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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0/16
    The Smith -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 
    흑점
  2. 2007/08/12
    블로그(1)
    흑점
  3. 2007/07/26
    밝은 미래
    흑점
  4. 2007/07/15
    열병(1)
    흑점
  5. 2007/07/13
    이사
    흑점
  6. 2007/06/25
    교통사고(3)
    흑점
  7. 2007/04/09
    일주일(4)
    흑점
  8. 2007/03/15
    ...
    흑점
  9. 2007/01/11
    ...(2)
    흑점
  10. 2007/01/11
    씨발
    흑점

The Smith -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 

Good times for a change
See the luck I've had
Can make a good man turn bad
 
So please please please
Let me, let me, let me
Let me get what I want this time
 
Haven't had a dream in a long time
See the life I've had
Can make a good man bad
 
So for once in my life let me get what I want
Lord knows, it would be the first time
Lord knows, it would be the firs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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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
- 모두들 아픈 다리 내놓고 장사하는 것. 저잣거리에 나와 내 흉터가 더 크지, 더 아프지 자랑하는 卑賤한 삶들. 거개의 블로그니 하는 것들에서 읽을 수 있는 속내가 그렇더라..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나 역시 이젠 블로그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무슨 글을 썼는지 모른 체 지내는 터라 글을 모아둘 창고를 짓는다 생각하고 열었던 블로그가 그런 고통이랄 것도 없는 자기전시의 쇼윈도가 되었다. 온 몸이 벌개지도록 부끄럽다.
 
- 고통은 견디고 부인하고 감추기 위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찌된 세상인지 고해처럼, 심리상담가 앞에 놓인 카우치처럼, 당신 나 사랑하지, 사랑해 줘 응석부리는 무대가 되었다. 나 술먹고 게웠어, 나 망가졌어, 내가 불쌍해서 옷 살래 따위의 허접한 잡담을 늘어놓고 고통의 값어치조차 능멸하는 숱한 블로그. (...)
-
서동진님의 블로그에서 허락도 없이 무단 발췌. 원문은 여기로.
 
 
 
위의 글을 읽고 나 또한 고민이 된다. 자신을 포장하는 각종이미지로 점철된 싸이월드. 읽었던 책, 봤던 영화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거나 알량한 지식을 뽐내기 위한 숫한 블로그들. 자신의 아픔을 과장해서 드러냄으로서, 나 아파, 그러니까 나 좀 사랑해줘, 애정을 구걸하는... 혹은, 현실에서 결코 충족되지 못할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자랑하며, 결국 공허한 울림에 그치고 말 것들...
 
이 곳 또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이런 생각을 하면 부끄러움에 지금이라도 당장 블로그를 닫아버리고 싶어진다. 옛글들을 읽으며 드러나는 나의 얕음에 자책하기도 하고... 오늘은 지금까지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읽었다. 나의 찌질함. 애정구걸. 자위. 자기연민. 나르시시즘. 신세한탄. 알량한 지식들...등등 모두 다 이곳에 있었다.

 

블로그를 완전히 닫는 건 아니더라도, 글 중에서 몇 개만 지워버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느 시기의 나에 대한 기록이라는 생각에 그냥 맘편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대신에 요즈음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을 핑계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블로그에 다 올리지는 않더라도 요즈음 노트에 글적거리고 있는 글들은 어쩔 수 없이 휘갈겨 쓴 글들이 많다. 책상 앞에는 앉았는데 책 속의 글자도 잘 들어오지 않고, 뭔지 모를 딴 생각만 계속해서 맴돌 때. 기지개를 펴고 마음을 다잡고, 담배까지 한 대 피고 와서도 이 가슴 먹먹함이 풀리지 않을 때면 그냥 책을 덮고 노트를 펼친다. 볼펜을 들고 노트에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리다보면 진정이 좀 되는 듯싶다. 글도 종류마다 다른데, 의식적으로 써봐야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은 글은 몇 줄 나가지 못해서 손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하고, 결국 손아귀에 힘이 풀리고 만다. 억지로 더 쓰다가는 펜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이다. 또 어떤 글들은 한번 삘이 꽂히면 몇 페이지를 정신없이 써나가서 나중에 가서는 손이 저려오기도 한다.

