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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15
    자원봉사자와의 대화
    간장 오타맨...
  2. 2008/11/15
    필리핀 음식을 접하다.
    간장 오타맨...
  3. 2008/11/15
    아주대학교 학보사 인터뷰 글
    간장 오타맨...
  4. 2008/11/15
    이주민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교육
    간장 오타맨...
  5. 2008/11/15
    이주노동자 봄 나들이를 갔다오다
    간장 오타맨...

자원봉사자와의 대화

  • 등록일
    2008/11/15 23:40
  • 수정일
    2008/11/15 23:40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러온 학생의 학부모와 대화를 나누었다.
자원봉사활동을 함께하면서 마음 아픈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학부모의 말씀을 듣는다.
왜 진작 몰랐는데.... 노동재해를 당한 이주노동자들이 있는 병원 병문안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한글을 몰라 작업장에서 노동재해를 당하고 있어 직접 자가용을 몰고 일요일마다 이주노동자들을 데리고 한글교실에 데려온다.
처음에는 아이의 자원봉사 접수를 위해 오셨다가 알아나가면서 마음이 아프시다는 학부용의 말을 들으면서 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인데... 너무 무심하게 넘어가고 있는 한국인들 아니 지역민들이 무심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이 학부용처럼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마음속으로 인지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학부모와의 대화... 얼마전 네팔인중 형이 데모때문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눈물을 짖던 이주노동자 그리고 형이 경찰서에서 나와 오토바이를 타다 교통사고로 이승의 삶을 등진 사건과 네팔인, 필리핀인, 방글라데시, 베트남인, 중국인 들의 사례를 설명하였다.

네팔의 민주화 투쟁사례를 통해 이들이 버마(현재 랭군) 민주화투쟁을 하고 있는 분들과 같이 고국에 돌아가면 탄압을 받을 민주인사라고 말을 해주고 네팔의 왕정의 폭압과 네팔인의 해외 민주화 투쟁(유럽, 일본, 미국, 한국, 홍콩 네팔 믽모임의 기자회견 및 민주화 염원을 위한 그/녀들의 행보를 말하였다.)사례를 설명하고, 필리핀인 제니씨의 누나의 병고로 인한 사망소식을 접하고 센터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을 지켜본 이야기, 얼마전 고국으로 돌아간 라삐네 아버지가 작업도중 과로사로 사망한 이야기, 베트남 여성이 사업장의 한국인에 의해 성폭행을 당해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낙태를 하게 한 이야기(낙태를 금지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눈물 짖는 모습으로 인해 도저히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다.), 중국인 권홍매씨의 국제결혼한 가정이 다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남편의 의처증으로 구타와 폭행으로 이해 고통 받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자원봉사자 학부용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아 차린듯 고개를 떨군다. 오늘 한글교실과 병원에서 노동재해를 입은 이주노동자의 밝은 미소뒤에 한국에서의 처한 노동현실이 어떠한지를 조금은 알아차린 듯이 고개를 떨군다.

이 이야기는 다른 센터도 마찬가지 이다. 그렇다고 마음만 아파할 사항이 아니다. 그/녀들이 스스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을 건설하여 이러한 기본권리 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소수자로 전락하여 처한 현실에 언제까지 한탄만 하고 가슴아파할 일이 아님을 이 일에 접하면서 알고 있다. 그들에게 알량한 지원이나 마음 아파해주는 것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들과 함께 이러한 사건들이 해소되고 자유롭게 고국과의 왕래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고 있지 못한 현실이 문제이다.

