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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관련 국제지수 분석 - 성격차보고서를 중심으로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4/10/29 13:34
  • 수정일
    2014/11/03 19:01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1. 들어가며: 성평등의 국가별 순위, 과연 의미있는가?

2. 성격차보고서에 대해

  2.1. 성격차보고서 개요

  2.2. 성격차보고서의 각 항목

  2.3. 성격차보고서의 지수 산정 방법

  2.4. 성격차보고서에 대한 비판 및 재비판

  2.5. 성격차보고서에 대한 개인적 평가

3. 기타 성평등 관련 국제 순위

  3.1. 관련 논의

  3.2. 여성권한척도와 성별개발지수

  3.3. 성·제도·개발지수

    3.3.1. 성·제도·개발지수 개요 및 항목

    3.3.2. 성·제도·개발지수에 대한 오해

  3.4. 성불평등지수

    3.4.1. 성불평등지수 개요

    3.4.2. 성불평등지수의 각 항목

    3.4.3. 성불평등지수의 산정 방법

    3.4.4. 성불평등지수에 대한 비판

    3.4.5. 성불평등지수에 대한 개인적 평가

4. 결론

 


 

1. 들어가며: 성평등의 국가별 순위, 과연 의미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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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F(세계경제포럼)에서 2014년도 성격차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GGGR)를 발표했다. 한국은 조사대상 142개국 중에서 117위를 했다. 순위가 낮을수록 성격차가 많이 벌어진 것이니, 한국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격차가 꽤 크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당분간 인터넷이 또 시끌시끌해지지 않을까 싶다. 4년 전 WEF의 성격차지수와 관련된 글을 하나 쓴 것이 있는데[여성 관련 각종 국제지수] 새로 자료가 나온 김에 성격차보고서를 중심으로 성평등과 관련된 국제지수를 비교하는 글을 한 편 더 써보고자 한다.

 

우선 나는 성격차나 성평등의 국가별 순위를 매기는 것에 부정적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지난 번 글에서도 말했다시피 국가별 순위만 가지고는 그 나라에서 실질적 성평등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알기 힘들다. 전세계 대다수 국가에서 성평등이 달성되었다면, 순위가 낮든 높든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반대로 전세계적으로 성차별과 여성 억압이 몰아치고 있다면, 순위가 높다고 한들 크게 좋아할 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의 국가별 성격차를 비교한다고 해보자. 거기서 1위를 해봤자 여성의 보통선거권조차 보장되지 않은 국가일텐데 과연 1위를 했다고 성격차가 없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전지구적으로 여성 억압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한 성평등이란 무엇인지, 그 완전한 성평등에 비교해 볼 때 현재 여성의 전지구적인 지위는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확정하지 않는다면, 국가 순위는 생각만큼 유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각 나라 별로 성차별이 일어나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 중에서 어떤 양상들을 어떻게 수치화해서 비교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자료에 따라 한국의 성평등 순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도 바로 이 요인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평균 소득은 남성과 비슷하지만, 여성 고위 관료의 비율은 매우 낮은 국가 A와, 여성의 평균 소득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지만, 여성 고위 관료의 비율은 50%에 이르는 국가 B가 있다고 하자. A와 B 사이에 순위를 매기기 위해서는 평균 소득과 고위 관료 비율에 각각 가중치를 부여해서 이들을 수치화한 후 A와 B의 최종 수치를 비교해야 한다. 이 가중치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그에 대한 표준을 마련하는 것은 가능할까? 평균 소득이나 고위 관료 비율은 원 자료가 이미 수치화되어 있어서 그나마 낫다. 여성 할례나 상속에서의 제도적 성차별, 성과 본의 부여 등은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는가? 기관마다 지표들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국가별 순위도 국제지수 별로 달라진다. 어떤 방식이 더 정확하며 표준적인지 확답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방식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토록 국제지수에 부정적인데 왜 글을 쓰는가? 과도한 의미 부여만큼 성평등 관련 지수들의 의미를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 최근 들어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성격차보고서를 중심으로 각종 국제지수들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미지가 잘 안 보이는 경우, 새 탭이나 새 창에서 보기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2. 성격차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에 대해

 

2.1. 성격차보고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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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차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GGGR)는 WEF(세계경제포럼)에서 2006년부터 매년 발표하는 성평등 관련 국제지수이다. 간혹 성격차지수(Global Gender Gap Index, GGI)라는 표현도 사용하는데, 성격차보고서 안에 담긴 것이 WEF가 조사한 성격차지수다. 즉 성격차보고서는 성격차지수를 소개하는 보고서이므로 이 둘을 동의어처럼 사용해도 큰 무리는 없다. 아래부터는 2014년도 성격차보고서(World Economic Forum, The Global Gender Gap Report, 2014)에 근거한 것이다.

 

성격차보고서는 국가 별로 여성과 남성의 격차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를 도출해낸다. 이를 위하여 성격차보고서는 세 가지 기초 원칙을 정립하고, 그 원칙에 입각해 연구 분야를 설정하고 성격차지수를 산출한다. 다음이 그 세 가지 기초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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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격차보고서는 수준보다는 격차를 측정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사회적 자원과 기회에 얼마나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며, 실제로 여성이 누리는 사회적 자원과 기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반영되지 않는다. 국가별 수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된 지수를 산출해내기 위해서다. 성격차보고서에 따르면 선진국일수록 평등의 정도와 무관하게 여성이 더 높은 수준의 교육과 의료를 누릴 것이므로, 그 수준의 차이 자체를 알아내는 것은 성평등의 정도를 제대로 반영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설령 전체적인 삶의 수준이 높더라도, 그 안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지 알아내는 것이 성평등의 정도를 측정하는 데 더 유의미하다.

 

둘째, 성격차보고서는 투입 지표보다는 성과 지표를 포착한다. 여성과 남성의 격차가 결과적으로 얼만큼 벌어졌는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마다 다를 수 있는 고유한 정책이나 권리, 문화, 관습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할례나 임신중지, 가족제도 등은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셋째, 성격차보고서는 여성 권한보다는 성평등에 따라 국가 순위를 산정한다. 바꿔 말하면 남성 대비 여성의 비율이 '1'을 초과하는 경우, 더 이상 성별 격차가 없다고 보고 이를 '1'로 계산한다.

 

 

2.2. 성격차보고서의 각 항목

 

성격차보고서는 4개 분야, 14개 항목을 바탕으로 성격차지수를 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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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경제참여와 기회. 하부 항목은 '남성 대비 여성 경제활동 참여비', '유사업무의 성별임금형평성', '남성 대비 여성 추정 소득비', '남성 대비 여성 행정직, 관리직 비율', '남성 대비 여성 전문직, 기술직 비율'이다.

 

둘째, 교육 성취도. 하부 항목은 '남성 대비 여성 식자율', '남성 대비 여성 초등교육 취학률', '남성 대비 여성 중등교육 취학률', '남성 대비 여성 고등교육 취학률(총합)'이다.

 

셋째, 건강과 생존. 하부 항목은 '출생성비', '남성 대비 여성 건강 기대수명'이다.

 

넷째, 정치권한 부여. 하부 항목은 '남성 대비 여성 국회의원 비율', '남성 대비 여성 장·차관 비율', '남성 대비 여성 국가원수 재임기간(최근 50년간)'이다.

 

 

2.3. 성격차보고서의 지수 산정 방법

 

성격차보고서는 각 14개 항목에 대한 남성 대비 여성의 비율을 구한 다음, 남성을 '1'로 놓고 그와 비교한 여성의 수치를 산출한다. 예를 들어 남성 국회의원이 100명이고, 여성 국회의원이 50명이라면, 남성을 '1'로 놓았을 때 여성은 '0.5'이므로, '0.5'가 해당 항목의 수치가 된다. 이렇게 성격차보고서는 14개 항목에 대하여 '1'을 만점으로 한 지수를 산정한다(출생성비 등은 비율이 약간 조정된다).