 

머릿속에 떠돌던 생각과 간절한 느낌들이 막상 펜을 타고 나오면, 글씨는 삐뚤빼뚤 엉망이고, 문장들은 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여기저기 끊긴 채 흩뿌려져 있다. 어떤 단어가 적합할지 한참을 고르다가 결국은 찾아내지 못하고 비워놓은 빈칸들이 군데군데 밍숭맹숭하게 뻥뻥 뚫려있다. 결국 그렇게 정신없이 써내려간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래, 이게 바로 뽀오스또 모오단적인, 데리다적인 글쓰기이지 하하, 하면서 웃어넘길 뿐 찢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왜 ‘블로그’인가? 하는 의문은 남아있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것이 인정욕망이라는 것을 시인 했음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족1.UCC에 대해.
길거리에서 나를 스치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단백질덩어리로만 느껴지던 그런 시절에, UCC가 나에게 약간의 안식이 되어주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날의 UCC를 뒤적거리면서, 내가 오늘 지나쳤던 사람들도 어쩌면 각자의 집에 들어가서는 눈을 가린 채 한손으로만 큐빅을 사정없이 돌려서 맞춘다거나, 길에서 조차 만나지는 못하는 아이들은 자기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기타로 캐논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있다거나, 저 아저씨는 손바닥과 책받침만으로 드럼소리를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날 집 밖을 나설 힘을 충전 하고는 했었다.

 

흔히 개그콘서트의 ‘마빡이’를 UCC시대의 새로운 개그 형식이라 예찬하기도 한다. SBS의 ‘스타킹’이라는 쇼프로그램에서는 UCC로도 방송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각종 포탈사이트나 청소년 미디어교육관련 기관에서 행해지고 있는 UCC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투자.

 

나는 이러한 것들이 다 지금 UCC를 망쳐놓았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를 수용하기만 했었던 기존의 방식에서 UCC는 스스로 이미지를 생산해냄으로써,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와 목소리를 부여함으로 전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지금 도처에 널린 UCC는 전부 자기 마빡을 때리고 있거나 천무스테파니의 봉 춤을 되지도 않게 따라한다. 요즘은 심형래를 응원하고 있다.
 
 
사족2. 블로그에 대해.
네이버메인에 ‘감성지수36.5’라는 칸이 생겼다. 꽤 흥미로운 제목들과 이미지에 혹, 하고 들어갔다가 헉, 하고 꺼버리기 일수다. 얼마 전부터 컬쳐블로그 어쩌구 하면서 다양한 컨텐츠들을 끌어들이려 애쓰더니, 이제는 블로그에서 ‘NAVER'로고까지 없애고, 아예 자기 블로그는 자기가 마음대로 디자인 할 수도 있단다 (네이버는 정녕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것일까). “나 이런 책도 읽었엉, 이런 영화도 봤지롱” 쓰나마나한 감상평들을 올려놓은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부르디외의 탁월한 분석이 이곳에서도 점점 맞아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 비록 소비활동으로 촉발되는, 즉 자본에 의해 필요되고 이용되는 창의성과 자율성이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통제하고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네그리의 말처럼, 대중들의 자발성·자율성을 자본주의가 더 이상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도래할 것... 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보지만...흠흠.
 
  
사족2-1. 어쨌든 블로그가 일종의 구별짓기 행위라면, 네이버는 가장 낮은 수준. 이글루는 좀 더 교묘하고. 진보넷은 가장 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족3. 싸이월드에 관해서.
흔히들 싸이월드가 얼짱각도를 하고 커피빈을 배경으로 책을 ‘들고’ 있는 사진 따위로 자신을 포장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해석. 이것은 매우 순진할 뿐만 아니라 안일하기까지 하다.

