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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body

 

연극을 보고 

 

참으로 오랜만에 연극을 봤다. 제목은 굿바디.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유명한 이브 앤슬러의 작품이란다.

연극을 보고나서야 생각해보니,

전에 대학로에 갔을 때 버스정류장에선가 

이 튀는 포스터를 보고 무슨 내용일까-"모 아니면 도잖아"-궁금해했었던 기억이 났다.

 

연극은 이브 앤슬러가 만났던 여러 여성들의 'body'에 대한 이야기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꾸며놓았다.

사실 이런 형식, 딱히 '재미가 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여성들의 입이 되어 '쏟아내는' 방식이 다소 정신없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을까("니 몸을 사랑하라!")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나오자마자 대학로를 뒤덮고 있는 광고들을 보면서

미친듯이 '착한 몸매'- 44사이즈에 대문자 S라인-를 포교하는 이 세상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다른 목소리'를 드러내고 진부할정도로 강조할 필요가 있잖아, 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무엇보다 나부터 성찰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쪽팔리지만, 내 얘기를 끄적여보자면.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skinny 라고 말할 정도로

아주 마른 여성들을 '예쁘다'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그 사실을 내 친구가 말해줘서 알게되었는데, 그러고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하는 배우, 모델들의 공통점이었다.

마른 그녀들은 내 눈엔 '뭘 입어도' 매우 스타일리쉬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skinny' 하길 바란다던가

내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어 다이어트 같은 걸 해본적은 없다.

그렇지만 내 사고가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예쁘다고 생각되는 걸 어떡해" ....아님 "사회적 시선이 내면화된것" 일뿐인걸까.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스트레스를 안 받은 건 아니다.

나는 술 취한 남자들의 시비거리가 될 정도로 키가 매우 큰편인데 그것도 문제다.

아무리 요즘 키 큰 사람들이 잘나간다 해도, 여자는, 남자보다는(!) 크면 안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큰 내가 마른 몸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도,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키큰데 살까지 있으면  '덩치있어보인다' '한 등발 한다'는 이유다.

하지만 여자가 덩치있으면 왜 안되나. 키 크면 덩치 있는게 당연한데 말이다.  

키가 크면 발도 커서 큰 신발을 신어야 하는데도 구두는 250 사이즈도 찾기가 힘들다.

미국 중산층 여성들은 마놀로 블라닉,지미추를 신으려고 발을 깎는다는데

난 길거리에서 파는 만원짜리 구두를 신으려다가 발이 꺾인다.

심지어 얼마전에 등산화를 사러갔는데도 여성용은 245까지밖에 안나오더라.

등산화는 5mm에서 10mm를 크게 신어야하는걸 감안해보면 235까지만 여자란 말이냐. 

 

나는 외모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이 기준은 매우 상대적인 거지만, 또 알고보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 방식으로 '꾸미지만',

운동을 할때에도 전형적인 '운동권 여성'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이건 두가지 측면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전형'stereo type을 설정하는 인간들도 문제이고,

여성들을 남성화/무성화하는 운동권 문화도 문제다..)

 

재미있는 건 페미니스트-여성학/운동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도 '전형'이 있다는 거다.

계속 그런 전형에서 '빗나가고' 있는 내 자신을 맞추어보려고도 했지만,

그건 이미 내가 아닌 것 같아, 그런 쓰잘데기 없는 시도는 이제 완전히 단념했다.

 

그래도 계속 이런 고민은 든다.

"나는 왜 화장을 하는 걸까? 그걸 정말 단순히 자기 만족이라고 할 수 있는건가?

다른 사람들을 내 잣대로 보고 있지 않나? 나도 내 몸에 불만을 갖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뭐야!"

 

내 몸은 내 자신이다

 

여자, 여자의 몸을 갖고 있다는 건 한편으로 참 슬픈 일이다.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 보지를 내가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내 몸에 만족하고 내 몸을 사랑한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시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게다가 그 시선은 아주 짜증나게 이중적이니까.

가슴이 없으면 절벽, 크면 머리가 비어보인다 그러고. 화장은 하되, 한듯 안한듯 해야하고...

그런 시선에서 완벽하게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미션 임파서블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일종의 '자기 검열'을 부단히 해야하고

내 몸을 내 자신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생각을 하더라도 잘 안되는 어려운 일이다.

 

모 대학에서 여성학 강사를 하고 있는 언니가 외모 컴플렉스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면서

자기가 들은 외모에 대한 코멘트를 100개 적어오라는 과제를 내준적이 있다고 했다.

놀라운건 그때 어떤 학생은 하루에 들은 내용만 100개가 넘었다고 했다.

"차려입었네, 어디 가?" "오늘따라 초췌해보인다"

무심히 내 던지는 말들과 시선들이 실은 외모에 대한 코멘트이며

누군가에겐 분명 스트레스일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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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읽었다.

근래에 책에 빠져들지 못하는 병이자 습관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고쳤다.

심지어 나는 지하철역을 놓치기까지 했으니까. ^^;;

 

책을 읽으면서 난,

이 책의 저자 정희진(씨?선생님?언니?)에 대한 호칭이 변한 만큼

지난 6개월간 여성주의에 대한 내 감정, 인식이 너무나 많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이건 잠깐 다른 얘기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건 

 호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지위 혹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반영하는 '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라는 것.)

아무튼 만약 내가 이 책을 6개월, 아니 1년전에 읽었더라면

지금과는 상반된(?) 감상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전에 反여성주의자였거나

현재의 모든 가치관들이 그녀와 일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주의(자)에 대한 내 태도가 훨씬 '열려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 책이 대형서점에 갈때마다 여성학 코너의 베스트셀러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건

또 많은 블로거들의 글에서 종종 보다는 자주 회자되고 있는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즘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감수성'과 '언어화의 능력'을 그녀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 친구가

"그렇게 사사건건 모든 것들을 분석하며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친구의 말에서 (유일하게) 틀린 단어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분석이라는 것이 무언가 임의적인 공, 노력을 들여야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제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눈(여기서 눈은 신체기관이 아니라 혜안의 의미)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학습과 경험과 성찰의 과정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그런 '민감함의 촉수'를 가졌을 때 사사건건 문제가 되는 건 맞고,

민감함이 아픔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피곤한 것도 맞는 것 같다.

 

게다가 평균 문장 길이가 1.5줄 안팎이라니,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학술적 글쓰기 방식에 대한 '도전'이다.

여성주의 (서적)가 대중화되기 힘든건 지배적인 가치관과 권력 때문인 것이 크지만(90%는)

한편으로는 지적 유희라고 느껴질 정도의 현학적 글쓰기를 구사하는 학자들 때문이기도 하다고

난 생각한다. 모국어에게 타자화되는 듯한 그 느낌이란.

하지만 남을 비판하긴 쉬워도 정작 내가 글을 써보려고 하면 막막하다. 젠장.

 

 

그런데 그녀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여성주의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나이듦, 성폭력-피해자 중심주의와 성적 자기결정권, 성판매 여성, 인권, 가정폭력, 군사주의

라는 많은 이슈들 앞에서 그녀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과 빈곤한 물음능력을 비판한다.

메모해두고 싶은 구절들은 아주 많지만 나의 요즘 고민과 맞물리는 딱 한문장,

"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을 기록해두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겠지만 (내가 젤 늦은거 아냐?;;) 읽기를 권하고 싶다.

