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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P51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에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이 산골사람을, 서울사람이 섬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 우김질을 어리석다 깔 볼 수도 있겠읍니다만 그렇다면 바다나 산이나 그런 구체적인 경험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가? 물론 없읍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릿속일 뿐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에서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적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P83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 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실현된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경우 이를 도둑이라 부르고 있거니와, 훌륭한 사상을 말하되 그에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이를 무어라 이름해야 하는지...

 

P168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발걸음 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발걸음이라 더디다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 해간다는 사실입니다.

 

P179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없음’입니다. 구경이란 말 대신 ‘관조’라는 좀 더 운치 있는 어휘로 대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관조만으로 시작되고 관조만으로써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
이처럼 대상과 인식주체가 구별, 격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시종 양자의 차이점만이 발견되고 부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자기와는 점점 더 다른 무엇으로 나타나고,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대상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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