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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뭘까.

한 몇 일 동안 계속 "깨달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명상도 잠시 했다. 내면에 있는 것들은 살펴보는 시간.

 

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할까?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깨달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철학과 노장철학의 공통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극단적인 약점은 그 철학의 "무기능성"에 있다.

 

부처의 "깨달음",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라는 말이나 노자의 "무위"나 사실 별 현실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면 적당히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wellbeing(넉넉살이)의 한 방편에 다름아니다. 물론 절박한 심정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선방에 앉아서!

 

결과적으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나 말씀을 들으면 그 때는 좋은 것이다. 평안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물론 지속적으로 자기가 그러한 질문을 통해 절차탁마하고 삼매에 빠져들면 또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경지는 결국 도가 "튼" 놈과 아닌 놈 사이에 차별의 간극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잘 이용하면 왠간한 사이비 종교하나는 너끈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어나갔는데, 결과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이든, 부처가 될려고 하는 이든, 마호메트나 노자, 장자, 문선명, 여호와의 증인 등등 그들을 믿는 말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꼴깝을 떨고 사는 건 매한가지다.

 

물론 깨달음의 경지는 나와 타인의 구분, 즉 경계가 사라지는 어딘가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은데 어떠한 자신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소위 대통령이든 노동부장관이든 성철 스님이든 간에 진정코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인가)받게된 공인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부처는 거리낌과 걸림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유인이다. 

 

근데 그것이 어떠한 자유를 주는지는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가 "대자유인"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러한 깨달음이 진정한 이 사회의 자유를 줄 거라고 생각치 않는다. 물론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자유, 자기세상의 구축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점은 인생살아가면서 필요하다고 본다.

 

자유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자기의 통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얻을 때 그게 자유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백날 가져봐야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게 또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는 자기통제라는 등식도 한참 생각 후에 던져 버렸다. "사회"라는 문제가 개입되는 한 그러한 등식은 웃끼고 자빠진 소리에 불과하다.

 

아직도 깨달음에 대해서 미련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계속 생각은 이렇게 흘러간다. 탄압과 불의에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열반으로 보는 것이 맞는지, 수십년간 수행 끝에 납자들과 신도들의 추앙을 받으며 박정희의 서슬파란 칼 앞에서는 별 말이 없었던 성철 스님의 열반을 진정한 해탈로 보는 것이 맞는지.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고도의 경지는 전태일과 성철이 유사하나 문제는 그 모양새가 좌탈입망이냐 아니냐가 아닌, 누구를 위해 열반의 길을 갔는가가 핵심이다. 아직도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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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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