계몽이 아니라 논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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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심청'에 대한

... 요컨대 황석영의 <심청>에 대한 주류 남성 비평가들의 시선을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체현한 근대적 주체이자, 동시에 강제된 근대화의 권력과 욕망을 초월한 탈근대적 주체의 재현으로 읽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심청의 서사는 여성의 몸으로 쓴 동아시아 '여성사'이자 타자와의 연대와 약자에 대한 보살핌으로 동아시아 근대의 바깥을 사유하는 '여성적 세계'의 구현으로 환유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을 타락한 성적 존재와 구원의 모성적 존재로 이분화 시키는 방식은 기왕의 남성의 시선 속에서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 여성을 재현하는 틀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성녀(性女+聖女)로서 심청은 기존 황석영 소설에 드러난 여성의 이미지의 연상선 위에 있기도 하다. (주-<아우를 위하여> 여교생, <삼포가는 길>의 술집 작부 미자, <장길산>의 묘옥, <무기의 그늘>의 오혜정, <오래된 정원>의 한윤희 등의 이미지가 '심청'이라는 이미지로 집적, 총화되고 있다. -오태호 "서사의 진화, 작가의 시선과 평론가의 응시가 밎어낸 풍경") 즉 부조리한 모순으로 점철된 소외의 비극적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창녀'의 이미지와 불안한 미래의 희망과 구원의 여성상으로서 등장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동시에 전유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과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누이'들의 모습이다. 더욱이 매춘부의 현실이 승화되어 신격화된 모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는 기제이며, 동아시아 근대의 가능성을 모성성의 원리로 상정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 일 수있다.

 

...심청은 힘없고 가난한 조선의 고난과 불행을 상징하는 딸의 기표는 되었을지언정 고향의 가족이나 민족을 기의하는 여성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주-민족주의 담론에서 민족을 기의하는 여성의 순결은 중요한 도덕적 전제가 된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민족의 식민지적 고난과 불행을 설명하기 위해 동우너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순결과 모성을 짓밟히고 여성적 도덕성이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이들이 자신을 동일시할 공간, 즉 돌아가고 싶은 고향, 국가, 민족, 가족에 관한 현실로부터 외면당했다.-김은실 "민족담론과 여성")

 

....'어여쁘고 순결하고 효심 깊은' 심청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고 부정될수록 역설적으로 '매춘의 오디세이아'라는 새로운 심청의 서사는 더욱 진실성을 획득해가는 기제가 된다. 그것은 심청에 대한 '기원적 기억'을 복구하고 심청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보다 자극시킨다. 또한 그것은 '동아시아 근대화'에 앞에서 무기력했던 '실패'한 아버지, 오빠들의 역사적 회복과 재기의 열망과도 맞닿아있다.

 

...'심청'은 이미 동아시아 여성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전략화되고 있다. 헐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공리, 장쯔이 주연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영화로 구별지으면서 영화 <심청>은 "조선의 한 여성이 아시아 각국의 매춘부로 떠도는 여성 수난사를 통해 서구화로 왜곡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은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아시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서구의 시각에서 판타지화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편견 없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본 이야기"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위험하게도 서구 중심 문명론에 대항하는 동질한 역사를 가진 지역과 집단으로 뭉뚱그려진다. 동아시아 국가, 민족, 인종, 성, 계급 빚어내는 비균질적인 차이들과 다성적인 목소리와 서사들은 배제되고 '범 아시아를 묶어내는' 상상의 공동체를 꿈꾼다. 여기서 '우리'는 아시아를 시장으로 한 문화 자본들의 결합이다. "범 태평양 영화(pan pacific movie)"를 꿈꾸는 <심청>은 과연 아시아/여성의 타자화, 성적 대상화의 역사와 서사화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 것인가. 심청 뿐 아니라 2007년 이후 한국 영화 작품 목록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황진이, 리심, 명성홯후 등 역사 속 여성들, 그들의 호출이 어쩐지 심상치 않다.

 

출처: 노지은, "심청: '동아시아 근대' 서사의 창출과 여성의 재현-황석영 소설 <심청>"

 

 

글을 보면서, "아 그래 이거였어"...그런 생각이 들었드랬다. 뭔가 언어화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글로 바라봤을 때의 쾌감과 감사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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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영화 '오래된 정원'을 봤다. 분명 개봉한지 며칠되지 않았는데...흥행부진이라 그새 거의 다 내린 거 같네. 쩝, 겨우 명동 씨네콰논에서 봤다.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텐 이 영화는 별로였다. 영화는 내내 지나간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냉소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 방식이 왠지 불편했다. 위장취업과 분신자살, 선도투 나가라고 등떠미는 조직에, 모든 것들이 짧은 에피소드처럼 휘리릭 지나갔다. "역사는 길고 혁명은 짧다".....는 건가. 그래도 '그 때는'  나혼자 행복하면 미안하고 죄책감 드는 시대였다는 식으로 과거를 기억해내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사실 이 영화가 보고 싶었던 건 여자주인공 윤희(염정아)가 어떻게 그려졌는지가 궁금해서기도 했다.. '바람난 가족'을 좋게봤었고 여배우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염정아라...운동권식 신파극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숨겨줘, 재워줘, 먹여줘,몸 줘...왜 가니? 니가” 예고편의 이 장면은 내내 찝찝했다....물론 혼자 애낳고 키우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그런 여주인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대를 주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나가는 여자도 아니었다. 내가 너무 양극단을 달리는 건가...윤희는 그저 감독의 '냉소적 시선' 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다. ( 대사봐라..."인생 길어, 역사는 더 길어. 우리 좀 겸손하자. 너 그거 하지 마. 조직인지 지랄인지..") 한겨레 21에서였나,,,여주인공의 그런 혜안(?)을 임상수식 여성주의라하던데...공감이 안된다.

  

이래저래 우울하고 김빠지지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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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인식론

Mary Gergen 2001, "The Emergence of Feminist Postmodern Psychology" in  Feminist Reconstructions in Psychology: Narrative, Gender, and Performance, Sage Publication, Inc. 

 

 

 

 



1986년에 페미니스트 철학자 산드라 하딩이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을 발간하면서 여성주의 인식론을 세가지로 분류하였다. 1970년대의 전통적인 경험론적 접근에서부터, 1980년대의 입장론, 그리고 199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의 간단한 개괄.

The Feminist-Empiricist position: The (Fairly) Comfortable Majority

여성주의 경험론

 

여성주의 경험론은 오늘날의 심리학 내의 지배적 전통과 연관되어 있다. 심리학의 연구는 자연과학에서의 방법론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철학적 유산은 계몽주의에서부터 비롯된다. 과학적 전통과의 연관, 지식발견에 있어서의 경험적 형태 그리고 과학적 조사의 기초. 이들은 자연세계의 관찰을 통해 과학적 질문을 던진다. 진보는 과학적 연구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결과는 사실(혹은 진실)이다. 과학은 감각적 활동으로 인식된다. 인식자는 누구든 동등하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질문 역시 동등하다. 따라서 지식은 경험적 자연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으로 객관적이며, 왜곡되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이들의 철학계보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개인은 사고와 행위의 원천이다. 연장선상에서 근대심리학은 인간행동을 과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사회적 질병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개인의 특성을 파악, 진단하여 치료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물론 이들은 과학적연구에서 남성중심적 편견을 비판하며 그것의 제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평등한 심리학을 지향한다. 또한 이들은 과학(자)세계에 만연한 성차별을 비판한다. 여성주의 경험론은 순수한 생물학으로서 sex와 사회적 구성물로서 gender의 구분을 지지한다. 이들에게는 독립적인 개인이 사회적 조건보다 분석단위로서 지지된다. 또한 성차에 있어서는 성차가 고정관념만큼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를 드러낸다. 여성주의 경험론 연구의 정당성은 지배적 패러다임과 연관되며, 그들의 자유주의적 인간가치는 성적 평등, 남성과의 동등한 위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이들은 회의의 전통이 없기 때문에 현재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고, 비판적인 성찰성이 부족하다.