자유롭게 노동할 권리와 이동할 권리가 무엇보다 이들에게 소중하다. 단지 돈을 벌러 왔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말하기전 그/녀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였으면 한다. 그/녀들은 불쌍하다는 말로 시혜를 받기를 거부한다. 당당히 인간으로서 대우받고 싶어하고 자신의 정당한 노동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업주는 그/녀들을 이용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나마 빨간글씨의 날짜를 쉬게하는 사업주는 그나마 낳은 조건에서 일을 한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지만 자원봉사자 학부용과의 대화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의 일부를 이야기해 주었다. 네팔인은 오늘에서야 형의 죽음소식을 듣고 단식을 하다가 오늘 밥을 먹고 기운을 내고 있다고, 이 일이 오산에서 뿐이더냐..... 전국에서 이러한 일들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다만, 우리는 이주노동자 그/녀들과 함께하고 있지 않기에 잘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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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음식을 접하다.

  • 등록일
    2008/11/15 23:39
  • 수정일
    2008/11/15 23:39
내가 속한 센터에 함께하고 있는 필리핀이주노동자 대표가 맴버 생일이라고 초대를 하였다.
그래서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귀거하고 있는 지역에 가보았다.
토요일 오후 퇴근을 하고 모인 필리핀 이주노동자들.... 일때문에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단속추방으로 인해 서로의 안부가 중요해서 였는지 아니면 공장 일로 인해 자주 만날 수 없어서 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들은 만난이들 마다 반가움이 듬뿍 배겨난 인사를 하며 그 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내가 배운 말로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소통 그리고 대화는 하는 것이 이리도 소중한 것임을 잠시나마 깨달아 보았다.

친구의 생일이라 모인 사람들은 서로 입담을 나누면서 친구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무언가 준비를 위해 친구들이 음식을 같이 만들어 준다. 우리는 초대한 필리핀 이주노동자 대표를 만나기 위해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 친구가 나오면 함께 간단히 음식을 먹고 축하해주고 발길을 돌리려고 하였다.

시간이 조금지나니 퇴직금과 체불임금 건으로 센터에 방문한 필리핀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우리는 자주 못오는 것을 빌미삼아 농담을 섞어가며 퇴지금과 체불임금 다 받으니 안온다고 핀잔을 주니... 일이 바쁘고 요즘 출입국관리소 단속으로 친구들이 하나둘 잡혀가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속내를 이야기한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괜찮다고 우리는 말하고 잡히지 말고 몸 건강히 목적한 바를 이루라고 말한후... 생일상이 차려진 장소로 갔다.

음식은 단촐하였다. 우리 음식과 그리 차이는 없지만 다만, 쌀은 우리가 찬질밥을 좋아한다면, 이들은 찬질밥보다는 꼬두밥 정도로 물기가 없는 밥을 즐겨 먹는다. 해놓은 밥을 먹고, 필리핀인들이 즐기는 돼지고기 요리(한국 불고기정도), 국수에 닭을 볶은 음식, 한국의 닭도리탕과 같은 음식, 달걀과 우유로 만든 무척 단맛이 나는 요리들을 먹었다. 처음으로 필리핀 음식을 먹는데... 그나마 먹을 만하다. 조금 우리와 맛이 다르지만 그래도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에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아.... 자주 보기 어렵지만 정겨운 이들과 함께 먹는 음식만이 좋았다.

그리고 그날의 핵심요리는 민물고기인 뗄라삐야라는 요리인데.... 시간이 없어 음식에 양념을 넣고 잘 하지는 못했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를 숯불구이 통 위에 올려 놓고 익혀가면서 간장과 양파를 썩은 소스에 찍어먹는 맛도 별미이다. 이렇게 난 여러나라 음식을 먹으면서 비록 해외는 나가지 못했지만 여러나가 음식만으로도 서남아시아를 시작해 동남아시아 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리고 이 맛도 맛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나라별 사람들의 소소한 삶 그리고 소박하지만 희망을 지니고 힘겹지만 현실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보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어제 갔을때... 센터에 자주 오는 포천에 있는 필리핀인 존갈랑씨가 필리핀 산재환자 하나를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와 존갈랑씨를 초대하였는데 포천에 있는 필리핀 결혼한부부 파티가 있어 참석을 못하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주었다.

