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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신개발독재 정권", 대학교수의 안이한 진단 / 2009. 01. 23.

"MB는 신개발독재 정권", 대학교수의 안이한 진단
 
[안일규의 Talk About] '87년 늪'에 쓴소리 던진 한 20대가 "정답"
 
안일규
 
 
  지난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한겨레 시민포럼의 발제자로 나선 정상호 한양대 연구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개발 독재정권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한 원인이 명확치 않은데 그나마 "성장제일주의를 내걸고 강력한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권력집중을 추구한다"고 한 데서 그나마 정 교수의 원인분석을 찾을 수 있었다.
 
  이어 정 교수는 검찰과 경찰의 역할의 증대, 다수당의 입법독재, 보수언론의 여론 독점에 의존하는 것이 신개발 독재의 특징이며 인사 편중과 수도권 집중, 신공안정국을 신개발 독재의 징후로 분석했다. 또한 신공안 정국에서는 "법과 권력을 이용해 비판을 원천 봉쇄한다"고 주장했다.
 
신공안정권? 이명박 정부를 확대해석한 결과일 뿐
 
  분명한 건 이명박 정부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뽑힌 정부란 데 있다. 정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신공안정국'이자 신개발독재 정권인 이명박 정부를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신공안정국'을 조성한 신개발독재 정권을 뽑아줬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은가.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국민들은 시계의 추를 과거 권위주의 시절로 되돌리지 못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지난 20일 자 '한겨레 시민 포럼'에 대한 기사.     © 한겨레 인터넷판
 
  그럼 현재 이명박 정부의 현상의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명박스러운' 발상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뇌로 들어간다. 이 문제는 분명한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야당'이 없다는 데서 시작한다. 여당 다음으로 지지율이 높은 정당은 "무당파"다. 촛불집회, 입법전쟁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무당파" 지지율의 상승이 뚜렷하다. 당연히 이명박 정부에게 야당의 존재란 없다. 당선 직후 첫 행보로 '강한 야당'이 될 줄 알고 찾아갔던 민노당 심상정 비대위도 없다. 이미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에선 지워진 상황에 민노당 의석은 반토막났다. 총선에서 '공룡 여당'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개혁한 게 없다. 광우병 쇠고기, PD수첩,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굴욕적인 친박복당과 지지율의 급격한 추락이 벌어졌고 그동안 손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하염없이 치솟던 촛불집회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해결되었다. 역습은 필연이다. 어차피 맞을 거 다 맞았다. 남은 건 밀어붙이는 것이다.
 
  힘도 없는 야당과 대화할 시간은 없다. 다수결로 해결하면 된다. 촛불에 데였는데 야당과 합의해주고 끌려다닐 이유가 없다. 여당에서 말 안들으면 때리면 된다. 여당을 거수기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MBC? KBS? 방송장악? PD수첩에 정권이 뒤흔들렸는데 그깟 방송 하나 못잡으면 언제든지 정권은 무너질 수 있다.
 
  정권이 앞으로 언제든지 또 흔들릴 수 있다. 잃을 건 다 잃었다.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기에는 자신도 없고 시간도 없다. 그럼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친정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충성인사'들을 각료로 배치하고 '형님인사'도 앉히면 된다.
 
  야당의 반발은 제압한다 하더라도 또다시 촛불집회가 일어날까 두렵다. 처치방법은 간단하다. '공포'를 주면 된다. 공권력을 동원하고 악법을 만들어서 조금만 행동해도 아에 불법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뒤집지 못한다. 뒤집지 못하면 곧 '식물인간'이다. '살인정권'이 되서라도 뒤집어야 한다. 국회와 방송을 '장악'하고 촛불을 든 국민들에게 '공포'를 조장하면 된다. 이것이 '명박스러운' 발상이다.
 
  그런데 통하지 않는다. 국회 장악은 친박계 때문에 여당 단속부터 실패했고, 방송장악 또한 아나운서들이 뛰쳐나와 쉽지 않다. 공권력을 동원하고 온갖 법들을 동원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선사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통하지 않는다. 권위주의로 시계 추를 돌릴 수 없음을 증명한다. 정 교수의 주장대로 신공안정국에 기반한 '신개발독재 정권'이 될 수 없다.
 
'진보+중도 야당'이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 발전? 터무니 없는 주장
 
  <한겨레>에 의하면 정 교수는 MB악법 저지 과정에서 "민주당-민노당-시민단체 연대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시민단체와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공동기획단을 만들어 다가오는 선거에 대한 포괄적 비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민생민주국민회의가 있다.
 
