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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

예의가 아닌줄은 알지만서도.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누군가들,

- 제가 어림짐작만 할 수 있을뿐이지만,

그럼에도. '당신들'과

-같이 읽고 싶어서.

허락없이 무단으로 서동진님의 블로그에서 글하나를 퍼왔습니다.

아래는 전문이지만, 아래 주소로 가져서 그곳에서 직접보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몽상님에게, 갈대로부터'라는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이제 막 니체를 만나고자 하는 시점에서,

제 욕망들을, 그래도 인정하고자 마음먹던 시점에서,

제가 예술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예술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에서,

지아장커의 전작들을 4편이나 보았지만 그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정작 <스틸라이프>는 보지 못한 상황에서.

한번쯤 개그맨이 되어볼까 고민도 했었던 시기에ㅋ.

이 글을 읽은 터라

지금은 너무너무 슬픕니다. 

 

서동진님의 블로그 주소입니다.

http://www.homopop.org



제가 조금 과했겠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기대를 품고 보는 거의 유일한 영화 감독이라고 할 지아장커였기에 - 사실 그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누구에게서 영화에 관한 우리의 피곤한 연민을 지탱할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 그의 동요나 침체를 더욱 못견뎠겠지요.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예술의 성쇠를 따라다니는 진드기라고 믿습니다. 저는 문학, 미술, 영화, 음악이 있다고 당연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장르와 미적 형식으로서 나뉜 예술로서의 그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당대의 가장 잘 나가는 예술을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울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삐리시절 시인이 되고 싶었고, 대학 초년 시절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대학원시절 록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고싶었으며, 그 뒤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장 잘나가는 예술이 세상에 말을 거는 재주를 가졌고 그래서 예술을 사랑할 온전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게 갈보짓이라면 저는 갈보 할애비라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지금 가장 슬픈 일은 그런 갈보짓을 할 상대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초기자본주의가 소설의 시대 혹은 문학의 시대였다면, 그리고 20세기 초 여명기의 자본주의가 미술의 세기였다면 저는 전후 자본주의의 세기는 영화 그리고 록큰롤 따위의 역사적 시대였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르로서의 특성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시대와 공명하는 독특한 감성적인 능력을 획득하고 또한 발휘했다는 뜻에서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문학의 종언을 지지합니다. 물론 문학은 죽지 않지요. 오락으로서 문학은 건재할 것입니다. 바로크 음악을 완벽하게 재연하는데 몰두한 음악가들이 있듯이 문학을 복제하는 문학가들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역사적 양식을 혼합하고 재연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이를테면 지난 10년간의 한국현대문학이 보여준 장르화되고 양식화된 글쓰기를 보면 잘 알 수 있겠지요. 번거롭게 말해 문학은 세상을 대하기보다는 문학 자신을 대하지요. 그래서 저는 신경숙, 김영하, 성석제같은 소설가들을 무척 싫어하고, 격하게 말하자면 혐오합니다)이 있다면 저는 문학은 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의 독자와 문학의 애호가들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미술에서 이런 풍경은 더욱 가관이지요. 저는 그래서 현대 미술을 가끔 증오합니다.

 

 

그런데 영화로 이야기를 옮기면 사정은 조금 달라집니다. 저는 여전히 영화가 “동시대”적인 예술이라고 믿었고 또한 지금도 아슬하게 믿고 있습니다. 제 공부와 머리가 짧아 잘 모르겠지만 어떤 학자의 말을 흉내 내자면 지금의 “감성적 체제”에 부응하는 것은 영화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지요. “문학이 맛이 갔다고 해서 뭐 그리 슬퍼할 일이냐, 또한 미술이 쫑났다는 것이 뭐 애석한 일인가. 새로운 감성적 체제와 대응하는 그리하여 현실과 상대하는 예술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현실을 체험하도록 조직하는 감성적 질서에 대적하는 새로운 예술은 언제나 발생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것이 영화라고 믿으며, 나는 영화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저는 언젠가부터 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냉소적인 심정으로, “씨발, 지금 혁명적인 예술은 개그아냐? 지금 ‘사모님’ 개그나 ‘홈쇼핑’ 개그보다 더 현실을 삽시간에, 그러니까 찐하게 감성적으로 니가 사는 세상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라고 뇌기도 했답니다(이 대목에서 전 아주 알뜰한 아드로노의 팬이지요)

