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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신냉전 - 우크라이나 대출

Losing Credibility
The IMF’s New Cold War Loan to Ukraine
by MICHAEL HUDSON

번역: 일몽

 

마이단 광장의 폭동과 2.22 쿠데타 직후이며 5.2 오데사 학살을 한달 여 앞둔 2014년 4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우크라이나 군사정권에 대한 170억 달러의 대출프로그램을 승인했다. 정상적인 IMF의 관행은 한해에 한 나라에 할당된 할당액의 2배까지는 빌려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8배였다.

그로부터 4개월 후, 키예프가 동부 돈바스 지역에 대해 인종청소를 실시하려던 시도에서 실패하기 시작했을 즈음인 8월 29일, IMF는 자본도피로 인해 국제수지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전에 정신이 없는 쪽에 최초의 대출을 승인했다. 지불능력에 아무 문제없다는 허구적인 예측에 따라, 우크라이나 통화의 가치가 더 떨어져서 훨씬 더 적은 유로, 달러와 같아지기 전에 올리가르히의 은행들이 돈을 빨리 서방의 경화 구좌로 옮길 수 있게 IMF 대출은 우크라이나 통화를 지원했다.

이 대출은 IMF가 미국 냉전정책의 신체임을 보여준다. 키예프는 대출을 동부 지역을 공격하는 군사비에 사용했으며, 대출조건은 마치 이 조건이 국가재정을 안정시킬 것이라는 듯이 늘 그랬던 것처럼 긴축예산을 부과했다. 키예프의 공격으로 발전소, 수도시설, 병원, 민간인 거주지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아 주요기반시설이 파괴된 동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의 없다. 민간인 거의 백만 명이 러시아로 도피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IMF는 “IMF는 현재 진행 중인 충돌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에 대한 정부의 헌신에 찬사를 보낸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수출의 4분의 1이 동부지역에서 나오며 주로 러시아로 수출된다. 그러나 키예프는 돈바스 산업지대에 폭격을 해서 탄광에 전기를 끊어버렸다.

이 대출은 IMF에서 일하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그리스에 대한 재앙적인 470억 달러짜리 대출을 둘러싸고 노골적으로 터졌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불화를 낳을 것이다. 당시 IMF의 사상 최대 대출이었던 그리스 대출로 인해 50쪽짜리 내부 문서가 나왔고 월스트리트저널로 새어나갔는데, 보도에 따르면 IMF는 “긴축처방이 그리스 경제에 입힐 피해를 심각히 과소평가했다.” IMF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은행을 지키려는 유로존 국가들의 압력을 비난했는데 그 은행들은 그리스 정부의 부채를 너무나 많이 갖고 있었다... 원래 IMF는 2009년부터 2012년 사이 그리스가 경제생산의 5.5%를 잃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실질 국민 총생산의 17%를 잃었다. IMF는 2012년에 15%의 실업률을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25%였다.

IMF 협정문은 명백히 지불능력이 없는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작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 IMF 경제학자들은 “빚을 갚을 수 없는 국가들에게” 악성대출을 함으로써 규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실질적으로 IMF는 정부가 은행과 채권소유자들을 얼마나 구제하려고 하든 상관없이 그냥 밀고 나간다. IMF는 지출을 삭감하면 빚을 갚을 능력이 더 나빠지는게 아니라 더 향상되는 것처럼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는 너무나 놀랍도록 그리스의 상황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년에 IMF의 한 임원은 IMF의 채무 지속가능성 분석(Debt Sustainability Analysis)이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라고 했으며, EU 집행위원회의 한 임원은 그것을 가리켜 ‘아이들을 재우게 하는 동화책’이라고 했고, 그리스 재무부의 한 임원은 ‘과학적으로 완전 허튼 소리’라고 했다.