 

그 다음, 성격차보고서는 14개 항목에서 산정한 지수들에 각각 가중치를 두어 분야별 항목을 합산해서, 분야별 총합을 '1'로 만든다. 국가들의 표준편차가 작은 항목에 큰 가중치를 주고, 표준편차가 큰 항목에 낮은 가중치를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교육 성취도' 분야의 4개 항목 중에서 '초등교육 취학률'은 표준편차가 작은 반면, '고등교육 취학률'은 표준편차가 크다. 그런 경우 '초등교육 취학률'에 더 큰 가중치를 두어, '초등교육 취학률'의 격차가 큰 국가가 '고등교육 취학률'의 격차가 큰 국가보다 불이익을 많이 받게 만든다. 즉 세계적으로 격차의 수준이 비슷한 항목에서 홀로 격차가 심할 경우 불리해지는 반면, 세계적으로 격차의 수준이 제각각인 항목에서는 특정 국가의 격차가 심하든 적든 최종적인 지수상의 차이가 덜 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국제적인 표준화가 이루어진 항목과 그렇지 않은 항목을 보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표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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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분야 별로 '1'을 만점으로 한 지수를 산정한 다음, 각 분야별 수치를 더한 후 4로 나누면 국가별 성격차지수가 나온다. 즉 분야별 가중치는 없다.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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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4개 항목을 구한다. 다음에 '1'이 넘는 수치, 예를 들어 기대수명을 '1'로 계산한다. 다음에 각 분야별 지수를 '1'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경제는 '0.512', 교육은 '0.965', 건강은 '0.973', 정치는 '0.112'가 나온다. 이 넷을 더하면 '2.562'가 나오고, 4로 나누면 맨 처음 본 '0.640'이 나온다.

 

 

2.4. 성격차보고서에 대한 비판 및 재비판

 

한국의 성격차보고서 순위가 낮게 나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독 성격차보고서에 대한 비판이 많이 제기된다. 각 비판을 살펴보고 그 비판이 타당한지 검토해본다. 우선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설명[2013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GGI) 관련 설명자료]이다.

 

(1) '유사업무' 항목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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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업무를 설문지를 통해 측정했기 때문에 '유사업무' 항목이 다소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 자체는 유효하지만, OECD에서 발표한 2013년도 정규직 간 임금격차를 보아도 한국은 OECD에서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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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OECD에서 조사한 기준대로 성격차지수를 다시 내보면 유사업무와 관련한 한국의 순위가 조금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큰 폭의 상승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더구나 OECD 자료에 비정규직 간의 성별 임금 격차를 포함하는 것이 반드시 한국에 유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2) '고등교육 취학률' 항목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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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교육 취학률 계산시 휴학생이 포함되는데, 한국 남성들은 병역의무를 지기 때문에 이 수치가 왜곡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한국의 '고등교육 취학률' 항목을 보면 남성의 취학률이 100%를 초과한다. 명백히 문제가 있는 산정 방식이며, WEF도 이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다만 이 항목에서 왜곡이 일어나는 것과, 이 왜곡이 한국의 전체 순위에 영향을 주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앞서 가중치에서 보았듯이, '고등교육 취학률' 항목은 '교육 성취도' 분야에서 가장 낮은 가중치를 받는다. '0.75'라는 해당 항목의 지수는 조정이 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부당한 불이익을 받았음에도 한국의 '교육 성취도' 분야 지수는 '0.965'로 높은 편이다. 교육 분야 순위가 103위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교육 성취도'와 '건강과 생존' 분야의 세계적인 성별 격차가 적어서 조금만 지수가 떨어져도 순위가 매우 크게 밀려난다는 데서 기인한다. 글 서두에 적어놓은 국가별 순위의 첫째 문제점에 해당한다. 순위 자체에 신경쓸 필요가 적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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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래프는 전세계의 분야별 성격차를 나타내준다. 건강과 교육은 지수가 '1'에 근접해 있는 반면, 경제와 정치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교육 순위가 103위이든, 건강 분야가 74위이든 크게 문제될 점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 분야 지수가 '0.965', 건강 분야 지수가 '0.973'으로 만점과 차이가 별로 안 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도 교육 분야의 지수가 낮아진 것이 전체 순위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악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낮다. 한 번 한국의 교육 분야 지수를 '0.965'가 아닌 '1'로 계산해보자. 그러면 전체 지수가 '0.6403'에서 '0.6491'로 조정된다. '0.6491'은 몇 위일까? 111위이다. 6계단 상승했다. 그러므로 '고등교육 취학률' 항목이 정 못마땅하다면 한국이 111위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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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고등교육 취학률' 항목의 산정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한국의 전체 순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또한, 한국의 교육 항목 순위가 낮다는 이유로 성격차보고서의 신뢰도를 공격하는 비판도 같은 이유로 무의미하다. 한국의 순위가 낮게 나온 진짜 이유는 교육 분야의 산정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정치 분야 및 경제 분야 순위가 낮기 때문이다. 한국은 교육 분야에서 만점 기준으로 '0.035'가 모자랐다. 한편 정치 분야는 1위인 아이슬란드와 '0.553' 차이가 났다.

 

한 번 상위권에 포진된 20개국의 지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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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분야나 건강 분야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더라도 경제 분야와 정치 분야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물론 니카라과처럼 경제 분야는 낮지만 정치 분야가 매우 높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반대로 하위권에 포진된 20개국의 지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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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건강 분야에서 1위를 했음에도 전체 순위는 125위에 그쳤다. 정치와 경제 분야가 낮은 까닭이다. 그만큼 성격차보고서의 전체 순위에 영향을 주는 분야는 교육이나 건강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분야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교육 관련 항목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성격차보고서 전체 순위가 완전 허황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과잉된 비판이다.

 

다음은 그 외 자주 등장하는 비판이다.

 

(3) 수준이 아니라 격차를 기준으로 삼은 점

 

앞서 살펴봤듯이 성격차보고서는 수준이 아닌 격차를 기준으로 지수를 만든다. 이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인터넷에 꽤 퍼져 있다. 남성의 99%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여성의 98%가 초등학교에 진학하는 국가보다, 남성의 21%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여성의 22%가 초등학교에 진학하는 국가의 순위가 더 잘 나오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따르면 '98/99'와 '22/21'을 비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98'과 '22'를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등이란 비교대상을 통해서 산출해내는 수밖에 없다. 남성 대비 비율이 아닌, 단순 진학률을 비교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자원이 성별에 따라 어떻게 배분되는지를 알려주지 못하고, 그저 개발이 덜 된 국가보다 개발이 잘 된 국가에게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이럴 경우 사회적 자원을 여성에게 얼마나 배분하느냐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이 얼마나 많은지가 지수를 좌지우지하게 되어 남성과 여성의 지위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다. 따라서 평등에 관한 지수라는 점에서는 국가별 수준을 배제하고 격차만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4) 한국 순위가 일부 '이슬람 국가'들보다 낮게 나온 점

 

한국보다 순위가 높은 국가들 중에서는 일부다처제 등이 허용되는 이슬람 국가나 명예 살인이 벌어지는 국가들이 있다. 따라서 성격차보고서는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결과가 발생하는 까닭은 앞서 보았듯이 성격차보고서가 각 국가별 고유한 제도나 문화를 지수에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격차보고서가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겠으며, 이를 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경제 분야 지수와 정치 분야 지수가 매우 낮아서 한국의 전체 순위가 이들 국가보다 낮게 나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국 정치 분야 지수가 이토록 낮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점을 들어 성격차보고서 전부를 배격하는 것은 부당하다.

 

사실 제도와 문화 지수 반영 문제는 글 서두에서 제기한 국가별 순위의 두 번째 문제점과 관련된다. 각 국가별 고유한 제도나 문화를 지수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긴 한데, 가중치는 어떻게 부여할 것이며, 어떤 표준을 만들어 수치화를 할 것인가? 아래의 개인적 평가 부분에서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일부다처제나 여성 할례, 임신중절 등의 문제를 포함한 국제 성평등 지수가 나오길 바라면서도 그 수치화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2.5. 성격차보고서에 대한 개인적 평가

 

성격차보고서는 수치화할 수 있는 자료들을 선별하고, 투명하고 비교적 간단한 방식으로 이 자료들을 분석했다. 이것이 성격차보고서의 의의이자 동시에 한계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즉 성격차보고서는 여성 할례, 성 상품화, 가족의 성본 제도, 임신중절, 일부다처제, 부르카 착용 등의 문제를 포괄하지 못한다. 성격차보고서에 나온 국가별 순위가 곧 그 국가의 실질적 성평등 정도를 충분히 반영해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성격차보고서가 성과 지표만 포착한 것도 나름의 제한적 합리성을 가진다고 본다. 예를 들어 서구나 한국의 통념상 부르카 착용은 여성 억압으로 여겨지는 반면, 여성에게 기형적으로 마른 몸매를 권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 억압으로 잘 포착되지 않는다. 각 국가나 문화권이 여성의 신체나 삶에 개입하는 양상은 제각각이다. 그러한 양상들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도 문제가 되거니와, 결국 남는 것은 그 억압의 양상들로 인한 최종적인 결과물, 즉 성과 지표 아니냐는 생각에 이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치 분야 순위는 93위다. 한국보다 정치 분야 순위가 높은 국가 중에는 파키스탄(85위)도 있다. 파키스탄은 히잡의 착용이 일상화되어 있으며(법으로 강제되어 있지는 않다), 여성의 발언권이 적으며,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파키스탄의 2014년 성격차지수는 141위로, 뒤에서 두 번째다. 외관으로만 보기에는 한국의 여성이 파키스탄 여성보다 자유로우며,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 여성은 남성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고, 히잡을 두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왜 한국 국회의 성비는 파키스탄보다도 편향되어 있는가? 제도적으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여성의 정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나 압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성과 지표는 아닌가?