“미디어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맥루한의 말을 상기하자!
싸이월드에 회원가입을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서 '호명’된다. 싸이월드에 의해 자신이 꾸며지는 시대는 이미 지나도 한참을 지났다. 이제는 반대로, 싸이에  올려지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영화나 책을 보고, 어디를 간다는 것이 정해진다. 다시 말해, 싸이의 이미지들로 자기를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싸이의 이미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실제 생활양식을 바꾼다. 즉, 이미지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자기로서 ‘실현’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아무리 자의적이고 미끄러진다고 해도, (그 기호를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기표는 기의를 반영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이제는 기의가 기표에 의해 '규정'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그러나 소쉬르의 분석에 다시 주목하자. "기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실체(지시대상)가 아니라,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차이)다." 나는 남들과는 다르고 싶고, 특별하고 싶다. 이 '차이화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 바로 블로그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이제 더 이상 근대적 주체를 생산해내기 위해 푸코의 '파놉티콘', 즉 가상 감시체를 설정하고, 감시의 시선을 자기의 시선으로 동일시하는 과정 또한 불필요하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감시하고, 통제하고, 조정한다. 그러므로 싸이월드에서 데카르트의 식상한 명제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회원가입한다. 미니홈피가 생긴다.
나는 프로필을 올린다. 방문자수가 올라간다.
나는 사진을 올린다. 퍼간다.
나는 일촌 신청을 한다. 일촌평을 단다.
나는 홈피관리를 한다. 방명록을 쓴다.
나는 싸이질을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족4. 최근 '디워'로 촉발되어 심형래를 선봉으로 이송희일, 진중권 등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번 사태. 이 민족주의적 광기를 단순히 찌질이들의 단순한 뻘짓으로 -나아가서는 사이버공간에의 파시즘의 도래로까지-치부하고 "즐쳐드셈"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자신의 블로그에 그렇게 써놓은 진중권교수의 반응은 십분 공감하고 지지한다. 나는 이런 아해들은 즐을 좀 처먹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대세를 업고 평론가의 자질 운운하면서 젠척하는 인간들이 더 짜증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인터넷에서 대한 분석은 필요하다. 사실 이런 식의 광기는 하루이틀일도 아니고, 계속 해서 다른 형태로 바뀌어가며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이것을 단순히 찌찔이들! 이라며 무시하는 것은, 인터넷이란 공간을 일종의 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양태를 실체화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인터넷이 가진 다른 가능성들을 스스로 사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는 자본주의에 관한 들뢰즈/가타리의 분석을 인터넷에서도 적용해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즉, 인터넷을 자본주의 분열증적 요소로 분석하고 그 끊임없이 탈영토화하는 동시에 재영토화해야하는 매커니즘을 파헤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들뢰즈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생각만 해볼뿐이다. 하긴 내가 뭘 제대로 공부했겠냐만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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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미래

앞은 언제나 불투명한 유리가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조금만 몸을 앞으로 내밀기만하면, 와장창하고 깨지는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에 온몸을 베일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 벽을 더듬어보려 했지만, 두손은 희뿌연 허공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멈춰서서 내가 걸어온 흔적들을 되짚어보려했다. 그러면 발자국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계속 걸음을 이어나갈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때 보이는거라곤 온통 질척거리는 진창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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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하기에 아직 새로운 환경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 거겠지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고 괜찮겠지 하며 조금 무리를 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몸져 누워버리게 되었다. 처음엔 하루정도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했었는데, 좀 괜찮아지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해서 열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몇 겹의 이불로 몸을 옥죄듯이 감싸야만 했다.
갑작스레 나를 덥친 이 열병은 밤새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도, 겨우겨우 잠이 들어 다음날 일어나보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짱한듯 싶다가 또 어느 순간 열이 올라 또다시 몸을 꼭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

 

그동안 몸 불편한것 말고는, 주사도 남들보다 쉽게 맞고 큰 통증도 없이 병원생활을 지내온터라, 그  꼴이 괘씸하게 보였던 탓인지, 몇일정도는 병원생활 제대로 하게 해주려나 보다, 생각하며 견디려 마음먹었는데, 이건 정말 처음 사고나던 때보다 더 하구나 싶다.

 

사고 때야 워낙 정신도 없었고, 어차피 인간의 인식이란 간사하기 마련인지라 현재의 고통이 지나간 기억속의 아련한 아픔보다 작을 수는 없겠지만. 이 다른 종류의 아픔의 형식은 지금의 것이 더욱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물론 응급실침대위에 누워서 덜그덕 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의사가 뼈를 맞춘다고 무지막지하게 당겨대는 그 순간에는 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몸을 통해 들려와서, 손바닥을 꽉 물고도 새어나오는 비명을 어쩔 수 없어서, 당기는 힘이 좀 느슨해지고서야 그제야 헥헥 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로 아팠지만. 최소한 그때에는 어떻게든 이 순간을 견뎌 내야겠구나하는 오기라도 솟아올라 앙다문입에 더 힘을 주었지. 지금처럼 이렇게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듯한 아픔에는 아슬하게 떨어지는 링거방울을 멍하게 바라보며 시름시름 앓는 콧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온 몸의 힘이 쭉빠져 이불 끝자락을 겨우 붙들고 있는 손아귀의 힘을 놓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저께는 새벽에 너무 열이 심해져서 도저히 혼자 버틸 수 없게 되어, 숙직서는 간호사선생님까지 불러 주사를 맞아야 했고, 다음날엔 오전부터 열이 오르는 바람에 계속 헛구역질을 해댔는데 몇 일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해 애꿎은 위액만 토해내다가 결국은 거기에 섞여나오는 붉은 선혈을 보아야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진찰을 받고, 혈관이 몸안으로 꼭꼭 숨어버린 탓에 몇번씩 연거푸 찌른 끝에 겨우 링거를 맞고. 여러 번 굵은 바늘로 남의 팔을 쑤셔야했던 미안함이 숨길 수없이 드러나는 얼굴로, 혹시 오실 수 있는 보호자나 친구, 여자친구 없냐고 연거푸 묻는 간호사 선생님의 질문에, 없어요... 라고 몇번씩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헛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생은 지금쯤 아르바이트 갔을 거고, 핸드폰에 저장된 몇몇 친구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갔지만,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면 별일 없을거란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 순간.  아직도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또 내 몸뚱아리 하나 조차 제대로 아껴주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애꿎은 전화기만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간호사선생님은 휠체어에 나를 태워 병실까지 바래다주고, 열을 내려야 하니 꼭 차고 있으라며 너무 차가울까봐서 베갯잇으로 감싼 얼음주머니까지 이불속에 넣어주시고. 근처 약국에서 직접 약까지 타와서는 얼마냐고 묻는 나의 말에, 약값은 나중에 몸나으면 천천히 주셔도 되요, 하고 말하며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간다.

