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신현상학 서설 §22

 

이성에 관하여 언급된 이와 같은 내용은 또한 이성은 합목적인 행위다라는 표현으로 대치될 수도 있겠다. 자연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유에 대한 어긋난 생각이 자연을 사유 위에 올려놓는 행위를 나았고 이어서 자연의 외적 합목적성을 축출했던 탓에 목적이라는 형식 자체가 불신대상이 되었다.[1] 그러나 진정 사태는 그렇지 않다.[2]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합목적적인 행위로 규정한 것을 보면 목적이란 [최종목적으로] 처음부터 작용하는 것[3], [뭔가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안주하는] 부동의 것,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다른 것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다. 주체도 이와 같다. 주체의 동력은, 추상하자면, 자아로서의 의식[4],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부정성이다. 결과가 시초와 동일한 이유는 시초가 바로 목적이기 때문이다.[5] 이 문제는 실재하는 것과 그 개념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겠는데[6], 실재하는 것이[7] 그의 개념과 동일한 이유는 다름아니라 바로 애당초 목적으로서 직접적인 것이 자기를[8],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순수한 실재를[9] 바로 그 목적 안에 갖기 때문이다.[10] [실현까지] 완전히 전개된 목적, 달리 표현하면 현실로 존재하는 실재는 엉긴 것이 펼쳐지는 생성으로서의 운동이다. 이렇게 안위하지 못하고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11] 바로 자기다. 이러한 자기가 시초의 직접성 및 단순성과 일치하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자기란 결과로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것이고 바로 이렇게 복귀한 것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는 자신 안에서 자기와 관계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동일성과 단순성[12]이다.



[1]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바로 목적론이라는 편견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고(„necessario existere“), 유일하고(„unicus“), 오로지 자기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하고 활동하고(ex sola suae naturae necessitate esse et agree), 모든 사물의 자유로운 원인(omnium rerum causa libera) 되고, 모든 것이 안에 있고 신에 종속되어 있으며 없이는 있을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다는 사실(„quod omnia in Deo sint et ab ipso ita pendeant ut sine ipso nec esse nec concipi possint“)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목적론의 동기로 사람들이 자신이 욕망을 가지고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것처럼 자연도 역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자연의 모든 사물이 그들처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살아 움직인다“(„omnes res naturales ut ipsos propter finem agere)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런 편견이 우상이 되어 신이 자연을 인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의 최종목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데 (omnium rerum causas finales intelligere easque explicare) 전전긍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최종목적을 쫓는 목적론은 질문에 질문을 거듭(causarum causas rogare)하지만 최종목적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지의 망명지인 신의 의지로(ad Dei voluntatem hoc est ignorantiae asylum) 도주하여 안위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자를 자연의 사물을 학문하는 자세로 인식하려고(res naturalis ut doctus intelligere) 하지 않고 자연과 신의 통역자(naturae deorumque interpretes)로 행세한다고 한다. 아무튼 사물이 신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면 이것은 신의 무결성(perfectio)을 지양하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떤 목적 때문에 신이 활동한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뭔가를 욕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원문 . 스피노자가 말한 것과 달리

[3] 원문

[4] 원문 ürsichsein>

[5]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4개 원인 (causa materialis/질료인, causa formalis/형상인, causa efficiens/동력인, causa finalis/목적인)과 관련이 있다. (형이상학, 13장과 자연학, 2 3장 참조). 그리고 헤겔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에서는 목적인, 형상인, 동력인이 하나라고 했던 것에 기대어 (자연학, 27, 198a 24 이하 참조) 주체를 설명하는 것 같다.

[6] 원문 < oder>

[7] 원문

[8] 원문

[9] 원문 . 정의로서의 개념적인 실재

[10]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에 기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형식(eidos), 혹은 원형(paradeigma)이 사유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바로 개별적인 것의 본질(ousia)이며, 개별적인 것이 그런 [유의] 개별적인 것이 (to ti en einai) 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정의로 이어진다. 여기서 정의란 헤겔의 단순한 개념이상의 것이 아닌>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첫째 요인(proton dia ti)을 사람이 사람이 되는 최종규정(eis ton logon eschatonanágetai)과 같게 하여 이것을 원인(aition) 혹은 원리(arche)라고 하고 이것은 존재하는 그 무엇의 형식, 즉 본질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같은 곳 참조).

[11] 원문

[12] 원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