  정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은 '87년 체제'에 기반해있다. 앞서 현 정부를 신개발독재 정권이라 규정하고 09년판 국본인 민생민주국민회의와 같은 단체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87년 체제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사고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곧 "현 정부는 반 민주세력"이며 반 한나라당, 반 MB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뻔한 '답'을 들이민다. 그 결과는 지난 2007년 대선에서의 패배의 재탕이다. 여기에 진보진영의 공멸을 가져오는 게 지난 대선과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한 20대 방청객이 "이념, 정책적 공감대에 기반하지 않은 '반 이명박 연대'는 눈앞의 승리를 위한 야합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비판한 데서 모든 게 정리되었다.
 
  이에 정 교수의 답변은 가관이다. "역사적으로 진보세력과 중도야당 세력이 연합할 때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는 진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엄연한 왜곡이다.
 
  정 교수가 지칭하는 '중도야당'은 지난 정부서 국가보안법 폐지발언 번복, 이라크 전투병 파병,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발언, 비민주적 한미FTA 추진과 반대세력 탄압, 삼성 프랜들리으로 '한나라당 3중대'스러운 역할을 수행해 "민주화의 배반"을 낳았다. 남북 관계 또한 대북송금특검, 남북관계를 북핵문제와 연계한 이회창식 남북관계로 바뀐 한미정상회담으로 미사일과 한미FTA 등과 연계해 인도적 지원을 중단해 대북제재에 동참하는 등 햇볕정책에 난도질한 이들이었다.
 
  민주화가 되면 서민대중이 잘 살 것이라는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이들과 진보세력이 연합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퇴행'이자 '민주화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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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귀환'만이 미네르바를 위한 길이다 / 2009. 01. 11.

'정치의 귀환'만이 미네르바를 위한 길이다
 
[주장] '정치의 부재'가 만든 미네르바, 정치고민 없는 미네르바는 실패작
 
안일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경제위기가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 한국에선 서민들이 어디가든 "IMF때보다 더 힘들다"며 아우성이다. 그래선지 여러 사람들이 "경제 공부하고 있다"며 자랑처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네르바'의 출현은 신드롬으로 직결될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다. 지금의 결과를 낳은 레이건, 대처, 월가 등에 대한 고민이 없다. 정치의 부재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없다는 게다. 
 
  미네르바 체포에 대한 논쟁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미네르바를 강만수의 경제교사로 채용해야 한다"라거나 "장관이 미네르바만도 못하다" 혹은 '주가지수 500' 등 그의 예측에 대한 시시비비 가리기,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논쟁, 미네르바의 진위여부에만 골몰할 뿐이다. 미네르바 출현에 대한 고민이나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요인'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결여돼 있다.
 
미네르바는 '정치의 부재' 최대 수혜자이자 피해자
 
  미네르바는 한국의 '정치의 부재'에서 나타난 인물이다. 지난 민주정부 10년에서 파탄낸 민생, 극에 달한 주주자본주의, "펀드복지"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지난 10년이 만든 '정치가 사라진' 장소에서 나타난 인물이다. 그의 글은 앞으로 경제전망, 서민들의 '펀드복지' 투자방향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내 펀드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서민들의 걱정에 가장 큰 해답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미 나가 떨어진 '빈곤층'을 어떻게 줄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해답은 찾을 수 없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잘못된 사회를 살아가는 데는 답이 되었을지 몰라도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데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다. 이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답'을 던져준 미네르바는 폭력적인 시장방임주의 정책에 의한 '물질만능주의 사회'의 최대 수혜자였던 셈이다.
 
  미네르바에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갈 '무언가'는 발견할 수 없다. 그의 글에서 '정치'는 찾을 수 없었다. 이 상황에 이르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을 찾을 수 없었다. 정치가 사라진 장소에서 꼭 구해야 할 명약이 없었던 게다. 당장은 그의 처방을 듣고, 그의 처방을 모방한 마케팅을 통해 서민이나 기업들이 돈을 벌 수는 있었을련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이런 상황이 재현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정치적인' 미네르바가 없는 한 미네르바는 "팥 없는 팥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그가 구속됐다고 한다. 이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란 주장들이 많다. 바로 정치의 문제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가 문제야"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저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었다'에 그친다. <오마이뉴스> 보도에 의하면 그가 구속되는 데 적용된 법이 '전두환 시절에 만든 법'이라 한다. 법조 전문가들은 "사회정의와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마저 권력에 눈치를 살폈다며 큰 실망감을 보였다(오마이뉴스)"고 한다. 바로 '정치'의 문제다.
 