 

식당아주머니는 목이 부어 밥을 먹기 힘든 나를 위해 하얀 죽을 정성스레 끓여주셨다. 나와 병실을 함께 쓰는 강성순 아저씨는 불편한 다리에도 직접 자신의 수건을 적셔 내 이마위에 얹어주고 내가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나 다시 수건을 갈아주신다.

 

이 따뜻한 죽 한 그릇과, 이마를 덥고 있는 수건의 보드라운 감촉과, 타인의 아픈 곳을 미리 헤아려 어루만지는 이 손길 같은,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음악은

sparkle horse - saint mary

(sparkle horse의 리더격인 마크링커스는 약물과다복용으로 어느 호텔방에서 다리가 접질러 넘어지면서 다리가 그대로 꺽여버리는 바람에 병원에서 12주이상의 치료를 받아야했다. 이곡은 마크링커스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때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해준 한 간호사에게 바치는 곡이라고 한다. 결국 이 사고로 마크링커스는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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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병원을 옮겼다. 이사하기 전에 짐을 좀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워낙 살림들이 많았던 탓에, 휠체어에 가득 싣고도 남아서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동생의 양손에 들려야 했다. 거의 두달간을 지내며 이곳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 터라. 아직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병원을 옮긴다는 것에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옮기게 된 이유에는 새로운 곳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결정적으로 이 곳보다 훨씬 싸게 들 병원비 때문이었다.


차로 얼마가지 않아 도착한 곳은 대로변에 위치한 작은 개인 병원이었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검사실로 들어가 이제는 제법 익숙한 포즈로 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엑스레이를 찍고. 그래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주사바늘에 찔려 피를 뽑고, 소변검사까지 한 후에 병실에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거뭇거뭇 해가 저물고 있었다.
놓친 저녁대신 배달시킨 피자를 나눠먹으며 앞으로 병실을 함께 쓰게 될 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투덜거리는 동생을 달래가며 대충 짐정리를 하고. 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새로 받은 어색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서는 겨우 한숨 돌리며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정적.

그 순간, 지금까지 병원에서 지났던 두달간의 시간이 몸속 깊은 곳에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려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또 얼마나 이 낯선 곳에서 몇 주를 아니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견뎌내야 할지. 너무나 낯설고 외로웠다. 심지어 전국에 똑같이 방송될 TV소리마저 낯설게 나를 옥죄어 오는 듯한.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곳은. 두달간 돌아가지 못한 안락한 나의 방도, 거의 일년간을 일했던 '언덕길'도 아닌- 황당스럽게도, 성애병원 572호 입원실이었다. 정말 미칠듯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다친 다리를 조금 접지르면 지금이라도 응급차에 실려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

그 병원에서 나는 '말없는 학생'으로 통했다. 틈틈이 시간이 나면 옥상이나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복도 계단들을 찾아서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했던 나는, 어떻게하다 병실아저씨들의 대화에 끼였을 때에도 주로 듣고만 있거나, 피할 수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맞장구정도를 치는 식이었으니 '조용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을만했다. 하지만 정형외과 병동에는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장기입원환자가 거의 없어서 나는 어쩔 수없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조용한 학생'이라는 어정쩡한 별명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애써 이곳까지 찾아 온 친구에 대한 반가움만큼이나, 그 친구의 어깨에 함께 묻어온 바깥세상의 냄새가 먹먹하게 내 가슴을 조이곤 했던 그런 시간들에는, 간호사선생님들의 친절이 작은 위안을 주고는 했었다.
하루에 세 번씩 있는 형식적인 회진, 그 잠깐의 시간에 내 이름을 불러주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그 시간이 어찌나 고맙던지. 나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어떤 말을 던질지 곰곰히 생각해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던진 그 농이 잘 먹혀들었다 싶다거나,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살갑게 말을 건낸 날에는 한참동안 기분이 들떠있고는 했었다. 퇴원하면 내 이름이야 금방잊혀질 것을, 이 시간의 행복감은 결국 이 때의 내가 얼마나 외로웠었는지는 드러내줄 뿐인 것을 알면서도.

