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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환히 웃으며 돌아오세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장수하셨다. 그런데 슬프다. 너무 슬프다. 더 오래 사실 수 있었는데 … 더 오래 사셔야 하는 건데 …. 지난 5월 몸의 반쪽이 무너지는 일을 당하시고, 남은 반쪽으로 무리를 하시다가 … 몇 년 일찍 보내드린 아픔은 그래도 견딜 수 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좋은 꿈이 아니었다. 편안하게 가셨다는 병원 당국의 설명과는 달리, 그분은 악몽을 꾸고 울면서 가셨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에서 ‘서거’라는 두 글자를 본 것은 마침 그날 저녁 한겨레신문사 특강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역사를 다루기로 하여 강의안을 작성하던 중의 일이다. 멍한 머리로 기억을 애써 더듬어가며 그분이 걸어온 길을 정리하려 하였지만, 그의 삶은 곧 한국 현대사였다. 그 굽이굽이에 남긴 참으로 많은 업적과 깊은 발자취를 어찌 90분 짧은 강의안에 다 기록하겠는가? 박정희를 위협한 박빙의 대통령 선거, 납치에서의 기적 같은 생환, 다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내란음모 조작 사건, 양김의 분열과 선거의 패배, 대통령 당선, 남북 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 등 하나하나가 장편소설로 써도 모자랄 진한 이야기들로 점철된 것이 그의 생애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고 오래 기억될 모습은 입원하시기 직전의 마지막 두 달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의 민주정권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촛불이 꺼진 뒤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슬픔과 분노를 겪고도 겨우 시국선언이나 했을 뿐, 우리의 근육은 살아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으로 숨 돌릴 새 없이 세상은 거꾸로 가는데,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때 중심을 잡아주신 분은 단연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역주행을 처음 지적하고, 현재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독재정권이라 규정하고, 민주당, 진보정당, 시민사회 등 민주연합세력의 대동단결이라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터뜨린 오열이 보여주듯 가장 깊이 슬퍼하면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행동 없는 양심은 악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처절하도록 간단한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준 분은 바로 그분이었다.


위기는 이명박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말씀처럼 악의 세력과 다퉈서 이기는 것도 아주 쉽고, 지는 것도 아주 쉽다. “아무것도 안하면 지니까.” 사람들이 다 싸우는 법을 잊어버렸을 때, 그분은 꼭 각목을 휘두르지 않고도, 고문당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법을 제시하셨다. 답은 복잡하지 않다.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하고,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되고, 나쁜 신문 보지 않고, 집회에도 나가고, 인터넷에 글 올리고,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고 연부역강한 젊은이들이 “하루도 쉬지 말고 민주화, 서민경제, 남북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하셨다. 특별한 유언이 따로 없으셨다고? 그분은 온몸으로 유언을 쓰고 간 것이다. 그분은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비바람을 막아주고 뙤약볕도 막아주는 지붕 같은 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붕 없는 한데에 나앉았다. 부디 그분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탐하지 말고, 유지를 잇도록 하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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