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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귀향(volver)


 

 드디어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귀향'을 봤다. 황금 시간대에도 여유있는 좌석 덕에.

 

 영화는 '모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독도 그렇게 말했다니. 3대에 걸쳐 중요한 컨셉이 어머니의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영화의 여러 부분에서 '여성들의 연대'를 느끼고, 그것을 강조하고 싶다.

 

 주인공 페넬로페 크루즈(라이문다)의 딸은 부계혈통적 의미에서는 그의 자매이기도 하다. 라이문다의 아버지와 바람을 핀 아구스티나의 관계에선 누가 피해자라고 가해자라고 할 수도 없다. (아마도 이게 한국 드라마였다면 머리를 쥐어뜯고 한바탕 난리법석이 났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어려울 때 나타나 서로를 도와준다. 아구스티나는 라이문다의 이모를 돕고, 또 라이문다의 어머니는 아픈 아구스티나를 돌본다. 라이문다는 남편을 죽인 딸을 끌어안지만, 딸은 라이문다의 눈물을 다시 닦아주고 그녀를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매개가 된다. 라이문다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친밀하고 따뜻한 여성들의 '관계'들로 영화는 엮여져있다. 이 영화의 여성들은 일방적 희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감독(알모도바르)이 갖고 있는 퀴어 감수성은 확실히 영화를 만드는데 엄청난 역할을 미치는 것 같다. 게다가 코믹 감각도 있다. 아무튼 이 영화가 남성 판타지 속의 '위대한 모성'으로만 읽힌다면 그건 참 아쉬운 일이다. 확실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많겠지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스토리 구조가 내 느낌엔 통속적일 정도로 단순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여성성과는 대립적으로, 이 영화의 남성들은 무능력하고 성욕에 눈이 멀었으며 관계를 파괴하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감독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폭력적 남성성을 대비시킴으로서 반대로 그 속에서 여성성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궁금하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어머니(유령이든 아니든)와 라이문다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이야기였지 않았나? 아구스티나 어머니의 실종과 관련된 미스테리도. (나만 그랬나?) 그래서 이야기가 마치 저 포옹장면을 위한 것처럼 짜여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딸과 어머니가 그렇게 오해 속에서 떨어져있을 일은 없었을텐데. 이런 느낌을 주고자 하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삐딱한가?)

 

 마지막으로 이 감독이 여성과 모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그가 귀환하고자 하는 곳 그 곳이 어머니의 품이라면 그도 남성 판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닐런지? (정말 내가 삐딱한가??) 영화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보는 관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볼때 정치적일 수도 있다. 이런 삐딱함은 내가 이 감독의 전작 '그녀에게'를 보고 느낀 남성의 시선, 그 불편함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감독과 그가 만들었던 영화가 궁금하다. 시간 날 때 좀 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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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

 

 

 

 누군가 내가 갖고 다니던 이 책을 보고 '제목이 마음에 닿는다'라고 했는데. 나도 그랬다. 이 책은 탈성매매를 지원하는 부산의 '살림'이라는 곳을 거쳐간, 성매매 여성들의 수기집이다.

 

 그녀들의 아픈 지난 이야기들을 듣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땅을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여성으로서 나는, 그 글들을 그저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내려 읽을 순 없었다. 몇번이나 책을 덮었다 다시 또 열면서 그렇게 한 자, 한 자 읽었다.

 

 성매매를 경험했던(또는 하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다양하다. 성매매 자체도 단일한 형태가 아니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감옥과도 같았던 그 곳을 탈출하고 싶어하고, 지난 과거를 지옥처럼 기억한다. 또 어떤 이는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을 긍정하며, 그 곳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구제'를 거부한다. 그들이 이렇게 다르게 성매매를 경험,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노동이냐 성매매냐, 합법이냐 불법이냐, 자발이냐 강제냐 이런 이분법 속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비난받는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민성노련의 한 성노동자는 이 책을 여성부의 홍보책자쯤으로 비난하지만, 그런 방식이 난 참 맘에 안든다. 그 일을 '타락한 것' '더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잘못된 사회적 편견이지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성매매를 아픈 기억으로 갖고 있는 여성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른 목소리와 차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양한 목소리들 중, 어느 하나만이 진짜라고, 다른 쪽은 진실이 아닐거라고 한다. 설문조사라는 것도 그들이 가진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은 그들 중 어느 하나만을 듣고 있으니, 다른 한 쪽의 여성들이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매매 집결지 이외에도 음성적으로 존재하는 성매매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이 가시화되어야 하다. 더 많은 목소리들이, 더 다양한 목소리들이 밖으로 드러나고 표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들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도 고민 될 수 있지 않을까.