 

*


쉽게 잠이 오지 않았던 그날 밤도, 아침에 깨어보니 끝이 나있었다. 새 병원은 휠체어를 타기 힘들 정도로 복도가 좁은 점이 맘에 걸렸지만 나머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맛이 이상하다는 옆의 아저씨의 말에 지레 겁을 먹어서 인지, 밥도 그럭저럭 씹어 삼킬만했다. 조금만 나가면 대로변의 작은 공원도 있었고, 등나무 밑의 벤치에 앉아서 환자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낮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로 옮긴 병원은 어떠냐고. 어렸을 적. 할머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어느 날 없어졌다는 사실에 울고 불며 때를 쓰는 나를 못 이겨, 시장 통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 한마리를 안고오신 할머니. 아무것도 모른채 뒤뚱뒤뚱 자꾸만 내 품으로 파고들려하는 어린 것을 애써 밀쳐내며,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부러 흘기는 아이처럼. 엄마의 물음에, 성애병원에 대한 일종의 향수병(?)으로 끙끙대던 어제밤의 내 모습이 떠올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미심쩍은 눈길로 병실 안을 다시금 쭉 흘겨보았다.

 

 

 

음악은

식스틴 - 이사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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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언덕길'을 그만두기로 하고 집으로 가던 마지막 퇴근길에 막차를 잡아타려고 부랴부랴 길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고, 지금 두 달째 병원에 입원중이다. '나이브'하고 즐겁게! 군대 가기 전 남은 기간을 보내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바로 다음 주에 텐트 들고 춤추러가기로 했던 세계DJ페스티벌 참가 계획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거기에다 덤으로 왼쪽 갈비뼈가 모조리 나갔고, 왼쪽 다리가 박살났으며, 눈썹의 반이 날아가 버렸다.
왼쪽다리에 무릎에서 발목까지 철심을 박았고 신경까지 다치는 바람에 발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사고가 나고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 뼈가 하나도 붙지 않았다고, 앞으로 최소한 한두 달은 더 이 추름한 환자복을 입고 지내야 할듯하다.
처음 입원하고는 약기운 때문인지 시간은 굉장히 빨리 휙휙 지나가 버려 2~3권의 시시껄렁한 책을 붙들고 낑낑대다 보니 어느덧 한 달이 지나있었고, 전국노래자랑이 왜 이렇게 자주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또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병원에 있으면 심심하겠다고 말을 꺼내지만 실상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주사 맞고, 물리치료 좀 받고, 하루세끼 꼬박 챙겨먹고, 하는 일 이외에는 거의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리지만, 이곳에서는 평소에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던 일상들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 되어다가온다. '밥 먹는 일' '씻는 일' '싸는 일' 심지어 ‘낮잠한번 자주는 일’ 등등 (특히 깁스한 한쪽 다리를 들고 변기에 걸터앉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입원초기에 나는 똥 안 싸려고 소식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답답하거나 힘들지도 않지만, 그저 이따금씩 쌓였던 답답함이 한꺼번에 밀려 올라올 때면 그 짧은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한달 간의 병원 생활을 한꺼번에 지나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동화신고 한강변을 달리던 내가, 고무 냄새 풀풀 나는 물리치료실 바닥에 주저앉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운동이랍시고 하고 있을 때나. 앞으로 나이브하고 경쾌하게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팔랑 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그 순간이 떠오를 때. X-Ray실에서 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온갖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멈춰 서서 의사가 버튼을 누를 때까지 멈춰있는 그 잠깐 순간에 - 내가 지금 여기에서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나. 문득 창밖으로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나 파랗다는 걸 알았을 때. 순간순간 울음이 터져 나올 듯도 하지만. 결국에 이 시간들은 내가 굳이 견디고자 애쓸 필요도 없이 그저 지나가게 될 것을 알기에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달라질 수있는 것도 없기에. (그나마 이런 생각들도 여유가 있거나 좀 살만할 때 그러는 거지, 화장실에서 한번 낑낑 대고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책이라도 좀 읽어두자는 생각에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먹을 것 대신 재밌는 책이나 한권씩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내 침대 옆에는 책이 잔뜩 쌓여있지만, 항상 켜져 있는 TV소리와 항상 누워있는 사람 소리 때문에 말랑말랑한 소설책 한권도 제대로 읽기가 힘들다. 결국 나는 TV관찰과 사람관찰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매진하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4년의 자취 생활동안 TV없이 지내온 나에게, 병실에 있는 TV는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방의 TV채널은 항상 KBS1에 고정되어있었는데 광고가 가장 적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TV의 조그만 화면은 병원을 나서지 않고도 이곳을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5시에는 아마존 밀림을 헤치며 ‘새끼 비버’와 진흙탕에서 뒹굴기도 하고(<동물의 세계>), 30분 후에는 이름도 모르는 쿠바의 한 농촌 마을에서 ‘꿈빠이’아저씨와 룸바를 땡기기도 했으며(<세계는 넓다>), 6시에는 한 시골마을에서 정겨운 아주머니들의 등쌀에 떠밀려 생전 처음 보는 술을 쭉 들이키고 있기도 했다(<6시 내 고향>).
특히 <전국노래자랑>에 대해서는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목욕탕대형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선반위의 작은 텔레비전 속에서 한 아주머니와 먹을 걸로 실랑이를 벌이던 송해 아저씨가, 유재석 빰따구를 두세대는 너끈히 치고도 남을 정도로 진행을 맛깔스럽게 잘한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대발견이었다. 지금도 “빠빠빠빰빠빠~빠 빠바바빰빠빠빠빠빠~빠”로 시작되는 예의 그 시그널송이 들려올라치면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 거릴 것만 같다.


