대해서도 재정거래라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추상적 인간노동이란 “형태가 없는 동일한 실체, 동질적인 인간노동의 단순한 응고물, 지출형태와 관계없이 지출된 인간노동력의 단순한 응고물” Karl Marx(1867), Capital, Vol. I; 김수행 역,『자본론』, 제1권, 47쪽. 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구체적인 측면을 사상(捨象)해 버린 노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구체적 측면을 사상한다는 말은 단순하게 사고 상에서 사상한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노동력이 생산의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노동의 구체적인 측면이 사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산 분야 사이의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생산을 통한 재정거래를 보장해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생산을 통한 재정거래를 통하여 가치대로의 교환이 관철되는 것이라면, 바로 생산을 통한 재정거래를 통해서 추상적 인간노동이 가치실체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의의 편의상 재정거래를 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태를 재정조건(arbitrage condition)이 충족되는 상태라고 부르기로 하자. 즉 재정조건이 충족된다는 말은 유통이나 생산을 통한 재정거래를 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재정조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재정거래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슴을 잡는 것이 분명히 이득이 되지만, 특허나 저작권과 같은 법률에 의해서 사슴을 잡는 행위가 금지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사슴과 해리를 가치대로 교환되게 만드는 힘이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재정거래가 불가능한 경우를 기술적(내부적), 외부적, 제도적 불가능성으로 구분해 보기로 하자. 기술적 불가능성이란 재정거래를 할 수 있는 기술이 없기 때문이 재정거래가 불가능한 경우를 말하며, 내부적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외부적 불가능성이란 자본의 힘으로 단기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외부적 요인, 즉 비옥도와 같은 자연적 조건이나 위치나 소비자들의 주목과 같은 인공적 조건의 차이로 인하여 재정거래가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제도적 불가능성이란 법률이나 시장조직과 같은 제도적 요인에 의해서 재정거래가 방해를 받는 상태를 말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여 보자. 유통과정이나 생산과정에서 재정거래가 기술적, 외부적, 제도적으로도 가능하면서 재정조건이 더 이상 충족되지 않아서 재정거래를 할 필요가 없을 때에 가치법칙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치법칙이란 말은 가치대로의 교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전형과정을 고려하면 가치가 아니라 생산가격을 기준으로 교환되므로, 일반적으로 가치법칙이라고 할 때에는 가치대로의 교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가 가치법칙이 성립되는 유일한 경우는 아니다. 다음 절에서 논의를 계속하여 보자. 이 절에서는 지식노동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 정치경제학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던 특별잉여가치, 지대, 독점과 불평등교환이라는 개념들을 재정거래라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제 불평등교환(unequal exchange)이라는 개념을 추가적으로 도입해 보자. 이 개념은 국제가치론논쟁에서 확립된 것으로서 처음에는 부등가교환을 불평등교환이라고 생각하였다. 부등가교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에마뉴엘(Arghiri Emmanuel, Un- equal exchange; a study of the imperialism of trade, [With additional comments by Charles Bettelheim], tr. Brian Pearce, Monthly Review Press, 1972)은 생산가격을 통한 잉여의 이전을 넓은 의미에서의 부등가교환이라고 불렀고, 임금격차로 인한 잉여의 이전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등가교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 또 다른 종류의 재정거래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 혹은 지식노동과 보통노동이 존재할 경우에 한 종류의 노동 대신 다른 종류의 노동을 투입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사슴을 생산하는 분야에서 숙련노동이 가치 이하로 거래된다면 자본가는 비숙련노동을 숙련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는 노동투입을 통한 재정거래의 주체는 자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거래가 일어나서 특정한 형태의 노동, 예를 들어 숙련노동에 대한 보수가 상승하면 노동자들이 스스로 교육이나 훈련에 투자하는 재정거래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동투입의 대체 행위도 일종의 재정거래라고 할 수 있다. 노동투입의 대체를 통한 재정거래라는 관점에서 불평등교환을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는 노동투입의 전환을 통한 재정거래가 외부적,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를 불평등교환이라고 정의하려고 한다. 지대의 경우에는 재정거래가 외부적 요인, 즉 자본 외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평등교환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 표로 나타내면 다음의 <표 1>과 같이 될 것이다. 경쟁 독점 특별잉여가치 지대 재정거래 가능 제도적으로 불가능 기술적으로 불가능 외부적으로 불가능 가치법칙 등가교환 부등가교환 등가교환 등가교환 평등교환 평등교환 불평등교환 평등교환 불평등교환 <표 1> 사슴과 해리의 모형을 활용하여 지식노동이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여 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해리 잡는 노동자들 일부가 10시간이 아니라 5시간에 해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5시간에 해리를 잡을 수 있는 노동은 지식노동이고, 종전대로 10시간에 해리를 잡을 수 있는 노동은 보통노동이라고 해 보자. 이러한 지식노동이 등장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이것은 지식노동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어떤 종류의 지식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분석을 해보자. 지식노동자가 가진 지식이 모방가능한 지식이지만, 모방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창출하는 것과 동일한 양의 노동이 필요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즉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의도적인 학습이 필요하며,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지식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을 교육해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50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지식노동이 되어 해리 100마리를 5시간에 잡을 수 있게 된다면, 100마리를 1000시간에 잡으나 500시간 지식을 습득하고 500시간에 잡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평균이윤율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사슴과 해리는 옛날과 같이 2:1의 비율로 교환된다. 5시간의 지식노동의 생산물과 10시간의 보통노동의 산출물이 1:1의 비율로 교환되며 지식노동 1시간은 보통노동 2시간의 가치를 창출해낸다. 이것은 재정거래가 기술적으로도 가능하고 외부적 제도적으로 가능하지만, 재정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상태이므로 평등교환 상태이고 가치법칙이 성립하는 상태이다. 이 경우는 “생산물의 보다 큰 가치는 그러한 재능을 얻는 데 지출된 시간과 노동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에 불과할 것이다.” Adam Smith(1776), The Wealth of Nations, 김수행 역,『국부론』, 53쪽. 다음으로 지식노동자의 지식이 모방가능한 지식이며, 모방을 위해서 아무런 추가적인 노동도 투하할 필요가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해리에 대한 지식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들지만 해리의 습성이 다 같아서 한번 그 지식이 발견되면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지식을 활용하기만 하면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노동투입의 전환을 통한 재정행위가 즉각 일어나서 모든 노동자가 지식노동자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아무런 가치도 창출하지 못한다. 해리의 가치가 반으로 떨어지며, 사슴과 해리는 1:1로 교환될 것이다. 이것은 등가교환이며 평등교환이다. 폐쇄경제를 가정하고, 해리의 수요가 일정하다면 지식노동자(해리 노동자)의 절반은 실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해리의 가치가 떨어져서 해리의 수요가 증가하거나 새로운 산업이 등장한다면 오히려 고용이 늘어날 수도 있다. B의 경우와 같이 지식을 창출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아무 비용 없이 즉각 그 지식을 모방할 수 있다면 그 지식으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이득도 얻을 수 없다. 이런 경우 지식을 창출한 사람은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 제도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이 그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해리를 생산하는 일부 지식노동자들이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또한 똑같은 지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지적재산권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이나 노동투입의 대체를 통한 재정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에는 사슴과 해리의 교환비율은 여전히 2:1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정 행위의 기술적, 경제적 가능성은 있지만, 제도적 가능성이 막혀 있는 경우이므로 등가교환이 아니라, 독점 가격에 따른 교환이다. 보통노동과 지식노동은 불평등하게 교환된다. 불평등한 상태는 시장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보장된다. 다음으로 지식노동자들의 지식이 고도한 수준의 노하우(know- how) 형태로 숨겨져 있어서 보통노동자들이 그 지식을 습득할 수 없지만, 그러한 지식은 경험학습 형태로 습득된 것이어서 지식노동자의 관점에서는 그 지식을 학습하는 데 아무런 추가적인 노동이 투입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에는 노동투입의 전환을 통한 재정거래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지식노동자가 5시간 걸려서 해리를 잡는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보통노동자는 10시간 걸려서 해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해리와 사슴의 교환비율은 여전히 2:1로 유지되고, 지식노동자가 5시간 걸려서 잡은 해리는 보통노동자가 10시간 걸려서 잡은 해리와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지식노동은 5시간만큼 특별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특별잉여가치이다. 지식노동은 보통노동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다. 가치대로의 교환이면서 특별잉여가치가 발생하지만, 불평등교환은 아니다. 이 경우가 A와 다른 점은 A의 경우는 지식노동이 두 배로 많은 가치를 창출하더라도 지식노동에 투입된 노동량이 두 배이므로 등노동량교환이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지식노동에 추가로 투입된 노동이 없으므로 부등노동량교환이라는 것이다. 지식노동자의 지식이 고도한 지식은 아니지만 외부적 조건으로 인하여 모방이 불가능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폭포 같은 특수한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해리를 잡으면 5시간에 잡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도 재정거래는 불가능하다. 보통노동자는 지식노동자처럼 5시간에 해리를 잡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폭포가 없기 때문에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사슴과 해리의 교환비율은 여전히 2:1로서, 등가교환이다. 지식노동자의 5시간 노동은 10시간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이 초과이윤은 특별잉여가치가 아니라 지대이다. 이것은 외부적 조건으로 재정거래가 불가능한 경우이므로 불평등교환을 의미한다. 지식의 가장 일반적인 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지식이 노하우 같은 형태로 숨겨져 있지만 점차 확산되어 다른 보통노동자들도 하나둘씩 그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마침내 모든 노동자가 그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경우이다. 처음에는 D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식노동자는 특별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확산되어 가고 많은 노동자가 지식노동자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재정거래가 점점 활발하게 일어난다. 재정거래가 계속되면 해리의 가치는 점점 하락하지 않을 수 없고, 마침내 모든 노동자들이 다 지식노동자가 되면 해리의 가치는 5시간으로 감소하게 된다. 지식노동은 일시적으로만 특별잉여가치를 창출한다. 이것이 앞에서 살펴본 D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모든 노동이 지식노동으로 전환되고 나면 특별잉여가치는 사라지지만 상대적 잉여가치가 형성된다. 이상의 여섯 가지 경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어떤 경우에도 지식은 더 많은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해리 잡는 지식이 늘어나면 해리 생산량은 그만큼 늘어날 수 있다. 둘째, 지식을 창출하거나 활용한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지 못할 수 있다. A나 B의 경우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으며, F의 경우에는 이득이 일시적이다. 셋째, 지식노동이 보통노동에 비해서 항상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특별잉여가치나 지대가 창출되어 가치총량이 증가하는 경우는 D와 E 두 가지 경우뿐이다. F의 경우에는 일시적으로만 특별잉여가치가 창출된다. 넷째, 지식을 창출한 자본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경우는 지식의 확산이 기술적, 외부적,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식은 독점을 할 때에만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C, D, E, F의 경우에는 모두 지식의 확산이 막혀 있다. 지식을 통하여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지식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수준에 격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지식을 창출한 자본이 이득을 보는 경우에는 특별잉여가치가 생산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평등교환이다. 여섯째, 한 분야의 지식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창출한 자본에게는 아무런 직접적인 이득을 주지 못하는 경우에도,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킴으로써 자본가 계급 전체에게 이득을 줄 수 있다. 흔히 지식을 노동이나 자본에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지식은 궁극적으로 인식의 주체인 인간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지식은 하드웨어 형태이든, 소프트웨어 형태이든 웨트웨어 형태든 모두 인간 노동의 산물이거나 인간의 노동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식은 인간의 노동과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자체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인간적인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구상과 실행의 통일 Harry Braverman, Labour and Monopoly Capital; 강남훈/이한주 역,『노동과 독점자본』. 에서 찾는데, 이것은 바로 지식과 노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오늘날 소프트웨어나 컨설팅 같은 형태로 지식 자체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 경우에도 상품화된 지식은 인간 노동의 산물이다. 다음으로 지식은 그 자체로서 항상 보다 많은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노동이 보통노동 이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경우는 지식노동 이외에 보통노동이 존재하거나 다른 지식노동이 지식을 모방할 수 없을 때뿐이다. 지식은 지식격차가 있는 경우에만 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처럼 일시적으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능력은 얼마 안 가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식의 확산을 막는 것이 지식소유자의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된다. 이와 같이 지식기반경제는 점점 불평등한 교환을 만들어내는 경향을 가진다. 두 번째로 지식기반경제에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경제법칙이 적용된다는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식에 의해서 수확체증 현상이 나타나든지 수확체감 현상이 저지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경제법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가치와 사용가치를 구분하지 않고 혼동하고 있다. 여기서 가치와 사용가치의 혼동이란, 가치는 그 실체가 노동이지만 항상 화폐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므로, 화폐적인 측면과 실물적인 측면의 혼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식노동의 등장으로 인해서 해리의 생산량이 많아지더라도 해리의 가치가 하락한다면 가치총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게 된다. 해리를 생산하는 자본의 입장에서는 해리 생산량이 아니라 해리 생산을 통한 화폐적 이득(예를 들어, 해리의 가격×해리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90년대의 통계로 볼 때 지식산업의 생산물들은 다른 어떤 생산물보다도 가격이 더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보면, 이러한 혼동은 특히 화폐를 명시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신성장이론모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신성장이론에 속하는 많은 연구에서는 생산량이 많아지면 가격이 하락하는 효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용가치 차원에서는 수확체증이 발생하더라도 가치차원에서는 수확체감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혼동은 매우 치명적인 혼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사용가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이윤)를 획득하기 위해서 운동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지식노동자의 수가 점점 증가하고 지식산업의 비중이 점점 증가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주장이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과거의 노동자에 비하면 모두 다 지식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오늘날의 지식노동자들이 모두 과거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점점 많은 노동자들이 지식노동자가 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미국의 통계를 보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Businessweek, 2000. 2. 14. 등을 참조 이것은 지식노동은 다른 노동과 격차가 있을 때에만 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하는 분석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 정보혁명과 공황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정보혁명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할 때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향이나 정책, 혹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시장의 확대와 국가의 축소 경향이다. 상품의 양이 증가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용가치가 상품으로 공급되고, 국가의 규제가 사라지고 국영기업은 민영화되며, 국가의 기능은 최소화된다. 시장에서의 자유가 증대하고, 시장의 규율이 지배적이 된다. 둘째는 금융주도 경향이다. 금융자유화가 진전되어 파생상품을 포함하여 다양한 금융상품이 생겨나며, 금융자본이 자본분파 중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주식 소유가 부의 가장 중요한 보유 형태가 되며, 금융소득이 소득의 주요한 원천으로 떠오른다. 셋째는 세계화 경향이다. 무역, 직접투자, 포트폴리오 투자 등의 형태로 국경을 넘나드는 상품과 자본이 증대하고, 노동과 자본의 국가간 이동이 자유로워지며, 기업과 시장의 규모가 전세계적인 규모로 증가한다. 초강대국인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국제적 조절이 강화되면서 국가적 조절은 축소된다.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한 단계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떤 이론적 입장에서 파악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 글에서는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이라는 조절이론(regulation theory)의 두 가지 개념을 활용하여 신자유주의를 파악해 보려고 한다. 정보혁명은 진공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현대자본주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포드주의 조절이론에서는 19세기 이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두 가지 축적체제를 발견하였다. 하나는 19세기 중반에서 제1차 세계대전 사이의 외연적 축적체제(extensive regime of accumul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대 사이의 포드주의적 축적체제(Fordist regime of accumulation)라고도 불리는 내포적 축적체제(intensive regime of accumulation)이다. 외연적 축적체제에서는 가혹한 노동 조건과 낮은 임금으로 높은 잉여가치율을 유지함으로써 이윤율의 하락을 방지하였다. 소비는 노동자들의 소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식민지나 개척지의 확대로 충당되었다. 내포적 축적체제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불하였지만, 그 임금의 상승이 소비재 생산부문의 생산성 증가 범위 이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잉여가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산재 생산부문의 생산성 증가로 인하여 자본의 기술구성이 증가하더라도 가치구성이 높아지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조건이 결합됨으로써 이윤율 저하에 반작용하는 힘이 구조적으로 보장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재 생산부문의 생산성 증가로 인한 소비재 생산량의 증대는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에 의한 구매력의 확대로 수요되었다. Alain Lipietz, "Behind the Crisis: the Exhaustion of a Regime of Accumulation. A 'Regulation School' Perspective on Some French Empirical Works,"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y, Vol. 18, No. 2, 1986. 생산과 소비 사이의 균형이 식민지의 외연적 확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소득 증대에 의해서 충족되었기 때문에 내포적 축적체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배제적 축적체제 생산 방법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특징이었던 대량생산(mass production) 방법이 대량맞춤생산(mass customization) 방법으로 변하고 있다. 대량맞춤생산은 획일적이고 표준적인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던 대량생산체제를 변화시켜 기본적으로 대량생산방법을 유지하면서도 소비자들의 기호를 반영하여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수요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대량맞춤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운동 과정 전체가 변해야 한다. 먼저 소비자의 주문을 받거나 선호를 파악하여 생산을 지시하는 과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CALS (commerce at the light speed), 식품, 잡화 산업에서는 효율적 소비자 반응(efficient consumer response), 의류산업에서 신속반응(quick response) 등의 기술이 개발되었다. B2B(business to business), B2C(business to consumer) 전자상거래가 급증하고 있으며, 경매(판매자 주도 경매), 역경매(구매자 주도 경매), 공동구매 등의 방법이 사용되고 있고, 소비자를 위하여 가격을 비교해 주거나 물건을 추천해주는 로봇(robot)이나 대리인(agent) 프로그램들이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있다. 다음으로 원료와 부품을 조달하는 구매과정이 혁신되어야 한다. 일찍이 자동차 산업에서는 적기생산(just-in-time) 방법이 사용되었고, B2B 전자상거래(electronic commerce)와 전자시장(e-marketplace)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들은 물류센터를 건설하고, 공급망 관리(supply chain management) 기술을 도입하면서 점점 통합되고 있다. 생산과정은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여러 종류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유연생산체제(FMS: flexible manufacturing system)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에는 컴퓨터를 활용한 CAD(computer aided design),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 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 등의 기술이 함께 사용되고 있고 점차 CIM (computer integrated manufacturing)의 개념으로 통합되고 있으며, 유연생산체제는 유연생산판매체제(FMMS: flexible manufac- turing and marketing system)로 나아가고 있다. 대량맞춤생산에 따라 노동자의 구성과 직무가 달라지게 되면 기업의 조직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기업은 위계적(hierarchy)인 조직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표준화된 제품의 생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량맞춤생산에서는 피콧 등의 주장처럼, 전략적 네트워크(strategic network) 형태나 모듈(module) 형태 등이 기업의 적합한 조직 형태가 된다. Arnold Picot/Ralf Reichwald/Rolf T. Wigand, Die Grenzlosen Unternehmung, 1998; 宮城 徹 譯,『情報時代の 企業管理の 敎科書』, 稅務經理協會, 188쪽. 대량맞춤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노동과정도 변화하여야 한다. 노동자들이 유연한 생산방법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한 노동자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다품종을 생산할 수 있도록 숙련되어야 한다. 유연전문화(flexible specialization)가 추구되고, 노동자가 다기능을 가지게 되며, 지식노동자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배제적 형태로 고착된 이유들 첫째로,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노동자를 지식노동자로 만드는 데에는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다. 만약 일부의 지식노동자들에게만 전문적이고 복잡한 업무를 맡기고 나머지 보통노동자들에게는 단순한 업무만 맡겨도 유연생산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비용측면에서 바람직할 것이다. 둘째로, 정보기술은 기계장치(하드웨어)나 그것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 자체는 더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노동은 단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보통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지식이나 숙련은 오히려 더 낮아지게 되는 효과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아울러 똑똑해진 기계장치와 소프트웨어는 일반적으로 노동강도를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셋째로, 정보기술은 비생산적 노동자를 축출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러한 노동자들을 실제로 축출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효과가 나타난다. 비생산적 노동이란 제도의 불완전성 혹은 정보의 부족이나 비대칭성 때문에 필요한 노동이다. 정보기술을 도입하면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놀랄 만큼 발전하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이 불필요하게 된다. 정보혁명은 비생산적 노동을 축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산업혁명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넷째로, 정보혁명은 실시간으로 기업의 업무를 원격 통제하고 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정으로 세계화된 생산체제를 가능하게 한다. 세계적으로 원료가 가장 싼 곳에서 물자를 조달하고 임금이 가장 싼 곳에서 생산을 하게 되면 개별기업이나 개별작업장 단위에서 일반 노동자들을 포섭하여 안정적인 고용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보통노동자들은 국민경제나 지역경제 차원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후진적인 경제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경제 차원에서 경쟁하여야 하므로 고용의 불안정과 노동조건의 악화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다수 노동자들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노동강도가 증가하면서 노동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고용의 불안정은 세계 각국의 자료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1990년대에 노동시간이 증가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용불안정은 정규직 노동자를 임시직 노동자로 대체하는 경우에도 발생하지만, 비생산적 노동자를 축출하는 데서도 발생한다. 나아가 기업의 핵심역량(core competence)만 남기고 나머지는 외부발주(outsourcing) 한다든지 극단적인 경우에는 분사(spin-off)해 버리고 하청계약(subcontracting)을 통해서 제조한다면, 보통노동자들의 고용은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다. 기업이 세계화함에 따라서 축적과정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은 국내의 산업예비군들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지구적인 산업예비군들과의 경쟁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예가 나이키(Nike)이다. 나이키는 본사에서는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연구개발, 설계, 마케팅 등만을 담당하고 실제 생산은 하청공장과의 계약을 체결해서 행하는 ‘생산 없는 제조업(manufacturing without production)’을 실현하고 있다. 나이키는 현재 전 세계 51개 나라에서 736개의 공장과 하청계약을 맺고 있으며 모두 556,350명의 노동자가 나이키 하청공장에서 노동하고 있다.(http://www.nikebiz.com) 이러한 축적체제를 배제적 축적체제라고 부르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소수의 지식노동자만 축적체제 안으로 포섭하고 다수의 보통노동자는 불완전고용이나 실업의 형태로 배제해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재생산 내포적 축적체제에서는 비교적 높은 임금이 지불되어 노동자를 체제 내에 포섭하려고 하였다.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음으로써 대량생산방법의 도입으로 반복적이고 강도가 높은 작업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노동조합 활동이 장려되고 단체교섭이 일상화되어 산업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배제적 축적체제에서는 임금구조가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소수의 지식노동자들에게만 고임금을 지불하고 다수의 보통노동자들에게는 임금 인상이 억제되어 임금격차가 커지고 있다.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축출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임금인상 요구를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또한 취업 중인 노동자들조차도 기업의 규모가 세계화되어 감에 따라 지구적 차원에서의 경쟁으로 인하여 임금인하압력이 강화되고 있다. 소득분배의 악화는 1990년대를 통하여 전세계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내포적 축적체제에서는 기본임금을 보장하면서 집단상여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Michel Aglietta, A Theory of Capitalist Regulation: The U.S. Exprience; 성낙선 외 역,『자본주의 조절 이론』. 그러나 이제는 임금이 개인별로 책정되고 상여금도 개인별로 지급되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보통노동자들은 치열한 경쟁 하에 놓여있기 때문에 특별한 동기부여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상여금은 지식노동자 계층에 집중되고 있다. 스톡옵션(stock option)이 지식노동자들에게 대한 보편적인 형태의 상여금으로 되어가고 있다. 1980년 미국에서 CEO들의 보수는 노동자들 임금의 42배였다. 1990년에는 84배였고, 1999년에는 475배로 증가하였다. GE의 CEO인 잭 웰치(Jack Welch)는 1999년에 보수(compensation)로 4,570만 달러, 스톡옵션 공여(stock option grants)로 4,690만 달러, 스톡옵션 행사(exercises)로 4,850만 달러, 미행사 스톡옵션으로 4억 3,640만 달러, 합계 5억 7,750만 달러를 벌었다. 보수와 스톡옵션 행사만 치더라도 노동자 15,000명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다.