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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스크린 쿼터 축소 논란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쓰잘때기 없는 생각들...
분명한건 스크린 쿼터는 축소하면 안되는거 같다는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영화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추상적인 문화주권의 확보도 맞는것 같고, 남한 영화산업의 자생력을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영화산업에 줄줄이 딸려있는 저임금의 영화생산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해서이란 것도 알만하다... 그런데 영화인들의 스크린 쿼터 사수 움직임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효과를 창출해 내는 것만 같아 아쉽기 그지 없다.
미국의 한 미 FTA협약 체결 목적의 스크린 쿼터 축소 요구는 우리 사회의 감정적 반미 의식을 다시한번 어리벙벙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다. 미국은 마냥 못된놈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제국주의 내지는 금융독점자본주의의 표상)이 마냥 나쁜것으로 판단하는데 그렇게 심한 반대의견을 낼 생각은 없으나, 우리네의 부적절한 열정은 다시한번 반성해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제발 못된 놈인거 알면 좀 알아보고 찾아보고 파병할때도 반대하고, 북한한테 시비걸때도 혼즘 내주고, 기지 이전한다고하면 죽자고 반대좀 하잔 말이다...
장동건을 안성기 박중훈 다음에 1인시위에 내보내는 것은 영화계(스크린 쿼터 축소에 반대하는)의 좋은 전략이라고 판단하지만 단순히 인긴 연예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지와 요구를 표출하고 그 '인기'라는 것으로 공감대와 지지층을 확보하려는 방법은 지적을 받을만하다. 결국 장동건씨는 5분도 채 서있지 못했다.
내가 청와대앞에서 근무할적에 신해철, 안치환, 이병헌 등이 피켓을 들고 무궁화 공원쪽으로 올라가는데 수많은 인파를 끌고 갔던 것을 기억한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으로썬 처음으로 청와대에 입성할때 효자로(A로)를 도보로 지나가서 효자동, 청운동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던 것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사람들 특히 언론이 파리떼 마냥 들러 붙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미디어라는 골빈 권력자들의 생각없는 행동이 많은 것을 그르친다는 생각이다. 장동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들을 생각이 별로 없다. 장동건이 추운날에 1인시위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인이나 과학자나 영화인이나 모두 쑈를 하고 있다...
일부 스크린 축소 찬성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근래에 한국영화가 국내 영화 시장에서 50%이상의 점유율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며, 국내영화산업의 경쟁력이 성장했다는 것을 이유로 한다. 또한 후속 협상에서의 실질적 이득을 위함이라고 하는데 씨댕 미국과 관계에서 도대체 민중들이 기대하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이라는 것이 있기난 한건가? 이는 항공사 조종사 노조가 파업을 하면 미친 것들이 골프땜에 파업한다는 공격보다는 매우 예의를 갖춘 것이기는 하나 매한가지로 싸기지 없기는마찬가지다. 반대로 물어서 세계 영화산업 떡주무르듯 주무르는 미국이 코딱지만한 영화산업(미국영화 산업규모와 비교하였을때) 잠식해서 어쩌자는건가? 그리고 40%이상을 이미 점유율 가지고 있는것 아닌가... 조종사들 많이 번다고 뭐라고 할꺼면 조종사 많이 육성하시던가 공적인 재원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운행보장하던가...
가장 가슴이 아픈것은 영화인들의 문화사수(?- 사실 이러한 표현이 그리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 영화가 나름의 독창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영화가 이사회의 문화를 표상한다거나 문화의 사수로 인하여 공평한 영화산업의 이익내지 문화의 내용이 모든이에게 균분되지 않기때문이다.)의 노력이 대중들의 움직임에 적지않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이다.
딴나라당의 개지랄 덕분에 임시국회가 가능해지고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비정규직 보호 입법안을 처리할 예정이고 노동계는 또 총파업 이야기가 나온다.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를 매우 강조했고, 한국방송공사 1텔레비젼 정관용씨가 진행하는 심야토론에 나온 열우당 대표후보들은 하나같이 국회 제1여당으로서 국민들의 지지율 하락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면 반성하고 거듭나는 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반장선거에나 나올만한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실제로 생존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한다면 영화인들의 싸움또한 걸리적 거리지는 않을텐데...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뿐만아니라 전체 계급의 이해를 바탕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진심으로 연대하고 전선을 형성해준다면... 국민들의 관심은 얄굳은 미디어 선생의 시선에 맞추어 영화인들의 일인시위에 가있는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찌 될 것인지...