  미네르바는 '폐쇄된 관료체계' 문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롱의 대상이 된 '만수'는 장관이며 '인터넷 경제대통령' 미네르바는 평범한 사람인 것도 '정치'의 문제다. 관료들이 일반인들보다 못하다는 것도, 그런 관료들이 행정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치'의 문제다.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으로 묶인 폐쇄적 관료체계의 문제가 바로 '정치'의 문제이며 미네르바를 양산한 것이다.
 
정치에 대한 진정한 고민없다면 미네르바는 '실패작'
 
  한국의 경제위기를 만든 핵심문제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입한 것은 지난 '민주정부 10년'이었고 현재 미국발 금융위기도 레이건, 부시 등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근원이다. 유럽 대륙계에서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영국도 이 위기의 근원은 대처리즘에서 시작되었다. 반면 큰 문제없는 북유럽은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든 좌우의 '무지개 내각'이, 최근 대안 카드로 떠오르는 남미는 '차베스'라는 민중적 영웅의 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자세와 각각 다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정치'의 문제이자 '정치에 의한' 것이다.
 
  학벌만능주의, 폐쇄된 관료체계, 경제를 '이따위'로 만든 것까지 미네르바를 통해 정치의 문제를 깊게 고민할 소재를 많이 던져줬다. 미네르바에 '정치의 귀환'이 없는 한 '미네르바'는 "반짝"일 뿐이다. 미네르바의 날카로운 경제평론을 정치평론으로 바꿔줄 이가 없는 한 미네르바에게 '봄'은 없다. 미네르바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갈 '무언가'는 정치의 귀환으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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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데까지 간 MB, 결국 '제왕적' 대통령이 문제 / 2008. 12. 31.

갈데까지 간 MB, 결국 '제왕적' 대통령이 문제
 
[안일규의 Talk About] '책사'들의 고언, "보수세력의 적은 '내부'에 있다"
 
안일규
 
 
  갈 데까지 갔다. 진보진영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파시즘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이른바 'MB악법'과 '이념법안'들로 따지자면 그럴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민주 대 反민주’ 구도로 되돌렸다. 게다가 민생민주국민회의는 2008년판 국본이다. 87년의 재림이자 진보진영이 정치의 ‘추’를 20년 전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진보성향 종이신문 <한겨레>와 <경향>의 ‘책사’ 여현호 논설위원과 이대근 에디터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이다. 진보진영의 책사로서만 아니라 보수진영의 책사도 자처한 ‘책사’들의 지난 칼럼에서 당선 1주년이 된 이명박 정부와 보수진영에 대한 고언을 살! 罹만 앞으로 이명박 정권이 나아갈 비전이 ‘선하게’ 나타난다.

조급함과 위기감이 만들어낸 “MB악법”

  촛불집회와 광우병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반격’이 시작될 즈음 이 에디터는 칼럼 <질주하는 18%>에서 이미 지금 벌어지는 현상에도 적용되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당시 KBS 사태와 현재의 미디어법 강행추진에 대해 이 에디터는 “MBC 'PD수첩' 프로그램 하나로 정권이 휘청했는데, KBS를 못 잡으면 정권 잡은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 지난 8월 경향신문 이대근 국제에디터의 칼럼     © 경향신문 인터넷판

  이 에디터는 이 문제를 이명박 정부의 낮은 지지율로 연계해 “비전으로 시민들을 재결집시키고 이견과 반대를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며, 작은 성공사례라도 만들어 지지를 조직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이를 포기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자기 권력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조급성과 위기감이 지금과 같은 문제를 만들었다는 게 이 에디터의 진단.

  이 에디터는 여기서 권력집중과 친정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결과 밀어붙이는 것밖에 없다. 이 에디터는 칼럼에서 “여야간 합의니 대화니 하며 야당에 끌려갈 거면 왜 고생하면서 총선을 치렀”나며 “국회를 장악해야 한다”며 이 대통령의 속뜻을 간파한다. 이 에디터가 말한 이 대통령의 속뜻대로라면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파시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간접적으로 틀렸음을 보여준 것.

