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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쥬케이터, The Edukators>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늦은 밤. 혼자 병실에 있게 되어 리모컨을 붙들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중에 SBS에서 해주던 영화 가 눈에 걸렸다. <에주케이터>라는 약간은 엉성한 한글표기와 익숙한 한국성우의 목소리들. 꽤 재밌게 봤던 영화라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영화를 TV에서 틀어준다는 사실이 아이러닉하게 우습기도하고(어찌됐던! 엄연히 이 영화는 혁명을 꿈꾸는 열혈청소년들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에), 병원에 있으면서 고픈 것이 영화인터라, 웬만하면 참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줄리아 옌체의 매력적인 입술에 위에 교묘히 덧씌워진 한국성우의 느끼한 목소리는 채널을 돌리게 만들었고 마침 EBS스페이스 공감에서는 이승열의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승열의 아쉬운 공연이 끝나고 다시 채널을 돌려보았을 때, 영화는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아래 줄거리는 네이버에서 퍼왔습니다. 주소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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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 계급, 자본, 평등, 착취, 이런 말은 낡은 구호다. 집단보다 개인이, 부의 분배보다 부의 축적이 찬양받는 지금 <에쥬케이터>는 이제 와서 혁명을 말한다. 덜 떨어졌다 해도 좋다. 철없고 무모하다 해도 좋다. 세 주인공 얀(다니엘 브릴)과 줄(울리아 옌치), 피터(스티퍼 에르켁)는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자’로 나섰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고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지만, 부자들의 집에 침입해 그들의 안온한 환경을 휘저어놓는 것이 목표다. ‘좋은 시절은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들은 너무 돈이 많다’, 이런 경고를 써붙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다. 2000년대의 <에쥬케이터>는 혁명 자체에서 끝나지 못한다. 실수로 고급차를 들이받아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줄은, 얀과 함께 차 소유주 하르덴베르그(버그하르트 클로즈너)의 저택에 침입해 ‘에쥬케이터’의 활극을 펼치지만 정작 그와 맞닥뜨리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피터까지 불러들여 하이덴베르그를 납치하면서 영화는 이들이 처한 거대한 아이러니를 하나씩 드러낸다. 배부른 돼지처럼 보였던 부르주아는 알고 보니 그들이 동경했던 68세대의 일원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등쳐 재산을 축적한 기성 세대에게도 회한이 있었다. 젊은이들의 구호는 열렬하지만 설익어 있다. 거기에 맞서는 하이덴베르그의 열변도 만만치 않다. 산장에 숨은 이들의 기묘한 동거가 계속되면서, 가난한 젊은이와 부유한 중년은 서로를 이해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두 남자와 여자가 이룬 삼각관계도 평화롭게 정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때, <에쥬케이터>는 다시 한번 사고를 뒤집는 결말을 마련한다. 그 위로 제프 버클리의 ‘할렐루야’가 간절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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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들의 투쟁방식 -혹은 뻘짓거리- 이 과연 ‘운동’이라고 불릴만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많은 예술 안에서의 저항이 그렇듯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 또한 지극히 ‘반문화적’이다. 영화 속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들의 이론적 배경- 그리 두텁지는 않아 보인다-은 역시 기드보로나 보드리야르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이 세계에 ‘균열’을 가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이들은 혁명적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보수적이라고 비판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를 TV, 그것도 공중파에서 틀어주다니. 나는 반응이 궁금해서 다음날 네이버에서 영화를 검색해보았다. 이 방송이 나가고 난 뒤 이루어진 별점평가는 거의 10점 만점이다. “나, 이런 영화도 봤지롱” 자랑하기위해 블로그에 올린 쓰나마나한 영화평들은 하나같이 유쾌하고 재미있었다는 칭찬 일색이다. 하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독일영화를 끝까지 보고 인터넷에 들어와 감상평까지 쓸 정도면 재밌게 본 사람들이겠지만...
그런데. 이 영화가 재밌고 유쾌하다고? 정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너무너무 슬프다. 이 슬픔은, 대안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이상주의적이기만한 아해들에 대한 듀나의 조롱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조롱의 대상이된 모습이 어느 시기의 내 모습과 자꾸만 오버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 나는 (좀 우울하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68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진 꿈 많은 청년이었다.