(http:// www. aflcio.org/paywatch 참조) 포드주의 시대에 도입된 국가나 공공단체에서 부담하는 간접임금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국가의 기능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금제도나 의료보험제도마저도 민영화됨으로써 노동력의 전체적인 재생산도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되고 있다. 연금기금의 주식투자 허용 등으로 인하여 노동자와 그 가족의 재생산이 금융시장의 기복에 의존하도록 되어가고 있다. 최근 엔론(Enron)의 파산에서 드러났듯이 기업연금제(401k)를 채택하고 있는 회사의 노동자들은 주식시장에 자신의 노후생활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기업이 파산하여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는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재생산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닥친다. 엔론의 노동자 1만7천여 명은 자사주의 주가가 올해 초 80달러 선에서 29일 36센트로 폭락하는 바람에 99%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한겨레, 2001. 11. 30)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 흔히 조절이론에서는 포드주의 이전의 외연적 축적체제에서는 절대적 잉여가치가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였는데, 포드주의에서는 상대적 잉여가치가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David Kotz, op. cit. 그러나 배제적 축적체제에서는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특별잉여가치, 독점이윤과 지대이다. 호순환 구조 축적체제가 안정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축적이 계속될 수 있는 호순환 구조가 성립되어야 한다. 여기서 호순환이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호순환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입장에서 호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순환 구조는 다시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생산 측면에서는 이윤율저하경향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운동은 이윤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비 측면에서는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확보되어야 한다. 배제적 축적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을 배제하면서도 어떻게 이러한 호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축적체제 성립의 관건이 된다. 노동자들을 축출함에도 불구하고 이윤율저하경향이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비생산노동의 감소는 직접 이윤율을 높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자본의 구성이 높아지거나 생산잉여가치율이 저하한다고 하더라도 이윤율이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또한 배제적 축적체제에서 노동자들의 축출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켜 잉여가치율이 낮아지는 것을 방지한다. 정보기술의 발달에 의한 생산재 가격의 급격한 하락은 유기적 구성의 상승도 억제하고 있다. 다음으로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가 특별잉여가치, 독점이윤, 지대 등으로 변하게 되면 이윤율은 직접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특별잉여가치, 독점이윤, 지대 등은 자본의 구성이나 비생산노동비율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이윤율을 증가시키게 된다. 배제적 축적체제의 세계화 경향은 이윤율을 더욱 높이게 된다. 지대나 독점이윤은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윤율을 결정하는 모든 구성요소가 이윤율저하경향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호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요 측면에서의 축적체제가 성립할 조건을 생각하여 보자. 포드주의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고임금을 지불하고 대량소비라는 새로운 소비양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수요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배제적 축적체제에서도 대량맞춤생산에 적합한 새로운 소비양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대량맞춤생산은 대량생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한계에 부딪친 표준제품의 판매를 맞춤생산을 통하여 더욱 확대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표준화된 제품의 대량소비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제품을 소비하는 차별화된 소비양식이 발달한다. 이에 따라 브랜드나 프랜차이즈 형태의 소비가 더욱 중요하게 되고, 생산자는 소비자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광고를 통한 기호의 창출에 나서며, 소비자가 광고되는 상품이 아니라 기호 자체를 소비하게 되는 ‘소비의 사회’ 현상도 나타나게 된다. Jean Baudrillard, La société de consommation: ses mythes, ses structures, Gallimard, 1974; 이상률 역,『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1992. 그러나 배제적 축적체제에서는 노동자를 축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방식의 소비 확대만으로는 축적체제를 뒷받침할 만큼 충분한 수요를 확보하기 어렵다.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추가로 작용하여야 한다. 첫째로, 투자를 통한 수요의 확보이다. 정보혁명 과정에서 모든 산업에 걸쳐서 엄청난 IT 투자가 행해지고 있다. 투자를 통해 수요를 확보한다는 것은 과거의 축적체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자가 생산능력의 증대로 연결된다면 수요 문제는 장기적으로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IT 투자는 생산량의 증가로 연결되지 않는다. 생산성 역설에 대한 논쟁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생산의 증가보다는 서비스의 증가를 목적으로 행해지는 IT 투자도 상당히 많이 있다. 신문사 홈페이지의 경우를 생각하여 보자. 홈페이지를 만들고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홈페이지를 유료로 운영하고 있는 신문사는 드물다.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경쟁에 뒤쳐지기 않기 위하여 독자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목적으로 운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일부의 지식노동자들이 받는 고소득과 그에 따른 고소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지식노동자들의 소득 증가분이 축출된 노동자들의 소득 감소분보다 크다면, 지식노동자들의 늘어난 소비를 가지고 일반노동자들의 줄어든 소비를 어느 정도 보충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로, 금융시장 활성화로 인한 소비의 증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주식투자를 하게 되었다고 할 때 주식시장이 활성화되면 노동자들의 자산평가가 늘어나게 되므로 소비가 증가할 것이다. 다음 절에서도 살펴보겠지만, 브와이에 같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호순환구조의 성립 가능성을 현실적인 것으로 고려하고 있다. Robert Boyer, "Is a finance-led growth regime a viable alternative to Fordism? A preliminary analysis." 넷째로, 세계화 경향은 수요 확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외연적 축적체제에서는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적 진출이 불가피하였다. 내포적 축적체제에서는 세계 시장에 의존하기보다는 노동자들에게 고임금을 지불하고 대량소비 규범을 만들어 국민국가 내에서 수요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배제적 축적체제가 되면서 세계시장이 다시금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WTO의 출범과 인터넷의 등장은 세계시장을 현실적, 가상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미국 자본의 직간접 해외투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미국경제의 무역의존도는 90년대 신경제 기간 중에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며, 2001년의 불황기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미국의 무역의존도(수출+수입/GDP)는 1994년 20%를 넘어선 이래 꾸준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29%에 도달하였고, 불황기인 2001년에도 28%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1961년의 무역의존도가 불과 8%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자료: Bureau of Economic Analysis) 배제적 축적체제는 다수의 노동자를 배제함으로써 유지되는 축적체제이다. 포스트 포드주의, 혹은 네오포드주의 등의 다양한 가능성이 전망되었던 포드주의 이후의 축적체제는 정보혁명과 결합되면서 배제적 축적체제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주식자본 화폐를 M, 주식을 S라고 하면, 주식자본의 운동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그런데 이러한 자본의 운동은 주식의 구매와 판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유통과정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없다는 가치법칙에 위배된다. 실제로 주식은 구매하는 순간에는 판매자가 있고, 판매하는 순간에는 구매자가 있으므로, 한 사람이 덕을 보면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M S M' M S M' M S M' <그림 > 주식자본의 운동 하나의 주식자본의 운동은 다른 주식자본의 운동과 이와 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없다. 일종의 영합게임(zero-sum game)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두 자본의 운동만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 주식시장 전체로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현물주식시장에서는 만기일이 없기 때문이다. 선물이나 옵션과 같은 파생상품의 경우에는 일정한 시점이 되면 게임을 끝내고 모두 현금으로 바꾸었다가 새로 게임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합게임이라는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영합게임이라는 것은 파생상품 투자를 통한 금전적인 이득과 금전적인 손실을 합계했을 때 합이 0이 된다는 뜻이다.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용의 측면에서는 돈을 잃은 사람도 만족할 수 있다. 파생상품 시장의 위험회피 기능을 고려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헤지거래자(위험회피를 위해서 파생상품 투자를 하는 사람)는 위험을 회피하는 대신 금전적인 손실을 감수한다. 이 위험회피자의 금전적인 손실은 투기거래자(파생상품 투자를 통해서 금전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의 금전적인 이득이 된다. 위험회피라는 측면에서 위험회피자는 이득을 보지만, 금전적인 이득과 손실을 합해보면 0이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른 하나는 주가가 상승할 때에는 전체가 행복해지고, 하락할 때에는 전체가 불행해지는 자산평가가 매일매일 참여자의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산평가는 참여자들을 누가 따고 누가 잃는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따고 모두가 잃는 공동운명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혹은 한 사람의 수익이 다른 사람의 주식시장에의 참여나 기존 사람의 추가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보장된다는 의미에서 폰지 시스템(Ponzi system) 찰스 폰지(Charles Ponzi)는 1920년대 금융 피라미드 사기의 원조이다. 그는 유럽의 반송우표의 국제가격과 환율의 차이를 이용한 중재거래를 통해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선전하여 투자자를 모집하였다.(Robert Shiller, Irrational Exubera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일반적으로 폰지 시스템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첫째, 고수익을 약속해야 한다. 둘째, 그럴듯한 사업 계획이 있어야 한다. 셋째, 실제로 그 사업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잘 몰라야 한다. 넷째, 최초의 몇 사람들에게 진짜 고수익을 제공하여야 한다. 다섯째, 고수익을 올린 사람들이 대중들에게 선전을 하여야 한다. 황소시장(bull market)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전부 충족되는 것이 아닐까? 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은 다이아몬드나 종이조각을 소유하는 것과는 다르다. 주식은 “미래의 이윤에 대한 청구권” Rudolf Hilferding, 앞의 책, 143쪽.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림 1>과 같은 주식시장에서 자본의 운동은 <그림 2>에서와 같이 그에 대응하는 산업자본의 운동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림 2>에서 타원 안은 주식시장을 의미하고 그 밖은 산업자본의 운동을 가리킨다. 산업자본에 의해서 생성된 잉여가치(M'-M)는 배당의 형태로 주기적으로(예를 들면, 1년에 한 번씩) 주식시장에 흘러 들어간다. 이것이 주식시장에서의 운동에 대한 합리적 근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소득의 흐름은 이자율을 매개로 자본화(capitalization)된다. 마르크스는 실제로 자본의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본화된 자본을 의제자본(fictitious capital)이라고 불렀다. 주식자본은 바로 이와 같이 미래의 배당(예상배당)에 기초해서 자본화된 의제자본이다. 주식의 내재가치(intrinsic value), 혹은 기본가치(fundamental value)는 미래의 배당의 현재가치이다. S ― M … P … M' M ― S ― M' M ― S ― M' <그림 > 산업자본과 주식자본 마르크스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용제도는 주식자본을 발생시키며 주식은 그 자본에 대한 소유권을 대표하게 된다. …… 그러나 그 자본은 이중으로―즉 한번은 소유권인 주식의 자본가치로서, 그리고 또 한번은 그 사업에 실제로 투하되었거나 투하될 자본으로서―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본은 오직 후자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주식은 이 자본에 의해 실현될 잉여가치에 대한 소유권[주식소유의 크기에 따라 잉여가치를 분배받는다]에 불과하다. Karl Marxl(1894), Capital, Vol. III; 김수행 역,『자본론』, 제3권, 572쪽. 그러나 이러한 주식자본의 운동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주식자본의 영합게임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주가 중에서 배당의 자본화에 의해서 합리화될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영합게임에 의해서 충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합리적 부분은 실제의 주가에 비하여 너무 작다. 완전한 정보가 있어서 리스크를 생각할 필요가 없고 현재의 배당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합리적인 주가배당비율(price dividend ratio)은 이자율의 역수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가는 불황국면일지라도 이 비율을 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장기투자가는 장기적으로 주가가 오를 것을 예상하는 투자가이지, 장기적으로 배당만으로 만족하는 투자가는 아니다. 실제로 이렇게 작은 배당을 바라고 투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배당율이 높은 주식의 예를 하나들자. 1999년 SK텔레콤의 배당율은 40%에 육박하였다. 액면가 500원짜리 주식을 가진 사람은 200원의 배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배당을 위해서는 40만원을 지불해야 했다(1999년 말 가격). 그리고 미래의 배당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나름대로의 예상에 기초해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배당이 없더라도 사내유보가 증가하면 주식의 내재가치가 올라간다. 이것은 사내유보가 미래 배당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의 사내유보 증가가 미래의 배당을 영구히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예상에는 투기적 성격이 있다. 이자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자율의 하락은 현재가치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내재가치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러한 내재가치 계산이 합리화되기 위해서는 이자율이 현재의 수준을 영원히 유지한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내재가치 계산 공식 자체에도 투기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도 있다. 주식보유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은 배당과 자본이득인데, 주식자본 운동의 결정적인 목표는 자본이득이다. 바로 이 자본이득 부분이 영합게임의 성격을 가지는 부분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주식은 상품으로서 매매될 수 있으며 따라서 자본가치로서 유통하는 사본이기 때문에 환상적인 성격을 지니며, 그것의 가치는 현실적인 자본(이것에 대한 소유권이 주식이다)의 가치운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등락할 수 있다. 주식의 가치는 이자율의 하락―이것이 화폐자본의 독특한 운동과는 무관하며 이윤율 저하경향의 단순한 결과라고 간주한다면―에 따라 필연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가지므로, 이 환상적인 부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하여 감에 따라 증대하는 경향을 가진다. Karl Marxl(1894), Capital, Vol. III; 김수행 역,『자본론』, 제3권, 585쪽. 주식자본, 일반적으로 금융자본의 영합게임의 성격은 파생상품(derivatives)에 투자되는 자본의 경우에는 완전히 투명하게 드러난다. 파생상품의 경우에는 주기적으로 만기가 되면 수익과 손실을 정산하여 기존의 상품을 파기하고 새로운 상품을 가지고 다시 자본의 운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BIS의 추정에 의하면, 2001년 6월말 현재 파생상품에 투자되는 자본의 규모는 100조 달러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3년 전에 비해서 38%나 증가한 규모이다. 총 99조의 파생상품 명목잔고 중 이자율 파생상품이 75조, 외환파생상품이 20조, 주식파생상품이 2조를 차지하였다.(Bank for International Settle- ments, "The global OTC derivatives market at end-June 2001: Second part of the triennial Central Bank Survey of Foreign Exchangeand Derivatives Market Activity", 20 December, 2001) 전 세계 연간무역량의 10배가 넘는 금액이 결과만으로 보면 카지노와 다름이 없는 영합게임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주식시장이 형성되고 나면 주식시장에 돌아다니는 화폐량은 산업자본의 운동을 하고 있는 화폐량보다 몇 배나 커지게 된다. 같은 말이지만, 시가총액(capitalization)은 자본금총액보다 커지게 된다. 이 차이는 이윤낳는 자본이 이자낳는 자본으로 전환하면서 발생한다. 액면가 5,000원에 이윤율 15%인 기업의 주식은 이자율이 5%일 때 15,000원에 거래되는 것이 적절하므로 10,000원의 창업자이득이 발생한다. 이 차이는 주식 소유자가 최초로 시장에서 주식을 거래할 때 발생하는데, 힐퍼딩은 이것을 창업자이득(promoter's profit)이라고 불렀다. <그림 2>에서 최초의 주식자본운동, 즉 굵은 이탤릭으로 표시된 자본운동에서 창업자이득이 발생한다. 오늘날의 표현을 쓰자면, 창업자가 이 창업자이득을 실현하는 과정이 바로 최초공개매수(initial public offering)이고, 벤처캐피탈(venture capital)은 바로 이 창업자이득을 노리는 자본이다. 창업자이득은 주식뿐만 아니라 수익을 낳는 모든 자산이 자본화할 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것은 보다 일반적으로 자본화이득(capitalization profit)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증권화(securitization)는 자본화이득을 쉽게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의 자본화이다. 창업자 이득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주식의 가치를 기업의 미래배당의 현재가치에 기초해서 평가하고 매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기업의 미래가치를 사전실현(pre- realization)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전실현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지금부터 영원히 일정한 비율의 배당(혹은 일정한 성장률의 배당을)을 계속 받았을 때 모을 수 있는 돈을 창업자들은 창업자이득의 형태로 한순간에 벌어들인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림 2>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주식시장에서 산업자본의 운동으로 화폐가 처음에 한 번만 흘러들어간다는 것이다. 화폐는 주식회사를 창업한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나와서 산업자본의 운동을 시작한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화폐가 공급되지 않는다. 주식시장이 활황이 되더라도 그 자체로 운동하는 산업자본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식자본의 이득, 즉 자본이득의 원천이 될 뿐이다. 중간에 주가가 유리하게 형성되어 유상증자를 하는 경우에는 이론적으로 새로운 주식회사가 추가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화폐가 한 번만 산업자본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창업자가 투자하는 화폐나 창업자이득을 나누어 가지려고 벤처 캐피탈이 투자하는 화폐만이 산업자본의 운동으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식시장이 예상외로 산업자본 조달의 주요한 원천이 되지 않고 있는 현상의 한 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주식시장이 가장 발달해 있는 미국의 경우에도, 1990년 비은행기업의 주식을 통한 자금조달은 전체 외부자금조달의 2.1%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너무 작은 비중이다. 은행대출은 61.9%이고, 채권을 통한 자금조달은 29.8%였다. (Frederic S. Mishkin, Financial Markets and Institutions, Addison Wesley Longman, 2000, p. 389) 아글리에타(Michel Aglietta, Macroéconomie financière; 전창환 역,『금융제도와 거시경제』, 39쪽)와 헨우드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Doug Henwood, Wall Street: How It Works and for Whom, Verso, 1995; 이주명 역,『월스트리트 누구를 위해 어떻게 움직이나』, 사계절, 1999) 이러한 현상은 흔히 적대적 인수의 위협에 대한 주주들의 반등,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한 주인-대리인 문제, 리스크의 회피 등의 이유로 설명된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주식자본의 운동에 대하여 가치론적인 시각에서 분석을 하였다. 이상의 분석으로부터 주식자본과 실물자본 운동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주식자본의 운동은 실물자본의 운동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서 별도의 자본운동이다. 주식자본의 획득하는 잉여가치의 대부분은 다른 주식자본의 음의 잉여가치에서 충당되는 것이다. 주식자본을 포함하여 상당한 규모의 금융자본이 영합게임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발행시장을 제외하면, 주식자본의 증가가 실물자본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식자본의 크기는 실물자본의 이윤율이나 예상배당률 등에 기초해서도 움직이지만 이자율의 등락이라든지 주식자본의 공급량 등과 같이 실물자본의 현실적인 움직임과 관계가 없는 요인들에 의하여 크게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자본의 운동은 실물자본의 운동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주식자본의 운동이 활발해지면 실물자본의 운동도 활발해진다. 여기에는 창업자이득을 노리는 주식자본의 운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주식자본이 실물자본에 자본을 공급하는 유일한 직접적인 경로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주식자본의 운동이 실물자본의 운동을 주도하고 제어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간접적인 경로가 있다. 이러한 경로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주식자본의 운동은 실물자본의 운동을 제약할 수 있다. 주식자본의 운동은 궁극적으로 실물자본이 벌어들인 잉여가치의 분배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주식자본은 실물자본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재투자하기보다는 분배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금융자본은 실물자본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요구하기 때문에, 금융자본이 실물자본에 비하여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실물자본의 축적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금융자본의 축적은 실물자본의 이윤율저하 경향에 대한 대응방법의 하나이다. 그러나 금융자본과 실물자본을 포함하는 전체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이윤율저하 경향이 오히려 가속화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주식시장의 불안정성 주식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불안정성이다. 로버트 쉴러는 1880년대부터 2000년까지의 주가수익비율을(PER)을 계산하여 <그림 3>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Robert Shiller, op. cit. 여기서 주가수익비율은 <그림 > 주가수익비율, 1881-2000 500지수를 이윤의 10년 이동평균으로 나눈 값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림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4개의 봉우리는 각각 1901년, 1929년, 1966년, 2000년에 해당된다. 거품과 관련하여 케인즈의 세 가지 비유를 음미해 보는 것이 재미있다. 하나는 미인투표 비유이다. 미인투표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진정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투표한다는 것이다. J. M. Keynes, 앞의 책, 154쪽. 이 비유는 주식의 내재가치에서 괴리된 거품의 존재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거품은 인기에 의해서 생긴다. 다음은 20파운드의 미래가치를 가진 주식이 3개월 뒤에 30파운드로 평가될 것이 분명하다면 25파운드에 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이야기이다. 같은 책, 155쪽 여기서는 합리적 거품을 말하고 있다. 이 때 합리성은 다른 사람들이 30파운드에 살 것이라는 믿음에서 생긴다. 마지막 비유는 음악이 끝날 때에는 누군가는 앉을 의자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음악의자놀이(musical chair)의 비유이다. 같은 책, 154쪽. 이것은 거품은 언젠가는 붕괴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거품이 언젠가는 붕괴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더라도 붕괴하기 전까지는 놀이에 참여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폰지 시스템도 개인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거품이 붕괴하기 전에 빠져 나오면 되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유명한 사우스 시(South See) 거품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거품이 한참 일어날 때 몇 주 샀다가 일찍 팔고 나와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자기가 나오고 난 뒤에도 주식이 끝없이 오르자 다시 거액을 들고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큰 손실을 보았다. 그는 “물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미친 사람들의 움직임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거품이 급속하게 꺼지면 주가가 폭락하면서 다른 금융시장으로 확대되어 금융위기가 일어난다. 이 때 금융위기란 금융자산의 가격이 전체적으로 폭락하면서 경제활동이 급격하게 위축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폭락은 흔히 불확실성,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한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 M. Aglietta, Macroéconomie financière; 전창환 역,『금융제도와 거시경제』, 121쪽 이하. 집단행동 등으로 설명이 되는데, 기본적으로는 거품이 형성되는 메커니즘과 동일한 힘들이 반대 방향으로 급격하게 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위기가 일어나면 주식가격은 종종 내재가치 이하로까지 하락하게 된다. 주식시장의 이러한 불안정성은 일반적으로 금융취약성(financial fragility)의 원천이 된다. 아글리에타는 이러한 특성을 시스템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총괄하고 있다. “시스템 리스크는 경제 주체들이 지각하는 리스크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 다변화에 의한 리스크의 더 나은 배분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경제상태가 발생할 가능성” 같은 책, 120쪽. 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개별주체들에게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행동이 모든 주체들이 동일한 행동을 함으로써 체계 전체의 위험이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취약성은 금융시장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정보비대칭성의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다. François Chesnais, eds., La Mondialisation financière―Genèse, Coût et Enjeux, La Découverte & Syros, 1996; 서익진 역,『금융의 세계화』, 한울, 2002, 295-296쪽. 쉐네는 금융취약성의 원천으로서 금융의 자유화, 세계화, 탈규제화 등을 들고 있다. 같은 책, 301-307쪽. 민스키(H. P. Minsky)는 이러한 불안정성이 금융시장 일반이 갖는 유동성과 일반성의 추구로 인해서 발생한다는 좀더 일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조복현,『현대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 새날, 1997. 주식시장을 통한 조절 주식시장은 이러한 기능들을 통하여 축적체제를 조절하게 된다. 자산평가 기능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주식자산의 가치는 주가에 의해서 끊임없는 변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된 가치가 아니라 계산상의 변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주가가 올라 수익이 발생해서 그것을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판매하려는 순간 가격이 하락하여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산평가에 의해서 개인과 기업의 행동이 변하게 되는 것을 자산평가효과(asset valuation effect)라고 불러보자. 이러한 자산평가효과는 개인들의 소비와 저축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금융화가 진전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주식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산평가효과에 의하여 개인들의 부는 끊임없이 변동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산평가액이 증가하면 사람들의 소비가 늘어난다. 기업의 경우에는 자산평가효과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주가가 떨어지면 유상증자를 통하여 자기자본조달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순자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마저 어려워진다. 무엇보다도 낮은 주가는 적대적 인수합병의 가능성을 높여서 주주들의 경영권을 위협하게 된다. 라조닉 William Lazonick/Mary O'Sullivan, "Maximizing shareholder value: a new ideology for corporate governance," Economy and Society, Vol. 29, No. 1, Feb. 2000. 등은 주식시장 규범이 법인기업으로 하여금 70년대까지의 유보하고 재투자(retain and reinvest)하는 전략을 버리고 규모축소하고 배당(downsize and distribute)하는 전략을 채택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이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프라우드 등은 Julie Froud, Colin Haslam, Sukhdev Johal & Karel Williams, "Shareholder value and financialization: consultancy promises, management moves," Economy and Society, Vol. 29, No. 1, Feb. 2000. 기관투자가들이 산업분야와 관계없이 모든 기업에게 과도한 사용자본수익률(return on capital employed)을 무차별하게 요구함으로써 합병, 분사, 규모축소 등 온갖 형태의 구조조정과 자사주 매입과 같은 전략의 채택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본시장이 요구하는 것과 생산물시장이 허용하는 것 사이의 모순이 증대한다. 이병천 이병천, 앞의 글. 은 주식시장을 통한 조절의 결과 다음의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요약하고 있다. 금융불안정성의 증가, 근시안적인 단기주의, 배제적인 임노동관계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업의 수익성을 즉각적으로 극대화시키는 전략이 선택된다. 대표적인 것이 흔히 구조조정이라고 불리는 규모감축(downsizing)과 외부발주(out-sourcing)이다. 이러한 행위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가치가 손상될 수도 있지만, 단기적인 수익성을 높이는 데에는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매출은 그대로인 채로 인건비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주식시장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노동조합이 구조조정에 반대하면, 그 기업의 주가를 떨어뜨림으로써 노동자나 소비자들의 태도를 길들이게 된다. 