생일을 맞은 필리핀인에게는 축하한다는 말과 준비해준 음식 맛나게 그리고 맛있게 먹었고, 이 음식잔치로 인해 우리가 마치 필리핀에 와서 풍성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포만감에 젖은 배를 부여잡고 내가 머물고 있는 센터로 왔다. 오는 길 비가 한두방울 내리더니 소낙비가 연실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밖에서 생일을 맞아 즐겁게 놀고 있을 필리핀 그/녀들이 생각이 났다. 부디 어제의 생일파티가 즐겁게 끝났기를 바라고, 부디 몸 건강히 이 곳에서의 생활을 목적한바 달성하고 그리운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갔으면 한다.

그리고 이후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투쟁으로 한국에서 정착하고 싶은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정당한 노동기본권을 행사하는 날.... 그리고 자유롭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쟁취되는 그날이 하루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 우리도 그 투쟁의 길에서 늘 함께하고자 한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의 노동자와 동일한 직분을 습득하고,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길에 함께 나가야 겠다.

그 해맑은 미소가 눈물을 먹금지 않고 단속추방의 불안에 더 이상 떨게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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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 학보사 인터뷰 글

  • 등록일
    2008/11/15 23:38
  • 수정일
    2008/11/15 23:38

1. '오산이주노동자센터'  간략한 설명, 성격 요약

오산이주노동자센터는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한국사회에서 정책과 제도개선을 이끌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며, 주요하게는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와 함께 이주노동자 투쟁 조직과 교육 그리고 문화 활동 공간입니다. 밖으로는 한국노동운동이 국제연대를 위한 기틀을 확립하고, 아시아 바닥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한 노동운동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2. 이주노동자 조합도 같이 설립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센터와 같이 연계돼 있는 것인지?

오산이주노동자센터는 이주노동자 명성농성투쟁 때부터 이주노동자후원회에 참여하여 함께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380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을 마치고 수도권이주노동자노동조합 준비모임을 결성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에 센터도 이주노동자 중심의 이주노조건설을 통한 이주노동자 주체형성이 무엇보다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독자적 이주노동자노동조합 건설 준비모임에 함께 참여하여 작년 4월 24일 이주노조 출범식까지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노조 출범 이후에는 오산이주노동자센터 회원들을 이주노조에 참여시키기 위한 조직 활동을 오산화성용인평택 인근 센터에 소속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이주노조 경기남부지부장과 오산분회장이 함께 센터와 연계하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주연대단위회의에 초기에 참여하였고, 현재는 지역상황으로 인하여 경기이주공대위활동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3. 최근 '코스쿤 셀림'사건에 대한 생각, 의견

2월 27일 터키 이주노동자 코스쿤 셀림씨 수원출입국관리소에서 사망사건은 정부의 강제단속이 부른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미등록이주노동자와 지원 단체들은 우선적으로 코스쿤 셀림씨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의 인간사냥식 강제단속이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강제단속저지와 이주노동자 故 코스쿤 셀림씨 사망사건 공대위”(이하 공대위)가 결성된 배경에서도 보여주듯이 강제단속은 이주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으며, 강제단속 저지 없이는 이주노동자 근원적 문제해결을 위한 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작년 10월 28일 수원출입국관리소에서 중국 이주노동자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렇듯 이주노동자들은 강제단속으로 인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고, 이후에도 강제단속이 저지되지 않는 이상 이주노동자들의 사회적 타살은 끊이질 않는 사회적문제로 붉어질 것입니다.


 정부는 코스쿤 셀림씨를 죽음으로 이끌게 한 강제단속 중단과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노동비자, 이주노조 합법화, 노동허가제 도입이라는 이주노조가 주장을 수용해야 합니다. 



