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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5

파울 첼란은 아우슈비츠에 갔다. Nach Auschwitz.


아도르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nach Ausschwitz”-철학이다.
 
“문화비평은 [오늘날] 문화와 야만 간의 변증법이 다다른 마지막 단계에 맞서있다: nach Ausschwitz 시를 쓴다는 건 야만이다. 이런 문화비평은 오늘날 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는지 발언하는 인식 역시 부식(腐蝕)한다.”(„Kulturkritik findet sich der letzten Stufe der Dialektik von Kultur und Barbarei gegenüber: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und das frisst auch die Erkenntnis an, die ausspricht, warum es unmöglich ward, heute Gedichte zu schreiben.“)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 (1951). In: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d. 10.1. Frankfurt/M. 1980. S. 11-30)

 

Nach Ausschwitz. 번역하기 어렵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니다. 전치사 nach 뒤에 지역이름이 따르면 보통 방향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Nach Jerusalem!”(예루살렘으로!)에서와 같이 특별한 지역이나 도시이름이 따를 경우에는 그 도시나 지역이 상징하는 것을 취하려 간다는 긍정적인 방향성의 의미가 있다.

 

“nach Ausschwitz.” 그럼 아우슈비츠에 가란 말인가? 그렇다. „Nach Aus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아우슈비츠가서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이다. 정말 그렇다.

 

추상과 보편으로 접근할 수 없는 사건이 아우슈비츠다. 정리하여 뒤로 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래서 거기에 가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는 아우슈비츠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가  과연 통과할 수 있는 문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아우슈비츠에 간 첼란은 ‘우리’가 되어 함께 죽음의 우유를 마신다. 그리고 ‘죽음의 푸가’를 쓴다.

 

“아우슈비츠가 개별적인 인간성의 역사적인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란의 글이 여하튼 여전히 시로서 가능하려면 개별적인 인간성의 지속가능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또한 출발점으로 삼으면 죽음의 푸가는 그가 말하고 있는 소름끼치는 것을 필연적으로 놓친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필연적인 일탈에 고귀한 도덕적, 감성적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그 가치는 시에 스며있는 의식, 즉 바로 저 모순이야말로 지양될 수 없다고 철두철미하게 두루 인식하는 의식을 통해서 규정된다. 죽음의 푸가는 제목과 형식에서 이 모순을 받아들였다.” ("Geht man davon aus, dass Auschwitz das geschichtliche Ende der individuellen Humanität bedeutet - doch sie hat viele Enden, sie geht nicht auf einmal zugrunde -, Celans Text ihre fortdauernde Möglichkeit aber voraussetzen muss, um als Gedicht überhaupt noch möglich zu sein, so wird man zwar zugeben müssen, dass die Todesfuge das Grauen, von dem sie spricht, mit Notwendigkeit verfehlt; zugleich aber wird man diesem notwendigen Verfehlen einen hohen moralischen und ästhetischen Wert zuerkennen. Er ist bestimmt durch das volle Bewusstsein, welches das Gedicht selbst von der Unaufhebbarkeit dieses Widerspruchs besitzt. Ihm verdankt die Todesfuge ihren Titel und ihre Form." Peter Horst Neumann: Schönheit des Grauens oder Gräuel der Schönheit? In: Geschichte im Gedicht. Texte und Interpretationen. Herausgegeben von Walter Hinck.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79. Seite 230-237. 재인용: http://www.celan-projekt.de/)


첼란의 죽음의 푸가를 모르고 바흐의 푸가를 즐기는 건 역겹다. 윌프리드 오웬의 시를 소화한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진홍곡’(War Requiem)을 모르고 카톨릭 ‘진홍곡’을 즐기는 건 역겹다.

