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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1/20
    블로그 이사
    은수
  2. 2009/10/26
    박정희의 날(2)
    은수
  3. 2009/10/25
    디스트릭트 9(2)
    은수
  4. 2009/10/23
    2009/10/23(4)
    은수
  5. 2009/10/19
    꾸물꾸물 말하고 싶을 때(4)
    은수
  6. 2009/08/11
    참, 닮은 꼴(6)
    은수
  7. 2009/07/27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은수
  8. 2009/07/17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와서(13)
    은수
  9. 2009/07/12
    평소와 다름없이 노는 날
    은수
  10. 2009/06/22
    알수없는 공포
    은수

박정희의 날

 

 

 

거대한 유산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5940.html

 

 

 

잊고 있었는데...오늘이 10.26 이다.

30년전 박정희는 죽었으나

30년후 박정희는 여전히 살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개헌 뒤 하야하려 했다"

박근혜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 건설"

 

 

포털 사이트를 지나가는 조선일보의 제목보고 경악했다.

이것이 현실인가보다.

 

 

요즘 보수들은 친서민이니 복지니 하면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고

아직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가 넘어야할 큰산이라니 슬픈일이다.

 

 

어쩌다 민주주의가, 그것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밥투정 하는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가 되어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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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

오랜만에 즐겁게 영화보려고 했는데, 흑- 머리가 더 무거워져버렸다.

최루성 멜로 보고도 잘 안우는데..보다가 울어버렸다.

 

District 9.

SF는 그 어떤 다큐보다 현실적이며, 외계인은 그 어떤 은유보다 직접적이다.

 

 

지구침공을 막아내고 세계를 구원할 백인영웅이 사는 제국의 메트로폴리스가 아닌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불시착해버린 '외계인' 영화는 설정부터 정치적이다.

 

수용소 천막과 비-인간구역 디스트릭트9,

세금이나 축내고 토지개념도 없는 것들을 쫓아내려는 '인간'의 법,

감염경로조차 '그 더러운 벌레들과의 성관계'를 통한 것으로 믿고자 하는..장치들까지

(콘돔은 꼈냐며 비아냥댔지..'피'섞임에 대한 공포란..)

하나하나....

 

모든 묘사가 너무도 직접적이어서 보는 내내 불편했고

내 자신안에 무엇이 나를 그렇게 불편하게 하는건지 외면하고 싶은건지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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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3

 

#

피곤이 가시지 않는다. 잠을 10시간은 잔거 같은데도 눈은 건조하고 목은 뻣뻣하고 정신도 개운하지가 않네. 요즘처럼 꿈을 많이 꾼 적도 없다. 어제는 요새 어린이들도 잘 꾸지 않는다는 미국가는 꿈(?)을 꿨다. 비행기 티켓을 부여잡고선..말도 안되는 루트로 여행을 떠나는 꿈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정확히 두달후에는 아무도 모르게 후울쩍 떠나려는, 아니 떠날 수 있을거라는, 나의 현재적 열망이 가득한 꿈이었던거 같다. ㅠㅠ

 

 

 

#

어제 코시보다 기겁하는 줄 알았다. 스크와 김성근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말나는 행동들을 하는지. 이것도 고도의 언플인가? 무엇보다 사측은 "사람을 향합니다-sk"의 문구가 이미 야구팬들 사이에서 빈볼시비를 비롯한 막야구에 대한 조롱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아는가 모르겠다....어쨌든, 어제 제일로 부러웠던 건 화면가득했던 잠실의 팬들이었다. 준플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지지만 않았어도, 나도 그런 열기를 느낄 수 있었을텐데. 프로야구를 좋아한다 그러면 주변에서 별로 호응해주는 이가 없었다. 사실 떳떳하게(?) 말하기 시작한것도 요즘이다. 그러고보면 사람들도 있는 거 같은데 대놓고 말을 못하는 거 같기도 하다. 혹자는 3S정책도 들먹이고,  어떤 이는 1등만 가리는 프로스포츠의 성적제일주의를, 또 어떤 이는 국내 재벌기업과 지역주의의 만남을, 또 어떤 이는 미니스커트의 치어리더와 소주병든 아저씨들로 가득한 남성적 공간을...등등등-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야구팬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야구(장)은 그리 단순한 공간이 아닌 것을..(언젠가 시간이 되면 포스팅을 해야지ㅎㅎ). 그래도 미투만 봐도..요즘은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여자분들이 많은 거 같다, 나이대도 상당히 다양하고. 반갑다 흐흐.

