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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25
    <미스 리틀 선샤인>(2)
    흑점
  2. 2007/06/25
    교통사고(3)
    흑점

<미스 리틀 선샤인>

 

 

okay, let'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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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언덕길'을 그만두기로 하고 집으로 가던 마지막 퇴근길에 막차를 잡아타려고 부랴부랴 길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고, 지금 두 달째 병원에 입원중이다. '나이브'하고 즐겁게! 군대 가기 전 남은 기간을 보내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바로 다음 주에 텐트 들고 춤추러가기로 했던 세계DJ페스티벌 참가 계획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거기에다 덤으로 왼쪽 갈비뼈가 모조리 나갔고, 왼쪽 다리가 박살났으며, 눈썹의 반이 날아가 버렸다.
왼쪽다리에 무릎에서 발목까지 철심을 박았고 신경까지 다치는 바람에 발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사고가 나고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 뼈가 하나도 붙지 않았다고, 앞으로 최소한 한두 달은 더 이 추름한 환자복을 입고 지내야 할듯하다.
처음 입원하고는 약기운 때문인지 시간은 굉장히 빨리 휙휙 지나가 버려 2~3권의 시시껄렁한 책을 붙들고 낑낑대다 보니 어느덧 한 달이 지나있었고, 전국노래자랑이 왜 이렇게 자주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또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병원에 있으면 심심하겠다고 말을 꺼내지만 실상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주사 맞고, 물리치료 좀 받고, 하루세끼 꼬박 챙겨먹고, 하는 일 이외에는 거의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리지만, 이곳에서는 평소에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던 일상들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 되어다가온다. '밥 먹는 일' '씻는 일' '싸는 일' 심지어 ‘낮잠한번 자주는 일’ 등등 (특히 깁스한 한쪽 다리를 들고 변기에 걸터앉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입원초기에 나는 똥 안 싸려고 소식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답답하거나 힘들지도 않지만, 그저 이따금씩 쌓였던 답답함이 한꺼번에 밀려 올라올 때면 그 짧은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한달 간의 병원 생활을 한꺼번에 지나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동화신고 한강변을 달리던 내가, 고무 냄새 풀풀 나는 물리치료실 바닥에 주저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운동이랍시고 하고 있을 때나. 앞으로 나이브하고 경쾌하게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팔랑 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그 순간이 떠오를 때. X-Ray실에서 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온갖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멈춰 서서 의사가 버튼을 누를 때까지 멈춰있는 그 잠깐 순간에 - 내가 지금 여기에서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나. 문득 창밖으로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나 파랗다는 걸 알았을 때. 순간순간 울음이 터져 나올 듯도 하지만. 결국에 이 시간들은 내가 굳이 견디고자 애쓸 필요도 없이 그저 지나가게 될 것을 알기에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달라질 수있는 것도 없기에. (그나마 이런 생각들도 여유가 있거나 좀 살만할 때 그러는 거지, 화장실에서 한번 낑낑 대고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책이라도 좀 읽어두자는 생각에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먹을 것 대신 재밌는 책이나 한권씩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내 침대 옆에는 책이 잔뜩 쌓여있지만, 항상 켜져 있는 TV소리와 항상 누워있는 사람 소리 때문에 말랑말랑한 소설책 한권도 제대로 읽기가 힘들다. 결국 나는 TV관찰과 사람관찰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매진하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4년의 자취 생활동안 TV없이 지내온 나에게, 병실에 있는 TV는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방의 TV채널은 항상 KBS1에 고정되어있었는데 광고가 가장 적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TV의 조그만 화면은 병원을 나서지 않고도 이곳을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5시에는 아마존 밀림을 헤치며 ‘새끼 비버’와 진흙탕에서 뒹굴기도 하고(<동물의 세계>), 30분 후에는 이름도 모르는 쿠바의 한 농촌 마을에서 ‘꿈빠이’아저씨와 룸바를 땡기기도 했으며(<세계는 넓다>), 6시에는 한 시골마을에서 정겨운 아주머니들의 등쌀에 떠밀려 생전 처음 보는 술을 쭉 들이키고 있기도 했다(<6시 내 고향>).
특히 <전국노래자랑>에 대해서는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목욕탕대형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선반위의 작은 텔레비전 속에서 한 아주머니와 먹을 걸로 실랑이를 벌이던 송해 아저씨가, 유재석 빰따구를 두세대는 너끈히 치고도 남을 정도로 진행을 맛깔스럽게 잘한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대발견이었다. 지금도 “빠빠빠빰빠빠~빠 빠바바빰빠빠빠빠빠~빠”로 시작되는 예의 그 시그널송이 들려올라치면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 거릴 것만 같다.