 

사회주의는 이런 지양불가능한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다 자본주의 아래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 일몽님이 레닌의 ‘어쩌고 저쩌고’하는 만트라에 구토하는 이유가 있다. 아우슈비츠에 간 부르주아의 사유에 한 참 뒤져 있다. 사회주의 지속가능성 혹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유해야 하는 사회주의의 지양불가능한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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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4

어떻게 자기 자신의 죽음을 표상할 수 있을까? 자신의 부재를 상상하는 에고(ego)가 주체로 살아 있고 현재하는데 이게 어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에 대한 표상은 항상 타자의 죽음이다. 사물(Ding)로 떨어진, 생명과 함께 주체가 사라진 것으로서의 타자다. 죽음의 실체는 주검이다.

파울 첼란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표상하고 있는가?

먼저 자신이 남김없이 죽어서 완전한 타자가 되어야 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엄마의 아기가 되어서?

 


어느 한 촛불 앞에서
 

망치로 두들겨 편 금으로, 그렇게
하라고 내게 간곡히 당부한대로, 어머니,
촛대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거기로부터
솟아 올라온 촛불 하나가 [독: 여성] 저를 어둠의 한가운데로
산산조각이 난 시간들의 한가운데로 인도합니다:
당신의
주검(Todsein)의 딸이.

(...)


Vor einer Kerze

Aus getriebenem Golde, so
wie du’s mir anbefahlst, Mutter,
formt ich den Leuchter, daraus
sie empor mir dunkelt inmitten
splitternder Stunden:
deines
Totseins Tochter.

 

 

(파울 첼란의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에서 나찌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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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난민 인권 유린 사건

연합뉴스:

“독일 최대 인구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주에 있는 한 외국인 난민 수용소.
이곳 사설 경비요원이 수갑채워진 두 손을 허리춤에 둔 채 엎어져 있는 난민의 목을 운동화 신은 발로 짓밟는 사진 한 장이 독일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보도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슈피겔 )

 

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1.난민의 인권을 유린했다?

 

독일 기본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제일로 삼는다. 그러나 법현실은 그렇지 않다. 난민 ‘관리’법인 망명법은 기본인권을 제한한다. 이동의 자유와 취업이 제한되어 있다. 기본적인 인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인권유린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망명이 인정되기 전에는 독일 사회로의 융합에 필수적인 독어 교육을 자비로 부담해야 한다. (망명인정 등 체류허가가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는 무료 독어교육 실시)

 

최근 망명법이 개정되었다. 발칸반도의 신티와 로마 사람들을 신속하게 추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개정의 골자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등 3국을 ‘안전한 국가’(sicheres Herkunftsland)로 규정해 신티와 로마 사람들이 아예 망명 신청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개정 망명법이 연방하원을 통과한 후 연방상원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거래(quid pro quo)가 있었다. 주정부의 구성상 개정 망명법이 연방상원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녹색당 소속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리 크레취만이 찬성함으로써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여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이동의 자유와 취업부분에서 난민의 권리를 신장하는 것이 크레취만의 거래였다. 이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녹색당과 좌파당의. 그리고 이들은 최근 난민 인권유린사건에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난민의 인권신장은 소홀히 하고서는.

 

2.치안의 민영화

 

파견노동과 치안의 민영화는 사민/녹색 연정아래 완성되었다.

 

지난 20년간 민영보안회사는 4000개로 두배로 뛰어 올랐다. 2013년 종사자는 18만 5천에 매출액은 50억 유로를 넘어섰다. (2014.10.1 슈피겔, http://www.spiegel.de/kultur/gesellschaft/private-sicherheitsdienste-staat-lagert-verantwortung-aus-a-994647.html)

 

업무내용도 건물관리에서 경찰에 의한 치안 고유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2012.6.14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 http://www.bpb.de/politik/innenpolitik/innere-sicherheit/76663/private-sicherheitsdienste?p=all)

 

반면 경찰인력은 지난 몇년동안 1만 6천명이 감원되었다.(2014.10.2 쥐드도이체짜이퉁, http://www.sueddeutsche.de/politik/private-sicherheitsdienste-in-deutschland-schwarze-sheriffs-schwarze-schafe-1.2155031)

 

