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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1/11
    연대의 형식
    흑점
  2. 2006/12/24
    매리(madly) 크리스마스.
    흑점
  3. 2006/11/12
    선언(2)
    흑점
  4. 2006/10/27
    네 멋대로 해라! - 오늘의 짧은 메모(3)
    흑점
  5. 2006/08/04
    나쁜피(2)
    흑점
  6. 2006/08/04
    희망
    흑점
  7. 2006/07/21
    변증법(4)
    흑점
  8. 2006/07/20
    (1)
    흑점
  9. 2006/07/20
    안습.
    흑점
  10. 2006/07/06
    I'm so fine.(4)
    흑점

연대의 형식

인간은 생각지도 못할 만큼 유물론적이고, 생각만큼이나 훨씬 더 관념론적이어서 결국엔 인간은 누군가에게 이해 받기는 커녕 결코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타인일 수밖에 없다.  

 

지하철 칸과 칸 사이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기어들어온다. 그의 한쪽 다리는 의족이었으며 그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그 한쪽 다리가 잘 보이도록 사람들에게 쭉 뻗은 채 처절하게 기어오고 있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왜 인간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치부를 타인에게 드러내며 사람들의 동정을 갈구하면서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은 왜 이리도 나약한 존재일까 하는...나 자신 또한 그렇듯이.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갈구하고 사랑하려고 하고 어딘가에 소속되려고 하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몸을 바치고, 때로는 취하기도 하지만 그 행위는 결코 충족 될 수 없는 공백만 더더욱 드러낼 뿐이다. 인간이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 결국 구원은 자기스스로를 구워하는 자만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말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갈수는 없을까? 라고...

 

*

 

J는 M과 서로의 바닥까지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한거라고 말했다. 그건 정말 힘들고 어렵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라는 건 공동체라는 건 그런게 아닐까라고 말했을 때, 나는 두려웠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럴 자신도 없다. 그런거 싫다! 한 자의식 하는 인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통에의 갈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고, 나는 이제 타협하고 싶다. 이게 타협인지 아닌지는 어차피 알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이고 싶다. 최소한의 내 것은, 그리고 지금 나의 평화와 여유는 지키고 싶다.

 

*

 

출근을했는데 뭔가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장은 넘어졌었는지 부서져 있었고, 바닥에는 흥건했던 핏자국을 닦아내고 남은 얼룩이 져있었고, 군데군데에는 채 닦아내지 못한 핏방울이 튀어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어느 정도 예상되는 바가 있었기에 오후에 온 K에게 물어보니, ‘치열하게’ 술을 마셨다보다, 라고만 대답했다.
저녁 무렵에 J와M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너무도 태연하게 오늘 수고 많았다고 말을 전해왔다.

 

아이들과 함께 김장을 하기위해 배추를 저리다가, 한 아이가 벽을 가리키며 이거 핏자국 아니에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넘겼다. 순간, 도대체 이게 뭐하고 있는 짓인가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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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madly) 크리스마스.

예수는 정말이지 믿어주지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월드컵조차 4년에 한번씩 밖에 못하는 일을 매년마다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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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

-

지금의 내 방 꼬라지와 나의 지금 상태와 나의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는 지금 점점 밀려들어오는 자괴감에 시달릴수록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지고 그래서 더 큰 자괴감에 시달리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있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고 단순하지만 지금의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지 않는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누군가 앞에서 펑펑 울며 하소연하고도 싶지만 그깟 알량한 내 자존심과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는 자의식은 다시 좀 더 높은 벽을 쌓으려 하고, 나는 여전히 홀로 비틀거리고 있다. 도망치고 싶다. 아니 언제나 도망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 여름 나는 여전히 혼자였고, 그래서 외로웠고, 힘들었다. 거리에선 비틀거렸고, 누군가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내가 맡은 나의 삶에 있어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이렇게 나는 무너져 내리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터져 나올 듯 했지만 결국 터져나오지는 않았다.

-여름을 보내며 썼던 글.   

