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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어서 블로그를 찾았다.

블로그는 아아, 여전히 그대로구나.

 

 

 

 

전희경님의 <오빠는 필요없다>,

2000년에 나왔던 석사 논문이

2007년에 새롭게 인터뷰와 작업을 더하여 책으로 나왔다.

 

하루종일 읽고서 마음이 뭉클뭉클.

아리고 쓰리고 말하고 싶은 것들이 뭉클뭉클하여

글이라도 남기고 자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맞을 수 있을까 해서.

 

2000년대 이후의 학번으로 학생운동을 했고 

현재는 20대 중반으로 여성학을 공부하는 나는

나의 위치에서 이 책을 마주하면서

고이고이 접어두었던 경험들과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어본다.

 

언젠가 [좌파, 페미니스트] 라는 포스팅을 한적도 있지만

내 인생에선 짧지만, 강렬한 각인이자 전환이었다.

학생운동도, 그리고 여성주의도 말이다.

한동안 자아분열이라는 성장통을 겪어야 했고,

적어도 조금은 내려다놓고 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1.

"내가 비판하고자 한 바로 그 언어 속에 있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나는 혹시 남자들과 '남자식으로' 싸우고 있던 것은 아닐까?(5-6)" 하는

저자의 성찰이 내게도 아리고 쓰리게 다가온다.

 

그랬다. 평생 변절않고 운동할 것 같다는 '기대'조차도 받지못했던

나는 언제나 '똑똑하고' '말발센' 남자 동료/선배들과 싸워 이기길 바랬지만

그러나 "'똑똑해지기를 열망한 만큼, 그것은 또다른 권위에 짓눌리는 과정이기도 했(39)"던 것이다.

그래, 결국 내가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다시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내가 침묵하고 있었거나 내면에서 가장 혹독하게 보았던 이들이

바로 내 옆의 '여성'활동가들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아프다.

 

2.

졸업 즈음 운동을 그만두고, 잊을만하면 뜸하게 걸려오는 후배의 전화는 무서워 받지 못했다.

또 혹시 성폭력 사건이면 어떡하지?

달리 찾을 사람이 없었던 그 후배의 입장이야 오죽했으련만

정말로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몇년이 지나서도, 가까운 언니에게 또다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때,

나는 다시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펑펑 울고 말았으니 말이다.

"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거야..왜..."

 

내가 한 노력, 내가 겪었던 경험, 그 모든 것은 재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불연속적이면서도 내게는 연속적으로 의미화되어있는 사건들과

동시에 내 자신이 피폐해지면서도 끝까지 놓지않았던 사건들이

한꺼번에 다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는 느낌, 이었다.

이조차도 지금,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은 아닐까

고민했던, 아니 고민해야만 했던 내 자신이 떠올랐다.

 

 

3.

나는 이 책에 나오는 90년대의 '영 페미니스트'  이후의 세대로

그녀들의 치열함과 헌신적인 활동 덕분에

'페미니즘 좀 아는 좌파'들과 함께 활동한 세대이다.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남자들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229)"은

실은 동일한 성별구도의 양면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가장 와닿는 부분 중 하나였다.

 

" 이 '오빠'들은 둘 다, 여성주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조직과 이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여성 활동가가 여성문제를 '담당'하고 '전문가'가 돼 '해결사' 구실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여성주의를 '인정'한다면서 '구색 맞추기'로 동원하고,

끊임없이 여성주의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면서 정답을 요구하는 남성의 행태는

여성활동가들을 소진시키고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활동했던 시절 여성주의는 여기저기 '문패'마냥 걸려있었지만,

(그 문패가 있어야 적어도 '진보'라고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니)

그러나 그 문패는 늘 그들의 집에는 같이 살지 않는 타자, '여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성주의는 타자화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한다면서 페미니스트가 커리를 짜서 세미나 시켜주길

시시껄렁한 에세이 같은 건 치우고 페미니즘의 (비판할 수 있기 위한) 핵심, 요약본을 바랬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한번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았다.

 

 

4.

저자의 성찰과 비판은 여성주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단일하게만 보여졌던 '우리' '여성주의자' 사이의 차이와 갈등들,

나의 위치를 2000년대 이후로 더 드물어진

학생운동을 했던 여성주의자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그래서 4부 흔들리는 지도를 들고 걸어가기, 가 특히 많이 와닿았다.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노동에 관심이 있다는 그 자체로 나의 역사성이 탄로나고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이 '후지다'는 뜻인 것마냥

나야말로 철지난 유행의 막차를 탄 존재로 보일까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기도 했다.

'진정한 여성주의자'인지 내 정체성을 의심받을까봐.

 

저자는 말한다.

"'일상의 정치'를 화두로 삼고 모든 일상을 정치적 문제로 토론하고 고민하려 한 여성주의자들이

이런 견해차이를 단순히 (나와 분리된) 어떤 '문제'로 거리를 두고 다룰 수 없던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여성주의는 자신이 '갖고 있는'(그래서 버리거나 바꿀 수 있는) 어떤 생각이나 견해라기보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나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처를 동반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의 살아가는 힘은,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상처와 강박으로 인해 (언젠가 페미니스트 자격에 대해 쓴적이 있지만)

자신을 비하하거나 페미니스트이기를 포기하기도 했다는 슬픈 사실.

생각해보면, "복수의 여성주의들"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었던 것은,

그 시절만큼, 아니 그보다 더 이후의 여성주의자들에게 힘들었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진정한' 여성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로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것이다.(18)"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중에서

 

 

나는 사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올바름이나 신념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그 올바름과 신념에 마음이 연결될 때,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걸게 될 때,

비로소 뭔가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갈등을 드러내고 토론하는 것이 여성주의 정치학을 성장시킬 거라는 걸 누구나 알지만,

또 여성은 동질적 집단이 아니며 여성들 사이의 차이의 정치학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누구나 느끼지만,

이 모든 것은 드러내고, 말하고,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알고 타인의 마음을 살피면서 여성주의를 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일상의 공간이 너무 분절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기억이 쓰여지고 해석되는 과정이 너무 불연속적이다.

그래서 경험과 기억의 바로 그 연속과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꾸벅.
 때로는 같은 공간에 있기에 깜빡하는 언니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도.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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