성북역 개찰구에 붙어있는 신규인력 확충이라는 붉은색 스티커와 지난 목요일쯤 6호선 합정역에서 피켓팅을 하고 있던 도시철도 노동자(꿈돌이형을 만났다... 다들 너무 엄숙한 표정이어서 살짝 쫄았다)들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영화산업은 안성기, 정지영, 박중훈, 장동건 등이 만드거 절대 아니다. 머가 좋은지 7000원이나 주고 영화보는 그것으로 엿같은 세상 시름을 걷어내는 대중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며, 장시간 노동 저임금에 열정만으로 투신한 영화 미친 노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들이 지켜야 하며 비록 지금 지킬것 그리많이 가지지고 못했지만, 그들이 가져갈 몫 되찾아야 한다.
스크린 쿼터 축소의 대가로 4000억을 영화발전 기금으로 내놓은 통근 정부의 배짱에 박수를 보내며 세금이나 제대로 관리하고 정신차릴길 말해주고 싶다. 그돈 있으면 문화주권 내지는 독립성 확보할 수 있도록 저예산 독립영화나 다양한 카테고리의 문화산업에 지원이나 해야 할 것이다. 문화 라는 것이 영화만 있는 것은 아닐텐데...
돈없는 우리네가 그 잘난 영화인들이 찍은 영화좀 실컷 보게 해주어야 나라가 할일 하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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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f광고 기업이미지 광고 요즘에 나오는것을 보면 500원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껌한통과 에디오피아에의 굶주리는 아이가 일주일 먹을 식량을 살수 있는 돈이라 비교한다.
과연 사기업 KTF는 지구의 빈곤 문제에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하고 있기에 그따위 광고를 낼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존재자체 그게 KTF와 같은 것들 아닌가?
삼성의 광고를 보면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위한 의료지원활동 지뢰에 의해 다리가 잘려나간 어린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지뢰제거활동 및 지원(축구공을 보내는것은 아니겠지...)를 선전한다...
지뢰를 만드는 자는 누구이냔말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년이 무상으로 치료받지 못하게한 자들이 누구이건데 그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체게바라를 상품화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착취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것 또한 매우 세련되어 간다...
하지만 너무나 어이 없다... 실상 밥먹고 입가심으로 500원 짜리 껌을 씹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 세상에는 밥먹고 입가심으로 얼마인지도 모르는 양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자본가들이 있으며 입가심으로 얼마인지도 모르는 제철아닌 과일과 차를 마시는 사모님들이 있다...
에디오피아의 굶주린 아이들이 걱정된다면... 당장 착취를 멈춰라...
밥먹고도 소화가 안되는 이유는 에디오피아의 아이들이 KTF적인 생각이라는 어처구니에 이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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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게시판은 장학금수혜범위와 등록금 대폭인상에 관한 논의로 후끈하다. 실제로 각 가정의 경제사정이 나아지고 있지 않은 실정에서 각 사립대학의 등록금 상향 상정은 큰 파장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부학자금 대출을 통한 등록을 이용하고 있는 실정에서 각 대학의 등록금 인상은 철저하리만큼 가계상황에 무관심하다.