 

*

 

 어제는 학교로 돌아간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가다가 걸려서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학교복도에서 불쌍한 나의 친구들은 서로에게 매질을 하고 있었고, 까맣게 잊은 줄 알고 있었던 선생들이 등장해서 나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어디론가 숨어들었고 나의 엄마는 따뜻한 밥을 해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결국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

 

편지를 받았다. 꼭 나에게만 필요한 말은 아닐 것 같아서 쓴 사람 허락 없이 발췌해서 올린다.
-
S가 일전에 이런 말을 하더라. 자기의 20대는 방황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번 제대로 방황해보지 못한 내 청춘이 서글퍼졌어. 방황은 청춘의 아름다운 전유물이자나. 일종의 통과의례일지도. 근데 나의 청춘은 항상 나의 결의라는 이유로, 언제나 명확한 길이 있었지. 그래서 20대가 저물어가는 지금에서야 꼭 겪어야 했던 의식을 못 치룬 것처럼 무언가 허전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아픔 없는 아름다움이 없는 것처럼 방황은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일테니. 방황이 청춘의 전유물이라면, 현실과의 타협은 성찰하는 사람의 특권이 아닐까. 인간이 완전한 존재일수 없다면,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없자나. 불가능하지.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이 때로 순도 100%의 올바름을 입으로만 떠들다가 갑자기 0%로 가버리지. 성찰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완전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100%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도 결국은 자기 안에서 조금 더 낳아지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겠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너 자신의 모습들과 비교하며 노력하렴. 불가능한 100%에 강박당하지 말고 다만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실에 맞춰서 사는거 그거 어렵다. 남들처럼 사는거. 그것이 지금 세상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라 해서 쉬운게 아니야. 박민규 이야기처럼 죽을 노력을 해야 겨우 평균인 삶이지. 사실 결코 안정적일 수없는 삶이지. 어쩌면 네가 바라는건 ‘안정’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여유’아닐까? 금전적이든. 정서적이든. 그 ‘여유’를 찾는 방법은 아무도 몰라. 다 같이 찾아볼 수밖에.
 
너의 방황을. 그리고 욕망을 사랑하렴. 지금 나의 모습을 나의 운동을 네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지지 못했던 내 20대의 한 조각. 어쩌면 그런 면에선 난 네가 부럽다.
-

 

*

 

머리가 좀 아프고 복잡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달콤했던 잠 덕분인지 나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다. 영화 <린다 린다 린다>의 OST를 다운 받아 헤드폰을 쓰고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버드와이저맥주 한 병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커피를 끓였다.

 

전에 “너는 너 자신을 좀 더 사랑할 필요가 있어”라는 말을 몇 번 들었었는데, 나는 ‘자기애’가 어쩌니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서야 나는 지금 이 삶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외로움을 방황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나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 그 모든 사람들을 세상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닿지 못한 그녀 또한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괜찮다.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쾌한 마음으로 기억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짐들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여전히 무섭지만 두렵지는 않다. 

 

이제 나에겐 오직 전진,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힘이 들겠지만. 때로는 지치고 쓰러지고 헤매이겠지만. 때로는 지금 서 있는 이곳이, 혹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이 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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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해라! - 오늘의 짧은 메모

 독문과 콜로키움에 갔다가 진중권씨에게 내 뒷자리에 앉은 한 철학과 여학생이 계몽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질문을 -니체가 어쩌고 권력이 저쩌고 하는 유치찬란한 말을 빌어 장황하게- 했는데 갑자기 내 얼굴이 빨게 지면서 부끄러워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몇 달 전에 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뒤돌아서 그녀를 볼 필요도 없이, 그녀가 누군가를 만날 때의 양태들과 현재적 시점의 고민들이 눈앞에 빤히 펼쳐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리석었던 나의 지난날들이 참으로 부끄러워졌다. (내가 말을 할 때도 누군가는 공감 혹은 이해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비웃기도 했겠지.)
 

*

 

 우리 모두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대안은 고사하고 한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너무나 많은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실상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소 도식적일 수 있는 설명이지만) 그 속에서 누구는 운동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난한 저항을 지속하려 하고, 또 누군가는 회의와 냉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기도 하며, 더욱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삶에 충실해서 살아가고, 아니 어쩌면 이 과정들을 넘나들며 반복하기도 하는, 그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며 우리 모두는,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보증금100에 월세 10짜리 단칸방을 처음으로 자신만의 공간으로 장만한 30대 활동가의 집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는 쓰레기이다. 그러므로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수밖에...”라고 토해내는 M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때는 운동권적 모럴리즘으로 많은 것들을 재단하고는 했던 순간의 선택들.
때로는 치열함으로, 때로는 그 치열함으로 가장했던 무식함으로, 때로는 찌질함으로, 때로는 쿨한척하는 냉소로, 맞닥뜨려야만했던 그 많은 세상들, 도피하기도 했던, 여전히 두려운 상황들.
인간에게 있어서 결국 궁극적인 문제는 자의식과잉이 아닐까. 좀 더 나이브하게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에 있어서 진정성의 매커니즘은 어떤것일까, 과연 자본주의는 실체일까 그것에 저항한다는건 가능할까, 하는 생각들도.