 

 

 

#

김제동, 손석희에 이어 김구라가 검색어에 올랐다. 이러다 김구라도 개념연예인 반열에 들게 생겼다. 풋-. 개인적으로 김구라를 전-혀어 좋아하지 않는다. 뭐 아무튼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는.. 요즘  한나라당을 위시한 인간들이 '윤리'를 강화함으로써 사회통제를 강조하는 보수의 색깔을 보인다는 것에, 그리고 이런 담론이 너무도 샥샥 스며들고 있다는 것에, 흥미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나의 귀차니즘으로 인해 미루다 대충 포스팅을 시작,,) 선정성과 폭력성이 높으며 패륜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막장드라마들을 퇴출시켜라, 욕설과 비속어를 남발하는 김구라를 퇴출시켜라. 그리고 이런 윤리적 잣대는 최근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아동성폭력 사건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사이코패스로 한개인을 병리화하고, 썩어빠진 정신을 가진 사회의 악이 되는 인간들은 화학적 거세든 전자발찌든 사회보호법이든 뭐든 만들어서 격리시켜버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가장 앞서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주장할때, 내가 생각하기엔 더 확실하게 하세요, 보다는 이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성폭력사건과 같은 처벌을 통해 확립해가는가에 대한 얘기가 더 필요한것 같다.  질문되지 않는 도덕과 윤리는 사회를 통제하는 가장 무서운 잣대일테니...다음은 쩌리짱과 쭈구리를 남발하며 방송심의규정을 어기고 있는 무한도전이 될테고. 소위 '정상적' 성규범에 맞지 않는 이들 모두 예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포르노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워졌을 때, 왜 일부 페미니스트들과 보수주의자들이 함께 포르노 반대운동을 벌이게 되었었는지...우리에게도 뭔가 '각'잡힌 논의가 필요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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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꾸물 말하고 싶을 때

2006년부터 시작된 나의 블로그는 최근 업데이트는 2009년 8월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방치하는 게 내 성격인가부다.

 

요즘 들어 뭔가 꾸물꾸물-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정작 쏟아놓아야만 하는 '작업'이 있을때, 그게 '일'일때는 샘솟지 않던 에너지와 열정들이

굳이 이 시기에 해야만 된다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 것에는 생겨버린다.

시험기간에 딴짓하는 학생의 심리랄까.

 

미니홈피도 있고, 최근 들어서는 트위터와 미투도 해보고, 여러가지 공간에 말하기를 시도 해보았다.

다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아무래도 옵라인에서 관계맺고 있는 이들과 150자의 압박이 있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말하기 힘든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다른 곳에 블로그를 한번 만들어보려다 실패했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것에 잘 적응을 못하는 것 같으니. 스킨 하나 바꾸기도 어려워..

 

딱히 내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좀 산뜻하게 정리하고파서 여기 진보블로그도 도메인을 바꾸고 싶었는데, 안된다고 하니..

 

그냥 써야지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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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닮은 꼴

은수님의 [하우스 키퍼 제도] 에 관련된 글.

여기, 참 닮은 꼴이 있다.

 

더럽고 나쁜 습관은 고치기도 어렵다더니

조직도 운동도 썩어빠진 것들은 참 변하지 않는다.

 

일전에도 썼지만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서 제일 처음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남성 위원장이 여성 조합원 집에 왜 은닉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건 단지 우연의 일치인가?

 

이번 사건에서 전국적으로 위원장 은닉에 동원되었던 이들은

하나같이 혼자사는 여교사들이었다고 한다.

 

왜? 왜?

 

이유는 뻔하다.

잡히면

조직적으로 은닉한거 아니고 위에서 동원해서 그런거 아니고

우리는 청춘 '남''녀'이니 사귀는 사이라고 불면 되니까.

그게 아니면? 뭐?

여성조합원이 더 수발을 잘해줄거라고 생각했나?

 

썩어빠진 대가리들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하나도 안변했다.

일제 시대 때 사회주의 운동에서 하우스키퍼 제도를 했던 거 하고 뭐가 다른데?

때때로 소름이 돋는다.

 

가진자와 권력에 저항이니 변혁이니 운운하는 인간들이

위원장-조합원, 남성-여성, 조직-개인 이런 권력관계들은 잘도 써먹지.

그래놓고 나가서 여성 '동지'들 어쩌고 하지마라. 토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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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미쓰 홍당무에 이어 여성감독의 영화에서 다시보는 공효진은 멋지다.