4. 이주노동자와 관련해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코스쿤 셀림씨 사건에서 보여주듯이 강제단속이 중단되어야 합니다. 인간사냥이라 표현될 정도로 출입국에 의한 강제단속의 형태는 그물 총, 가스총, 전기충격봉 등을 동원한 마구잡이식 단속으로 폭력과 강제연행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시간에도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단속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 강제단속의 공포는 당하지 않는 사람이면 느낄 수 없다고 흐느끼며 말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차츰 늘고 있습니다. 강제단속의 공포와 불안감은 여러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년 병점의 한 공장에서는 방글라데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단속추방을 피하기 위해 2층에 뛰어내려 다리관절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고, 직장동료들이 들어오는 것을 출입국직원이 단속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심장마비로 사망하는가 하면, 군포지역에서는 방글라데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에 문을 부수고 들어와 가스총, 전기봉을 동원한 전쟁을 방불케 폭력연행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비단 오늘 어제 일 만은 아닙니다.


반복되는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제단속이 시급히 중단되어야 합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단속으로 강제추방 시키겠다는 발상에 의한 강제단속은 결코 이주노동자들을 추방시킬 수 없음을 정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단속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5. 현 센터에 나오는 이주노동자 중 임금체불이나 그 밖의 이주노동자 관련 문제를 겪고 계신 인원 및 한 가지 사례


- 사례1.

 방글라데시 가니 미아씨의 체불임금 사례입니다. 임금을 13개월분이 체불(표준근로계약서에 작업을 포함한 월 120만원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였고, 이 근거로 체불임금을 산출해보니 1,560만원의 임금이 체불된 상태이고, 퇴직금을 합산하면, 액수는 더 늘어남.)에 대한 상담이 들어왔음. 이에 센터에서는 회사와 연락을 취하고 대표이사와 통화를 하였지만 나중에 센터에 방문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연락을 끊었음. 그리고 계속해서 연락이 되지 않아 노동부에 진정서를 냈지만 사장은 계속해서 체불임금을 못주겠다는 입장만을 되풀이 하였지만 사장이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부근로감독과에서는 체불임금 미지급에 따른 형사 처벌조항에 따른 벌금부과만을 할 뿐 이주노동자는 다시금 민사소송을 진행하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다시금 대한법률구조공단에 이 사건에 따른 진정을 내었지만 증인확보와 사장이 돈이 없으면 돈을 못 받는다는 절망적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센터에서는 회사 앞에서 집회신고를 하고 방송차를 동원한 집회를 진행하여도 사장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가 방글라데시 가니 미아씨만의 문제만이 아님.


 대부분의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체불임금으로 지급받지 못한 돈이 개인당 평균 300-400만원정도가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오래된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회사 사장의 도피, 그리고 3년 기간이 지나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한 사례가 많다.



- 사례2.

 작년 4월 화성 정남에 위치한 공장단속으로 잡힌 이주노동자 4인에 대한 회사의 퇴직금 미지급 건으로 화성보호소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체불임금과 퇴직금 미지급을 우선적으로 해결한 후 이주노동자들을 출국시켜야 하지만 강제단속으로 이주노동자를 일단 연행한 후 임금과 퇴직금을 제대로 정산시켜주지 못하고 출국시킨 사건이다.


 1992년 이 공장에 들어온 네팔이주노동자는 회사와 함께 한국생활의 꿈을 키워갔던 젊은이였다. 이 젊은이가 한국에서 결혼도 못한 채 마흔의 나이가 되었지만 회사는 이 이주노동자의 노력에 의해 초기의 영세사업장에서 벗어나 중소기업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일을 시킬 때는 열심히 일한다며 독려하던 사장은 출입국에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연행 되자 태도를 바꿔 이들에게 돈 몇 푼을 받을 테면 받고 그렇지 않으면 한 푼도 못주겠다고 엄포를 놓고 빨리 출국할 것을 강요하였다. 출국비행기표가 다급한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돈을 받고 출국하게 되었다. 강제단속으로 인해 위임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떠나보냈던 것이 가슴 한쪽 멍으로 남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렇듯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강제단속으로 인해 체불임금 그리고 퇴직금을 받지 못하고 떠나는 사건이 비일비재한 상황이다.