 

*

 

 뭐 사실 얼마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기간 속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황하고 찌질 대기도 하면서 지금 결국 남은 것은 딱 한가지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을 때까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치기 자유주의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로 그렇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은 우리가 행복해지도록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며, 끊임없이 우리를 억압하고 세뇌하고 조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에 반하는 모든 투쟁을 삶을 지지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 실천을 끊임없이 해나가며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이런 생각이 나 자신의 편협함으로 인해 인류애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삶의 문제에서 힘겨워하고 있는 내 주위의 친구들만은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다. 아직 답장을 하지 못한 편지를 보낸, 감옥에 있는 --도 다가올 겨울을 잘 견뎌냈으면 좋겠다. 가끔 만날 때마다 힘들다고 칭얼대지만 나보다 훨씬 강한 그래서 더 잘해나가고 있는 --도 잘됐으면 좋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때 그때마다 그녀를 다잡아주었던 무언가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고 말하는 --도 더 늙어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이 일하고 있는, 치열하고도 치열한 그래서 위태롭기까지한 활동가들도 계속 밀고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든 과정을 겪어갈 아이들도 내가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 술 한잔 기울이며 지금을 돌아보며 함께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치스런 자의식과 또다시 그것을 인식하는 자의식으로 인해 갈등하는 --도. 하루하루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연장해야만 하는 --도. 지금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도. 나랑은 너무 안 맞지만 그래도 지지하는 --도. 내가 만났던 혹은 스쳐지나갔던 모두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힘을 주는 말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그러기에 앞서 나부터가 먼저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들을 시대를 세상을 담론을 가로지르고 뛰어넘어 탈주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나는 너무나 작고 어리고 어리석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짦은 메모를 남기고 다시금 나를 격려해본다. 힘을 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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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피


“안그런 사람이 어디있겠어, 다 그렇게 살지.”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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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몇몇의 사람들을 만났고, 몇몇 텍스트들을 읽었고, 어떤 일들을 경험 하였지만,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없었다. 아니, 남은 것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한발을 내딛기 힘들게 만드는 ‘두려움’과 그나마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 ‘냉소’이다. 두렵다, 라기 보다는 허망하다. 이제 선택 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물론 인생에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삶들이 있지만, 꼭 그 길로 걸어봐야만 어디어디를 거쳐 가는 것인지, 그 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길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내가 굳이 살아보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이 자리에 멈춰 서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설사 그것이 내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본디 변증법이란 거듭할수록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 일진데, 나의 경우엔 점점 더 반대로 가고 있다. 그건 ‘모호함’의 종류가 아니라 차라리 ‘없음’에 더 가깝다. 누군가는 그런 과정을 ‘성숙’이라고 표현하겠지만, 내 생각엔 ‘늙음’이라는 단어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30대에 세기말 블루스를 절규하던 신현림은 지금은 40대가 되어 희망블루스를 노래한다. 나도 40대가 되면 감히!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치졸한 자기위안이겠지.

 

-
위의 글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 혼자 잠들기 전에-아니 잠들기 힘들었던 새벽에- 생각했던 것들인데,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조금은 다행이다.

*

 

춘천지역공부방연합 캠프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이들을 만났었다. 이 아이들에게 희망이란 것을, 그래도 삶은 살만한 것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에게만은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희망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다. 어떻게든 반드시 이 아이들만은 지켜주고 싶다.

*

 

J는 얼마 전 죽으려고 결심을 했다가 그 와중에 조금은 희망을 찾았다고 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본건 다행스럽지만 희망과 목숨이 결부되어있는 거라면 너무 위태롭지 않은가. 청량리역 광장에서  멍하니 홀로 서있던 그 뒷모습만큼이나.

*

 

-

이제 내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
전에는 무언가 찾아다니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얼까?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인생이 그무엇이라기보다는
아무것도 아닐수밖에 없지만
인생은 그 무엇인가여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찾아나서기도 했던거이다.
나는 이제 기다릴것이 아무것도 없기때문에
내방에서 아무것도 하지않고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밖에는 어떤 인생이 있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사람들에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그럴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런일에 관심이 없다.
나는 내집 의자에 앉아있을 뿐이다.
나는 꿈을 좀 꾸어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내가 무슨 꿈을 꿀수 있겠는가?
나는 그냥 거기에 앉아 있을뿐이다.
나는 잘 지낸다고 말할수는 없다.
내가 거기에 있는것은 그것, 즉 내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거기에 그냥 있는것이 좋을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가 나중에 한번은 꼭 일어나야 할것도 알고있다.

 

-http://hajiyoung.com 에서.

 

한때 이 글을 읽고 너무 공감해서 몇번씩이나 곱씹으며 읽었었다.

