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9/06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6/22
    알수없는 공포
    은수
  2. 2009/06/01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13)
    은수

알수없는 공포

 

 

오늘같은 날 게다가 누워서 티비를 보다 일어나 깜깜한 방에서 혼자 이런 글을 쓴다는게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평소엔 개인적인 얘기를 잘 쓰지도 않는 이 곳에.

내일이면 또 지울지도 모르지만 일단 쓰고 본다.

 

오늘, 아니 어제가 된 일요일. SBS에서 공포증에 대한 다큐를 보았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 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 과일을 안먹는 사람..

아..저럴 수도 있군..이유가 뭘까..처음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 것마냥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큐를 계속 보다보니 공황장애부터 시작해서..갈수록 마치 내 얘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마저 신경강박인가, 고질적인 과대망상인가 그러고 있다.

 

나를 조금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그렇다(?)는 것에 대해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가끔 나의 공포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아니, 전에 상담을 받을 때부터 생각해보았다. 

나름대로 여성단체와 연계된 소개받은 병원이었는데도, 어째 갈수록 의사가 나를 포기한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약이라는 것도 위험인물로 분류된 이상 별로 소용이 없었고,  병원에 가서 '억지로' 얘기를 꺼내야한다는 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원을 안갈수록 더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어릴때부터 하루도 꿈을 꾸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어른들은 그래서 내가 키가 큰 거라고 했지만.

정작 내가 꾼 꿈의 내용들은 대부분 끔찍한 것들이었다.

끝도 없는 층층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이유는 뒤쫓아오는 무서운 아저씨 때문이었다. 성폭행의 위협..죽음의 공포..그런걸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곤, 나는 낭떠러지나 난간따위에서 꼭 몸을 던졌다.

그리고 또 많이 꾸는 꿈들은 어느날 사람들이 많은 거리, 친구들이 있는 학교, 이런 곳들에 나갔는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옷도 안입은 차림이었거나 그래서, 수치심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숨어다녔었다. 이런 식의 꿈을 한두번 꾼게 아니었다.

왜 항상 그런식의 불쾌하고 위협적인 꿈을 꾸는 건지..어린시절에 나에게 무언가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봐도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다.

어느 순간 그게 꿈을 꾸는 순간 꿈이라는 걸 꿈에서조차 알정도로 익숙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처음 지금 사는 집에 이사를 와서 제일 괴로웠던 건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밤마다 자려고 누우면 나는 옆집 tv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자꾸만 확대되서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여름이 되어도 창문을 열어놓고 잘수가 없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자꾸만 옆집에서 누가 볼 것 같고, 누가 들어올것 같고,조금만 창문이 바람에 흔들려도 그런 불안감이 든다.

그리고 상상 속의 공포는 점점 커진다.

 

어느날은 동생집에 놀러가서 시내에 나갔는데, 버스에 어떤 남자가 자꾸만 쳐다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언니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버스 중간에서 내려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야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일련의 공황장애라고 할 수 있는 거, 사회공포증, 대인공포증...의 증상들은 나도 다 경험해보았다.

왜 그런건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사회생활에 완전히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만 아는거다.

이런 생각조차 너무나 자아중심적이어서 하는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느끼는 공포 자체가 너무나 '여성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엇으로부터의 강박때문에 그런걸까?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과도하게 생각하는-꼭 지금처럼-것의 문제일까?

 

아무래도 오늘밤은 잠이 안 올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

가끔 진보블로그에 들어오기 싫을때가 있다.

뭐, 요즘같은 시절-이른바 추모정국-도 그 하나인가보다.

처음 뉴스를 보고, 몇개의 글과 그에 달린 '반복되는' 댓글을 보다가 그냥 덮어버렸다.

 

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그런(?이른바 노빠?) 사람이 아니라고 양심고백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

나는 노무현을 찍은 적도 없고, 탄핵때도 촛불을 들지 않았고,

03년 열사정국, 대추리, FTA 농민투쟁...나의 대학시절을 뒤덮은 것이 노무현 정권때였다고

노무현에 관해서는 노무현 정권 퇴진 투쟁이라는 구호밖에 외친적이 없다고

나의 정치적 올곧음(!!)을 전제로 깔아야만 글을 쓸수 있을 것 같네.

 

한 사람의 죽음.

그래, 죽음이라는 것도 평등하지 않다는 누군가의 말은 맞다.

강준만이 이야기했던 심정민주주의가 왜 한 택배노동자에게는 작동하지 않는가?

한 택배노동자의 죽음과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같지 않고, 같을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모두에게 슬픔을 강요할 수도 없고, 모두가 슬퍼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슬픔조차도 중립적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느날 한겨레의 헤드라인이 내 가슴속에 팍 꽂혀들었다.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

 

노무현이 자행하고 침묵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묻혀지는 것도,

대한민국의 선구자이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화되는 것도 싫지만 말이다.

대중들을 돌아서면 까먹는 금붕어로 대상화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왜 , 모든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던 국민들이, 왜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럽게 울고,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촛불을 드는지를 분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개인의 '불쌍한' 죽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또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상징했던 '가치'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 가치가 비록 실제로 노무현이 될 수 없는, 허구적인 것이더라도 말이다. 

그 가치는 무엇인가? 민주주의? 인권? 시민들의 정치참여? 촛불의 기억?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보고 듣고 느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인지.

그 미안함이 어떤 기억이 되어, 앞으로의 정치적 상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물론 작년의 촛불을 '실패'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시민추모제를 주최한 몇몇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기획한 판에서 시인, 학자, 노래패를 불러놓고 추모를 '시킨다'.

이름은 자유발언이되, 내용은 자유발언이 아니다.

이미 섭외된 사람들이 나와 미리 정해진 말들을 쏟아놓는다.

며칠뒤, 학생운동단체들은 마스크에 모자, 사수대복장을 갖추고 시청앞 골목에 앉아있었다.

이명박 정권 심판을 비롯한 각종 급진적인 구호들과 노래들이 이어진다.

그 시각, 몇몇 시민들은 도로로 뛰어나와 전경들에게 에워싸이고

분노한 시민들은 '권'들에게 그렇게 앉아나 있을거면, 구경이나 하고 서있을거면 

차라리 깃발을 내리고, 차라리 다른데로 가버리라고 소리지른다.

속사정이 있겠지..무언가 있겠지..생각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는 그들이, 택이 내려와야 움직이는 그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소위 말하는 진보진영, 혹은 운동권들은  무엇을 진정 듣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흐름을 타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노란풍선을 들고광장을 가득채웠던 사람들은 신도같은 노빠들과

무지한 국민들일 것이라고..언제까지 비난만 하고 앉아있어야 할 것인가..

변하지 않는 이런 모습들이 기계적인 반응들이

대중운동 운운하면서도 대중들을 우습게 보기만 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을 비난으로 자위나 하면서..

결국 지난 촛불때처럼 대중들의 뒤꽁무니조차 쫓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반복되게 하는게 아닌가..

다시 씁쓸한 마음이 겹쳐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