사례 3.

 이주여성의 경우이다. 대부분의 이주여성이 자국의 남성에게 그리고 한국의 남성에게 이중차별을 받고 있다. 한국에 와서 돈을 벌어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이주여성의 당찬 포부는 가부장적 사회의 차별과 한국에서 차별로 많은 멍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작년 베트남 여성은 한국회사의 직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회사는 이주여성을 해고시키고 비자를 종료시킨 사례이다. 회사는 분명 한국남성이 성폭행을 가했지만 그 가해자가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사장은 이주여성을 해고시켜 그 여성은 고용허가제 비자가 만료되었다.  그 여성은 원치 않은 임신에 의한 낙태와 한국에서의 꿈을 접고 떠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이주여성이 겪는 문제는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사례 4.

 미등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주노동자 건강권이 상당히 위협받고 있다. 비자가 만료되면 이주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건강보험카드가 만료가 된다. 이렇다 보니 병원에 가도 비싼 돈을 내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은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을 찾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건강을 키워서 급기야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작년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야니씨는 소장(小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입원하여 정밀조사를 받고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해 입원비가 무려 1,000만원이 청구되었다. 그리고 향후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하기 위해서는 1,000원의 돈이 더 들어갈 것이고, 치료가 잘 되지 않으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라는 병원 측의 이야기를 전달 들었다. 그리고 병원 측은 치료비를 납입하지 않으면 더 이상 치료를 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치료비에 대해 센터에서 보증을 서줄 것을 요구하였다.


 감당할 수 없는 액수의 금액이라 보증을 서주지 못하고 병원사회복지담당자를 만나 상담도 하였지만 뾰족이 수를 찾지 못하던 중 보건복지부에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긴급지원을 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긴급지원을 받아 치료한 사례이다. 여기서 확인되었듯이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병이 걸려도 산업재해 판정을 받지 못한다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많은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치료비의 문제로 인해 병을 키워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강제단속으로 인해 아파도 단속의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약국에 혼자 가지 못하는 상황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지만 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여러 사건에 센터에서 노동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합니다. 법이라는 이름이 기본(인)권보다 우선시되어져 문제를 보고도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이주노동자들은 방치되는게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 이에 이주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노동할 수 있는 노동기본권이 보장되는 한편,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전면 합법화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6. 현 노무현 정부의 강제 추방 정책에 대한 생각, 견해

  강제단속 추방정책은 즉각 중단되고, UN의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on the Protection of the Rights of All Migrant Workers and Members of Their Families: MWC)1)에 정부는 비준국가로 즉각 가입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문제를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문제로만 치부하고, 적극적인 대책마련에는 나서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을 통해 일하는 권리마저 지켜지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정부는 강제단속이라는 폭력을 내세워 추방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고용허가제의 경우 이미 대만, 그리고 서구유럽의 각 나라에서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인)권 차별과 문제가 많은 정책으로 인식하여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권리보호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정부는 즉각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출입국 할 수 있도록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자유로운 사업장 이동의 자유와 재입출국의 자유, 노동비자, 노동기본권을 부여하여야 한다.


7. 이주노동자 관련해서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이주노동자들은 우리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입니다. 이들에게도 문화가 있고, 인권, 그리고 노동권이 있습니다.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숨쉬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다정한 이웃입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은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갈 소중한 친구들이고, 한국의 산업을 함께 발전시켜나가는 이 땅의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이 땅에서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거나 한국 산업발전이 첨단화시키는데 저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작업장 대부분은 한국인들이 한두 달 일을 하다가 도저히 힘들어 하기 싫어하는 하청업체 또는 하도급업체들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일해 자신이 정당한 노동력으로 교환한 임금을 한국인들은 마치 쉽게 돈 벌은 것처럼 치부합니다. 이주노동자 그/녀들은 한국사회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는 노동자입니다. 한국인들이 버린 일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 땅의 노동자들입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이주노동자 그/녀들의 낮은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8. 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 소개