 

정리해보자. 성격차보고서가 나름의 합리성을 지녔음에도 고등교육 취학률이나 유사업무 임금격차와 관련해 다소 부정확한 산정 방식을 지니는 것은 맞고, 임신중절 등 제도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 것도 맞다(다만 국가별 분석 자료마다 몇 가지 수치화된 제도적 장치들을 소개해준다). 그리고 분야별 지수에 가중치를 두지 않고 산술평균을 내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남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격차보고서에 따른 국가별 순위를 그대로 가져다가 인용하며 한국의 성평등이 이 정도 수준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경제 분야와 정치 분야에 대한 지수 및 순위는 상대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본다. 이들은 수치화할 수 있는 지수이며, 그 비교 방식도 간단하고 투명하다. 분야별 지수를 합산하지 않고 따로 보는 한 가중치 적용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운 편이다. 따라서 만약 성격차보고서를 인용하고 싶다면, 정치 분야나 경제 분야를 떼어내서 인용할 것을 추천한다. (교육 분야와 건강 분야는 상향 평준화로 그 순위가 다소 무의미해졌다고 앞서 설명했다.)

 

다음은 지난 9년간 한국의 각 분야별 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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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성평등 관련 국제 순위

 

3.1. 관련 논의

 

굳이 다른 성평등 관련 국제 순위를 소개하는 까닭은, 각종 기사들이 여러 성평등 관련 국제지수를 비교하면서 성격차보고서의 의의를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헤럴드경제의 다음 기사[대한민국 여성불평등지수가 나이지리아, 수단과 같은 정도? 국제성평등 지수 현황 분석해보니…]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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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격차보고서는 "4가지 기준에 대해 남성에 비교한 단순 격차만 보여"주지 않는다. 4가지 분야 14가지 항목에 걸쳐 보여준다. 그런데 이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UNDP(유엔개발계획)의 자료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다. 자료 별로 순위의 차이가 발생하는 까닭은 글 서두에서 말한 두 번째 문제점 때문인데, 한 번 구체적으로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지, 각 국제지수 별로 알아보자는 것이다.

 

 

3.2. 여성권한척도와 성별개발지수

 

UNDP(유엔개발계획)에서 발표하는 여성권한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 GEM)와 성별개발지수(Gender-Related Development Index, GDI)부터 짚고 넘어간다. 여성권한척도는 의회내 여성비율, 여성 고위관료 비율, 여성 전문인력 비율, 평균기대소득 비율, 정치참여가능연령 등을 기준으로 지수를 산출하는 반면, 성별개발지수는 평균기대수명, 평균 교육 성취도, 기대 교육 성취도, 기대 소득 등을 기준으로 지수를 산출(2013년도 기준)한다.

 

UNDP는 2010년을 기점으로 이 두 가지 지수를 앞선 헤럴드경제 기사에서 인용된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 GII)로 보완했다. 그러므로 여성권한척도와 성별개발지수를 따로 검토할 필요는 없고, 뒤에 가서 성불평등지수만 보도록 한다. (다만 UNDP에서 아직 성별개발지수를 따로 산출하므로, 관련 자료에 접근할 수는 있다.)

 

 

3.3. 성·제도·개발지수

 

3.3.1. 성·제도·개발지수 개요 및 항목

 

성·제도·개발지수(Gender, Institutions, and Development Index, GID)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2006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성·제도·개발 데이터 베이스(Gender, Institutions, and Development Database, GID-DB)에 포함된 지수이다.

 

성·제도·개발지수는 UNDP의 여성권한척도와 성별개발지수 등 각종 성평등 관련 국제지수를 포괄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변수를 추가해 보다 충실한 성평등 관련 지수를 산정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여성의 경제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지표들을 분석하려고 한다. 다음은 OECD가 2006년에 발간한 보고서(OECD Development Centre, Measuring Gender (In)equality: Introducing the Gender, Institutions and Development Data Base (GID), Working Paper No. 247, 2006)에 포함된 관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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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경제적 역할이 산출 변수인데, 이 산출 변수는 경제 발전, 자원 접근, 사회 제도라는 세 가지 투입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되어 있다. 성·제도·개발지수는 그 중에서도 사회 지표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다음은 OECD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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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변수가 여성의 경제적 역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성·제도·개발지수의 핵심에 자리잡는다. 정리하자면 성·제도·개발지수는 경제 발전, 자원 접근, 사회 제도, 여성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모든 지표를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되, 그 중에서 제도적 변수에 특히 주목한다. 그래서인지 보고서에서도 내내 특히 제도적 변수를 강조한다. 아래에서 보다시피 보고서 결론에서도 제도가 산출 변수에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 번 강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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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성·제도·개발지수는 제도적 변수를 새롭게 찾아내고 분류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서, 제도적 변수를 4가지 분야, 13개 항목으로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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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신체 관련 제도. 하부 항목은 '여성에 대한 폭력 관련 입법', '여성 성기 절단 비율 추정치'이다.

 

둘째, 가족 관련 제도. 하부 항목은 '평균 혼인 연령', '여성 조혼(15-19) 비율', '일부다처제의 허용 여부', '부모권한의 성별 형평성', '상속의 성평등', '이혼의 자유'이다.

 

셋째, 소유권 관련 제도. 하부 항목은 '여성의 토지 소유', '여성의 은행 융자 권리', '여성의 토지를 제외한 기타 물건 소유'이다.

 

넷째, 시민권 관련 제도. 하부 항목은 '여성이 밖에서 얼굴을 가려야 하는지 여부', '여성의 밖으로 이동할 자유'이다.

 

여성에게 불리한 제도가 많을수록 수치는 '1'에 가까우며, 적을수록 '0'에 가깝다. 여하간 주의할 것은 성·제도·개발지수가 제도 관련 변수만 모으지 않는다. 성·제도·개발지수는 최대한 많은 변수를 모으되, 제도 관련 변수에 특히 주목하는 것일 뿐이다.

 

 

3.3.2. 성·제도·개발지수에 대한 오해

 

성·제도·개발지수가 한국에서 '특별히' 유명한 이유는 한국이 2006년도 조사에서 4위를 기록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표가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닌다. 이 표는 OECD가 공식적으로 배포한 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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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공동 4위로 올라와 있다. 이 표와 함께 네이버 지식백과의 설명[여성의 사회적 역할]도 같이 소개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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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명만 읽으면 마치 한국이 50여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성·제도·개발지수에서 4위를 한 것 같다. 그렇다면 방금 소개한 표는 과연 저 50여개의 항목을 포괄한 성·제도·개발지수인가? 아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주재선 씨의 보고서(주재선, "통계, 지식과 정책"에 관한 제2차 OECD 세계 포럼 참여 결과 보고, 2007)를 보면 저 표의 정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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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순위나 지수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표는 위에서 본 표(한국이 4위라고 나온 표)를 세분화한 것이다. 그런데 평가 항목은 50여개가 아니라 13개이며, 이 평가 항목들은 전체 항목이 아니라 제도 관련 항목에 불과하다. 즉 한국은 2006년도 성·제도·개발지수 종합 4위를 한 적이 없으며, 사회 제도 지수에서 4위를 한 것에 불과하다. 2006년도 종합 순위는 공개되어 있지 않다.

 

성·제도·개발지수의 2006년도 자료는 많지 않다(부분적인 보고서 몇 개만 존재한다). OECD 홈페이지 데이터 베이스는 2009년도 자료와 2012년도 자료만 공개한다. 그런데 2009년도 자료 이후에는 OECD 가입국들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어, 한국에 대한 지수나 순위는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2006년도 지수는 정확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2009년도와 2012년도 지수는 OECD 가입국들을 제외해서 각각 한계를 지닌다.

 

그래도 성·제도·개발지수의 2006년도 사회 제도 관련 한국 지수는 좋은 편이며, 순위도 높지 않으냐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성·제도·개발지수의 사회 제도 관련 한국 지수가 좋은 것은 보다시피 사실이다. 하지만 OECD가 산정한 저 항목들은 다소 부실하다.