물론 등록금 고지가 정확히 나온 것이 아닌 상황에서 17%이니 15%이니 하는 논의는 실제로 실익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등록금 인상안을 발표한 타 대학의 인상률을 미루어 판단할 때 우리학교 또한 두자리수 이상의 인상률이 고지될 수 있다는 것에는 모두들 긴장하는 눈치이다. 새로운 건물이 하나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학부생들의 공간을 오히려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씨추에이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확장된 공간은 실제로 대학원과 행정부서의 확장과 편의를 위해 대부분 제공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대학원생에게 공간이 돌아간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대학원 과정을 적대시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실제로 학교는 기초학문의 육성보다는 산업기술의 발전을 위한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문대학의 열악한 환경과 고립이 반증해 준다. 산업기술에 대한 지원과 산업체와의 협력은 실제로 교육 공간을 자본을 운영하는 사기업체와 같은 논리로 운영하겠다는 의도와 일맥상통하다. 이에 대하여 자본을 투하하는 학생들은 실제 주식시장에서 자본투자를 하는 주주보다도 못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등록금 인상은 전반적인 교육문제에 대한 것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대표성은 매우 큰 것이다. 따라서 등록금과 관련된 싸움을 어떠한 형식으로 이끌어내고 만들어가는 가는 전체 교육투쟁의 문제와 결부된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교육시장 또한 충분히 개방 가능하다는 언질을 주었다. 이미 남한의 교육정책은 교육으로서의 역할은 방기하고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의 효과적인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그러한 정책적 결정으로 말미암아 정책적 지원은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를 공공적 담론으로 품지 않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작년의 경험으로 비추어 올해 또한 총학생회 선도의 교육투쟁이 큰 힘을 발휘하거나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님을 냉정하게 인식하면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지난해 학생회 중앙 간부 구성 또는 활동가 구성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수량과 질 면에서 확대를 가져오지 않은 현 중앙 집행부체제를 신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7000단위의 학생사회의 운동을 전개해갈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총학생회의 운동에 대한 비판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운동방식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촌체전에 60명의 심판 지원자가 신청한 것에 매우 고무되어 소수의 중앙간부 체제에 대한 “대안”이 있다고 자신하는 대표자를 신뢰하기란 매우 힘들다. 실제 교육투쟁에 있어서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학생 총회는 재적인원의 1/10로 줄어들었으며, 마지막 교육투쟁 대회에서는 100명의 단위도 조직해 내지 못한 점들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지난해 교육투쟁에 대해 자평하면서 구체적 제안을 했으나 실제로 그러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는 총학생회의 중앙 선도적인 교육투쟁의 방식이 매우 부실한 만큼 각급 자치단위의 대중적 결합과 연대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각급 과학생회를 비롯한 모든 단위의 소모임과 자치단위는 교육투쟁에 대한 교육과 선전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개강이후 투쟁일정을 구성해야 한다. 단순히 몇퍼센트의 등록금이 인상되었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투명하고 민주적인 등록금 책정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 또한 이루어져야 지난번 신임 총학생회장단과의 간담회에서 이것에 대한 모호한 답변으로 그들은 실질적인 등록금 책정 절차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나, 실질적 재정담당자인 학생들이 등록금 책정과 사용 확인 절차에 참여하고 적절한 의사발언과 결정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후 학교 발전 계획 등에 대해서도 실제 학생들의 의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의사소통체계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장기적인 투쟁목표가 되어야한다. 개강이후 새내기들과의 이러저러한 문화행사에 집중하다가는 대중들의 정치적 불만들을 결코 해소할 수 없다. 투쟁 투쟁만이 최선이라는 제안이 아니다. 새내기들과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당구도 쳐라 하지만 교육문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리고 대중집회에서 조직해야 한다. 대학의 낭만을 즐기고 있을 화창한 봄날은 이후 화창한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보다 실질적인 낭만과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위기와 공격으로부터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새내기와 함께 교육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같고, 새내기끼리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학교 측과 간담회도 성사시키고 그들의 대응방식을 확인시켜주어야 하며 전반적인 남한의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의식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실제 학생들과의 접합점이 넓은 자치단위의가 해야 하는 중대한 역할이다.
실제로 정부학자금 대출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은 만큼 등록금 납부거부 등의 운동 방식은 커다란 효과를 만들어 내기 힘들다. 정부대출은 직접 등록절차를 진행하기 때문에 학생이 등록을 보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교 측은 무한정 인상된 등록금을 산정하고 일정정도 인하하여 돌려주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수의 대중들을 규합하고 조기하는가에 달려있다. 몇몇 대중 간부들이 발언하고 투쟁을 외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방식이다. 가장 강력하게 의사전달을 이루어내야 한다. 점거와 항의방문이 효과적이려면 엄청난 대중의 동의와 연대투쟁의 수단으로서 이루어져야 하며 학사행정의 실질적인 마비를 목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극단적인 방법일 수도 있으나 전체 학생 동맹휴업이 실질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것 보다는 각 사립대학의 동맹과 연대로서 이루어질 때 효과적이다.
