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4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0/26
    박정희의 날(2)
    은수
  2. 2009/10/25
    디스트릭트 9(2)
    은수
  3. 2009/08/11
    참, 닮은 꼴(6)
    은수
  4. 2009/07/27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은수
  5. 2009/06/01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13)
    은수
  6. 2009/05/16
    황석영의 '변절'일까?(16)
    은수
  7. 2009/02/14
    워낭소리_한줄로요약안됨(3)
    은수
  8. 2009/01/05
    쌍화점(2)
    은수
  9. 2008/11/06
    오빠는 필요없다(1)
    은수
  10. 2008/01/29
    엄마의 뽀뽀
    은수

박정희의 날

 

 

 

거대한 유산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5940.html

 

 

 

잊고 있었는데...오늘이 10.26 이다.

30년전 박정희는 죽었으나

30년후 박정희는 여전히 살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개헌 뒤 하야하려 했다"

박근혜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 건설"

 

 

포털 사이트를 지나가는 조선일보의 제목보고 경악했다.

이것이 현실인가보다.

 

 

요즘 보수들은 친서민이니 복지니 하면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고

아직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가 넘어야할 큰산이라니 슬픈일이다.

 

 

어쩌다 민주주의가, 그것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밥투정 하는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가 되어버렸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디스트릭트 9

오랜만에 즐겁게 영화보려고 했는데, 흑- 머리가 더 무거워져버렸다.

최루성 멜로 보고도 잘 안우는데..보다가 울어버렸다.

 

District 9.

SF는 그 어떤 다큐보다 현실적이며, 외계인은 그 어떤 은유보다 직접적이다.

 

 

지구침공을 막아내고 세계를 구원할 백인영웅이 사는 제국의 메트로폴리스가 아닌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불시착해버린 '외계인' 영화는 설정부터 정치적이다.

 

수용소 천막과 비-인간구역 디스트릭트9,

세금이나 축내고 토지개념도 없는 것들을 쫓아내려는 '인간'의 법,

감염경로조차 '그 더러운 벌레들과의 성관계'를 통한 것으로 믿고자 하는..장치들까지

(콘돔은 꼈냐며 비아냥댔지..'피'섞임에 대한 공포란..)

하나하나....

 

모든 묘사가 너무도 직접적이어서 보는 내내 불편했고

내 자신안에 무엇이 나를 그렇게 불편하게 하는건지 외면하고 싶은건지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참, 닮은 꼴

은수님의 [하우스 키퍼 제도] 에 관련된 글.

여기, 참 닮은 꼴이 있다.

 

더럽고 나쁜 습관은 고치기도 어렵다더니

조직도 운동도 썩어빠진 것들은 참 변하지 않는다.

 

일전에도 썼지만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서 제일 처음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남성 위원장이 여성 조합원 집에 왜 은닉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건 단지 우연의 일치인가?

 

이번 사건에서 전국적으로 위원장 은닉에 동원되었던 이들은

하나같이 혼자사는 여교사들이었다고 한다.

 

왜? 왜?

 

이유는 뻔하다.

잡히면

조직적으로 은닉한거 아니고 위에서 동원해서 그런거 아니고

우리는 청춘 '남''녀'이니 사귀는 사이라고 불면 되니까.

그게 아니면? 뭐?

여성조합원이 더 수발을 잘해줄거라고 생각했나?

 

썩어빠진 대가리들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하나도 안변했다.

일제 시대 때 사회주의 운동에서 하우스키퍼 제도를 했던 거 하고 뭐가 다른데?

때때로 소름이 돋는다.

 

가진자와 권력에 저항이니 변혁이니 운운하는 인간들이

위원장-조합원, 남성-여성, 조직-개인 이런 권력관계들은 잘도 써먹지.

그래놓고 나가서 여성 '동지'들 어쩌고 하지마라. 토나오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미쓰 홍당무에 이어 여성감독의 영화에서 다시보는 공효진은 멋지다.