“이 대통령, 다 버려라”

  이 에디터가 지적했던 친정체제는 이명박 정부에서 갈수록 고착화되고 있다. 고소영, 강부자, 강만수와 최시중 등 “이명박과 아이들”을 연상하게 할 정도다. 내부에서는 ‘명박찬가’를 부르기에 바쁘고 외부에서의 사퇴 압력은 ‘지나가는 개 쳐다보듯’ 한다.

  이에 여 논설위원은 이 대통령의 친정체제에 대해 일갈한다. 당선자 신분일 즈음 칼럼 <이명박, 외로워져야 한다>에서 당선자에게 냉정해져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측근도 버리고, 공신도 외면해야 한다”며 고언했다. 그는 덧붙여 “외로워지더라도 자신을 도와줬다는 사람이나 세력에 휘둘리지 말라는 얘기”라며 후보 당시 내건 실용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 “정권교체의 주역이라고 자처하는 기존 보수세력으로부터도 거센 저항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여 논설위원의 충언은 묵살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정권의 판박이, 지금이라도 盧 정권 반면교사 삼아야”

  여 논설위원의 ‘친정체제’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칼럼 <10년을 준비했다더니 …>에서 여 논설위원은 친정체제를 “그런 ‘끼리끼리 인사’”는 “다른 목소리가 귀에 닿지 않으니, 일이 제대로 매듭지어지기 어렵다”면서 “지지세력의 실망은 국민의 외면으로 이어지고, 정국 주도층은 갈수록 소수화된다”며 노무현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주문했다.

  당시 칼럼에서 여 논설위원은 “당선자 주변에선 ‘아니오’라고 말할 이도 많지 않다”면서 “당선자의 개성이 워낙 강한데다, 자리와 정책적 배려 등 집권 초의 온갖 권력이 집중돼 있는 탓이다”고 말했는데 한나라당과 청와대 내부에서 이명박 대통령만 바라보고 있는 현 상황에 알맞은 문구다.

  여 논설위원의 이 대통령에 대한 고언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제왕적 대통령 현상에 있어 똑같은 현상을 보였던 노무현 정권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당선 1주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여 논설위원의 고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에 여 논설위원은 “몇 해 뒤 지금처럼 후회를 남길 이유는 없지 않은가”며 보수진영에 되묻는다. “‘또다시 잃어버린 10년’을 하고 싶은가”를 돌려 말한 게 아닐까.
 
▲ 지난 9월 18일 자 한겨레 여현호 논설위원의 칼럼     © 한겨레 인터넷판

“한나라당이라도 살려라”

  평소 여 논설위원의 이와 같은 주장은 칼럼 <한나라당이라도 살려라>에서 한 발짝 더 나간다. 제왕적 대통령에 의한 ‘거수기 여당’을 꼬집은 것이다. 칼럼에서 여 논설위원은 최근 제도권 정치가 불신의 대상이 된 것에 대해 “기껏 쌓아올린 우리의 민주주의가 다시 큰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는 얘기”라면서 집권세력이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편향 논란 당시 여당의 어청수 경찰청장 경질 건의를 정부가 묵살하고 친이계 의원들이 홍준표 원내대표 사퇴 요구한 사례를 들며 “그렇게 여당의 리더십에 상처를 입히고, 청와대의 말만 고분고분 듣는 ‘시녀’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면 정당 정치는 살아날 길이 없다”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내 친이계 의원들을 일갈했다.

  그는 칼럼 말미에 언론장악 시도와 촛불집회에 대한 탄압을 들면서 “남은 길이라도 열어둬야 한다”며 한나라당이라도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고언했다. 이같은 여 논설위원의 주장은 이 대통령은 국회를 장악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친박진영에 야당 역할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이 에디터의 고언과 다르지 않다.

“보수세력의 적은 ‘내부’에 있다”…키는 이 대통령이 갖고 있어

 이 에디터는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한 보수진영의 장기집권에 보수세력이 ‘적’이라 말한다. 진보진영이 보수세력 장기집권의 위협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바로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다급한 보수진영의 ‘박근혜 수혈론’을 의미할 것이다.