정보혁명과의 상호작용 주식자본의 운동이 정보혁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축적체제에 끼친 긍정적인 효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벤처자본(venture capital)의 투자를 통하여 벤처기업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정보혁명에서는 제품혁신과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기 위한 경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벤처기업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주식자본이 발달하고 나스닥과 같은 형태로 주식시장을 새롭게 제도화함으로 벤처기업은 자신의 미래가치를 주식시장에서 사전실현하고 창업자이득을 벤처자본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 용이하게 되었다. 축적체제의 호순환 조건 중에서 중요한 조건인 투자의 활성화가 이와 같이 충족될 수 있게 되었다. 정보혁명은 주식시장을 포함하는 금융시장의 발달에 기술적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주식시장은 거래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져야지만 활성화될 수 있다. 주식거래비용이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 크다면 주식시장은 확대될 수 없다. 정보혁명은 이러한 거래비용을 상당한 수준으로 낮추었다. 또한 주식시장은 주식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게 주어져야 활성화될 수 있다. 기업에 대한 정보가 풍부할수록 주식거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정보혁명은 풍부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여 주식시장을 활성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파생상품과 기초상품, 혹은 하나의 파생상품과 다른 파생상품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실시간으로 계산하여 제공함으로써 파생상품 거래에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주식시장은 정보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토대가 되었다. 광고 형태가 아니라 직접 유료 판매되는 형태로 가장 먼저 상품화된 정보는 주식시장에 관한 정보였다. 한국은행에서 값이 비싸서 IMF 이후에 비로소 도입하였다고 하는 블룸버그 단말기(Bloomberg terminal)가 좋은 예이다. 이 단말기를 통해서 한국에 곧 외환위기가 닥칠 것이 확실하다는 보도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주식시장에서는 남보다 조금 빨리 정보를 수집하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므로, 주식시장 참여자들은 신뢰성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있다. 신용평가도 금융상품에 대한 정보를 판매하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주식시장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주가지수도 상품화에 성공하였다. 다우존스(Dow Jones) 회사는 다우존스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파생상품이 등장하고 나서 다우존스 지수를 유료화하였다. 지대와 독점을 추구하는 경향도 주식시장의 발달에 의해 촉진된다. 벤처기업이 특허나 저작권 같은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있으면 더 쉽게 벤처자본의 투자를 확보할 수 있고, 주식시장에서 재빨리 창업자이득을 실현할 수 있다. 가입자의 수로 대표되는 네트워크 지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가입자가 많은 기업의 주가는 당장 수익이 없더라도 쉽게 상승할 수 있다. M&A를 하면 독점이 강화되어 수익이 올라갈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주가가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독점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 또한 주식시장은 규모감축과 같은 구조조정을 반기는데, 이것은 노동자를 축출하는 배제적 축적체제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한다. 세계화의 필연성 배제적 축적체제의 한계 신자유주의와 상품화 경향 정보상품과 상품화 경향 상품화 경향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화 경향이 주요한 경향으로 나타난다. 상품화 경향은 비상품이었던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상품화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토지나 노동력과 같이 사회의 혁명을 필요로 할 수도 있다. 상품화 과정은 인간에게 먼 것에서부터 인간에게 점점 가까운 것으로 진행되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정보상품의 특징 정보상품은 생산측면과 소비측면에서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생산측면에서는 외부효과와 규모수익체증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소비측면에서는 비배제성, 비경합성, 불투명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품화 비용 상품화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향이지만,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품화 경향은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하여야 한다. 이러한 장애들을 극복하고 비상품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을 상품화 비용(cost of commoditification)이라고 불러보자. 상품화 비용으로서는 먼저 그러한 사용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비자에게 알리는 비용과 그러한 사용가치를 소비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내는 비용. 이 두 가지 활동은 경영학에서 흔히 마케팅이라는 활동으로 불리우는 범주에 속하는 것인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광고라고 할 수 있다.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제3절에서 살펴본 특징들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비용이 상품화 비용에 포함되게 된다. 첫째, 돈을 지불하지 않는 소비자를 차단(lock-out)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이것은 정보상품의 배제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비용이다. 어떤 소비자가 구매할 의사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공짜로 접근할 방법이 있다면 돈을 지불하면서 구매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람을 차단하는 것은 상품화 과정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배제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기술적 방법, 법률적 방법, 도덕적 방법, 영업방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 방법으로는 흔히 암호, 복사방지, 디지털 워터마킹(watermarking) 등의 방법이 사용된다. 법률적인 방법으로서는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을 설정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직접 불법복제 여부를 조사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도덕적인 방법으로서는 소프트웨어나 콘텐츠를 돈을 내고 사서 쓰도록 권장하는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불법복제된 소프트웨어에 대하여 해적판이라는 등의 격렬한 용어를 씀으로써 죄의식을 심어주어 정품구매를 유도하려는 것도 도덕적인 차단 방법의 하나이다. 본질적으로 강도에 해당하는 해적질과 소유자의 동의를 얻어 나누어 쓰는 불법복제 행위는 죄질이 너무나도 다른 범죄이다. 영업방법의 경우에는 필수적인 보완품을 통제하는 방법이나, 응용프로그램을 돈을 받고 인터넷 상에서만 서비스를 하는 방법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소비의 경합성을 높이는 데 들어가는 비용.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비경합적인 소비는 배제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생산자에게 매우 유리한 규모수익체증의 비용구조를 낳을 수 있다. 이 때에는 비경합성이 단기적으로 상품화를 촉진하는 측면도 있다. 상품화에 성공하면 추가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많은 수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자연독점(natural monopoly) 시장이 될 수도 있고, 모방이 용이할 경우에는 독점적 수익을 노리고 경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시장형성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경합성은 비배제성과 함께 나타난다. 접속할 때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게 한다든지, 이메일 주소를 요구하는 것 등은 경합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배제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경합성도 함께 높인다. 셋째, 상품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 정보상품은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서 구매욕구를 만들어 내는 데까지 들어가는 비용도 커지게 된다. 경험재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많은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자기들의 상품을 쉐어웨어(shareware) 형태로 제공한다든지, 무료버전과 유료버전을 함께 제공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넷째, 재산권을 설정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어떤 물건이 만들어졌을 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가 확정되어야 매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산권을 설정하는 행위는 상품화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절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상품의 경우에는 만들기만 하면 누구의 재산인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재산권을 설정하는 절차가 불필요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정보상품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 때문에 재산권을 설정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게 된다. 재산권을 설정하는 문제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느 범위까지, 그리고 누구에게 재산권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범위까지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도덕적이거나 관습적인 제약을 극복하는 문제가 포함된다. 정보상품을 돈을 받고 판매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도덕적, 관습적 제약이 존재하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상품으로 만드는 데에도 아직까지 강력한 저항이 존재하고 있다. 리눅스(linux) 등과 같은 카피레프트(copyleft), 오픈소스(open source) 운동을 생각해 보면 좋다. 특허 제도 초기에는 모방이야말로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인 추진력을 주기 때문에 특허제도가 없어야 한다는 반특허이론이 강력하게 제기된 적이 있다. 송영식/이상정/황종환, 앞의 책, 58-59쪽. 그리고 아직까지 인간에 대한 치료방법은 특허로 인정되고 있지 않다. 생명을 담보로 돈을 버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약품은 이미 물질특허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일부 나라에서 동물에 대한 치료방법의 발명도 특허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같은 책, 187쪽. 또한 소유권의 정당성 여부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만들어진 특이생물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예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신이 창조한 수만 개의 유전자 중 한두 개만 바꾸어서 그 생물 전체를 자기의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단순하게 유전자의 수로만 따져 보아도 인간의 기여분은 무한소에 가깝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소유권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유전자에 관한 정보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산권이 부여되지 않을 전망이다. 누구에게 재산권을 인정하는가를 결정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정보상품은 생산 측면에서도 외부효과가 매우 크다. 정보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는 여러 관계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에서 행해진 발명의 경우 해당 부서의 회사원에게 재산권을 부여할 것인지 법인에게 부여할 것인지의 문제라든가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원주민들이 약초로 쓰던 식물에서 추출한 약품의 경우 원주민에게 재산권을 부여할 것인지 제약회사에 부여할 것인지 등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좋다. 재산권을 설정하는 비용은 재산권을 부여하는 국제적, 국내적 제도를 만듦으로써 절약될 수 있다. 특허청이나 지적 재산권에 관한 WTO 협약(TRIPs) 같은 것들이 없었다면 저작권이나 특허가 국제적으로 상품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높은 상품화 비용으로 인해서 제도가 먼저 마련되지 않고서는 아예 시장 자체의 형성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제도들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상품화 비용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신자유주의의 모순 자본과 시장 사이의 관계 자본주의를 시장경제와 동일시하는 견해: 자기조정적 시장. 자기 완결적 시장. 시초축적 시장, 국가, 법률, 기술(code) 공유지 자유의 의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읽기위해 퍼나른다. 3(진보네트워크 세미나)

  • 등록일
    2005/04/28 17:49
  • 수정일
    2005/04/28 17:49
진보네트워크 세미나 *** 강사 : 한신대 강남훈 교수 제1강: 정보혁명 의의와 노동가치론 (3월 27일) 제2강: 상품화경향과 비생산적 노동 (4월 3일) 제3강: 배제적 축적체제 (4월 10일) 제4강: 신경제, 지식기반경제와 세계화된 경제 (4월 17일) 제1강 정보혁명의 의의와 노동가치론 가.정보혁명의 의의 산업혁명과 정보혁명: 카스텔의 규정. 제1차 산업혁명, 제2차 산업혁명, 지식과 정보가 중심적이라는 것이 특징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수단으로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특징이다. 포드주의 대량생산방법. conveyor belt. 산업혁명의 요소: 기계, 동력 기계의 3요소: 동력기, 전달기, 작업기. 작업기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 기계 도입의 경제적 효과: ① 노동시간 연장 ② 노동강도 강화 ③ 숙련 해체, 숙련노동 축출, 비숙련노동 고용(여성, 아동 등) 배비지의 원리(Babbage principle): 분업의 경제적 동기 정보혁명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나.정보혁명의 두 가지 요소 (1)디지털 정보혁명이 도래하면서 모든 것들이 디지털화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컴퓨터,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 TV, 디지털 라디오 등 디지털 제품들이 계속 출현하고 있고, 경제와 사회도 디지털화 되어 디지털 경제, 디지털 사회로 되었으며, 마침내 디지털 존재까지 등장하게 되었다.(Nicholas Negroponte, 1996) 네그로폰테의 책 ꡔ디지털이다ꡕ의 영어 제목은 "Being Digital"이다. 인간(human being)이 디지털로 되고 있다(being digital)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물질폐기론(George Gilder, 1990) 등과 같이 다소 신비스럽고 기술학적인 측면에 치우친 주장들까지 제시되고 있다. 네그로폰테는 아날로그 원자인 아톰(atom)과 디지털 원자인 비트(bit)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트는 색깔도, 무게도 없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 그것은 정보의 DNA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원자적 요소이다."(Nicholas Negroponte, 1996: 15) 디지털이란 정보를 비트의 묶음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비트란 0 아니면 1의 값을 갖는 단위를 말한다. 원래 아날로그(analog)가 전압이나 전류처럼 연속적으로 변하는 양을 의미하는 말이라면 디지털(digital)이란 손가락이나 발가락의 수처럼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양을 의미한다. 하나의 비트는 0 아니면 1 두 가지 값뿐이지만, 비트를 묶으면 모든 수를 비트로 표시할 수 있다. 자연수는 10진수를 2진수로 바꾸고, 필요한 만큼 비트를 묶어서 표현하면 된다. 예를 들어 5라는 숫자는 비트 세 개를 묶어서 101로 표현할 수 있다. 음수는 묶음의 제일 앞에 오는 비트를 부호를 나타내는 비트라고 약속하면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소수의 경우에는 원하는 만큼의 정확도를 가지도록 소수점 이하 자리수를 나타내는 비트를 필요한 만큼 묶어서 근사치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생활하는 세계에서는 숫자가 아닌 정보들이 압도적이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숫자 형태로 주어지는 정보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아날로그 형태로 주어진 정보이다. 우리가 디지털화 한다고 하는 것은 아날로그 형태로 주어진 정보를 디지털형태로 변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냄새든 감정이든 인격이든 모든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디지털 형태로 주어지지 않은 정보를 디지털화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보가 디지털로 표현되는 과정에 대한 예를 몇 가지 들어 보면 분명해진다. 우선 문자를 생각해 보자. 문자를 디지털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어떻게 디지털로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ㄱ’을 ‘001’로, ‘ㅏ’를 ‘101’로 표현하기로 약속하였다면 ‘가’는 ‘001101’로 표현하면 될 것이다. 음악의 경우에도 도를 ‘001’로 표현하고 레는 ‘010’으로 표현한다는 식의 약속이 이미 존재하여야 한다. 그림의 경우에도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같은 원리이다. 흑백 그림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림을 가로 1000줄, 세로 800줄의 모눈종이에 놓는다. 제일 왼쪽 위 모눈부터 오른쪽으로 가면서 그 부분의 색깔이 흰색이면 ‘0’으로 표현하고 검은색이면 ‘1’로 표현하기로 약속한다면 그림을 디지털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모두 1000×800개의 비트가 필요하게 된다. 만약 그림을 정밀하게 표현하고 싶으면 더 촘촘한 모눈종이를 사용하고 더 많은 비트를 모으면 된다. 다음으로 ‘ㄱ’도 ‘001’로 표현하고 ‘도’도 ‘001’로 표현하기로 약속하였다면 ‘001’이라는 정보가 전달되었을 때 그것이 ‘ㄱ’ 인지 ‘도’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음에 올 비트가 문자인지 음악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비트를 앞에 덧붙이는 방법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트 두 개를 덧붙여서 문자의 경우에는 ‘00’로 표현하고 음악의 경우에는 ‘01’로 표현하기로 약속한다면 ‘00001’은 ‘ㄱ’이고, ‘01001’은 ‘도’가 될 것이다. 네그로폰테는 이와 같이 앞에 덧붙여져서 다음에 오는 비트를 설명해주는 비트를 비트의 비트라고 불렀다.(Nicholas Negroponte, 1996: 19) 그러면 이와 같은 디지털 형태의 정보는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로 동일한 내용의 정보를 저장하는 크기가 줄어든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날로그 형태로는 백과사전 30권에 들어갈 내용이 디지털 형태로는 CD 한 장에 저장된다. 이러한 일은 약속에 기초해서 디지털화한 숫자만을 저장하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둘째로 디지털 형태의 자료는 자연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물질에 저장될 수 있고 거의 모든 물질을 통하여 전달될 수 있다. 이것은 디지털화된 자료는 0과 1만으로 표현되므로, 어떤 물질이 그것을 저장하거나 전달할 수 있으려면 인간이 그 물질의 두 가지 상태를 구별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공관이나 반도체뿐만 아니라 자석, 단백질, 탄소, 양자까지도 모두 저장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전화선뿐만 아니라 전기선, 전파, 케이블, 공기, 빛까지도 모두 전달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 에 모든 사물을 포괄 ·귀속시키는 음양설에 따르면 만물에는 두 가지 상태가 있으므로, 디지털 데이터를 저장하고 전송할 수 있다. 셋째로 디지털 형태의 자료는 혼합되고 압축되며, 암호화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비트의 비트를 잘 설정해 주면 문자자료와 음악 자료는 서로 혼합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것을 네그로폰테와 같이 혼합비트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Nicholas Negroponte, 1996: 19) 흔히 말하는 멀티미디어란 오디오, 비디오, 텍스트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자료가 혼합비트에 의해서 혼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혼합뿐만 아니라 자료를 압축하는 것도 압축비트를 설정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압축비트를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약속, 즉 압축알고리즘이 필요할 것이다. 혼합하고 압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암호화 하는 것도 암호비트를 설정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들은 함께 사용된다. 아날로그 형식으로는 수십 명의 목소리를 하나의 전화선으로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디지털 형식으로는 압축하고, 암호화하고, 혼합함으로써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이다. 넷째로, 디지털 자료는 컴퓨터에 의해서 처리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일초에 수십억 번의 연산을 할 수 있다. 컴퓨터는 정보를 검색하는 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정보가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그것을 제때에 검색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결국 디지털화 한다는 것은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으로 컴퓨터가 바로 이렇게 엄청난 성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디지털 형식으로 자료를 처리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 컴퓨터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는 부울(George Boole)의 부울 대수학(Boolean algibra)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George Boole, The 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 Being an Essay Towards a Calculus of Deductive Reasoning, 1847.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것이 1947년이니까 발상의 전환 이후 100년이 걸린 셈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정리하여 보자. 디지털이라는 것은 정보를 0과 1의 비트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현상에 관한 정보는 디지털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디지털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완벽하게 변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변환하면 된다. 이와 같이 디지털화 한다는 것은 정보를 0과 1만을 사용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만큼 근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할 뿐 무슨 신비스러운 마술이 아니다. 아톰과 대립되는 비트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톰에 관한 정보를 비트로 필요한 만큼 근사적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디지털 형태로 변환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변환하겠다는 약속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약속은 흔히 표준(standard)이라고 불리고 형식(format)이라고도 불린다. 표준이나 형식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도 있고 제도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표준이나 형식이 존재해야지만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디지털이라는 기술의 근저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술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변하기 위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먼저 변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디지털이라는 기술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은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을 추가함으로써, 예를 들어 혼합비트, 압축비트, 암호비트 등 비트의 비트를 계속 덧붙임으로써,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2)네트워크 정보혁명의 두 번째 요소는 네트워크(network)이다. 네트워크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넓은 의미에서는 정보사용자(발신자 및 수신자)와 정보전달체계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좁은 의미에서는 정보전달체계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리눅스 사용자들의 네트워크’라고 할 때에는 전자의 의미에 가깝고, ‘방송망’, ‘통신망’ 등이라고 할 때에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다. 정보전달체계는 정보를 전달하는 경로(channel, link)와 노드(node, switch) 및 그 작용에 대한 통제(control)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드는 경로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한 장치이다. 네트워크는 전화나 팩스와 같이 아날로그 네트워크일 수도 있고, 인터넷과 같이 디지털 네트워크일 수도 있다. 또한 방송처럼 정보의 흐름이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단방향 네트워크도 있고 인터넷이나 전화처럼 양쪽으로 흐르는 쌍방향 네트워크도 있다. 이 글에서 네트워크라고 할 때에는 주로 쌍방향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쌍방향 네트워크에서는 정보의 공급자(생산자)가 정보의 수요자(소비자)가 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은 전 세계 컴퓨터들을 연결하는 디지털 쌍방향 네트워크이다. 인터넷은 컴퓨터들의 네트워크이다. 그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네트워크이다. 그것은 디지털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를 광섬유로 연결한 것이므로, 1초에 수십억 번의 연산을 하고 빛에 가까운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진정한 쌍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컴퓨터가 정보의 제공자이면서 정보의 사용자이고, 정보의 생산자이면서 정보의 소비자가 된다. 네트워크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보전달에 관한 약속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모스 부호와 같이 신호의 의미를 미리 정해둔다든지, 자기의 말이 끝나면 ‘오버’ 등의 말을 끝에 덧붙여 자기 말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등의 약속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들 사이의 통신에 관한 약속을 일반적으로 통신규약(protocol)이라고 부른다. 인터넷은 TCP/IP(Transmission Control Protocol/Internet Protocol)라는 프로토콜에 입각해서 전 세계의 컴퓨터들을 연결한 네트워크로 정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보혁명의 두 번째 요소인 네트워크의 경우에서도 그 기술의 근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네트워크에서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 혹은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y)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재화의 가치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에 의존할 때” 발생하는 효과로 정의된다.(Hal R. Varian, 2000: 143) 이메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이메일의 가치가 늘어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서술 중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앞뒤 맥락으로 보아 소비자에 대한 가치, 혹은 소비자가 느끼는 가치를 말하는 것이므로 정치경제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에 해당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네트워크효과를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네트워크의 사용가치가 증가하는 효과”로 정의하려고 한다. 네트워크효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효과가 합해져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콘텐츠효과(contents effect)가 있다. 콘텐츠효과란 접속자가 늘어나면 정보의 양과 질이 늘어남으로써 사용가치가 커지는 효과이다. 전화 같은 네트워크를 예로 들어 보면 정보를 얻기 위하여 전화를 거는 사람은 통화 중에 저절로 상대방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물물교환에서 물건의 공급자가 바로 수요자가 되는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수요가 스스로 공급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콘텐츠 효과는 생산소비자(prosumer) 효과라고도 부를 수 있다. 생산소비자(prosumer)란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서 앨빈토플러(Alvin Toffler, 1980)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네트워크에 한 명의 접속자가 늘어나면 정보소비자뿐만 아니라 정보생산자가 한 명 늘어나므로 콘텐츠도 그만큼 늘어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효과는 대략 접속자의 수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접속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의사소통 경로가 늘어나서 네트워크의 사용가치가 커지는 효과가 있다. 이것을 경로효과(channel effect)라고 불러 보자. n명의 접속자 사이에 전달자를 사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의사소통 경로는 개를 만들 수 있으므로, 접속자의 수가 커질 때 경로효과를 통한 사용가치는 접속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네트워크의 가치는 접속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멧칼페(Metcalfe)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멧칼페의 법칙은 바로 이러한 경로효과를 고려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멧칼페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네트워크의 가치가 한 사용자가 접속할 수 있는 다른 사용자의 수에 비례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n 명의 접속자가 있는 네트워크에서 한 사용자가 느끼는 가치는 n 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네트워크에는 모두 n명의 접속자가 존재하므로 네트워크 전체의 가치는 n2 이 된다. 셋째는 네트워크 내에서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사용가치가 증가하는 공동체효과(community effect)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공동체는 접속자들에게 사용가치를 제공해 준다. 단 2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두 번째의 직접적인 경로효과와 동일하다. 그러나 공동체는 3사람, 4사람 등과 같이 여러 사람 사이에서도 형성할 수 있으므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n명의 접속자가 있는 네트워크에서 형성할 수 있는 공동체의 총 수는 대략 이 된다. 이 공동체 효과는 0개에서 n-1 개까지의 전달자를 사용한 간접적인 경로효과와 같은 개념이 된다. 이와 같이 공동체 효과, 즉 간접적인 경로효과로 인한 사용가치는 최대한으로 접속자의 지수배로 증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효과는 단순한 가정 하에서 설명한 것이다. 콘텐츠의 경우에는 너무 많아지면 검색하고 선별하는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사용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경로효과를 생각하여 보면 일반적으로 어떤 소비자가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과 의사소통 경로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효과의 경우에도 개별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30명으로 구성된 공동체와 31명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설명은 다분히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위와 같은 세 가지 효과가 모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한 네트워크의 사용가치는 접속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상당히 빠르게 증가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정보혁명은 시작부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약속을 추가하거나 변경함으로써 계속해서 추가적인 기술혁신이 창조될 가능성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약속을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사용가치의 증가를 누가 향유하고, 누가 이익을 누릴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첨예한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이 디지털과 네트워크라는 정보혁명의 두 가지 요소는 인간 관계에서 출현한 것일 뿐 거기에는 한 점의 신비스러움도 없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 어떨까? “비트는 냄새도 색깔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트로부터 냄새를 맡고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 사람들이 냄새를 맡고 색깔을 구별하는 방법에 관하여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보혁명의 창세기는 “태초에 약속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정보상품과 노동가치론: 두 가지 문제 (1)정보상품의 교환 정보상품에 대하여 더 이상 노동가치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비단 주류경제학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해리스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노동자가 생산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정보가 점점 중요해지고 노동의 비중이 점점 작아진다면, 궁극적으로 노동가치론은 정보가치론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Jerry Harris, 1995) 과거에도 노동이 전혀 투입되지 않은 상품의 가치를 노동가치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이다. 