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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체성. 좋은 글^^

[109호]n개의 정체성을 보다
(하쿠 / 행복한 여성주의자 , )
 
나의 첫 연애는 스무살 때였다. 초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XY와의 만남. 당시만 해도 나는 가부장제를 따르고 결혼관도 어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성관계도 결혼할 사람하고만 해야한다고 할 정도로 아주 보수적인 인간이었다.

스무살 때 연애는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을 때 한 첫 연애였다. 그러나 그 XY와는 기대와 다르게 2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발단은 키스였다. 키스를 하고 싶어하던 그 XY와 입을 맞추는 순간, 이게 무어라~! 혀가 날름 들어오는 것이 정말 역겹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나의 반응에 그 XY는 상처를 받았고, 그날로 어이없게도 헤어지고 말았다.

첫 연애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몇 명의 XY와 사귀었지만, 언제나 손잡고 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이십대 초반의 연애 기간은 거의 1개월~2개월이었다. 당시엔 나의 연애가 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에서였다. 내가 바라던 연애와 그 XY들이 바랐던 연애의 관점이 달랐다는 것을 말이다.

XX와 처음 사귈 때는 불꽃이 튀었다. 조금은 나이가 더 들어서인지 아니면 상대가 너무 맘에 들어서였는지 초고속 열차처럼 우리 관계는 급진전했다. 이 기회로 부모님 집에서 독립까지 했다. 아마도 많은 XX 커플들이 그러한 것 같다. XX와 연애하면서 나는 열혈 래디컬 여성주의자가 되었고, 사고의 전환을 느낄 정도로 성정체성에 대해 혼란과 공포, 두려움 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XX와의 연애 후 시작된 성 정체성 탐험

이 시기 종교, 사회, 인권, 노동, 섹슈얼리티, 자연, 문화 등등 나의 젠더성을 구성했던 수많은 덩어리들이 모순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새로운 우주적 체계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으로 위장해 온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 내가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당시에는 몰랐지만, 축복받은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언의 벽을 깰 수 있는 삶을 그리고 그 삶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포비아를 버리는 것, 일반 사회와 다르게 산다는 것에 왜 공포를 느껴야하며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가? 그 두려움이 또 다른 포비아를 낳는 것을 보면서 점점 사람에 대해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진정한 첫 연애이자 첫사랑을 경험했던 이 시기는 예민하게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 속에 내가 속해있음을 보게 해주었다. 이 시기에도 나는 XY을 좋아했던 어릴 적 경험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단정할 수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들리는 소리 한마디는 항상 ‘넌 동성애자야’였다.

XX와 끝나고 난 후,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별명이 ‘남자’였고,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을 좋아했으며, 치마를 입는 것 등 여성성의 특징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넷째 딸인 나의 어릴적 별명은 ‘못난이’, 남동생의 별명은 ‘왕자’였다. 귀한 존재였던 남동생처럼 되고 싶었던 것일까? 단지 남성의 사회적 질서에 편입되고, 우월의식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나의 어릴적 행동에 대해 떠올려보면, 어머니의 시중을 받는 아버지처럼 가족들에게 존중받고, 남동생처럼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에 여성인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인지했던 것 같다.

