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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22
    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봄날
  2. 2005/07/21
    벼룩과의 전쟁에서 생각하기
    봄날

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고 싶어 라디오 방송국을 차렸다는 유리코의 사무실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위치해있습니다. 동티모르 4대 방송국 중 하나라고 하기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있게 방송국 이름을 외쳐봅니다. 하지만 택시는 한참을 헤맨 뒤에야 락카로 ‘라캄비아(RAKAMBIA)’라고 쓰인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섭니다. 방송국으로 사용되는 단층 건물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던진 폭탄 흔적이 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커다란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고, 창문은 성한 것보다는 깨진 것이 더 많습니다. 방송국 기자재라곤 1평 남짓한 작은 방송실 하나와 문서작업만 되는 컴퓨터 2대가 전부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로 기억하는 탓에 총리의 종교적 신앙마저 그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종교차별해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와르의 사무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식당 겸용으로 쓰고 있는 작은 회의공간과 컴퓨터 한대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할 뿐입니다. 빠듯한 단체 운영에 안와르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99년 해방이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대학생들은 버려진 건물은 사무실 삼아 아동과 여성인권을 고민합니다.


한국의 가난한 단체도 이들보다는 호사스럽다 느껴질 만큼 열악함에 고개가 흔들어지지만 이들은 국제연대를 꿈꿉니다. 지원받기위한 연대가 아니라 지원하기 위한 연대를. 63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국민의 1/10이 죽어나간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들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읍니다. 한 시간 사용료가 하루 수입에 맞먹을 만큼 비싼 지출을 감수하며 인터넷 방에서 정보를 모으고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수고를 감수합니다.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에서 독립해 정부와 국가를 갖게 된 지 이제 3년. 해서 과거청산부터 사회재건까지 구석구석 해야 할 일엔 끝이 없지만 국제연대를 터부시하진 않습니다. 항상 ‘국외’보다는 ‘국내’사안이 우선이고, 국제연대는 몰라서가 아니라 ‘여력’의 문제라며 뒷전으로 미뤄왔던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유리코가 말합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가 없었다면 독립은 요원했을지 모른다고.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에서 아버지와 친구들을 잃은 닌도가 덧붙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 문제와 정치적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그래도 죽음의 공포에선 벗어나 있다”고. 그러면서 묻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은 무엇을 할 거냐”고.


필리핀 분쟁지역에서 만났던 이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25살의 평화운동가 빙은 “언제든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죽을 수 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런 빙에게 외부세계의 ‘연대’란 활동의 방패이자 삶을 지탱시키는 힘입니다. 거듭된 교전으로 농사지을 땅과 가축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에모다스에게도 ‘연대’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공포에 떨며 살아온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어디에 있었냐”고 절규하더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한국은 인권의식이나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발달해있지만 국외 문제에 대해선 인색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명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긴 해도 물적, 인적 자원을 쏟아 부으며 긴 호흡으로 이들과 동고동락 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인권운동’을 해왔다는 저 역시 공포에 질린 그들의 눈을 보기 전엔,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기 전엔 ‘조건’만을 탓하며 ‘국제연대’는 특별한 사람, 단체의 몫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언제쯤이면 ‘국가’라는 공간을 넘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절규와 공포에 어깨를 걸 수 있을까요?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그래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사용해달라는 사람들의 호소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2005. 7. 22 동티모르 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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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과의 전쟁에서 생각하기

 

간만에 푹 자고 싶었다.

 

남들의 일상에 비하면 호사를 누리고 사는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10시간이 넘게 포장도 되지않은 동티모르의 도로를 밟으며 이곳저곳을 헤메고 돌아왔으니 할일이 산더미 같이 있더라도 오늘은 기필코 늦게까지 자보리라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만사 제치고 잠자리에 든 게 밤 11시 30분. 하지만 채 30여분도 지나지 않아 몸 이곳저곳이 간지럽다. 모기에 물렸으려니 하며 애써 무시해보지만 한군데만 가려운 것이 아니다. 열심히 몸을 긁어보지만 가려움이 가라안지를 않는다. 혹시 모기 말고 다른 벌레에 물린 것은 아닐까해 방안은 뒤적거려보지만 오늘도 오후 8시부터 전기가 나간 탓에 ‘촛불’을 들고 ‘민첩한’ 벌레들을 찾아보겠다고 설치는 것이 우스워 보여 몇 분하다 포기하고 만다. 가려움은 새벽내내 가라앉지 않았지만 마치 잠과 경쟁이라도 하는 냥 눈을 뜨진 않았다.


아침, 커텐 쳐진 창문으로 햇볕이 비집고 들어온다. 눈을 1/3쯤 떳다가 다시 잠에 빠져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닭이며 맷돼지 우는 소리로 집안이 들썩들썩한다. 이것도 무시해야한다. 어디 하루 이틀이랴, 가축의 목따는 듯한 울음소리가. 하지만 계속된 마리아의 괴성 앞에선 더 잠을 잘 수가 없다. 게다가 몸은 계속 간지럽기만하다.