당연하게 이런 상품의 가치는 노동가치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노동가치론의 설명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피카소의 그림이라든지 희귀한 다이아몬드 같은 것들을 노동가치론으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한 상품은 예외적이었으며, 자본에 의해서 생산되거나 재생산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혁명이 도래하면서 상황이 달라져 보인다. 특히 일부의 정보상품은 자본에 의하여 생산되고, 재생산되면서도 노동이 전혀 투입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제2장에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정보상품 중에서는 첫 단위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다음 단위부터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주류경제학의 용어를 빌리면, 고정비용은 매우 크고, 한계비용은 0에 가까운 상품을 말한다. 소프트웨어라든지 CD에 담겨진 음악이라든지 DVD에 담겨진 영화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디지털화된 정보상품는 거의 모두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상품에 대해서는 노동가치론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정보상품을 추가로 생산하는 데 아무런 노동도 들지 않는데, 어떻게 노동가치론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류동민, 2000) 그러나 이러한 경우보다 더욱 역설적인 경우가 있다. 정보상품의 경우에는 사용가치가 투하노동에 반비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프트웨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흔히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에는 가격차별을 하기 위하여 전문가용, 일반용, 학생용 등과 같이 기본적인 기능은 갖고 고급 기능에서만 차이가 나는 몇 가지 종류를 함께 개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에는 가장 고급의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먼저 개발하고 나서 추가적으로 노동을 투입하여 기능이 낮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있는 기능을 삭제하는 것이 없는 기능을 추가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노동이 더 많이 투하된 제품이 사용가치가 더 낮고, 따라서 가격도 더 싸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도 상품의 교환이 가치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는 노동가치론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먼저 투하노동이 0인 경우, 즉 한계비용이 0인 경우를 생각하여 보자. 이 경우에는 주류경제학에 따르더라도 가격이 0이 된다. 경쟁시장에서는 한계생산비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가치가 0인 상품의 가격이 0이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실제로 경쟁시장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지면 정보상품의 가격이 매우 낮아지는 현상은 종종 나타나고 있다. 흔히 인용되는 사례로서는 전화번호부 CD라든지 백과사전 CD의 예를 들 수 있다.(Hal R. Varian, 2000) 그리고 노동가치론에서 상품의 가치는 과거에 투하된 노동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투하되는 노동량,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 재생산을 하기 위해서 투하되는 노동량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데 유의하여야 한다. 한계비용이라는 것은 단기적인 재생산비용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재생산비용이 0인 상품의 가격이 경쟁시장에서 0에 가까워지는 것을 가치법칙에서 어긋난다고 보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노동가치가 0인 상품이 많아진다는 것은 노동가치론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품의 가격이 0으로 되는 것은 단기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가격이 0인 상태가 장기간 계속된다면 그 정보상품은 정상적으로 재생산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자본이 그 분야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법칙은 재생산비용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가치대로 판매되면 그 상품이 정상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치법칙대로 판매되는데도 정상적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이 문제는 정보상품의 단위 개념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와 같은 정보상품은 상당히 많은 개발비를 들여서 하나의 버전(version)을 생산한다. 상당한 노동이 투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한 한 버전의 여러 카피(copy)를 판매하는 것이다. 개발비를 제대로 회수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한 카피의 가격이 얼마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카피의 가격에 판매량을 곱한 값이 얼마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렇게 분석해 보면, 정보상품은 카피가 단위가 아니라 버전을 단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상품의 단위는 카피가 아니라 버전이다. 정보상품의 가치는 한 카피가 아니라 한 버전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다. 하나의 버전의 가치가 여러 카피에 나누어서 실현되는 것이다. 정보상품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한 카피당 가격과 더불어 카피의 판매량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수요자가 작은 특용소프트웨어의 경우 값이 비싸고 수요자가 많은 범용소프트웨어의 경우 값이 싼 것도 가치법칙 발현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버전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그 정보상품은 정상적으로 재생산될 것이다. 이와 같이 버전을 단위로 보면 가치법칙을 정보상품에 적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물론 버전의 가치도 새 버전이 나올 때에는 그 가치가 저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기본적인 파일 형식을 유지한 채 새 버전을 만드는 경우에는 그러한 파일 형식을 가진 버전을 처음으로 만들 때보다 개발비가 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장기적으로도 수확체증 현상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0으로까지 저하하는 것은 아니다. 백과사전과 같은 경우에 추가되는 콘텐츠가 별로 없다면 새 버전의 가치는 0에 가까워질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자료에 약간의 자료를 추가하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가치 측면에서의 특성이 백과사전으로 하여금 상품으로 존재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과사전의 경우에도 파일형식을 달리한다든지, 멀티미디어를 삽입한다든지, 새로운 검색 기능을 추가한다든지, 웹 서비스와 연동시킴으로써 계속해서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 버전을 만드는 한계비용은 같은 버전 한 카피를 만드는 한계비용보다는 훨씬 클 것이다. 그리고 파일형식이 달라진다든지 새로운 표준이 도입되는 경우에는 새 버전을 만드는 데 투하되는 노동량이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다. 파일형식이나 새로운 표준이 도입될 경우에는 매우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도스(Dos)에서 윈도(Windows)로 전환될 때에나 글에서 워디안, 혹은 한글2002로 전환될 때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좋다. 어떤 경우이든 일반적인 상품의 수확체증이나 수확체감 현상에 대하여 가치법칙을 적용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가치법칙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2)정보상품의 이윤 써로는 노동가치론은 노동이 가장 중요했던 시대에 타당한 이론이기 때문에 지식이 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Lester Thurow, 1999). 이러한 주장은 써로뿐만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지식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자원이다. 전통적인 생산요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Peter Drucker, 1993) “불확실한 경제에서 항구적인 경쟁 우위의 유일하게 확실한 원천은 지식이다.”(Nonaka, 1991)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빌 게이츠(Bill Gates)가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된 것은 노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부의 원천이라는 말은 애매한 말이다. 지식도 노동의 한 속성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상품의 부가가치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선의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같은 말이지만, 상품의 판매가격 중에서 인건비를 포함한 제조비용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을 가리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유럽시장에서 30불에 판매되는 배낭은 베트남에서의 제조원가는 불과 1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뿐만 아니라 자본투입량도 감소하고 있다. 미국회사들의 경우 25년 전에 비하여 1달러 판매를 위하여 필요한 유형자산(tangible asset)이 20%나 감소하였다고 한다.(Alan Burton-Jones, 1999) 노동가치론이 정보상품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들을 제대로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 동안 가치론 논쟁의 결론과 같이 노동가치론을 잉여가치에 의해서 이윤을 설명하려는 이론으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정보상품의 이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문제의 핵심은 노동가치와 관계없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보상품의 막대한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있다. 노동가치론에서는 가치를 초과하는 초과이윤의 원천으로서 세 가지 요소를 들 수 있다. 첫 번째 요소가 특별잉여가치이고, 두 번째 요소가 지대이며, 세 번째 요소가 독점이윤이다. 여기서는 세 번째 요소부터 분석하여 보자. 주류경제학에서도 정보상품에서 이윤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독점가격설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한계비용과 가격이 일치하는 경쟁가격 수준에서는 정보상품의 이윤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상품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지역별, 소비자별, 단위별, 버전별 가격차별(price discrimination), 끼워팔기(tying)와 묶어팔기(bundling) 끼워팔기와 묶어팔기의 차이는 함께 판매되는 물건이 별도로도 판매되느냐의 여부에 있다. 소비자가 별도로 구매할 수 있으면 묶어팔기이고, 싫어도 함께 살 수밖에 없으면 끼워팔기이다. 일반적으로 묶어팔기는 합법적인 판매행위이지만, 끼워팔기는 불법적인 판매행위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브라우저(browser)인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를 불법적으로 끼워팔았다는 판결을 받았다. , 보완품과 광고의 판매, 생존가격설정(survival pricing)과 약탈가격설정(predatory pricing) 생존가격설정과 약탈가격설정은 둘 다 가격을 인하하는 점에서는 공통이지만,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느냐 아니면 남을 축출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느냐의 차이가 있다. 등의 방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Shapiro, Carl/Hal R. Varian, 1998) 일부의 주류경제학자들이 전통적인 반독점법이 정보산업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가 여기에 있다.(Stan Liebowitz/Stephen Margolis, 1999) 이와 같이 주류경제학에서는 정보상품이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독점가격설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노동가치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점가격이 아니더라도 정보상품의 재생산을 보장할 수 있다. 앞 절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품의 단위를 카피가 아니라 버전으로 파악할 경우에는 가치대로 판매하더라도 정보상품의 재생산을 얼마든지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주류경제학에서는 정보상품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무차별하게 독점이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독점이윤이란 “생산물의 가격이 생산가격이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매자의 구매욕과 지불능력에 의해 결정되는”부분을 가리킨다.(K. Marx, 1894: p.953) 이 부분은 가치가 생산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자본이나 소비자들로부터 가치가 이전되는 부분을 말한다. 모든 이윤을 독점이윤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정보혁명으로 인하여 경제 전체에서 이윤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독점이윤이란 한 부분의 잉여가치가 다른 부분으로 이전되어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혁명이란 다른 부분의 잉여를 재분배하고 수탈하는 것에 불과한 기생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노동가치론에서는 정보상품의 가격과 가치 사이에 독점이윤이라는 성분뿐만 아니라 다른 성질의 가격 성분들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대와 특별잉여가치이다. 이 장에서 지대라고 하는 것은 차액지대를 의미한다. 절대지대는 자본주의적 토지소유 자체에서 발생하는 지대이므로 토지소유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정보상품의 경우에 절대지대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특별잉여가치와 지대는 모두 개별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여기서는 가치와 생산가격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추상수준에서 논의하고 있다. 생산가격의 개념을 도입한다면, 지대란 개별비용가격과 일반비용가격의 차이(K. Marx, 1894: 793-794)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는 “초과이윤의 원인이 자본 그것--자본사용량의 차이든 자본의 보다 능률적인 사용이든--에 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생산분야의 모든 자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투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K. Marx, 1894: 796) 반대로 지대의 경우에는 초과이윤의 원천이 “기계나 석탄 등등과 같이 노동이 생산할 수 있는 생산물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토지의 특정한 자연조건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K. Marx, 1894: 797) 물론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도 자연력을 이용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증기기관을 처음 도입한 자본의 경우 증기력이라는 자연력을 이용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K. Marx, 1894: 797). 그러나 이 때의 자연력은 동일한 생산분야의 모든 자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이다. 지대의 경우에는 자연력의 독점에서 발생한다. 이와 같이 개별 자본이 가진 우월한 생산성의 원천이 자본 자체(노동력을 포함하여)에 있느냐 자본 바깥에 있느냐에 따라서 특별잉여가치와 지대를 구분할 수 있는 것다. 독점과 달리, 특별잉여가치와 지대는 모두 가치법칙에 따라서 교환이 된다.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는 다른 자본이 아직 그만한 생산력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가 저하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지대의 경우에는 다른 자본이 그만큼 유리한 생산조건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가 개별가치 수준으로 낮아질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자본이 동일한 상품을 재생산하려면 사회적 가치에 해당하는 만큼의 노동을 투하해야 하므로, 두 가지 경우 모두 가치대로 교환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잉여가치나 지대를 획득하는 자본에 의해서 투하되는 노동은 그 크기만큼 강화된 노동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는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와 지대의 경우 모두 이전설이 아니라 생산설을 지지하고 있다. 특별잉여가치의 경우 이전설이란 대개는 부문 내 이전설을 말하는데, 이 설이 타당하려면 부문 내에 가치이전 메커니즘이 있어야 할 것이다.(佐藤金三朗 外 編, 제2권, 1977), 그러나 동일 산업에서 같은 생산물을 생산하는 자본끼리 생산물을 교환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그리고 이전설이 성립한다면, 특별잉여가치나 지대를 가치법칙의 예외라고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특별잉여가치와 지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동태적인 과정에서의 차이이다. 특별잉여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점차 소멸한다. 다른 자본이 똑같은 생산방법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대의 경우에는 시간이 간다고 소멸하지 않는다. 다른 자본이 똑같은 생산조건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특별잉여가치의 경우에는 자본 간의 경쟁에 의해서 사회적 가치가 점점 낮아지지만, 지대의 경우에는 사회적 가치가 낮아지지 않는다. 특별잉여가치는 사회적 가치를 낮추어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지만, 지대의 경우에는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특별잉여가치는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지대는 허위의 사회적 가치(ein sozialen falschen Wert)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K. Marx, 1894) 허위의 사회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비옥도가 높은 토지에서는 5시간에 쌀 한 가마가 생산되고, 열등한 토지에서는 10시간에 쌀 한 가마가 생산된다고 가정해 보자. 사회적인 쌀 수요가 두 가마라고 가정한다. 이 때 토지가 사적으로 소유되어 있다면 열등한 토지의 재생산비를 보장해 주어야 하므로 쌀 한 가마는 10시간의 가치를 가지게 되고, 우등지에서는 5시간의 지대가 발생하게 된다. 사회 전체로 보면 쌀 두 가마에 대하여 20시간의 노동을 지불하게 된다. 그러나 토지를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면 20시간이 아니라 15시간의 노동만 지불하면 두 가마의 쌀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두 경우를 비교하여 보면 5시간의 노동은 가치이기는 하지만, 허위의 가치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하나 지대와 관련하여 유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지대를 농업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으로 좁게 한정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지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공업에서의 지대를 예로 들고 있다. 폭포 근처에 위치한 공장은 에너지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K, Marx, 1894) 또한 일상생활에서는 상업에서의 지대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 중심부에 가게를 열면 손님이 많이 와서 다른 곳에 위치한 가게보다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초과이윤은 곧 지대로 전환될 것이다. 상업에서의 지대를 생각하여 보면 생산비가 절약되는 경우뿐만 아니라 판매량이 증가하는 경우에도 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대는 주택임대와 같이 소비행위를 매개로 하여 발생하는 지대를 포함시킬 수 있다. 소비를 매개로 한 지대는 자본의 힘으로 재생산하기 힘든 공간적, 사회적, 문화적 이유로 소비자에게 더 많은 사용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 때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대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본의 생산력과 관계가 없는, 따라서 자본의 힘으로 재생산하기 힘든 조건으로 인하여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조금 뒤에 살펴보겠지만, 자본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할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은 잘 존재하지 않는다. 바다에서도 쌀을 재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건을 만드는 데에 많은 비용이 든다면,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을 확보한 자본에 비해서 불리한 조건에 놓이게 될 것이고, 지대가 발생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정보상품의 경우 발생하는 대표적인 지대의 하나로서는 네트워크 효과로부터 발생하는 지대를 들 수 있다. 제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네트워크 효과는 사용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사용가치가 증가하는 효과를 말한다. 이 효과는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콘텐츠가 풍부해지고, 직접적인 연결경로가 많아져서 의사소통이 용이해지며, 간접적인 연결경로나 구성할 수 있는 공동체의 수가 증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의 힘에 의해서 생긴 효과가 아니라 소비자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낸 효과이다. 네트워크 효과가 있으면 사람들은 큰 네트워크일수록 더 많은 사용가치를 즐길 수 있고 기꺼이 더 높은 접속료를 지불하려고 할 것이다. 그 결과로 큰 네트워크의 소유자는 작은 네트워크의 소유자에 비하여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정의한 바에 따르면, 이와 같은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서 발생하는 초과이윤은 지대의 일종이 된다. 네트워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지대가 높아지는 것은 도시 중심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땅값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보상품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지대의 하나로서 브랜드 효과(brand effect)를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브랜드 효과를 ‘브랜드로 인하여 똑같은 제품과 서비스를 평균적인 시장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게 됨으로써 수익이 증가하는 효과’로 정의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브랜드 효과가 나타나는 요인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흔히 소비자의 브랜드에 대한 인식, 품질에 대한 인식, 브랜드의 연상작용, 브랜드에 대한 신뢰 등을 들고 있다.(David Aaker/Erich Joachimsthaler, 2000) 자세히 살펴보면 브랜드 효과를 만들어내는 네 가지 요인 모두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에서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브랜드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비자가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소비자가 그 브랜드의 품질을 믿어야 하고, 소비자가 그 브랜드로부터 연상 작용을 통하여 더 많은 효용을 느껴야 하며, 소비자가 브랜드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를 부여하여야 하는 것이다. 자본의 생산력과는 상관없이 소비자가 부여하는 속성에 의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만큼은 지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브랜드 효과는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다른 자본과의 경쟁의 결과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형성된 브랜드 효과는 상당한 기간 동안 유지되는 것이 보통이며, 브랜드의 명성이 유지되는 한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시중심부에 가게를 차린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대수익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보상품의 이윤의 원천으로서 특별잉여가치, 지대, 독점이윤이라는 세 가지 구성 성분을 검토하여 보았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이윤의 구성 성분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전환되는 동태적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라는 데에 주의해야 한다.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일반적인 경우에 특별잉여가치는 경쟁에 의하여 사라지고 상대적 잉여가치로 전환되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세 가지 성분 중에서 특별잉여가치가 가장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구성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독점이윤도 경쟁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독점이 법률이나 제도에 의해서 뒷받침될 때에는 신기술이 개발되어 경제적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독점 상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지대는 다른 자본이 만들어내기 힘든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고 유지되기 때문에 세 가지 구성성분 중에서 가장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대도 영구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토지의 비옥도나 경제적 위치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적, 사회적인 변화로 인하여 바뀌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본투자로 인하여 토지의 비옥도나 경제적 위치가 변할 수도 있다.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투자를 수년 동안 계속한다든지 큰 도로를 내고 빌딩을 건축하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본투자의 결과로 전보다 수익이 많이 나온다면 그 초과수익은 지대라기보다는 자본투자에 대한 이윤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련의 투자를 통해서 토지의 비옥도가 한 단계 높아지고 나면 상당한 기간 동안은 더 이상의 추가 투자가 없어도 초과이윤이 계속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때의 초과이윤은 다시 지대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흔히 사람들이 무형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브랜드에 대한 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특별잉여가치도 독점이윤이나 지대로 전환될 수 있다. 특허(patent)와 저작권(copyright) 같은 지적재산권 제도는 경재에 의해서 사라져갈 특별잉여가치를 법률이 정하는 기간 동안 적절한 수준의 독점이윤으로 전환시켜서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업이 경쟁적 우위를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할 자신이 있는 경우에는 특허 신청을 하지 않고 노하우(know-how)와 같은 특별잉여가치 형태를 유지하기도 있다. 표준(standarad)은 특별잉여가치를 지대나 독점이윤 형태로 전환시켜 표준제정에 참여한 소수의 과점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나누어 가지는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실상의 표준이 됨으로써 발생하는 초과이윤은 지대의 성격을 가진다. 이외에도 마르크스는 독점이윤이 지대로 전환되거나 지대가 독점이윤으로 전환되는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K. Marx, 1894: 953) 정보상품의 가격에는 이 세 가지 구성성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판매하는 윈도XP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윈도의 가격에는 타 기업이 당장 모방하기 힘든 기술격차에서 발생하는 특별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타판이나 패치판을 유상으로 판매한다든지, 여러 가지 응용프로그램을 운영체제에 끼워팔고, API를 늦게 공개하거나 공개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오피스를 지원하고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란 운영체제에서 응용프로그램(application program)을 위하여 제공하는 함수를 말한다. 언어로 비유하자면, 윈도에서 제공하는 단어라고 해 보면 어떨까? 윈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작용하는 응용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API를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는 자기 회사의 오피스 개발자에게 API를 먼저 알려준다든지 아예 다른 개발자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오피스를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윈도XP보다 먼저 출시된 오피스XP에는 아직 출시되지도 않은 윈도XP에 서 제공하는 기능을 활용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는 오피스XP는 앞으로 출시될 윈도XP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선전을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다른 회사의 오피스 프로그램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피스 프로그램과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개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1만 단어나 되는데, 다른 오피스 개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휘가 1천 단어에 불과하다면 누가 자기의 생각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 바탕화면에서 경쟁 회사의 아이콘을 설치하지 않는 조건으로 제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배타적 거래를 강요하는 행위 등등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독점이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비싸더라도 윈도를 구매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다 윈도를 쓰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일종의 네트워크 효과로서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초과수익은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보상품의 이윤을 구성하는 세 구성 성분 사이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정보상품의 이윤 중에서 어디까지가 독점이윤이고 어디까지가 지대이며 어디까지가 특별잉여가치인지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적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구분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정보상품의 이윤을 독점이윤이라든지 그보다 다소 넓은 의미로서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라는 개념으로 총괄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가치론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세 가지 구성성분을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보상품과 정보경제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 특별잉여가치와 지대 및 독점이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히 있지만, 대개는 기술혁신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초과이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서 생산력을 가장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것은 특별잉여가치이다. 특별잉여가치는 경쟁에 의하여 상대적 잉여가치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혁신의 결과가 지대나 독점이윤의 형태로 고정되기보다는 특별잉여가치 형태로 출현하여 계속해서 동태적 기술혁신 과정이 계속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독점이윤은 다른 부분의 잉여가 이전된 것에 불과하므로 독점이윤이 증가한다고 해서 사회 전체적인 가치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치의 사회적 재분배가 일어날 뿐이다. 신기술을 개발한 자본의 입장에서는 초과이윤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특허와 같은 방식으로 독점이윤을 추구할 것이다. 앞으로 지적 재산권은 점점 확대될 것이고 그것을 둘러싼 더욱 많은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반독점법은 정보혁명의 시대에도 더욱 철저하게 시행될 필요성이 있다. 너무 강력한 지적 재산권 보호제도는 활발한 기술혁신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셋째로 지대는 가치 법칙에 따라서 발생하는 초과이윤이지만, 그것은 허위의 사회적 가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대를 낳는 조건은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없는 조건이므로 지대의 기술진보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보상품의 경우에 지대를 발생시키는 것으로서는 네트워크 효과와 브랜드 효과 등을 들 수 있는데, 두 가지 모두 초과이윤의 주된 원천이 생산요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소비자 때문에 증대된 사용가치에 대하여 소비자가 더 많은 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지대는 지대나 독점이윤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소위 렌트 추구(rent seeking)행위를 생각해 보면 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초과이윤 전체가 기술혁신이 아니라 독점과 지대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행위에 낭비되어 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지대나 독점이윤에 대해서는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 정보상품의 경우에도 보통 상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 개발한 사람에게는 일시적으로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게 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재생산하는 비용인 가치만큼의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읽기위해 퍼나른다.2