 

 

 

[관련된 글]

 

한국인권뉴스에 기고된 성노동자의 글(민성노련)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26329&page=1&s2=subject&s_arg=너희는

 

일다에 실린 ‘살림’의 활동가의 글

http://www.ildaro.com/Scripts/news/index.php?menu=ART&sub=View&idx=2006092600004&art_menu=1&art_su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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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사 아르망



 

드디어 '읽어야하는' 책을 내팽겨쳐두고 '읽고싶은' 책을 읽고 있다.

 

이네사 아르망.

러시아의 여성혁명가가 아닌, '레닌의 연인'으로 기억되는 그녀.

저 대문짝만한 빨간 글씨가 거슬리는 표지.

누군가의 부인, 연인, 엄마가 아닌 여성의 이름은 없는걸까.

 

 

이네사는 부르주아 출신의 계급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실은 첫번째 결혼했던 알렉상드르가 공장을 갖고 있는 자본가였다. 둘 사이엔 네 아이가 있었다. 참 신기했던 것은 이네사가 11살이나 어린 알렉상드르의 동생(시동생)과 연인이 되어 함께 살고 애까지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이 이를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이네사가 곤경에 빠질때마다 알렉상드르가 도와준 걸 보면, 지금 우리네 시각에서 봐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알렉상드르의 동생, 볼로댜가 병으로 죽고 난 후, 이네사는 레닌을 만난다. 레닌은 이네사를 신뢰했고 그녀에게 많은 중요 업무들을 부탁했다. 이네사와 레닌은 서로를 사랑했고, 나디야(그룹스카야)도 이 관계를 받아들였다한다. 근데, 정말 받아들인걸까?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던 걸까.

 사실은 그전에 레닌에게 떠나겠다했지만, 레닌이 붙잡았고 나디야는 이를 받아들였다. 레닌과 나디야의 관계는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라기보단 신뢰하는 동지 사이 정도로 보인다. 사랑이 혁명의 대의에 장애요인이 된다고 생각한 레닌은, 결국 이네사에게도 결별을 선언하고, 이 일로 이네사는 매우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둘은 계속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고, 파니 카플란이 레닌을 저격했을때 다시 둘은 연인이 된다.

  10월 혁명 이후 이네사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인민위원으로, 중앙위원회 여성분과 위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제 1회 국제여성공산주의자대회를 개최한 것도 대표적인 활동이다. 이런 부분에서 이네사와 콜론타이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성격도 많이 달랐던 것 같고. 1920년 일에 지친 그녀가 요양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이네사는 레닌을 울게 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억된다.

 

 

물론 책을 읽어보면 그녀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 레닌 얘기가 많긴 하다.

(저자는 <봉인열차>라는 책을 쓰다가 이네사에 대해 알게된 마이클 피어슨이란 사람인데.

혁명가들과 혁명을 이상적인 혹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관점'과 '편견'을 감안하더라도

레닌이 정말 성격이 안좋았던 인간이라는 건 진실인 듯하다. 하하.)

하지만 레닌이 없다면 그녀는 기억될 가치가 없는 혁명가였을까. 결코 그렇진 않을텐데.

 

 

콜론타이도 마찬가지이지만. 러시아의 많은 여성혁명가들은 레닌을 비롯한 남성혁명가들의 여성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에 대해 외롭게 분투했다. (6호가 나올때까지 여성노동자 신문인 '라보트니차'에 글 한편 안 실었던 레닌에게 어찌 분노하지 않으리오!)

여성주의나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그와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문제제기 하고, 그들의 '편견'과 맞서싸워야 할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왠지 그녀의 일생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늘 사랑에 목말랐고 외로워했던 아픔 때문일까. 아니면 평생을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도 잊혀진 안타까움 때문일까.

 

 

 

몇가지 기록해두고 싶은 구절들.

 

<이네사는 레닌이 어떤 남성 동지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자신에게는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신뢰와는 달리 혁명 과업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일들이 과소평가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느낌은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과 같이 일생을 혁명에 바친 여성들도 그녀와 같은 견해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문제에 관한 모든 논쟁과 연설들이 시사하는 교훈은 법은 바꿀 수 있지만 오랜 세월 자리잡아 온 관습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1926년 이후 이네사는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제 신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 레닌과 그녀와의 의심스러운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젊고 부유한 여성이라는 그녀의 배경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이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네사가 개선하려고 그처럼 열심히 일했던 여성주의적 진보들은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였던 러시아에서 가부장제의 반동으로 이내 사라져버렸다. 엘우드는 "이네사는 '생각으로 들끓는'-스탈린에게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던 지적인 여성 공산주의자-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썼다. 1930년에는 탁아소와 공공 식당과 세탁소가 사라졌다. 자유이혼법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은 한때 사라져야 할 부르주아 결혼이라고 조롱당하던 기존의 결혼제도로 되돌아가길 강요당했다. 콜론타이의 전기 작가인 베아트리체 판스워스가 논평했듯이 "가족의 소멸은 그저 또 다른 사회주의의 신화가 되어버렸다.">