나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나의 여성성을 배제하는데 쏟았다. 청소년기 때는 몇 년을 제외하곤 여성의 옷보다는 톰보이같은 옷과 머리 모양을 하고 다녔다. 왠지 톰보이처럼 하고 다니면, 남성들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느껴졌고, 여성차림을 하면 열등한 존재, 타자화된 욕망의 대상이 된 느낌이 들어 불편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여성성포비아로 나의 여성성을 제어하고 제거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요했다. 물론 지금은 개과천선(?)하여 내안의 여성성을 사랑해보는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스스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관찰할 수 있는 습관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알아맞히는 능력까지 생겼으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성 정체성 수는 무한하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나는 여성과 남성이란 성별적 구분법보다는 나하고 맞는 사람, 나하고 잘 통하는 사람에게 더 끌린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외로움에 XX 채팅을 한 적이 있다. 그날이 명절이었는데 번개로 약 3명을 우리집에 초대했고, 늦은 밤 시간에 함께 놀게 되었다. 그러나 한 XX의 예의없는 왕부치성 행동을 보고 차라리 팸같은 XY가 나랑 더 잘 맞겠구나 생각했다. 이때 나의 성지향성을 조금은 깨닫게 됐다.나는 나와 사귀었던 사람들의 영혼과 연애를 했고, 사랑을 나눴으며, 그것은 어떤 육체성(성별)을 지향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영혼이 소통되는 아름다운 사람이 좋았던 것이다.

내가 스스로를 이성애자였다고 생각했을 때 난 이성애자로서의 나에 충실했고, 동성애자였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때의 나에 충실했으며, 양성애자로 느꼈을 때 역시 내 자신에게 충실했다. 그러나 이성애자였을 때는 동성애자에 대한 약간의 선망이 있었고, 동성애자였을 때는 이성애자에 대한 또 다른 선망이 생겼으며, 양성애자였을 때는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한쪽의 성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에 선망이 생기더란 말이다. 또한 대략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에게 포비아를 갖고 있고,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에게 포비아를 갖고 있으며, 양성애자는 양쪽에게 포비아를 당하고 있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몇몇의 동성애자들은 골드레즈비언, 실버레즈비언 등의 등급을 매기며 양성애자 여성들을 폄하하고, 다른 동성애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웃팅 하기도 했다. 양성애자를 이성애자와 똑같은 방식과 태도로 경멸하고 ‘더러운 년’이란 편견으로 바라보는 동성애자도 있다. 아웃팅이 동성애자만의 공포가 아닌데도 말이다. 어떤 성별을 갖고 있고, 성정체성, 지향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그릇과 영혼의 깊이에 따라 다양한 성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달랐다.

한 레즈비언이 사회적 커밍아웃을 한 후, 몇 년 후에 열 살 어린 남성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가 다시 LGBT를 지향하거나, 다시 S(스트레이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XX가 행복하다면 충분히 축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배신감이 든다’,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 못하면서 커밍아웃한다는 게 사회적 책임이 없는 사람같다’, ‘재수없다’ 등 이성애자가 성 소수자에게 아웃팅하고 포비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수위의 말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더 심한 경우는 그 사람을 따돌리거나, 뒷담화를 하면서 외톨이로 만들기도 했다. 왜 그녀가 다시 돌아올 수 없게 하는 것인가?

영화 <3XFTM>에 나온 고종우 씨는 ‘어느 누구나 자신에 관해선 가장 전문가다.’고 말한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렇다고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백퍼센트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결혼한 XX는 행복추구권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선택했다. 그 XX가 이혼을 하더라도 ‘거봐, 이혼했잖아’가 아니라, 더 좋은 반려자를 만나거나 더 좋은 삶이 있기를 기원해주는 것도 아름다운 생각인 거 같다. 있는 것을 금지하는 것보다 있는 것을 사용하며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엔 여성이 여덟 번을 이혼해야 진정한 여성으로 인정을 한다고 한다. 또한 2008년 법적으로 동성애자 결혼이 합법화된 벨기에의 경우 10명중 1명이 동성애자 결혼 커플이라고 한다. 그중 레즈비언 커플이 80%다.

우리가 꿈꾸는 그 무한수인 n개의 성은 차이와 차별도 없어야하며, 다름이 존중되는 성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의 n개의 성을 탐험하러 떠난다.

앞으로 내게 남은 n개의 성은 무엇이 있을까? 무성애자? 트랜스젠더? 게이??? 아니면 나무와의 사랑? 방황과 혼란의 세월을 보내기보다 그때마다 감사하게 나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LGBT 지지운동을 하고, 무궁한 n개의 성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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