뭐랄까, 참하게 입어도 삐딱하고 삐딱하게 입어도 묻어나는.. 진실성이 느껴지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핵심이자 반전사항을 중간쯤부터 눈치챈 이후, 후반부에 가서야 급속도로 건너뛰며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꽤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된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주는 인상은 알모도바르의 귀향, 같은 느낌이다. 일전에도 포스팅을 한적이 있지만 결국은 여자들의 우정, 관계들이 모계를 중심으로 둘러싸지게 되는 방식인데,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라는 고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결국은 트랜스젠더 아버지를 통해 모계-모성으로 통합된다. 영화에서 여러대에 걸쳐 등장하는 아버지 없는 자식들은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비난을 받지만, 다시 이것을 엄마, 이모라는 존재가 다시 메꿔주는 형식이다. 언니와 동생의 관계는 갈등적이지만 결국은 서로가 가진 상처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그래도 자매'이다.

 

미쓰 홍당무도 그랬지만 이건 분명 여성감독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언제나 남자를 둘러싸고 적이 되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불편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렇게 쉽게 '여자'라는 관계로 우정이 되고 갈등이 풀어지는 전개들을 불편해할테다. 물론 나는 그 두가지가 동급의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 여성을 어떻게 풀어내고 넘어서는지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

가끔 진보블로그에 들어오기 싫을때가 있다.

뭐, 요즘같은 시절-이른바 추모정국-도 그 하나인가보다.

처음 뉴스를 보고, 몇개의 글과 그에 달린 '반복되는' 댓글을 보다가 그냥 덮어버렸다.

 

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그런(?이른바 노빠?) 사람이 아니라고 양심고백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

나는 노무현을 찍은 적도 없고, 탄핵때도 촛불을 들지 않았고,

03년 열사정국, 대추리, FTA 농민투쟁...나의 대학시절을 뒤덮은 것이 노무현 정권때였다고

노무현에 관해서는 노무현 정권 퇴진 투쟁이라는 구호밖에 외친적이 없다고

나의 정치적 올곧음(!!)을 전제로 깔아야만 글을 쓸수 있을 것 같네.

 

한 사람의 죽음.

그래, 죽음이라는 것도 평등하지 않다는 누군가의 말은 맞다.

강준만이 이야기했던 심정민주주의가 왜 한 택배노동자에게는 작동하지 않는가?

한 택배노동자의 죽음과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같지 않고, 같을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모두에게 슬픔을 강요할 수도 없고, 모두가 슬퍼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슬픔조차도 중립적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느날 한겨레의 헤드라인이 내 가슴속에 팍 꽂혀들었다.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인가"

 

노무현이 자행하고 침묵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묻혀지는 것도,

대한민국의 선구자이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화되는 것도 싫지만 말이다.

대중들을 돌아서면 까먹는 금붕어로 대상화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왜 , 모든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던 국민들이, 왜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럽게 울고,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촛불을 드는지를 분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개인의 '불쌍한' 죽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또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상징했던 '가치'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 가치가 비록 실제로 노무현이 될 수 없는, 허구적인 것이더라도 말이다. 

그 가치는 무엇인가? 민주주의? 인권? 시민들의 정치참여? 촛불의 기억?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보고 듣고 느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인지.

그 미안함이 어떤 기억이 되어, 앞으로의 정치적 상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물론 작년의 촛불을 '실패'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시민추모제를 주최한 몇몇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기획한 판에서 시인, 학자, 노래패를 불러놓고 추모를 '시킨다'.

이름은 자유발언이되, 내용은 자유발언이 아니다.

이미 섭외된 사람들이 나와 미리 정해진 말들을 쏟아놓는다.

며칠뒤, 학생운동단체들은 마스크에 모자, 사수대복장을 갖추고 시청앞 골목에 앉아있었다.

이명박 정권 심판을 비롯한 각종 급진적인 구호들과 노래들이 이어진다.

그 시각, 몇몇 시민들은 도로로 뛰어나와 전경들에게 에워싸이고

분노한 시민들은 '권'들에게 그렇게 앉아나 있을거면, 구경이나 하고 서있을거면 

차라리 깃발을 내리고, 차라리 다른데로 가버리라고 소리지른다.

속사정이 있겠지..무언가 있겠지..생각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는 그들이, 택이 내려와야 움직이는 그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소위 말하는 진보진영, 혹은 운동권들은  무엇을 진정 듣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흐름을 타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노란풍선을 들고광장을 가득채웠던 사람들은 신도같은 노빠들과

무지한 국민들일 것이라고..언제까지 비난만 하고 앉아있어야 할 것인가..