 

The Transition From Empiricism to the Feminist Standpoint Position

여성주의 경험론에서 여성주의 입장론으로

 

성중립적이고 평등에 기반한 심리학이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남성중심적인 요소와 전통을 지지한다는 비판아래, 좀 더 여성중심적인 대안적 관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성주의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립적인 관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실험 대상에 대한 통제와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전통 과학에서 연구자와 연구대상자의 관계가 수직적임을 비판한다. 또한 과학적 활동의 핵심은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주의 입장론은 여성주의 경험론과 마찬가지로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 여성의 경험과 남성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기에, 보편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적 지식을 주장한다. 오히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변부적 위치로 인해 지식의 우월성(실재에 가깝다)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이들은 질적 방법론과 연구자와 연구대상자 간의 평등적 관계를 강조한다. 여성주의 입장론은 맑스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유물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경제적 조건, 여성이 특정 노동에서 배제되고 저임금의 주변부노동을 맡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의 변혁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맑스주의 인식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하더라도, 생산수단 개념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이 배제되는 점 등을 비판하며 전통적 맑스주의와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여성주의 입장론은 지식생산에서의 구체화를 강조한다. 여성주의 경험론과 같이 보이지않는 중립적 연구자가 존재할수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는 이들의 평가와 의도, 가치관이 지식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여성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성들은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는데 이들이 스스로의 경험을 얘기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과정은 남성의 권력에 도전적일 수 있다. 메리데일리와 같은 여성주의 입장론자들은 남성과는 분리된 입장을 강조하며, 여성이 오히려 남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우월성을 갖고 있다고 여성적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상관계이론, 성정체성 형성과정 남성과는 거리가 있음)

 

 여성주의 입장론에 대한 비판은 급진적이고 민족적 소수자 그룹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다. 특정 목소리-백인, 이성애, 중산층, 중년, 학구적 여성-가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 과정에서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입장론은 산드라 하딩과 같이 다양한 목소리들의 확산을 강조하는 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으로서 어떠한 단일한 입장을 강조한다.

 

 

Feminist Postmodernism/Postmodern Feminism: Jockeyting For Positions

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던 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post는 후기, 반대, 전조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해체와 재건의 과정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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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은 왜 웃음거리가 되는가?

페이퍼 제출용으로 쓴거라 길기도 길고, 요약해서 올리기가 귀찮았는데;; 그래도 '소통'을 과제로 삼았으면 노력을 해야할것 같아서-좀 자르다말다 들쑥날쑥인데,,, 블로그에 올려본다....근데 각주까지 같이 붙이는 법도 모르겠고-_- 인용처리가 매끄럽지 않네, 표는 또 어떻게 줄이는거니-이것참참참 허접이네.

 

 

 

고민의 시작

 

  사범대를 다녔던 나는 어느 남녀공학중학교에 교생실습을 가게 되었다. 때마침 학교는 축제기간이라 교생인 나도 학생들과 함께 축제준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학교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미스/미스터 ㅇㅇ중학교 선발대회였다. 각 반의 학생을 한 명씩 뽑아서 여장과 남장대회에 의무적으로 내보냈다. 그 때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던 반의 아이들을 도와주게 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준비과정과 행사의 진행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남자아이들이 여장을 할 때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그 인기는 대단했다. 여성주의 공부를 시작하면서 여장에 표현되는 것들이 여성성에 대한 왜곡과 비하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순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장을 보고 웃고 즐기는 것일까? 왜 여장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일까? 이처럼 ‘여장’ 문화는 대학교 축제 등의 단골 프로그램일뿐만 아니라, 개그 프로에서도 남자 개그맨들의 여장은 단골 코너로 등장하며 식상할 정도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여자들의 남장은 남자들의 여장만큼 빈번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사람들로부터 전혀 다른 반응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여성/남성은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인가? 두 범주는 대립적인가? 하나의 성이 다른 성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남자가 여장을 할 때 웃음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반대로 여자의 남장은 왜 그렇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로부터 이 글은 시작되었다.

 

 

 

 



 

여장이란

  일반적으로 ‘여장’ 혹은 ‘여장남자’는 이성의 옷을 입는 행위인 크로스 드레싱(cross-dressing)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cross-dressing과 transvestism, drag을 혼동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transvestism은 이성의 복식을 착용함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것이며, drag은 퀴어 정체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둘 다 cross-dressing의 하위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크로스 드레싱은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cross-dressing을 저항적 크로스 드레싱, 도착적 크로스 드레싱, 관습적 크로스 드레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젠더 이분법과 범주의 이동

 1) 젠더 범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여장’은 말 그대로 남자가 여자의 복식을 착용함으로써 여성처럼 가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여자/남자라는 두 가지의 성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들에게 하나의 성이 다른 성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남자가 여자 분장하는 것 봤죠, 축제 날 3학년 형들이 했어요. 남자가 여자가 된다는 게 좀 희한해서. 여잔데 다리털이 나 있다, 목젖이 튀어 나와 있고 이러니까 웃기는 것 같아요. 신체적 조건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사람들이 보해보기에 추해보이고 그러니까, 남자 같지 않으니까. 남자들은 목젖도 나와 있고 머리도 짧고 어깨가 넓고 키가 좀 크고, 근육도 있지, 아 또 목소리 변성기도 오죠. 근데 여자들은 머리도 길고, 남자랑 옷차림이 다르잖아요, 치마 입고 키도 작고 다이어트를 많이 하니까 살도 덜 쪘고요.(웃음) <민혁>

 

  많은 사람들이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답변을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터뷰를 한 ‘민혁’의 경우 자기 주변의 남학생/여학생들이 결코 자신이 설명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특히 같은 반 중학교 1학년의 경우 상당수의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키나 덩치가 큰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남자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답변을 한 것이다.


옷 칼라 같은 것도 그렇잖아. 저 같은 경우는 여자들이 보통 좋아하는 거 분홍색 그런 거 좋아하는데, 지금 입고 있는 것도 핫핑크네. 고등학교 때 동기들 만나면 다 뭐라 그래 니가 여자냐고. 내가 대구경북 출신이니까 남성성에 대한 규정이 되게 강한 지방이니까요. 너는 뭐냐? 가시나도 아니고 이런 식이죠. <아치>


일단 2차 성징이 나타나면 남자와 여자의 외형상으로 많이 변하잖아요. 남학생은 몸집이 좋아지고 여학생은....아무튼 그렇게 변하는데 여학생이 남장을 하면 아직 2차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남학생이거나 좀 몸집이 왜소한 남학생으로 보이는데 남학생이 여장을 하면 일단 몸부터가 어색하고 얼굴도 어색하잖아요, 게다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여자는 몸집이 작은 걸로 생각하는데 몸이 좋은 남학생이하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게다가 남자의 특유의 강해보이는 느낌이 여성에게 있다면...그래서 웃게 되고 그것 때문에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석화>


  여전히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을 대립적인 범주로 인식한다. 따라서 ‘석화’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성별의 사회적 구분이 강조되면서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는 필요 이상으로 과장, 왜곡된다. (한서설아 2000:46)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넘나들 수 없는 고정된 범주라는 것이다. 평범한 남자가 여자의 ‘색깔’을 입는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따라서 그 대립적인 범주를 넘나드는 ‘여장’ 혹은 ‘남장’ 행위는 일단 ‘희한하고’ ‘어색하고’ ‘신기하며’, 더 나아가서 ‘이상한’ 것으로 인식된다.


 2) 젠더에 대한 이론적 논의

  ‘젠더’라는 개념은 1970년대 초에 나타났다. 앤 오클리의 sex, gender, society라는 책에서 젠더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인 섹스에 대비하여, 사회적 문화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델피 1996) 이렇게 젠더 개념의 등장으로 여성억압을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설명하던 기존의 가부장적 논리를 상당수 바꿀 수 있었다. 특히 젠더를 활용한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은 그때까지 당연시되고 상식화되어 있던 문화를 가장 중요한 투쟁과 이론화의 대상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김은실 2000)1) 그러나 이러한 논리 속에서 여전히 섹스는 젠더에 선행하는 본질화되고 자연화된 개념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최근의 연구들은 섹스와 젠더의 구분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섹스라는 자연적 이분법을 통해 젠더라는 사회적 이분법을 보는 방식은 잘못되었으며 오히려 젠더가 섹스에 선행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델피 1996) 섹스와 젠더가 모두 사회적으로 구성된 지식이라면 오히려 섹스가 젠더의 효과가 되는 것이다. (스콧 2001)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젠더가 자유롭게 떠다니는 속성은 아니다. 왜냐하면 젠더는 그것의 일관성을 규제하는 실천에 의해서 수행적으로 산출되고 강요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하는 것(doing)이다. (버틀러 1990)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젠더 이분법은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을 둔 본질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행위의 규칙에 불과하다. 이처럼 젠더를 둘로 나누어 그 관계를 대립적으로 범주화하려는 것에 대해서 조안 스콧은 ‘사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를 조직하려고 시도하는 사회적 규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스콧 1999:215)2) 이 글에서는 사람들의 젠더화된 인식이 여장을 어떻게 웃음과 연결시키는지 살펴볼 것이다. 우선 젠더의 연출과정으로서의 여장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맥락을 보겠다.