이번 난민 인권 유린이 발생한 부르바흐의 난민수용소 경비는 소관당국이 저렴한 European Homecare라는 회사에 위임하고, 이 회사는 다시 뉘른베르크에 있는 보안회사 SKI에 하청을 주고, 이 회사는 다시 더 저렴한 하청기업을 사용하였다. (앞 슈피겔 기사)

 

3.사건 연루 경비원

 

마르쿠스 H. (30세)는 극우주의자일 거라고 한다. 하박에 네오나치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문신 “Ruhm und Ehre” (명예와 영광, 히틀러 친위대의 구호)이 있다. (2014.9.30 슈피겔http://www.spiegel.de/panorama/justiz/fluechtlingsheim-burbach-wachmann-traegt-neonazi-tattoo-a-994681.html)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다. 주변화된 사람들이 많다는 게  문제다. 민영 보안업종은 다른 업종보다 임금이 현저하게 낮으며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임시고용인인 경우가 허다하다. (앞 독일 연방정치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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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3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이 과연 쇼아를 살아남은 사람일까?

 

첫 연에서 느껴지는 건 대화대상의 부재와 현재의 동시성이다. 아무리 말을 건네도 돌아오는 말이 없는 상황에서 시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것 같다.

 

“[비켜갈 수 없고] 꺼지지 않는 고통은 온 몸에 가해지는 고문으로 갈기갈기 찢긴 사람이 울부짓지 않을 수 없듯이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는 지어질 수 없다는 말은 어쩜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허나 그보다 덜 하지 않는, 문화 [전반]을 문제시하는 질문, 즉 우연히 [쇼아를] 비켜간 사람이,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사람이 아우슈비츠 이후에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계속 살 수 있는지, 그렇게 살 권리가 있는지 묻는 질문은 잘못된 게 아니다. 그의 연명은 부르주아 주체성의 근본터전인 냉정을, 아우슈비츠를 가능하게 했던 냉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Das perennierende Leiden hat soviel Recht auf Ausdruck wie der Gemarterte zu brüllen, darum mag falsch gewesen sein, nach Auschwitz ließe sich kein Gedicht mehr schreiben. Nicht falsch aber ist die minder kulturelle Frage, ob nach Auschwitz noch sich leben lasse, ob vollends es dürfe, wer zufällig entrann und rechtens hätte umgebracht werden müssen. Sein Weiterleben bedarf schon der Kälte, des Grundprinzips der bürgerlichen Subjektivität, ohne das Auschwitz nicht möglich gewesen wäre[.]”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III. 형이상학에 대한 성찰, I (아우슈비츠 이후))

 

파울 첼란은 자유죽음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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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메모

1. 근.중동이 장차 취할 모습은?

 

이에 대한 미국 주도 유지동맹(coalition of the willing)의 전략 부재.

 

미국은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empire of logistics”를 중동에 구축. 그러나 전략 부재. ‘병참’은 ‘전략’의 뒤를 따르는 거 였는데, 현재 중동 상황은 ‘병참’은 있지만 ‘전략’, 즉 일정한 목적과 이를 수행하는 군대 부재. 아랍권의 유지동맹도 마찬가지.


ISIS 혹은 ISIL만 전략적으로 행동. 즉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현재의 중동을 거부하고 중동지역의 향후 모습에 대한 청사진 제공.

 

2. 혁명적 패배주의

 

사회주의 세력이 운운하는, 다시 말해서 관념적으로만 참조하는 ‘혁명적 패배주의’를 현재 중동 상황에 적용하면  ISIL 만이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닌지. ‘혁명적 패배주의’는 조직된 세력의 존재(군대)와 일정한 전략 및 정권획득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ISIL의 ‘혁명적 패배주의’는 기존 아랍 국가들의 붕괴로 이어질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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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afer Youssef, Sweet Blasphemy

http://www.youtube.com/watch?v=H4YoqEDGI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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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2

첫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렵다. 누가 누구에게 청원하고 있는가?