- 한글교실

- 쉼터 운영

- 노동상담 활동

- 이주노동자 봄 체육대회

- 각 나라별 이주노동자 봄/여름 나들이

- 각 나라별 이주노동자 여름캠프

- 이주노동자 문화제

- 이주노동자 컴퓨터 교실운영

- 영화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영화감상)

- 추석, 설날 각 나라별 음식잔치

- 이주노동자 법제도 및 정책연구 활동

- 연대활동

 . APWSL(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을 통한 각국의 노총과 아시아 노동운동에 대한 발전방향 모색

 .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 조직화 사업 및 법제도 연대투쟁

 . 경기이주공대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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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교육

  • 등록일
    2008/11/15 23:36
  • 수정일
    2008/11/15 23:36

이주민을 위한 인터넷라디오 방송을 영상미디어센터 Mediact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이주민 스스로가 방송의 주인이 되어 한국어가 아닌 다국어 인터넷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고국의 소식과 듣고 싶은 음악 그리고 고국에 친지들에게 자신의 음성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소박한 꿈을 갖고 시작하였다.

 

더디게 진행은 되고 있지만 매주 일요일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에게 이들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어 흐뭇하다. 저사양 컴퓨터로 자신의 육성이 녹음되고 방송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다소 욕심을 부린다면 이들이 고국에 돌아가 이러한 작은 공동체 라디오 진행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을 이야기를 통해 한국의 정보와 생활 그리고 모습들을 아시아 각국에 소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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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봄 나들이를 갔다오다

  • 등록일
    2008/11/15 23:35
  • 수정일
    2008/11/15 23:35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어제 전북 부안의 바닷가로 소풍을 갔다.
전북 부안의 체석강에서 바닷내음과 기간 한국에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주해온 이주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또한 지역을 전전긍긍하는 이주민으로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삶을 잊고, 함께 어울리며, 기간 힘들었던 일상을 일탈하기 위한 소풍을 갔다 왔다.

토요일 때아닌 비가 내려서 소풍을 갈 수 있을까? 걱정도 하였고, 이주노동자들이 과연 몇명이나 올까? 내심 불안함도 들었지만 이주노동자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출발할때는 버스 한대를 꽉 채워 출발하였다.

작년 여름캠프에 간 서해 궁평리 해수욕장이 워낙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아 여행을 떠난 다는 것이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멀리 전라북도 부안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치악산을 갈 계획이었으나 이주노동자들이 걷기를 싫어하고, 산을 타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의 고국에 없는 색다른 체험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터라 부안으로 여행지를 변경하였다.

부안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약간 시간의 문제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되었다. 왔다 갔다하는 시간이 하루 여행치고는 너무 짧아서 친구들이 여행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놀면서 소풍을 잘 치룰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왕 벌어진 일 이판사판으로 달라 붙어서 그냥 추진하였다. 시간이 안되면 안되는데로.... 버스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이라는 기대반 근심반 우려를 갖고 소풍을 가기로 내심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스리랑카 해러드, 인도네시아 아셈, 방글라데시 미아는 형 몇시에 오면 되요! 물어본다. 10시까지 와야 한다고 어름장을 놓고 시간을 어기면 안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이주노동자에게 미안한 생각을 한편 들었다. 한달에 두번 정도 쉬는 날인데, 휴식 커녕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오게 하는 것이 영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어쩌랴.... 짧은 즐거움이라도 함께 누려야 하거늘...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제촉하며 이주노동자들에게 아침 일찍 오지 않으면 그냥 출발해 버린다고 했다. 시간개념이 약간은 없어서 약속 시간을 어기기를 밥먹듯 빈번히 벌어진다.^^)

회비 1만원... 먹을 것은 인쇄 거래하는 우리동네사람들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김밥 값을 후원받았고, 오산지역에 있는 이주노동자 상점에서 각 나라별 과자와 음식 그리고 음료수를 한 보따리 준비하였다. 다솜공부방에서는 과일을 후원해 주어 먹을 것 걱정없이 소풍을 준비하였다.