 그런 KBS1 에 대한 우리방의 믿음이 잠시 접힐 때가 있었는데 다른 채널에서 역사극이나 시대극을 해줄 때였다. 방에서 리모컨을 가진 -즉 방장 급의- 아저씨가 그런류의 드라마 매니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역사극이나 시대극은 딱 질색이었지만 차마 나의 그런 적의를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때만 되면 은근히 딴청을 피워야만 했다. 그 아저씨는 열심히 드라마를 보다가도 "이거 재밌지?"하는 은근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피드백을 요구했고, 그때면 나는 얼른 시선을 TV로 돌려 "우와! 결국 저 장수가 이긴거에요?"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맞장구를 쳐야했기 때문이다. <영웅시대>라는 옛 드라마에서 박정희 역을 맡은 배우가 예의 그 모자와 라이방을 눌러쓰고 뭔가 단호한 결단을 내린 듯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빠방한 음악이 배경에 깔릴 때는 정말이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리고 두 번째가 사람구경인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러기엔 나의 글 솜씨가 너무나 형편없어 직접 내 자리에서 한달 간 누워지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스펙타클한 ‘사람살이들’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말로 그만 넘겨야 할 것 같다.

 


 병원에 있으면서 좋은 것 몇 가지는 하루세끼 밥을 꼬박꼬박 먹는다는 내 생애 최초의 식습관과 함께, 평소에는 그토록 지겹던 ‘바깥세상’에 대해서 생겨나는 이 무한한 동경심과,  여기만 나가만 무엇이든 해볼 것이라며 불끈 솟아나는 이 알 수없는 용기인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밥 한번만 같이 먹자는 나의 구애에 몇 달 뒤 아는 형을 통해 몇 달 전 캐나다로 훌쩍 떠나버렸다는 소식으로 화답했던 그녀에 대해(덕분에 난 몇 달간 캐나다 타령을 하고 살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간곳은 미국이었다.) ‘장기전’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이따금씩 데미안 라이스의 Blower's daughter를 들으며 그 바람같은 미소를 떠올리곤 하기 보다는, 절대 안될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욕이라도 시원하게 먹을 정도로 들이 대볼껄 하는 후회와 병원을 나가기만 하면 그때는 피했던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가서 “내가 그때 찝쩍댔던 그 놈이라고, 그 분은 잘 지내시냐고, 그 사람 소식이나 듣게 술한잔 하자고. 내가 살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말을 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 한다거나. 그렇게 완전히 뭉개져 버린 뒤에는 지금까지 지나면서 호감을 가졌던 몇 명의 사람들에게 그 당시에는 ‘저 사람은 나랑 안 맞을꺼야, 아마.’ 혹은 ‘나는 저 사람에게 맞지 않을 거야, 역시.’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토닥거렸던 그 순간들에 떠오르는 여인들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고차원적인 다짐을 하기까지는 수 시간의 쌓임을 필요로 했고, 그전에는 동물원에서 기린과 코끼리를 보고 싶다거나, 한국에서 제일 큰 수족관에서 제일 큰 물고기를 보고 싶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에 가서 미치고 팔짝뛰듯이 춤을 추고 싶다거나, 이적의 신곡을 노래방에서 열창을 하고 싶다거나, 이 구질구질한 환자복 말고 깔쌈한 티셔츠를 입고 싶다거나, TV에서 누군가 팔짝팔짝 뛰거나 재주를 넘을 때 나도 따라하고 싶다거나, 하는 식의 일차원적 욕구가 있었고, 지금은 그저 두 다리로 거리를 뚜벅뚜벅 걸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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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월요일
인디다큐 페스티발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영화를 보다가, 현정누나의 부친상 소식을 들었다. 영화를 보던 중간에 나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경주로 가는 버스 안에 설치된 TV에서는 FTA가 체결됐다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경주 동국대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해 조문을 하고, 오랜만에 프로메 선배들-과거 전학협 운동을 했던- 친구들과 같이 국밥을 말아 먹으면서, 지금처럼 누군가가 죽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하는 일들에만 다 같이 모이겠구나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되었다.
 