 

예를 들어 판례 법리를 조사하지 않고 법령 위주로 조사한 까닭에 한국의 상속제도가 완전 평등인 '0'으로 나왔다. 그렇지 않다. 한국 민법 제1008조의3은 분묘 등 제사용 재산은 제사주재자가 승계한다고 정하지만, 대법원은 상속인들 사이에서 합의가 되지 않는 이상 망인의 장남을 제사주재자로 본다(대법원 2008.11.20, 선고 2007다27670 전원합의체 판결). 또한 한국 민법 제781조 제1항은 자녀가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고, 예외적으로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정해 놓아, 명백한 CEDAW(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 위반임에도 (한국은 현재 CEDAW 관련 조항을 유보해놓은 상태이다) 관련 항목이 없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한국의 여성 폭력 관련 입법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며, 가정폭력과 관련해서는 즉각적인 구조 조치가 미비한 편이다. 조사 당시 한국에는 아직 친고죄가 있었으며, 부부강간이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던 때인데, 이런 부분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도 미지수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자. '여성에 대한 폭력 관련 입법' 항목에서 한국은 '0.17'을 받았다. 해당 항목은 (1) 가정폭력에 대한 법률, (2) 성폭력에 대한 법률, (3) 성희롱에 대한 법률을 토대로 산정된다. '0'은 완전한 입법이 되어 있는 상태, '0.25'는 입법은 되어 있지만 일반적 특성을 지닌 상태, '0.5'는 입법 계획이 있는 상태, '0.75'는 해당 입법 계획이 일반적 특성을 예정하는 상태, '1'은 관련 입법이 전무한 상태이다.

 

세 가지 세부항목 별로 0을 만점으로 한 점수를 도출한 다음에, 거기에 1/3을 곱한 뒤, 합산한다(이는 2006년의 방법론으로, 2012년의 계산 방법은 다소 다르다. 다만 한국의 유일한 수치는 2006년도 것이므로 2006년도 방법론을 기준으로 한다). 한국이 이 항목에서 '0.17'을 받았다는 것은 세 가지 세부항목의 총합이 '0.5'였다는 의미이다. 세부항목에 따라 정확히 몇 점이 나왔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어차피 OECD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입법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일반적 특성(general nature)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일반적 특성이 어느 정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한국의 가정폭력 특별법이 여성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다는 현실(가정폭력 피해자의 반 이상은 경찰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응답한다. 여성가족부, 2010년 가정폭력 실태조사 1부, 2010 참조)이 얼마나 적절하게 반영되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

 

각 항목별 수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측정되었는지, 어떤 가중치가 적용되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셈이다(2012년도 방법론은 공개되었는데 2006년도 자료의 방법론은 완전히는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항목별 수치도 그렇고, 수치의 합산에 관해서도 그렇다. 한국은 조혼이 '0.01'임에도 가족관련점수는 '0.00'인데, 어떤 수식을 사용하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자료나 설명을 찾기 힘들다.

 

따라서 한국은 성·제도·개발지수 종합지수에서 4위를 한 것이 아닐 뿐더러, 4위를 한 사회 제도 지수는 다소 허술한 면이 있다.

 

 

3.4. 성불평등지수

 

3.4.1. 성불평등지수 개요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 GII)는 UNDP(유엔개발계획)에서 2010년 새로 개발한 지수로서 과거의 여성권한척도와 성별개발지수를 보완한다. 한국은 2013년 기준으로 152개국 중에서 17위를 했다. 아래는 UNDP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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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평등지수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성과가 어떻게 분배되었는지를 설표보고, 성불평등으로 인한 인간개발비용을 측정한다. 정확히는 성불평등으로 인해 어떻게 성별 개발 가능성이 손실되었는지를 측정한다. 따라서 '1'을 최고점으로, 성불평등지수가 높을수록 성별 개발 가능성의 손실이 많다는 의미이다. 성불평등지수는 격차와 수준을 모두 반영한다. 구체척인 내용은 항목 별로 보도록 한다.

 


 
3.4.2. 성불평등지수의 각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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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평등지수는 3개 분야, 5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생식건강. 하부 항목은 '모성 사망률', '청소년 출산률'이다.

 

둘째, 여성권한. 하부 항목은 '여성의원 비율', '중등교육 이상을 이수한 인구 비율'이다.

 

셋째, 경제참여. 하부 항목은 '경제활동참가율'이다.

 

성격차지수와 성·제도·개발지수하고 비교했을 때 가장 적은 항목 수를 보여준다. 따라서 성격차지수가 성불평등지수에 비해 항목 면에서 세밀하지 않다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다음으로, 생식건강 관련 항목은 필연적으로 격차보다는 수준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여성권한과 경제참여는 격차도 반영하게 된다. 성불평등지수는 수준과 격차를 모두 포함하다 보니 복잡한 공식을 통해 이들 항목을 수치화한다.

 

 

3.4.3. 성불평등지수의 산정 방법

 

이 항목은 UNDP의 기술보고(UNDP, Technical notes, Human Development Report, 2013)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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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평등지수는 다섯 단계에 걸쳐 산정된다. 우선 극단적인 수치나 원 자료가 '0'인 경우를 조정한다. '모성 사망률' 항목은 100,000명 대비 최소 10에서 최대 1,000으로 조정되며, 여성의원 수가 0명인 국가들에게는 '0.1'이라는 비율을 부여한다. 항목별 수치에서 '0'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성별 별로 분야별 수치들의 기하평균을 구한다. 여성은 5개 항목, 남성은 3개 항목의 수치들 간 평균값을 낸다. 공식은 다음과 같다. MMR은 '모성 사망률', ABR은 '청소년 출산률'(UNDP는 2013년까지 ABR(Adolescent Birth Rate)라는 단어 대신 AFR(Adolescent Fertility Rate)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다. 따라서 2014년 이전에 나온 자료들에서 나오는 AFR가 곧 ABR이다), PR은 '성별 의원 비율', SE는 '중등교육 이상을 이수한 인구 비율', LFPR은 '경제활동참가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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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각 성별 수치들의 조화평균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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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각 분야별 산술평균의 기하평균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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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성불평등지수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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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성불평등지수에 대한 비판

 

비판 항목은 두 개의 논문(Stephan Klasen and Dana Schüler, Reforming the Gender-Related Development Index and the Gender Empowerment Measure : Implementing Some Specific Proposals, 2011; Iñaki Permanyer, Are UNDP Indices Appropriate to Capture Gender Inequalities in Europe?, 2011)을 참고해서 작성되었다.

 

(1) 복잡한 산정 방식에 따른 문제

 

산정 방식이 복잡한 탓에 일반 대중은 물론 정책 입안자도 성별불평등지수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성격차지수의 경우, 4개 분야별 지수의 산술평균이라는 직관적 이해가 가능한 반면, 성불평등지수의 경우는 그러한 직관적 이해가 불가능하다. 인터넷에서도 성격차지수의 세부 항목을 나름 분석하는 글은 있어도, 성불평등지수의 세부 항목을 분석하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수치 자료가 공개되어 있음에도 진입 장벽이 높은 것이다.

 

복잡한 산정 방식이 장점은 아니겠지만, 성불평등지수가 동일한 기준으로 정량화하기 힘든 여러 항목을 합산하는 이상, 다소 복잡한 산정 방식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산정 방식이 정확하고 합리적이라면 복잡함은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산정 방식이 무엇을 최대치로 놓고 성취도의 손실을 측정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산정 방식에 내재한 결함이거나, 적어도 산정 방식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2) UNDP에 의한 부정확한 계산의 가능성

 

더 큰 문제는 UNDP의 기술보고가 들어주고 있는 예시조차 정확한 계산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아래는 기술보고에 들어가 있는 예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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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검증해보자. 아래의 검증 과정은 개인적인 계산의 결과물이다. 계산을 위해 Web 2.0 scientific calculator를 사용했다. 우선 맨 위에 있는 (F+M)/2 항목부터 구해보자.

 

건강에서는 [{(10/200)*(1/47)}^(1/2)+1]/2를 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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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308...이 나오므로 반올림하면 UNDP의 값이 정확하다.

 

권한에서는 {(0.007*0.076)^(1/2)+(0.993*0.244)^(1/2)}/2를 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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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7648...이 나오므로 반올림을 하면 0.258로 UNDP의 값이 정확하다.

 

경제에서는 (0.252+0.718)/2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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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5이 나오므로 UNDP의 값이 정확하다.

 

다음은 분야별 수치들의 기하평균이다. 우선 여성부터 해본다.

 

[{(10/200)*(1/47)}^(1/2)*(0.007*0.076)^(1/2)*0.252]^(1/3)을 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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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4465...이므로 반올림하면 0.057인데, UNDP는 0.058라는 값을 내놓는다. 0.001의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알 수 없다.

 

다음은 남성의 분야별 수치들의 기하평균이다.