변하지 않는 이런 모습들이 기계적인 반응들이

대중운동 운운하면서도 대중들을 우습게 보기만 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을 비난으로 자위나 하면서..

결국 지난 촛불때처럼 대중들의 뒤꽁무니조차 쫓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반복되게 하는게 아닌가..

다시 씁쓸한 마음이 겹쳐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황석영의 '변절'일까?

요즘 황석영의 행보를 두고 변절이니 뭐니..시끌시끌하다.

그야 당연히 그가 한국문학사에서, 더군다나 진보진영에서 가져왔던 상징적 의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그러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변절이라는 평가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이건 황석영의 변절이 아니라, 황석영 사상의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그 사상의 이름이 대민족주의건 뭐라고 이름 붙이건 말이다.

 

 

일전에 포스팅 해놨던 글중에서 보면..

 

...'심청'은 이미 동아시아 여성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전략화되고 있다. 헐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공리, 장쯔이 주연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영화로 구별지으면서 영화 <심청>은 "조선의 한 여성이 아시아 각국의 매춘부로 떠도는 여성 수난사를 통해 서구화로 왜곡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은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아시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서구의 시각에서 판타지화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편견 없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본 이야기"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위험하게도 서구 중심 문명론에 대항하는 동질한 역사를 가진 지역과 집단으로 뭉뚱그려진다. 동아시아 국가, 민족, 인종, 성, 계급 빚어내는 비균질적인 차이들과 다성적인 목소리와 서사들은 배제되고 '범 아시아를 묶어내는' 상상의 공동체를 꿈꾼다. 여기서 '우리'는 아시아를 시장으로 한 문화 자본들의 결합이다. "범 태평양 영화(pan pacific movie)"를 꿈꾸는 <심청>은 과연 아시아/여성의 타자화, 성적 대상화의 역사와 서사화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 것인가. - 노지은 "심청: '동아시아 근대' 서사의 창출과 여성의 재현-황석영 소설 <심청>"( [황석영의 '심청'에 대한] 에 관련된 글 중에서)

 

 

그렇다. 한겨레에 나온 기사를 보니 황석영의 구상이라고 하는게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해, '우리가 먼저 나서' 동아시아를 단일하게 균질하게 묶어내고자 하는

또다른 '제국' 욕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모든 기사 인용은 한겨레 기사-“막힌 남북관계 풀려는 뜻…나는 변하지 않았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5178.html

 

“북한 노동자·남한 청년백수 손잡고 몽골 개척, 몽골+2코리아 구상”

몽골이 동몽골을 같이 개발하자고 한 지 벌써 10년 됐다. 우리 한반도 넓이의 배 정도인데 남한이 산지를 빼고 경작지가 120만 헥타르니까 사람마다 수치는 다르지만 한 400만 헥타르 된다고 한다. 같이 참석한 농업관계 전문가에 의하면 고추도 재배되고 옥수수, 콩, 밀이 된단다. 그 안에는 수많은 지하자원이 있다. 이 사람들이 재미있는 게,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주장이다. 몽골+2코리아 하자는 거다. 나는 내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 풀리면 북한 노동자와 남한 청년백수들이 같이 가서 그땅을 개척해내고 여러가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꿈이었던 ‘느슨한 연방제’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남북관계만 풀린다면. 동북 중앙아시아 연합이 가능하단 말이다. -황석영 인터뷰 중에서

 

 

아직 근대화되지 않은 몽골땅을 '남북한 청년'이 손잡고 땅파서 개발하자는데

이게 MB식의 삽질하는 개발론랑 다른게 뭔가?

못사는 나라에 한국 기업 진출시키고

거기에 값싼 북한 노동력+남한 백수까지 합치면 금상첨화지! 안그런가?

 

MB가 "그 안을 같이 얘기했더니, 현 정부가, 이 대통령이 “그건 내 생각이다”라고 하더라. 아, 이건 생각이 같구나." 라고 대응하는 건 정말 너무 당연한 결과다.

 

황석영의 생각은 우리민족이 우선 손잡고 몽골 개발해주고 손잡고

골치아픈 중국은 제일 마지막에 마지못해서라도 손잡게 하면 '동북 중앙아시아 연합'이 된다는거다.

