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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


 

 

기절한듯이 버스를 타고, 또 그렇게 내려서

즐겨찾는 구석진 곳에 가, 텅스텐 불빛의 운동장 아래에서

담배를 피고, 여전히 꿈속이었다가.

고은에게 전화가 왔다.

29.97fps로 셋팅을 해도 되냐는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10분뒤에 정확한 답변을 주겠다고 말한뒤

림에게 전화를 걸어, 논리적인 이유를 물었고, 한참 뒤에야

나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어서 또 고은에게 전화를 했다.

그 뒤로도 3번쯤 전화를 받았고,

캡쳐가 안된다는 그녀의 말에,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너무 조바심이 들었고, 그 초조함때문에

현관문을 열자마자 기절한듯 잠을 청해야 겠다는 굳은 의지는

몇시간째 서성였다.

마침 씨네21에서 서른살쯤 되는 어떤 편집기사의 경력을 읽은 뒤였고

나는 되지도 않는 촬영을 하느라, 진짜 색온도로 전체 톤도 일관성이 없는

촬영본을 보면서, 다시는 촬영을 하지 않겠다라고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고은의 전화는 앞으로의 일이 더 문제라는 경각심을 일깨웠던 것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미친듯이 자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벨소리 모드상태의 전화는

저 멀리 있는 나를 깨우고, 보고싶지만 만나고싶지 않은 몇몇 이들의

전화를 받지 않느라 잠에서 깨버렸다.

 

몇가지 악몽들을 지속/반복.

삼청동에서 들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원인이였으며

나는 죽는것이 모두들 위해 평화를 가져다 주는 진심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날 처음으로 먹은 밀가루 덩어리들이

내 입속에서 뜨겁게, 그렇게 허기를 느꼈다.

표준적인 윤리들을 어긴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나는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 어쨋든 그것은 윤리이다.

의처증과 폭력 그리고 자살로 이어지는 이 진부한 내러티브앞에서

나는 왜 가슴을 움켜지는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지.

가증스럽게 상처받은 척 해야 했던 그 몇년전의 일들이 늘어진 재생테잎처럼

내 앞에 펼쳐지는데.

토할것 같은 그날의 공기는 역시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침마다, 28살의 여름이 시작되고.

아직도 학생인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고, 상업영화 감독이 되고 싶지만,

될 수는 없는 이 명확한 현실적인 판단들 앞에서

아트하겠다고, 프랑스 부르조아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는

단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겠다고 나비의 꿈을 꾸는

모든 영화과 학생들과는 무언가 달라야 한다고.

그래. 영화는 내게 있어 예술이 되서는 절대 안되며

이것은 크레인 기사가 매일, 크레인 레버를 작동하는 것처럼 

하나의 직업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최선을 다하는 순간 도대체 내가 왜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

까뮈는 시지프스처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희망없는 희망을

가져야한다는 그 실존주의적 대처방법을 말하는데.

나는 까뮈도 싫고 까뮈의 관념론을 비판하는 피펜하임 싫다.

 

그렇다. 내가 가진, 여러개의 가면들중. 그나마 가장 칭찬할만한 것은

그녀로부터 수혜받은 가공할만한 자제력과 침착함, 절제력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방식인데.

이렇게 내가 불안정하고 감정의 파고를 건너뛰는 이 무자비함은

모두 그녀를 만나지 못한 탓이라고, 그것도 도대체 얼마큼의 긴 시간인지

헤아릴수 없는, 6개월동안이나 그녀를 보지 못했기때문에

나는 다시 머리가 돌아버릴만큼 불안정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화가 난다.

내가 가진 이 취향, 지금도 플레이 되고 있는 이 스팅의 음악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공책아래 적어내린 빽빽한 그녀의

홈메이드 자필편지.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면.

난 도대체, 이 작고 못생긴 남자아이에게 나에 대한 사랑을 광풍처럼 변화시켜

그 내면적인 사랑을 쏟고 있는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몇년 전 새벽녘에 너가 필요하다는 그 간절함을 한마디의 말로 정리시킨

그녀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그래. 시애틀에서 장장 6개월동안에 내게쓴 그녀의

편지는 수신자가 잘못 적혀진 그에 대한 연애편지였으며. 도대체 그를 너무

사랑한다는 그 홈페이드 자필편지 앞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편지가 도착할때마다 연필을 꼭꼭 눌러쓴듯한 그 필체 앞에서 나는 건성으로

편지를 읽고 아무렇게나 방구석에 어느곳에 방치해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미친듯한 정서 불안과 애정결핍은

어쨌든 그녀를 만나서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명징한 사실들 앞에서

이번주쯤 그녀를 만나고, 다시 가공할만한 자제력과 침착함을 수혜받아

좀 차분하게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그렇게 결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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