John Helmer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Dances with Bears의 추산에 따르면 “5월 초 IMF가 우크라이나 재무부에 지급한 32억 달러 중에서 8월 중순까지 31억 달러가 해외로 사라졌다.” 이러한 사실은 IMF 대출이 군사정권이 도입해서 정부 내부자가 가로챈 “추악한 외채”(odious debt)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IMF는 중앙은행이 그들 복합기업의 일부로서 은행을 운영하고 있는 클렙토크라트(강도정치인)들에게 돈을 그냥 넘겨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뿐 아니라 중앙은행은 주요 클렙토크라트들을 위해 동부를 군사공격하는데 자금을 대고 있는데, 그 정치인들은 주로 마이단 쿠데타의 배후에 있는 인물들이다) “은행에 대한 정부 증권과 부채 비율은 2010년 말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자산총액의 28%에서 2014년 4월 말 56%로 올랐다.” 재정상태가 악화일로인 탓에 우크라이나의 주요 은행들이 지급불능을 막기 위해서는 IMF의 170억 달러 구제금융 이후에도 50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보도되었다.

10월로 예정된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동부는 투표할 상태가 전혀 아니고 군사정권은 공산당만이 아니라 그들이 싫어하는(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방송국과 언론사를 금지시켰다. 전쟁을 지지하는 주요 정당들은 (9월 초 현재) 여론조사 결과 심지어 서부에서도 지지율이 매우 낮기 때문에 라이트 섹터(Right Sector)와 그 동맹인 네오나치 민족주의자들 - 이들은 그 자신의 사병을 투입시키고 있는 올리가르히 이고르 콜로모이스키가 이끌고 있다 - 은 지체 없이 쿠데타를 경고하고 있다.

전쟁에서 질 경우 흔히 정권교체가 일어난다. 쿠데타의 유령이 다시 한 번 키예프의 거리와 광장을 배회하고 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정부군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포로셴코에게 겨누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현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세 번째 마이단[독립광장 저항운동]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번 마이단의 선동자들은 콜로모이스키의 돈으로 만들어진 토벌군의 전투원들이다. 콜로모이스키가 포로셴코를 상대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밑에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사병을 거느리고 있다.

IMF와 미국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의 민영화 계획

우크라이나의 주된 문제는 부채가 달러와 유로로 표시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IMF 빚을 갚기 위해 외화를 늘리는 방법은 단 하나, 가스에 대한 권리와 농업지대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파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미국이 지원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콜로모이스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상원 2277 법안은 “미국 국제개발청이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의) 석유와 가스 개발을 위한 매 단계마다 대출을 보장할 것을 지시한다.”

최근 조 바이든 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은 사이프러스에 등록된 우크라이나의 석유, 가스 회사인 부리스마(Burisma) 이사회 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회사는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나서 오래전부터 미국이 선호하는 기업이 되었다. 부리스마는 수압파쇄법(프래킹)으로 가스를 추출할 예정인 곳을 군사목표로 만들 정도로 키예프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노보로시야 통신은 웹사이트를 통해 지역 주민들의 말을 인용하여 우크라이나 포병들이 지난 3개월간 폭격과 포격을 가했던 동부 슬랴반스크 인근에서 셰일가스 생산장비를 설치하는 것을 돕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간인들은 우크라이나군의 보호 아래 시추장비를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주민들은 장비가 더 오고 있는 중이며, 군이 앞으로 가스를 추출할 지역을 포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보고서는 “친러시아”라는 말이 가스 장악에 반대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Yzovka 셰일가스전 한가운데 있는 슬랴반스크 사람들은 과거 수도 없이 개발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심지어 이 문제로 국민투표를 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체코,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나라는 그 지역에서 셰일가스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이 나라들만이 아니라 극히 중요한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2주 전 독일은 지하수 오염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앞으로 7년간 셰일가스 시추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IMF의 지원 의도는 국제수지를 압박하기 위해 유럽의 대러 의존을 줄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생각은 가스 수익이 줄어들면 오늘날의 신냉전에서 러시아의 기동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황당하게도 미국과 콜로모이스키가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콜로모이스키는 그가 소유한 Privat Bank를 통해 부리스마의 실소유주다. 그는 “쿠데타 정권에 의해 우크라이나 중남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콜로모이스키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족을 살해하는 야만적 민병대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관여해왔다.” “러시아족”(ethnic Russian)이라는 용어는 국가의 천연자원을 민영화하려는 클렙토크라트들에 의한 프래킹에 반대하는 주민행동과 같은 말이다.