 

이게 문화적인 구상이라고 한다면, 평화전략이라고 한다면, 이건...황석영 선생님 너무 순진하신거 아닌가요.

맙소사, 요새 애들은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알타이 어족이라고 묶이면 이건 정말 너무 하잖아요.

 

도대체 주구장창 변하지도 않는 '범(pan)', '연합', '개발' 논리

자신을 구원자적 위치로 놓으려고 하는 거 (-박쥐, 보고 박찬욱한테 느낀 감정과 유사함)

끝내 '우리 손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함에 대한 지난한 미련

근대 민족주의적 남성 지식인의 상상력의 한계인건가?

 

기사 보다 빵 터진 게 하나 있었다. 역시 새겨들을 말은 가까이 있다.

 

"나는 침체되면 내 탓인 줄 알고 총대를 메잖아.

마누라가 어제 밤새 “그놈의 메시아 콤플렉스 좀 버리라”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워낭소리_한줄로요약안됨

영화보고 다이어리에 끄적끄적..옮김.

 

 

누가 그랬다.

울고 나왔는데 묘하게 껄끄러운 감정이 든다고.

나 역시, 딱 그런 기분이다.

한줄평을 적으라는데 도저히 한줄로는 정리가 안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평이 나올 수 있을 듯하여.

 

모든 껄끄러운 감정들이 논란이 될 수 있을테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깔린 전제-일종의 당연함이

무엇인가 질문하게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라면은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다.

 

난 영화를 잘 모르지만

이 영화는 철저한 극영화이다.

(물론 이 영화가 다큐냐 아니냐 하는 논란 뒤에는

연출과 개입없는 '사실만을' 보여주는 다큐가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을테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그 순간, 촬영되는 그 순간 이미 사실,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그 점이다.

다큐와 사실이라는 관객의 기대를 철저하게 활용하면서

다른 것들을 보이지않게 만들면서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함정.

 

오로지 소를 중심으로 한 얘기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일상과 관계들-특히 할머니와의 관계들은  지나치게 삭제되거나 조절된다.

할아버지의 삶에는 99.9% 소만 들어차있는 것 같이 보이고

할아버지는 반려동물로 소를 대접하는 사람처럼 보여진다.

할아버지가 소를 아끼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오로지 소에 의한 소를 위한 사람처럼 보여질때

'농촌'이란 현실적인 공간은,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농촌에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철저한 낭만화라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군데군데 의도삽입된 '자연'의 모습과 소리는

더욱 관객들에게 자연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그대로 '자연화'시킨다.

 

IMF시절 무너지는 아버지의 어깨를 보면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는 감독의 의도는

사실상 이 영화가 소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근대화과정에서 이촌향도했던 사람들에게 농촌에 대한 원시적인 묘사와 고향 이야기를 통해

결국은 소로 동일시되는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성공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시공간적인 차이는 있으되, IMF시절 유행했던 소설 아버지 류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본다.

소와 할아버지 뒷바라지 하시느라 고생하시고

영화 내내 스토리텔러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신 할머니가 부차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이 영화의 의도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보통 성공한 '아들들'의 스토리 뒤에는 어머니의 희생이 부각되는데

요즘은 경제위기가 심각하다보니 오즈인가 모 대리운전 CF처럼 

'가장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것이 공감을 사는게 아닐까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쌍화점

 

 

 

12월 30일, 개봉날을 기다리다.

뜻밖의 무대인사 덕분에 좋아하는 인성씨도 보게 되고. 훗...

 

쌍화점의 감상을 얘기하자면, 한마디로 좀 '뒤쳐지는' 영화였다..

뭐랄까..

감각의 제국, 색계, 황후화까지..여러 영화들을 군데군데 뒤섞어놓은 듯한 비쥬얼..

특히 정사신과 색감..

 

그런데 그 스토리 전개 라고 하는 건, 전혀 몰입이 되지 않았다.

 

어느 감독 인터뷰를 보니 절박한..사랑의 장애물로 성정체성(동성애)을 집어넣고 싶었다는데..

성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적인 고안물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조인성이 왕후를 만나고서 그동안 몰랐던 이성경험?, 이로 인해 왕과의 연모는 모두 착취(?)라, 하는 이 상황은 뭐인지..