 

 



*음악을 어떻게 링크시키는지 모르겠다.

듣고 싶은 분은 아래 주소로

http://blog.naver.com/kjhyun84/10006959951

 

 

BGM : Thee michelle gun elephant - girl friend

 

世界はくだらないから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세상은 따분하니까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世界はくだらないから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세상은 따분하니까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天國はくだらないから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천국은 따분하니까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天國はくだらないから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천국은 따분하니까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希望は虛だらけで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희망은 거짓말투성이라서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だから僕はあの娘と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그러니까 난 그녀와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悲しみでこの世界は 作られているから
슬픔으로 이 세상은 만들어져 있으니까
僕はあの娘と二人で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난 그녀와 둘이서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アルコ-ル ドラッグス ロックンロ-ル ラヴ-アンド-セックス チルドレン
Alcohol Drugs Rock'n Roll Lvoe and Sex Children
この子達は守りたい
이 아이들은 지키고 싶어
爭いはどうして 起こってしまうんだろう
다툼은 왜 생기는 걸까
毆りたいから毆るんだろう 殺したいから殺すんだろう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걸까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걸까
そこに理由はないだろう そこに理由はないんだろう
거기에 이유는 없을 거야 거기에 이유는 없을 거야
悲しみでこの世界は 作られているから
슬픔으로 이 세상은 만들어져 있으니까
僕はあの娘と二人で ぶっとんでいたいのさ
난 그녀와 둘이서 뛰쳐나오고 싶은 거야
ラヴ-アンド-セックス チルドレン
Love and Sex Children
この子達は守りたい この子達は守りたい この子達は守りたい
이 아이들은 지키고 싶어 이 아이들은 지키고 싶어 이 아이들은 지키고 싶어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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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어쩌면 이 블로그에 나보다 더 자주 들락거리는 듯한 군대 간 친구 한 녀석과 싸이로 쪽지질을 하다가, (그 과정과 양태는 완전히 다를지라도 결과적으로 봐서는) 내가 1년 전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쩌면 인생이란 이러한 싸이클의 연속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나의 위치를 지탱하며 버티고 살아남는 것. 그게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첫째로 앞으로 또 다시 다가올 지나간 과정들이 두렵고 무서웠고, 둘째로 아 그것도 이렇게 지나가고 나면 별거 아니겠구나 하는 안심이 들었다. 셋째로는 절대 그래선 안되겠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이런 인생을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하라고? 아무리 니체식으로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디오니소스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렇다, 나에게는  인식론적 단절, 즉 혁명이 필요하다. 그런데...혁명? 무엇을 위한?(What for?)

 

*

 

헌책방에서 산 ‘아이히 호른’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책 제일 뒷장에는

-
*해방통일진군 48년 6월 26일 금요일,
<열린 글방>에서.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변증법적으로 살자!
-

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헌책방에서 주로 책을 사는 나는 <사.사.방.(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이진경)> 사이에 끼여 있던 결혼사진부터 시작해서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뒷장에 쓰여진 식상했던 소설 습작,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저자와 거의 대결해보자는 식으로 밑줄을 긋고 거기에 대한 반론을 적어놓은 <쇼펜하우어 인생론> 등등 많은 재미난 것들을 보았지만, 이 짧고 단순한 메모의 주인이 가장 기억에 남고 또 궁금하다. 앞장에는 이름도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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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90303-022 박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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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학번이면 지금쯤 30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 텐데. 아직도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변증법적으로 살고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정-반-합'의 과정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비닐로 정성들여 책꺼풀까지 씌운 손때묻은 이 책을 헌책방에 헐값으로 넘기면서 그 과정도 끝이 난것일까... 혹시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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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오는 탓인지 왠지 센치해져서는 사촌이 독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주고 갔던 커피포트를 꺼내 물을 올리고, 이런 상황에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얼마 전 헌책방에서 2000원을 주고 산 <상실의 시대>를 펼쳤다. 어차피 이 책은 너무 뻔해서 쪽팔리게 들고 다니면서는 읽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고, 내 책장에 꽂힌 책 중에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책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에 일조했다. 내가 중3때인가 한창 tv광고에 나와서 주가를 올릴 즈음에 친구 집에서 그 친구의 형이 읽던 것을 호기심 반 겉 멋 반으로 빌려서 읽게 되었는데, 그때는 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나름 진지하게 읽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그때 나로서는 ‘젖었다’, ‘펠라티오’ 등등의 성적인 용어들을 잘 이해 할 수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당시 나에겐 그저 소설 초반부 ‘나’와 나오코가 초원을 걸어가며 얘기했던 깊은 우물의 이미지만이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나름대로 센치하게 저녁을 해먹고 다시 책을 펼쳐서 새벽 5시 즈음까지 단숨에 일독했다. 중간 중간에 남아있던 담배 몇 까치를 다 피웠고, 비틀즈의 를 내가 좋아하는 <미쉘>과 <헤이 쥬드>를 곁들여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여전히 이 소설이 왜 그러한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때는 전혜린이 혹은 헤세의 <데미안>이나 까뮈와 니체가, 또 어떤 의미에서는 체게바라 평전이 ‘유행’했던 맥락을 생각해보니 아 그렇구나 싶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저 작년에 들었던 철학수업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교수의 말장난과 논의 수준의 유치한 현학성으로 수업시간 내내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해야만 했던-에서 누군가가 이 책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정의해보겠다던, 주제는 거창했으나 그 내용은 차마 참고 봐주기 힘들었던 발표가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비가 멈추질 않는다. 네이버에서 수재피해 뉴스를 보면서 문득, ‘계급투쟁’이라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 비 또한 누군가에게는 재앙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조금의 귀찮음이거나 혹은 멜랑꼴리한 배경으로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수재민들은 매년 이 지역이 침수가 된다는 걸 알아도 돈이 없어서 이사를 못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이것도 계급투쟁이군 싶기도 하다만은.

