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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29
    신영복,<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흑점
  2. 2007/07/26
    밝은 미래
    흑점
  3. 2007/07/15
    열병(1)
    흑점
  4. 2007/07/13
    이사
    흑점
  5. 2007/07/13
    이혜경, <그림자>중에서
    흑점
  6. 2007/07/09
    아멜리 노통, <오후 네시> 중에서
    흑점
  7. 2007/07/09
    김애란, <달려라, 아비> 중에서
    흑점
  8. 2007/07/09
    미셀 트루니에 <외면일기> 중에서
    흑점

신영복,<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P51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에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이 산골사람을, 서울사람이 섬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 우김질을 어리석다 깔 볼 수도 있겠읍니다만 그렇다면 바다나 산이나 그런 구체적인 경험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가? 물론 없읍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릿속일 뿐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에서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적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P83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 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실현된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경우 이를 도둑이라 부르고 있거니와, 훌륭한 사상을 말하되 그에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이를 무어라 이름해야 하는지...

 

P168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발걸음 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발걸음이라 더디다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 해간다는 사실입니다.

 

P179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없음’입니다. 구경이란 말 대신 ‘관조’라는 좀 더 운치 있는 어휘로 대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관조만으로 시작되고 관조만으로써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
이처럼 대상과 인식주체가 구별, 격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시종 양자의 차이점만이 발견되고 부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자기와는 점점 더 다른 무엇으로 나타나고,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대상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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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미래

앞은 언제나 불투명한 유리가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조금만 몸을 앞으로 내밀기만하면, 와장창하고 깨지는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에 온몸을 베일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 벽을 더듬어보려 했지만, 두손은 희뿌연 허공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멈춰서서 내가 걸어온 흔적들을 되짚어보려했다. 그러면 발자국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계속 걸음을 이어나갈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때 보이는거라곤 온통 질척거리는 진창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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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하기에 아직 새로운 환경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 거겠지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고 괜찮겠지 하며 조금 무리를 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몸져 누워버리게 되었다. 처음엔 하루정도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했었는데, 좀 괜찮아지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지기 시작해서 열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몇 겹의 이불로 몸을 옥죄듯이 감싸야만 했다.
갑작스레 나를 덥친 이 열병은 밤새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도, 겨우겨우 잠이 들어 다음날 일어나보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짱한듯 싶다가 또 어느 순간 열이 올라 또다시 몸을 꼭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

 

그동안 몸 불편한것 말고는, 주사도 남들보다 쉽게 맞고 큰 통증도 없이 병원생활을 지내온터라, 그  꼴이 괘씸하게 보였던 탓인지, 몇일정도는 병원생활 제대로 하게 해주려나 보다, 생각하며 견디려 마음먹었는데, 이건 정말 처음 사고나던 때보다 더 하구나 싶다.

 

사고 때야 워낙 정신도 없었고, 어차피 인간의 인식이란 간사하기 마련인지라 현재의 고통이 지나간 기억속의 아련한 아픔보다 작을 수는 없겠지만. 이 다른 종류의 아픔의 형식은 지금의 것이 더욱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물론 응급실침대위에 누워서 덜그덕 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의사가 뼈를 맞춘다고 무지막지하게 당겨대는 그 순간에는 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몸을 통해 들려와서, 손바닥을 꽉 물고도 새어나오는 비명을 어쩔 수 없어서, 당기는 힘이 좀 느슨해지고서야 그제야 헥헥 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로 아팠지만. 최소한 그때에는 어떻게든 이 순간을 견뎌 내야겠구나하는 오기라도 솟아올라 앙다문입에 더 힘을 주었지. 지금처럼 이렇게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듯한 아픔에는 아슬하게 떨어지는 링거방울을 멍하게 바라보며 시름시름 앓는 콧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온 몸의 힘이 쭉빠져 이불 끝자락을 겨우 붙들고 있는 손아귀의 힘을 놓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저께는 새벽에 너무 열이 심해져서 도저히 혼자 버틸 수 없게 되어, 숙직서는 간호사선생님까지 불러 주사를 맞아야 했고, 다음날엔 오전부터 열이 오르는 바람에 계속 헛구역질을 해댔는데 몇 일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해 애꿎은 위액만 토해내다가 결국은 거기에 섞여나오는 붉은 선혈을 보아야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진찰을 받고, 혈관이 몸안으로 꼭꼭 숨어버린 탓에 몇번씩 연거푸 찌른 끝에 겨우 링거를 맞고. 여러 번 굵은 바늘로 남의 팔을 쑤셔야했던 미안함이 숨길 수없이 드러나는 얼굴로, 혹시 오실 수 있는 보호자나 친구, 여자친구 없냐고 연거푸 묻는 간호사 선생님의 질문에, 없어요... 라고 몇번씩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헛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생은 지금쯤 아르바이트 갔을 거고, 핸드폰에 저장된 몇몇 친구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갔지만,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면 별일 없을거란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 순간.  아직도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또 내 몸뚱아리 하나 조차 제대로 아껴주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애꿎은 전화기만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간호사선생님은 휠체어에 나를 태워 병실까지 바래다주고, 열을 내려야 하니 꼭 차고 있으라며 너무 차가울까봐서 베갯잇으로 감싼 얼음주머니까지 이불속에 넣어주시고. 근처 약국에서 직접 약까지 타와서는 얼마냐고 묻는 나의 말에, 약값은 나중에 몸나으면 천천히 주셔도 되요, 하고 말하며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간다.