 

{1*(0.993*0.244)^(1/2)*0.718}^(1/3)을 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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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0193...이 나오므로 반올림을 하면 0.707로, UNDP의 값이 정확하다.

 

다음으로, 기술보고에 따르면 조화평균을 구하기 위해서 [1/2*(1/0.058+1/0.707)]^(-1)을 계산하면 되는데, 방금 검증한 대로 한다면 [1/2*(1/0.057+1/0.707)]^(-1)을 계산해야 한다.

 

기술보고의 수치대로 계산한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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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205228...이 나오므로 반올림하면 UNDP의 값이 정확하다.

 

앞서 검증한 값을 입력해서 조화평균을 구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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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4947...로 반올림해도 0.105라서, UNDP의 값과 0.002의 오차가 발생한다.

 

다음으로 분야별 산술평균의 기하평균은 (0.516*0.258*0.485)^(1/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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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1779...이므로 반올림하면 0.401로, UNDP의 값이 정확하다.

 

마지막으로 성불평등지수를 구하기 위해서, 기술보고의 수치대로 하면 1-(0.107/0.401)을 구해야 하고, 검증한 자료대로 하면 1-(0.105/0.401)를 구해야 한다.

 

기술보고의 수치대로 계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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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31670...이므로 반올림하면 0.733으로, UNDP의 성불평등지수가 정확하다.

 

검증한 대로 계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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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8154613....이므로 반올림을 하면 0.738이 나와, UNDP의 수치와 0.05의 차이가 발생한다. 여성의 분야별 수치들의 기하평균에서 최초의 차이가 발생했는데, UNDP가 이 값을 올림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수치들에서는 반올림을 했으므로 그랬을 가능성은 적다. 결국 여성의 분야별 수치들의 기하평균에서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용한 프로그램이 계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UNDP 측의 계산 착오가 있었던 것이 된다.

 

한 번 천천히 여성의 분야별 수치들의 기하평균만 다시 구해보자. 앞서 보았듯이 [{(10/200)*(1/47)}^(1/2)*(0.007*0.076)^(1/2)*0.252]^(1/3)를 계산하면 된다.

 

10/200은 0.05다. 1/47은 0.0212765957446809이다. 이 둘을 곱하면 0.001063829787234045이다. 이 수치의 제곱근을 구하면 0.032616403652672147416이다.

 

0.007*0.076은 0.032616403652672147416이다. 이 수치의 제곱근은 0.0230651251893416이다.

 

0.032616403652672147416*0.0230651251893416*0.252는 0.0001895799612356953929388364281296890112이다.

 

0.0001895799612356953929388364281296890112의 세제곱근은 0.0574465753284891351013624273511393362270959이다. 그러므로 일단 내 계산에 실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UNDP의 계산이 맞고, 내 계산이 틀렸다는 반증이 나오지 않는다면, UNDP에 의한 성불평등지수 계산의 신뢰도가 다소 낮아질 수 있다고 하겠다.

 

(3) 수준 반영에 따른 문제

 

'생식건강' 분야의 하위 항목은 '모성 사망률'과 '청소년 출산률'이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모성 사망률'이나 '청소년 출산률'은 격차가 아닌 수준을 반영하는 지표이며, UNDP 역시 이 항목들이 여성과 남성 사이의 격차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 두 항목이 단순한 성불평등의 결과물이 아니라 개발 수준의 정도와도 관련이 있으며, 한 국가 내에서도 사회 인프라가 갖추어진 지역이냐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과연 적절한 지표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임신중절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재생산권 문제가 충분히 다뤄졌다고 보기 힘들다. 한국은 청소년 출산률이 1,000명당 2.2명으로 최상위권인데, 임신 청소년의 임신중절 비율이 81.6%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어[성관계 유경험 청소년 평균 15세 시작… 4명 중 1명 임신] 출산을 한 2.2명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이 타당한지 문제된다. 다만 재생산과 관련된 지표를 포함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하간 UNDP는 성불평등지수 산정 방식을 통해 수준 문제를 조정하려고 시도하지만, 원 자료가 수준을 반영하고 있는 이상, 성불평등지수 자체도 영향을 받게 된다. 성불평등지수가 수준과 격차를 다 반영한 결과, 여성 지위 지수(절대적 지위)나 성평등 지수(상대적 지위)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애매한 지수가 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불투명해졌다.

 

(4) 변수 선택 문제

 

'경제참여' 분야의 하위 항목이 다소 부실하다. 오로지 '경제활동참가율' 하나만 가지고 수치를 산정하는데, 추정 소득이나 임금 형평성 등이 반영되어 있지 않아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UNDP는 성평등 관련 지수를 산출하면서 소득 항목을 반영했던 적이 있었으나, 격차보다는 수준을 반영하는 형식이어서 제대로 성평등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는 소득 항목을 아예 제외해서 또다른 문제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3.4.5. 성불평등지수에 대한 개인적 평가

 

성불평등지수는 수준과 격차를 모두 반영하려고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수준을 반영하는 것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목표가 산정 방식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 정확한 성평등을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본다.

 

또한 항목 자체가 적고, 경제 분야는 직업의 질을 묻지 않고 경제활동에 참가하기만 하면 모두 같은 값으로 따지는 '경제활동참가율' 하나만 가지고 모든 것이 측정되었다는 점에서 성취도의 손실조차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으로 몰리는 반면, 남성이 정규직에 편중되어 있어도 그런 차이가 드러나기 힘들게 된다.

 

산정 방식이 너무 복잡한 탓에, 개별 분야에 따른 자료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문제가 된다. 성격차지수는 개별 분야를 떼어내서 지수와 순위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성불평등지수는 어떤 방식을 도입해야 분야별 지수나 순위가 나오는지 알기 어렵다.

 

 

4. 결론

 

개인적으로는 수준을 반영하지 않는 성격차보고서를 더 선호한다. 주재선 씨는 국제지수 비교글(주재선, 우리나라의 성평등지수와 국제성평등지수 비교, 젠더리뷰, 2013)에서 격차만 반영하는 성격차보고서가 "체감적 평등과 거리가 있다는 문제"를 지적한 반면, 성불평등지수는 "국가의 발달수준에 영향을 받는 단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전자가 체감상의 문제라면 후자는 지수 자체의 산정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차라리 전자가 낫다고 본다. (주재선 씨도 성격차지수를 선호한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국제단체나 국제지수들은 보다 포괄적으로, 정확하게 성평등 지수를 산출해내길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관련된 지표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지표들을 어떻게 합산하고 정리해야 할지 복잡해지며, 표준을 정하기도 힘들어진다. 성격차보고서가 표준편차와 산술평균을 사용하는 반면, 성불평등지수가 산술평균, 기하평균, 조화평균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이런 관점의 차이가 현격히 드러난다. 더구나 이들 중에서 무엇을 표준적인 산정 방식으로 삼을 것인지 정하기는 대단히 까다로운 관계로 하나의 종합적인 성평등 지수를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체 순위라든가, 전체 지수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항목 별로 수치를 따져주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마무리를 해보자. 여성보다 남성이 리더십을 지닌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여성 고위직 비율이 낮은 것이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들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여성과 남성이 각각 어느 분야에서 더 두각을 드러내는지 비교해주는 자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자료들은 차별의 결과인가, 차이를 발생시키는 원인인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리더십이 뛰어나서 관리직에 진출하기 수월한가, 남성 관리직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가 남성의 리더십을 경험적으로 더 뛰어나게 만들었는가?

 

만약 생물학적 원인이 컸다면, 세계적으로 편차가 이렇게 크게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편차가 발생한다는 건 인간이 국가 정책과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점을 반증해주지 않나 싶다. 바로 그 반증으로서 국제지수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참고자료

 

OECD Development Centre, Measuring Gender (In)equality: Introducing the Gender, Institutions and Development Data Base (GID), Working Paper No. 247, 2006.

OECD, Gender, Institutions and Development Database (GID-DB), 2009.

OECD, Gender, Institutions and Development Database (GID-DB), 2012.

UNDP, Table 4: Gender Inequality Index, 2014 Human Development Statistical Tables, 2014.

UNDP, Technical notes, Human Development Report, 2014.

World Economic Forum, The Global Gender Gap Report, 2014.

여성가족부, 2010년 가정폭력 실태조사 1부, 2010.

주재선, "통계, 지식과 정책"에 관한 제2차 OECD 세계 포럼 참여 결과 보고, 2007.

주재선, 우리나라의 성평등지수와 국제성평등지수 비교, 젠더리뷰, 2013.

Stephan Klasen and Dana Schüler, Reforming the Gender-Related Development Index and the Gender Empowerment Measure : Implementing Some Specific Proposals, 2011.