더군다나 상대가 조인성의 연적이었던 왕후라니...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왕후와 공모해 왕을 죽일 계획이었다던지..차라리 아들을 하나 낳아서 왕위에 올릴 생각이었다던지..

갑자기 떠오르는 순수한 사랑, 지고지순한 연모의 감정이라니..

몸적 경험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색계와 조금은 비슷했지만,

실상 몸적 경험이 각종 경계를 뒤흔들 수 있는 파워를 이 영화는 스스로 거세해버렸단 점에서

색계와는 전혀 다른 길로 가는 영화였다고 본다..

 

게다가...근대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개인의 성적 지향을 중심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성정체성이란게 없었다..

오히려 오늘날의 기준에서 호모섹슈얼한 성적 행위들은 매우 공공연한 것이었다..

왕의 섹스란..비밀이 아니라 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음에도..

조인성이 거세당한건, 왕의 사랑을 배신해서이지, '동성간의 섹스' 때문이 아니었듯이..

그러므로 결론으로 조인성을 이성애자로 커밍아웃 시키는 건,  좀 많이 웃기는 상황이 아니었나 했다..

 

뭐 아무튼...여러모로 실망이 있었지만..

영화 초반 조인성이 보여준 귀여운 애교와...

의외의 몰입력을 끌어냈던 주진모..

본격적으로(?) 연기를 해보지...하는 정도로.. 아쉬움을 뒤로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빠는 필요없다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어서 블로그를 찾았다.

블로그는 아아, 여전히 그대로구나.

 

 

 

 

전희경님의 <오빠는 필요없다>,

2000년에 나왔던 석사 논문이

2007년에 새롭게 인터뷰와 작업을 더하여 책으로 나왔다.

 

하루종일 읽고서 마음이 뭉클뭉클.

아리고 쓰리고 말하고 싶은 것들이 뭉클뭉클하여

글이라도 남기고 자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맞을 수 있을까 해서.

 

2000년대 이후의 학번으로 학생운동을 했고 

현재는 20대 중반으로 여성학을 공부하는 나는

나의 위치에서 이 책을 마주하면서

고이고이 접어두었던 경험들과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어본다.

 

언젠가 [좌파, 페미니스트] 라는 포스팅을 한적도 있지만

내 인생에선 짧지만, 강렬한 각인이자 전환이었다.

학생운동도, 그리고 여성주의도 말이다.

한동안 자아분열이라는 성장통을 겪어야 했고,

적어도 조금은 내려다놓고 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1.

"내가 비판하고자 한 바로 그 언어 속에 있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나는 혹시 남자들과 '남자식으로' 싸우고 있던 것은 아닐까?(5-6)" 하는

저자의 성찰이 내게도 아리고 쓰리게 다가온다.

 

그랬다. 평생 변절않고 운동할 것 같다는 '기대'조차도 받지못했던

나는 언제나 '똑똑하고' '말발센' 남자 동료/선배들과 싸워 이기길 바랬지만

그러나 "'똑똑해지기를 열망한 만큼, 그것은 또다른 권위에 짓눌리는 과정이기도 했(39)"던 것이다.

그래, 결국 내가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다시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내가 침묵하고 있었거나 내면에서 가장 혹독하게 보았던 이들이

바로 내 옆의 '여성'활동가들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아프다.

 

2.

졸업 즈음 운동을 그만두고, 잊을만하면 뜸하게 걸려오는 후배의 전화는 무서워 받지 못했다.

또 혹시 성폭력 사건이면 어떡하지?

달리 찾을 사람이 없었던 그 후배의 입장이야 오죽했으련만

정말로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몇년이 지나서도, 가까운 언니에게 또다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때,

나는 다시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펑펑 울고 말았으니 말이다.

"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거야..왜..."

 

내가 한 노력, 내가 겪었던 경험, 그 모든 것은 재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불연속적이면서도 내게는 연속적으로 의미화되어있는 사건들과

동시에 내 자신이 피폐해지면서도 끝까지 놓지않았던 사건들이

한꺼번에 다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는 느낌, 이었다.

이조차도 지금,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은 아닐까

고민했던, 아니 고민해야만 했던 내 자신이 떠올랐다.

 

 

3.