도네츠크에서 키예프 병력이 파괴한 전기, 수도시설을 복구하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춥고 어두운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키예프는 동부에 대한 연금과 기타 세입 지출을 중단해왔으며, 그것이 동부의 분리주의를 거의 확실하게 만들었다. 마이단 사건이 터지기도 전부터 지역주민들은 독일과 다른 유럽국들이 반대했던 것과 똑같이 프래킹을 못하게 하려고 막았다.

또한 그들은 클렙토크라트들과 특히 몬산토 같은 해외 기업이 땅과 기타 재산을 처분하는 것에 반대했다. 몬산토는 우크라이나에서 유전자조작 곡물 프로젝트에 투자해왔으며, GMO에 대한 저항에서 우크라이나를 유럽의 아킬레스 힐이라고 보고 있다. 오클랜드 연구소의 최근 보고서 “Walking on the West Side: the World Bank and the IMF in the Ukraine Conflict”는 우크라이나의 농토 사용에 대한 규제를 풀어서 미국을 비롯한 해외 투자자들에게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IMF와 세계은행이 어떤 압력을 넣고 있는지 설명한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 IFC)는 “우크라이나 법과 정부령에서 농산물의 강제인증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고” 살충제, 첨가물, 기타 등등에 관한 규제에 의한 “불필요한 기업비용을 제거할 것을 우크라이나에 권고했다.”

러시아나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아직 유전자조작식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가 GMO 농작물을 수출할 수 있는 길은 미국 외교관들이 유럽에게 GMO 표시를 못하게 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밖에는 없어 보인다. 이것은 미국이 대러 제재를 부과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 둘이서 싸우게 하겠다”) 미국과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 사이에 또 하나의 쐐기를 박을 것이다.

 

계속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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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아리스토텔레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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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2권 1972b 18-30을 인용하며서 「엔치클로페디아」를 마친다. 자신이 논리학이 위에서 인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좀(?) 장황한 ‘번역’이란 말인가?


어쩜, 헤겔을 얼른, 한큐에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한 부분의 ‘번역’이 헤겔의 논리학이라고 하고픈지 모르겠다. 암튼, 번역에 덤벼본다.

 

근데 좀 까깝하다. 중.고의 초보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장구조와 어휘는 그렇다치고, 첫 문장부터 뭔 말이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과연, 그리스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뒤적거려보니까, 저런 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의를 위해서 끄적거려논 거란다. 그럼 그렇지, 누가 저런 말을 이해할 수 있어?

 

‘헤 노에시스 카트[ㅎ]아우텐’ - 보니쯔(Bonitz)는 ‘das Denken an sich’로 번역한다. 우리말로는 아마 ‘사유 자체’ 정도로 번역될거다.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물자체’(Ding an sich)와 같은 용법인가? 수박 겉핥기의 사유가 있고 진짜 사유가 있단 말인가? 첫 문장은 동사도 없다. ‘이다’가  주로 생략되기 때문에 ‘이다’를 첨가해서 읽어본다. 사유는 자체는 ‘투 카트 아우토 아리스투’, 뭐지? 2격의 기본 의미인 소유의 의미로, 사유 자체는 좋은 것 자체에 속한다? 그리고 [그 자체] 최고의 사유는 [그 자체] 최고로 좋은 것에 속한다? 그게 왜 그래?

 

로스(Ross)는 “The thought which is independent of lower faculties must be thought of the best object.”(Ross, Vol 2, 373 쪽)라고 주해한다. 입의 욕구, 눈의 욕구, 머리의 욕구를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3층 심리학에 입각하여 ‘사유 자체’란 먹고싶은 욕심, 지각하고 싶은 욕심 등과는 거리가 먼 무슨 고귀한 거란 말인가? 이런 건 우선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어려운 말이 아니라 먹고싸는 일을, 인간이해의 중심에 바로 세운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상점의 디스플레이를 깔끔하게 잘하는 상점주인 정도인가?