 

식당아주머니는 목이 부어 밥을 먹기 힘든 나를 위해 하얀 죽을 정성스레 끓여주셨다. 나와 병실을 함께 쓰는 강성순 아저씨는 불편한 다리에도 직접 자신의 수건을 적셔 내 이마위에 얹어주고 내가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나 다시 수건을 갈아주신다.

 

이 따뜻한 죽 한 그릇과, 이마를 덥고 있는 수건의 보드라운 감촉과, 타인의 아픈 곳을 미리 헤아려 어루만지는 이 손길 같은,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음악은

sparkle horse - saint mary

(sparkle horse의 리더격인 마크링커스는 약물과다복용으로 어느 호텔방에서 다리가 접질러 넘어지면서 다리가 그대로 꺽여버리는 바람에 병원에서 12주이상의 치료를 받아야했다. 이곡은 마크링커스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때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해준 한 간호사에게 바치는 곡이라고 한다. 결국 이 사고로 마크링커스는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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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병원을 옮겼다. 이사하기 전에 짐을 좀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워낙 살림들이 많았던 탓에, 휠체어에 가득 싣고도 남아서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동생의 양손에 들려야 했다. 거의 두달간을 지내며 이곳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 터라. 아직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병원을 옮긴다는 것에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옮기게 된 이유에는 새로운 곳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결정적으로 이 곳보다 훨씬 싸게 들 병원비 때문이었다.


차로 얼마가지 않아 도착한 곳은 대로변에 위치한 작은 개인 병원이었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검사실로 들어가 이제는 제법 익숙한 포즈로 몸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엑스레이를 찍고. 그래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주사바늘에 찔려 피를 뽑고, 소변검사까지 한 후에 병실에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거뭇거뭇 해가 저물고 있었다.
놓친 저녁대신 배달시킨 피자를 나눠먹으며 앞으로 병실을 함께 쓰게 될 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투덜거리는 동생을 달래가며 대충 짐정리를 하고. 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새로 받은 어색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서는 겨우 한숨 돌리며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정적.

그 순간, 지금까지 병원에서 지났던 두달간의 시간이 몸속 깊은 곳에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려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또 얼마나 이 낯선 곳에서 몇 주를 아니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견뎌내야 할지. 너무나 낯설고 외로웠다. 심지어 전국에 똑같이 방송될 TV소리마저 낯설게 나를 옥죄어 오는 듯한.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곳은. 두달간 돌아가지 못한 안락한 나의 방도, 거의 일년간을 일했던 '언덕길'도 아닌- 황당스럽게도, 성애병원 572호 입원실이었다. 정말 미칠듯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다친 다리를 조금 접지르면 지금이라도 응급차에 실려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

그 병원에서 나는 '말없는 학생'으로 통했다. 틈틈이 시간이 나면 옥상이나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복도 계단들을 찾아서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했던 나는, 어떻게하다 병실아저씨들의 대화에 끼였을 때에도 주로 듣고만 있거나, 피할 수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맞장구정도를 치는 식이었으니 '조용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을만했다. 하지만 정형외과 병동에는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장기입원환자가 거의 없어서 나는 어쩔 수없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조용한 학생'이라는 어정쩡한 별명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애써 이곳까지 찾아 온 친구에 대한 반가움만큼이나, 그 친구의 어깨에 함께 묻어온 바깥세상의 냄새가 먹먹하게 내 가슴을 조이곤 했던 그런 시간들에는, 간호사선생님들의 친절이 작은 위안을 주고는 했었다.
하루에 세 번씩 있는 형식적인 회진, 그 잠깐의 시간에 내 이름을 불러주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그 시간이 어찌나 고맙던지. 나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어떤 말을 던질지 곰곰히 생각해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던진 그 농이 잘 먹혀들었다 싶다거나,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살갑게 말을 건낸 날에는 한참동안 기분이 들떠있고는 했었다. 퇴원하면 내 이름이야 금방잊혀질 것을, 이 시간의 행복감은 결국 이 때의 내가 얼마나 외로웠었는지는 드러내줄 뿐인 것을 알면서도.