 

 

하지만 역시 영화에 대한 저의 기대는 접기가 제법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뉴 저먼 시네마” 이후에 사실 영화운동다운 영화운동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요. 저는 미국 인디와 중국 5세대 이후의 영화운동을 영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연구”를 통해 영화의 본원적 자기동일성을 묻기보다는 문화적 정체성과 차이를 묻는 소위 내셔널 시네마니 하는 따위로 전락한 영화 이론에 대하여 폭소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장 뤽 고다르는 누벨 바그 감독이 아니라 프랑스 내셔널 시네마의 감독으로 지역화, 맥락화해야 할까요? 더 나아가 마르크스의 생각은 독일적 문화정체성을 반영하는 로컬 지식인의 아이디어라고 주장해야 옳은 건가요? 물론 그런 생각은 개좆이지요. 세상에 그런 코미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를테면 겉멋들었지만 영화는 세계의 진실을 주장하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던 왕년의 <키노>를 사랑하지만, 내셔널 시네마 따위를 이야기하고 세대, 문화적 정체성, 성별의 정체성 따위에 따라 나뉜 다양한 취향의 세계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영화 아닌 영화를 두고 지지고 볶는 <씨네21>(물론 그보다 못한, 거의 영화의 위엄을 조롱하고 숫제 영화를 장례치르는 데 여념이 없는 싸구려 잡지들은 열외로 치고)을 딱하기 짝이 없게 생각합니다. 그런 너는 그러지 않았냐고 말한다면, 물론 정확히 보신 겁니다. 저는 그랬고, 그래서 90년대의 혹은 그래서 21세기의 표준적 이데올로기가 된 영화에 관한 저능한 주장을 거들었다는데 대한 자책감으로 영화에 관한 어떤 말도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다시 지아장커로 돌아가지요. 저는 앞의 이야기에 비추어 그가 제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영화가 세상에 관하여 무슨 말을 전하고 어떤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가를 반성하며 나온 그 맹렬한, 이를테면 노도윅같은 영화평론가의 말을 빌면, 정치적 모더니즘을, 그 자는 그냥 맥없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슬픈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무능함을 바로 정치적 모더니즘의 상투적인 형식을 통해 감추려고 합니다. 갈수록 그는 더욱 노골적입니다. 그 시절의 모더니즘 영화를 통해 영화에게서 혁명적인 예술로서의 능력을 본 사람들에겐 지아장커의 영화는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화제에서 앞 다투어 모셔 갈 거의 유일한 거장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화에 처량한 희망을 걸고 있는 저같은 이들이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 희망을 대신할 어떤 대역을 찾고자 그에게 온갖 축복을 퍼붓고 싶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얄팍한 짓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영화를 시체검시소에 운반하고 그것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다음의 혁명적 예술을 위해 웃음을 머금고 부고장을 들고 화장터를 나오는 것, 그런 게 필요한 것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애도란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그러면 넌 무엇에서 희망을 거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군요. 그 대목에서 저는 요지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혁명적인 예술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무엇이 예술이 하던 모든 일을 떠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통틀어 지금과 같은 시대가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이 디자인 혹은 광고와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역설적으로 디자인을 예술이 아니라고 역성을 들면서 예술의 아류라고 젠체하는 인간들을 정말 같찮게 여깁니다. 그 인간들은 예술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삼류입니다. 디자인은 사실 일급의 예술입니다. 세상을 체험하는 감성적 질서를 조성하고 가공하는 능력-싱겁게 말해 과학적 지식, 도덕적 지혜, 미적 감성을 우리가 세상과 섞이는 세 가지 앎의 형태로 나눈 칸트같은 이의 구분을 따르자면 말입니다-을 예술에 관한 온전한 정의라고 받아들이자면, 디자인을 우리 시대의 예술이라고 인정하는데 주저하는 것은 정말 촌스럽고 좀스러우며 나아가 더러운 짓입니다.