  • 등록일
    2005/04/28 17:41
  • 수정일
    2005/04/28 17:41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기념비적인 업적이며, 그의 생애 전체의 작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자본론』의 목적은 그가 제1권 서문에서 썼듯이,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경제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작동의 이 또는 저 측면만을 파악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앞의 두 장에서 제시된 분석방법과 역사 해석에 따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말이나, 인간 본성에 조응하는 사회 형태로서가 아니라, 그 내적 모순들 때문에 몰락하게 되는 역사적으로 과도적인 생산양식으로서 분석했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이 말했듯이 경제학이라는 '우울한 학문'과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이 장의 주제를 간략하게 개관하는 것이 좋겠다. 이 장은 『자본론』의 초석(礎石)인 노동가치론---이에 따르면 시장에서 판매되는 생산물인 상품은 그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서 교환된다---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이론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에 따르면 노동자가 창조한 잉여가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이윤의 원천이다---의 배후에 놓여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잉여가치의 최대량을 거머쥐기 위한 자본들---개별 자본가이든, 기업들이든, 혹은 심지어 국가이든 간에---간의 경쟁은 일번적 이윤율을 형성시키고, 그리하여 우리가 보게 되듯이 노동가치론에 수정을 가져온다. 경쟁은 또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야기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규칙적으로 괴롭히는 공황의 근본 원인이다. 노동과 가치 모든 인간사회의 기초는 노동과정이다. 인간은 노동과정에서 협동하여 자연의 힘들을 이용함으로써 자기 욕구를 충족시킨다. 노동의 산물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유용해야만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것을 사용가치라고 불렀다. 사용가치의 가치는 무엇보다 우선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는 데 있다. 사용가치에 의해 충족되는 욕구가 반드시 육체적 욕구일 필요는 없다. 책은 사용가치인데, 이는 사람들이 읽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용가치가 충족시키는 욕구가 더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들일 수도 있다. 살인자의 총이나 경찰관의 곤봉은 구운 콩 통조림이나 외과 의사의 메스와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노동생산물은 상품의 형태를 취한다. 아담 스미드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상품은 단지 사용가치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상품들은 직접 소비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판매되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교환되기 위해서 생산된다. 각 상품은 그 자체로서 "한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양적 관계, 비율"인 교환가치를 가진다. 그리하여 셔츠 한 벌의 교환가치는 구운 콩 통조림 100개일 수 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서로 아주 다르다. 스미드의 예를 들어 보면, 공기는 인간에게 엄청나게 큰 사용가치이다. 왜냐하면 공기 없이는 인간은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기는 (부나가 덜 오염된 공기를 사는 경우를 무시한다면) 교환가치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는 비교적 작지만, 매우 높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 사용가치는 어떤 교유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배가 고프다면, 책은 (배를 채우는데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상품의 교환가치는 단지 그것과 교환되는 다른 상품들의 양이다. 교환가치는 상품들의 고유한 질보다는,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 빵 한 덩어리는 병따개 한 개와 용도가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직접이든 화폐의 매개를 통해서든, 교환될 수 있다. 이러한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그것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답은 모든 상품들이 가치를 가지며, 교환가치는 단지 그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나타낸다.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 비용은 상품의 생산에 투하된 노동량에 의해서만 측정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노동이, 빵 한 덩어리르 굽거나, 또는 병따개 한 개를 제조하는 데 사용된 것과 같은 각각의 개별적인 유형의 노동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구체적인' 노동이라고 표현한 이 현실적인 노동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가치의 척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을 그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추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용가치 즉 유용물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다만 거기에 추상적 인간노동이 대상화, 즉 물질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동은 '이중성'을 가진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의 인간노동력 지출이며, 이 동등한 인간노동, 곧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그것은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모든 노동은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의 인간노동력 지출이다.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을 "내 책에서 최상의 부분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바로 이 지점이 마르크스의 이론이 리카아도를 비롯한 정치경제학자들의 이론과 갈리게 되는 곳이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정확한 공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데에만 거의 전적으로 관심을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물론 그들은 시장가격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리카아도의 오류는 그가 오로지 가치량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리카아도가 연구하지 않은 것은, 노동이 자신을 상품들에 공통적인 요소로 표현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마르크스는 사장가격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 형태로 이해하고, 무엇이 자본주의를 이전의 사회 형태들과 구분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모순들이 장차 자본주의의 변혁을 가져오게 할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얼마나 많은 노동이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구성하는가를 알려고 했다기보다는, 어떠한 형태로 노동은 이 기능을 수행하며, 왜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이 이전 사회들에서처럼 직접 사용하기 위한 생산물의 생산이 아니라 시장을 위한 상품들의 생산인가를 알고자 했다.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노동은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특정한 종류의 노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그러하다. 각 개인 혹은 집단의 노동은 그것이 사회의 욕구들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노동이다. 이러한 욕구들은 모든 종류의 상이한 생산물들---다양한 종류의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 주거, 운송수단, 생산에 필요한 도구 등---을 필요로 한다. 이는 상이한 종류의 유용노동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단지 한 종류의 생산물만을 생산한다면, 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는 상이한 생산 활동들에 사회적 노동을 분배하기 위해 특정한 수단들을 필요로 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노동을 특정한 비율로 분배해야 하는 이와 같은 필요성은 사회적 생산의 특정한 형태와 함께 소멸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썼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다른 생산양식들 사이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노동 중 얼마만큼이 특정한 과업들에 바쳐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사회가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메커니즘도 갖고 있지 않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전(前)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고찰해야만 한다.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경제 활동의 목적이 주로 사용가치들의 생산이었으며, 각 공동체는 자신의 필요들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그 구성원들의 노동으로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필요을 위해 곡물이나, 가축, 실,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 가족의 농촌 가부장적 생산에서...... 가족내 노동의 분배와 가족의 개별 구성원들이 지출하는 노동시간은, 노동의 자연적 조건들의 계절적 변동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성과 연령의 차이에 의해서도 규제되었다. 노동의 분배는 착취와 계급이 존재하는 전자본주의 사회들에서조차 집단적으로 규제되었다. 그리하여 봉건제에서는, 노동과 그 생산물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에서 부역이나 현물공납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가 그와 같은 사회에서 인간들이 서로 직면했던 상이한 역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노동을 통해 개인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인격적 관계로서 나타나며, 물건과 물건 사이, 즉 노동생산물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변장되지는 않고 있다. 계급착취에 기초한 생산양식인 노예제와 봉건제의 경우, 생산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생산자들과 착취계급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바쳐졌다. 주요한 문제는 무엇이 생산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사회적 생산물의 분할이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 분업의 발전으로 이제 각 작업장의 생산은 고도로 전문화되며, 다른 작업장으로부터 분리된다. 각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만으로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병따개 공장의 노동자는 병따개를 먹을 수 없다. 살기 위해서 그는 병따개를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야 한다. 그리하여 생산자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상호 의존적이다. 우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산물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매할 수 있는 화폐를 획득하기 위해, 서로서로를 그들 자신의 생산물들의 구매자로서 필요로 한다. 이러한 체제를 마르크스는 일반화된 상품생산이라고 불렀다. 생산자들은 그들 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만 서로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사용 대상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적 노동의 총체가 사회적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은 그들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만 사회적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도 역시 이 교환을 통해서만 비로소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면, 교환에 의하여 노동생산물들 사이에 수립되는 관계와, 그것들을 매개로 하여 생산자 자신들 사이에 수립되는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사적 노동은 사실상 사회적 총노동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구체적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이었다. 생산이 (생산자 자신의) 사용을 위해, 어떤 특정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생산의 사회적 역할은 분명하며,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생산이 교환을 위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특정한 생산자가 수행하는 유용노동과 사회의 필요들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한 특정한 공장의 생산물들이 어떤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여부는 그것들이 제조된 다음, 시장의 판매대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만약 어느 누구도 이러한 재화들을 사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생산한 노동은 사회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사회적 노동과 사적 노동의 차이에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측면이 있다. 동일한 생산물의 제조업자들은 동일한 시장에서 경쟁할 것이다. 그들의 상대적인 성공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산물을 얼마나 싸게 판매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는 노동생산성의 증대를 수반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높을수록, 어떤 재화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적을 것이며, 그 재화에 응결된 노동량도 그만큼 적을 것이고, 따라서 그 가치도 작을 것이다" 하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경쟁의 압력은 생산자들로 하여금 경쟁자와 유사한 생산방법들을 채택하도록 강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경쟁에서 밀려날 것이다. 따라서 상품들의 가치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의 총량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즉 "어떤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에서 평균적인 노동의 숙련도와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노동강도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시간" 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것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이상을 사용하는 비효율적인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물의 가격이 그의 초과노동을 보상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오로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이 사회적 노동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은 단지 하나의 개념, 즉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생산자들이 '정상적인 생산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업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사적인 유용노동은 일단 그 생산물이 판매되어야만 사회적 노동으로 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교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 상품이 포함하고 있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어야만 한다. 사회는 이것을 집단적으로 행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란 생산자들이 단지 그들의 생산물을 통해서만 상호간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한 상품에 보편적 등가의 역할을 맡겨서,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치들을 측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특수한 상품이 보편적 등가의 역할로 고정되면, 그것은 화폐가 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품이 화폐로 대표된다는 것은...... 상품가치들의 상이한 양이...... 모두 사회적 노동의 구현체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개별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산물이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를 미리 알 수 없는 경제체제이다. 생산자들은 오직 시장에서 이 생산물들을 상품으로서 판매하려고 노력해야만 이를 알 수 있다. 상대보다 싸게 판매해서 시장을 차지하려는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하여 생산자들의 상이한 노동들은 하나의 척도, 즉 화폐 속에 체화된 추상적 사회적 노동으로 환원된다. 한 상품의 공급이 그것에 대한 수요를 초과하는 곳에서는, 그 가격은 하락할 것이며, 생산자들은 더 수익성 있는 다른 경제 활동들로 이동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도 간접적으로만, 사회적 노동은 상이한 생산부문들 사이에 분배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가치 분석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적 생산 형태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초점은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내적 연관"이었다. 그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가치로서 상품은 사회적 크기이며...... 생산 활동에서 인간들이 맺는 관계이다...... 공동체적인 노동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사회적 생산에서 맺는 인간들의 관계가 '사물들'의 '가치들'로서 자신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자본론』이 출판되자마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제1권 시작 부분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가치에 대한 설명이, 상품들이 실제로 그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교환된다는 명제를 증명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반박을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 같은 비판자들을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이 불행한 자들은 내 책에 '가치'에 관한 장은 없지만, 내가 제시하고 있는 현실적 관계들에 대한 분석이 현실적 가치관계의 증명과 전개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임무는 다름 아니라 어떻게 가치법칙이 자신을 관철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외관상 법칙과 모순되는 모든 현상들을 처음부터 '설명'하려 한다면, 그는 과학에 앞서서 과학을 제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론』전체는 노동가치론의 증명이다. 마르크스는 정확한 과학적 방법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향"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을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매우 추상적인 형태로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분석에서 단지 출발점일 뿐이다. 그 다음 그는 한걸음씩 나아가면서, 복잡하고 ㅤㄸㅒㅤ로는 혼돈된 자본주의 경제 형태가 노동가치론에 기초하여 이해될 수 있고, 또 그 기초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잉여가치와 착취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두 개의 커다란 분리를 수반한다. 첫 번째 것은 우리가 이미 검토한 것으로서 생산단위들의 분리이다. 다시 말하여 자본주의 경제는 상호 의존적이며 경쟁하는 분리된 생산자들로 분할된 체제이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각 생산단위 내의 분리로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직접 생산자들 간의 분리, 즉 자본과 임금노동 간의 분리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상품은 자본주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화폐와 교역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은 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상품유통은, C를 상품, M을 화폐로 표시하면, C-M-C라는 형태를 취한다. 각 생산자는 자신의 상품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판매하여 화폐를 손에 넣은 다음, 그 화폐를 사용하여 다른 생산자로부터 다른 상품을 구매한다. 화폐는 거래에서 매개물일 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상품유통은 이와 다른 좀더 복잡한 형태, 즉 M-C-M'의 형태를 취한다. 화폐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자되고, 이 상품들은 다시 더 많은 화폐와 교환된다. 중요한 것은 M', 즉 자본가가 거래 후에 보유하게 되는 화폐는 M, 즉 최초에 투자된 화폐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 초과화폐 혹은 이윤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그러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리키아도는 노동이 창조한 가치는 임금과 이윤으로 분할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답했다. 리카아도는 노동을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보았다. 하지만 리카아도는 명백한 모순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임금을 노동의 가치라고 정의했다. 임금이 노동이 창조한 가치보다 작을 경우, 어떻게 임금을 노동의 가치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또 리카아도 자신도 노동이 창조한 가치는 임금과 이윤으로 분할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리카아도는 잉여가치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잉여가치 문제와 대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잉여가치의 존재를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과 교환하기 위해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라고 보았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해야 하는 사용가치는...... 생산물에 물질화되어 있지 않으며, 노동자 자신과 분리되어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가능성으로서만, 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자본에 의해 가동될...... 때 비로소 현실화된다.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며,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와 사용가치를 가진다. 그것의 가치는 노동자가 살아가는 데, 그리고 자신을 대체할 자녀를 양육하는 데 요구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서 벌써 일정한 양의 사회적 노동이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그 후에 행해지는 노동력의 발휘에 있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노동이며, 따라서 노동자가 일단 고용되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노동시킨다. 그러나 노동은 가치의 원천이며, 또 노동자는 보통 1노동일 중에 자본가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한 하루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 즉 단지 가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으로 된다는 이 노동력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이다." 예컨대 8시간의 1노동일 중 4시간의 노동이 자본가가 임금 형태로 투자한 노동력의 가치를 대체한다고 가정하자.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잉여가치 혹은 이윤은 단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특유한 잉여노동의 존재 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의 분석이 가지는 의의는, 이것을 통해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의 기원이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그것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추적한 사회 유형이 자연적인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며, 역사적으로 툭수한 생산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조명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포함한 모든 상품들이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하면서도 잉여가치를 해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속이고 노동력에 대해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등가보다 덜 지불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착취는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정상적 작동의 전형적 결과이다. 그것은 노동력이 일단 가동된 뒤 그것이 창조한 가치와 노동력 가치의 차이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의 분리에 의존한다. "노동자는......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롭다. 즉 그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기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다른 모든 상품들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생산요소 그 자체가 한편에서는 집적된 물질적 요인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고립된 노동력으로 분리"된 것을 전제로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제1권 제8편에서 이러한 '분리'가 농민이 자신들의 토지에서 추방되고, 처음에는 토지 그 자체였던 생산수단들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한 계급의 독점물로 되는 역사과정의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시민들이 겉보기에는 정치적 평등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계급착취 때문에 불평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자본과 임금노동 간의 교환은 등가물의 교환이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상품소유자이다. 전자는 노동력을 소유하고, 후자는 화폐를 소유한다. 노동력은 그 가치--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대로 지불받는다. 그러면 착취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유통영역', 즉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상품소유자들로 만나는 시장 안에 머물러서는, 착취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입구에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씌어 있는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야 비로소 사태가 변한다. 착취는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즉 노동력 상품의 사용가치가 가치와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 노동력이 가동되는 것은 생산에서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고찰하기 전에, 자본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자본은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하고 축적하는 가치의 축적이다. 물론 자본주의보다 훨씬 전에 부자들은 노예와 농노의 잉여노동을 수탈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소비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부자들과 그 식솔들은 더 많은 생활자료와 사치품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는 그것이 잉여노동이라는 공통된 원천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자본은 아니다. 부의 축적이 자본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는 최초의 신호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M-C-M'라는 공식이다. 이 공식은 화폐(M)가 상품(C)과 교환되고, 상품이 다시 더 많은 양의 화폐(M')를 위해 판매되는 거래를 가리킨다. 우선 그와 같은 거래는 예컨대 동방으로부터 향료를 수입한 다음 그것을 다시 북유럽--그곳에서는 육류 보존에 필요한 향료에 대한 수요로 인해 향료 가격이 높았다--에 되파는 상인들이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자본은 노동력이, 구매되고 판매되는 상품이 될 때에만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생산관계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다음 두 가지 점으로 정의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은 노동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의 축적이며, 이러한 축적은 화폐, 상품 혹은 생산수단--그리고 통상적으로는 세 가지 모두를 결합한--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또 더 많은 축적을 확보하기 위해 행동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가치의 자기증식'이라고 묘사했다. 자본을 반드시 개별 자본가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부유한 개인들은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오늘날은 그 같은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이 자기 자신의 생명을 갖고, 그 어떠한 개인도 초월한 경제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실제로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보통 '자본들'이라고 불려지는 개별 자본 단위들은 소기업이나 대기업, 금융기관에서 국민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특수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수많은 새로운 개념들을 정식화했다. 우리는 앞 장에서 모든 노동과정에는 두 가지 주요한 요소--노동력와 생산수단--가 존재함을 보았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이들 두 요소가 모두 자본의 형태를 취한다. 자본가가 자신의 초기 투자를 증가시키려면, 화폐를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데 투자해야만 한다.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사용된 화폐를 마르크스는 가변자본이라고 불렀다. 플랜트, 설비, 원료, 기타 생산수단을 획득하는 데 투자된 화폐는 불변자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름이 붙여지게 된 이유는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하다. 가변자본이 가변적인 까닭은, 그것이 가치의 원천이며, 가치를 증식시키는 상품이 노동력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불변자 본은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살아있는 노동--노동력의 가치를 대체하는 동시에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의 노동--과 생산수단에 축적되어 있는 죽은 노동을 모두 관련시킨다. 죽은 노동은 생산수단 생산에 투하된 노동자의 노동이다. 기계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감가(減價)되기 때문에, 그 감가된 가치는 그 상품에 이전된다. 잉여가치율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와 노동력에 투자된 가변자본 간의 비율에 대해 부여한 명칭이다. 이 비율은 착취율을 측정한다. 