 

 


 

Inessa Armand

이네사 아르망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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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가족형태 비판 :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은 지금이 2006년이니까, 정확하게 3년전에 사서 본 책인데. 이제야 다시 본다. 점점 기억력이 떨어지나보다. 봤던 책도 안본거 같고, 안본것도 본 거 같다. 과천연구실 책은 집에 몇권이 있기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그동안 들이 보지 않아서. 하나씩 꺼내보고 요약을 해두어야지.

 

 책은 근대적 가족형태 비판과, 쉴라 로보쌈의 자료(마르크스 박사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마르크스 가족의 가려진 사생활) 두가지 번역이다. 아, 여기에서 말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네가지 분류에서 mf에 국한되지 않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몇가지만 메모해두고, '근대적 가족형태 비판' 요약.

 

-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

- 가족임금체계에 대한 평가

- 알튀쎄 이론이 페미니즘에 미친 영향, 철학적 비판

- 가사노동논쟁의 성과와 한계

- 가족에 대한 역사적 분석의 의미

- 뤼스 이리가레의 '여성권'

 

 



:: 엥겔스의 기여와 한계

<기원>의 의의는 역사적으로 변화해온 가족형태를 분석하여, 기존의 초역사적 분석에 대한 유의미한 비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억압을 bg 가족에 한정해서 보았는데, 왜냐하면 pt의 경우 남성지배의 물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고 여성의 일반적 고용상승이 평등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들의 사회적 생산에로의 완전한 통합을 여성해방의 필수적 조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엥겔스의 예견과는 달리 노동시장에 편입된 여성들은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가사노동에의 이중부담으로 노동운동에서도 주변화되었다. 책에서는 이후에 나오지만, 가족임금체계를 통해 오히려 부르주아적 가족 모델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편, 콜론타이는 '새로운 가족형태, 성도덕, 자유연애'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여성문제는 엥겔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6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부흥과 함께 '가사노동 논쟁'이 제기되었다. 논쟁을 통해 여성문제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접근 자체를 재검토 하기 시작, 성과 계급의 인과적 연관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 독자적 가부장제론을 제기한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맑스주의와의 조화를 꾀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등장한다.(가부장제론의 초역사성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공백이 한계로.)

 

 

::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가족형태

 가사노동 논쟁 등에서 인간의 재생산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주목하게 되면서, 재생산의 계기를 간과한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남성적 마르크스주의로 비판받는다. 그리고 생산과 재생산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생산의 두 계기들로 이론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접근들은 대부분 알튀쎄의 영향(재생산, 이데올로기 개념 등)이 크다. 대표적으로 시큼(Seccombe)은 어떤 가족형태도 주어진 생산양식과 분리할 수 없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즉, 생산양식은 가족형태를 구성하지만, 가족형태 역시 생산양식의 구성과 발전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요소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사용하는 초역사적 가부장제 개념이 아니라, 일 가족 내에서의 가부장적 특권을 볼때, 농민가족에서 노동자가족으로의 이행은 생산수단의 박탈, 즉 가내권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또한 여성, 아동노동의 편입과정은 엥겔스가 예견한 노동자계급 내에서의 성적 평등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나 '가족임금체계'의 확립은 상황을 변화시켰다. (가족임금에 대해서는 하트만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자본가과 남성노동자의 공모로 보고 여성억압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린지저먼의 글에서 알수 있듯이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세대간 연속성을 보장함으로써 노동자 계급 일반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이행이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서 자녀관계와 부모-자식 관계를 변화시켰으나, 이것이 가부장제의 최종적 소멸을 가져오지는 못했고, 가족임금체계라는 새로운 토양 위에서 재구성되었다. 임금형태의 개인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였으나, 남성 생계부양자 규범의 승리는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 없다.