  전자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 에디터는 “국민통합, 신뢰의 회복, 포용적이고 유연한 사고, 정치의 존중”을 주문했다. 이 대통령이 후보당시 내건 방법들이다. 이 대통령이 키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 정권 좌초 자격 갖춘 박근혜, 초대장 받지 마라"

  이명박 대통령 당선 1년간 보수진영의 또 다른 이슈는 ‘친이’ 대 ‘친박’이다. <이명박의 박근혜 딜레마>에서 이 문제를 논했던 이 에디터는 먼저 정부에 박근혜 전 대표를 포용하라는 보수진영 인사들의 주문에 “협력은 좋은 것, 갈등은 나쁜 것이란 이분법에 의거한 위험한 주문”임은 물론이며 보수정권의 몰락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친이진영에게는 “박근혜와 합치자면 권력이동도 각오해야”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얼굴마담 이명박의 박근혜 정권의 등장도 점친다.

  친박진영이 경선 탈락과 공천 학살을 겪으면서 무소속과 당내 비주류로 시베리아 벌판에 던져졌다 총선과 촛불집회를 통해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을 뒤흔들었고 국민들로부터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하라는 부름을 받은 결과 복당은 물론이거니와 이명박 정권을 좌초시킬 수도 있는 ‘밤의 대통령’이 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짚어낸 셈.

  이 에디터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 “이 난장의 한 가운데 뛰어 들어봤자 이명박 구출도 못하고 자신도 수렁에 빠질 수 있다”고 고언함과 동시에 실패한 노무현 정권의 정동영, 김근태, 천정배, 정세균을 예로 들며 보수진영에 “박근혜에게 초대장을 보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한다. 그는 다시 “박근혜가 여당내 야당으로 남을 기회를 줘야 한다”며 이명박 정부 견제를 맡을 사람에 ‘박근혜’밖에 남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이 칼럼에서 그는 “이명박정권 말기에도 누가 더 효과적으로 반대하고 비판하고 견제했는지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면서 박근혜 전 대표에게 ‘야당’ 역할을 할 것을 강력하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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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 재구성 통한 '야당 교체'가 답이다 / 2008. 12. 29.

진보진영 재구성 통한 '야당 교체'가 답이다
 
[안일규의 Talk About] '책사'들의 고언, 민주당 해체와 박근혜 야당 필요
 
안일규
 
 
  이명박 대통령 당선 1주년과 집권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좌파정부 척결’ 1년이 지났음에도 야권 세력은 이명박 당선 전이나 직후,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다. 1년 전이나 지금에서나 ‘大실패세력’과 진보진영은 한 목소리로 이명박 정부를 군부독재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했다고 말할 뿐이다. 앵무새보다도 못한 이들에게 ‘대안야당’ 운운하는 건 사치다.
 
  1년 전 ‘묻지마 대통합’에 쓴 소리를 던졌던 진보진영의 대표 언론인들의 당시 발언을 지금 다시 읽는다면 어떨까, 그들은 지금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나. <한겨레> 여현호 논설위원과 <경향>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의 지난 2년간의 정치칼럼을 정리해 현 상황에 적용 분석, 대안을 찾아내고자 한다. 흉흉한 연말에 진보성향 종이신문에서 ‘진보진영의 책사’로서 여 논설위원과 이 에디터의 “말·말·말”을 살펴보자.

“大실패연합 · 이명박 정부의 일등공신”과 손잡는 건 ‘죽음’  

  지난 대선 정국 이대근 에디터는 <신당, 그 무덤에서 아무도 초대말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을 ‘99% 열린 우리당’으로 규정하면서 정체성 상실을 당시 범여권의 진짜 문제로 짚었다. 이 ‘99% 열린 우리당’은 실패세력이 똘똘 뭉쳐 질서있게 구축한 것이므로 ‘대실패 연합’이며 존재의 가치가 없다고 진단했다. 의사라면 당시 범여권에 ‘사망선고’ 내린 셈이다. 이 에디터는 수위를 한 층 높여 대통합민주신당을 ‘무덤’으로 규정하고 “대통합에 참여하는 순간 ‘죽음의 키스’가 될 것”이라 했다.  
 
▲ 지난해 9월 12일 자 경향신문 <이대근 칼럼>     © 경향신문 인터넷판

  이 에디터의 1년 전 비판은 현재에도 적용되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번 대통합은 ‘미완의 대통합’이기에 “민노당까지 아우르는 게 ‘진짜’ 대통합”을 위해 ‘大실패연합 시즌2’를 위해 뛰고 있고 민노당은 ‘민주당 사람’ DJ의 말을 냉큼 받아 그들의 적이던 ‘99% 열린 우리당’과 죽음의 키스를 준비하고 있다. 이 에디터의 말로 고친다면 “파탄난 지난 10년 정권의 생존자들의 모임”이 당장 살기 위해 만든 ‘잔당’과 진보진영이 손잡아 파탄의 길, 공멸의 길을 스스로 두드린 셈이다.  