다시 말해,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잉여노동을 뽀아 내는 데 어느 정도나 성공적인가 하는 것을 측정한다. 앞에서 든 예로 돌아가, 만약 필요노동이 4시간이고, 잉여노동이 4시간이라면, 잉여가치율은 4:4, 즉 100%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잉여가치율을 증대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중 하나는 모든 생산양식들에 공통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이들은 각각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일을 연장함으로써 창조된다. 예컨대 노동자가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을 노동에 지출하는데, 필요노동은 여전히 4시간이라면, 2시간의 잉여노동이 새로이 추가된다. 잉여가치율은 4:4에서 6:4로, 즉 100%에서 150%로 상승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가장 빛나고 위력적인 페이지들에 속하는 것은, 특히 산업혁명 초기 국면에서 자본가들이 어떻게 하여 노동일을 최대한으로 연장하고, 주철공장의 지옥같은 조건에서 9살밖에 안 된 소년들을 12시간 3교대로 노동하도록 강제하는가 하는 것을 묘사한 부분이다. 그는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마치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만 살 수 있고,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어야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노동일의 연장에는 객관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노동일이 너무 연장되면, "발육과 활동에 필요한 정상적인 도덕적·육체적 조건들이 박탈되어, 인간노동력이 위축될 뿐만 아니라, 노동력 그 자체의 조기 고갈과 요절이 초래된다." 그리하여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력에 의존하는 자본은 그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행동한다. 또한 동시에 노동일의 무자비한 연장은 그 희생자들인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의 집단 행동이 영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공장법(Factory Acts)을 채택하도록 강제하는 데서 수행했던 역할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표준 노동일의 확립 그 자체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여 총자본, 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 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의 산물이다." 하지만 자본은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통해 잉여가치율을 높일 수 있다.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노동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를 저하시킬 것이다. 만약 생산조건에서 기술 진보가 이루어져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으로 구매하는 소비재가 저렴하게 되면, 노동력의 가치는 저하한다. 이제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더 적은 노동이 필요할 것이며, 필요노동에 바쳐지는 노동일 부분이 감소하고, 더 많은 시간이 잉여가치의 창출에 쓰이게 될 것이다. 가령 소비재 산업에서 생산성 상승이 소비재 가치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해 보자. 앞서 든 예로 돌아가 보면, 이제 필요노동은 8시간 노동일 중 단지 2시간만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잉여가치율은 이제 6:2로 될 것이다. 즉 잉여가치율은 100%에서 300%로 상승했다. 마르크스는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모두 자본주의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발견되지만, 그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보아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최초에는 봉건 사회의 수공업으로부터 물려받은 생산방법의 기초 위에서 도입되었다. 이러한 수공업적 방법은 처음에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단지 좀더 큰 생산단위로 묶였으며, 더욱 복잡한 분업에 종속되었을 뿐이다. 새로운 생산관계가 구래의 노동과정에 접목된 것이다. 기존의 노동양식이 주어져 있을 때......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일을 연장해서만, 즉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켜서만 창조될 수 있다. 착취자도 피착취자도 생산력을 증대하는 데 강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봉건제와 같은 생산양식에서는, 직접 생산자들을 더 오래 노동하게 함으로써만 그들로부터 더 많은 잉여노동을 추출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새로운 착취율 제고방법을 도입한다. 생산자들을 더 효율적으로 노동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과 함께, 모든 현실적 생산 형태가 변화되고, 고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생산 형태가 존재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매뉴팩처라고 부른 것, 즉 "도시 수공업과 농촌 가내공업의 광범위한 기초"에 입각한 생산조직이 근대적 대공업, '기계제 생산'(machinofacture)으로 대체된다. 기계제 생산으로 생산이 기계체계 중심으로 조직되고, 노동과정이 기술혁신에 따라 항상 변화한다. "이제 노동과정과 그 현실적 조건들을 변혁하는, 기술적으로도 다른 면으로도 고유한 생산양식--자본주의적 생산--이 출현했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노동과정이 점차 사회화한다는 것이다. 이제 생산은 기계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대규모 생산단위에서 이루어지고, 고도로 복잡한 분업을 수반한다. "노동과정 전체의 실제 담지자는 점차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집합적 노동자'라고 부른 것을 창출하는데, 이제 개인들은 상품 생산에서 그들의 결합된 노력에 의해 연관되는, 집합적 노동자의 손발들이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을 항상 변혁하는 목적은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해서 착취율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계는,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다른 모든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을 저렴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또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노동일 부분을 단축하여, 노동일의 다른 부분, 즉 그가 자본가에게 공짜로 제공하는 부분을 연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기계는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다. 이는 우리가 앞 장에서 보았던 명제, 즉 생산력은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발전한다는 명제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특수성은 그 생산관계가 노동생산성의 지속적 향상을 요청한다는 사실이다. 경쟁, 가격 그리고 이윤 『자본론』제1권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매우 높은 추상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상품은 그 가치대로, 즉 그 생산에 수반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비례하여 교환된다고 가정한 사실이다. 특히 그는 경쟁의 효과와 상품의 공급 및 수요 변동의 효과를 배제했다. 이러한 절차가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는, 제1권에서 마르크스의 관심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었으며, 그 원천이 생산과정 내부에서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추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분석에서 마르크스의 대상은 그가 "개별 자본들과는 구별되는 자본 일반"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하나의 추상임을 인정했지만, 이 추상은, 자의적인 추상이 아니라, 부의 다른 모든 형태들--즉 사회적 생산이 발전해 온 다른 여러 양식들--로부터 자본을 구별하는 고유한 특징들을 포착하는 추상이다. 이것은 각종의 자본 그 자체에 공통적인 양상이며, 혹은 각각의 일정한 가치액을 자본으로 만드는 양상이다. "각종의 자본들 그 자체에 공통적인 양상"은 생산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서, 자본이 가치의 자기증식이라는 사실로 귀착된다. 그리하여 자본을 "사회적 생산이 발전해 온 다른 여러 양식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불불(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잉여노동을 직접 생산자로부터 강탈하는 특수한 경제적 형태"로서 잉여가치이다. '자본 일반'의 분석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기초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라크스의 자본주의 검토에는 또 하나의 단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 생산양식이 두 가지 분리를 수반함을 보았다. 하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분리인데, 이는 임금노동과 자본 간의 교환의 배후에 놓여 있으며, 잉여가치의 추출을 가능하게 한다. 또 하나는 생산단위들간의 분리인데,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적 노동이 상이한 부문으로 분배될 수 있는 어떠한 집단적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따라서 개별 생산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만 상호 관계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나는 분리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ㅤㅌㅡㅇ징은 어떠한 생산자도 홀로는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본은 오로지 다수(多數) 자본으로서만 존재하고, 또 존재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다수 자본'의 영역은 경쟁의 영역이다. 개별 자본들은 시장을 둘러싸고 서로 투쟁하며, 특정한 부문들을 통제하려 한다. 이러한 자본들의 행태는 '자본 일반', 특히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을 분석하는 데서 취한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을 자본으로 만드는 것은 생산에서 가치의 자기증식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경쟁 분석은, 아주 중요한 의미에서 생산과정의 분석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점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자본론』세 권 전체를 개관해야만 한다. 제1권은 우리가 보았듯이 생산과정의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상품생산 체계이기 때문에,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추출해 낸 잉여가치를 실제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자본가가 이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삼품들을 판매하는 데 성공한 경우에 한에서이다. 마르크스가 생산에서 창조된 가치의 실현이라고 부른 것--가치의 화폐로의 전화--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유통에 의존한다. 『자본론』제2권은 이 유통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함의를 두 가지 방식으로 검토한다.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의 상이한 순환들을 검토한다. 예컨대 화폐자본은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으로 형태가 변환되고, 생산된 상품들은 다시 그 가치대로 판매되어 더 많은 화폐량으로 잇따라 형태가 변환된다. 그 다음에 마르크스는 개별 자본들의 순환들이 뒤얽혀 경제 전체의 재생산을 가져오는 방식을 검토한다. 그가 『자본론』제2권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눈부시게 혁신적인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공황을 검토할 때만 그것을 약간 소개할 것이다. 경쟁의 분석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자본론』제3권에서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전체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다룬다. 생산에서 창조된 가치의 실현이 상품의 유통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통일이다...... 이 책[제3권]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다양한 형태들은...... 서로 다른 각종 자본들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경쟁 속에서, 그리고 생산 담당자 자신들의 일상적인 의식 속에서,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는 자본의 형태로 한발한발 접근하게 된다. 경쟁의 핵심적 중요성은 경쟁의 압력을 통해 개별 생산자들이 자본으로서 행동하도록 강제된다는 사실에 있다. "개별 자본들의 상호 작용은 그들이 스스로 자본으로서 행동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치법칙--상품 생산에 지출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비례한 상품 교환--은 두 가지 방식으로 경쟁에 의존한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와 그것의 시장가격을 구분한다. 가치는 상품에 지출된 사회적 노동이다. 반면 시장가격은 어느 시점에서든 상품이 팔릴 때 얻게 되는 화폐의 양이다. 양자가 다른 경우는 흔하다. 왜냐하면 시장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진동에 따라 변동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시장가격의 변동은 시간이 경과하면 상쇄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상품의 가치는 우리가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 보았듯이, 그 생산에 지출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다. 이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실제의 노동량과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상품의 개별 가치, 즉 그것이 체화하고 있는 노동시간과, 해당 산업에서 지배적인 생산조건을 반영하는 사회적 가치 혹은 시장가치를 구별한다. 상품의 시장가치는 그 산업의 자본들간의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 각 자본은 자기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시장지분(市場持分)을 차지하려고 노력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생산조건을 개선하여, 자기 상품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경쟁을 한다. 통상 그로부터 산출되는 시장가치는 그 산업의 평균적인 생산조건에서 생산되는 재화의 가치로 될 것이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 개별 자본의 생산물은 이들을 생산하는 데 투하된 실제의 노동량인 그것의 개별적 가치가 시장가치보다 높든 낮든 간에, 시장가치대로 판매될 것이다. 그리고 경쟁이 가치법칙의 작용에 개입하게 되는 두 번째 방식이 있다. 이는 상품이 "자본의 생산물"이 라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자본가들이 그의 자본을 투자하여 상품 생산을 하는 것은, 생산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앞 절에서 보았듯이, 잉여가치의 원천은 가변자본, 다른 말로 하면 자본가가 임금을 주고 고용한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이 임금을 지불하기 위한 화폐만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계, 건물, 원료, 그밖에 노동자가 실제로 상품을 생산하려 할 경우 필요하게 되는 것들을 사기 위한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된다. 자본가가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단지 가변자본에 대한 수익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총투자, 즉 생산수단에 투자된 불변자본을 가변자본에 더한 것에 대한 수익이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을 인정하여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을 구분했다. 잉여가치율은 단지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우리가 앞 부분에서 보았듯이, 이 비율은 노동력의 착취도를 측정한다. 반면에 이윤율은 총자본, 즉 가변자본에 불변자본을 합한 총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잉여가치율이 더 기본적인 비율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윤율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단지 그가 임금에 지출한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의 총투자에 대해 적절한 수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분명희 두 비율은 다르다. 100명의 노동자를 주당 50파운드의 임금으로 고용하는 자본가의 예를 들어 보자. 그러면 그의 임금 지불총액---그의 가변자본---은 주당 5000파운드이다. 잉여가치율이 100%라면, 매주 생산되는 잉여가치는 5000파운드일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윤이다. 하지만 이 자본가는 또 플랜트, 건물 등등에 지불하기 위해 주당 2500파운드를 투자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이 그의 불변자본이다. 그러면 매주 투자된 총자본은 7500파운드가 될 것이며, 그의 총투자에 대한 수익률인 이윤율은 총자본에 대해 수취한 이윤의 비율로서, 5000파운 : 7500파운드 그러니까 약 67%가 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윤율의 존재는 경쟁이 어떻게 하여 진정한 생산관계를 은폐하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예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일상적인 계산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윤율이기 대문이다. 이 개념이 잉여가치를 총자본에 관계시키기 때문에, 노동력이 잉여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은폐된다. 마치 생산수단에 투자된 불변자본도 가치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데 기여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상품 물신성이라고 부른 것, 즉 자본주의 경제의 작용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가 물리적 대상들---사용가치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기계---에 의해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지배된다고 믿는 방식의 한 예이다. 그 효과는 이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자본가들의 주장, 즉 자본가들도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생산물의 생산에 협력했으므로, 생산물의 분배에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지분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윤율에 대해서는 이러한 신비화 이외에 더 살펴볼 것이 있다. 마르크스는 지배적인 생산조건에 따라 이윤율이 산업마다 다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또 하나의 개념,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가치텀으로)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계, 원료 등등의 양을 소요되는 노동력과 비교하여 나타낸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실제로 노동생산성의 척도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더 효율적으로 되면, 한 개별 노동자가 가동시키는 기계가 많아질 것이고, 노동자가 사용하는 원료 등등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 고도화된다. 이것은 이윤율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두 자본가 A,B의 경우를 검토해 보자. 각각의 자본가가 동일한 주당 임금 지불 소요액---5000파운드---을 가지고 있으며, 마르크스가 가정한 것처럼, 잉여가치율이 각각 100%로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그리하여 각자는 주당 5000파운드의 이윤을 수취한다. 그러나 A는 매주 5000파운드의 불변자본을 투자하고, 다른 산업부문에 있는 B는 10000파운드의 불변자본을 투자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A의 경우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은 5000파운드 : 5000파운드, 즉 1:1이다. 그의 이윤 5000파운드는 충자본 1000파운드에 대해 얻어진 것이므로, 그의 이윤율은 5000파운드 : 1000파운드, 즉 50%이다. 한편 B의 경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10000파운드 : 5000파운드, 즉 2:1로서 A의 두 배이다. B의 이윤율은 5000파운드 : 15000파운드, 즉 33%이다. 그리하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을수록, 다시 말하여 각 노동자가 사용하는 기계와 원료가 많을수록, 이윤율은 낮아진다. 왜냐하면 노동력만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자신의 투자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최대의 수익, 즉 될 수 있는 대로 최고의 이윤율을 획득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계, 건물 등의 양이 산업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시 말하여 어떤 산업들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다른 산업보다 높기 때문에, 자본은 이윤율이 더 높은 곳으로, 다른 말로 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더 낮은 곳으로 유입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가 B가 그의 자본을 A 산업에 투자하여, 50%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면, 단지 33%의 수익률만을 얻을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자본을 계속 투자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이윤율의 균등화라고 부른 것을 낳는다.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본 유입은 이윤율의 차이를 없애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경제 전체에서 생산된 총잉여가치와 투자된 사회 총자본 간의 관계를 반영하는 일반적 이윤율이 형성된다. 개별 자본들은 그들이 투자한 가변자본이 아니라, 그들이 투자한 총자본의 비율에 따라 착취된 총잉여가치에서 각기 자기 몫을 수취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마하는가 하는 것을 보기 위해 A와 B의 경우로 되돌아가, 그들이 경제체제에 존재하는 자본 전부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총잉여가치는 10000파운드이고, 사회 총자본은 25000파운드일 것이다. 일반적 이윤율은 10000 : 25000, 즉 40%일 것이다. 이는 B는 원래 33%보다는 높지만, A의 50%보다는 낮다. 이제 각 자본가는 그들의 총자본에 대해 40%의 수익률을 얻을 것이다. A는 그의 총자본 10000파운드에 대해 4000파운드의 이윤을 얻을 것이고, B는 그의 총자본 15000파운드에 대해 6000파운드의 이윤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각 자본가는 자신의 노동자들로부터 500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추출했으므로, 1000파운드가 그들간에 이전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불행히도 A와 B 두 자본가만 있는 위의 예는 이러한 잉여가치의 이전을 낳는 메커니즘을 보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지만, 우리는 계속 위의 예를 사용하여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자본가 B는 A가 자기보다 더 높은 이윤율을 수취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연히 자기 자본의 일부를 A 산업으로 이전시킬 것이다. 이는 A 산업의 생산을 증가시킬 것이며, 이같은 생산 증가는 이 재화의 공급이 그것에 대한 수요를 초과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공급되는 재화가 구매자보다 더 많게 되면, 그 재화의 가격은 저하할 것이다. 그리하여 A 산업의 상품은 급기야 그 가치 이하로 판매될 것이며, A 산업의 이윤율은 저하할 것이다. 거꾸로, 자본가 B가 자신의 화폐 일부를 자기 산업으로부터 빼내 갔으므로, B 재화의 생산은 감소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재화의 공급이 그 수요보다 낮아지고, 가격이 상승할 것이며, 결국 그 재화들은 자기 가치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될 것이다. 처음에는 낮았던 B 산업의 이윤율은 상승할 것이다. 자본은 항상 최고의 수익률을 찾아 다닌다. 이 ㅤㄸㅒㅤ문에 노동력에 비해 플랜트, 기계, 원료를 덜 사용하는 산업, 다시 말하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낮고 이윤율이 높은 산업에는 투자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그 산업의 재화 가격은 저하할 것이고 이윤율도 저하할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은 산업에서는 정반대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상대적 수익성에 따라 상이한 생산영역간에 항상 재분배되도록 하는, 자본의 "이와 같은 부단한 유출과 유입"은, "생산영역들에서 평균 이윤이 동일하게 되고, 따라서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공급과 수요의 비율을 만들어 낼" 때까지 계속된다고 보았다. 상이한 재화의 가격들이 모든 자본에게 동일한 이윤율을 얻게 해주는 수준으로 정해질 때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노동자들이 어느 곳에 고용되어 있든, 그들로부터 뽑아 낸 잉여가치를 모두 하나의 저수지에 모은 다음, 거기에서 자본가들이 자기가 투자한 자본의 양에 비례하여 이윤을 퍼가는 것과 같다. 잉여가치의 기원은 그리하여 더욱 신비화된다. 왜냐하면 한 자본가가 획득하는 이윤은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수행한 노동의 양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모든 현상"은, "가치는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리하여 경쟁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러한 외관은 일단 우리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전반적인 관계를 고려하면 사라진다. 자본가 전체뿐만 아니라 개별 자본가들도 각각의 특수한 생산분야에서 총자본에 의한 총노동계급의 착취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조건들이...... 불변이라면, 평균이윤율은 총자본의 총노동 착취 수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그들이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쥐어짜낸...... 불불 노동량을, 특수한 자본이 직접 생산한 잉여노동에 따라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특수한 자본이 대표하는 총자본의 상대적 지분에 다라, 이차적으로는 총자본이 생산한 잉여노동의 양에 따라, 자기들끼리 나눠먹는 싸움(이 싸움이 경쟁이다)을 벌인다. 자본가들은 적대적인 형제들처럼 다른 인민의 노동으로부터 약탈한 것을 자기들끼리 분배하며, 그리하여 평균하여 한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동등한 양의 불불 노동을 수취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호 경쟁에서는 그렇게도 형제답지 않게 행동하는 자본가들이 왜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해서는 진정한 비밀결사를 결성하게 되는가 하는 것에 관해 수학적으로 정확한 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윤율의 균등화 때문에 가치법칙이 수정된다. "일반적 이윤율의...... 출현은 가치들이 그것들과는 다른 생산가격으로 전형되는 것을 필연으로 만든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앞의 자본가 A, B의 예로 돌아가 보자. 자본가들의 주당 생산물의 가치를 계산하기 위해, 그들이 매주 투자하는 불변자본이 전부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들로 이전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들의 주당 생산물의 총가치는 잉여가치+가변자본+불변자본과 같게 된다. A의 경우 이것은 5000+5000+5000=15000 이 되고, B의 경우 이것은 5000+5000+10000=20000 이 된다. 하지만 이윤율의 균등화는 1000파운드의 잉여가치가 A로부터 B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생산된 가치는 이 재분배를 고려하기 위해 수정되어야만 한다. 즉, A의 경우 우리는 4000+5000+5000=14000 을 얻을 것이며, B의 경우는 6000+5000+10000=21000을 얻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일반적 이윤율의 형성을 반영하는 이러한 전환된 가치를 생산가격이라고 불렀다. 생산가격의 형성은 "자본은 다수 자본으로서 존재하며, 오로지 다수 자본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경쟁이 우선 하나의 생산분야에서 달성하는 것은, 상품의 다양한 개별 가치로부터 단일한 시장가치와 시장가격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상이한 분야들 사이에서 이윤율을 균등화시키는 생산가격이 성립되는 것은, 상이한 분야들의 자본들 사이의 경쟁에 따른 것이다."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가치 자체의 형성과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상품이 우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판매되도록 하는 것은 개별 산업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되는 것은 노동가치론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치와 생산가격의 괴리는 "어느 상품에 잉여가치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다른 상품에는 잉여가치가 너무 적게 들어감으로써 상품들의 생산가격과 가치 사이의 괴리는 서로 상쇄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항상 해결된다"고 지적한다. "사회 전체에서...... 생산된 상품들의 생산가격의 합계는 그들의 가치의 합게와 같다." 우리가 두 문단 앞의 A와 B의 경우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그들의 생산물의 총가치 35000파운드는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되기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전형 문제'(轉形問題)는 『자본론』제3권이 출판된 1894년 이래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으며, 오늘날에도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비판들 중 어떤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성립과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도 있다. 예컨대 전형 문제를 처음으로 논의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오이겐 폰 뵘바베크(Eugen von Böhm-Bawerk)는 마르크스가 『자본론』1권을 쓴 후 생각을 바꾸어, 상품은 결국 그 가치대로 교환되지 않는다고 결단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엥겔스가 『자본론』제3권을 출판할 때 지적했듯이, 『자본론』제3권이 근거하고 있는 초고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제1권의 최종 원고를 완성하기 전인(!) 1864년과 1865년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여하튼 그보다 더 전인 1861/63년 초고로 이루어진 『잉여가치학설사』는 마르크스가 자신보다 앞선 리카아도와 마찬가지로,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가 가치법칙의 수정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더 가치 있는 약간의 기술적 비판들도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전형 예에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이 나타내는 상품들의 가치도 생산가격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따라서 내 예에서도 그렇게 했듯이, 전형 이전에도 이후에도, A의 자본을 10000파운드로 또 B의 자본을 15000파운드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소비하는 재화와 그들이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플랜트, 기계 등등은 그 자체가 일반적 이윤율 형성의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생산가격으로 전형된 가치를 가질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 문제를 의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문제가 걱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후의 연구들은 마르크스가 틀렸으며,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완전한 전형은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들을 수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도달된 전형 문제에 대한 수학적 해법들이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 설명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몇몇 경제학자들은 아직도 '전형 문제'가 노동가치론이 거부되어야 하는 논거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요한 주장은 가치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서도 상품 가격을 결정하는 기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옳은 말이지만, 노동가치론의 핵심은 놓친 것이다. 노동가치론의 주요한 목적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을 결정하는 공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물론 마르크스의 전형방식을 정정한다면, 그러한 공식이 제공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의도는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역사적 발전의 경향을 폭로하는 것이다. 노동가치론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밟은 절차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이라는 그의 일반적 방법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1권과 제2권에서 마르크스는 '자본 일반',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기본 특징들을 분석하면서, 상품들이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고 가정한다. 이는 완전히 타당한 가정이다. 왜냐하면 전형 문제는 우리가 자본들간의 차이를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제3권에서 '다수 자본'의 영역, 그리고 다수 자본들간에 발생하는 경쟁을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상품들이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가정을 기각한다. 