 

그리고 ‘노에시스’가 명사의 형식으로 등장한다고해서 과연 명사로 취급할 수 있을까? 사랑이 사랑하는 행위외 다른 게 될 수 있을까? 사랑 자체? 너나 먹어.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Noesis’?

 

1.독일에 음악하러 온 유학생: (2년동안 계속 시험에서 떨어지다가 마지막 시험에 붙은 후) “엄마, 나 오늘 시험 붙었어.”
엄마: “정말! 잘 했다, 내 딸. 조타아~~!!”

2.베를린 시장 보베라이트: “Ich bin schwul und das ist gut so.”(나는 게이다. [니들이 뭐래도] 좋다.
 
 
‘헤 노에시스 카트[ㅎ]아우텐’은 앞의 사례와 같이 말주고받기(Redepraxis/말실천)에서 드러나는 두 개의 차원을 전제하는게 아닌가 한다. 즉, 대상 차원(Objektbezug) – 시험에 붙음, 게이라는 사실 – 과 그 대상차원을 놓고 행해지는 이런저런 말하기다. 후자의 ‘메타차원’이 ‘헤 노에시스 카트[ㅎ]아우텐’이 아닌가 한다. [전문]용어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메타차원’의 말주고받기에서는 ‘좋다/안좋다/나쁘다’가 기본범주다. 식욕의 현실이든 눈욕의 현실이든  머리욕의 현실이든 그렇다. 그리고 집단을 이루고 사는 인간은 그가 속하는 집단의 짜임(Verfassung, Constitution/헌법현실)과 관련해서 가장 강도 높게 ‘좋다/안좋다/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의미의 복합체’(Sinngefüge)를 이룬다. 멍청한 내 머리로도 뭔가 이해된다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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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8

붕어와 꿀꿀이

 

나는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다.

기후도 이젠 믿을 만한게 아닌가 보다. 가을인가 했더니, 왠걸, 느닷없는 무더위에 몸이 끈적끈적해졌다. 이런 몸을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누운 날, 짝지는 돼지라고 멀리한다. 등을 돌리고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

빵이 없다. 난 돼지라 아무것이라도 마구 먹는데, 짝지는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출근길에 빵을 사가지고 가겠다고 집을 나선다.

의례의 반복으로 연속되는 동거, 내 사람과 나만이 아는 암호를 인사말로 나누는 가운데 동거를 확인하는 의례, 이런 의례의 하나로 짝지는 출근 후 제일먼저 내게 전화한다.

“꿀꿀인데요.”
“여기 붕어. 뭐 잊어먹은지 알아? 빵.”

우리의 암호까지 잊어먹어서는  안되는데. 그래서 어항 한바퀴를 돌고나면 먼저 반드시 우리의 암호를 확인한다.

“여기 꿀꿀이 – 여기 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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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유럽을 말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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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http://online.wsj.com/articles/karl-theodor-zu-guttenberg-the-return-of-europes-sleepwalkers-1409786698)

독일국기 색깔의 불길을 의식하지 못하고 안위하는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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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조국이 없다?