 

우선 뭘 청원하는지 보자. 살구씨를 세는 일. 똑같이 반복되는 손동작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달라지는 게 없다. 뭔가에 붙잡혀 그만 둘 수 없는 일 같다. 마치 공장에서 그저 흐르는 시간에 맞춰 같은 손동작을  반복하듯이. 걷어 차버리고 일어 섰으면 하는 바램이 굴뚝 같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의 배경은 쇼아(홀로코스트)다.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은 쇼아를 살아남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쇼아의 ‘경험’(여기서 경험이란 말을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이 어쩜 시간을, 인간이 본원적으로 향유하는 시간을,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합성된 시간을 파괴하여 순차적으로 그저 흐르기만 하는 선형시간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선형시간의 지배아래 그저 순차적인 시간을 모방하여 하나, 하나 세기를 반복하는 멜란콜리아의 지배아래 있는 쇼아 생존자가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닌지.

 

그렇다면 청원이 아니다. 청원하는 일이 이미 현실이다. 청원이 아니라 최소한 안쓰러운 마음이다. ‘그래, 그렇게라도 해라. 그게 달램이 된다면...’      

 


그래, 살구씨를 세어라 [일일이]
그래, 널 갈기갈기 찢고 잠못이루게 했던 걸 세어라 [반복해서]
나도 그래, 같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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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I.
1    Zähle die Mandeln,
2    zähle, was bitter war und dich wachhielt,
3    zähl mich dazu:

II
4    Ich suchte dein Aug, als du’s aufschlugst und niemand dich ansah,
5    ich spann jenen heimlichen Faden,
6    an dem der Tau, den du dachtest,
7    hinunterglitt zu den Krügen,
8    die ein Spruch, der zu niemandes Herz fand, behütet.

III
9    Dort erst tratest du ganz in den Namen, der dein ist,
10  schrittest du sicheren Fußes zu dir,
11  schwangen die Hämmer frei im Glockenstuhl deines Schweigens,
12  stieß das Erlauschte zu dir,
13  legte das Tote den Arm auch um dich,
14  und ihr ginget selbdritt durch den Abend.

IV
15  Mache mich bitter.
16  Zähle mich zu den Mandeln.

 


시 연 I)

3개의 청원하는 명령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청원하는 것인지 그 주체와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시 행 1)

zähle
- 모델 독한사전 : (수를) 세다; 헤아리다, 일일이 세다; ...의 수에 달하다, ...의 수를 이루다; 계산에 넣다, … 속하다; 값이 나가다, 효력이 있다, 가치를 인정하다, 의미를 갖다; 믿다, 기대하다

- 어원사전 : 영어의 ‘to tell’과 어원이 같음. ‘보고하다’, ‘이야기하다’

- 연상 : 화창한 늦가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은행을 일일이 씻고 있는 할머니. “이거슨 내 일 이랑께.” 신동엽의 ‘조국’.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zähle die Mandeln
- ‘살구씨를 일일이 세어라’ 왠 뜬금없는 살구씨야?

 

시 행 2)

bitter
- 모델 독한사전 : 쓴; 괴로운, 아픈; 찌르는
- 어원사전 : beißen (깨물다), Beil (도끼)와 어원이 같음. 상처를 입히는 것, 둘로 쪼개는 것

 

zähle, was bitter war und dich wachhielt
- 아팠던 것과 널 깨어있게 했던 것을 일일이 세어라.

 

아팠던 것과 깨어있게 한 것과의 관계
- 예레미야 1장 살구나무 가지 비유  :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하고 나서 주님이 묻는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냐?” 내가 대답하였다. “저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네가 바로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 보고 있다.”(11-12절) 원문 schkd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schaked (샤케드 : 살구나무) 아니면 schoked (쇼케드 : 지켜보다)가 됨.

- 살구씨, 즉 날 둘로 쪼개는 아픔과 깨어 지켜보는 일은 질료적으로 같은 것.
깨어 지켜보는 이는? 시적 주체의 대화의 대상은?
 

