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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정체성

ou_topia님의 [어린이를 뮈토스화하는 독일 개혁교육학 비판] 에 관련된 글.

 

"Der Mensch lebt noch überall in der Vorgeschichte, ja alles und jedes steht noch vor Erschaffung der Welt, als einer rechten. Die wirkliche Genesis ist nicht am Anfang, sondern am Ende, und sie beginnt erst anzufangen, wenn Gesellschaft und Dasein radikal werden, das heißt sich an der Wurzel fassen. Die Wurzel der Geschichte aber ist der arbeitende, schaffende, die Gegebenheiten umbildende und überholende Mensch. Hat er sich erfaßt und das Seine ohne Entäußerung und Entfremdung in realer Demokratie begründet, so entsteht in der Welt etwas, das allen in die Kindheit scheint und worin noch niemand war: Heimat."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 원리, 마지막 부분)
 
"인간은 어떤 곳에 살든지 아직 역사의 문턱 바깥에서 살고 있다. 아니 전체와 그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아직 세계창조를, 올바른 세계로서의 창조를 기다리고 있다.  참다운 창조는 태초가 아니라 끝[장]에 있다. 이 창조는 사회와 현존재가 급진적이 될 때, 즉 자신에게 손대는데 있어서 뿌리까지 내려갈 때 비로소 착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근데 역사의 뿌리는 분명 노동하는, 창조하는, 주어진 것을 뒤집어 바꿔 새로 짜 맞추는 가운데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그가 자신을 스스로 움켜쥐고 자기주변을 외화와 소외 없이 현실화된 민주주의 바탕에 굳게 세우고 그것이 완성될 때 비로소 세상에 생성되는 것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번득이면서 유아기로 비춰 내려가는 것, 하지만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 바로 고향이다."(ou_topia)        
 

 

 

이 말이 일부가 거짓임을 알게 된 것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될 때였다. 이 희망의 세계가 참작하는 욕망이 아무런 매개 없이 충족되는 유아기는 어린이를 감싸고도는 부르주아의 유년기임을 한 순간에 깨닫게 되었다. 왜 거짓이냐고? "모두에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한 사람을 내 주장의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    


한국에 나가면 가능하면 바로 시골 고향에 간다.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라 상수도, 하수도가 없고, 화장실도 물론 재래식이다. 그러나 전혀 불편하지 않다. 모든 것이 좋다.


어렸을 때 말 안 듣고 부잡하기로 유명했다. 매를 때리려고 해도 도망가 버려서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먹히는 주문이 하나 있었다. “계속해서 그러면 00에게 장가보낸다.” 란 말이었다. 옆집에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살았는데 정말 못 생겼었다 (미안해!). 장가간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나에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그 여자아이를 몇 년 전에 만났다. 얼마만인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가정주부였다. 그녀의 언니가 아직 시골 고향에 살고 있는데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늘 00이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전화했다.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너무나 반가와 한다. 짝지랑 같이 만났는데, 짝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녁을 같이 하는 동안 내내 내 옆에 앉아서 내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내가 니를 언만큼 조아했는지 니 아냐. 00댁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숨어서 날 훔쳐봤단다. 내가 피해 도망 다녀서.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갔다. 00이는 식구와 함께 일찍 고향을 떠났다.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손은 시베리아에서 벌목하다 독일로 이주하여 공장에서 막일하는 독일계 아저씨의 손, 석면제거공사장 막일노동자의 손과 다름없다. 거칠다.


00이네는 정말 못살았다. 이건 내가 그 당시 알았던 것이 아니다. 당시 알 리가 없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힘겨운 일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 집에서 빌어먹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걱정 없이 자란 내개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안다는 것도 한국의 70/80년대에서 무산자가 어떻게 살았을 거라는 추상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고향을 떠난 후 고향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한 번도 없단다. 그리고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단다. 그때 순간적으로 고향이 다 고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 정체성의 본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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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쟁탈

근대의 전쟁이 속도전이 되고 총력전이 되었다고 해서 고지쟁탈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지에 성을 쌓아올려 놓고 거기에 들어앉으면 그만이었던, 근본적으로 방어전이었던 중세의 고지가 대포의 도입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평지에서의 "대중"군대의 육박전으로 대체되었다고 해서 고지개념이 낙후한 것이 된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 3세의 대군을 격파했던 몰트케의 속도전, 총력전은 고지의 추상적 사용에서 나온 것이다. 과히 추상적이라 할 만한 합참이란 고지를 만들어서 고지를 개념화하고 개념적으로 사용한 결과였다.

