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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다큐멘터리<소풍>

봉도각 할아버지들의 세상
영화 속의 노년(97) : 다큐멘터리 <소풍>
텍스트만보기   유경(treeappl) 기자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가면 '봉도각'이라는 곳이 있는데, 정자와 연못이 있는 운치 있는 곳이다. 지난 해 가봤더니 신기하게도 아주 오래된 옛 건물을 어르신들이 모이는 경로당으로 쓰고 있었다. 언제부터 경로당으로 사용하셨느냐고 여쭤보니 어르신 한 분이 높이 걸려있는 현판을 가리키신다.

"저 글씨가 400년쯤 됐을 걸!"

현판에는 한자로 '경로소(敬老所)'라고 쓰여 있었다.

어르신들은 그저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면 으레 '봉도각 노인정'으로 오는 것으로 알았다고 하셨다. 마을의 다른 어른들도 모두 그러시는 것을 보며 자랐다는 말씀이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한 쪽에 겨우 자리잡고 있거나, 단독건물이라 해도 아주 비좁은 경로당만 보아왔던 내게 '봉도각 노인정'은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싸고 있는 너른 마당과 울창한 나무숲을 지닌 멋진 곳이었다.

이 '봉도각 노인정'의 할아버지들(이곳에는 할아버지들만 모이신다)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혼자 웃었고, 괜히 콧등 시큰해 애꿎은 얼굴만 문질렀다.

'봉도각 노인정' 할아버지들과 홍남희 감독
ⓒ 홍남희
70세가 훨씬 넘은 맏아들 부부와 함께 사는 91세의 홍 할아버지.
식사하실 때도 러닝셔츠 차림은 어림도 없는 깔끔한 분이시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도시에 사는 자식에게로 가지 못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72세인 며느리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시아버지 식사 챙겨드리느라 맘 놓고 어울려 놀지도 못하는 이 '늙은' 며느리는 아직도 '새댁질'을 한다며 하소연을 한다.

80세의 남 할아버지는 평생을 술로 살아오셨다. 그러니 아내의 지청구와 구박에는 인이 박혔다. 노부부는 쉴 새 없이 말싸움을 한다. 자식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두고두고 잔소리를 듣는 할아버지는 '한심한 세상'이라며 세상탓도 해보고,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래도 웃는 얼굴만은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

변 할아버지는 78세.
5일장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들이 10년은 아래로 볼 정도로 정정하시다. 예전에 자식 생각해서 이혼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시는 할아버지는 오래 전 사별을 하셨는데, 여자들에게 붙임성도 좋으시고 여전히 관심이 많으시다.

이 세 분의 할아버지 말고도 '봉도각 노인정'에는 할아버지들이 많다.
심심풀이로 술도 한 잔씩 나누고, 장기도 두고, 돼지고기 파티도 하고, '방에 치는 향수(방향제)'를 뿌리며 장난도 치고, 별 것 아닌 일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하고…아무튼 비가 오나 꽃이 피나 바람이 부나 '봉도각'에서 만나신다.

어느 날 할아버지들이 소풍 길에 나선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실은 관광버스는 떠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가지 않은 혹은 가지 못한 할아버지들만 남는다. 나이가 많아서 안 간다고 했던 할아버지나 많이 가봤던 곳이라서 안 가는 거라고 하는 할아버지나 사정이 안돼서 포기한 할아버지나 모두 심심하고 허전하다.

그런데 웬일일까. 소풍을 가신 할아버지들이 예정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다. 화가 난 할아버지들, 할아버지들은 다시 한 번 또 새로운 소풍 계획을 세우는데…. 그래서 영화 제목이 '소풍'인 모양이다.

영화는 '봉도각 노인정'에서의 할아버지들의 생활은 물론 집에까지 따라가서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카메라 뒤에서 웃고 말 붙이는 감독을 '새댁'이라 부르는 할아버지들.

방안의 옷장을 열쇠로 열고 그 안에서 음료수를 꺼내 주고, '나큐멘타리(어떤 할아버지는 다큐멘터리를 꼭 그렇게 말씀하신다)'한테는 버스비 받지 말라고 운전기사에게 부탁도 하고, 5일장에 가서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건네시더니, 술도 한 잔 따라주신다.

거의 매일 노인복지관과 노인대학, 경로당을 드나들며 어르신들을 만나고 있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탓에 농촌 지역 어르신들의 현실을 그저 책이나 뉴스로만 알고 지내던 내게 영화 속 새까맣고 주름지고 이가 다 빠진 할아버지들은 그 어떤 농촌 어르신들의 현실보고서보다 생생하게 다가왔다.

평생 농사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르신들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딱한 노인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어르신들을 카메라 저쪽의 대상으로 놓지 않고 함께 나누고 호흡하는 존재로 담백하게 대하는 감독의 눈과 균형을 잃지 않은 자세에 힘입은 바 크다.

'봉도각' 옆에 살던 시절에 할아버지들 드시라고 김치전을 열심히 부쳐서 날랐다는 감독의 따뜻한 마음이 할아버지들의 마음을 똑똑 두드려 열었고 거기서 소통과 진정한 관계 맺기가 시작되었으리라.

'봉도각 노인정'앞마당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날.
순서를 기다리며 농담을 하던 할아버지들도 막상 사진기 앞에 앉으니 긴장한 얼굴, 진지한 얼굴들이다. 사진기를 응시하는 눈에 언뜻 서글픔과 슬픔 같은 것이 서리는 듯도 하다. 흑백사진 속 젊은이들 얼굴에서 더듬어보는 할아버지들의 청춘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영화 마지막에 보는 할아버지들의 웃는 얼굴, 웃는 얼굴들. 그동안 내가 입으로만 떠들어대던 '노인은 머지않아 만날 나의 얼굴'을 실감하며, 주름 가득하고 새카맣더라도 저렇게 순하게 웃을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발걸음이 가닿지 않는 곳,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그 어딘가 에서 할아버지들은 오늘도 그분들 몫만큼의 생을 살아내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영화 마지막 자막이 다 올라간 후에도 음악이 나오는 동안에는 가만히 앉아있어 보자. 할아버지들의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은 감독의 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보너스를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풍, 77분, 2006년 / 감독 : 홍남희 / 제작 : 푸른영상)

* 다큐멘터리 영화 <소풍>은 독립영화의 특성상 개봉 예정 일시를 알 수는 없고, 푸른영상에서 곧 비디오로 출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2006-06-1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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