 

 

잠시 그때 얘기를 해보자면. 그 즈음 나 또한 영화에 나오는 소년 소녀들처럼 자본주의 현실에 갑갑해하고 숨막혀했으며, 아는것과 가진것이 별로 없었으며, 그냥 막연히 혁명을 꿈꾸던 소년이었다. 김누리 교수의 독일문화수업에서 68에 대한 발표를 내가 맡았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잘 이해하지도 못한 68혁명에 관한 논문하나를 읽고 발췌해서 발표를 했었다. 더군다나 68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학생들 앞에서, 68혁명이 기존의 고전적인 맑스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전복하고자 했는지를 마르쿠제의 이론에 기대어 설명해놓은 그 논문을 부분발췌해서 버벅거리며 읽었을 때, 그 강의실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나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수업이 끝나고 같이 발표준비를 한 창언형과 강의실을 나서면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었는데 정리해보면 이렇다. 68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68은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기존의 일방적 폭력-통제방식에서 더 교묘하고 견고한 조정적 통제-억압방식으로 바꿈으로서 자본주의 혁명을 일으켰다. 는 식의 논지를 펼쳤었고,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재원형은 씩, 웃으면서 나에게 책 한권을 추천해줬는데 그 책이 바로 미셸 우옐벡의 문제적 소설<소립자>였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서. 이 영화가 나에게 슬펐던 다른 이유는 이 영화의 반동성에 그때의 나도 혹,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인 혁명소년소녀들과 보수주의자 부르주아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나는 그 아저씨의 말에 얼마간 동조했었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말로 슬픈 이유는 좀 더 복잡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패배주의 때문이다. 바로 위의 문장에서 언급된 대화에서 출발하자. 비인간적이고 보수적인 뚱뚱한 부르주아 아저씨가 실은 한때 68운동에서 한가닥 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무려 ‘루디 두치케’의 친구이면서 프리섹스주의자이다!) 영화는 서서히 화해모드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혁명청년들은 아저씨의 말에 서서히 동조하게 되고 아저씨 또한 그들을 인정함으로써 영화는 사상과 계급의 차이를 단지 ‘세대간의 차이’로 변질시키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이 ‘변질’은 중요하다. ‘세대간의 차이’ 즉 시간적인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무마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물론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새로운 세대들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청년들은 어른이 되고, 어린이는 자라서 청년이 된다. 갭은 남는다. 즉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연’ 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문제의 틀을 인식하는 순간 이것은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할 필요도 없는 ‘자연현상’으로 탈정치화·탈역사화 되어 저기 저편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시간적인 문제인가?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이 납치했던 아저씨를 집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주고 아저씨 또한 여주인공 줄의 빚을 탕감시켜줌으로써 화해의 국면을 맞이하는 듯하다. 만약 영화가 이렇게 결말을 맺었다면, 조금 과장해서. “네, 부르주아 아저씨 계속 국가 경제를 위해 힘써주세요.” “그래, 자네들 같은 사람들도 있어야 세상이 더 좋아지지. 나도 젊었을 때는 그랬었지.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여”하면서 서로서로 얼싸안고 각자 열심히 하자 파이팅, 하는 식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이 영화는 볼 것도 없이 개쓰레기 반동이데올로기영화라고 치부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오히려 쉽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다. 오히려 더 교묘한 건지도.

 

 

여기서 반전. 서로간의 묘한 연대감을 확인하며 헤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가 싶었던 그 화해는 결국 부르주아 아저씨가 그들을 잡기위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 경찰특공대까지 보냄으로써 결별된다. 다행히 그들 또한 아저씨를 완전히 믿지 않았고, 그들이 떠난 빈집에 붙어있는 쪽지에 쓰여진 뭔가 굉장히 있어 보이는 말, “어떤 사람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를 달랑 남긴 채 그들은 어느 호텔방의 침대 위에서 셋이 같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초반에 남자주인공의 목표였던 유럽 전지역에 방영되는 TV수상기를 폭파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들은 ‘일단은’ 타협하지 않는다. (여기서 ‘일단은’이란 말을 기억하자)

 

마지막 장면. 그들 셋은 TV수상기가 있는 섬으로 배를 타고 떠난다. 이 영화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위에서 저 너머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그들의 멋진 배의 아름답고도 진취적인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이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이고 고무적이다. 그런데 나는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다시 살펴보자.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데, 수평선은 그 끝을 규정지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계속적인 듯하지만, 그냥 바라보았을 때 보이는 바다와 하늘이 이루는 선명한 대비의 일직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계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계가 나에게는 그들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벽’으로 보인 것은 왜일까?

 

 