 

3) 여장, 젠더의 연출과정

   많은 이들이 여장을 경험한 것은 대부분 학교에서이다. 이들은 여장의 준비과정을 돕기도 했다. 일단 여장과정에서 남자들은 ‘여성스럽다’ ‘여성적이다’라고 생각되는 외모를 연출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복’이다.


옷이 되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여학생이 치마를 입어도 괜찮지만 남학생이 치마를 입으면 000라는 소리(욕설)를 듣게 되겠죠. 음 머릿속에서 자동 통제기능이 000으로 통제하라고 하네요. 하지만 여학생이 바지를 입는다고 해서 이상하진 않죠. 남학생이 비키니....(웃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석화>


  요즘은 메트로섹슈얼3)이니 해서 남성들도 외양이 상당히 변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복은 여전히 성별을 구분 짓는 필수적인 것이며,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연상케 하는 수단이 된다.(박미령 2003:324) 특히 남성성에 대한 정의는 의복을 통해 기호화하였으며, 남성패션은 착용코드와 그 착용코드를 무시하거나 파괴하였을 때의 제재가 여성보다 훨씬 강했다.(정인희 2001) 따라서 남성들이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치마’를 입었을 때 일탈성은 훨씬 더 강하다. 다음으로 어떻게 여장이라는 행위를 수행하고 연출하는지를 살펴보자.

 

내가 대학교 때 동아리가 00라고 봉사동아리였거든. 근데 거기가 얼마 전에 작년인가 20주년을 했어, 전통이 오래됐는데 봄가을에 엠티를 가거든. 근데 엠티를 갈 때마다 미스 00을 뽑아. 봄에는 1학기생 위주로 하고 가을에는 2학기생 들어온 남자애들 신입생 위주로 한다. 근데 엠티를 가면 조별로 나누잖아. 그러면 신입생 한명 선배들 이렇게 구성을 하잖아 그러면 한 조에 한명씩 꾸며서 나와 그런 식이었어. 이 남자애를 여자 선배나 여자 동기들이 얘를 꾸며주고 그런 거였는데. 나도 그렇게 한 번 꾸며준 적이 있거든. 내가 후배남자를 해줬는데, 내가 화장을 안 하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하긴 했는데 되게 못했어, 근데 거기는 어차피 화장을 잘하고 이런 것보다는 과장하는 게 중요하잖아. 화장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메이크업베이스 바르고 립스틱도 바르고 점도 찍고, 점이 막 섹시하게 보여야한다거나 그랬어. 옷도 집에서 직접 가져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거기 있는 거 수건, 천 이런 걸로 가슴 양말 말아 넣고 이건 남성 스타일 애들을 꾸밀 때는 그렇게 하고. 예쁘장한 남자애를 꾸민다고 할 때는 수줍음 많은 척을 하라고 시킨다거나 그러니까 그냥 이미지가 두개였던 것 같아. 그냥 보기에 더 남자다운 애들을 화장시켰을 때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웃고 터프하거나 이런 애들보다 섬세한 남자애들도 있잖아 그런 애들이 나오면 “어머 쟤 진짜 여자같다” 이런 반응이고. 보기에 남자 같다 그런 애들은 웃고 난리가 나지. <주희>


여장할 때 다 그거 섹시 컨셉. 가슴에 많이 넣고 치마 짧은 거 입고 망사스타킹 같은 거 막 신고요. 우리는 AM4)이 에로엠이야. 에로틱하다고, 남자들이 설치면서 하지. SM이라고 섹시엠이라고도 하고요. 여자처럼 하는 거지. 흔히 얘기하는 뭐죠? 상품화되고 있는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 있잖아요, 요새 나오는 섹시 가수들 이미지 그런 거 그대로 차용해요. 그런 거 하면 좋아하죠. <아치>


중학교는 공학이었는데 중 3때 졸업하기 전에 왜 축제 이런 거 하면서 그게 누가 주최하고 그건 모르겠는데 한반에 한명씩 여장남자 콘테스트 해서 남장은 안했죠. 그런 거 약간 왜 유명한 애들 나가잖아요, 얘 잘생겼다 하는 애 1반부터 쭉 나오는데 구청 구민회관 대강당 빌려서 했는데. 진짜 예쁘고 잘생긴 애들 나오면 소리 지르고 환호성치고 여자애들도 좋아하고 남자애들도 좋아하고. 주로 섹시 아니면 청순가련. 섹시는 아까 걔네들 소위 좀 논다 이런 애들 일부러 덩치 되는 애들이 걔네들이 가슴을 만들 수가 있잖아요, 그렇고 진짜 예쁜 애들은 청순 이런 걸로. 남자애들은 진짜 여자애들은 안 그러는데 여장남자들이 막 나와서 적극적으로 표현하니까 좋아하는 거 같아요. 여자애들은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고 저희 1등했던 애가 진짜 유명한 애였어요, 진짜 예쁜 애 그때가 막 셀카 유행할 때 너무 애가 예쁘게 나와 가지고 여자애들은 그래서 좋아했던 거고. 오오오 막 이러면서. <트르>


   여성의 의복을 입으며 여자임을 가장할 때 주로 사용되는 컨셉은 두 가지, 섹시 혹은 청순 형이다. ‘여자’ 혹은 ‘여자답다’는 것을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 속에서만 인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시선의 남성 중심성을 드러낸다. 남성적 시선 속에서 여성은 섹시하여 성적매력을 발산하거나 청순가련하여 다소곳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인터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남자 중에서도 겉보기에 남성성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판단되는 경우 즉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굵고 털이 많고 적극적인 성격인 경우에는 일부러 반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섹시 컨셉을 사용하고, 겉보기에 여성성이 드러난다고 판단되는 경우 즉 마르고 목소리가 가늘며 얼굴이 예쁘고 소극적인 성격인 경우에는 청순가련한 여성의 컨셉을 잡는다.

  이어서 이들은 자신의 컨셉에 맞게 제스추어, 동작, 걸음걸이 등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고 연출한다. “더 남자답게” 혹은 “더 여자답게” 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여성성/남성성은 행위자의 의도에 따라서 외모와 행동에 의해 얼마든지 연출되고 가꾸어질 수 있는 수행적인 것이라는 점이 여기에서 잘 드러난다. 모방행위가 발생하면 이미 그 순간 원본과 모방본의 구분이 불가능해진다고 말한 버틀러의 논의는 이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버틀러에게 드랙(drag)은 바로 그 좋은 예가 된다. 모방본이 모방하고 있는 것은 원본이 아니라 원본이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이상적 자질들이다. (버틀러 1990) 만약 남성적인 여성이 교태나 애교로 자신의 여성성을 가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성성이라는 허구적 이상을 모방하는 것이다.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은 진정한 여성성이라는 원본을 모방하는 모방본이지만, 사실 진정한 여성성도 가면으로서의 여성성도 여성적 특성이라고 가정되는 허구적이고 이상적인 자질들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둘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은 여성성 그 자체가 규제적 이상을 모방하는 허구적 산물임을 드러낸다.(조현순 2001:184) 따라서 ‘여장’ 과정에서 모방한다고 생각하는 ‘진정한 여성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모방하고 연출하는 것은 젠더 이분법이 강요하고 규제하는 행위들에 불과하다.

 

 웃음의 발생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여장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일까? 어떤 요인이 웃음을 발생시키는가? 그를 위해 웃음에 대한 기존 연구들을 살펴보자.


