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오늘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을 얻은 고 황유미씨, 고 이숙영씨, 고 황민웅씨, 그리고 김옥이, 박지연씨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자문의 협의회가 열립니다.

 

애초에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의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며 산업안전보건공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3월 역학조사 결과가 근로복지공단으로 넘어올 때까지,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산재 신청 이후 길게는 2년, 짧게는 1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또 다시 산재 판정을 유보하고 자문의 협의회를 연다고 합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라 합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역학조사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업무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들은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 작업환경 상 백혈병 유발원인의 존재 가능성을 추정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고,
- 근무기간 중 노출된 양이 백혈병을 일으킬 만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으며,
- 업무상 원인보다 더 유력한 개인적인 백혈병 위험요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섯 명의 피해 노동자들 모두, 업무 관련성을 뒷받침할 만한 간접 사실 증거들, 즉,
- 입사할 당시 건강 상태가 양호했으며,
- 가족력 상 백혈병은 물론, 비슷한 질환의 병력도 없고,
- 근무 당시 안전보건설비나 개인 보호구가 충분치 않았거나 아예 없었으며,
- 낡은 생산 설비에서 수작업으로 일하거나, 각종 사고를 처리하는 업무를 맡거나, 과도한 업무량에 쫓기는 등, 유해요인 노출이 가중될 만한 방식으로 작업을 했고,
- 같은 사업장 안의 인접 부서에서 백혈병과 림프종 등 림프조혈기계 암 환자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 등이 충분히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근로복지공단이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연장하면서까지 굳이 자문의 협의회를 개최하는 것을 우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문의 협의회는 업무 관련성을 판정하는데 결코 적합하지 않은 기구입니다. 직접 진찰하고 치료하기는커녕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환자에 대해, 현장에 한번 가보기는커녕 웨이퍼가 어떻게 생겼는지, 런이 무엇인지, 유기용제 일사일비(141B)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업무 관련성을 판단한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여태까지 단 한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도 없고, 역학조사에서조차 숱한 정보들이 영업비밀이라는 허울 아래 감추어진 삼성반도체의 작업 환경에 대해 판단을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전문의라 하더라도 몇 시간 만에 서류 몇 장을 읽고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업무 관련성에 대해 조사하고 평가해본 적조차 없는 임상 의사들이 말입니다.

 

이런 데도 근로복지공단이 굳이 자문의 협의회를 개최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산재 판정의 책임을 몇 사람의 전문가들에게 떠넘기려는 얕은 수작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번 뿐만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자문의 협의회를 앞세워 산재 불승인을 남발해온 근로복지공단의 횡포에 고통을 겪어온 산재 노동자들이 허다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문의 협의회를 빌미로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연장하지 말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습니다. 수차례 면담을 청하고, 한달 동안 1인 시위를 하고, 보름동안 노상 농성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도대체 누가, 무슨 자료를 가지고 내가, 내 딸이, 내 아내와 남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판정한다는 것인지조차 전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 자문의 협의회가 이렇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판정할 안건은, 단지 다섯 명의 산재 승인 여부가 아닙니다. 사회보장제도인 산재보험의 이름으로, 다섯 노동자와 그 가족들 모두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할 것이냐 짓밟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이 인위적으로 숨기거나 눈감지 않는 한, 직업병으로 인정할 근거 또한 명명백백하게 존재합니다.

 

자문의사들과 근로복지공단은 진실을 진실로서, 인권을 인권으로서 직시해야 합니다. 그들이 진실을 덮고 인권을 짓밟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도 기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들이 귀기울여야 할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2009년 5월 15일
반도체노동자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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