뭐랄까, 참하게 입어도 삐딱하고 삐딱하게 입어도 묻어나는.. 진실성이 느껴지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핵심이자 반전사항을 중간쯤부터 눈치챈 이후, 후반부에 가서야 급속도로 건너뛰며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꽤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된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주는 인상은 알모도바르의 귀향, 같은 느낌이다. 일전에도 포스팅을 한적이 있지만 결국은 여자들의 우정, 관계들이 모계를 중심으로 둘러싸지게 되는 방식인데,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라는 고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결국은 트랜스젠더 아버지를 통해 모계-모성으로 통합된다. 영화에서 여러대에 걸쳐 등장하는 아버지 없는 자식들은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비난을 받지만, 다시 이것을 엄마, 이모라는 존재가 다시 메꿔주는 형식이다. 언니와 동생의 관계는 갈등적이지만 결국은 서로가 가진 상처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그래도 자매'이다.

 

미쓰 홍당무도 그랬지만 이건 분명 여성감독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언제나 남자를 둘러싸고 적이 되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불편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렇게 쉽게 '여자'라는 관계로 우정이 되고 갈등이 풀어지는 전개들을 불편해할테다. 물론 나는 그 두가지가 동급의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 여성을 어떻게 풀어내고 넘어서는지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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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와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에 다녀왔다. 진보넷 어느 블로그에선가 광고 포스터를 보고 갈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어떤 조직도 단체도 걸치지 않은 그냥 개인인 내가 꼭 가야될 당위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으나 '피해자 지지'라는 특정 글귀가 마음에 남아 결국 가게 된 것이다.

 

어젯밤 집에 돌아와 지지모임에 대해 오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 글로 인해 이 모임에 대한 오해 혹은 편견이 생기거나 하면 어떡하나...글 쓰기도 전에 고민병이 도져 결국 노트북을 덮었지만,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던 내 의견을 블로그에서 말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면서.

 

단적으로 내가 느꼈던 점을 말하자면, 피해자 지지모임은 성폭력 사건 대책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물론 피해자를 지지하는 (운동)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고,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조직하고 민주노총과 전교조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피해자의 고립을 방지하고 연대를 표명하는 방법의 하나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런 방식의 운동을 하는 것을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기대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재심위에 제출한 피해자의 글을 보면서 나의, 그리고 누군가의 경험을 떠올리며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고, 그로부터 고립된 그녀가 싸우고 있는 거대한 조직의 '반복적인' 논리들에 어떻게 함께 대응해야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집단적인 경험으로 나누고 피해자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서로가 치유하고 치유받는 과정이 피해자 지지모임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폭력상담소의 한 선생님이 말했던 것처럼 (잘 해결하라, 똑바라고 하라고 촉구해서) 조직에 다시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의 운동이 아니기를, 나 또한 바랬던 것이다. 비록 노동조합의 일정을 따라가고 중집회의에 가고 피켓팅을 하는 운동의 방법은 성폭력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는 매뉴얼이라할지라도, 그런 방식의 운동만로는 크게 바뀌지 않을거라는 마음과 그것이 피해자를 지지하는 유일한 방법인가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도 갖고 있다. 

 

그러면 어쩌자는거냐 물을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할수 있는 글쓰기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어제 모임에 왔던 한 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다. 전교조가 어려운 시기에 한 개인이 조직을 해치고 있다는 논리에 맞서기 위해, 현시국,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 대해서 분명히 반대한다는 연대입장을 밝혀두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런식의 대응이 오히려 연대를 해치는 행동이며 우리가 더 잘싸우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잘 해결해야 한다는 설득의 논리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났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조직 우선의 사고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이든 다른 사건이든 그로 인해 조직이 망하면 어떤가? 연대를 해치면 안되는가? 썩어문드러진 조직 속에서 개인이 당장 숨도 못쉬겠다는데..죽겠다는데. 조직이 망해도 아무리 탄압상태라고 해도 문제제기 하는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조직이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 일로 망할 조직이라면 진작에 망해없어지는게 낫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조직을 위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연대를 위한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정말로 듣고 싶지 않다.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과 손잡아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분리획책에 놀아나지 않고 노동자가 하나되어야 우리는 자본이란 거대 괴물에 더욱 잘 싸울 수 있다. 등등등)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여전히 개인은 조직을 위한 존재이고, 개인들의 문제제기는  '건강한', '더 잘 싸울 수 있는' 조직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최종목적은 우리가 '진정한 동지'가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들이 조직보위논리를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는 간부들에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설득논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절대로 이번 문제를 촉발시킨 핵심중의 하나인 '조직우선주의'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조직보호 논리로 내부 개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조직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고민해야 한다" 고 충고한 검찰의 이야기를 제발 우습게 알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은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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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이 노는 날