교육의 공공적 성질에 기인하여 각 대학 투쟁세력들은 대정부투쟁 또한 진행해야 하면 정확한 의사표현을 이루어내야 한다. 단순히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학부모들에 대한 설득과정이 필요하다. 어느 부모나 자녀가 있다면 대학교육을 필요로 할 것이고, 내자식은 외국으로 보내겠다하는 반동적 반계급 정서의 학부모가 아닌 이상 비상식적인 등록금 인상과 일방적 고비에 대한 문제를 인식할 것이다. 대중의 동의 없이는 운동을 성립 시킬 수 없다. 전체 학생운동의 대중 조직력과 정치적 설득력이 매우 침체되고 학생사회의 운동력이 매우 쇄퇴 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강력한 압박Force로부터 적절하고 현명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학생운동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장기적이고 신중한 방법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아닐한 생각보다는 보다 의사소통의 창구를 확보하고 합리적인 등록금 책정 방식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고 실질적인 학생운동의 신뢰와 대중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이후 등록금 인하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질적인 대중 자치단위들의 연대체로서의 교육투쟁체를 건설하고 교육문제에 대한 교육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방중, 개강 후 투쟁 일정을 심도 깊고 현실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한발 늦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불리함을 안고 있으나 대중적 공감대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교육이 과연 돈 몇백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인가를 판단한다면 해결책은 쉽게 도출될 수 있다.
결국 등록금 싸움은 패배했다. 교육의 공공성에 관한 싸움은 시비하나 부쳐보지 못했다. 무기력하다. 성의없다. 노력하지 않았다. 허울뿐인 구호였다.고 말할 수 없는 내가 바보같다.
인상된 등록금이 그대로 2학기에 적용되어 고지될 것이다. 누구의 책임인가? 새우깡이 비싸졌으면 더 맛있게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학생들인가? 새우깡 가격을 올린데로 줘놓고선 깍자고 발악을 하는 학생들의 잘못인가?
새우깡 그것 그냥 먹으면 안되나? 꼭 내돈 내고 먹어야 하나?
대학은 교육부장관의 깃발을 휘두르며 서슬퍼런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투쟁하지 않는 학교는 거세당한다. 공대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난 법대인데...
모든걸 주사파학생들에게 돌리기엔 학생대중들의 몰정치성이 너무 두려울 따름이다. 언제까지 주사파학생들을 바어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언제쯤 제대로된 의사표시를 할 수 있고, 정확한 노점과 공격으로 투쟁할 수 있을까? 학생운동권은 왜 성장 할 줄 모르는가? 빨리 졸업해야 겠다. 등록금이 바벨탑을 넘어설 것만 같다.
성탄의 기쁨과 사랑은 실존하지 않는다.
스스로 성탄의 축복을 바라면서도 또, 그 존재를 부정한다.
외로운 이들이 더 외로운것은 성탄절이기 때문이며, 헐벗은 이들이 그나마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성탄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얼 원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성탄절이라고 쓸쓸히 보내는 젊음을 한탄해야 하는 것 인가? 아니면 소외된 인간들을 외면하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기원해야 하는 것 인가?
함께하는 성탄을 보내는 이들을 축복하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저주한다.
그렇게 365일 중 어느 하루와 같은 하루가 또 지나간다.
그래 당신의 그 절박하고 솔직한 아웃팅을 존중한다... 나는 그것을 존중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안다.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해 뜸금없이 물었다. 우리 오래된 선배부터 바로 윗학번 선배까지 얘기했다.
모두 사실이다. 나느 극복할 수 있는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래도 나는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의 극복과 승리를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선배 왈 더이상 분노 할 수 없다고,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행동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가 그만한 자기인식에 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스스로 대세에 편입했으며, 그것이 그렇게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으며 이쪽보다 나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분명 그것이 어렵지만 이쪽보다 고달프지 않으며, 그것이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벽이었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좋다. 그 용기에 감복한다.
나는 열우당, 한나라당의 수괴 4명이 손을 잡는 모습을 보고 분노 하지 않는다. 또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걸 보고 가만히 있는 우리를 보고 분노하며 슬퍼한다.
파병동의안은 당빠 통과 될것이며, 국가보안법은 내년까지 위세를 떨칠것이다. 자...
분노하고 슬퍼할일이 너무도 많은 세상속에서 쉽게 슬퍼하고 분노하면 그만큼 쉽게 지치고, 많이 패배하며, 허무해 진다. 그래서 나는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나에게 화가나고 불편할 따름이다.
현실 운동의 위기 내지 붕괴와 우리(?)학교내의 학생운동의 반동적 퇴조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 이상이다. 허나 나는 기류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
슬프고도 추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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