 

 

일전 어느 디자인평론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디자인을 살리고 나쁜 디자인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의 디자인 “계”에 대하 애착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의 결론은 물론 “디자인” 자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모더니즘 디자인이 보여주었던 놀라운 힘을 생각하며 디자인이 세상을 체험하고 조망하는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리 있습니다. 그러나 디자인은 그 힘을 지금까지 예술이 가져왔던 자명한 능력, 즉 예술은 언제나 세상을 적대적인 방식으로 보아 왔다는 그 능력에 반하여 사용합니다. 그래서 디자인은 예술의 힘을 이용하여 근대적 예술 자체를 죽입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인을 제일 증오합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인이 죽어야 예술이 산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저는 좋은 디자인, 착한 디자인이라고 그 디자인 평론가가 말한 말을 농담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니면 몽상님도 영화와 디자인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거의 아무 것도 듣고 보고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제게는 사실 헤맬 것도 없습니다. 미어터질 듯한 제 싸구려 빌라 집에 친구가 가져다 준 자전거 한 대가 지금 놓여있습니다. 자전거 매니아인 제 매제가 온갖 재주와 돈을 들여 조립하고 장만하 무슨 값 비싸고 귀한 자전거라고 합니다. 그가 선물한 그 자전거를 제게 주었습니다. 역시 자전거 광인 제 친구는 그걸 들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나라로 갈수가 없어, 제게 그걸 처분하는 셈치고, 아쉽고 배 아픈 심정으로, 그걸 제게 준 것입니다. 물론 그건 제게 그냥 평범한 자건거입니다. 외려 비싸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세워둘 외발도 붙어있지 않고, 무슨 거치대를 장만해서 집 안에 모셔두어야 하는 것이 더 성가시고 짜증이 납니다. 가뜩이나 발뻗을 자리도 없는 집안에 자전거 한 대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찮고 불편합니다. 저는 그 자전거를 보면서, 문득 니가 지금 예술의 자리를 닮았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더 말 안 해도 잘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지식정보사회에서, 혹은 지식기반경제에서, 나아가 창의성의 경제에서, 예술이 제 자신의 반현실적 전통을 뒤집어 현실을 엄호하는 일급의 지식이 된 것. 편의를 위한 기능적인 작은 물건이 집을 점령하고 위세를 부리듯이, 세상을 등지고 그 세상을 다음의 세상으로 가게 하는 억센 박차였던 예술이 지금의 세상을 위해 가장 달콤한 알랑방귀를 뀌는 쓰레기가 되었다는 것. 그렇습니다, 뭐. 예술이 간 마당에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 저는 그래서 예술이 언제나 정치에 딸려있다고 봅니다. 예술은 그 스스로 정치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정치의 충격이 없는 한 제 스스로 정치적일 수 없습니다. 예술은 결단코 자율적으로 정치적이지만, 그 자율성을 가지기 위해 언제나 정치의 충격을 필요로 합니다. 정치가 예술을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그렇다면 예술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이고 국정홍보처이며 왕년의 KBS입니다) 예술은 한 번도 정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순간 예술은 자신이길 단념하고 현존하는 질서를 포장하는 감각적 기교로 전락합니다. 감성의 능란한 능력을 숱한 철학자들이 불신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플라톤주의자이고, 아울러 헤겔주의자입니다, 혹은 반하이데거주의자입니다.

 

 

제가 이렇게 횡설수설한 것은 술취한 탓입니다. 실은 깡술을 한병 부었습니다. 무언 글을 하나 쓰려는데 마음이 후둘거려 잘 안나갑니다. 그래서 마감은 일주일 전에 지났는데 여전히 한줄도 안나가고 줄창 술만 마시고 있습니다. 글도 말도 짧아져, 아주 불안합니다. 참 한심하지요. 제가 사랑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이데올로그 파스칼의 아름다운 말. 항상 오해받았던 그의 무시무시한 말,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 말이 진화생물학자의 "인간은 생각하는 원숭이다"보다 더 낫잖나요? 전 원숭이보다 갈대같단 생각을 더 자주 합니다. 제 자신을 단백질로 환원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삶을 제 단백질의 명령 탓이라고, 제 본능의 명령 탓이라고 핑계대는 잡넘들, 잡년들보다야 끝까지 제 생물학적 본성에 저항하는 광기를 저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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