Iñaki Permanyer, Are UNDP Indices Appropriate to Capture Gender Inequalities in Europ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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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9. 20:04

한국의 2013년도 성불평등지수 순위를 187개국 중 15위에서 152개국 중 17위로 수정한다. 15위는 UNDP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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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9. 22:15

UNDP가 계산을 부정확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비판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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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 1:49

성·제도·개발지수 관련 부분에 내용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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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3. 18:39

UNDP의 기술보고를 2013년 자료에서 2014년 자료로 업데이트했다. 달라진 것은 색상과, AFR이 ABR로 변경됐다는 점과, 예시가 브라질에서 예멘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수정된 점은 본문에 모두 반영했다. 아울러 계산을 그래픽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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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charges' 관련 코멘트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4/08/24 17:37
  • 수정일
    2014/08/25 02:2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지난 번 <이방인>의 이정서 번역과 관련된 글에 대해 Waga Jabal님이 페이스북 상에서 비판적 고찰을 적었다. 페이스북 댓글을 남기는 게 가장 낫겠지만 내가 계정을 비활성화 상태로 해놓은 관계로 따로 글을 남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Waga Jabal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어 charge에도 기소 혹은 기소이유 등의 뜻이 있다. 일반사전에는 잘 안 나오지만 유럽연합 다언어용어 데이터베이스 IATE 및 Robert Herbst가 펴낸 기념비적 역작 Dictionnaire des Termes Commerciaux, Financiers et Juridiques(프랑스어/영어/독일어 법률/경제 용어 사전)에는 이런 뜻이 나온다. 따라서 '기소'의 뜻이 없다며 이정서가 명백히 틀렸다는 블로거의 반박은 꼭 옳지만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 제61조 및 주요 언어의 공식 번역은 다음과 같다.

 

영어 Confirmation of the charges before trial
프랑스어 Confirmation des charges avant le procès
독일어 Bestätigung der Anklage vor dem Hauptverfahren
이탈리아어 Convalida delle accuse prima del processo
스페인어 Confirmación de los cargos antes del juicio
러시아어 Утверждение обвинений до начала судебного разбирательства
중국어 审判前确认指控
일본어 公判前の犯罪事実確認
영어와 프랑스어가 똑같이 charges로 되어 있고 독일어 Anklage 기소, 고소, 고발 따위를 뜻하며 일본어는 범죄사실이다.

 

우선 '기소'와 '기소이유'는 다른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기소'와 '공소사실'도 다른 의미다. '기소'는 형사사건에 대하여 법원에 재판을 구하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반면, '공소사실'은 기소가 된 범죄사실을 가리킨다. ('기소이유'라는 용어는 한국 법체계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따라서 'charges'에 담긴 '혐의'라는 의미를 '공소사실'로 넓혀서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재판을 구하는 행위 자체인 '기소'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혹은 그것만으로는 근거 부족이다.

 

Waga Jabal님이 예시로 든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 제61조의 경우 국내 번역어는 '기소'가 아닌 '공소사실'이고, 일본어 번역인 '범죄사실'도 세부적 법리나 연혁이 다를 수는 있지만 '공소사실'과 궤를 같이 하는 번역어다. Waga Jabal님이 언급한 IATE에 따르더라도 'charges'는 "fait qui pèse sur la situation d'un accusé", 즉 '사실(fait)'에 관한 용어이지 '행위(acte)'에 관한 용어가 아니다.

 

Waga Jabal님은 "기소 혹은 기소이유"라고 포괄적으로 지칭하지 말고, 'charges'가 정확히 '기소'라는 의미로 사용된 예시를 들어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내 단정적인 표현을 철회할 것이다.

 

덧. 영어에서는 'charge'가 '기소'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공소사실'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따라서 프랑스어의 'charge'가 영어의 'charge'에 대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프랑스어의 'charge'도 '기소'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해당 문맥의 영어 'charge'가 '기소'라는 의미로 쓰였는지, '공소사실'이라는 의미로 쓰였는지부터 확정지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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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 법률 용어와 관련된 번역 문제, 그리고 이정서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4/08/19 00:34
  • 수정일
    2018/02/21 23:15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한국인 소설가가 한국어로 소설을 쓰면서 법률 용어를 잘못 사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소설만이 아니라 가끔 변호사들조차 법률 서면을 작성하면서 다소 부정확한 단어를 쓰는 경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외국 문학에 등장하는 법정 장면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소한 오류야 거의 필연일 수밖에 없다. 1. 원 텍스트를 작성하는 외국인 작가부터 정확한 법률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2. 외국어 사전들에서 해당 외국어 단어의 뜻을 충분히 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아예 대응하는 적절한 한국어 법률 용어가 없을 수도 있다) 3. 설령 그랬더라도 문맥에 따라 다르게 옮겨야 할 필요가 발생하기도 한다.

 

카뮈의 <이방인>은 부조리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제2부에 이르러서는 형사 절차를 주된 소재로 삼는다. 그런 이유로 국내에 수종의 <이방인> 번역본이 있음에도 제각각 크고 작은 오류를 담고 있다. 내가 제출한 번역본 역시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오류가 생기는 까닭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이방인>의 한국어 번역본에서 역시 이 세 가지 문제가 모두 발생한다.

 

 

첫째, 카뮈 본인의 부정확한 용어 사용이다. 제2부 제4장 첫째 문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L'avocat levait les bras et plaidait coupable” 나는 이를 “변호인은 두 팔을 든 채 유죄를 인정하면서도”라고 번역했다. 다른 번역본도 비슷하게 번역했다. 원문 자체가 중의적이거나 복잡하지 않고, 번역에도 별다른 난점이 있진 않다. 문제는 “유죄를 인정”한다는 표현 그 자체다.

 

미국 형사 절차에서는 법관이 증거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피고인에게 기소사실에 관하여 유죄로 답할 것인지, 무죄로 답할 것인지 묻는다. 이를 기소사실인부절차(起訴事實認否節次)라고 부른다. 유죄를 인정할 경우에는 증거조사를 생략한 채 곧바로 양형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 무죄라고 대답하는 경우에는 증거조사를 개시하게 된다.

 

프랑스와 한국을 비롯한 대륙법계 형사 절차에서는 원칙적으로 기소사실인부절차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프랑스가 몇몇 경죄에 대하여 최근 이 제도를 도입하긴 했지만 살인죄와 같은 중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정되지 않는다. 설령 피고인이 자기 유죄를 인정하더라도 법관은 증거조사에 의해 독립적으로 피고인의 죄를 인지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피고인이 스스로 유죄라고 말해도 법관이 무죄 선고를 내릴 수 있다(예컨대 책임조각 등의 사유로). 때문에 법관은 피고인에게 유죄로 답할지 여부를 묻지고 않고, 피고인이나 변호인도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방인>의 배경이 프랑스 형사 절차가 적용되던 식민지 알제리인 이상 뫼르소의 변호인은 변론 과정에서 유죄를 인정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설령 변호인이 실제로 ‘유죄를 인정한다’는 단어를 사용했더라도 이는 ‘뫼르소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다투지 않겠다’는 취지로만 다뤄질 수 있으며, ‘유죄 인정’이라는 표현이 내포하는 효과를 취할 수는 없다. 따라서 뫼르소가 변호인의 변론을 정리하며 “변호인은 두 팔을 든 채 유죄를 인정하며”라고 서술해서는 안 된다. 소위 말하는 ‘고증 오류’인 셈이다.

 

마치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 1심 법원이 피고인에게 사형 선고를 한 경우 피고인은 항소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A라는 소설이 한국 법정을 묘사하며 피고인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항소를 포기해서 이내 사형당했다고 서술한다고 치자. 이는 한국 형사 절차상 가능하지 않은 전개인 것이다.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변호인이 공판에서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 전개다. 물론 <이방인>의 경우는 무슨 취지로 하는 말인지 이해해줄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면 번역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원문대로 번역을 하더라도 법리적 오류가 담긴 번역본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아쉽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정도 오류가 큰 흠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설령 기소사실인부절차의 연혁과 의의를 아는 사람이 저 표현을 보더라도 카뮈의 취지대로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둘째, 불한사전의 불충분한 용어 안내다. 제1부와 제2부에 등장하는 “témoin”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불한사전은 ‘증인’이나 ‘목격자’라는 번역어를 소개한다. 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대다수의 번역본은 이를 일관되게 ‘증인’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불한사전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뜻이 하나가 더 있다. ‘참고인’이라는 뜻이다.

 

경찰에서 조사받는 목격자가 ‘참고인’이라면, 법원에서 조사받는 목격자는 ‘증인’이다. 따라서 경찰이 ‘증인’을 조사한다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하다. <이방인>의 경우, 제1부에서 레몽이 뫼르소에게 자기를 위해 경찰에 가서 “témoin” 노릇을 해달라고 한다. 경찰 조사이므로 ‘증인’이 아닌 ‘참고인’이 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다소 부실한 사전 탓에 대부분의 번역본은 이를 ‘증인’으로 해두었다.