일요일 아침 10시 소풍을 가기 위해 함꼐 쉼터에서 잔 사람들 이외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올까? 과연 차는 다 채울 수 있냐며, 걱정반 우려반으로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도 평상심을 유지해야지 하며, 이주노동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0시 30분이 되어서야 한 무리가 왔다. 센터 인근에서 방을 얻어서 사는 이주노동자들은 아침을 먹지 않아.... 아침을 먹지 않아서 라면을 먹고 나간다고 네팔 라이는 부시시한 옷차림으로 이야기를 한다. 해러드는 덕절리 친구들이 아직 오지 않아 기달려 달라고 말하고, 인도네시아 아쎔은 언제가요, 한글교실 선생님은 출발을 언제하나요. 걱정어린 말을 건넨다. 해러드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빨리 오라고 하였다.

해러드가 온 시각은 오전 11시 10분 친구들을 막 태우고 출발을 하였다. 기사 아저씨는 기름을 주유해야 한다며 주유소에 들려 10분을 까먹고, 11시 20분이 되어서야 부안으로 출발하였다. 앞이 캄캄하였다. 길이 막히면 어쩌나.... 그리고 도착해서 부안 격포의 운치나 보고 올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런 내마음도 모르고 이주노동자들은 형 우리 배고파요. 먹을 꺼 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참으로 울화통이 터지지만 좋은 날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으랴.... 준비한 과자를 한보따리 풀고... 각 나라별 소개를 하면서 출발하였다. 해러드는 나에게 살짝 와서 형 술사줘요.... 친구들이 술먹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한글교실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였을때는 술은 절대 안된다고 어름장을 나에게 놓은 터라.... 술은 안된다고 하고, 부안 격포 체석강에 도착하면 술을 사주마 달랬다.(사실 나도 술을 좋아하는데,,, 센터에서 내가 인솔자로 와서 술을 먹을 수 없는 이 참담한 마음을 누가 알아주랴....^^)

서해대교 입구에서 주변에 펼쳐진 평택항과 서해대교를 건너면서 보는 서해의 모습에 친구들은 마냥 흐뭇해 한다. 그리고 서로온 친구들과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참 기분좋게 보였다. 일요일마다 자신의 말로 자신의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주노동자들이 웃는 모습이 참 정겹게 다가왔다.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친구들이 있어 들린 휴게소에서는 전날 비가와서 그런지 많은 여행객은 없었다. 다만, 주변 경치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차가 전부였다.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도 그리고 서해고속도로에 펼쳐진 풍경이 참 여유롭게 다가오고, 한국의 지역을 보여줄 수 있었다.

바닷가에 펼쳐진 뭉게구름..... 참 간만에 보는 구름이였다. 학교다니거나 이맘때면 어김없이 하늘에 뭉게구름이 솜사탕 처럼 바람에 실려 다니는 모습을 하늘을 쳐다보면 느낄 수 있었는데.... 이런 유년에 보았던 구름이 하늘에 펼쳐졌다. 내심 비가와서 걱정하였던 것들이 그 하늘에 펼쳐진 뭉게구름과 새파란 하늘로 위안을 삼아보았다.

차창밖에 펼쳐진 모습을 보면서 내가 오고 싶어했던 지역에 데리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하였는데... 여행이라는 핑계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있다는 생각을 들어 피식 웃음을 지어보았다. 참 여유롭게 다가오는 풍경에서 그간 힘들었던 일들을 하나둘 날려보냈다.