 그런 KBS1 에 대한 우리방의 믿음이 잠시 접힐 때가 있었는데 다른 채널에서 역사극이나 시대극을 해줄 때였다. 방에서 리모컨을 가진 -즉 방장 급의- 아저씨가 그런류의 드라마 매니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역사극이나 시대극은 딱 질색이었지만 차마 나의 그런 적의를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때만 되면 은근히 딴청을 피워야만 했다. 그 아저씨는 열심히 드라마를 보다가도 "이거 재밌지?"하는 은근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피드백을 요구했고, 그때면 나는 얼른 시선을 TV로 돌려 "우와! 결국 저 장수가 이긴거에요?"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맞장구를 쳐야했기 때문이다. <영웅시대>라는 옛 드라마에서 박정희 역을 맡은 배우가 예의 그 모자와 라이방을 눌러쓰고 뭔가 단호한 결단을 내린 듯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빠방한 음악이 배경에 깔릴 때는 정말이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리고 두 번째가 사람구경인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러기엔 나의 글 솜씨가 너무나 형편없어 직접 내 자리에서 한달 간 누워지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스펙타클한 ‘사람살이들’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말로 그만 넘겨야 할 것 같다.

 


 병원에 있으면서 좋은 것 몇 가지는 하루세끼 밥을 꼬박꼬박 먹는다는 내 생애 최초의 식습관과 함께, 평소에는 그토록 지겹던 ‘바깥세상’에 대해서 생겨나는 이 무한한 동경심과,  여기만 나가만 무엇이든 해볼 것이라며 불끈 솟아나는 이 알 수없는 용기인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밥 한번만 같이 먹자는 나의 구애에 몇 달 뒤 아는 형을 통해 몇 달 전 캐나다로 훌쩍 떠나버렸다는 소식으로 화답했던 그녀에 대해(덕분에 난 몇 달간 캐나다 타령을 하고 살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간곳은 미국이었다.) ‘장기전’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이따금씩 데미안 라이스의 Blower's daughter를 들으며 그 바람같은 미소를 떠올리곤 하기 보다는, 절대 안될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욕이라도 시원하게 먹을 정도로 들이 대볼껄 하는 후회와 병원을 나가기만 하면 그때는 피했던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가서 “내가 그때 찝쩍댔던 그 놈이라고, 그 분은 잘 지내시냐고, 그 사람 소식이나 듣게 술한잔 하자고. 내가 살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말을 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 한다거나. 그렇게 완전히 뭉개져 버린 뒤에는 지금까지 지나면서 호감을 가졌던 몇 명의 사람들에게 그 당시에는 ‘저 사람은 나랑 안 맞을꺼야, 아마.’ 혹은 ‘나는 저 사람에게 맞지 않을 거야, 역시.’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토닥거렸던 그 순간들에 떠오르는 여인들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고차원적인 다짐을 하기까지는 수 시간의 쌓임을 필요로 했고, 그전에는 동물원에서 기린과 코끼리를 보고 싶다거나, 한국에서 제일 큰 수족관에서 제일 큰 물고기를 보고 싶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에 가서 미치고 팔짝뛰듯이 춤을 추고 싶다거나, 이적의 신곡을 노래방에서 열창을 하고 싶다거나, 이 구질구질한 환자복 말고 깔쌈한 티셔츠를 입고 싶다거나, TV에서 누군가 팔짝팔짝 뛰거나 재주를 넘을 때 나도 따라하고 싶다거나, 하는 식의 일차원적 욕구가 있었고, 지금은 그저 두 다리로 거리를 뚜벅뚜벅 걸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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