 

 

셋째, 문맥에 따른 용어 사용의 문제다. 뫼르소에게 “avocat”가 있는데, 사전에 따르면 이는 ‘변호사’라는 의미도 있고, ‘변호인’이라는 의미도 있다. 동의어처럼 보이는 두 단어지만 사실 뜻이 다르다. ‘변호사’란 타인을 소송대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하나의 직업이라면, ‘변호인’이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지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민사소송에서는 ‘변호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변호인’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꼭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는 셈이다.

 

물론 많은 경우 직업이 ‘변호사’인 사람이 ‘변호인’의 직책을 맡게 되므로 형사소송에서는 두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한국 법체계에서 이 둘이 나뉘어서 그렇지 프랑스에서는 둘 다 “avocat”라는 같은 단어다.

 

다만 제2부 제3장에서 검사가 직접 뫼르소의 변호인을 언급하는 장면이 간접화법 형태로 등장한다. 이때는 명백히 형사소송에 참여하는 지위로서 ‘변호인’을 언급하는 것이므로 맥락상 ‘변호사’ 대신에 ‘변호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다. 마찬가지로 형사소송법에 따라 국가가 피고인에게 붙이는 변호인은 ‘국선변호사’가 아니라 ‘국선변호인’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다행히도 이런 종류의 오류나 오역은 매우 사소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줄거리를 바꿔버릴 정도의 오류도 아니거니와, 작품에 대한 이해와도 큰 관련이 없다.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본도 법률 용어와 관련해 이런저런 오류를 안고 있다. 다른 번역본과의 차이점이라면, 이정서 번역본에는 “역자노트”가 붙어 있어 이정서가 그런 오류에 이르게 된 비교적 상세한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은 그가 내놓은 결과물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남의 번역본을 비판한 그의 서술에 오류가 있는 경우도 다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법체계나 법률 용어와 관련된 그의 주장은 대부분 틀렸다.

 

번역가란 법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법에 대한 사소한 무지를 탓할 건 없지만, 그 무지가 남의 노력과 성과물을 함부로 깎아내리는 데 동원되었다면 마땅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몇 개를 보도록 한다. 보아하니 이정서의 <이방인>은 쇄 별로 내용이 꽤 다른 모양인데 (독자로서 유감이다) 나는 2쇄를 기준으로 검토하겠다.

 

 

(1) 이정서의 “역자노트” 29.

 

제2부 제1장에서 뫼르소의 변호인과 예심판사가 “charges”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정서는 김화영이 “charges”를 ‘수임료’로 번역한 것을 두고 “charges”에는 ‘수임료’와 ‘기소’라는 의미가 둘 다 있지만 여기서는 ‘기소’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정서가 드는 근거는 세 개다. 첫째, 프랑스 저소득층을 변론해주는 국선변호인은 국가로부터 보수를 받으므로 예심판사와 수임료를 논할 필요가 없다. 둘째, 예심판사에게 기소 권한이 있으므로 둘이 기소를 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세 번째 근거는 법과 상관없으니 따로 적어놓지 않는다.

 

우선 프랑스어 사전을 보면 “charges”에 ‘기소’라는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프랑스어로 ‘기소’는 ‘poursuite’ 내지 ‘accusation’이다. 그러므로 “charges”에 ‘기소’라는 뜻이 있다는 이정서의 주장은 사전에 의해 뒷받침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그의 두 가지 ‘법리적’ 근거를 보자. 첫째 근거는 그 자체로 아주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국선변호인 제도가 꼭 저소득층을 위한 제도는 아니라서 아주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변호인과 예심판사가 수임료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수임료를 논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이정서는 뫼르소의 변호인이 국선변호인이라는 점이 대단한 근거인 것처럼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선변호인도 의뢰인으로부터 수임료를 받기 때문에 굳이 예심판사와 수임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국선변호인은 같이 국가로부터 보수를 받는 입장에서 예심판사와 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조금이라도 더 있는 셈이다. 여하간 변호인이 굳이 예심판사와 수임료 이야기를 안 할 것이라는 지적 자체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는 있다.

 

둘째 근거와 관련해, <이방인>이 쓰였을 당시 적용되었던 프랑스 구 형사소송법(1808)에 의거, 예심판사에게 부분적으로 기소 권한이 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살인죄와 같은 중죄의 경우 예심판사에게 기소권(재판회부 결정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고등검찰청 송부 결정권이 있었을 뿐이다. 이 송부 결정권을 이정서는 ‘기소’라고 파악한 모양인데, 중죄의 재판회부 여부를 고등검찰청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고등검찰청 송부 결정을 ‘기소’로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단순하게 보아 예심판사가 기소권을 갖는다고 하다라도 그가 변호인과 기소 여부를 논해야 하는 건 아니다. 유죄협상제가 도입되지 않은 프랑스 형사절차를 고려하면 예심판사가 변호인과 기소 여부를 논할 당위는 더더욱 떨어진다. 마치 경찰이 수사를 개시할지 말지를 용의자와 의논해서 결정하는 꼴이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둘이 수임료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기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색하다는 말이다.

 

‘기소’라는 번역어는 사전에 잘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이정서가 드는 근거도 빈약하다. 그렇다면 어떤 번역이 가장 적절할까? 프랑스 형사소송법에서 ‘charge’는 증거, 피의자/피고인에게 불리한 사항, 혐의, 비용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현행 프랑스 형사소송법 제81조는 예심판사에 대해 “Il instruit à charge et à décharge.”라고 규정해두고 있으며, 한국 법무부는 이를 “예심판사의 수사대상에는 피의자에게 불리한 사항과 유리한 사항이 포함된다.”라고 번역한다(법무부, 2011). 혹은 제1권 제3편 제1장 제1절 제목인 “De la reprise de l'information sur charges nouvelles”는 “새로운 증거에 기한 예심수사의 재개”라고 번역한다.

 

해당 장면이 예심수사 중에 예심판사와 변호인이 대화하는 장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항’, ‘증거’, ‘혐의’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프랑스 형사소송법은 “charges”를 ‘비용’이라는 의미로는 사용해도 ‘기소’라는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으므로 이정서의 주장은 명백히 틀렸다.

 

 

(2) 이정서의 “역자노트” 38.

 

마리는 결과적으로 법정에서 뫼르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만다. 이정서는 왜 마리가 그런 증언을 했을까 탐구하며, 마리가 “예심을 맡았던 ‘차장 검사’”에게 뫼르소에 대한 유리한 증언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불리한 증언도 일단 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과감한 추측인데도 이정서는 단정한다. 그래서 이정서는 마리가 차장 검사에게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형사소송법 체계상 차장 검사(avocat général)는 당해 사건의 예심(cours d'instruction)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예심은 예심판사(juge d'instruction)가 주관할 뿐이며, 차장 검사는 공판 단계에 이르러 공소유지의 임무를 맡을 뿐이다. 실제 소설을 보더라도 차장 검사는 공판 이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차장 검사가 예심과 관련된 서류를 검토할 수야 있겠지만 적어도 예심을 담당하는 당사자는 아니다. 따라서 “예심을 맡았던 ‘차장 검사’”라는 표현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며, 차장 검사가 예심에 관여해 마리와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볼 소설 내적, 혹은 법리적 근거 역시 찾을 수 없다.

 

 

(3) 이정서의 “역자노트” 40.

 

이정서는 김화영이 “se défendre”를 ‘변명’이라고 번역한 것을 비판하며, ‘변호’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문이 대명동사로 쓰인 점을 감안하면 ‘자기 변호’ 정도가 될 것이며, 실제로 이정서는 “스스로를 변호”라고 옮겼다.

 

그런데 ‘변명하다’와 ‘스스로를 변호하다’ 사이에는 실제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정서는 대단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변명 = 자기 변호’다. 한국 형사소송법 제72조와 제200조의5 모두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서술한다. ‘변명’은 적확한 용어인 것이다. 이정서의 비판은 과잉되었다.

 

 

(4) 이정서의 “역자노트” 47.