  여 논설위원도 간접적으로 이 에디터와 비슷한 논조를 견지한다. 칼럼 <이명박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의 높은 지지율을 “이명박의 반대편”에서 찾은 여 논설위원은 이명박의 반대편에 대한 불신이 이명박에 대한 불신보다 더 컸다고 말한다. 문국현 후보와 민주노동당도 국민들에게는 ‘노무현과 그 비슷한 자들’로 뭉뚱그러져 있기 때문에 지지율이 정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당시 이 에디터가 대통합민주신당을 ‘무덤’으로 규정한 것으로 연결되는 셈.  

  여 논설위원의 칼럼은 암묵적으로 결국 이명박의 ‘반대편’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이명박 정권이 무너질 수 없다고 한다. 이 에디터의 ‘야당 교체’ 주장으로 연결되는데 칼럼 <불안한 세상, 평온한 민주당>에서 이 에디터는 “민주당은 어울리지도 않는 이명박과의 싸움에서 물러나야 한다”며 “실패한 세력과 실패하고 있는 세력의 대립은 짜증이 날지언정 흥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덧붙여 “다수의 서민들도 민주당을 자신들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이명박을 위해서라도, 정치에 실망한 이들을 다시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하는 세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야당 교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형식만으론 안 돼, 내용과 가치가 있어야”  

  여 논설위원의 다른 칼럼 <최악의 시나리오>는 경선이라는 형식만으로 감동을 이끌어내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범여권에게 ‘착각’이라며 꼬집었다. 反한나라당 전선을 통해 51:49 드라마를 연출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정치공학으로 표를 모은다는 자체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정작 국민이 보고 싶은 ‘내용’이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 지난해 9월 10일 자 한겨레 여현호 논설위원의 칼럼     ©대자보

  여 논설위원의 명쾌한 비판은 현재에도 적용되고 있다. ‘反 한나라당’은 국민이 보고 싶은 ‘내용’이 될 수 없으며 ‘전선’이라는 ‘형식’만으로 여 논설위원의 말대로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내용’도 없어 왜 한나라당이 아닌 민주당이나 반 한나라당 전선을 지지해야 하는지 이유도 없다. 그 결과 전라도에서 박근혜 지지율이 20%에 달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이 에디터도 여 논설위원의 진단에 같이 한다. 이 에디터는 칼럼 <신당, 그 무덤에 아무도 초대말라>에서 민주정부 10년 이후 ‘죽음의 잔치’ 속에서도 자기 원칙과 노선, 정책을 지켜나가면 최소한 ‘미래가 있는 패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진보진영의 책사’로서 여 논설위원과 이 에디터는 진보진영에 ‘반MB’(당장의 문제)에 얽매여 소신없이 反 한나라당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실패한 세력과 손잡지 말고 진보진영의 노선과 가치를 제대로 정립하라는 주문을 한다. 제대로 정립할 경우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패배는 하더라도 ‘올바른 패배’이자 ‘미래가 있는 패배’가 될 것이다.  

야당 자격없는 민주당 대신 ‘박근혜’에 '여당 내 야당' 기회 주고, 진보 재구성 통한 '야당 교체' 준비해야 

  한국의 보수독점구도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당의 노선은 ‘상대적 진보’를 통한 개혁적 보수 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이는 IMF 이후 지난 10년간 무너져왔고 여기에 완전한 파괴를 가져온 이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다. 이들은 개혁에 대한 열망의 추동력을 ‘삼성공화국’과 매판자본의 세상으로 만들었고 이명박 정권 창출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이들이기도 하다.  

  개혁노선을 이미 상실하고 한나라당의 ‘잃어버린 10년’을 해결해준 민주당은 더 이상 고쳐 쓸 수도 없는 상태다. 이 에디터가 말하듯 민주당은 시민들의 시야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통해 시민들은 민주당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이미 ‘죽은’ 세력을 다시 대안정당으로 인정할 수 없고 이들에게 정권을 다시 맡길 수 없다. 개혁과 민주를 염원하는 유권자들에게 진보정당을 찍을 수 있도록 민주당이 스스로 민주당을 해체하는 것이 지지자에 대한 마지막 도리다.  