 

 

:: 가족형태와 젠더 이데올로기

 바렛(Barrtte)은 가족임금의 도입과정에서 '젠더 이데올로기'의 역할 강조. 가족임금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부르주아가 확립한 가족에 관한 헤게모니적 정의들을 노동계급이 수용한 결과로 본다. 이러한 젠더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가족 안에서 진행되는 젠더이데올로기 과정에 대해 분석하지 못함.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입장에서 정신분석학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된 것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이론이다. 대표적으로 미첼(Mitchell)은 여성의 지위가 생산과 더불어 재생산, 성욕, 사회화에 의해 중층결정된다고 주장. 가족은 경제적 기능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사회적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경제적 단위로서 가족을 종말시킨다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사회적 생물학적 단위로서 가족을 폐지시킬 수 없다. 미첼은 기존 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달리, 라캉의 재해석에 근거하여 프로이트를 긍정적으로 파악했다. 이에 대해 이리가레는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적 환상들이 현존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부장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 근대적 가족형태의 역사 

 빅토리아적 가족에서 아메리카적 핵가족으로.

 

빅토리아적 가족 :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부르주아는 새로운 가족 구조를 확립시킨다. 남녀간의 엄격한 역할 배분이 특징이다.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아내의 역할이 가정을 중심으로 재정의. 부모-자식 관계에서도 감정적 친밀성이 중요해지며, 아동기가 새롭게 발명되면서 모성이데올로기가 형성. 결혼은 낭만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관념.

 

아메리카적 핵가족 : 자본주의 초기 출현한 가족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념은, 가족임금체계를통해 노동계급에게 이식되기 시작한다. 빅토리아 가족이 이상화한 낭만적 사랑을 동반자적 사랑으로 대체하고, 성애적 부부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1960년대말 아메리카 법인자본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가족임금 체계가 위협받게 되면서,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은 더이상 지배적 가족 형태일 수 없게 되었다. 동반자적 결혼이 안고 있는 모순(남녀간의 성적 일치라는 이상) 역시 아메리카적 핵가족을 유지하게 어렵게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분석은 근대적 가족형태의 딜레마들이 경제적, 사회적 재생산의 일반적 위기로부터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현재 진행중인 가족의 위기는 가족관계를 넘어서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총체적 위기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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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새벽길님의 [체 게바라의 사진] 에 관련된 글.

 

새벽길님의 글을 보니, 일전에 읽었던 <혁명을 팝니다>라는 책이 생각난다. 스타벅스 컵 안에 체게바라의 얼굴 그려진 커버의 책.

 

책의 저자들의 관점 자체는 나의 것과 일치하지 않았지만,(다원주의의 불가피한 결과가 시장경제 체제이고, 사회주의는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체제 내의 재분배에 대한 기대등) 반문화에 대한 비판만큼은 괜찮고 커트코베인, 버켄스탁, 바디샵 등의 다양한 예가 재미있는 책이었다.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서도 관점은 다르지만 시사하는 바도 있었고.

 

재미있는 구절이 있었는데,

"지난 50년간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은 항목들을 들어보자. 담배 피기, 남자의 장발, 여자의 짧은 커트머리, 턱수염, 미니스커트, 비키니, 헤로인, 재즈, 록, 레게, 펑크, 문신, 낙서, 서핑, 스쿠터, 피어싱, 얇은 넥타이, 노브라, 동성애, 대마초, 찢어진 옷, 피임, 포스트모더니즘, 군화, 인종간 섹스. 지금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뮤직비디오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소위 반(反)문화 운동이 오히려 지난 40년간 소비 자본주의를 추진해온 주요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고 비판한다. 반문화 운동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은 피상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좌익정치 역시 제도에 불과하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상을 파고든 문화, 제도 그자체이다. 의식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이나, 한편으로는 무정부주의와도 맞닿아있다.

 

"소비주의에 대한 반문화 비판, 소비의식을 날조된 순응의 형태로 분석하고 따라서 지위 재화와 구별에 대한 추구가 소비자본주의의 추동력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개인의 복장 및 스타일을 통한 반란-은 새로운 반란 소비자들의 경쟁목표가 될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지위 재화를 창출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부추긴다. 지위를 얻기 위한 투쟁이 쿨에 대한 추구로 대체되었지만 경쟁의 기본 구조만큼은 그대로다."

 

체게바라가 불티나게 팔려나갈 때, 참 자본주의는 웃기는 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부를 겨누지 않는 이상, 자본은 저항도 혁명도 반란도 반문화도 새로운 상품으로 새로운 시장으로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어제의 대안을 오늘의 주류로 포섭하는 것, 무서운 자본주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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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섹슈얼리티

 

사람이 많은 주말, 큰 서점에 가면 없던 용기도 생긴다. 며칠 전 교보문고에 갔다. 요즘은 또 어떤 책이 나왔는지 두리번 거다가 몇권의 재미있어보이는 책을 잡고 바닥에 쪼그려앉았다. 사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살수만 있다면 몰라도, 돈없으면 이렇게라도 신간을 봐야지. 하긴 신간이라고 하기엔 두달 쯤 된 책이다;;