1) 웃음에 대한 이론 연구

  그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웃음의 발생과 그 조건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져왔다. 웃음의 이론은 일반적으로 우월론(Superiority Theory 풍자론), 해소론(Relief Theory, 이완론), 부조화론(Incongruity Theory, 골계론)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박근서 1997; 이재원 2003; 원용진 2001)    웃음에 관한 많은 연구와 이론이 있지만 이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중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로 우월론이다. 이 이론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 따르면 희극은 ‘보통 이하의 악인을 모방’한다. 토머스 홉스 역시『리바이어던』에서 “웃음의 감정은 타인의 약점 또는 자신의 이전 약점과 비교해 자신에게서 뜻밖의 우월감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갑작스러운 승리감이다”라고 표현한다. 즉, 우월론에서 웃음은 열등한 인물이나 행위를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반대로 코미디의 인물들은 대개 중요하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간주한다. 코미디의 인물들이 하향적 일탈을 일삼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들이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일탈을 보고 즐기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추켜올려 세우는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그 프로그램에서 가장 흔한 소재가 되는 소위 ‘바보’ 연기를 보면 이런 웃음의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2) 여장은 왜 웃음거리가 되는가?

① 사회성과 권력관계 그리고 우월감

   웃음은 사회관계 속에서 보편적이고 대중적으로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베르그송은 웃음이 사회성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웃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라고 하는 그의 본래적 영역에 다시 위치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베르그송 1992) 웃음이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 관계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개입된다.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경제적, 정치적 관계, 일상적 대인 관계 및 젠더, 인종, 지역, 세대 등 다양한 형태의 관계들 속에 내재해 있다. 권력은 사회관계와 공존해있기 때문에 권력은 사회성과 등가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푸코 2003) 이렇게 우월론을 사회적 권력관계 속에서 사고하게 되면, 웃음은 다수의 정상성과 우월감을 확인하면서 기존의 권력질서를 확인하고 또 강화하는 기제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장’이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를 성별권력관계에 기반 한 여성/여성성에 대한 멸시로 읽을 수 있다. 남자가 여자가 된다는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행위이자 사회규범을 일탈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웃음이 발생하지만, ‘여장’의 재현과정을 통해 비하되고 조롱받는 대상은 당사자 남성이 아니라 연출되고 있는 여성과 여성성이다. 여기에서 보는 관객의 시선은 남성인 반면,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성이다. 응시가 남성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유적 용법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각 양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응시가 여성을 향하고 그 여성에게서 쾌락을 얻을 때는, 언제나 그 응시는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여성은 에로틱한 대상으로서 역할 한다. (드베로 1990)1)  이러한 물신주의적 시선은 특정한 신체 부분에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월터스 1999:77) 여장 과정에서 여성들의 가슴, 엉덩이, 입술, 점과 같은 성적매력을 불러일으킨다고 간주되는 부위들이 특징적으로 강조되는 것을 보게 된다. 지나치게 과장된 가슴과 엉덩이 등의 신체부위들에 덧붙여 ‘오버스럽게’ 연출되는 행동과 목소리는 여성성을 왜곡하고 과장한다. 이 때 발생하는 ‘우스꽝스러움’은 여성에 대한 조롱을 통해 남성들에게 우월감을 부여하며 웃음을 발생시킨다.


딱 해서 진짜 예쁘고 여자 같은 애들은 그냥 가만있어도 되는데 되게 남자 같은 애들 있잖아요. 예쁘지 않은 남자애들 그런 애들은 아무리 꾸며놔도 여자 같지 않으니까 되게 몸짓으로라도 여자인척 하려고 자기가 생각하는 여자 태도를 막 보이려고 하고, 몸짓으로 보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자 이미지, 되게 여자 같은 이미지하고 거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교태를 부리고 얌전한척 하고 애교 부리고 이런 거. 목소리도 되게 야리야리하게 하고. 그 사람들도 어떤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웃어주겠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요. <안나>


‘여장 남자’들의 실제 모습에는 강한 남성성이 감춰져 있다. ‘여장 남자’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여려 보이지만, 실제는 정반대로 강지섭은 184cm의 훤칠한 키에 유도 유단자이다. 조승우와 오만석도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하고 있다. 코미디에서 ‘황마담’이나 ‘제니퍼’는 극중 갑자기 거친 남성으로 깜짝 변신하기도 한다. <스포츠칸 2006.01.03>2)


<웃찾사>도 꾸준히 여장남자 캐릭터를 ‘밀어’왔는데, 얼마 전까지 인기 코너였던 ‘퀴즈야 놀자’에서는 씨름선수 같은 체격의 문세윤이 여성 간호사 역할을 맡아서 인기를 얻었다. 산만한 덩치의 문세윤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교를 떨면서 “몰라요~”라고 말하면 시청자는 뒤집어졌다. 문세윤의 간호사는 생김새와 체격이 전혀 여자 같지 않은 남자가 여장남자 역할을 하는 고전적인 여장남자 캐릭터의 한반도 버전이었다. <한겨레 21 제623호 2006.08.17>3)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여장을 통해 성적 매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부각시킬 때 이것을 수행하는 이들은 보통 남성성이 더 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예쁜’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은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환호를 받아도 결코 웃음거리는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기에 ‘우락부락하고’ ‘남성성이 강한’ 사람이 여장을 할 때 역설적으로 더 많은 웃음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통제에서 찾을 수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몸 관리와 훈육에 소모한다. 대표적인 것이 외모강박증이다. (보르도 1993) 예쁘지 않은 얼굴, 털 있는 다리, 뚱뚱한 몸은 여성성, 여성의 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털 많고’ ‘뚱뚱한’ 남자가 몸에 달라붙는 치마를 입고 여장을 수행한다면, 사람들은 ‘그는 여자가 아니다’라고 인식한다. 신문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리 간호사 의상을 입고 여자 목소리를 내도 그가 ‘여자답지 않음’을 보는 사람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코미디 효과는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특히 개그프로의 경우 여장 연출 과정 중에 거친 남성으로 돌변하여 괴성을 지르거나 남성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이들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한다.” “우습게보지 마라, 나 알고 보면 이런 남자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이들의 말은 여성을 연출하고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이 원래 자신의 위치(남성)보다 훨씬 낮다는 맥락을 드러낸다. 즉, 자신은 여자다움과 여성성을 규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놀이감으로 전유할 수 있는 남성의 일원임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들을 보며 폭소를 터뜨리는 관객들 역시 우월감을 통해 동일시한다고 볼 수 있다. 

 

② 웃음 대상과의 거리감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있을 때 그것이 웃음이 되는 조건 중의 하나는 바로 웃음대상과의 ‘거리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수를 범한 사람에 대해 감정적인 동참, 즉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웃는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웃는 사람과 웃음의 대상이 된 사람과의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류종영 2002:236) 예를 들어 유태인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개그가 있다고 할 때, 유태인이 아닌 다른 민족들은 웃을 수가 있겠지만 당사자 유태인들은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웃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다수의 남자들이 여장을 즐거워하는 이유는 여성성이 우스꽝스럽게 연출될 때 남성들은 재현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과 거리감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여성들은 왜 여장을 보고 웃는 것일까? 당사자 여성의 몸에 대한 조롱과 비하라면 여성들은 불쾌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첫 번째 이유로 관람자 여성들의 시각이 ‘남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관객을 남성으로 관객의 시선을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하면, 관객으로서의 여성은 남성적 응시에 동화된 대상이며 남성과 마찬가지로 관음증과 물신주의의 메커니즘에 묶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월터스 1999:82) 이러한 이론을 빌리자면 많은 여성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대상화하는 ‘남성적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성 관객들이 ‘여장’ 재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많은 여성들은 여성성을 과장해서 연출하는 여장에 대해 불편함 내지는 거북함을 표현한다.


tv 보면은 황마담, 제니퍼 (처럼 여장 캐릭터) 너무 희화화시키는 것도 있고 거북스러워요. 다른 친구들끼리 얘기할 때도 “황마담 짜증난다” 이런 얘기 종종하니까. 너무 막 애교부리고 과하게 막 여성성을 드러내려고 하니까 뭐라고 해야되지 너무 막 오버하잖아요, 목소리도. 사실 그런 애들 보면 짜증난다고 하는 것처럼 실제로 보통 사람들이 안 그러는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트리>