이는 우리가 "전체로서 자본의 운동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체적 형태들을 발견하고 서술해야" 할 때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본 일반'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추상, 즉 상품이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추상을 했던 한에서이다. 리카아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요한 비판은 리카아도가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를 가정만 했을 뿐이며, 경쟁으로부터 독립하여 가치와 잉여가치를 고찰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리카아도의 오류는 "추상력의 결핍이며, 상품의 가치를 검토할 때, 경쟁의 결과로서 그가 직면하는 요인인 이윤을 잊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태까지 '자본 일반'과 '다수 자본' 간의 관계를, 단지 그것이 어떻게 가치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가에만 촛점을 맞추어 정태적으로 고찰했다. 이제 우리는 더 동태적인 관점을 택하여, 자본들간의 경쟁이 부르주아 경제의 발전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검토하고자 한다. 축적과 공황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들로부터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자본의 축적이다. 노예제나 봉건제 사회에서는 착취자는 그가 직접생산자로부터 빼앗은 잉여생산물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생산은 여전히 사용가치가 지배하고 있었다. 생산의 목적은 소비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일단 지배하게 되면 사태는 변한다. 노동자들로부터 쥐어짜낸 잉여가치의 대부분은 소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의 증대를 위해 재투자된다. 이러한 과정, 즉 잉여가치가 더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항상 재투입되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불렀다. 『자본론』제1권의 유명한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자본축적이 어떻게 자본가계급에게 '절욕'(節欲)의 이데올로기를 낳으며, 그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소비조차 부정하고,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를 저축하여 재투자하도록 고무되는지 보여 주고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따라서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혹은 잉여생산물 가운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축적의 동기는 탐욕이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개인으로서 자본가는 탐욕적일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서 어떤 '물물교환의 자연적 속성'을 찾을 필요가 없다. 체제 그 자체가 자본가의 동기를 제공한다. 자본가가 인격화된 자본인 한, 그의 활동 동기가 되는 것은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략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그것의 증식이다...... 그런 한에서 그는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공유한다. 그러나 수전노의 경우에는 개인의 광기로 나타나는 것이 자본가의 경우에는 그가 단지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사회적 기구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적 기구'는 '다수 자본'간의 경쟁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은 그들이 스스로 자본으 로서 행동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축적 그 자체에 특히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잉여가치를 재투자하지 않는 자본은 자신의 경쟁자들, 즉 더 개선된 생산방법에 투자하여 더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게 된, 그리하여 자신의 상품 가격보다 저렴하게 상품을 내놓을 수 있게 된 경쟁자들에 의해 자신이 밀려나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축적하는데 실패한 자본은 이내 파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축적과정은 자본들간의 경쟁과 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원만하거나 평탄한 과정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축적과정은 또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마르크스가 시사하는 바는 생산이 항상 갱신되지 않는 한, 사회는 존속할 수 없으며, 생산의 갱신은 자본가들이 시장에서 실현한 가치를 생산에 재투입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재생산의 두 가지 형태를 구별한다. 단순재생산은 생산이 종전과 동일한 수준에서 재개될 때---따라서 경제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될 때---발생한다. 하지만 확대재생산은 잉여생산물이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사용될 때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에서 통상적인 것은 확대재생산이다. 『자본론』제2권에서 마르크스는 단순 혹은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조건들을 분것한다. 그는 여기에서 사용가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재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노동력과 생산도구를 구매할 수 있는 화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자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소비재와 그들을 작업시키기에 충분한 기계, 원료가 또한 존재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를 크게 두 부문, 즉 제Ⅰ부문과 제Ⅱ부문으로 나눈다. 경제의 제Ⅰ부문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부문으로서,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이나 원료를 생산하는 광산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다. 제Ⅱ부문은 식품이나 의복과 같은 소비재를 생산한다. 마르크스는 단순재생산이나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부문이 재화들을 특정한 비율로 생산해야만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경제의 상이한 부문들간에 이 비율들이 실제로 지켜지는 것은 대체로 우연적이다. 자본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을 위해서 생산한다. 생산된 것이 소비될 것이라는 그 어떠한 보장도 없다. 소비될지 여부는 상ㅇ품에 대한 유효수요(有效需要)의 존재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여 어느 누군가가 그 상품을 구매하기를 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화폐를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흔히 이 같은 유효수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경제공황이다. 예컨대 제Ⅰ부문(생산수단)의 자본가들이 잉여가치율을 증대시키려고 그들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제Ⅰ부문의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적은 양의 제Ⅱ부문 생산물(소비재) 를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Ⅱ부문의 자본가들은 이 같은 자기들 시장의 감소 사태에 대해 다시 신규 플랜트 설비에 대한 주문의 감축으로 반응할 것이다. 제Ⅰ부문의 자본가들은 다시 이 같은 자기들 생산물에 대한 수요의 감소에 대응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할 것인데, 이는 또 다시 이전과 동일한 제Ⅱ부문 자본가들의 반응을 낳게 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반복된다. 이러한 과정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는, 케인즈(J. M. Keynes)의 1936년 저작『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의 출간 이후에야 실제로 이해되었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을 이미 70년 전에 케인즈보다 먼저 『자본론』제2권에서 분석했던 것이다. 경제공황의 가능성은 상품의 본성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 단순상품유통이 C-M-C라는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상품이 판매되고, 화폐가 다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판매 다음에 구매가 반드시 뒤따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판매자는 자기 상품을 일단 판매하면, 그가 수취한 화폐를 축장(蓄藏)할 수도 있다. 자본가들이 바로 이렇게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자본가들은 투자를 하기에는 이윤율이 너무 낮을 경우 화폐를 축장한다. 그리하여 공황의 원천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계획적 성격에 있다. 마르크스가 썼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발적 성격 때문에, 균형 그 자체가 우연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공황이 가능하다는 것만을 보여 줄 뿐이다. 왜 공황이 현실적으로 발생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축적과정의 성격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경제공황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그가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라고 부른 것에 기초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법칙이 "모든 측면에서 근대 정치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며, 가장 곤란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법칙"이라고 썼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자본주의에서는 일반적인 저하 경향을 갖는다고 말한다. 단지 경제의 특수한 영역들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또 특수한 시기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러한데, 그 이유는 노동생산성의 지속적 증대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 이윤율의 점진적 저하 경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특유한, 사회적 노동생산력이 천천히 발달하는 것의 표현일 뿐이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질수록, 개별 노동자가 감당하는 기계와 원료가 많아지게 된다. 다시 말하여 플랜트, 설비 그리고 원료에 투자된 불변자본의 양이 노동자의 임금 지불에 사용된 가변자본에 비해 많아진다. 가치텀으로 말하면, 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잉여가치의 원천은 노동력이기 때문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수록, 이윤율은 저하한다. 그리하여 생산성이 증대하면, 이윤율은 저하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자본가들은 생산을 더 높이려고 투자를 하는가? 그 답은 자본가는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투자함으로써 이득을 보기 때문이며, 장기적으로는 손실을 입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으로 인해 투자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한 상품의 개별 가치, 즉 그것에 체화되어 있는 실제 노동은 그 산업에서 평균적인 생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가치, 즉 시장가치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제 이러한 평균적 생산조건을 사용하는 개별 자본가의 경우를 들어 보자. 그리고 개별 자본가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의 생산성을 평균 이상으로 올리는 신기술을 도입한다고 가정하자. 그의 상품의 개별적 가치는 그 사회적 가치 이하로 저하한다. 왜냐하면 그의 상품은 그 부문에서 표준적인 것에 비해 더 효율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상품의 가격을 사회적 가치보다는 낮은 수준으로 매김으로써 그의 경쟁자들보다 싸게 팔면서도, 자기의 개별적 가치보다는 높게 매겨, 초과이윤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자본가들도 남들이 자기보다 싸게 팔아 자신이 사업에서 밀려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신기술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러한 혁신이 그 산업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되면, 그 생산물의 사회적 가치는 혁신자의 상품의 개별적 가치 수준으로 내려가고, 그의 초과이윤은 소멸한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경쟁의 압력을 통해 신기술을 채택하여 노동생산성을 높이도록 강제된다.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은 그리하여 "경쟁의 강제법칙"으로서 작용한다고 마르크스는 썼다. 개별자본가가 "가치규정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개별 자본가의 상품 생산비를 높이거나 낮추는 한에서만이고, 그리하여 그것이 그의 지위를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이다." 각각의 자본가는 오직 경쟁자들을 타도하는 수단으로서만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 결과 모든 '다수 자본'은 가치법칙에 적응하도록 강제되며, 항상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도록 강제된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그들의 노동자와 경쟁자로부터 가로챌 수 있는 잉여가치의 양을 증대하려는 이 같은 모든 자구 행동들의 결과는 일반적 이윤율을 저하시키게 된다. 새로운 생산방법이 아무리 생산적이라 하더라도, 또는 그것이 아무리 잉여가치율을 올린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면, 그 방법을 자발적으로 사용할 자본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새로운 생산방법은 어느 것이나 상품을 저렴하게 하며, 따라서 자본가는 처음에는 그 상품을 그것의 생산가격보다도 높게, 아마도 그것의 가치보다도 높게 판매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상품의 생산비와 더 높은 생산비로 생산되는 다른 상품들의 시장가격 사이의 차액을 취득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산방법이 사회적 평균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은 그 새로운 방법을 보편화하고 그것을 일반적 법칙에 복종시킨다. 그리하여 이윤율의 저하가 야기된다. 이윤율 저하는 아마도 이 생산분야에서 먼저 나타나고 나중에 다른 분야의 이윤율과 균등해진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저하는 자본가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은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일정한 점을 넘어서면, 생산력 발전이 자본에 대해 장애가 되며, 따라서 자본관계가 노동생산력 발전에 대해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점증하는 힘을 반영하는 노동생산성의 증대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이 경제공황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기존 생산관계 사이에 점증하는 양립 불가능성은 격렬한 모순, 공황, 경련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윤율 저하는 마르크스가 한 자본주의 공황 분석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는 "일반법칙의 효과를 억제하고 상쇄하며, 그 법칙에 하나의 경향일 뿐이라는 성격을 부여하는 상쇄요인들이 작용하여," "법칙의 절대적인 관철이 저지되고 지연되고 약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를 초래하는 바로 그 원인들이 이 저하를 저지하고, 연기시키며, 부분적으로는 마비시키기까지도 하는 반대작용을 야기한다." 예컨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주어진 양의 상품을 좀더 적은 노동자가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는 과잉 노동자를 해고함으로써 이에 대응할 것이다. 이는 실제로 그가 최초에 신기술을 도입한 목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 자본축적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생산과정에서 축출하는 결과를 동반한다. 마르크스가 '상대적 과잉인구'라고 말한 것이 창출된다. 상대적 과잉인구는, 맬더스나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식량보다 인간의 수가 많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많은 인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과잉인구는 생존에 필요한 임금까지 박탈당하고 만다. 노동력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즉 그 생산에 소요된 노동시간---와 가격---그것에 대해 지불된 화폐량---을 갖는다. 노동력 가격은 임금이며, 다른 모든 시장가격과 마찬가지로 임금은 노동력의 공급과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등락에 따라 변동한다. 하지만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노동력의 공급을 추웁낳게 유지해 주기 때문에, 노동력 가격이 그 가치 이상으로 상승하는 것이 저지된다. 마르크스는 "임금의 일반적 변동은 산업예비군의 팽창과 수축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임금 철칙설'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 철칙설에 따르면, 임금은 노동자가 겨우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육체적 최저 수준 이상으로 상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지적했듯이, 소위 '임금 철칙설'은 맬더스의 인구론에 기초한 것이며, 따라서 완전히 오류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자본주의는 노동생산성의 항상적인 상승을 수반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가치의 지속적 감소를 초래한다. 소비재의 가치 저하는, 노동력의 가치가 저하한다 할지라도, 노동자의 임금 구매력이 과거와 동일한 수준에서 유지되거나 심지어 상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절대적으로는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상승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전히 악화된다. 왜냐하면 잉여가치율이 상승하고, 따라서 그들이 창조한 총가치에서 그들의 지분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자본가의 입장을 강화하며, 자본가로 하여금 잉여가치율을 증가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만약 자본의 총량이 동일하게 유지된다면, 이윤율은 상승할 것이다. 그리하여 더 높은 착취율은 이윤율 저하에 대한 상쇄요인의 하나이다. 하지만 착취율의 상승은 모순적 효과를 낳는다. 만약 착취율의 상승이 노동생산성의 증가를 통해 성취되었다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될 것이며, 이 경우 잉여가치율의 상승은 이윤율의 저하를 의미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상황이 이윤율의 저하에 전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 상승으로 경제공황을 설명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를 거부했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잉여가치율......의 상승 경향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저하를 임금률의 상승으로 설명하는 것---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다...... 노동이 덜 생산적으로 되기 대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더 생산적으로 되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다. 잉여가치율의 증가와 이윤율의 저하는 노동생산력의 증대를 자본주의적으로 표현하는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와 마찬가지 이야기를 또 다른 상쇄요인인 불변자본 요소들의 저렴화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Ⅰ부문, 즉 생산수단 생산부문의 생산성 상승은 불변자본을 구성하는 플랜트, 기계 등의 가치가 저하함을 의미한다.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 비율(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증가와 함께, 노동생산성도 증가하고, 사회적 노동생산력 발전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노동생산성의 증대 결과, 기존의 불변자본 가운데 일부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감가(減價)된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그것에 원래 투하된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재생산될 수 있는 노동시간에 의존하는데, 이 후자가 노동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감소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많은 비판가들(그들 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있다)은 이처럼 노동생산성 상승이 불변자본의 요소들을 저렴화한다는 사실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 다시 말하여 생산수단과 노동력 간의 물량 비율이 엄청나게 증가한다 할지라도,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비용이 저하하기 때문에, 가치텀으로 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종전과 동일한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시하고 있는 점은 자본가들이 중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원래 투자에 대한 수익이라는 점이다. 자본가가 플랜트, 설비 등에 지출한 돈은 이들 생산수단을 원래 가치대로 구입한 것이지 미래에 그것들을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구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본가는 이 원래 투자에 대해 적정한 이윤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공황 자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불변자본의 가치가 "그것에 원래 들어 있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재생산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맞추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주로 공황을 통해서이다. 경제공황은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공황은 어떤 중요한 원료 가격의 갑작스런 상승---예컨대 1973~74년 석유 가격의 4배 상승---으로 초래되기도 한다. 흔히 공황은 금융체제의 어떤 혼란---예컨대 주요 은행의 파산 혹은 주식시장의 붕괴---을 통해 시작된다. 『자본론』제3권의 많은 부분은 점점 많은 화폐가 은행 자신을 통해 창조되는 결과로서 신용체제의 발전이 어떻게 하여 공황을 저지하는 동시에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하지만 공황의 배후에 있는 원인은 항상 이윤율의 저하 경향과 그것이 동시에 작동시키는 상쇄요인이다. 우리는 상품의 본성 때문에 C-M(판매) 다음에 M-C(구매)가 반드시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상품을 판매하여 획득한 화폐는 다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축장될 수도 있다. 이는 경제공황 시에는 대규모로 이루어진다. 엄청난 양의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이전의 생산양식들과 구별하는 것이다. 노예제와 봉건 사회에서는 공황은 모든 사람들을 먹이기에도 충분치 못한 과소생산(過少生産)과 부족의 공황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공황은 과잉생 산 공황이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생산물의 양이 그것들에 대한 필요에 비해 과잉"임을 의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생산의 한계가 결코 생산자들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에 의해 설정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의 적정 이윤을 실현하기에는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우리는 서방에서는 농산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 산더미 같은 버터와 호수 같은 포도주의 재고가 쌓이는데도, 제3세계에서는 7억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공황은 자본축적의 내적 모순들에 의해 야기되는 동시에, "공황은 항상 기존 모순들의 일시적·폭력적 해결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의 감가 혹은 평가절하라고 부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본이 생산한 재화들에 대한 시장의 붕괴는 많은 자본들을 파사나게 한다. 그 결과 많은 양의 자본이 파괴된다. 자본의 파괴는 때때로 말 그대로 이루어진다. 즉 기계가 녹슬고, 재화가 썩거나 파괴된다. 하지만 가격 저하는 동시에 생산수단 가치의 대부분을 청산한다. "공황을 통한 자본의 파괴는 가치의 파괴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그 후 이 자본이 자본으로서 자신의 재생산과정을 동일한 규모로 갱신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경제공황을 통해 불변자본의 가치는 그것을 원래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 재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으로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낮아지고, 따라서 이윤율이 회복된다. 그리하여 공황은 자본을 복구시켜, 그것이 수익성 있게 사용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기존 자본의 가치 감소---이것은 이윤율의 저하를 저지하고, 새로운 자본을 형성하여 자본 가치의 축적을 촉진하기 위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하는 수단이다---는 자본의 유통과정과 재생산과정이 진행되는 주어진 조건들을 교란시키며, 따라서 생산과정의 갑작스러운 중단과 공황을 수반한다. 공황이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저지하는 데 기여하는 다른 방식들도 있다. 마르크스는 "공황은 항상...... 임금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노동자계급이 연간 생산물 가운데 소비로 사용하는 부분이 더 큰 몫을 실제로 받는 바로 그러한 시기에 준비된다"고 말했다. 이는 경제호황의 절정에서는 가능한 한 큰 시장 지분을 차지하려는 많은 자본들 때문에 상품들에 대한 초과수요가 생겨나 많은 상품들이 희소해지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경제 성장이 가속됨에 따라 산업예비군이 줄어들고, 노동자들, 특히 숙련 노동자들이 희귀해진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강화되어, 노동력 가격의 인상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임금률이 상승한다. 그런데 경제공황이 일어나면, 실업자가 증가하여, 고용주는 임금을 인하하고, 아직 해고되지 않은 노동자에게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황은 투자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이윤율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가 재조직되고 재형성되는 시기이다. 모든 자본들이 이 과정에서 똑같이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취약하고 비효율적인 기업들, 특히 낡은 기계의 부담이 큰 기업들은 사업에서 도태된다. 강하고 효율적인 자본들이 살아남으며, 침체 후에는 더 강력해져서 등장한다. 그들은 매우 낮은 매매 기준 가격으로 토지와 생산도구들을 긁어 모을 수 있으며, 잉여가치율을 제고할 수 있는 노동과정의 변혁을 노동자들에게 강제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공황은 마르크스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라고 부른 과정에 기여한다. 자본들의 규모가 잉여가치의 축적을 통해 증가할 때, 집적(集積)이 발생한다. 한편 집중(集中)은 더 큰 자본들이 더 작은 자본들을 흡수하는 것이다. 경쟁과정 자체는 이 추세를 조장하는데, 이는 더 효율적인 기업들이 자신들의 경쟁자들보다 싸게 팔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파산한 경쟁자들을 합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불황은 불황 후 생존한 자본들이 생산수단을 저렴하게 매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 과정을 가속한다. 그리하여 개별 자본규모의 항상적인 증가는 축적과정의 불가피한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근대 산업에 특징적인 진행과정은 (더 작은 규모의 변동에 의해 중단되는) 평균 수준의 호황, 활황, 공황 그리고 침체로 이루어지는 주기적인 형태를 취한다"고 썼다. 호황과 불황의 교체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인간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공황과 호황으로 살아간다...... 공황과 호황은 자본주의의 탄생기부터 자본주의에 내재하며, 무덤까지 자본주의를 따라갈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공황이 자본축적에 내장되어 있는 방식에 대한 분석은 매우 높은 추상 수준에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분석은, 우리가 마지막 장[8장]에서 보게 되듯이, 자본주의 체제가 노쇠함에 따라서 일어나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으로 인하여, 공황이 예전처럼 수익성 있는 축적조건들을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점점 곤란하게 되는 사태에 대한 설명으로 정교화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이해하려면 『자본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결론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현실이 변증법적이며, 내부에 모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일반적 명제를 예증한다. 예컨대 한편에서 기술진보, 즉 새로운 생산방법의 도입은 자본주의의 존재 그 자체의 일부이다. 경쟁의 압력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항상 혁신하도록 강제하고, 그렇게 해서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공황을 발생시킨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공산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를 항상 변혁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생산관계와 사회의 모든 관계들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낡은 생산양식을 변하지 않은 형태로 유지하는 것은...... 이전의 다른 모든 산업계급들의 일차적 존립조건이었다. 생산의 항상적 변혁,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영속적인 불확실성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시켜 준다. 자본주의와 그것에 선행한 사회들 간의 차이는 생산관계로부터 생겨난다. 생산물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가 지배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는 어디에서나 잉여노동이 대체로 한정된 욕망의 범위에 의해 제한되며, 따라서 잉여노동에 대한 무한정의 갈망은 생산 그 자체의 성격으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봉건 영주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익숙한 방식대로 사는 데 필요한 지대를 그의 농민들로부터 수취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자본가는 "잉여노동에 대한 게걸스러운 탐욕", "굶주린 늑대와 같은 잉여노동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경쟁자들의 기술 진보를 따라잡으려는 필요(그렇지 않으면 파산하기 때문에)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전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향수와 같은 애착을 가지고 있던 낭만주의자들에 대항해서, 그가 "자본의 위대한 문명화 효과"라고 부른 것을 단호히 옹호했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자본주의적 생산을 고찰할 때 오직 생산력의 발달에만 주의를 집중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리카아도에 대한 감상주의적 반대자들이 그랬듯이,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생산이아먈로 인간 생산력의 발전, 다시 말하여 목적 그 자체로서 인간 본성의 풍부함의 발전이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이다. 자본주의는, 국경과 편견을 넘어 나아가고, ...... 또 모든 전통적인, 속박된, 자급자족적인 틀에 갇혀 있는 욕망의 충족과 구래의 생활방식의 재생산을 넘어 나아간다. 자본주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파괴적이며, 그것을 항상 변혁하며, 생산력의 발전, 욕망의 확대, 생산의 다양성, 자연력이나 정신력의 이용과 교환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파열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자본주의가,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가장 합리적인 사회 형태이기는커녕, 생산력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그것에 대해 질곡으로 되는, 역사적으로 제한적이며 모순적인 생산양식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에 대해 외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닌, 자본의 자기보존을 위한 한 조건으로서 자본의 격렬한 파괴는, 자본이 빨리 지구에서 사라져 더 높은 단계의 사회적 생산에 자리를 내주라는, 자본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충고이다."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많은 논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붕괴가 불가피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영구적인 공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본 것처럼, "공황은 항상 기존 모순들의 일시적·폭력적 해결이다." 노동자계급이 실업, 생활수준의 저하, 노동조건의 악화라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자본주의 체제가 그것으로부터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공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황이 "사회적 생산의 더 고차적 상태"로 인도될지 여부는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행동에 달려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읽기위해 퍼나른다.