오후 2시.... 서해 부안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격포에 위치한 체석강으로 향하였다. 핵폐기장 저지를 위한 부안지역민들의 상징인 핵반대 깃발은 사라졌지만 부안에 내려왔을때의 느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의 그 때 집회를 했던 장소를 지나.... 부안의 들녘.... 깃발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그 민심과 지역의 모습은 다름 형태로 변경되었을 것이라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들녘을 달렸는데.... 언론에서 보도된 새만금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언론에서 보도된 새만금 갯벌.... 그 자리에 장승들이 놓인 해안가에서 새만금의 위용과 갯벌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방파제를 보면서.... 다시금 부안의 핵폐기장 투쟁의 그 힘이 다시금 되살아나기를.... 삼보일배를 했던 문규현, 수경, 삼도일도를 했던 이휘영 목사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 새만금과 인사를 하고 다시금 채석강으로 갔다. 새만금을 지나니 변산반도의 해안가와 해변이 나왔다. 한적에게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드문드문 방문한 이들이 해변가를 걷고 있는 모습을 지나쳤다.

오후 2시 30분이 되서야 체석강에 도착하였다.
내리고 전체 사진 한장을 찍었다.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또 쳐서 가져온 김밥에 음료수를 먹으면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였다.
채석강에 도착하니 만조라서 채석강을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해변가를 거닐면서 암초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사진을 하나둘씩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해변가로 갔다. 날씨도 좋았고,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이주노동자들이 기분이 업되었다. 그래서 인지 때이른 해변가에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사진을 찍었다. 조금만 벗어나면 이렇게 여유를 찾을 수 있는데.... 이런 여유를 찾을 시간이 이주노동자 그/녀들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어제의 하루.... 한국에서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과 바램을 가져본다. 방글라데시 분은 사장님과 회사 나들이를 했는데 전라남도 순천, 구례, 담양 등을 갔었다고 자랑을 하면서 자주 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이런 야유회를 자주 갖자고 했다. 이동을 할 수 없는 아픔과 비애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비자가 종료되어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고, 작업장의 끝없는 일거리로 인해 마음편히 쉴 여유.... 그리고 돌아다닐 시간이 없는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어제 하루 처럼 한국의 들녘... 이주노동자 각 나라보다는 못하지만 여유를 갖고 자유롭게 이동하고 산하를 누렸으면 한다.

바다에서 멋드러지게 찍은 사진들을 감상해 보시기를.....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자리....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해변가에서 노닐던 일을 마치고 귀경준비를 하였다.

차안에서 다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술한잔 한 기분에 노래방 기계를 틀고 노래를 부르면서 중고등학생때의 댄스파티가 벌어졌다. 중고등학교때 수학여행을 갈때 버스에서 갖가지 이상한 몸짓을 하면서 추었던 춤들을 연상케 노래를 틀면서 몸을 흔들어 대던 시절을 떠올리게 이주노동자들이 노래에 맞춰서 댄스파티를 자그맣게 벌였다.

술한잔 한 기분에 서로가 몸을 흔들고, 필리핀 이주여성은 프리마돈나처럼 노래를 멋드러지게 팝송을 해대면 일제히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네팔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화답을 하면서 박수도 치고, 노래에 맞춰 몸도 흔들어 대면서 여행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 차안에서 20년전의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끄집어 내보았다.

행복은 작은 것인데.... 행복을 큰 것으로만 착각한 나머지 주위에 온 행복을 미쳐 발견하지 못하는 우리의 우매함을 느끼는 대목이었다. 언젠가 들었던 책 이름 "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 주세요."라는 독일의 창작동화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우리내 행복이라는 것이 소소한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년전의 모습... 그리고 지금의 함께하는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있어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왔나 보다. 그렇게 미소 머금고 힘든 일박의 여행을 마무리 하였다. 아쉽지만 다음 달에도 같이 작은 여행을 떠나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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