이른바 좌파는 사회주의 운동이 쟁탈한 모든 고지를 쓰레기처리하고 이상야릇한 말들로 대체했다. 대포가 나왔는데 고지에 성 쌓는 일이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이냐 하면서 육박전과 같이 알아먹기 힘든 "대중", "Multitude" 등등을 운운한다.

근대전과 현대전의 본질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이런 글을 읽으면 정말 짜증난다. (새로운 주체로서 대중과 대중운동의 방향, 진보평론  제28호, 윤수종, 전남대 교수/ 사회학과)

들어가는 질문부터 확 짜증난다.

"왜 인간들은 마치 노예상태가 자신들의 구원인 것처럼 완강하게 자신들의 노예상태를 위해서 싸우는가? 왜 대중은 복종을 달게 받고 있는가? 왜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억압을 자청하고 있는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고 똑같다. 니가 그렇게 멍청한 놈으로 취급받는 것은 니 잘못이고 니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니가 알아서 헤어 나와야 해!

 

지랄, 빠져 나오려고 하면 뚜드려 패는 놈이 없었나?

계급정의와 관련해서 레닌을 한번이라고 읽어 보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 뇌주름 한 가닥이라도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자 그러면 대중 개념을 맑스주의적 맥락과 연관시켜 좀더 파악해 보자. 맑스주의 논의에서는 자본주의사회의 기본계급이면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로 설정되는 노동자계급이 있다. 그런데 사실 노동자계급 개념은 배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노동할 필요가 없는 소유자들로부터 노동자를 구분하고 또한 노동자계급을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식으로 말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노동자계급 개념은 농업, 서비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과 구분하면서 산업노동자들만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가난하고 임금을 받지 않는 가사노동자들 및 임금을 받지 않는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구분되는 ‘모든 임금받는 노동자들’을 나타낸다. 대중은 반대로 열리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계급정의가 무슨 동물세계의 분류학과 같은 거였나? 제발 레닌의 계급정의를 좀 읽어봐! 카테고리적인 규정(kategoriale Bestimmung)이잖아! 그래서 가장 열려있고 포괄적이잖아! 논리학 기본부터 알고서 좀 떠들어라. 그래야 읽을 가치라도 있지.

넘, 짜증나서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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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3

분석과 비판의 능력 부족으로 우선 연구해야  할 방향만을 스케치해 본다.


테제: 현재의 자본주의는 시민운동과 [전통]노동운동이 연대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연구방향

1. 노동운동과 계몽과의 관계

0 우선 두 사람의 대조적인 행보가 눈에 뜨인다. 계몽을 주체의 문제로 설정한 칸트한테 가서 결국 다시 존재론-역사적 존재론이라고 하지만-으로 떨어진 푸코에 영국에 가서 계몽을 "combinations of the poor against the rich"의 문제라고 인식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moral science" [사회과학]을 참조해서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가 대비된다.

"Laws are continually made against combinations, but the secret combinations of the low against the high can never be prevented, because it is founded on the interest of the many, and the moral sense of all." (Anna Laetitia Barbauld, zit. nach: Dietmar Dath/Barbara Kirchner, Der Implex, Sozialer Fortschritt, Geschichte und Idee, Berlin 2012, S. 88)

0 이게 무슨 의미인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2. 현재의 자본주의와 가치론에 대한 연구

0 진보넷 바깥블로그 EM님이 제시한 틀을(http://socialandmaterial.net/?p=3593) 참조한 공부가 되겠다.

- 정신노동(문화 등등)이 자본의 밑으로 실질적으로 종속되는 과정과 그 현상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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