 

*


쉽게 잠이 오지 않았던 그날 밤도, 아침에 깨어보니 끝이 나있었다. 새 병원은 휠체어를 타기 힘들 정도로 복도가 좁은 점이 맘에 걸렸지만 나머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맛이 이상하다는 옆의 아저씨의 말에 지레 겁을 먹어서 인지, 밥도 그럭저럭 씹어 삼킬만했다. 조금만 나가면 대로변의 작은 공원도 있었고, 등나무 밑의 벤치에 앉아서 환자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낮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로 옮긴 병원은 어떠냐고. 어렸을 적. 할머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어느 날 없어졌다는 사실에 울고 불며 때를 쓰는 나를 못 이겨, 시장 통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 한마리를 안고오신 할머니. 아무것도 모른채 뒤뚱뒤뚱 자꾸만 내 품으로 파고들려하는 어린 것을 애써 밀쳐내며,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부러 흘기는 아이처럼. 엄마의 물음에, 성애병원에 대한 일종의 향수병(?)으로 끙끙대던 어제밤의 내 모습이 떠올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미심쩍은 눈길로 병실 안을 다시금 쭉 흘겨보았다.

 

 

 

음악은

식스틴 - 이사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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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그림자>중에서


*
여자는 막 버려진, 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강아지 같다. 혼자있는걸 못 견뎌서, 그게 누구든 자기에게 손만 내밀면 핥는 강아지. 이런 여자는 상처받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낯선 강아지의 귀여움에 잠깐 홀린 것 뿐이다. 데리고 가서 털을 씻기고 밥을 챙겨먹이고 똥을 치울 사람은 흔치 않다. 지나치던 사람에게 귀염받는 것도 털빛이 살아있을때까지 만이다. 거리의 먼지로 털빛이 꼬질꼬질해지고, 눈빛 마저 허기진 앙칼짐을 띨때면 돌팔매질까지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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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 <오후 네시> 중에서

결핍은 과잉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스승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팔라메드 베르나르댕은 아무런 결핍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쉽지 않은 법이니까.

...


하지만 이웃집 남자의 삶이 공허 그 자체라고 결론 내리는 데에는 그런 극단적인 예까지도 필요치 않았다. 그의 공허는 위고가 묘사한 위대한 공허가 아니라, 비열하고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고 보잘것없는 공허였다. 가엾은 인간의 불평으로 가득 찬 허무였다.
<마지막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그 중요성은 그 어느것에 못지않은> 사항으로, 그 가엾은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도 없고,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아파트 관리인이나 가질법한 감상주의에 빠져들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는 법이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사람이란 사랑없이 사는 경우 다른 무엇에 몰두하는 법, 경마나 포커, 축구, 철자법 개정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일시적으로 스스로를 잊게 해주는 것이라면.

 

*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한번만 하고 말진 않아. 어떤 사람이 어느날 한 행동은 그 사람의 본질에서 나온거야. 인간은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살아가지. 자살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야. 살인자들은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연인들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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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달려라, 아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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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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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트루니에 <외면일기> 중에서

나는 새해의 시작을 구실삼아 그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몇몇 친구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속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 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

 

사진과 문학. 렌즈의 조리개 열기. 조리개를 적게 열수록 장면의 깊이가 깊어진다. 다시말해서 풍경의 깊이가 또렸해진다. 반대로 조리개를 크게 열면 겨냥하는 피사체는 또렸해지는 반면 그 나머지는 모두 흐릿하다. 스탕달: 조리개 3.5.발자크: 16. 왜냐하면 발자크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환경, 배경, 일화 등과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다시 말해서 조리개를 적게 열어 풍경의 깊이가 잘 느껴지게) 독자에게 소개된다. 반면 스탕달의 인물들은 배경이 흐릿한 가운데, 다시 말해서 배경 제로 상태에서 (조리개를 많이 열어 풍경의 깊이가 없이) 인물과 자신만 또렸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

 

지하철역 <벨빌>. 이상하게 생긴 좁은 골목 드누와예 거리 저 안쪽에 보디빌딩 전문'체육관'. 이층은 남성용. 삼층은 여성용. 대다수가 아프리카 출신. '보디빌딩 운동가'의 심리: 일종의 문화활동, 그러니까 결국 어떤 고독에서 오는 불안에 대처하는 처방으로서 자신의 근육숭배. 나르시즘에 의한 구원, 거기에 반복되는 노력에서 맛보는 피로감이 추가된다. 이 노력의 반복은 일종의 금욕과도 유사한 것.

 

*

 

밖으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얼굴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다른 여러기관들과 더불어 의복속에 숨겨져있는 거대한 덩어리인 몸은 빙산의 잠겨있는 부분이다. 그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감옥이란 단순히 문을 잠근 빗장만이 아니라 지붕이기도 하다. 위를 막고 있는 지붕을 경계하라.

 

*

 

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 다가 글을 몇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 들일수 있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각의 틀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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