하나 더.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배경으로 큰 위성접시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 이 위성접시가 그들이 폭파하고자 했던 TV수상기일 것이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면 위성접시는 폭발하고 영화는 마치 TV화면이 팟, 하고 나가듯이 꺼진다. (그런데 알다시피 TV에서는 엔딩크레딧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광고가 나와서 그 장면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TV수상기가 무사하고 바로 광고가 이어져 나오는 상황이 더욱더 시사적이고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어떤 이들 또한 영화가 끝나자마자 우후죽순으로 극장을 빠져나가 이 영화 재밌었지, 하는 식의 대화를 스타벅스커피 따위를 목구녕에 들이부으며 말할 것이다)  어쨌든 이 ‘폭발’이 전혀 통쾌하지 않고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이 영화는 젊다. 감독도 배우도. 젊은 감독의 재기발랄함과 매력적인 독일배우들의 향연만으로도 이 영화는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고, 그래서 예쁘다. 그런데 바로 이 ‘예쁨’이 문제다. 조금 시야를 넓혀보자. 최근 몇 년 사이에 좁은 간격으로 개봉된 68과 관련된 영화들. 이 영화를 비롯해서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이상일의 <식스티 나인>, <박치기>까지(물론 <박치기>는 나머지 영화들과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 (또 한편으로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 우후죽순으로 번역된, 68혁명을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해놓은 책들 또한 연관이 있을 지도...어쨌든,) 이들 영화는 각각의 다른 위치에서 제각기 다른 정치색을 가지고 68을 바라보고 있지만, 공통점 한 가지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 파릇파릇하고 매력적인 젊은 배우들이다. 이들 영화의 감독들은 직·간접적으로 68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이들 중 68을 직접 겪은 사람은 베르톨루치뿐이다). 그 '향수'를 40년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그때'를 회상하며 '그때의 현재적시점'으로 다루고있다. 즉, 이들은 68을 일종의 ‘청춘영화’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지금 언급되고 있는 <에쥬케이터>란 영화에서 한때 급진주의자였던 부르주아 아저씨가 “나도 한때는 그랬었지”하는 식의 ‘회상’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지금의 ‘그 세대들’에게 모든 짐과 책임을 씌우고서 잘못을 물을 수는 없다. 청년들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어야만 하기마련이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었다. 짐모리슨에 관한 누군가의 글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 세대는 두 가지 갈림길 앞에 놓여있었다. 미쳐서 일찍 죽어 신화화되어 상품이 되는 길. 다른 하나는 그냥 조용히 타협하고 살아남는 길이다.” 이 두가지 갈림길은 '일단은' 타협하지 않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 앞에도 놓여져있다.  

 

다시 돌아가서. 이 영화 초반부에 남자주인공이 캐릭터상품이 되어버린 체게바라 티셔츠를 바라보며 한탄을 하는 장면이 있다. 68혁명 때 체 게바라의 이름에서 따온 체!체!라는 구호는 그 당시 권력에게 위협적이었다. 권력은 더 이상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식으로 대처했다. 권력은 그 이미지들을 티셔츠나 뱃지 따위에 마구 찍어 복제하고 상품으로 팔아치움으로써 그 기호들을 널리 퍼뜨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그 기호들은 원래 지녔던 불온성은 소멸된 채 마구 증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들은 최고의 농담: 체게바라평전을 읽은 한청년이 '불가능한 꿈'을 지방대를 나온 자신의 '대기업 입사'로 해석했다는 이야기) 결국 역설적으로! 68과 관련된 이 영화들 또한 그러한 작용을 하고 있다. 68의 이미지를 한때의 아름다웠던 청춘으로 복제함으로써 68이 가졌던 혁명성은 상실된다. 지금 남은 것은 온통 껍데기들뿐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들 68에 관한 영화와 책들을 반가우면서도 반길 수 없고, 재밌고 유쾌하게 보면서도 마냥 재밌고 유쾌할 수만은 없었던 이유이다.                 
 
다시, 이제 글의 마지막. <에쥬케이터>의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의 마지막 폭발이 그들의 목표, 즉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붕괴(혹은 자폭)로 받아들인 것은 나뿐일까? 이 영화는 영화 내·외적으로 그 세대의 붕괴를, 즉 어떤 저항의 종말을 몸소 실천해 증명해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그래서 이 영화의 "유쾌한" 결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은...그래서 암울하기까지 한것은...

 

 

이들의 뒷모습은, 또 이 폭발은, 그래도 유쾌하고 희망적인가?

 

 

나는 이 영화가 너무너무 슬프다.

  

 

 


사족1.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영화초반 두남녀 주인공이 어떤 건물옥상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지금쯤 혁명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하는 물음을 던지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멜리에’가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지금쯤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물음보다 실효성도 없고 흥미롭지도 않다.

 

 

사족2. 병원을 나가면 68과 동시대 감독의 영화들을 찾아봐야겠다. 특히 고다르의.

 

 

사족3. 이글과도 연결될 수 있을 듯한. 얼마 전 <요코 이야기>에서도 폭발!되었고, <화려한 휴가>로 인해 진행되고 있는 논의들 - 역사를 예술에서 어떻게 재현·해석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궁금하다. 물론 한일전쟁과 5.18은 68과는 매우 다른 맥락에 서있지만.  

 

 

사족4. 차라리 68을 ‘추억에 대한 회상’이 아닌 ‘트라우마’로서 해석해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트라우마’는 어쩌면 반성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줌으로써 현재적 시점으로 되살려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나는 아직까지 이런 영화 혹은 소설을 보지는 못했다. (우옐벡의 <소립자>에 나오는 브루노 역시 2차적 피해자이다) 혹시 아는 사람 있으면 추천해주기를 바란다. 물론 68의 역동적 에너지를 트라우마 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반동적으로 흐를 수도 있다. 생각건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여성들’이 아닐까 싶다. 프리섹스의 피해자는 생물학적 임신주체였던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락스타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했던 ‘그루피’는 어떨까. 물론 이것 또한 그때 여성들의 2차적 착취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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