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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所乘之

 

김기섭(두레생협), <지역자립의 경제학을 위하여> 중

 

노자 도덕경 불사편(不徙篇)

 

小國寡民에 使有什伯之器而不用하고 使民重死而不遠徙하여
雖有舟車나 無所乘之하고 雖有甲兵이나 無所陳之하며
使民復結繩而用之하여 甘其食하고 美其服하며 安其居하고 樂其俗하여
隣國相望하며 鷄犬之音이 相聞하되 民之老死하더라도 不相往來니라.
 

그렇게 많지 않은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조그만 지역사회에서는,
문명의 혜택들은 많이 있어도 그것이 별 도움을 주지는 않고,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소중히 여겨 멀리 헤매고 다니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빠른 교통수단이 있어도 별로 타는 일이 없고,

무기와 군대가 있어도 쓸 일이 없으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인격적 신뢰에 기초한다.
사람들은 그 음식이 맛있다 하고, 그 옷이 아름답다 하며, 기거하는 곳이 편안하다 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닭과 개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웃한 나라가 가까이에 있어도
천수를 다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필요없이 서로 왕래하는 법이 없다.

 

 

앙드레 고르, <자동차의 사회적 이데올로기>, <<에콜로지카>> 중

자동차의 대안은 전 지구적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자동차를 단념할 수 있으려면 그들에게 좀 더 편한 집단 대중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전혀 교통기관에 의지해 이동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는 동네나 마을이나 도시에 있어도 아주 편하게 느낄 테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직장에서 집으로 기꺼이 걸어서 퇴근하면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걸어서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에 산다는 불행, 그리고 어디 있어도 편안하지 못하고 오직 일하기 위해서 아니면 고립되어 잠을 자기 위해서만 도시를 잠시 지나쳐가는 불행을 제아무리 빠른 교통수단이나 도피수단도 보상해주지 못한다.

 

동네나 마을이 다시 예전처럼 모든 인간활동에 의해, 인간활동을 위해 설계된 소우주가 되어 거기서 사람들이 일하고 긴장을 풀고 학습하고 소통하고 움직이고 모듬 살이의 환경을 다 함께 관리해가야 한다. 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낭비가 철폐되고 난 뒤에 사람들이 여유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마르쿠제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대도시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시들을 다시 세울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은 소일거리가 되겠지요."

 

노자와 고르.

김기섭씨의 절묘한 해설의 덕이 크지만...

지역과 교통에 대한 입장에서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는 게 재밌다.

 

생각해보니, 위의 노자의 유토피아[小國寡民] 서술에서 처럼...

고르도 <에콜로지스트선언>에서 유토피아를 묘사하면서...

첫머리에 교통수단(자전거!)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했었다.  ㅎㅎ

 

아무튼 결론은...

자고로 자동차는... 無所乘之... 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 ㅎㅎ

 

 

이어지는 김기섭씨의 해설을 좀 더 인용하자면...

 

  2,000여 년이 지난 옛날, 수많은 나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터지게 싸움질하는 난세 속에서, 시골마을의 한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말 한마디이다. 노자사상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지만 이 글을 경제적 시각에서 나름대로 이해해 볼 때 두 가지 중요한 초점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멀리 떠돌지 않는다[不遠徙]’이다. 앞귀절인 수많은 문명의 이기[什伯之器]란 백성으로 하여금 멀리 떠돌게 하는 이기이며, 그 구체적 예가 뒤 구절에 나오는 배와 수레[舟車] 같은 것이다. ‘멀리 간다[遠行]’와 ‘멀리 떠돈다[遠徙]’는 분명히 다르다. 경제적 시각에서 볼 때, 꼭 필요한 사람이나 지역에게 나와 우리 지역이 생산한 재화와 용역을 건네주러 가는 것은 가는[行] 것이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나와 우리 지역이 생산한 결과물을 팔러가는 것은 떠도는[徙] 것이다. 어디에 누가 얼마만큼을 살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지역내보다는 지역 외부를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 생산 결과물이 배나 수레에 실려 잘 뚫린 길을 통해 타지역으로 수송되지만, 그 기은 단지 물자의 교역만이 아닌 무기와 병사의 진군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노자 할아버지의 불원사(不遠徙)를 현대의 경제적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생산과 소비의 익명성, 생산지와 소비지의 원거리성의 극복을 의미한다. 
 

 

  두 번째 초점은 복결승(複結繩)이다. 결승이란 새끼를 묶는다는 뜻으로, 문자가 없고 계약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표식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자가 이미 존재하여 사용되었던 당시에 결승으로 되돌아가자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문자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문자로 인해 발생한 인간관계의 변화에 대해 문제제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자는 인간의 뜻을 알리고 관계성을 확인시켜 주는 매체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문자라 함은 경제상의 계약관계를 맺게 하는 매체이다. 따라서 문자를 버리자 함은, 비인격화된 계약관계를 버리자 함이며, 결승으로의 복귀는 인격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계약관계로 되돌아가자는 뜻일 것이다. 소자(蘇子)가 주석하기를 ‘사소민박(事少民樸)에 수결승(雖結繩)이라도 가의(可矣)’라 한 것은 이러한 의미 때문이다. 즉, 자신과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생태적, 사회적 제관계를 무시하고 행하는 경제행위[=有爲의 경제행위]가 적고 따라서 그러한 경제활동을 행하는 백성이 순박할 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는 결승이라는 간단한 표식만으로도 모든 경제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별 부족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자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복결승이란, 현대의 경제적 시각으로 볼 때, 경제관계의 인격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원사(不遠徙)와  복결승(複結繩)의 경제활동, 그것은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명확하고 그  교역의 범위가 넓지 않으며 모든 경제관계가 인격적 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제가 실현 가능한 곳은 적은 백성으로 구성된 작은 나라, 즉 지역사회일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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