시 행 3)

zähl mich dazu:
- 연상 : 할머니, 나도 씻어 줘. 나도 씻어 거기어 더해 줘.
- 시적 주체는 몸소 어떤 프로세스를 거치는가? 씻김?

- 연상 : 1986년 (1987년 이었던가?) 베를린 세계문화(들)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 'Horizonte'(지평들)에서 선 보였던 진도씨낌굿. 기나긴 하얀 원단을 몸으로 둘로 가르면서(찟으면서) 나가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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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싸가지 부재론'에 대한 단상

 'Quid est ergo tempus? Si nemo ex me quaerat, scio; si quaerenti explicare velim, nescio'.

(그럼 시간이란 대체 뭔가? 그걸 나로부터 쥐어짜내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면 알겠는데, 쥐어짜내서 보여주라고 으름장을 받고서 설명하려고 하면 모르겠소. 성 아우구스티누스)

 

 

싸가지란?

 

질문이 잘못되었다.

 

싸가지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은? (what are we talking about when we talk about ...?)

 

“사랑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에서 레이먼드 카버가 보여주는 것은 사랑을 정의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화자 멜(Mel)이 그때그때마다 (독: je und je) 현실로 나타나는 사랑을 – 손짓, 몸짓, 표정 등으로 현실화되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놓친다는 점이다.

 

싸가지는 타입(type)이 아니라 토큰(token)이다. 쉽게, 뭐냐고 물어보면 아리송하지만, ‘보면’ 접하면 금방 알아볼 수 있는 게 싸가지다.

 

왜 그런지 살펴본다.

 

싸가지란 말의 사용의 구체적인 상황을 사상(捨象)하고는 싸가지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이 구체적인 상황은 일반화될 수 있겠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놓고 하는 말이다.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더러 “싸가지 없다”하지 않는다. (이건 정말 싸가지 없는 짓이다.) 싸가지는 이런 너와 나의 관계(Ich-Du-Beziehung)에서 사용된다. 제3자의 입장에서 어떤이의 어떤사람에 대한 말 혹은 행동을 놓고 “싸가지 없다”할 때도 역시 이런 ‘너와 나의 관계’가 추상되어 ‘어떤이의 어떤사람과의 관계’속에 스며있다.
    

그럼 손아랫사람의 뭘 놓고 싸가지 있다 없다 하는가?
 

여기서(독일) 태어나서 우리말을 잘 못하는 녀석들도 어른들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피워도 고개를 돌리는 등 어디서 배웠는지 어려워한다.

 

뭐야? 무슨 관계야? 왜 그래? 반권위주의적인 교육을 받은 친구들이 아닌가?

 

부정적으로 손아랫사람과 손윗사람의 관계는 권위주의적인 관계다. “귀때기에 피도 안마른 놈이 …” 할 말을, 해야 할 말을 못하게 한다. 그리고 싸가지를 주문한다.

 

근데, 싸가지가 주문의 대상인가?

 

주문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이미 사라진게 싸가지다. 주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달라고 손을 내미는 순간 손바탁에서 문드러지는게 싸가지다. 주문자는, 합당하게 주문한다 할지라도, 바로 꼰대가 된다.

 

싸가지 있는 녀석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싸가지 없는 녀석들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이 기분의 바탕에는 치유될 수 없는 병[자]의 위로가 있다. 중턱을 넘어서 하강하는 삶은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것, 후회막심한 것, 다시 한번 살게 된다면 달리 하고 싶은 것 등 충만한 삶의 ‘부정적인 우토피아(유토피아/eu-topia가 아닌 몸둘 곳이 없는 우토피아/ou-topia)’가 있다.

 

싸가지 있는 녀석들은  이 병을 위로해 준다. 손윗사람의 시간성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손윗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싸가지 있는 녀석들은 입을 열기전 이 시간성을, 밤에만 피어오르는 하얀 박꽃을 보는 능력이 있는 녀석들이다.   
   