  그런데 이는 실현 가능성 ‘0%’다. 이 에디터가 지적한 대로 민주당은 ‘파탄난 지난 10년 정권의 생존자들의 모임’이다. 노선, 이념, 가치 어느 것 하나 없는 ‘뱃지’ 하나 바라보고 모인 “뱃지동맹”으로 정당이 아니다. ‘대실패연합’에 환멸을 느껴 떠나간 개혁적 유권자를 흡수해야 할 민노당이 “뱃지동맹”과 손잡는다면 한 줌이라도 남은 대안정당으로서의 가치마저 상실하게 된다.  
 
▲ 이대근 에디터의 지난 24일 자 칼럼     © 경향신문 인터넷판

  결국 좋든 싫든 원내에서 박근혜에게 ‘야당’의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 이 에디터는 칼럼 <이명박의 박근혜 딜레마>에서 박근혜에 여당 내 야당 역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하는데 “박근혜가 덜 보수적이거나 더 유능해서가 아니”며 “민주당은 그럴 정치적 자격을 잃었고, 그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박근혜가 남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명박이 싫지만 지난 10년간 '실패한 세력'을 찍을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할 수 있는 ‘박근혜’에서 투표의 재미를 찾은 것일 뿐이다.
 
  18대 국회 야당은 ‘여당 내 야당’ 박근혜 세력이 하고 다음 총선에서 의미있는 의석 확보와 대권 득표를 위해 민주당의 소멸과 진보진영의 재정비를 해야 한다. 하나의 경우로 그나마 민주개혁세력의 역할을 다한 임종인, 최재천, 김근태 전 의원의 개별적 입당을 통해 개혁을 열망하던 떠나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진보정당을 찍을 명분을 주고 분당 이후 정책적, 노선적 ‘차이’를 입증하는 데 실패한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심상정 · 노회찬” 중심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사실상 개혁세력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보진영이 이들을 흡수해 진보진영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만이 ‘보수 다당제’로의 변화에 유일하게 제동을 걸 ‘Hidden Card’다. 진보개혁의 위기가 아닌 개혁의 종말과 진보의 기회다. 진보진영이 이 기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그때는 진보의 위기를 논할 자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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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 <절반의 인민주권> 서평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갈등, 이익, 정당,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최대의 인민주권'

E.E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은 정당론 고전으로 갈등, 이익, 정당, 민주주의가 이 책의 키워드다. 첫 키워드 ‘갈등’에는 가담자와 구경꾼이 있고 이 구경꾼이 늘어날수록 갈등의 성격은 크게 변하며 갈등의 사회화가 이뤄진다. 이러한 갈등은 파당적인 성격을 갖고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균형은 언제든지 변한다. 여기서 정치역할은 이러한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다.

 

   
  
갈등의 종류를 줄이거나 혹은 바꾸거나 배제하는 등 갈등을 이용하려는 것이 정치다. 저자는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 최고의 권력수단”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대안의 정의는 갈등의 선택을 의미하고 갈등의 선택이 권력을 배분하기 때문”이라고.

갈등을 관리하거나 대안을 정의할 이로 ‘정당’과 ‘이익집단’을 상정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익집단 체제를 말하는 다원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여기서 두 번째 키워드 ‘이익’이 등장한다. 이익집단의 편향성은 상층계급적 성향을 보이고 농촌 지역 조직에 참여하지 않은 농민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임을 보여주면서 책에서 그는 대략 인민의 90% 정도는 이익집단 체제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다원주의자들 주장처럼 이해관계자 개념이 강조될 경우 갈등은 협소해질 것이고(가담자와 구경꾼의 관계에서 구경꾼은 배제될 것이며)다수의 지배와는 멀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의 종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익집단 정치를 갈등의 사회화 중 하나로 보며 특수(사적)이익을 형성하고 약자들의 작은 이익들은 갈등의 사회화와 힘의 균형을 변화시키기 위해 공적 권위를 기대한다. 공적 권위의 기능은 갈등의 범위를 넓혀 사적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키워드 ‘정당’은 이익집단 정치의 대안카드로 나타난다. 저자의 관점에서 정당의 역할은 유권자들이 선택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정부를 제대로 운영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정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보통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고 묻는 저자의 네 번째 키워드 ‘민주주의’로 넘어온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리더십과 조직의 역할이며 대중이 개입할 수 있고 공공정책 대안들이 부상하게 하는 갈등이 근간”이라 말한다. 민주주의 이론에서 현명한 출발은 보통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 정치에 있어 갈등ᆞ경쟁ᆞ리더십ᆞ조직이 핵심이며, 정당과 정치지도자가 사회화된 갈등과 좋은 대안들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최대의 인민주권이다.