이번주까지만 놀아야지. 그 이번주는 계속해서 연장되고 있다. 오늘도 비가 온다. 쏟아지는 비 덕에 오늘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 좋다고 자체판결을 내렸다. 오늘은 어제 못본 무한도전을 보고 밀린 찬란한 유산을 보고...그리고 영화를 두개정도 본 다음에...책을 보고..1박 2일을 보고 나면 다시 또 하루가 갈 것이다. 예전에 잠시 같이 살았던 후배가 그런 말을 했었다. "언니는 언제 공부해요?" 그렇다. 실은 나는 공부를 잘 안한다. 그래도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 외적인 것으로 보내는 (게다가 현재로서는 다른 '일'은 전혀 않는 full time)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TV를 보고 인터넷 기사를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논다. 내가 생산성을 추구하고 무지 효율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요즘 돌이켜생각해보면 원래부터 안 그랬던 것도 같다. 착각이었나?

 

다만 그 취미들조차 익숙한 바운더리를 못 벗어난다는 점은 분명하다. 드디어 도서관에 예치금을 내고 책을 빌려봤는데 첫 책이 목수정씨 책이었다. 작년에 사볼까 하면서도 끝내 안사봤는데 이제서야 읽었다. 책도 타이밍이 있는것 같다. 적어도 책으로 파악한 그녀는 사상, 가치보다..아니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멋있는 여자다. 그녀처럼 나도 장래희망의 리스트가 (마음 속으로는) 여러개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현실가능한 것,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것으로 가지치고 축소시키며 끝내 이거 아니면 할게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한 우물을 파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그리하여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전 인류가 주입시켜온 생각"에 동의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녀가 분노했던 많은 것들에 나또한 분노하고 반대했던 인간이었으나, 그녀와 내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무엇을 반대해서, 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어서, 할 때 그것이 내 가치가 될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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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없는 공포

 

 

오늘같은 날 게다가 누워서 티비를 보다 일어나 깜깜한 방에서 혼자 이런 글을 쓴다는게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평소엔 개인적인 얘기를 잘 쓰지도 않는 이 곳에.

내일이면 또 지울지도 모르지만 일단 쓰고 본다.

 

오늘, 아니 어제가 된 일요일. SBS에서 공포증에 대한 다큐를 보았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 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 과일을 안먹는 사람..

아..저럴 수도 있군..이유가 뭘까..처음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 것마냥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큐를 계속 보다보니 공황장애부터 시작해서..갈수록 마치 내 얘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마저 신경강박인가, 고질적인 과대망상인가 그러고 있다.

 

나를 조금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그렇다(?)는 것에 대해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가끔 나의 공포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아니, 전에 상담을 받을 때부터 생각해보았다. 

나름대로 여성단체와 연계된 소개받은 병원이었는데도, 어째 갈수록 의사가 나를 포기한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약이라는 것도 위험인물로 분류된 이상 별로 소용이 없었고,  병원에 가서 '억지로' 얘기를 꺼내야한다는 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원을 안갈수록 더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어릴때부터 하루도 꿈을 꾸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어른들은 그래서 내가 키가 큰 거라고 했지만.

정작 내가 꾼 꿈의 내용들은 대부분 끔찍한 것들이었다.

끝도 없는 층층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이유는 뒤쫓아오는 무서운 아저씨 때문이었다. 성폭행의 위협..죽음의 공포..그런걸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곤, 나는 낭떠러지나 난간따위에서 꼭 몸을 던졌다.

그리고 또 많이 꾸는 꿈들은 어느날 사람들이 많은 거리, 친구들이 있는 학교, 이런 곳들에 나갔는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옷도 안입은 차림이었거나 그래서, 수치심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숨어다녔었다. 이런 식의 꿈을 한두번 꾼게 아니었다.

왜 항상 그런식의 불쾌하고 위협적인 꿈을 꾸는 건지..어린시절에 나에게 무언가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봐도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다.

어느 순간 그게 꿈을 꾸는 순간 꿈이라는 걸 꿈에서조차 알정도로 익숙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처음 지금 사는 집에 이사를 와서 제일 괴로웠던 건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밤마다 자려고 누우면 나는 옆집 tv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자꾸만 확대되서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여름이 되어도 창문을 열어놓고 잘수가 없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자꾸만 옆집에서 누가 볼 것 같고, 누가 들어올것 같고,조금만 창문이 바람에 흔들려도 그런 불안감이 든다.

