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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9

(§39) 참과 거짓은 [사유행위와 사유된 것을 구별하는 오성으로서의] 사유가 하는 행위의 산물인 명제에[1] 속한다. 오성이 하는 일이란 사유된 것들간에 [참과 거짓을 나누는] 엄격한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들이 마치 독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통용되는 양 그들을 그 경계선의 이쪽저쪽으로 갈라놓고 그들을 서로 교통하는 법이 없는[2] 요지부동하고 고립된 것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진리를 주조된 동전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바, 우선 진리는 [진짜] 동전마냥 서로 주고 받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가해져야 할 것이고, 이어서[3] [위조된 가짜 동전이 있듯이] 거짓된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악이 특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듯이 거짓된 것도 역시 특수한 형태로[4] 존재하지는 않는다.[5] 거짓된 것과 악한 것이 특수한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악하고 거짓된 속성을 지닌] 악마와 같은 것이 되는데, 그들이 악마와 같이 [그런 속성을 지니고 그 무게에 눌려] 삐딱하게 한쪽으로 치우쳐[6] 존재한다면 좀 웃기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저 악한 것, 거짓된 것으로서 [어디에다가도 갖다 붙여놓을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악한 것과 거짓된 것은 서로 구별되는 [유령이 아무 곳에서 들어앉지 않듯이] 저마다의 고유한 기질(氣質)[7]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은 여기서 차치하고 거짓만을 살펴보겠다. 거짓된 것이 [독자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지의 내용인 실체의 타자, 즉 실체에 부정적인 것이 되겠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 그렇지 않다.[8] 실체란 본질적으로 스스로 부정적인 것으로서 [거짓된 것에 속한다는 부정적인 것은] 사실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을 통해서 실체는 스스로 내용을 구별함과 동시에 규정하는가[9] 하면, 또 애당초[10] 자기와 지를 확실히[11] 구별한다. 사람인 이상 뭔가를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은 지가 그의 [대상인] 실체와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불일치가 [실체에 스며있는] 본질적인 힘이 되며[12], 그렇기 때문에 실체에 실체 자체를 통해서 구별이 생겨나는 것이다.[13] 이런 구별에 [따른 분열은] 틀림없이[14] [통일을 이루는] 일치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일치가 진리인 것이다. 이때 일치가 진리가 되는 것은 마치 슬래그를 제거하고 순수한 금속만을 취득하듯이, 아니면 완성된 항아리에서 도구로 사용된 틀을 떼어내듯이 하는 불일치를 내팽개쳐버림으로써 남게 되는 그런 진리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부정으로서의 불일치는 [실체의] 자기로 [앞서 불일치를 거쳐서 생성된] 진리에 [아직 움트지 않은 단순성의 형태로][15] 보존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된 것이 참된 것의 한 마디가[16] 되거나 심지어 진리의 한 구성요소를 이룬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거짓된 것이든지 간에 뭔가 참다운 것이 있다는 식의 표현에서는 참과 거짓이 마치 서로 융화될 수 없는 기름과 물처럼 단지 겉으로만 어울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과 거짓이라는 표현이 뭔가가 서로 완벽하게 달리 존재한다는 면을 가리킨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완벽하게 구별된 존재양식이 지양된 상태라면 참과 거짓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주관과 객관, 유한과 무한, 존재와 사유 등의 통일이라는 식의 표현이 어정쩡한 표현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관과 객관 등등의 통일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사용되는 <주관><객관> 등등의 표현이 통일되기 이전에 가졌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통일된 상태에서는 그런 표현이 다른 의미를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된 것도 더 이상 거짓된 것으로서 [생성된] 진리의 한 계기가[17] 되는 것이 아니다.



[1] 원문 . 사유가 이렇게 구별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함으로써 사유된 것을 사유한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는 사상>을 사유결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한 것 같다. 사유결과로서의 , , 그리고 언어분석철학이 이야기하는 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명제>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는 이런 명제에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이 적용된다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뭔지 몰라 사전을 뒤적거려 <보리수>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그러나 Lindenbaum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리수>란 말을 듣고서 Lindenbaum이 뭔지 알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ein Falsches> 그리고 <ein Boeses>. <개별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부정관사에 주의해야 한다.

[5] 하나 사유에 총력을 기울인 플로틴에 이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그노시스의 이원론에 대항하여 </malum>이 독자적인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선의 전제아래 존재한다고 한다. “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선의 결핍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Quid est autem aliud quod malum dicitur, nisi privatio boni?) (출처: Enchiridion de fide, spe et charitate Liber unus/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안내서 1, 3.11). 악을 이렇게 이해하는 전통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까지 이어진다. “[선과 악은 관련되어 있는데], 악에 의해서 선의 결핍이 이루어지는 것에 한해서 그렇다. 여기서 자명한 것은 악이란 것이 있다면 이것은 선의 결핍이란 것이다.”(… inquantum per malum privatur bonum. Ex hoc autem ipso est aliquid malum, quod est privativum boni.) (출처: 신학대전 2 1 질문 42)

[6] 원문 악한, 나쁜>. 한쪽으로 기울어진>란 본래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7] 원문 . 하면 역자는 꼭 <귀신>이 떠오른다.

[8] 원문

[9] 언어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sortal predicate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이것이 바로 헤겔이 이야기하는 개념의 운동이다.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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