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3)

이제, 이 '할례고백'과 같이 전형적인 후기 스타일로 쓰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먼저 이러한 말=어휘가 가진 통상적인 함의를 괄호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치부터 검토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먼저 인용한 여러 곳에서, ‘고백 confession’, ‘할례 circoncision’의 양자와 '할례고백 circonfession'과의 대치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오리지널적인 이야기=자기사(史)를 날조하고 강화하는 고백 및 할례의 제도는, '가족'적이며 '진실'을 보증한다고 데리다는 이야기한다. 그 제도에서는 나=데리다는 탄생의 순간부터 어떤 동일성을 각인되어, 아무리 여러 가지 인격상의 변천을 이뤘다하더라도 그 본질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이 이야기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정원 문턱 위 저 최초의 아침으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앞 장에서 다뤘던 고유명의 문제에 직결되고 있다. 성질이 아무리 변했더라도 '나는 나다'라는 점, 그것은 확정기술의 변화에 의존하지 않는 단독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할례고백'을 시작한 것은, 그 단독성을 교란하는 '過巻き', 소위 유령의 목소리가 있는가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서는, 할례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써의 매킨토시, 즉 컴퓨터=정보기계에 대한 언급이 행해지고 있다. 인용부분만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실은 이 '할례고백' 전체를 통해서, 펜과 매킨토시의 대치는 고백=할례와 할례고백과의 대치에 병행하고 있다. 컴퓨터로 쓰지 않는 사람들은, 할례고백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거기서는 말하자면, 기억(상기, 아르시브)의 펜적 형태와 매킨토시적 형태가 대치하게 된다. 한편으로 '고백', '할례', '진리', '가족', '펜'이라는 용어. 그리고 다른편으로 '할례고백', '반복가능 itérable', '매킨토시 셋 le bloe Macintosh'라는 은유군……. 그렇다면, 은유의 이 계열과 대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 이번에는, '할례고백' 이외의 텍스트를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되풀이 해 온 것처럼,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는 상호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해독하는 축의 하나로써, 이하 우리들은 '우편 poste'의 은유를 선택하도록 하자. 그 선택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편적 은유는 극히 초기부터 최근까지, 데리다의 많은 텍스트에서 일관되게 나타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의 최초 저작, "'기하학의 기원' 서설"에서 이미 그 은유는 나타나고 있다.(4) 후설은 기하학적 이념이 역사적 전승(탈레스가 발견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전하고, 또 누군가가 전하고...) 위에서 성립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그것에 의해 '원격 커뮤니케이션으로의 우편과 서간'이 지(知)의 구성에 대해서 하는 역할의 고찰, 이후 데리다가 사용하는 술어로 말하면, '그라마톨로지'의 고찰에 일보 전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면 후설은 전승의 불확정성을 없애버렸다. 데리다가 후설의 '초월론적 역사'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이미 검토한 것처럼 바로 그 양의성에 있어서다. 또, 같이 앞 장에서 다룬 논문 '서명 사건 콘텍스트'를 봐도 좋다. 어떤 발화가 문자 그대로인가 수사적인 것인가, 콘스터티브한 것인가 퍼포머티브한 것인가, 즉 '정상'인 것인가 '기생적'인 것인가, 그 구별을 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데리다는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그 때 들고 나온 것은 수취인이 죽인 편지의 예였다.(5) 그리고 또 데리다는 80년의 '엽서'를 필두로, 문자 그대로 우편이나 텔레미디어를 테마로 한 텍스트를 다수 발표하고 있다. 우리들이 본 장에서 이후 읽게 되는 논문 '真理の配達人(진리의 배달인)'은, 이 저작에 포함되어 있다. 우편적 은유에 갖다 붙여서 정리하면, ‘에크리튀르’는 결국, 정보의 불가변적인 동시에 불완전한 매개로 생각될 것이다. 정보의 전달이 반드시 무엇인가의 매개(미디어)를 필요로 하는 이상,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자신이 발신했던 정보가 잘못된 곳에 전해진다든지, 그 일부 혹은 전부가 도착하지 않는다든지, 거꾸로 자신이 받고 있는 정보가 실은 기록된 발신인과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내진 것이었다든지, 그런 사고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데리다가 강하게 비판하는 ‘현전의 사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사고를 최종적으로 제어가능하다고 보는 사고법을 의미하고 있다. 역으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데리다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그런 종류의 사고 가능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믿을 수 없는 우편제도’라고 말해도 좋다. 4) L'origine de géométrie, pp.36-37. 일역 47-49항 5) Marges, p.375. 논문 일역 21항.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