화요일
새벽차로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선배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전엔 다 같이 모여 밤새 술을 먹고는 다음날 헤어지기 전에 이렇게 점심을 먹고는 했었다. 낮 동안 뻗어 있다가 인디다큐 폐막작을 보러 아트시네마로 향했다. 표가 매진되어 나와 같은 처지의 육구와 함께 바로 옆 관에서 상영 중이던 조도로프스키의 <엘 토포>를 보았다.
 
수요일
오후 늦게 일어나 아버지 생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서울역으로 향했다. 대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김종은의 소설 <서울특별시>를 읽었다. 마침 2년에 한번 씩 한국에 오는 독일고모가 내일 출국하는 날이라 친척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케잌을 사서 조촐하게 아버지의 생일파티를 했다.
 
목요일
동숭아트홀에서 연달아 영화를 봤다. <포도나무를 베어라> <우리학교> <방문자>.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서 FTA반대 촛불 집회를 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TV를 켜니 100분토론에서 FTA특집을 하고 있었다. 답답했다, 협상의 성과에 대해서만 국가적 차원에서의 손익을 따지고 있을 뿐, 그것이 누구의 이익인지 그리고 FTA로 인해 변화될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FTA에 포섭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아침에 다시 올라가야했는데 늦잠을 잤다. 무겁다는 나의 투정에도 꿋꿋이 엄마는 여행용 가방 한가득 반찬과 먹을 것들을 싸주셨다. 가방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딸기까지 한 상자까지 들려주셨다. 좌석이 매진이라 입석표를 샀다. 서울역 앞에서는 장애인들이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언덕길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청소를 했다. 활동가들에게 4월중에 언덕길을 그만 두고 싶다고 말했다.                  
 
토요일
언덕길 출근. 오랜만에 송현샘 공부방의 근정쌤과 B가 놀러왔다.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다. B의 엄마는 동인천역 앞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그 병원엔 이제 내가 아는 사람만 3명이 입원해있다. 저녁엔 프랑스로 3주간 여행을 떠나는 락이의 환송회를 했다. 일찍 자리가 끝나고 헤어진 뒤 나홀로 언덕길에 남아 <밝은 미래>와 <리얼리티 바이츠>를 보았다.
 
일요일
오전에 수연이가 언덕길에 와서 잠을 깼다. 교회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주구장창 음악을 들었다. 막차를 타고 집에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한강변을 숨이 터질듯 뛰었다. 집에 돌아와서 대구에서 가져온 딸기 상자를 열어보았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버릴까 하다가 그나마 먹을 만한 것을 골라내어 냉장고에 있던 김빠진 맥주와 함께 먹으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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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같이 사진수업을 하고 있는 한 아이가 자살기도를 했다. 모임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서 평소엔 일찍이 와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웬일인가 싶었는데, 느지막이 친구가 와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며 소식을 전했다. 그날 저녁 면회를 가서 병실을 찾다가, 입원자 명단에 있는 이름 옆의 17이라는 숫자가 눈에 밟혀 손가락끝으로 문질러보았다. 각종 호스가 군데군데 연결된 채, 중환자실 침대 위에서 그 애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머리를 예쁘게 잘랐는데 머리를 못 감아서 별로 안 예쁘다고 했다. 도화지 같은 팔에는 손목부터 어깨까지 빨간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바닥이 질척해 내려다보니 오줌통에서 호스가 빠졌는지 바닥이 흥건했다. 곧 간호사가 와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호스를 바로 잡고는 사라졌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기계적이어서 섬뜩하게 느껴졌다. 핏줄이 안보여서 결국 발에다 링겔을 꼽았다면서, 심심해 죽겠어서 간호사에게 겨우 졸라서 책 몇 권을 빌렸다고, 일반실로 옮기면 자주 놀러오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 애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사이다에 아세톤을 섞어서 반통이나 들이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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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데 덮친 격으로.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400여개의 전화번호들을 홀랑 날려버렸다. 물론 그중에서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는 번호는 몇 개 없지만, 그리고 그중에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가끔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번호 목록을 쭉 훑어보면서 이 사람은 요즈음 어떻게 잘 살고 있으려나...하면서 생각하다가,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피식 웃고는 했었는데 이제 그러기는 힘들겠지...날아간 번호와 함께 기억도 영영 사라져가겠지...

