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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생명 : oikozoe [oikozoe@kornet.net]

민중과 생명      - 김용복 -

 

韓國生命學硏究院

 

<머리말>

 

민중신학은 성경과 민중학을 연계하면서 민중의 생명을 일으켜세우는 기독적 학문이라고 규명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민중신학과 생명신학을 연계하려고 한다. 동시에 민중신학을 민중학과 연계하듯이 생명신학을 생명학과 연계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민중신학과 생명신학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일은 약간의 진척을 있었지만[1] 앞으로 더 발전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민중학과 생명학의 연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민중과 생명을 연계하여야 하는 가? 지금까지 민중신학은 생명의 문제가 민중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포괄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민중신학이 민중의 사회전기 또는 민중의 사회경제적 차원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민중의 생명과 민중의 공생성(Conviviality)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생태학이나 생명공학이 민중의 문제를 초점으로 다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생태학적 문제나 생명공학의 문제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민중신학은 생태학과 생명공학의 문제에 대하여 유기적인 접근을 시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과 생명의 유기적인 연계성을 신학적으로 논하고 이를 민중학적, 생명학적 차원에서 총체적인 접근을 제시하려고 한다.

 

민중신학은 역사뿐 만 아니라 우주(거시/미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민중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한다. 이것이 민중신학의 명제이다. 민중은 사회적 역사적 실체일 뿐 아니라 생명적 우주적 실체이다. 생명이 우주적 실체라면 민중은 곧 생명이고 생명의 핵심적 실체이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과 생명을 공히 그리고 연계적으로 논하기 위하여 시공(지정학)의 개념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것은 宇宙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근대적인 문리학의 개념만이 아니다. 이 개념은 집 즉 생명의 거처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희랍어로는 OIKOS를 말한다. 1) 이 집은 코스모스(Universe)를 의미한다. 이 집은 천지삼라만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2) 이 집은 또한 지구라는 지정학적 거처를 말한다. 지구위의 모든 생물이 거하는 곳이다. 전통적으로는 이 집을 天下라고 불렀다.  3) 그리고 그다음의 집의 형태는 민족적 차원의 정치경제이다. 4) 이 집의 기초로서 지역마을의 거처를 들 수가 있으며 나아가서 생명공동체의 기반으로서 가족공동체의 공간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5) 생명개체의 창원에서 말한다면 몸이 곧 집일 것이다. 생명은 이런 다차원의 집에서 起居(Dwell)한다.

 

위의 지정학적 구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않고 서로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위 지정학적 구도의 우주적 지평과 지구적 지평, 사회경제적 지평과 지역적 지평은 서로 융합되여 있다. 생명은 바로 이 지정학적 융합 속에 존재하고 그 織組 속에서 산다. 생명은 몸이라는 집, 가정이라는 집, 지역공동체외 민족공동체라는 집, 지구와 우주라는 집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구도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조합된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의 문명에서는 太極의 우주론이 지정학적 구도를 결정하였고 그리스문명에서는 희랍철학이 그 지정학적 구도를 결정하였다. 시대적으로는 농경사회에서는 지역적 자연의 지정학이 지배적이었고 산업사회에서는 현대과학적 지정학이 지배적이었으며 오늘은 <가상세계Virtual World>의 지정학이 지배적일 전망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지구화의 과정이 전개되어 그 정점에 달하고 있다. 우리는 민중과 생명문제를 취급할 때 이런 지정학적인 조합과 구도를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성경적으로 민중과 생명을 연계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의 지정학과 민중-생명.

 