 

카뮈는 뫼르소의 변호인을 두고 “Il a plaidé la provocation très rapidement”라고 묘사한다. 이정서는 이를 “그는 도발에 대해 황급히 변론한 다음”이라고 옮기면서, 이 도발이란 뫼르소에 대해 사형을 청구한 검사의 도발을 가리키며, 변호인은 거기에 변호(항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원문을 분석해보면 “la provocation”은 “a plaidé” 동사의 직접목적보어, 즉 해당 동사의 대상이 된다. 영어의 3형식 문장(S+V+O)과 유사하다. 따라서 한국어 구문에 맞게 원문을 재구성하면 ‘la provocation을 a plaidé하다’가 된다. “la provocation”은 ‘도발’이라는 의미이므로, ‘도발을 a plaidé하다’가 된다. 한편 이정서는 ‘도발을’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도발에 대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직접목적보어로서 ‘도발’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고 원문의 문장 구조를 비튼 것이다. 마치 ‘나는 사과에 대해 먹었다’와 같은 문장이 되어 버렸다.

 

“a plaidé” 동사는 ‘변론하다’, ‘변호하다’, ‘주장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변호하다’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쓰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변론하다’나 ‘주장하다’가 더 적절하며, ‘변론’이 개별 주장을 모두 포괄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발’이라는 구체적 지점 내지 쟁점을 내세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장’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정리해보면 ‘그는 도발을 주장했다’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발’이란 무엇일까? 프랑스 구 형법(1810) 제321조에 의하면 피고인이 자신을 도발(provoqués)한 피해자를 살해한 경우, 양형에서 감경이 이루어진다. 변호인이 ‘도발을 주장했다’는 것은 바로 이 구 형법상 감경 사유인 ‘피해자의 도발에 의한 살인’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이정서가 변호인이 검사의 도발에 항의했다고 파악한 것은 문장 구문에 맞지 않고, 프랑스 법체계를 간과한 처사다.

 

 

(5) 이정서의 “역자노트” 51.

 

교도소 부속 사제가 뫼르소를 방문한다. 원문은 “recevoir”인데, 김화영은 ‘면회’, 이정서는 ‘접견’이라고 번역했다. 이정서는 ‘접견’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며 사전에서 두 단어를 비교해보라고 하며 사전을 인용해 놓았다. 사전에서 ‘접견’은 “[법률] 형사 절차에 의하여 신체의 구속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나 피의자와 만남. 또는 그런 일.”이라고 나와 있다. 반면 ‘면회’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어떤 기관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곳에 찾아가서 사람을 만나 봄.”이라고 나와 있다. ‘면회’가 ‘접견’보다 포괄적이고 넓은 개념이다. 그런 만큼 ‘면회’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정서는 당연히 자기처럼 번역해야 한다고 자신하는 모양이다.

 

이정서는 ‘접견’이 법률 용어이므로 그게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법률 용어인 것과 정확한 번역인 것은 다른 문제다. 도리어 법률 용어는 딱 정해진 대로 쓰이지 않는 한 오류가 나기 쉽다. 제각각 매우 한정적인 용법만을 지니고, 그 범위를 함부로 벗어날 수 없다. 위에서 보았듯이 김화영의 ‘변명’이라는 번역은 상황에 알맞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접견’이라는 법률 용어는 이 상황에 딱 알맞는 단어는 아니다.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사전에는 신체가 구속된 피고인을 만나는 걸 ‘접견’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부속 사제도 구속된 피고인인 뫼르소를 만난 것인데 말이다. 한 번 ‘접견’의 의미를 더 자세히 따져보자. 아무리 사전이 정확하다고 해도 법률 용어에 관한 한 법률 자체의 설명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재소자의 접견을 규율하는 주된 법은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의 제41조 제1항은 “수용자는 교정시설의 외부에 있는 사람과 접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교정시설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는 부분이다. ‘접견’이란 외부 사람을 만난다는 맥락을 내포한 것이다. 수용자가 교정시설에 소속된 사람과 만나는 행위를 ‘접견’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예컨대 재소자가 교도관과 만나는 것을 ‘접견’이라고 하진 않는다. 교정시설 내 사람을 만날 때는 접견과 관련된 규정과 절차가 적용되지도 않는다.

 

마침 뫼르소가 만나는 사제는 보통 사제가 아니라 교도소 부속 사제다. 교정시설에 속한 종교인이라서 교정시설 외부에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부속 사제가 뫼르소를 만나는 것을 두고 ‘접견’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 한국의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역시 ‘접견’과 ‘종교상담’을 전혀 다른 조항에 규정해두고 있으며, 교정본부 홈페이지를 보아도 접견 관련 안내와 종교생활 관련 안내는 구분되어 있다. 이정서의 ‘접견’ 번역이 오역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겠지만 반드시 그와 같이 번역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면회’가 무난하며, 나는 사제가 직접 뫼르소의 감방으로 찾아온다는 점에 착안해 ‘방문’으로 번역했다.

 

 

(6) 이정서의 “역자노트” 53.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pourvoi”를 할지 말지 고민한다. 김화영은 “pourvoi”를 ‘상고’로, 이정서는 ‘항소’로 옮겼다. 이정서는 1심에 대한 상소는 ‘항소’, 2심에 대한 상소는 ‘상고’이므로 1심을 마친 뫼르소로서는 ‘항소’를 고민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이정서의 설명은 3심제 하에서, 그것도 원칙적으로 볼 때만 타당하다. 엄밀하게 보자면 3심제 하에서도 1심 판결에 불복해 고등법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법원에 상소할 수도 있으며, 이는 ‘항소’가 아니라 ‘상고’에 해당한다. 실제로 한국 형사소송법은 예외적으로 1심에서 곧바로 대법원으로 상소하는 것을 허용하며, 이를 ‘비약상고’라고 부른다.

 

사실 항소심에 하는 상소가 ‘항소’, 상고심에 하는 상소가 ‘상고’이다. 말장난 같지만, 상소라는 행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받아주는 법원이 먼저 있다는 뜻이다. 현행 한국 법체계에서 대법원은 상고심의 지위를 차지한다(이외에도 몇 가지 지위를 더 점하긴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에 대해 대법원에 상소하는 것은 그것이 몇 심에 대한 불복인지를 불문하고 ‘상고’가 된다. 그런데 보통 2심 판결에 대해 불복해서 대법원에 상소하기 때문에 2심에 대한 상소를 흔히 ‘상고’라고 부를 뿐이다. 또한 2심 형사 판결이 확정된 뒤에도 이에 예외적으로 불복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사실관계를 다시 다투는 경우 2심이 다시 심판하기 때문에 ‘재심’이라고 부르는 반면, 법률관계를 다시 다투는 경우 대법원이 심판하기 때문에 ‘비상상고’라고 부른다.

 

결국 1심에 대한 상소는 항소, 2심에 대한 상소는 상고라고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제도의 구체적 운용에 따라 알맞은 용어를 골라야 한다. 뫼르소에게 적용되었던 프랑스 구 형사소송법(1808)은 중죄법원(cour d'assises)이 살인 사건의 1심을 담당하도록 하되, 그 판결에 대해 파기원(Cour de cassation)에 상소하는 것만을 허용했다. 3심제가 아닌 2심제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파기원에 상소하는 것을 바로 “pourvoi”라고 한다. 프랑스 법체계에서 최종심이자 법률심인 파기원에 하는 상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거기에 대응하는 한국 법률 용어는 ‘상고’이다. (절차법상 상고이유가 법률 위반 사유에 한정된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법무부 역시 프랑스 형사소송법의 “pourvoi”를 ‘상고’라고 번역한다. “pourvoi”를 ‘항소’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거나, 최소한 현재 학계에 의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번역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 외에도 이정서의 번역본에는 ‘피고/피고인’, ‘참고인/증인’, ‘신문/심문’, ‘고소/고발/기소’ 등의 용어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은 부분이 다수 있었다. 

 

누차 말했지만 법률 용어와 관련해서는 오류가 날 수도 있다. (물론 너무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그런데 “역자노트”를 통해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강하게 주장했다면 그런 오류에 대한 허용 가능성은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법리적인 부분에 관한 이정서의 번역과 주장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이정서한테 그가 “역자노트”에 남긴 말을 되돌려준다.

 

“이렇듯 역자는 기본적인 프랑스의 법률 체계조차 들춰 보지 않고, 프랑스어를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한다는 자신감에 (사전을 잘 안 보는 편집자차럼) 자기 상식으로 그 뜻을 옮겨서 소설을 완전히 왜곡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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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26. 23:08

 

예심판사의 기소 권한과 관련해, 프랑스 구 형사소송법(1808)에 따른 권한이 그렇다는 점을 명시했다. 기존 글과 내용 변화는 없다. 한편, 프랑스 현행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예심판사는 모든 죄에 대하여 고등검찰청을 거치지 않고 재판에 회부할 권한이 있다. 단, 예심판사에 의한 재판 회부를 기소로 보아야 할지, 이송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이외에도 몇 가지 띄어쓰기를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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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0. 18:50

 

한국의 사형제도와 관련해 잘못된 내용을 적어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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