 

 

<노동하는 섹슈얼리티>는 제목으로 어느 정도 짐작이 가겠지만, 성매매(혹은 성노동)에 관한 책이다. 조금 특이한 점을 꼽자면, 서구 페미니즘이 넘쳐나는 이 때에 '일본' 책이라는 것이고, 그리고 성노동에 관한 논쟁과 성매매가 일어나게 되는 사회구조적 원인(이론적인)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미나 용으로도 괜찮을 듯 하다. 뒷부분에는 일본에 들어온 이주 성매매 여성(타이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여러 저자들의 논문을 묶어놓은 형식의 책이라 그런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후다닥 읽었다. 사실 다리가 저려서 뒤에는 다 읽지를 못했다.

 

 

성매매/성노동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논쟁은 이분법적 구도를 띄고 있었다. 전자는 성매매=성노예 이므로 금지하여야 하고, 성매매 종사 여성들은 모두 피해자라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후자는 그녀들은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며 그녀들의 일을 성노동으로서 인정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 전자는 탈성매매운동을, 후자는 성노동자운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둘다 '성매매여성' (아직 고민이 완전하게 정리되지 않아서, 성매매라고 일단은.) 을 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후자의 입장에서도 이른바 인신매매나 강제적 성매매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사실 내가 성노동자운동을 처음에 접할때는 성노동=성매매 합법화의 논리로 이어질 우려가 있어 반감이 상당히 있었다. 성매매 여성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글들을 너무나 많이 접했던지라, 정말로 감정적인 거부가 컸던 듯하다. 뭐 어쨌든 민성노련이라는 조직이 출범하고 한국에서도 성노동자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성주의 내부에서도 성매매/성노동 논쟁이 핫이슈가 되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 그리고 내가 공감하는 바, 자본주의 내에서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매매가 아닌 다른 '대안적인 직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어불성설인것 같다. 전반적인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결혼제도(가족)나 성매매 모두 여성을 억압하는 하나의 제도임에 틀림 없다. 이것을 부르주아 정부가 강제로 금지시키는 법률을 발효시킨다고 한들, 일시적이고도 기만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 노동이냐 아니냐의 부분은 성노동자 운동에서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그 어떤 이유를 차치하고 "현실적인 이유"-노동자로서의 권리획득을 통한 생존권 보장-때문에 성노동자 운동을 꾸리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성노동자운동의 생존권적 투쟁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지금 현재 성노동자운동(을 이끌어가는 지도부)과 그 방향성에는 많은 문제가 보이는 듯하다. 이 방향성을 어떻게 만들어갈것인가가 앞으로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합법화/공창제 등의 마초적이고도 포주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로 가지 않고, 또한 이 운동이 나아가 부르주아 정부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 되려면 말이다.

 

비판과 지지, 둘 다 함께 생각해야할 일이겠다. 예전에 성매매 여성들의 수기나 경험 위주로 된 책이나 이런것들만 보다가, 이론적인 책을 보니까 좀 더 다른 고민들이 많이 드는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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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反역사 여공 1970


 

-  드디어 다 읽었다. 솔직히 말해 800 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은 또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하하. 역시 책을 읽는 것이든, 읽고 생각하고 또 글을 쓰는 것이든 상당한 인내심과 노력을 요한다. 필자는 서강대 교수 김원이라는 사람이다. 이 책으로 첫번째 김진균상을 수상했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김원씨는 산업화 시기 여성노동자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계보학'과 '미시사'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실 나는 계보학에 대해서 거의 접해보지 않아서, 이런 방식이 낯설고도 재미있었다. 기존의 담론과 연구들을 파헤치면서 지금까지 배제되어온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하고 발견한다. 식모 담론에 대한 검토, 기숙사나 소모임을 통한 여성노동자들의 자매애 형성 과정, 등등등 그리고 지배적인 담론에 가려져있던 여성노동자 내부의 차이와 균열. 그녀들의 문화, 가치관, 정치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돋보이는 책이었다. 일일이 열거하기는 너무도 많다.

 

-  이 책은 산업화 시기 여성 노동운동에 대한 지배적 해석에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동안 여성노동운동은 '조합주의' '경제주의' 이상으로 평가되지 못했다. 나 역시도 지배적인 해석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당연한 한계 정도로 사고 해왔던 것 같다.

