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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또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

 

공(公),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또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


최형묵 (본 연구소 운영위원 / 천안살림교회 목사)


1. 민중신학적 사회윤리의 가능성  


윤리적 사고를 하지 않은 이에게서 윤리 사상을 이끌어내는 일이 도대체 가당한 것일까?

안병무는 ‘기존 체제’ 또는 ‘이미 정착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로서 윤리 내지는 도덕 관념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도대체 윤리, 도덕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정착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가 아닌가? 그러면 누가 이 질서를 만들었는가? 그것은 언제나 강자 즉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윤리는 지배자의 논리로써 피지배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설정된다. 그것을 보다 심화시키면 도덕이 되고, 더 나아가 강제화하면 법이 된다. 그러므로 도덕, 윤리, 법, 그 모든 것이 지배자의 도구가 되어 피지배자에게 무조건적인 순종 또는 복종을 정당화한다.”1)

그러니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운운한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 될 것이다.

대가의 사상을 후학들이 계승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흔한 하나의 방법이



  그의 사상을 요리조리 해체 분석하여 재구축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신학의 역사 자체가 그렇다. 성서가 구원론을 말한 바 없는데, 신학자들은 당연하게 성서의 구원론을 말한다. 예수가 교회론을 말한 바 없는데 역시 예수의 교회론을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말하는 것도 그러한 시도에 해당할 것이다. 장본인은 그저 ‘육담’으로 말한 것뿐인데, 후학들은 그것을 논리로 재구성하여 하나의 논을 만들어낸다. 이를 어쩌나?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것만 말한다’는 식의 태도2)를 전제할 것 같으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어떤 해석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면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말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적어도 민중신학자로서 안병무의 사상을 논하는 데서는 그렇다. 안병무는 명백히 탈윤리적 탈도덕적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원래 텍스트의 맥락과 다른 맥락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언제나 가지고 있다. 이 때 재해석이란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말하여진 것을 다른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논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전제에서이다. 그런 전제에서 말할 때 안병무의 민중신학 사상은, 우리가 ‘윤리적’이라 말할 만한 발상의 실마리를 분명히 내장하고 있다.

 ‘윤리적’이라? 안병무 사상에서 그 단초가 무엇인지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사용하는 ‘윤리적’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밝혀야겠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영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회윤리’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때 사회윤리란 인간 실존의 필수불가결한 틀인 사회적 질서 구조의 큰 맥락에서 제반 윤리적 관계를 다루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 실존의 모든 관계 속에서 책임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개인, 집단, 사회 등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촉진시키는, ‘제도에 의해 매개된 구조적 질서’를 문제 삼는 것이다.3) 물론 이 경우 사회윤리는 그것이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지 그 자체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배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고, 탈지배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다. 안병무가 지배자의 논리로서 윤리를 배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말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탈지배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해방의 윤리에 해당하는 셈이다.4)


2.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 윤리 사상을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는 것은 ‘공’(公)이다. 물론 그와 같은 이론적 개념적 장치가 없다고 하여도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질서 구조의 맥락에서 논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 근거 삼아 충분히 안병무의 윤리 사상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안병무는 ‘공’ 개념으로 민중신학적 윤리의 확실한 징검다리를 마련해 주었다. 안병무에게서 ‘공’은 돌발적 상상의 소산이 아니다. 1980년대 중후반 어느 순간부터 빈번하게 등장하는 ‘공’ 개념은 당대 민중운동과의 깊은 교감에서 나온 심각한 고심의 결과이다. 민중신학에서 하나의 사회윤리적 거점으로서 ‘공’이 갖는 의의는 다음과 같은 안병무의 주장에서 시사되고 있다.

“나를 그 동안 지배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엄청난 민중사건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를 ‘국시’라도 되듯이 굳혀가는 마당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민족통일이라는 민중적 염원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공’(公)이라는 사상이다. 우리 민중은 ‘공’을 사유화한 것과 싸우고 있다. 그것이 독점 세력과의 투쟁이다. 공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폭압이 자행된다.”5)

자본과 권력이 독점화된 당대의 현실에서 민중적인 염원을 집약한 것이 바로 ‘공’이었다. 그런데 당대 민중들의 염원으로서 ‘공’은 사실 신학적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민중신학은 “하느님 나라는 곧 민중의 나라”라는 인식을 매우 당연시하고 있지만, 당연시하는 만큼 그 관계가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다. 안병무는 그 자명하지 않은 관계를 깊이 유념했던 것 같다. 사실 안병무가 보기에 예수에게서 그의 본질적 메시지였던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나라와 동일시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자명하지 않게 된 데에는 예수 자신에게서 그 양자 관계가 자명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민중사건 안에서 민중과 동일시된 예수에게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구체상을 구구하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 당대 상황에 처하지 못한 후대의 해석자의 입장에서 양자 사이는 여백의 지대로 남게 되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안병무는 서구 신학의 책임을 묻는다. 서구 신학은 묵시문학과 하느님 나라 표상을 동일선상에 놓고 해석하였고, 동시에 묵시문학을 상대화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마저 상대화해버렸다고 본다.6) 서구 신학은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평가절하함으로써 사실상 그것을 제거해버렸다. 그 까닭은 그 하느님 나라가 안락한 삶을 비판하고 깨뜨리기 때문이었다.7) 여기에서 서구 신학은 하느님 나라를 역사 피안으로 돌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삼아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나라 때문에 자신의 삶을 위협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것이 민중들의 염원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려 애초 예수에게서 자명했던 그 관계가 불투명해져버렸다.