 

돌아보면,
2003년에 홀홀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났다. 그때는 정말이지 많이 돌아다니고 부딪히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일어서기도 하고 그랬었다. 생각해보면 그땐 그랬었지 하며 웃음이나는 일투성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땐 왜 그랬을까 하며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올해가 밝아오는 시간에 나는 멍하니 시덥지 않은 컴퓨터게임이나 하고 있었고, 문득  휴대폰으로 시간을 봤을때 어느새 2007이라는 어색한 숫자를 보았다. 나는 해가 바뀌었다는 느낌보다는 지금쯤 종각에서는 사람들이 개떼같이 몰려서 소리치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1월 1일이라는 단순하면서도 기이한 숫자의 조합이 어색해서 한참을 물끄러미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았었다. 그러다가 문득 작년 이 맘 때쯤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때는 피시방 야간 알바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전 타임알바와 교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나니 어느덧 2006년이 시작돼있더라.

 

그리고,
 또 작년 이맘때 즈음, 그러니까 일월도 중반가량 지났을 무렵에 나는 ARCO의 HAPPY NEW YEAR라는 곡을 반복재생해서 듣고 있었고, 이제야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내가 워낙 느려터진 편이라, 올해도 마찬가지로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새해를 맞이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또 다시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작년을 돌아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다. 처음으로 상근비 받아가며 활동을 시작했던 해였지만, 그래서 더욱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얼마 전의 글에서 나의 방황자체를 사랑하자고 다짐했건만, 이건 방황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아무튼!
 2006년은 지나갔고, 2007년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이지 새로운 해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나간 해에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보다도 앞으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백배천배는 더 슬프다. 또 슬픈 건 그 2007년마저 얼마나 여기에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다. 아마 어느 순간 모든 걸 버려버리고 도피하듯 군대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전에 내가 혹은 나를 스쳐 지났던 사람들 한번 씩 만나서 안부인사나 전할까 했었는데 전화번호가 홀랑 다 날아가는 탓에 그럴 수도 없다.

 

그래도...
어찌 됐건 새해는 밝았다. 아마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나이를 쳐먹을수록 나도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좋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사람들은 또 그렇게 똑같이 살아가겠지.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또 그걸 알면서도 새로 시작하려고 하겠지. 그게 빌어먹을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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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나는 지금 몹시도 기분이 좋지 않다. 어제 새벽에  술상을 한번 뒤엎었고, 바로 구역질이 나버렸지만 아직도 진정이 잘되지 않는다. 오늘은 입을 열면 욕지거리가 터져나올까봐서 하루 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비겁하게 말하면, 이제 여기서 발 빼고 싶다. 새벽에 시발놈 어쩌구 하다가 오전에 자고 일어나서 몸은 괜찮냐고 태연한척 물어보는 이 상황이 정말 너무 싫다. 누구는 이것을 서로 바닥까지 가본 경험이라고 소통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흠씬 두들겨 맞고 강간까지 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성장은 상처로 출발 한다지만 이런게 성장이라면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유아기적 투정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늙어버린거든 뭐든 받아들이겠다. 그냥 나는 이게 정말 싫고, 힘들고, 벗어나고 싶다. 이것이 퇴보든 포기든 뭐든 상관없다.

 

물론 한 인간을 단편적으로 하나의 상황만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아무리 백번 양보해서 인정하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나란 놈은 아직 성숙이 덜 된 탓인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으로 그 통합성은 부분을 무마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소통을 불가하게 만드는 시대성은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치열함은 그 모든 것을 ‘과정’이라는 노력으로 치환하고 덮어버린다. 그런데 이게 어디 한 두 번이어야 말이지... 

 

아, 씨발.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보다 더 싫은 건 한 인간을 이렇게나 까대 놓고서 내일 또 다시 어색한 웃음으로 그를 대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만 하고 싶다...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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