나는 이 책에 나오는 90년대의 '영 페미니스트'  이후의 세대로

그녀들의 치열함과 헌신적인 활동 덕분에

'페미니즘 좀 아는 좌파'들과 함께 활동한 세대이다.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남자들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229)"은

실은 동일한 성별구도의 양면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가장 와닿는 부분 중 하나였다.

 

" 이 '오빠'들은 둘 다, 여성주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조직과 이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여성 활동가가 여성문제를 '담당'하고 '전문가'가 돼 '해결사' 구실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여성주의를 '인정'한다면서 '구색 맞추기'로 동원하고,

끊임없이 여성주의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면서 정답을 요구하는 남성의 행태는

여성활동가들을 소진시키고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활동했던 시절 여성주의는 여기저기 '문패'마냥 걸려있었지만,

(그 문패가 있어야 적어도 '진보'라고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니)

그러나 그 문패는 늘 그들의 집에는 같이 살지 않는 타자, '여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성주의는 타자화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한다면서 페미니스트가 커리를 짜서 세미나 시켜주길

시시껄렁한 에세이 같은 건 치우고 페미니즘의 (비판할 수 있기 위한) 핵심, 요약본을 바랬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한번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았다.

 

 

4.

저자의 성찰과 비판은 여성주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단일하게만 보여졌던 '우리' '여성주의자' 사이의 차이와 갈등들,

나의 위치를 2000년대 이후로 더 드물어진

학생운동을 했던 여성주의자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그래서 4부 흔들리는 지도를 들고 걸어가기, 가 특히 많이 와닿았다.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노동에 관심이 있다는 그 자체로 나의 역사성이 탄로나고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이 '후지다'는 뜻인 것마냥

나야말로 철지난 유행의 막차를 탄 존재로 보일까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기도 했다.

'진정한 여성주의자'인지 내 정체성을 의심받을까봐.

 

저자는 말한다.

"'일상의 정치'를 화두로 삼고 모든 일상을 정치적 문제로 토론하고 고민하려 한 여성주의자들이

이런 견해차이를 단순히 (나와 분리된) 어떤 '문제'로 거리를 두고 다룰 수 없던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여성주의는 자신이 '갖고 있는'(그래서 버리거나 바꿀 수 있는) 어떤 생각이나 견해라기보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나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처를 동반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의 살아가는 힘은,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상처와 강박으로 인해 (언젠가 페미니스트 자격에 대해 쓴적이 있지만)

자신을 비하하거나 페미니스트이기를 포기하기도 했다는 슬픈 사실.

생각해보면, "복수의 여성주의들"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었던 것은,

그 시절만큼, 아니 그보다 더 이후의 여성주의자들에게 힘들었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진정한' 여성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로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것이다.(18)"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중에서

 

 

나는 사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올바름이나 신념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그 올바름과 신념에 마음이 연결될 때,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걸게 될 때,

비로소 뭔가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갈등을 드러내고 토론하는 것이 여성주의 정치학을 성장시킬 거라는 걸 누구나 알지만,

또 여성은 동질적 집단이 아니며 여성들 사이의 차이의 정치학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누구나 느끼지만,

이 모든 것은 드러내고, 말하고,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알고 타인의 마음을 살피면서 여성주의를 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일상의 공간이 너무 분절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기억이 쓰여지고 해석되는 과정이 너무 불연속적이다.

그래서 경험과 기억의 바로 그 연속과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꾸벅.
 때로는 같은 공간에 있기에 깜빡하는 언니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도. 꾸벅.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엄마의 뽀뽀

어제 아침 자고 있는데 엄마가 출근하기 전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이구~우리 딸" 하면서

갑자기 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붓는 것이 아닌가.

 

어제는 집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날이었고

그렇게 엄마와의 아침인사는 헤어짐인사가 되었다.

 

잠귀가 밝은 내가,

심지어 살갗이 닿는 느낌을 모를 리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상황이 쑥스럽고 어색하여

그냥 눈을 감고  "엄마 안녕"하고 말았다.

 

왠지 참 어색했다.

본래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한 내 성격 때문인가

표현을 잘 안하는 경상도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가

한 살 더 먹은 내 나이 때문인가

뭔가 어색한, 영 어색한 느낌.

 

 

풋.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