 당시 한국노총을 비롯한 어용노조가 남성인데 반해,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세운 것에 대해, 기존의 노동사가들은 가족부양의 부담이 없던 미혼이라던가 단순함, 순수성을 이유로 보는 등의 전형적인 남성주의적 시각을 드러내왔다. 또, 작업장에서 여성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했던 남성노동자들에 대해 '사측의 사주'로만 해석하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여성사업장에서의 여성노동자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성폭행 위협과 남성중심주의 문화에 의한 통제 등 "성적 통제"는 자본의 보편적인 통제양식이었다. 그럼에도 남성노동운동가들과 노동사가들은 이를 성문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사고해왔다. 

 이런 비판들은 상당히 유의미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또 사회화에 따른 성별 특성-관계지향적-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여성노조가 가졌던 노동자 민주주의와, 소모임 활동 등 일상에서부터 파고든 탄탄한 현장권력의 기반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한편 이런 방법은 상당한 기본 지식과 자기 관점이 있어야 제대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정말이지 여성노동자 연구에 관련된 수많은 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 중에서도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저자인 구해근씨와,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의 저자 전순옥씨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여공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으로 오는 것이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보는 것을 필자는 '희생양-수동적 주체' 담론이라고 비판하며,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의 정체성 내부를 들여다보면 가족에 대한 지원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자립과 독립성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구해근씨는 여성노동자들이 어려운 노동환경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을 강고한 가족윤리로 바라보는데 비해, 이 책의 필자는 그러한 담론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고, 궁극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벌이를 통한 경제적 조건의 개선과 교육 등 자아실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순옥씨의 경우는 서구 페미니즘의 제 3세계 여성노동자에 대한 시각-희생자로 개념화-을 비판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의 자율성-헌신적 투쟁과 민주노조운영방식-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책에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 간의 적대적 관계가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산업발전->계급형성->계급투쟁->계급의식고양->역사진보 라는 고정된 가부장적 도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1970년대 노조운영에서 남성 지배란 요인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는 '민주 대 어용'의 이분법적 구도가 남성노동자의 문제라던가 교회 및 지식인과 노조와의 관계 등 다양한 균열을 은폐하고, 운동의 주체인 여성노동자들을 중성적 투사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면서 민주노조운동 일반을 무오류의 신화로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구해근 식의 노동사 서술은 긍정적인 내러티브만을 강조하여, 노동운동의 신화 혹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동맹이라는 특정만을 특권화 시킨다는 것이다. 반대로 필자는 동일방직이나 청계천피복노조 등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지식인 또는 산업선교회와의 결합과정이 낳은 한계와 노조 내부의 균열을 강조한다.

 

  이런 비판 지점들에 있어서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동의하기 어려웠다. 미시사나 일상사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도 있고. 남성 대 여성의 대립구조를 중심으로 놓는 것이라던가, 내부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전체적인 틀을 보지 못한다던지, 정치성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들이나 노조의 역할에 대한 것들도. 궁극적으로는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몇 가지. 이 책의 현재성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민주노조를 '동지' 관계이자 '무성화된 가부장적 유사가족'으로 서술한 것에 대한 비판 부분. 이런 식의 운동 주체 담론은 여성들을 '동지'라는 집단적 주체로 복속시키는 동시에 여성의 성차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점에서 동지적 관계로서 민주노조에서 집단적 주체의 상상적 구조는 표면적인 젠더 중립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성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오히려 젠더 경계를 재구축해왔다.

  그리고 현재 여성노동자를 배제하는 지배적 담론과 지식의 기원을 1970년대 여성노동자로부터 탐색할 수 있다.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 이후에도 1987년 그리고 전노협 시기에도 여성 노동자들은 운동의 중심 주체가 아니라 주변부 혹은 부차적인 주체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일부로 합리화 되었다. 현대차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집단해고 사건과 같이 말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남성편향적 성격과 이 속에서 국가 자본과 손을 맞잡은 남성중심적 노조 사이에는 여성노동에 대한 '암묵적 배제'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배적 담론은 이미 발전주의 시기에서부터 형성된 것으로, 그러한 노동자 주체형성의 다론, 기제, 매커니즘의 기원이 구조조정 시기에 어떻게 다시 반복되는가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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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Country

영어 자막에 보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집착하면서 다봤다. 한국 개봉날짜가 확정되지도 않아서 기다리긴 넘 궁금했다. 개봉하면 다시 한번 봐야겠다.