 

*

 

대구에 있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전화는 물론이고, 꼭 필요한 용건 말고는 대화가 거의 없는 아버지와 나 사이이기에 어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요즈음 뉴스 보니까 비 때문에 난리라고, 저번에 보았을 때 나의 집 뒤편에 있는 축대의 경사가 꽤 높으니, 혹시 이번 비로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비가 많이 오면 근처 친구 집에서 자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훗 하면서도, 진지하게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물론, 절대 그러진 않겠지만ㅋ) 김규항이었나, 부모가 늙으면 그저 자식 걱정만 하며 남은 인생을 버티는 도인이 된다고 얘기 했었던게...

 

“...잘 지내니?”

 

“네...

 

...아버지도 건강하시죠?”

 

“응...

 

...끊을께"

 

"네..."

 

 어색한 대화들과 더 어색한 공백들로 채워진 짧은 전화통화가 끝나고, 나는 아버지가 늙었구나...생각했다. 예전엔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했던,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진 않겠노라고 그의 얼굴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에게서 보았을 때 그 밀려오는 자기혐오들... 지금은 그저 미안함만이 남아있다. 통화하느라 몇 번 빨지도 못한 채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면서,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상처주지는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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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습.

 더 이상 찌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그 다짐을 반복하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찌질하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오로지 그 사람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안고 싶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심지어 그 누군가와 같이 있어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으면 하는 못된 상상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일년 동안은, 아니 어쩌면 평생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절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를 막고 있는 것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거리도 아니고,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필요한 비행기값 백만원도 아니고, 설사 거기까지 간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도 아니다. 그것들은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나를 막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나의 자리가 없다는 것, 라깡 식으로 말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는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나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나는 그저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 이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있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그 사람의 미소 짓는 얼굴과 그 미소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는 내 모습이다. 울어본지 너무 오래 되어서 눈물이란게 남아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나이기에 과연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지만, 확인하게 되는 그날까지는 절대로 눈물 보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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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so fine.

 얼마 전의 글에서 ‘이제 말을 좀 줄여야 겠다’라고 했지만, 요즈음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고 있다. 이전 같았으면 나의 뿌리자체가 흔들렸을 법한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실실 웃고 있다가 실없는 농담 따위를 던진다거나, 이미 오래전에 했던 과거완료형시점 고민들의 찌끄러기들을 아무런 우러나옴 없이 현재진행형 시점으로 꾸며 잘도 술술 지껄여대곤 한다. 또, 전혀 나의 문제의식으로 다가오지 않는 주제들에 대해 알량한 지식들을 동원해서 젠 척하며 떠벌이는 식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보면 진심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한다. 모든 상황들이 내가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돌아간다. 설사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있더라도 그건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간단하게 경계선을 그어버리면 그만이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언젠가는 곧 산산조각 나고야말 이 평온함을 그럴듯하게 즐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어떤 이의 고민에 대해서 알지만 공감하지 못하고, 공감했다하더라도 공명하지 못한다.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그 사람을 도와 줄 수도, 진심으로 말을 걸 수조차 없다. 그 누군가를 위해서도, 또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걸 알지만 그래도 확실한건 이편이 건강에는 훠얼씬 좋다는 거다.
 
*이렇게 나름 심각하고 진지하고 솔직하게(나름!) 글을 쓰면서도 뭔가가 답답하게 막혀있어서 풀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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