  그러나 반면에 또 많은 여성들이 여장을 보고 웃는 이유를 단순히 남성적 시선의 내면화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여성 관객들은 재현되는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있었지만 단순히 남성적 주체로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거리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는 여장 중에서도 가장 많이 재현되며, 가장 많이 웃음거리가 되는 ‘섹시’ 컨셉에 대한 생각을 통해 이를 살펴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남자를 그런 컨셉으로 꾸며넣는게 tv 드라마에 시골 다방 레지나 어떤 그런 이미지로 촌스럽고 과장되게 그런 이미지인 것 같아. 여성들 중에서도 되게 안 좋은 그런 이미지로, 술집 여자. 걔네들을 사회자가 인터뷰하고 할 때도 걔네들 자체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고. 껌 짝짝 씹고 “오빠~~”막 이러면서.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아. <주희>


내가 봤던 건 대동제 때 주점하잖아요. 그 때 손님들 많이 끌어 모으려고 호객 행위하잖아. 그거할 때 남자애들이 여장하는 거지. 술집여자 딱 그거죠. 일종의 전복이죠. 전복에서 유희를 느끼는 거죠. 일부러 막 덩치도 크고 딱 이런 친구들 시키는 거죠. 여장 진짜 안 어울리는 거 같은 애들. 완전 희화화의 대상이죠. 예쁘장한 애들은 시켜본적이 없는 거 같아요. 오히려 그런 거 잘 안 시키는 거 같아요. <아치>


많이 웃는 건 좀 그런 애들 있잖아요. 좀 논다 하는 애들이 오버하고 일부러 막 브래지어 올리는 척 막 이런 거 하고 치마 일부러 들어올리고 그러죠. <트르>


  ‘주희’와 ‘트르’의 인터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여장’의 섹시컨셉이 모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 ‘다방 레지’와 같은 이미지들이다. ‘아치’의 말에서 나오는 것처럼 실제로 대학교 축제에서 여장은 호객행위를 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술’과 ‘성적 서비스’를 판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미지들은 미디어와 사회적 담론을 통해 가공되고 구성된 것이다.4) ‘그런 여성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박하고’ ‘과장된’ 행동을 할 것이라고 간주된다. 여성 관객들은 여성 중에서도 더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여성들과 자신들을 분리했다. 여기에는 섹시 컨셉으로 재현되는 여성들에 대한 거리감과 상대적 우월감이 결합되어 있다. 이들 여성의 이미지, 섹슈얼리티가 비하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는 거리감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런 대상이 되어도 괜찮은 (직업) 여성’이 있다는 가정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성 관객들은 불쾌감을 표출하기보다 여장을 보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보론: 남장은 왜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가


  인터뷰를 했던 이들은 모두 ‘여장’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남장’을 경험한 적은 일부에 불과했다. 남녀공학의 경우에도 ‘여장 대회’만 따로 한다던지 여장만을 재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남장은 ‘재미가 없다’ ‘인기가 없다’. 달리 표현하면 그만큼 웃음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개그프로의 경우에도 일부 개그우먼들이 종종 남장을 하긴 하지만 여장에 비해 빈번하지 않다. 또한 여장에서와는 달리 남장에서 남장을 하는 이들은 이미 “남성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간주되는 ‘덩치가 좋거나’ ‘예쁘지 않은’ 개그우먼들이다. 이들 개그우먼들은 일상 영역에서도 대부분 여성성이 탈각된 남성화된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엔 신영이가 가발 쓰기 싫다고 앙탈을 부렸어요. 특히 여자가 가발을 써서 잘 된 코너가 없다고 다들 말렸죠. 하지만 전 자신 있었어요. 지금 '국민 여동생'은 문근영이지만 '국민 남동생'은 김신영이죠."(김태현) "이제 '행님'이 됐는데, 저도 가끔 '오빠'라고 부르면 어색해요. 서로 너무 잘 아니까."(김신영) <스타뉴스 2006.01.25>5)


  개그프로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행님아' 코너는 10년 전 개그맨 강호동이 MBC '오늘은 좋은날'의 '소나기' 코너에서 했던 역할을 개그우먼 김신영이 재현한 것이다. “여자가 가발을 써서 잘 된 코너가 없다”고 한 개그계에서 이 코너는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남동생으로 분한 개그우먼 김신영은 ‘국민 남동생’으로 일컬어지고 스스로도 남자동료를 ‘행님’이라고 부를 만큼 남성화된 존재로 인식이 된다. 이 코너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남장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형제의 아옹다옹하는 캐릭터에 있었다. 즉, 여성이 남장을 하는 경우에 남성성이나 남성의 육체에 대한 비하와 조롱을 통해 웃음을 발생시키는 경우는 없다. 남장을 해서 웃음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개그요소, 재미있는 캐릭터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자의 남장은 웃음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인가? 사람들은 여자의 남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사람들이 제일 처음 인터뷰에서 말했던 이유는 상당수의 여성들의 의복이나 헤어가 남성과 별 다른 차이를 못 느낀다6)는 것이었다.


여자가 남장을 하면 어지간하면 티가 잘 안 나는데. <아치>


남장은 아예 없었어요. 아무래도 여고나 그런데서 잘 보이는 건데 여자애들은 남자애처럼 보이기가 쉽잖아요. 머리 좀 짧게 자르고 옷 좀 스포티하게 입으면 그렇게 보일 수 있는데<트르>


여자애들이 남장을 했을 땐 여자는 평소에도 바지입고 남자 옷 입고 다니는 애들이 있어서 아무런 느낌이 안 드는 것 같아요. <보영>


근데 기숙사에 외부인 들어가면 안 되는데 남잔 줄 알고 경비실 아저씨가 꼭 잡는 애들 있거든요. 제가 봐도 남자 같아요. 걔네는 남장을 할라고 한 건 아닌데 돌아다니면은 남자인 것 같다고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안나>


  이들이 말하는 것은 남녀가 같은 의복을 입는 경향, 유니섹스(unisex)를 의미한다. 유니섹스는 1960년 히피들이 중성적 이미지로서 남성복을 근간으로 하여 똑같은 디자인을 남여가 같이 입음으로서 기존의 가치체계와 성역할의 이분법을 해치시키고자 했던 정치적 의미(안소현, 이경희 2000)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대 패션에서 유니섹스는 실용성과 함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남녀구분 없이 남성성에 가까운 셔츠와 면바지 스타일인 캐주얼로 발전하였다.(박미령 2003:329)  이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유니섹스는 정확하게 ‘무성화’라기보다는 ‘남성화’에 가깝다. 따라서 여자가 남장을 한다는 것이 외관상 특별한 특징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유니섹스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의 학교 공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론 학교를 제외하면 상당수의 여성들은 남성적인 의복과 대비되는 여성적인 의복을 착용한다. 남성의 응시대상으로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남성을 유혹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현대패션에서는 전형적인 여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디자인을 페미닌룩(feminine look)이라고 부른다. (박미령 2003) 그러나 어찌되었든 여성들이 남성들의 의복을 착용했을 때는 남성들이 여성적인 옷을 입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여자들이 정장 딱 갖춰 입으면 되게 멋있다, 세련되고 품위 있어 보인다고 하는데. 남자들이 만약에 여자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 그러겠지. <우주>


남자들은 머리에 여자 가발을 쓰고 가슴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여자 되기’에 안간힘을 쓴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엽기녀’들. 반면 남장 여자들은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다. 오히려 절도 있는 행동과 당당한 말투로 실제 남성보다 더 매력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일간 스포츠』2002.01.16>7)


여자들은 보이쉬한 사람보고 ‘멋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남장이 웃기지는 않죠. <민희>

 