안병무가 ‘공’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바로 그와 같은 불투명성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현재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 바로 ‘공’이었다.8) 그래서 안병무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뭐냐? 그것은 公을 公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나 모든 걸 포함해서 사유화함으로써 분열되고 찢겨진 그것을 다시 공으로 돌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거예요. 하느님 나라를 자꾸 정신화해버려서 피안적이고 관념화된 그런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입장에서는 있을 필요도 없어요.”9)

안병무가 보기에 주기도문은 자명한 하느님 나라의 요체를 집약해주고 있다. 주기도문에서,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늘의 뜻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과 빚을 탕감 받는 것으로 구체화되어 있다.10) 그 염원은 매우 물질적이다. 물론 여기서 물질적이란 역사적ㆍ사회적 관계의 차원을 함축한다.11) 그러니까 독점적인 사유화에 기초해 있는 제반 사회적 관계가 ‘공’의 관계로 바뀌는 것이 곧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 된다. 한마디로 ‘공’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이다. 그것은 물질과 권력을 본래의 생산자에게 돌림으로써 민주주의적 제도와 공유제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공존 공영하는 생태학적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전망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전망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불어 이 세계를 창조한 하느님이 그 동반자로 일하는 인간을 선택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분명한 고백에서 비롯된 것이자 동시에 그 하느님의 주권은 민중의 주권으로 구체화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12)

‘공’(公) 개념으로 하느님 나라를 역사화하고 있는 안병무의 이와 같은 전망은, 앞서 말한 대로 1980년대 민중운동의 시대정신을 공유한데서 비롯되었다. 특별히 매우 급박하게 대안을 요구하였던 당시 민중운동과의 깊은 공감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안병무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는 교회라든지, 어떤 사회체제라든지, 어쨌든 기존의 어떤 것과도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싸움 속에서 지금 그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고 또 그 싸움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민중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사람은 동적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상(像) 즉 스테투스(status)를 원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런 안목에서 ‘구체적인 상(像)’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3) 이것은 분명히 당대 민중운동의 현실을 직시한 데서 나온 견해이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비단 1980년대 민중운동의 현실에서만 비롯되는 발상은 아니다. ‘공’으로 표상될 수 있는 제반 사회적 관계의 상이 이미 예수시대 예수 자신과 민중에게서 자명했다는 견해는 그러한 전망이 민중의 원초적 염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민중의 염원이란 일종의 가시적 대안의 요구이다. 그것은 ‘제도에 의해 매개된 구조적 질서’의 구체상으로서, 현실의 제반 관계를 지배하는 독점적 사유화를 해체하고 공유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민중들의 언어 자체가 곧바로 ‘공’으로 표출된다는 뜻은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고 빚진 죄인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그 염원을 안병무는 ‘공’으로 표현하고 그 밑그림을 그렸다. 이로써 땅의 사람들에게 한동안 범접 불가능해 보였던 하느님 나라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이제 하느님의 나라는 개념상 ‘공’을 매개로 역사 안에서 그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역사 안에 있는 인간들의 행위 규범으로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3.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


신학적 윤리란 인간이 역사적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한계를 승인하는 데서 형성된다.14) 하늘의 계시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불가불 역사적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수용된다. 안병무가 민중이 바라는 바 ‘구체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 표상으로 ‘공’을 제시한 것도 사실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에서 그 인간 유한성의 표현인 윤리가 절대성을 참칭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 때 윤리는 안병무가 말했던 대로 ‘지배자의 도구’가 된다.15)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내지는 윤리적 거점으로서 ‘공’은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는 위험이 없을까? 그 위험성이 있다. 사실은 하느님 나라 자체가 그런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서구신학의 역사에서 단지 부차화되거나 배제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존하는 교회 또는 지배체제와 동일시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공’의 이념 또한 그와 같이 될 가능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공유제의 이상이 거꾸로 지배이념이 되어 인민을 배반한 근대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떻게 그런 전도가 가능한 것일까? 하느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공’ 역시 일종의 공백의 기표다. 사실 공백의 기표는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오히려 의미를 지닌다. 이미 기존의 것으로 충족된 현실을 비판하는 근거로서 그것은 제 몫을 다한다. 그러나 그 공백의 기표는 끊임없는 유혹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다. 그 공백을 누군가 전유하러 든다. 기어코 그 공백에는 어떤 대체물이 채워진다. 하느님 나라가 현실의 교회와 동일시되고 지배체제와 동일시된 현상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안병무는 그것을 독점적 사유화에 저항하는 민중이 그것을 전유하도록 ‘공’으로 설정했다. 공백의 기표를 민중의 입장에서 선점한 셈이다. 그러나 인민의 이름으로 행해진 독재의 역사적 경험은 그것마저 안전한 장치가 되지 못한다는 회의를 제기한다. 그것 역시 다양한 해석, 심지어는 상반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일종의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의 은유인 탓일까?   