  • 등록일
    2005/04/27 12:34
  • 수정일
    2005/04/27 12:34
노동과 소외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주장은 가장 오래되고 동시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비난이다. 사회주의는 훌륭한 이념이지만, 우리가 인간 본성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빈곤과 착취와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인간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공격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아마도 기독교의 오래된 원죄 개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이야기할 때 여성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은 자기 이마에 카인의 낙인을 찍고 태어난 타락한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현세가 아닌 내세에서, 신의 축복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러한 주장을 세속적 용어로 바꾸어, 18세기 영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발흥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시장경제의 기원을 '거래하고, 바꾸고, 교환하려는 인간 본성의 경향'에서 찾았다. 이러한 생각들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스미스의 자유시장 경제학은 통화주의 속에 살아 있다. 모든 종류의 '과학적' 이론들은 경쟁과 전쟁이 인간 본성에 내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예컨대, 사회생물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이비 과학은 인간들이 실제로 땅뙈기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주장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예컨대 생물학은 저주를 섞어, 여자는 천부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요리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불변의 인간 본성을 전제하는 사상 전체를 뛰어넘었다. 그는 여섯 번째 테제에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란 개별적인 인간 각각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사회관계의 총체이다"하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추상적인 의미에서 '인간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가 변동함에 따라 인간의 신념이나 소망이나 능력도 변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유형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으로 변동해 온 '사회관계의 총체'를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나의 분석방법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주어진 사회 단계로부터 출발한다"고 썼다. 비록 마르크스가 불변의 인간 본성 개념은 거부했지만, 그는 매우 상이한 사회들에서 사는 인류가 어떤 것들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진실로 이러한 공통 속성이야말로, 인간사회가 변동하고 이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신념과 욕구 그리고 능력이 변동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요인이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자신의 생각을 상세히 전개했다. 여기에서 그는 포이에르바하의 유(類)적 존재로서 인간 개념을 이어받고 있지만 거기에 근본적으로 다른 내용을 부여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를 다시 한 번 인용하면, "인간의 본질은...... 그[포이에르바하]에게는 단지 '유(類)'로서만, 즉 많은 개인들을 오직 자연적인 방식으로 결합시키는, 내적인 무언(無言)의 보편적 성질로서만 파악될 수 있었다." 포이에르바하에게는 사람들을 사회로 함께 결합시키는 것은, 개인들을 서로에게 끌어당기게 하는 자연적이고 불변의 감정인 사랑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는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며 사회의 토대이다.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의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 대상세계를 상대로 노동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 생산은 그의 활동적인 유적 삶이다. 이 생산을 통하여 자연은 그의 노동으로 그의 현실로 나타난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그래서 인간은 생존하고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짓는 것은, 인간이 그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동물은 그 자체로서 생명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기 생명활동 자체를 자기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의식적인 생명활동을 가지고 있다....... 의식적인 생명활동은 인간을 동물의 생명활동과 직접 구별되게 한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그 자신이 수많은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추를 보면 더 명확해질 것이다. 하나의 꿀벌통은 고도로 조직된 분업사회인데, 개개의 꿀벌은 꿀벌 경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꿀벌의 작업은 반복적이다. 그 작업은 수백만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한 마리의 꿀벌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리부터 매우 좁은 범위의 행동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이러한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인간은 생산의 방법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고도의 지적 능력때문이다. 인간은 반성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서 물러서서, 그것을 같은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다른 방법들과 비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목표를 생각해 낼 수도 있다. 인간이 역사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연 역사는 어떤 종류의 동물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행동이 어떠한가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자연 세계의 변화는 단지 새로운 종이 나타날 때만 일어난다. 이와 달리 인간 역사는 같은 종이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의 변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의식은 인간이 참여하는 생산활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강조했다.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은 의식이나 종교 또는 그가 무언가를 욕구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들 자신과 동물을 구별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는데, [이러한 생존수단의 생산은] 인간의 신체조직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는 바의,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자라는 주장은 이전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회에 관한 기본 가정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합리적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에서는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는 힘을, 다른 모든 활동, 특히 역사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주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상의 고된 육체노동으로부터 구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노예 사회의 산물이다. 고대 세계의 지배계급은 육체노동을 노예에게만 적합한 활동으로 보았다.(노예에 대한 로마법의 정의는 말하는 도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보다 고상한 정신적인 일을 추구할 수 있는 노예소유주의 이미지였다.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부르주아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구별했는데, 그러한 구별 자체가 바로 그들이 살았던 계급사회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인간사에서 오직 정신적인 생활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취급했으며,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음식, 의복, 주거와 같은 잡다한 물질적 재화를 자신들에게 제공해 줄 것이라고 가정했다. 마르크스와 말한 바와 같이, "헤겔이 알고 인정했던 노동은 오직 추상적인 정신노동이었다."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을 인간 존재에 기본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뒤집었다. 그는 노동을 인간이 자연과 결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이 자연에 의존하여 생존한다는 것은 자연이 그의 몸체이며, 그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연과 교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의 이 '끊임없는 교환'은 이중의 과정이다. 인간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킨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영원한 '유적 존재'로 보는 개념을 조소했던 것처럼 자연이 불변이라는 생각을 조롱했다. 그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성적 세계가 영원한 옛날로부터 직접 주어져 항상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산업의 생산물이고 사회 상황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즉, 감성적 세계는 역사 속의 각 세대들이 이전 세대의 어깨 위에 서서 활동한 결과라는 의미에서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간단한 '감성적 확신'의 대상들조차도 오직 사회 발전과 산업 그리고 상업교류를 통해서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벗나무는 다른 거의 모든 유실수와 마찬가지로 겨우 수백 년 전에야 상업에 의해서 우리들이 사는 지역에 이식된 것이며, 또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회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만 이 벚나무는 포이에르바하에게 '감성적 확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생산은 마르크스에게는 사회적 활동이다. 그는 노동을 '이중의 관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자연적 관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사회적이라 함은 어떠한 조건 아래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목적으로든지 간에 여러 개개인들의 협업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사람들을 사회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치경제학자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된 개인 개념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자본주의 시장의 작동이 이러한 '자연인'의 욕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마르크스는 이들을 공격했다.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홉스가 말한 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즉 권력과 부를 둘러싼 끊임없는 투쟁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하는 데 쉽게 봉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환상을 '로빈슨주의'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이 마치 무인도에 사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경쟁 사회에서는, 개인은 이전의 역사 시대에는 자신을 특정한 인간 공동체의 부속물로 만들었던 그러한 자연적 유대 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 사회적 동물[공동체 속에서 사는 동물]이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오직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개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동물이다. 사회 바깥에서 고립된 개인이 생산한다는 것은...... 함께 살면서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인간세계 바깥에서 언어의 발전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이다. 생산이 가장 기초적인 인간활동이라면, 사회를 분석하고자 할 때 우리는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관계들', 영주와 농노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관계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생산이 사회적 활동이라면, 생산 조직의 변동은 사회의 변동을 초래할 것이며, "인간의 본질은 사회관계의 총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념이나 소망, 긔ㄹ고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의 핵심이다. 그 성숙한 해석은 다음 장에서 다를 것이다. 여기서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 나타나 있는 역사 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첫 번째 소묘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그의 비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분석방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게는 소외란 세계를 어떤 잘못된 방법으로 봄으로써 나타나는 순수히 지적(知的)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소외를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과정으로 파악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는 자신의 근력과 기술을 자본가에게 팔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통제할 수도, 자신의 노동 자체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된다. 그의 '생명활동'---그는 이를 통해 자신을 인간으로서 혹은 '유적 존재'로서 확신할 수 있다---이 되어야 할 것이, 어떤 목표를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인간 본성으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왜냐하면 그가 자연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인간화하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인간들로부터도 소외된다. 이러한 소외된 노동의 조건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를 낳는다. 이 관계에서는 일하지 않는 자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통제하고 그들로부터 이윤을 얻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노동자가 자기 노동생산물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세계로 보았다. 이 노동생산물은 소외된 형태인 자본이라는 모습을 취한다. 이러한 해석은 '1844년 수고'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개진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론'을 포함하는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들에서도 그러한 해석이 발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에 대한 그의 분석은 아직 자신의 ㅊ러학적 과거라는 딱지를 떼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모든 해석이 인간 본성이 어떠어떠하다---타락하고, 왜곡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존재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대조위에 구축되어 있다. '수고'에서는 자본주의는 여전히 일차적으로 비자연적인 사회이며, '지옥같은 사회'이다. 이는 푸리에나 다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인간 본연의 욕구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 관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약점에 대한 이러한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분석은 어떤 사회주의 이론에서도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들을 이전 사회주의자들의 저작들과 구분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전복시키는 물질적·사회적 조건을 창출하는 방식에 관한 그의 분석이었다. 마르크스는 '수고'에서는 아직 그가 '자본론'에서 말한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에 실제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일차적으로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을 어떻게 부인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데 관심이 있었다. 또, 계급투쟁을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고'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전복에서 계급투쟁이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질적인 언급도 없다. 공산주의는 '수고'에서는 아직 철학적 범주로서 그려지고 있다. 즉, 전체 역사가 그 목표를 통해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의 결과는 절대정신에 내재한 모순의 화해로서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헤겔의 순환적 변증법의 영향이 아직 강력히 남아 있다. 이러한 철학적 궤적은 정치적 효과를 가진다. 소외된 노동의 분석이 가지는 하나의 함의는 자본가들 자신도 소외되어 있으며, 비인간적이고 타락한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저주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주장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뿐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호소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은 자본가들 또한 부르주아 사회의 전복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가 1892년 그 자신의 초기 저작들에 관해 말한 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 대해서도 옳다. 근대 국제사회주의는...... 1844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책은 그 맹아적 발전 단계의 하나를 대표한다. 그리고 인간의 태아가 그 초기 단계에서는 아직 우리 물고기 선조들의 아가미 흔적을 재생산하듯이, 이 책도 근대 사회주의 선조들의 하나인 독일 철학의 흔적을 모든 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단지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교조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비롯한 사회 전체를 그 당시의 협소한 조건들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이론이라는 점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추상적으로 보면 분명히 옳지만, 실천에서는 완전히 무용하거나 종종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부유한 계급이 어떠한 해방도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집요하게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에 반대하는 한, 사회혁명은 오직 노동계급에 의해서 준비되고 쟁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의 저작들, '독일이데올로기', '철학의 빈곤', '자본론'과 그 초고들에서 마르크스는 그의 역사 이론을 충분히 발전시켰으며, 자본주의적 착취가 어떻게 노동자로 하여금 그 전복을 위해 집단적으로 조직하게 강요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1844년 수고'의 소외된 노동에 대한 분석은 엥겔스가 말한 바대로 후기의 성숙한 이론의 맹아이다. '자본'의 논리 "마르크스가 후세에 '논리학'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본론'의 논리를 남겼다"고 레닌은 썼다. 레닌이 이렇게 말한 것은, 비록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합리적 핵심'을 추출하는, '인쇄 전지 두세 매 분량'의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본론'이 그의 방법의 적용을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연구해 보면 우리는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해석에 깔려 있는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출발점은 헤겔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헤겔에게서는 그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립적 주체로까지 전화시킨 사유과정이 현실적인 것의 창조자이고, 현실적인 것은 다만 그 외적 현상을 이룰 뿐이다. 나에게는 그와 정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접근방법은 달리 말하면 유물론적이었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자의적인 전제들이 아니고 독단들도 결코 아니며, 오직 상상 속에서만 도외시될 수 있는 현실적 전제들이다. 이들 전제는 현실에 실재하는 개인들, 그 개인들의 활동, 그리고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그들 생활의 물질적 조건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들은 오직 경험적인 방식으로만 확인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실재하는 개인들, 그 개인들의 활동, 그리고 그들 생활의 물질적 조건들'을 단순히 관찰하거나 기록하는 것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은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항상 그것이 보이는 대로가 아니다. 예컨대 우리가 관찰을 통해 판단하면, 지구는 정지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러한 예를 '자본론'에서 들고 있다. "천체의 외견상의 운동은 그 실제 운동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고 감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대상세계의 운동을, 숨겨져 있는 실재와 외견상으로 나타나는 왜곡으로 구분했다. 그가 말하는 사물의 본질, 즉 내적 구조와 현상, 즉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 사이의 구별은 '자본론'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만약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사물의 본질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쓸모 없게 될 것이다"하고 주장했다. 현상이 실재와 다른 일반적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마르크스는 특히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그렇다고 생각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계급사회로서 자본주의는 그것의 운동에 대한 인식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의 배후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 마르크스는 그가 '추상력'이라고 부른 것에 호소한다. 그에 따르면 이 추상력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현실의 가장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을 포착하는 한편, 다른 모든 이차적이고 상관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개념을 형성시켜야 한다. 예컨대, 물리학은 어떤 물체의 색깔, 화학적 구성, 그리고 그것이 죽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혹은 살아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하는 문제들을 일단 제쳐 두고 그것의 질량을 다룬다. 이러한 질량 개념에 기초해 과학자들은 모든 물체에 적용되는 관성의 원리, 중력의 법칙, 자유낙하 법칙 등의 이론을 구성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노동가치론을 구성했을 때 이와 비슷한 추상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으로 보았다. "드디어 리카아도가 나타나서 과학을 불러낸다. 서라! 부르주와 체제의 생리학을 위한---그 내적 유기적 통일성과 생활과정을 이해하기 위한---기초이자 출발점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의 결정이다." 문제는 그러한 추상이 보통 현상과 모순된다는 사실이다(그래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학은 쓸모 없을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예컨대, 모든 물체는 1초에 32피트의 가속도로 떨어진다고 하는 자유낙하 법칙은 오직 진공 상태에서만 진리이다. 현실에서는 공기저항 때문에 돌맹이와 깃털은 동시에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리카아도와 마르크스 둘다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상품은 실제로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교환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추상이란 단지 과학적 분석의 출발점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은 우리가 기본 특징을 분리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음에 우리는 이러한 기본 특징이 우리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자신이 구성한 추상적 개념(노동가치론)과, 자신이 설명하고자 한 살아 있는 현실을 단순히 병렬시켜 놓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양자는 하나가 그 옆에 놓여진 채로, 각각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에게 추상은 단지 목료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즉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우회로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일반적 이윤율을 예로 들고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것은 노동가치론과 겉으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리카아도는 단순히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를 받아들였을 뿐, (마르크스가 한 것처럼) 노동가치론으로써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이 일반적 이윤율을 전제하는 데신에, 리카아도는 그것의 존재가 사실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과 얼마만큼 일치하는가을 조사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일반적 이윤율은 이 가치규정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모순되며, 따라서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는 수많은 중간항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추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수많은 중간항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이러한 과정을 마르크스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방법'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구체'란 우리가 관찰하는 바의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 그래서 경제학에서 예컨대 모든 사회적 생산 행위의 기초이고 주체인...... 인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것은 틀렸음이 드러날 것이다. 인구는 만약, 예컨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계급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하나의 추상이다. 이러한 계급들 또한 만약 그것을 규정하는 요소들, 예컨대 임금노동이나 자본 등을 알지 못하면 공허한 개념이 된다. 임금노동이나 자본은 다시 교환, 분업, 가격 등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자본은 임금노동, 가치, 화폐, 가격 등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인구로부터 시작한다면, 처음에 이것은 전체에 대한 혼돈되 개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간 규정으로써 더 단순한 개념들로 분석적으로 나아가고, 상상된 구체로부터 더 높은 추상으로 나아가서, 결국 가장 단순한 규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여행은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으로 다시 인구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구는 전체의 혼돈된 개념으로서 인구가 아니라 많은 규정들과 관계들을 가진 풍부한 총체성으로서 인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분석방법이다. 우선 우리는 현실이 다양한 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복잡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구체는 많은 규정들의 집적이며, 따라서 다양성의 통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력'을 사용하여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 이러한 '가장 단순한 규정'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추출해 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여, '이번에는 ...... 많은 규정들과 관계들을 가진 풍부한 총체성'으로서 구체적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구체적인 것을 헤치고 그 '가장 단순한 규정'에 도달하고, 다음에 추상에서 구체로, 이러한 규정을 사용하여 전체를 재구성한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할 때 이러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적 현실을, 그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총체성', '다양성의 통일성'이라고 불렀다. 사회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의 방법에서 핵심적이다. 사회의 다양한 측면은 오직 전체의 부분들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전체를 '가장 단순한 규정들'로 분해하는 것은 단지 그것들을 '많은 규정과 관계들을 가진 풍부한 총체성'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자들이 사회를 서로 현실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는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리하여 [그들의 이론에서는] "사회체제의 각 분야가 탈구되어 있다"고 했다. 일단 우리가 사회를 총체성으로 보게 되면, 사회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동한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자들에게 가한 또 하나의 비판은, 그들이 자본주의를 설명하기위한 법칙을 모든 형태의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생산관계를 ......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범주로 표현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위에서 언급한 [생산]관계에서 어떻게 생산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관계 자체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문제, 즉 그것을 출현시킨 역사적 운동을 그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방법은 다른 한편에서는 항상 역사적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그리고 일시적인 사회 형태이다. "경제적 범주들은 단지 사회적 생산관계의 추상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들 역시 사회가 변동함에 따라 변동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헤겔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사회형태를 포함하여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 모순적" 이라고 헤겔은 말했다. 그러나 헤겔은 사회의 적대관계를 결국 절대정신으로 해소시켜 버렸지만, 마르크스는 모순에는 끝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변동을 일으키는 것은, 봉건 사회의 모순이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동을 가져오듯이, 모순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변동을 일으킬 자체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변증법은 헤겔의 생각처럼 신이나 절대정신의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역사 발전의 이론이 된다. 각각의 사회조직은 그 안에 변동의 잠재력을 제공하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대립물의 통일'이며 역사발전은 이러한 대립물의 투쟁이다. 우리가 모든 계급사회가 대립물의 통일이며 한 계급이 다른 대립하는 계급을 착취한다고 말할 경우, 그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우리는 각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다만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은 임금노동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의 활력의 원천인 이윤의 창조자가 임금노동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은 ......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은 그래서 사회학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 사회학자들은 계급을 노동분업 속에서 수행하는 그들의 기술적 기능(화이트칼라 노동자, 육체노동자, 경영자, 전문직 종사자 등등) 으로 정의한다. 마르크스에게 계급이란 오직 적대적 관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어떤 의미에서는 계급투쟁이 계급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집단들이 계급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충돌하여 갈등하는 이해관계를 인식할 때이기 때문이다.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함의는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내재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회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사회갈등'의 존재를 기꺼이 수용하고 그것을 연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우연적인 어떤 것,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긴장의 산물로 간주되며, 기존 질서의 기본 틀을 해치지 않고 능숙한 '사회공학'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대부분의 비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에게는 사회란 본질적으로 조화로운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와 반대로 사회는 대립물의 통일이며, 그 속에서 계급투쟁이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투쟁은 기본 모순, 즉 사회 심장부에 있는 착취적 사회관계가 제거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헤겔의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 헤겔 변증법에서 세 번째 단계는 대립물의 화해를 포함하고 있다. 상호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들은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절대정신'의 동일한 두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각각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에게는 모순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한 쪽이 반대 쪽에 대해 승리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임금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는 단순히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변화나 사물을 보는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혁명적 사회변동을 통해서만 폐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방법은 사회를 서로 다른 모든 측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대립물의 통일로 보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오직 사회를 그러한 모순적인 통일로 봄으로써만 하나의 총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루동의 이른바 '변정법적' 방법은 모든 것을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으로 나누고 역사는 오직 나쁜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진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증법적 운동을 구성하는 것은 두 모순적인 측면의 공존, 그들의 갈등, 그리고 새로운 범주로의 용해이다." 나쁜 측면이야말로 투쟁을 제공함으로써 역사를 만드는 운동을 생산한다. 마르크스에게는 '나쁜 측면'---폭력, 착취, 투쟁---이 없이는 어떠한 역사적 운동이나 발전도 있을 수 없다. 영국의 인도 지배의 영향을 논의하면서 마르크스는 식민주의자들의 탐욕과 파괴성, 그리고 그 결과 '부지런하고 가부장적이며 비공격적인' 촌락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동정심을 가지고 기술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 식민주의가 '동양적 전제주의의 굳건한 기초'였던 '목가적인 촌락 공동체'를 쓸어버리고, 그 대신에 계급의 완전한 폐절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로 대체시킴으로써,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혁명을 야기하는 데서, 단지 가장 비열한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했으며, 또 이익을 얻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서 근본적인 혁명이 없이 인류가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영국은 그러한 사회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 노릇을 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폭력과 착취는 그래서 공산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것들은 불가피하다. 위대한 사회혁명이 부르주아 시대의 결과물인 세계시장, ㅤㄱㅢㄹ고 근대적 생산력을 정복하여 그것들을 가장 선진적인 인민(국민)들의 공동 관리에 복속키셔 버리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진보는 피살자의 두개골로부터만 감로주를 빨아먹으려고 하는 저 소름끼치는 이교도의 우상을 더 이상 닮지 않을 것이다. 실천의 철학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른 점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역사를 객관적 과정으로 보았다. 역사는 거기에 붙잡혀 있는 인간들의 의식과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사상가의 태도는 '웃거나 울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 스피노자에 두 사람은 모두 동의했다. 마르크스는 또한 단순한 도덕적 비판을 거부하는 것을 헤겔로부터 배웠다. 헤겔 좌파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도덕적 비판은 현존하는 사태와 바람직한 이상을 단순히 대조하고, 사회가 '어떠한가'와 그것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사이의 모순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정신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다. 그것은 현실 그 자체의 모순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극복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는 현존하는 사태에서 변동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고 현재의 상황 속에서 그 변동을 야기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행동은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에 그 기초를 두어야지, 사상가의 머리에서 나온 환상이나 좋은 의도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의식적인 인간 행동이 역사변동에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위대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빌면, '실천의 철학'으로 이해되어야 옳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사상을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역사를 본질적으로 관념의 역사이며 세계에 대한 개념의 변동이라고 본 헤겔과 그 추종자들, 계몽주의, 그리고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명백히 거부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상은 오직 사회생활의 부분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사회생활과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들의 개념, 관념 등등의 생산자이다. 즉, 그들은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산력 발전의 특정한 수준과 그에 조응하는 교류의 일정한 발전 수준---그 발전의 최고 형태에 이르기까지---에 의해 제약된다. 의식이란 의식된 존재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으며, 인간 존재는 곧 그들의 현실적 생활과정이다. 인간의 사상은 그래서 '현실적 생활과정', 즉 인간 생활의 물질적·사회적 조건들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이러한 생활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성이며 반향'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변동의 원천은 인간 존재가 새로운 세계관을 채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은 물질적·사회적 조건에서 일어나는 변동의 결과이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은 자신들의 현실 세계와 함께, 자신들의 사고방법과 사고의 결과물을 변화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열한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단지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고 주장했다. 이것은 청년 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 그들은 "모든 의식의 산물에 ...... 자립적인 존재로서 의의를 부여하고, 그것이 인간들을 실제로 얽매는 굴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의식을 변화시키라고 하는 [그들의] 요구는 결국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요구, 즉 세계를 다른 해석방식으로 인식하라는 요구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사상의 변동이 현실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을 변하지 않은 상태로 그냥 둔 채 단순히 현실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사상이 물질적·사회적 조건의 반영임에도 불구하고, 사상투쟁이 물질적·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투쟁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은 밑바닥부터 보수적인 관점이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인간을 단순히 사회의 희생물로 간주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비판자들은 노동자들은 착취로 인해 너무 볼품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독자적인 사상과 행동을 가질 수 없다고 너무나 쉽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인종주의·성차별 이데올로기, 그리고 선진 산업국가들에서 고용주들과 국가로부터 얻어낸 경제적 양보가 노동계급을 효과적으로 타락시켜 왔다고 믿는 사회주의자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점(그것은 마르크스 시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서 유행했다)은 밑바닥부터 엘리트적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세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은 환경과 양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반드시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그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하다---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그가 공격하고 있는 관점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부패하고 타락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 하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만들어 내는 사회주의에서나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치 절망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가 대중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폐절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면, 사회주의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어떤 식으로든 벗어날 수 있는 소수의 선각한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을 위해서 사회를 변화시킬 때에만 사회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유물론적으로 보이는 이 견해는 관념론으로 빠져들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난, 따라서 계급투쟁으로부터도 초연한 사람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취급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와 블랑키 같은 엘리트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모든 주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과 사회를 변동시키는 데 있어서 투쟁이 수행하는 역할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세 번째 테제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오직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들은 사회에 의해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조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착취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 형태이기 때문에, 즉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발생시킨다. 이 투쟁의 효과는 노동계급을 변화시킨다. 고용주와 싸워야 한다는 압력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해관계를 의식하는 계급으로서 점점 집단적으로 조직화하고 행동하게 된다. 투쟁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자본가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승리의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쟁점을 둘러싼 것이라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해 준다. 계급투쟁은 또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도 결정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모순 때문에 붕귀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승리는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변증법의 결과는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 그리고 자신감에 달려 있다. 이상의 논의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사회주의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주장에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해방자이다. 다른 어떤 사람도 그들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좋은 의도를 가진 공상적 개혁가도, 블랑키주의적인 모험가의 음모도 그들에게 사회주의를 선물할 수 없다. 마르크스가 쓴 국제노동자협회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들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 해석이 '결정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주의가 불가피한 것이라는 의미라면,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계급투쟁의 '혁명적 실천'이라는 형태로서 인간의 행동이 자본주의의 운명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머리에서 명확하게 썼듯이,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넘겨받아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에 인간 행동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지배적인 물질적·사회적 조건에 달려 있다. 이러한 조건에 대한 분석이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