  인터뷰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적 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 이유는 여성들의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과 연관을 가진다. 여성의 전문직 증가와 여성중역의 책임이 당연시되면서, 패션에서도 여성에게도 공적 영역에서 남성에게 요구되어졌던 ‘사업가적’ ‘전문적’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요구되었다. (박미령 2003:328) 그렇기 때문에 특히 전문직, 고위직으로 갈수록 여성들의 의상은 정장 수트를 비롯하여 남성화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수트는 남성의 성공, 남성다움, 성숙함을 가장 완벽하게 상징하는 기표로 사용되고 있다. (홀랜더 1994)8) 머리 스타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커리어 우먼은 너무 길거나 짧지 않고, 또한 너무 곱실거리거나 직모가 아닌 헤어스타일을 함으로써 젠더나 섹슈얼리티를 함축하지 않도록 조언 받는다. (프리드만 1986)9) 최근 유행하고 있는 매니쉬룩(mannish look)10)의 경우에도 카리스마와 당당함을 표현하기 위한 패션 경향의 하나로 보인다. 따라서 여성들이 남장을 했을 경우에는 여장과는 달리 오히려 ‘멋있고’ ‘카리스마 있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을 앞서 언급한 웃음의 이론들과 연결해보면, 왜 남장이 웃음이 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다. 즉, 여성들이 남성의 옷을 입어 ‘남자’가 된다면 성별권력관계 속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상승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남성적 의복은 성공한 여성,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와 곧잘 연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11) 그러므로 보는 사람들은 ‘남장’에 대해 어떤 식의 우월감도 갖지 않으며 전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여자가 남장을 통해 표출하는 강렬함과 카리스마는 그것이 직장이든 연애관계이든 여성들을 남성과 동등한 ‘경쟁자’로 인식되게 하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남장은 가부장적 권력에 위협적이고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탈적 크로스드레싱으로서의 여장은 일상적으로 축제 프로그램, 개그 프로그램, 코미디 영화 등 웃음의 소재가 된다. 여장은 남성성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여성성을 가장하고 연출한다. 사람들은 젠더 범주가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실제 여장의 연출과정을 보면 젠더란 허구적인 여성성을 모방하고 수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여장을 연출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이 웃음을 발생시키기 위해 여성성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왜곡하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렇게 여장이 웃음이 되는 이유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권력을 바탕으로 한 우월감과 웃음대상과의 거리감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는 여장을 수행하는 이들의 특성과 그들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 이와는 달리 여성이 남성을 연출하는 남장은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는 것을 의미하고 오히려 여성을 남성의 경쟁자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에 우월감이나 거리감에 바탕 한 웃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성들에게 남장은 가부장제에 위협적이고 도전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버틀러가 드랙(drag)을 젠더범주의 허구적 맥락을 드러낼 수 있는 정치적, 문화적 실천으로 본 것(버틀러 1990)과는 달리 이 글에서의 여장은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다. 웃음을 목적으로 하는 여장은 보는 이들의 정상성과 우월감을 확인시키는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남자가 여장을 통해 ‘여자’가 될 때 웃음이 발생하는 순간 사람들은 젠더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비정상적인 행위’라는 관념을 확고히 한다. 또 생물학적 성과 일치하지 않은 외양은 수행자의 실재 젠더 정체성과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 즉 “역시 여자는 ~해야 한다.” “여자란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성별화된 관행과 몸 이미지는 우리가 여성과 남성의 몸을 인식하고 분류하고 평가하는 방식들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쉴링 1993) 따라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일탈적 여장은 오히려 전통적인 젠더 이분법을 더욱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문제점을 낳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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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오랜만에 맞게된 방학. 놀아야지 놀아야지 했는데 딱히 할일없이 뒹굴거리는 것도 지겨운 일이다. 그래도 딱 12월까지만...지난 열흘간 뭘했나 생각해보니, 진짜 한게 없네. 그나마 한 일이 뭐냐, <아내가 결혼했다>를 봤다. 2006년 화제의 책이라,,,,,몇몇 블로거들이 적어논것도 눈팅을 했는데. 암튼 읽었다. 읽고서 블로그에 감상을 좀 끄적여놓는다는게 벌써 일주일이 흘렀네..

 

작가가 전공이 사회학과시더만, 이렇게 지식을 설명해대는 소설은 처음인 거 같다. 내가 요새 도통 소설을 안 읽어서 그런건지, 이런게 대세인가? 그건 아닐거 같은데.

 

 내가 이 책을 보고 느낀 점은 솔직히 일부일처제와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가 주제인지 잘 와닿지가 않는다는 거다. 작가가 이 책을 쓴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말이다. "일부일처제가 인간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제도일진 몰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 메세지를 주고 싶었던건가? 적어도 나한텐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오히려 "폴리아모리가 잘난 마누라와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제도일지는 몰라도 남편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 같았다고나 할까?

 

화자가 남편이라고는 해도, 아내가 폴리아모리를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 어떤 욕망을 실현하는지는 도통 느낄 수가 없었다. 모수족 이야기를 백번한다고 해도 그건 이해불가다. 책은 내내 폴리아모리를 욕해대는 남편의 머릿속만을 그렸고, 그의 대응전략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과 대응전략이란건, 사랑과 전쟁만큼이나 뻔하고뻔한 가부장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 예쁘지는 않지만 맛깔난 음식을 십분안에 차려내는 그녀(아내)는 결정적으로 축구까지 좋아하지 않는가.....완벽하게 집안일을 해내면서도 직장에서 능력있고, 게다가 섹스기술도 뛰어나며 같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그런 여자, 아내는 바로 그런 여자다. 어느 블로거가 써놓은대로 그(남편)는 가사노동에 손하나 까딱하지않는 인간이다. 아내가 주말이 되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때 그는 "마누라 없는 집안은 별 일 있다"는 증거를 집안 구석구석에 남겨둔다. 사실 일부러 '남겨둔게' 아니고 손하나 까딱안하면 자동으로 집안이 그꼴이 될 거다. 아내는 군말없이 집을 치우고 성실한 주부 역할을 다해낸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 남편이 노력하는건, '밤일'이다. 허허,,,,,,설상가상이다. 축구는 골대안에 공을 집어넣는 경기라며, 다른 스트라이커보다 더 많이 더 훌륭하게 아내의 골대에 공을 집어넣겠다 다짐하는 것이다. 아내에게 열받으면 화풀이도 밤일로 한다. 아내가 아프다고 하거나 말거나, 집어넣는게 그 남자의 표현방식이다. 그런 그가 가사노동에 참여한  계기는 아내의 임신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아버지로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봐야 거드는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아버지되기가 그의 두손을 걷어붙이게 만든 유일한 계기라니 자손과 혈통이 무섭긴 한가보다. 물론 아이를 낳은 이후에 양육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 그냥 "아이가 소중하고 예쁠 뿐", 아이를 보살피고 돌보는 건 뒷전이다.

 

책을 읽으면서 늘 항상 거꾸로 생각을 해본다. 만약 주인공이 여자였다면? "남편이 결혼했다"였다면 첩이건 두집살림이건 간단히 끝나버릴 얘기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 아내의 대응전략이 저러했을까 싶다. 사랑과 전쟁이었다면 상대여자의 얼굴에 벌써 찬물 끼얹었겠지, 국내에선 구하기 어렵다는 축구 동영상 앞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는 일따윈  없었을거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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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홀리데이


 

 

어제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았다

원제에는 '로맨틱'이 없었던 것 같은데 '로맨틱'은 삽입은 한국의 수많은 이성애자 커플관객을 노린 술수일테다ㅋ 저 포스터에서부터 로맨틱이 철철 흘러내리는 거 같잖아.

암튼 왠지 이 맘때쯤이면 '러브 액츄얼리'류의 영화를 봐줘야할 것 같다.

남들 하는 건 또 다 해볼려고 그러는 나....쯧...

아무튼 영화는 재미있었다.

한여름에 집에서 비디오 틀어놓고 부채 부치면서 보기에는 정말 짜증날 거 같지만.

 

좀 신선했던 점은 home exchange라는 설정에 있었다.

두 여자 다 남자관계의 파탄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원해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여행을 간 건 심히 부러웠다.

누구 저랑 집 좀 바꾸실래요?

 

그런데 꼭 그렇게 new guy를 만나야 하는건가?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아문다는 그 고전적인 논리 때문인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주드로의 살인미소에 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낭만적 사랑과 연애에 대한 환상을 굳건히 지속시킬 것인가!