 

 몬스터의 주인공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을 맡은 는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미국내 첫번째 소송이라고 전해지는 1984년도의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Jenson vs. Eveleth Mines)' 케이스를 영화로 만든거라고 한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광산 노동자가 된 조시가 처음으로 겪는 관문은 소위 '밑' 검사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광산에서의 일은 남성이 되길 요구했고,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주변 남성 노동자들로부터 매일같이 듣는 모욕적인 성희롱이었다. 입만 열면 나오는 여성비하적 욕설들. 그리고 그녀가 불만을 갖고 입을 열면 열수록 거세지는 보복들. 해고의 위협들...너무도 끔찍했다. 벽에 그려진 오랄 섹스 장면과 한 여성 노동자의 락커 안에 뿌려진 정액, 도시락 안에 들어있던 성기 모양의 물체......비난을 퍼붓는 남성노동자들. 그러나 그의 아들도, 그의 아버지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세상은 모두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끔찍했던 것은 소송과정이었다. 아들의 아빠가 누구인지, 숱한 남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왔지 않냐고 묻는 법정에서의 폭력적 상황들. 심지어 그녀가 고등학교 선생으로부터 강간당한 것조차 부인되며 '성적 관계'의 증거로 제출되는 상황이 정말 보기 힘들었다. 남성 동료들로부터 겪은 성희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가 계속 이야기 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떠올리게 했다. 80년대 반성폭력 운동을 유발시켰던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강간을 당할뻔한 여성이 혀를 깨물어 논란이 된 '변월수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피해자의 성경험 여부와 피해자의 성격, 인간관계까지 들먹이며 성폭력을 부인하려는 그 상황 말이다. 아, <<피고인>>도 있다.

 

 아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그런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성경험이 있어, 너는 성적으로 문란해, 니가 남자를 먼저 유혹한 거야, 니 옷차림이 문제야, 니가 조심하고 다녔어야지.......그러니 넌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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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열흘

 

 

 

  생일에(그러고보니 벌써 작년이다) 받은 책인데.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3장까지만 여러차례 시도하다가, 이번에서야 다 읽었다. 많은 잔상들이 머리에 남았다.

 

 인상 깊었던 장면을 기록해두려고 했는데, 너무 많아서 중도 포기다.....귀찮다.

 

- 혁명은 솟구치는 노동 대중의 자발적인 열기로부터 가능하다. 그것은 곧 그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정치, 정치적으로. 10월 혁명이 발생했던 당시의 러시아는 배우려는 갈망으로 폭발했다. 야윈 얼굴과 창백한 피부,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친 병사가 존리드에게 '읽을 것'을 가져왔냐고 묻는 장면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어디서라면 논쟁하고 집회하고. 지식인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회 경제 이론 서적을 읽고 토론했던 것이다.

 

-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무장봉기를 명령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봉기를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였다. 10일 밤에는 밤샘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당의 많은 지식인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수비대 대표들이 참석했다. 지식인들 중에는 오직 레닌과 트로츠키만이 봉기를 지지했다. 심지어 군대 대표들조차도 봉기에 반대했다. 투표 결과, 봉기를 감행하자는 주장은 일단 기각됐다!

  그 때 한 노동자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말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를 대표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는 봉기에 찬성합니다. 여러분은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소비에트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면, 우리와의 관계는 끝날 것입니다!" 몇몇 병사들이 그에 합세했다. 그래서 투표가 다시 이뤄졌고, 결국 무장봉기를 감행하자는 주장이 통과됐다. >

 

- 혁명의 규율. 혁명적 규율. 언젠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군대조차도 설득과 자발적 규율로 이루어진 것이라 들었을때. 러시아 혁명에서 그것들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트로츠키가 통행증이 없어 스몰니 회관을 통과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던가, ^^ 동궁에 들어갔을 때 굶주린 병사들의 약탈이 발생하자 스스로를 통제하며 "혁명의 규율과 민중의 재산"을 외쳤던 부분. 볼셰비키에 대한 온갖 왜곡과 비난에도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존 리드는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동궁에 남아 있던 여성대대에 대한 강간과 살육에 대한 소문이 무성히 퍼졌을때, 실은 살육한 적이 없고 몇몇에 대한 강간이 있었을 뿐이라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단 몇...)



- 케렌스키는 도망가고 의외로 볼셰비키는 쉽게 진입했지만. 반혁명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케렌스키의 무장도발과 함께, 소위 조국과 혁명 구제위원회-그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아니라 기자들과 학생, 지식인, 멘키 등등이었다-가 온갖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혁명은 곧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예상하던 모습으로, 지식인들이 기대하던 모습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거칠고 강렬하게, 정해진 공식을 무시하고 감상주의를 비웃으며 찾아왔다.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으로."