지금 진행되는 ‘진보의 싸가지 부재론’은 이곳 블로거 藝術人生님이 이야기한 진보의 ‘역사와의 단절’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걸 명쾌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어야 겠지만 오늘은 이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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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칼 크라우스의 "언어" - 싸가지론 논쟁에 대한 단상을 대신하여

언어의 형태(Gestalt)가 아니면 의미전달(Mitteilung)에 입각하여 언어에서의 말의 가치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둘 다 [언어를 사용하는] 탐구수단에 의해서 [언어란] 질료의 일부가 되지만, 그 어는 점에서도 공통의 인식으로 만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시구의 청진과 언어사용의 퍼켜션 사이에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세계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위의 두 갈래 시도에서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는 일은 둘 다 언어란 유기체와 동일한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의 모든 영역에서, 시편에서 시작해서 지역보도기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연법칙성이 의식(Sinn)에 의미(Sinn)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입자인] 불변화사가 논리적인 전체를 포괄한다는 규범을 관통하는 것은 저 자연법칙성 외의 그 어떤 원소(Element)도 아니며, 어떻게 한없이 한찮은 것을 위해서 한 시구가 피어나고 시들어지는지 그 비밀을 관통하는 것 역시 저 자연법칙성일 뿐이다.  

 

최근의 언어학은 [언어의] 규칙성을 넘어서 창조적인 필연성을 인정하는데까지 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창조적인 필연성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Sprachwesen)과의 연관을 알아차리고 읽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규칙성에서도 [언어의] 정형과 기형을 기록하는데에는 공을 세웠지만 본질적인 인식에는 제몫을 다하지 못한 과거 언어학과 같이 인간과의 연관을 읽어내지 못했다.

 

저들이 시적 자유라고 일컫는 게 단지 운율법상으로만 구속된 것인가? 아니면 보다 깊은 합법칙성에 의존하는 것인가? 그게 언어사용에서 작용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이런 작용의 연속하에 마침내 언어사용이 규칙이 되어서] 결국 규칙이 언어사용에 의존하게 되는게  아닌가? 말의 선택에 대한 책임성 –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야 할 이 선택, 하지만 실지로는 가장 쉽게 행해지는 이 선택 – 이런 책임성을 갖는 것, 이 건 글쓰는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요구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이 책임성을 깨닫는 일, 바로 이 일에 있어서 언어교육자들이 부족하다. 이 일의 요구에 충족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자칫 심리학적인 문법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러나 학교문법선생들과 마찬가지로 언어교육자의 부족함은 말의 심적 공간에서 논리적으로 사유할 줄 모르는데 있다.   

 

언어뿐만 아니라 말하기와 관계하는 훈계의 활용은 절대 말하기(sprechen)를 배우는 사람이 또한 언어(Sprache)를 배워야 한다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이건 분명 말형태(Wortgestalt)를 파악하는 가운데 직접 유용한 것 저편 (jenseits des greifbar Nutzhaftenen)에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영역으로 접근하는데 있다. 이런 도덕적인 수확의 보증은 벌 받지 않고 해칠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언어를 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기준으로 책임성을 책정하는 정신의 훈육(Disziplin)에 있다. 삶을 좋게 하는 모든 것(Lebensgut)에 대한 경의를 가르치는데 이런 훈육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다.

 

과연, 언어적인 주저(Zweifel/의심, 회의)보다 더 강력한 도덕적인 것의 보호(Sicherung)를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주저에 모든 물질적인 소망에 앞서 사유의 아버지가 되는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오늘날의 모든  말하기와 글쓰기는, 전문이의 그것을 포함해서, 경솔한 결정의 진수가 되어서 언어를 사건과 체험을, 있음과 그러함을(ihr Sein und Gelten) 신문이 하라는 데로 하는 시대의 쓰레기(Wegwurf)로 만들었다. 주저(Zweifel)는, 언어의 덕택일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 경멸의 대상이 된 커다란 재능으로서의 주저는 틀림없이 문명의 종말로 이끄는 진보를 제지하는, 문명에 봉사한다고 망상하는 진보를 제지하는 구원[의] 힘일 것이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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