 

며칠전에 내 친구가 쓴 글 제목이 '가부장제는 여자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다'였다.

여자는 연애, 결혼 그리고 가족이라는 것을 꾸려야만(!) 된다는 거지.

혼자 있는 여자는 항상 비정상이고 심지어 미친여자일지도 모르며, 종국에는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그런 압박!! 그런 압박이 사방에서 조여오니까 말이다.

 

다른 식의 상상은 불가능할까?

영화처럼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 단 2주간이라도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이곳에서의 나 같지 않은 파격적인 모습으로 하루쯤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다녀보고 싶고, 근처에 걷기 좋은 길이 있다면 하루쯤은 내내 걸어다니며 사진도 찍어보고 싶다. 집에 들어와선 하루종일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써도 좋을테고. 새로운 환경은 180도 사고의 전환을 가져올지도 모르잖아.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한 holiday일텐데 말이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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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하나의 원칙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알고 있기로 운동사회에서도 몇몇 단체가 내부 규약을 통해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공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얼마전에 양성평등연대라는 데서 노동해방학생연대의 반성폭력 규약을 갖고 논쟁이 붙기도 했다. 물론 양성평등연대인가 하는데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런 단체를 만들어서 활개를 치는가 의문이 들지만, 어쨌든. 핵심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공정한가 하는데 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미국의 경우에는 'reasonable woman', 한국말로 옮기자면 합리적 여성 혹은 합리적 피해자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에 'woman'이 붙은 것이고. 이 개념은 동일한 사실을 다르게 인식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진실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사용된다.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제외하고. 예를 들어 '성기 삽입'이라는 기술에 대해서 잠정적으로 가해자/피해자 측이 모두 인정하는 상황이 있다. 그런데 가해자는 이에 대해 '관계'라고 말하고, 피해자는 '강간'이라고 말한다. 이 때 과연 누구의 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누구의 말이 더 합리적일까?  이 때 사용되는 '합리적 피해자' 개념은 흔히 '아이의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에 비유된다. 즉 가해자의 의도에 관계없이 피해를 입는 사람은 피해자 당사자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것이 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대부분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이런 감정, 입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왜 그렇게 느끼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둘러싼 총체적 맥락을 드러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자의 no는 yes'라고 오랫동안 교육받아왔던 이 남자는 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관계'를 한 것은 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극렬한 저항이 수반되지 않은' 관계는 강간이 아니라는 가부장적 전제가 분명하게 깔려 있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이런 가정과 전제들은 무수히도 많다. "여자가 남자와 단둘이 있었으니" "여자 옷차림이 그러하니" "여자 혼자 밤늦게 돌아다녔으니"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등등등. 그러나 법적 절차나 해결과정은 이런 '맥락'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지, 내릴 수밖에 없는지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객관성'을 주장하면서도 실은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모든 지식은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기준이란 없다. 충분히 다른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맥락이 중요하다. 성폭력이 위계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그러한 맥락에서 누구의 판단이 덜 왜곡된 것이며 덜 부분적인 것일지를 그 속에 개입된 가치와 이해관계들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이 나올 수 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인 산드라 하딩(Sandra Harding)은 이것을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라고 불렀다. 하딩은 전통적인 과학과 객관성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은 지배자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지식과 연구만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이를 '약한 객관성'이라 비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이 주장하는 사회적 상황적/맥락적 지식(socially situated knowledge)이 판단과 인식론에 있어서의 상대주의-어떤 주장도 합리적, 과학적 근거가 없다던가 그렇기 때문에 결국엔 모든 주장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식-와 혼동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적 위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들에서 '합리적 피해자'나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이 하딩 식으로 말하자면 '강한 객관성'을 드러낼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심지어 사실관계 확인조차 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으니. 피해자 + 중심 + 게다가 주의! 라니, 찬찬히 뜯어놓고 보니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역시 익숙하던 개념도 조금 떨어져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실은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개념이 만들어진 것인지, 사용되게 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누가 알면 좀 가르쳐주세요-) 과거의 반성폭력 운동, 그 중에서도 여학생운동 쪽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추측만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합리적 피해자'와 동일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명명이 사람들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다른 식의 용어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너무 보편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실은 그렇지도 않다.

 

 그리고 더불어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피해 혹은 고통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것과 사건의 해결과정을 통해 '생존자'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화'가 된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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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 1950년대 중국의 가정부녀와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 담론


 

 지난 목요일에 이대 아시아 여성학센터에서 주최하는 국제 컨퍼런스 "신여성/모던걸의 재현과 동아시아의 식민지 근대성"이 있었다. (저 사진은 자료집을 찍은 것이다.) 시간 상 오전에 있었던 젊은 여성학자들의 pre-conference밖에 듣지 못했는데, 모던걸의 프롤레타리아 형태로서 베이핑의 웨이트리스의 문제라던가, 일본의 첩과 관련된 논의들 등의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기록해두고 싶은 발표는 중국 인민대 조교수 송 샤오펑의 <가솔: 1950년대 중국의 가정부녀와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 담론>이다.

 

 가정부녀(가정주부)는 '가솔' '가사관리자'라는 신분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독립적 사회신분이 되게 된다. 가솔은 주로 도시남성노동자의 아내를 가리킨다. 이들은 농촌여성이나 여성노동자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논의대상이 된적이 거의 없다. 송 샤오펑은 국가와 당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인민일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담론을 추적한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에 의한 가사노동 담론이 시기에 따라 '변화과정'을 겪는다는 점이다.

 

 건국 초기에 가사노동은 폄하되고 가정부녀는 '기생충'으로 비난받는다. 왜냐하면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권은 생산노동에의 참여를 통해 부녀해방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는 오히려 정권에게 큰 경제적 부담이 되었고,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이들 여성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50년대 중기에 가사노동은 국가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의 일부분으로 인정되고 국가에 의해 장려되는 모범 모델 중의 하나가 된다. 특히 5호라 하여, 이웃단결이 좋고, 자녀교육을 훌륭히 하는 등의 덕목을 따져 표창을 내리기도 한다. 이는 가사노동에 대한 정치적 긍정과 가정주부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긍정이며, 또 한편으로는 가사노동의 성별분업이 국가의 긍정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58년부터 국가는 '대약진'을 통해 부녀들을 생산노동에 투입시키기 위하여 가사노동의 역할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위에서 언급한 '5호' 선정활동도 진행되지 않았다. 대약진이 끝난 난 후, 1960년 국가경제조성시기가 되면 모범가솔은 또 다시 장려의 대상이 되며, 1964년 이후 가사노동은 국가담론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시장화 개혁 이후 여성의 가내노동은 '전통미덕'으로 국가에 의해 장려된다. 이런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담론의 변화는 내가 보기에 러시아에서의 논의와도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다.

 

 송 샤오펑은 여성의 생산노동에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여전히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을 지고 있었던 것에 주목하며, 맑스주의 이론이 '성별분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한 데서 근거를 찾는다. (맑스주의에서 초기 성별분업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내가 봤을 때는 성별분업을 '초기'에 국한되어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여성억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철저하게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주장이, 어처구니 없게도 '몰역사적'으로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대목이다.) 대부분의 공산당 간부들과 모택동 역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문제의 해결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사회가 공적양육을 제공할 수 없는 단계이자 이에 대한 의무를 모두 '여성'에게 부과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은 더이상 사회주의라 할수도 없지만, 어쨌든 전통적 성별규범은 중화민족의 전통적 미덕으로서 여전히 국가의 찬양을 받고 있다.

 

 <만약 우리가 여성노동과 여성의 가정 내에서의 성역할의 변화를 더 큰 거시적인 노동질서와 성별질서에 놓고 보면, 우리는 건국 이래로 한 번도 남성들을 향해 성별질서영역에서의 변혁과 요구를 제기한 바 없고 남성의 가정내 가정외 성역할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별질서의 변화요구는 모두 부녀를 향해 제기되었던 것이다.>

 

 성별분업과 그것의 여성억압적 성격에 대한 분석/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변화 없이 하나의 '당위'로서 주장되는 생산노동에의 참여와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반쪽에 불과한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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