 제대로된 지휘관도 없는 오합지졸의 적군이, 백군을 물리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전투였고, 그들의 세상을 위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나긴 전쟁을 거쳐 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

 

- 크렘린에서 있는 장례식 장면은,,,말로 표현할 수 없는,,,그런 느낌이었다. 짜르의 무덤이 있는 크렘린에 짜르에 반대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한 민중들이 잠드는 장면. 저자인 존 리드 역시 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크렘린에 묻힌 사람이기도 하다. "이제 이 신앙심 깊던 러시아인들에게 자신들을 천국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해줄 성직자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그 어떤 천국보다도 밝게 빛나는, 그것을 위한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나라를 지상 위에 세우려 하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자발적 의지를 통해서 결국 혁명은 성공했고, 그것은 말그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 볼셰비키만이, 끝까지 혁명적 세력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도 말이다. 농민대회 장면은 예전에 정권에 의해 삭제된 부분이라던데,,,역시 재미있었다.

 

-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한 일화.

 

 <  다음 날 페트로그라드에서 반볼셰비키 신문들이 '플레하노프 고열 상태!!'라는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차르코스예 셀로에 있던 플레하노프는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적위병들이 그의 무기를 수색하고 그를 심문했다.

  그들은 "당신은 어느 계급에 속하는 가요?" 하고 그에게 물었다.

  "나는 혁명가요." 플레하노프가 대답했다. "40년 동안 자유를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해온 혁명가요!"

  "아무튼," 한 노동자가 말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을 부르주아지에게 팔아 넘겼잖소!"

  노동자들에게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선구자 플레하노프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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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 이효정, <약속>

 

 

 경성트로이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효정의 시로 시작되는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시간이 지루할 것 같아 샀는데. 단숨에 읽었다. 이전에 여러 사회주의 매체에서 평론을 써놓은 것을 제목만 보았는데, (영화든 책이든 평론을 미리 읽으면 재미가 뚝 떨어진다) 다시 찾아서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지 한 번 봐야겠다. 나름대로 몇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들만 메모 해두어야지. 발췌는 포기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아직도 발췌 중이다;;)

 

- 첫번째로는 이재유를 비롯한 혁명가의 삶에 대해서. 특히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의 여성혁명가들의 삶에 많은 관심이 갔다. 일제 시대 끊임없는 감시와 체포,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규율을 지키고 동지를 지키려고 한 그들의 삶에 한없는 존경심을 느꼈다. 자살하려고 독약을 마신 사람을 위세척까지 시켜서 고문하는 일제의 잔혹함이란. 그리고 계속해서 조직이 와해되는 데도 혁명운동에 조직운동이 없어도 되는 시기가 어디있느냐며, 제 2의 경성트로이카,,,경성 꼼그룹까지 끈질기게 다시 처음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혁명가의 태도를 보았다.

 

 

- 현장에 기반한 조직이 없는 조선의 노동운동 상황과 지금의 현실의 유사성. 이재유의 말이뼈 속 깊이 와닿는다. 

 

  "지금 조선 땅에는 사회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지식인 축에도 끼지도 못하는 형편이지요. 일본에 유학 갔다 오면 누구나 사회주의자요.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서 한 두권만 읽으면 누구나 사회주의자를 자처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머릿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희생과 불굴의 의지를 통한 실천 속에서 완성 됩니다. 백수건달처럼 놀고 먹으며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이론이나 떠볼리는 얼치기 사회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선의 사상운동은 그런 관념적 인텔리를 중심으로 한 파벌 운동에 불과했기 때문에 완전한 조직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사상운동이 바로 일어서려면 러시아처럼 노동자와 농민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 조선의 노동자 농민의 의식 수준은 낮기 때문에 혁명적 의식과 실천 의지가 있는 지식인들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갈때 비로소 조선의 당조직은 진정한 혁명 조직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 해방 그리고 이어진 분단 상황에서. 북한의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하는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의 주역들. 그리고 남한에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은 사회주의자들과, 남에서도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마지막 빨치산 이현상. 오래 전 읽었던 손석춘의 <<아름다운 집>>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 이재유의 일생에, 빈틈이 있었던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특히 박진홍과 결혼하면서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된 후 흔들리는 개인적 감정이, 결국 문제를 낳았다. 결혼과 아이는 역시 무섭고도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순금과의 삼각관계에서, 물론 그들은 혁명가답게 치정관계로 완전히 틀어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깔끔하지 못한 관계를 만든건 이재유의 잘못이다.

  아, 그리고 한편으로 당시 조선의 혁명가들은 자유 연애 사상을 상당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재유의 아이까지 낳은 박진홍과 그리고 이재유가 죽고 난 후에 다시 김태준과 결혼하는 모습이라던가. 다양한 여성의 모습들이,,봉건적 인습에 찌들어있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음, 이재유 그룹과 국제선의 관계라던가. 당시 그룹들 간의 논쟁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궁금한데, 언제 시간나면 <<이재유 연구>>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정말이지, 맨날 러시아 혁명에 대한 건 읽어도 조선 노동운동사를 너무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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