한국의 ‘정당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샤츠슈나이더의 고언

이 책은 현 정치이슈 측면에서나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갈등은 없애야 할 것이며 정당정치는 패거리 정치란 주류정치담론이 팽배한 지금, 갈등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고 정당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정당론 고전을 대표하는 한 학자의 주장에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다원주의의 영향에 의한 이익집단 중심의 정치에 대해서는 소수의 상층계급집단과 친기업 집단만 체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10%에도 미치지 못할 수준의 노조 조직률(한국의 노조조직에는 상층노동자 중심으로 기층노동자들은 배제되어있다)과 한 재벌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해 정책을 집행하는 대비되는 두 현실의 암울함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정당을 멀리하고 이익집단 정치를 활성화하는 것이 답이라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의 영향력 행사 범위는 정당정치에 비해 제한되어있고 규모가 작아 정치적 동원 효과도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선거에서 기업가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노동자는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듯 이익집단의 힘만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

저자가 강조하는 경쟁의 측면에서도 정당이 이익집단보다 더 경쟁적이며 선거에서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조직이다. 기업과 정당의 관계에서 미국의 공화당이 이익집단에 ‘압력’받는 게 아니라 먼저 친기업적 태도를 취했을 뿐이며 ‘압력’이 아니라 이익집단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이 삼성공화국을 만든 것도 총선 직후 내걸었던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친기업적 태도에 적용할 수 있다. 기업계 역시 한나라당에 ‘압력’을 넣는 것으로 보이지만 저자의 관점대로 전경련과 같은 기업집단들은 한나라당이 자신들과 다른 정책을 추구하더라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은 이익집단의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정당과 경쟁하기 때문이자 미국의 기업과 공화당의 관계, 조직 노동과 민주당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적 정당체계와 전국적 정당체계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지역주의와 전국정당화가 민주화 이후 정치담론 전면에 나타났던 한국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주의가 정당조직의 약화와 억압을 가져온다면 정치의 전국화는 전국적인 정치조직 수요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갈등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차원의 정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난 결과 가운데 하나는 “특정지역에 편향되지 않은 전국적인 유권자와 전국적인 다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정당들의 짧은 수명과 허약한 정당체제, 민심과 괴리되면서 다수의 지지에 기반하지 않은 한국 정당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정치체제의 한계로 ‘투표 불참’ 문제를 제기한다. 투표율이 나날이 낮아지는 한국에서 그가 제기하는 ‘투표 불참’ 문제는 시대적인 시사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높아지는 투표 불참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데 시민들의 상당수가 정치체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며 정치 세계의 확장을 제한하는 투표불참이 큰 영향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 이 원인을 찾아내는가. 정치, 정당, 정치인에 대한 공격에서 찾았다. 미국에서는 저자가 평소 비판해왔던 1920년대 진보주의 운동이자 지난 10년간 한국정치에 팽배한 반 정치담론을 투표불참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경쟁이 정부와 기업간 균열이란 균열AB를 대표하고 지배담론이 됨에 따라 대안적 균열이자 억압된 균열인 CD를 원하는 사람들이 투표불참 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여기서 투표불참 한 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다. 한국의 균열에는 민족문제가 대표균열이 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문제, 사회경제적 문제에 의한 균열은 한국의 기존정당에 의해 억압된 현실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당선자가! 배제된 이들을 일정부분 동원해냈지만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노력 통한 억압된 균열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이들은 배제될 것이며, 한국은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균열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보수적인 유권자들만 행복한 선거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2008년의 절반의 인민주권,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절반의 인민주권」은 인민주권이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태동의 관점에서 보장되는 게 아니라 대안과 갈등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에 의해서 최대의 인민주권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촛불집회에 많은 교훈을 준다.

 

지금과 같이 시민이 정부를 통제하지 못하는 데는 갈등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아서라는 그의 지적은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정당의 역할로 경쟁하고 갈등을 관리하며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 것은 현 한국정당들의 과제를 제대로 지적했다. 정당의 이러한 역할을 통해 배출한 지도자나 정부는 ‘제 갈 길 가는 대통령’이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정부’가 될 것이다.

내가 저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기업국가의 결정타 ‘삼성공화국’ 문제와 현재 한국에서의 이익집단 정치, 론스타와 같은 외국 투기자본, 다국적기업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고언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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