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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_수정_2

1. 삼성이 직접적으로 간여를 했든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삼성에서 광고를 못받을 것을 두려워했든지는 모르겠다. 이 광고를, 이렇게 단순한 책 광고를 하지 못하겠다, 언론이 두 손 두 발을 들고 있는 이유는 뭘까("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심지어 경향신문까지도 '알아서 기'고 있더라)? 이유는 "밥줄"이겠지뭐. 

 

 

2.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삼성에 대한 비리와 각종 은폐된 의혹들이 제기되었고, 같은 본질의 사안이지만 대법원이 서로 다른 결론을 낸 두 사건을 상기해 본다면 여전히 '삼성'은 진행형의 문제다. 이재용에게 모든 경영권을 넘기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들만의 진실일 뿐,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대한 본질적 문제제기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한 쪽의 완벽한 승리라는 것이 없다면, 더구나 삼성이 법적으로 세습경영의 정당을 탈환했더라도, 여전히 구린 것이 남는다. 바로 도덕성의 문제다.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아니 무리다. 그러나 조금 더 버는, 아니 아주 많이 버는 기업들은 달라야 한다. 그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이유를 단순히 그 철학적 근원을 쫒아 아담스미스에서 답을 구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가 윤리철학자라는 이유로. 하지만 아담 스미스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 탓에 그런 고상한 '촉구'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3. 그저 솔직히 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도덕성이라는 건, 상도덕 플러스 알파다. 그 알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글로벌 스탠다드'만 지켜달라는 거다. 글로벌 스탠다드, 별 게 있나? 세계적으로 자랑스런 기업이 되달라는 거다. 이게 뭐 어렵나? 거니형 살리려고 9천억씩 토해내는 화끈함을 고려한다면 어려울 거 없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저 따박따박 세금내고, 법 지키는 삼성이 되어 달라는, 그 정도다. 그저 바램일 뿐이라는 말이다. 왜?

 

나의 손에 쥐어진 삼성 핸드폰과 삼성이라는 마크가 찍힌 가전제품들을 사용하는 나약한 소비자들은 삼성이 아무리 젓가락 같은 호루라기 같은 색히라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투적 시민으로서 불매운동에 앞장서기도 녹록치 않은데다, 나의 경우에도 삼성제품을 절대 사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들 그게 지켜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에이에스, 때문에. ㅆㅂ. 그래서 우린 바램만 얘기할 뿐이다. 그리고 그 바램이 쉽게 이뤄지지 않기에 우리는 불편할 것이고, 또한 삼성에 대한 불편함은 삼성이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은 한, 아니 삼성은 망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한,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숙명의 불편함이다.  

 

4. 삼성을 까대는 책이 나오면 예전의 방식은 전량 삼성측이 사재기를 한 후, 폐기하는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최석철의 "나는 삼성왕국 무노조 경영철학의 희생자였다(도서출판 반도기획, 1997)"와 김형극의 "어느 삼성 노사관리자의 참회(도서출판 반도기획, 1997)"였다. 1997년 이후로도 '희생자'를 생각한 바도  '참회'를 한 바도 없었다.

 

그것이 오늘날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기업에 대한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할 수 없다면 그 조직은 닫혀있는 있으며, 닫혀있다면 곧 부패할 가능성이 높고, 부패할 가능성이 높다면 도덕성을 기대할 수 없다. 도덕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건, 그 기업이 스스로가 소비자 더나아가 국민의 신뢰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물건 잘 만드는 것만 기업의 몫인 시대는 끝났다. 기업과 사회가 함께 보폭과 방향을 맞추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민주주의로 이행되어가고 있는데, 자기들만 왕정을 고집하고 있다. 
 

5. 삼성에 대한 비판이 담긴 책에 대한 광고를 거의 대부분 종이신문들이 거부하고 있다. 밥줄을 건드리니까. 이 치졸한 방법 -이 정부가 그렇다- 으로 언론의 입을 막는 건, 기업이 할 일은 아니다.  돈으로 매수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물증이야 없다.

 

하지만 문제는 언론에게도 있다. 광고를 받든 못받든 간에 작금의 상황, 한권의 책으로 일어나 '필화사건'에 한 줄 논평이라도 했어야 했다. 예전 언소주만 봐도 그렇다. 광고 못내게 하고, 불매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게거품을 물고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니 마니, 그러지 않았나. 그런 용기는 어디가고, 지금은 책광고는 광고가 아니잖아요, 용철이 책은 책이 아니라 찌라시잖아요, 하며 쿨하게 책광고를 걷어차고 있다.

 

"광고받아 밥줄을 이어붙이는 언론에게 광고를 받지 말라니, 이건 대기업의 횡포와 뭐가 다르냐"고 악악댈 정도도 안되는 것이 지금 언론이다. 경향도 매한가지다. 결국 본질은 광고가 아니라 언론의 태도다.

 

6. 책 한 권 때문에 정말 가지가지 한다. 이미 살 놈은 다 샀겠지뭐. 알 놈은 다 알거라고. 삼성 안다녀도 빠구미들은 삼성 직원 보다 많으며, 삼성은 막강한 돈과 권력을 틀어쥐고 자신들만의 왕정을 수호하는데 여념이 없을 것이다. '글로벌 스탠다드'건 지랄이건, 거니형이 인정하는 것만 글로벌이며, 스탠다드다. ㅆㅂ.

 

이병철이 그의 아들에게 남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경청(傾聽)'과 '목계(木鷄)'였다. 근데 이 순서가 바뀐 나머지 '나무닭'에게는 소비자도 국민의 원성도, 그  뭣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제가 중학교 때, 제 아버지께서 이렇게 질문 하셨다.
 
"정직하면 손해본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지금 손해가 되어도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아마도 그 때가 90년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에 대해 보안사가 사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뉴스에서 본 뒤였다.
 
물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그 이전 세대가 정직해서 손해본 경험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정직해서 된장, 손해보는 경우도 있다. 통상 힘 있는 놈에게 앞에선 정직이 곧 손해가 된다. 그건 그 놈의 정직이라는 것이 자기 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겨둘 점은 그러한 손해가 지금 당장에 고통을 수반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같은 이들에게 항상 무기가 된다는 점이다.  
 
정직하게,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르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용기 있는 자들이 그런 행동을 취할 때 우리와 다음 세대엔 분명히 일깨워 주어야 한다. 정직하면 손해보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정치적, 혹은 경제적) 민주주의를 되찾는 투쟁을 아주 더디지만 천천히, 보상해 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이 책의 저자가 던지는 양심의 직언은 당분간 우리 가슴에 새겨둘 필요는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사법부가 진 손해는 막대하다.

 

 

http://blog.jinbo.net/pink/?cid=4 이 분 블로그에 삼성 관련 글들이 정리되어 있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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