그리고 상상 속의 공포는 점점 커진다.

 

어느날은 동생집에 놀러가서 시내에 나갔는데, 버스에 어떤 남자가 자꾸만 쳐다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언니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버스 중간에서 내려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야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일련의 공황장애라고 할 수 있는 거, 사회공포증, 대인공포증...의 증상들은 나도 다 경험해보았다.

왜 그런건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사회생활에 완전히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만 아는거다.

이런 생각조차 너무나 자아중심적이어서 하는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느끼는 공포 자체가 너무나 '여성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엇으로부터의 강박때문에 그런걸까?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과도하게 생각하는-꼭 지금처럼-것의 문제일까?

 

아무래도 오늘밤은 잠이 안 올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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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

가끔 진보블로그에 들어오기 싫을때가 있다.

뭐, 요즘같은 시절-이른바 추모정국-도 그 하나인가보다.

처음 뉴스를 보고, 몇개의 글과 그에 달린 '반복되는' 댓글을 보다가 그냥 덮어버렸다.

 

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그런(?이른바 노빠?) 사람이 아니라고 양심고백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

나는 노무현을 찍은 적도 없고, 탄핵때도 촛불을 들지 않았고,

03년 열사정국, 대추리, FTA 농민투쟁...나의 대학시절을 뒤덮은 것이 노무현 정권때였다고

노무현에 관해서는 노무현 정권 퇴진 투쟁이라는 구호밖에 외친적이 없다고

나의 정치적 올곧음(!!)을 전제로 깔아야만 글을 쓸수 있을 것 같네.

 

한 사람의 죽음.

그래, 죽음이라는 것도 평등하지 않다는 누군가의 말은 맞다.

강준만이 이야기했던 심정민주주의가 왜 한 택배노동자에게는 작동하지 않는가?

한 택배노동자의 죽음과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같지 않고, 같을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모두에게 슬픔을 강요할 수도 없고, 모두가 슬퍼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슬픔조차도 중립적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느날 한겨레의 헤드라인이 내 가슴속에 팍 꽂혀들었다.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

 

노무현이 자행하고 침묵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묻혀지는 것도,

대한민국의 선구자이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화되는 것도 싫지만 말이다.

대중들을 돌아서면 까먹는 금붕어로 대상화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왜 , 모든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던 국민들이, 왜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럽게 울고,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촛불을 드는지를 분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개인의 '불쌍한' 죽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또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상징했던 '가치'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 가치가 비록 실제로 노무현이 될 수 없는, 허구적인 것이더라도 말이다. 

그 가치는 무엇인가? 민주주의? 인권? 시민들의 정치참여? 촛불의 기억?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보고 듣고 느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인지.

그 미안함이 어떤 기억이 되어, 앞으로의 정치적 상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물론 작년의 촛불을 '실패'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시민추모제를 주최한 몇몇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기획한 판에서 시인, 학자, 노래패를 불러놓고 추모를 '시킨다'.

이름은 자유발언이되, 내용은 자유발언이 아니다.

이미 섭외된 사람들이 나와 미리 정해진 말들을 쏟아놓는다.

며칠뒤, 학생운동단체들은 마스크에 모자, 사수대복장을 갖추고 시청앞 골목에 앉아있었다.

이명박 정권 심판을 비롯한 각종 급진적인 구호들과 노래들이 이어진다.

그 시각, 몇몇 시민들은 도로로 뛰어나와 전경들에게 에워싸이고

분노한 시민들은 '권'들에게 그렇게 앉아나 있을거면, 구경이나 하고 서있을거면 

차라리 깃발을 내리고, 차라리 다른데로 가버리라고 소리지른다.

속사정이 있겠지..무언가 있겠지..생각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는 그들이, 택이 내려와야 움직이는 그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소위 말하는 진보진영, 혹은 운동권들은  무엇을 진정 듣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흐름을 타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노란풍선을 들고광장을 가득채웠던 사람들은 신도같은 노빠들과

무지한 국민들일 것이라고..언제까지 비난만 하고 앉아있어야 할 것인가..

변하지 않는 이런 모습들이 기계적인 반응들이

대중운동 운운하면서도 대중들을 우습게 보기만 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을 비난으로 자위나 하면서..

결국 지난 촛불때처럼 대중들의 뒤꽁무니조차 쫓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반복되게 하는게 아닌가..

다시 씁쓸한 마음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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