우리의 고민은 바로 이 점이다. ‘공’으로 하느님 나라의 구체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중의 난관에 봉착했다. 그 난관은 한편으로는 ‘공’ 역시 그 자체로 구체성을 지니지 않는 일종의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의 은유라는 데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역사 안에서의 구체성의 표상인 ‘공’이 절대화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결국 이 난관을 해명하지 않고서는 신학적 윤리의 거점으로서 ‘공’의 의의는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4. 탈/향(脫/向)의 인간사와 ‘공’(公)


사실 안병무의 사상을 단순하게 집약했을 때, ‘공’은 그 자체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 위치가 매우 불안정해 보인다. 민중신학자로서 안병무의 사상적 기저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편 가운데 하나로 나는 “탈-향의 인간사”16)를 주저 없이 꼽겠다. ‘탈’(脫)은 과거와 단절하는 행위이며 자신의 삶을 보장해주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다. 그것은 소유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삶의 보장을 내던지는 것이다. ‘향’(向)은 궁극적 목적을 말한다. 그러나 ‘향’은 목적지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다. ‘향’은 도상의 존재를 나타낸다. 목적을 가진 나그네의 길, 그것이 ‘향’의 형태이다. 결국 ‘향’은 ‘탈’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삶의 양태를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정착자의 윤리’는 설자리가 없다. 서두에 이미 밝혔듯이 안병무가 윤리와 도덕을 배격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공’은 명백히 궁극적 목적에 해당하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로서 성격을 지닌다.17) 그러나 한편 ‘공’은 가시적인 상을 요구하는 민중의 염원의 표상으로서 성격을 지닌다. 이미 지적한 대로 안병무가 그와 같은 착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대의 시대적 ‘압박’ 요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착상이 시대적 요구만이 아니라 민중들의 원초적 염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껄끄러운 이물질로 치부할 수는 없다.

결국 하느님 나라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동적인 ‘탈향의 길’에서 정적인 관계의 차원 혹은 ‘제도에 의해 매개된 구조적 질서’의 구체상으로서 ‘공’의 의의를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이다. 어쩌면 우리가 ‘난관’이라 불렀던 ‘공’의 이중적 성격 또는 그 위치의 불안정성 자체가 신학적 윤리의 거점으로서는 무척 다행일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구체상을 지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구체상의 절대화를 방지하는 모순적 기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공’은 한편으로는 이 땅 위에서18) 펼쳐지는 운동의 궁극적 목표이자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야 할 사회적 관계를 지시하는 표상으로서 이중적 성격이 훼손되지 않을 때 신학적 윤리의 거점으로서 진가를 지닌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그 이중적 성격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강조점이 어디에 주어져야 할지는 미리 확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 조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결정될 일이다.

이 주제에 접근하는 동안 내내 나의 뇌리를 맴도는 하나의 기억이 있다. 30여 년전 우리 가족의 탈향(脫鄕)의 기억이다. 고향을 등지라고 누가 등을 떠미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것은 명백히 강제적 이탈이었다. 이촌향도(離村向都), 그것은 자발적 선택의 결단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살아갈 근거를 다 잃었기에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그 때 온 가족을 사로잡은 꿈이 무엇이었을까? 빚 없이, 먹고살 것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막내둥이 나에게는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의 독려가 있었다. 나는 정말 걱정 않고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꿨다. 그러나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질 턱이 없었다. 서울 생활 내내 한 집에서 춘하추동을 살아보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소년에게 걱정이 떠날 턱이 없었다. 그만 하자! 자발적 선택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에게는 순례 그 자체가 커다란 기쁨일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내몰려 이리저리 방황해야 하는 이에게는 정착지를 만나는 것이 기쁨이다. 송곳 하나 꼽을 땅이 없는 민중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민중의 염원으로서 ‘공’은 그런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나는 이 ‘공’에서 안병무의 이중성을 본다. 지식인 신학자로서 안병무와 민중의 증언자로서 안병무의 동요와 갈등을 본다. 궁극적 목적으로서 ‘공’의 성격이 지식인적 고민의 표현이었다면 민중의 염원의 구체상으로서 ‘공’의 성격은 민중의 대변자로서 고민의 표현이었다. 그 이중성은 학자로서 불처저성 내지는 모호성을 말한다기보다는 민중적 지식인으로서 진지성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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