씩씩거리면서 잠에서 깬다. 문뜩 좀 더 자고 싶지만 잘 수 없는 이런 여행이 너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려운 곳으로 시선이 향한다. 팔뚝이며 허벅지며, 목 뒷덜미며, 얼굴만 빼곤 발끝에서 목까지 벌레에 잔뜩 물린 흔적이 가득하다. 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쥐벼룩’에 물린 것 같다고 말한다. 약을 발라도 가라앉지 않는 가려움과 발열에 짜증이 밀려들었다. 그때부터 이집의 이곳저곳이, 동티모르의 이런 상황들이 너무 화나기 시작했다.


오늘도 2주전 동티모르에 도착했을 이후로 하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고 있을 뿐이었다. 밤부터 나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뒷마당에서 펌프질을 하면서 머리를 감고, 대야가 비싸기도 하고 위생관념이 한국과는 달라서인지 방금 머리를 감은 대야에 집주인은 설거이 거리를 담는다. 주위에 닭과 맷돼지, 개들이 모여든다. 오전 내내 울어대던 이집 막내딸 마리아가 발가벗은 몸에 흙은 한아름 뒤집어 쓴 채 거실과 부엌을 헤졌고 다니는 통에 바닥은 온통 흙먼지로 가득찼고, 4살 먹은 이집 아들 구디뉴는 언제 마지막으로 씻었는지 조차 모를 손과 얼굴을 해서는 아침 식탁을 뒤적거린다. 내가 묶는 방안 문틈으로는 열심히 막아보려는 나의 선방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생쥐가 민첩하게 방안 탁자 뒤로 숨어든다.


계속 몸을 긁어대면서 입었던 옷과 방안에 있는 이불보따리를 챙겨다가 뒷마당으로 나가 펌프질을 해댄다. 갑자기 이렇게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동티모르란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이 나라의 고요함이 좋았다. 99년 독립이후 어떠한 재건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이들의 삶은 어떠한지가 궁금해 무작정 찾아들었다. 처음 딜리에 왔을 때, 5층을 넘는 빌딩이 없음이 좋았고, 오염되지 않은 바다의 광할함이 좋았다. 맷돼지가 뛰놀아 차들이 비껴서야하는 도로는 자연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흙에 파묻혀 사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한국의 아이들보다 풍요롭다 생각했다. 정리되지 않은 부엌살림을 보면서는 거의 매일 8시면 전기가 나가고 수도가 집으로 잘 들어오지 않아 개수대조차 없는 곳에서 살림살이의 정돈을 요구하는 것이 참 배부른 소리처럼 여겨졌다. 방안에 살림살이라곤 하나도 없어 맨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노곤함도 이곳 사람들의 살림살이, 그래서 잠 잘 곳이 없는 곳에 비하면 그래도 풍족하다 생각했다. 가끔 눈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도 낯선 이방인이 너무 많은 위생관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생쥐에 요란을 떨거나 몇일이고 받아 둬 먼지가 고인 물로 양치를 하면서 궁시렁 거리는 이들을 볼 때마다 참 소란스럽다 생각했다. 근데 오늘은 내가 그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 짐을 꾸렸다. 오늘은 내일마감인 원고도 하나 있고, 잠도 좀 자야겠고. 이것저것 핑계를 만드니 한순간에 한아름이 된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며 점심을 먹자는 소리를 뒤로하고 약속이 있다며 빠져나와 근처 호텔에 짐을 푼다. 하루에 3만 5천원. 두명이 묶는 숙소이니 1만 7천원인 셈. 짐을 풀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는다. 얼마만에 보는지 모를 거울 위로 벼룩이 지나간 흔적이 가득 남아있는 내 몸이 비쳐진다.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이걸 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 그동안 잘 지내왔잖아. 오늘 하루뿐이라고. 니가 호사스럽게 지낸 것도 아니고 1만 7천원이면 그리 비싼 돈도 아니라고. 게다가 오늘은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잖아라고.


맥주를 한캔 따고 언제 마지막으로 누워보았을까 싶은 하얀 침대위에 앉는다. 그렇게도 졸립고 자고 싶었는데,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푹신한 이불위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맥주를 딴다. 그리고 원고를 쓴다고 부산을 떨어본다. 하지만 한 줄도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온몸은 계속 간지럽고, 물린 곳은 하도 긁은 탓에 핏줄이 선다. 계속 머릿속으로는 잘 온거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는다. 항상 이렇게 도망칠 곳이 있다면 언제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일까? 나의 고민은 땅위에 발 딛고 있는 것일까? 그저 생각으로만 시선이 그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나의 삶은 사람들 속에 있다고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몇 시간째 풀리지 않는 고민만 계속한다. 무엇인가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호텔방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아니 일어서지 않는 것이다. 이런............


동티모르의 딜리에서 7월 19일 호텔방에서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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