민중은 땅의 사람들이다. 민중은 땅을 일구어 생명의 정원을 가꾼다. 성경의 창조론은 민중론이다. 창조론은 창세기, 시편, 이사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등에서 확연히 들어 나지만 성경전체를 통하여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선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는 <노동하는 인간> 즉 땅을 가꾸는 인간의 창조가 그 절정을 이루고 있음과 동시에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인간생명을 창조하는 가정을 이루고 생명의 정원을 이루어 가꾸어 나가고 경영하는 것이 창조이야기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창조론의 지정학적 배경은 우주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바벨론 제국과 같은 제국적 궤도를 의미한다. 이를 테면 창세기의 창조론은 바벨론 제국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바벨론 제국은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는 <흑암과 혼돈>세력으로 표상되어 있다. 동시에 인간이 노동의 고역을 하게 된 근원적 요인은 인간이 이세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민중과 생명은 바벨론 제국이라는 공동의 지정학적 위치에 공히 처하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벨론제국 아래에서 민중의 생명과 삶은 생명의 지정학적 정치경제(OIKONOMIA)에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을 가질 수 있다. 민중은 생명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으며 생명은 민중적 운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으로 민중을 통하여 생명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명>이 생명에 대한 이해의 근원적 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문제를 민중의 생명과 삶을 떠나서 취급한다고 했을 때 생명의 정치경제적 성격을 다룰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바벨론제국의 지배에서 민중을 탈출시키는 출애급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요 동시에 생명을 파괴하는 <흑암과 혼돈의 질서>를 극복하고 <생명의 정원>으로서의 창조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다. 민중의 해방과 생명의 보전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중심에 공히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 그럼으로 생명은 민중적이고 민중은 생명적이다. 민중적 시각 없이 생명은 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생명의 지평을 떠나서 민중[2]을 이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계약(Covenant with All Living Things)을 맺으셨다[3] 이 계약은 홍수로 인한 재해에 의하여 생명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루어 졌다. 말하자면 치수문명과 연관되어서 이루어 진 계약관계이다. 노아의 홍수는 홍수라는 자연재해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이는 인위적인 요인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표현하여 준다.  홍수를 다스리기 위하여 인간은 바벨탐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적 문명(Despotic Civilization)을 일으켰다. 우선은 홍수를 제압하려는 토목기술을 발전시켰고 민중을 수단화하고 억압하는 노예제도를 만들었으며 신격화된 절대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한 전체주의 체제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홍수에 대비한 인간의 잔존이 명분이었다. 우리는 이것은 잔존 이데올로기(Survival Ideology)라고 부르겠다. 인간의 잔존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일이든지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잔존을 위하여 생명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치수문명에서의 자연정복의 모티브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의 신은 민중의 이름으로 그 전제체제를 비판하고 생명을 정의(Covenant)의 법 아래에서 영원히 보전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생명과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계약과 이 계약을 토대로 한 하나님의 생명의 지정학(Geo-politics of Life)은 바벨탑의 지정학과 대조된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잔존이데올로기가 민중을 억압하는 체제로 전개됨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계약은 민중해방의 계약임을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지정학은 생명과 민중을 공히 축복하고 해방하는 지평인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출애급의 지정학에서도 여실히 들어 난다. 출애급기의 계약법은 안식년의 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곧 안식일의 계명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도 생명의 창조 즉 생명의 지정학과 노예의 해방 즉 민중의 해방은 밀접히 연관된다.[4] 이 출애급의 지정학에서 우리는 출애급의 재앙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히브리노예를 억압하는 대가로서 갖가지 생명파괴의 재앙이 도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재앙은생명의 질서 창조의질서를 파괴하는 질서 이다. 결국 에집트문명의 지정학은 피라 밑으로 대표되는 치수를 위한 토목기슬을 발전시키고 방대한 노예제도를 이룩하며 바로(Pharaoh)체제라는 절대전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생명지정학은 출애급사건으로 전개되는 데 이는 사회적 안식뿐 아니라 생명의 안식으로 연결된다.

 

희년의 지정학

레위기 25: 땅의 안식

샤론의 지정학: 이사야 11장과 60

메시아의 지정학

결론: 카이로스의 지정학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나님의 무소부재

 

2. 민중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민중과 성령의 결합은 민중과 생명의 결합이다.

민중을 위한 말씀(/정의)은 창조의 법이다.

3. 민중의 주체성과 생명의 주체성은 공히 이해된다.

모든 생물의 공생 (conviviality)적 주체의 차원안에 민중공동체적 차원 (동활체=Koinonia)이 연계통합되어 있다. 생명의 주체성은 민중의 주체성의 연속이다.

만물(생명)의 신음과 민중의 신음은 공히 죽임의 세력 때문이다.

공생의 도와 적자생존의 역리가 공존/모순관계에 있다. 이것은 생명계 전체에 공존과 잔존의 질서가 삼투되어 있음을 한다.

4. 우주적 메시아는 민중의 메시아이며 동시에 민중의 메시아이다.

4.1. 창조의 이야기와 신천신지의 이야기의 지정학적 동시성을 논한다. 이 지정학은 생명의 동산과 새 생명의 동산을 위치한다.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과 22.

4.2. 도교/유교적 동양적 우주관과 힌두교적 우주관은 생명의 우주적 유기성을 주창하고 있다.

 

5. 민중의 개념의 총합성은 생명의 총합성과 같다.

 

0. 지정학 민중과 생명체는 처참하다: 히로시마원자탄의 예

1.정치경제: 잔존의 질서/ 산업화와 시장화

2.식품계 : 기아/식품오염

3.의료계 :의료의 시장화/유전자 공학상품

4.사회계: 초국적 기업체의 신 다윈주의/무한경쟁적 적자생존론

5. 정치계: 지구제국주의억압

6.문화계 : 문화의 상품화와 정체성의 위기, 가치관의 와해, 미적 감성의 혼선과 피폐

7.종교계 : 종교적 근본주의:달릿의 메타포어

8.생태계 : 생태계의 파괴와 공해

 

 

6. 생명의 축제 (요한계시록21장 처음)

 

생명의 영이 가득찬다.

생명의 빛은 죽음의 그림자를 거둔다. 이것이 생명의 지정학이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삶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

생명의 꽃이 핀다.

생명은 우주의 샬롬 위에 번성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참여한다.

생명의 정치경제는 정의롭고 풍요롭다.

생명의 축제는 삼라만상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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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남동등 여러 민중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취급하였다. 해방신학에서도 생태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Eco-feminism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신학들이나 신학자들 학자들은 억압을 극복하는 문제와 생명문제를 연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2] 여기서 우리는 한국말로 생명과 삶이 구분되어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생명은 삶을 사는 실체임으로 서로 구분할 수 없다. 영어로 LIFE는 양자를 공히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과 삶을 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창세기 9 11-12. 모든 살아있는 것과의 계약

 

[4] 출애급기 21 1-11, 20 11절의 안식년의 법과 안식일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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