공산당 선언은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Die Arbeiter haben kein Vaterland.”)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아무런 설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사실로 애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면 그리 자명하지 않다. 상당히 많은 전제와 설명을 요구하는 주장임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즉, “노동자들에게 없는 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는 없다”(Man kann ihnen nicht nehmen, was sie nicht haben.”)란 문장에서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란 서술이 “지구는 자전한다”란 명제와는 다른 의미구조를 갖고 있음이 인지된다. 이 문장의 진리조건이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노동자의 형성은 ‘고향’(patria=아버지가 산 곳)의 상실을 전제한다. 이 상실은 역사가 애기해 준다. 그리고 노동자가 마주하는 ‘조국’은 ‘고향’의 형식이 아니라 국가의 형식이라는 것 또한 역사가 말해준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와 조국과의 관계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다.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란 문장에는 뭔가 빠져있다. 노동자와 조국의 관계는 부르주아지로 매개된 관계다. 달리 표현하면, 노동자와 조국과의 관계에는 노동자와 부르주아지와의 관계가 깔려있다. 노동자와 조국과의 ‘참다운’ 관계는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공산당 선언은 이 투쟁의 길이 민족적이라고 한다. “첫 단계에서”(zunaechst)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통치권”을 장악하여 “민족적 계급”(“nationale Klasse”) 또는 “민족의 영도적 계급”(fuehrende Klasse der Nation)이 되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족으로 세워야 하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이 필연이라고 한다(“Indem … muss”). (밑줄 ou)

국제주의가 추상 이상의 것이 아니며 무능력하게 느껴지는 게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란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닌지....  내용(국제주의)와 형식(민족)의 변증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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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 the EU!" 빅토리아 눌런드 미국무성 차관보 뒤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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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outu.be/6czKOr0Wx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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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하늘은 높게 낀 안개로 흐리멍텅하고, 거리에서는 낙엽이 나부낀다. 며칠 기온이 뚝 떨어지고 비가 오더니 어느덧 가을이다. 엊그저께까지만 해도 아열대를 무색하게 했던 여름이었는데 말이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가슴”이 사라진  과거가 된게 오래전 일인데, 이건 왠일인야. 넘 쓸쓸하다. 그리움이 엄습한다.


날 찾아온 ᅠJ,  까마득한 옛날 내가 차려준 아침에서 레르담 치즈의 맛을 알게 되었다면서 레르담을 먹을 땐 “오빠가 생각나.”한다. 그런 일도 있었던가? 그날 아침 밥상을 둘러 앉았던 사람들을 기억에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떠오르는 건 이름뿐이다. ᅠᅠJ만 변함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내 곁에 와, 사랑했던 이들의 감각기관에 저장된 풍부한 과거의 일부를 되돌려 준다.

‘무의지적 기억’? 아니야. 그 기억은 내 안에 있다가 어쩌다 떠오른게 아니야. 날 사랑하는 J가 내게 갖다준거야. 내 기억을 좀더 완성시켜준거야. 내 기억은 애당초 불완전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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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 이어서

여기, 나도 역시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 ...

[아름다운 시 등등을 지으면서 내 삶을 살겠다는] 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더 좋을 수 없는 장소를 찾았다. 노르망디의 르아브르 드그라스에서 그리 멀지 않는 해변가에 자리한  빌라를 찾은 것이다  ... 나는 이 곳에서 잔잔한 노래를 지으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

그러나 이런 기분에 취하면, 알다시피, 방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종종  고양된 마음과 볼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밖으로 나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길을 가는지 염두하지 않고 거닐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상태였다. 결국, 나도 모르게 어느새 아브르의 시골길로 접어 들었다. 그때 가지가지의 초라한 궤짝과 함, [대대로 물려 받아] 닳고 닳은 살림살이, 아낙네들, 그리고 아이들을 높게 실은 여러 대의 큰 농업용 마차가 천천히 내 앞을 가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남자들이 걷고 있었다. 이들의 말을 듣는 순간 적지않게 놀랬다. 슈바벤 사투리 독일말을 하고 있지 않는가. 고향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는 사라들임을 쉽게 알았다. 이들을 눈여겨 보면서 나는 내 생에서 아직 느껴보지 못한 느닷없는 감정이 날 아찔하게 관통하는 걸 느꼈다. 모든  피가 역류하여 심장으로 올라가 갈비뼈를 두드렸다. 마치 가슴에서 뛰쳐나와야 하는 것처럼. 마치 지체없이 나와야만 하는 것처럼. 호흡이 목에 걸렸다. 내가 만난 것은 조국의 모습이었다. 금발머리 독일이, 진지한 파란 눈빛으로, 느긋하고 너무 신중한 얼굴로, 내가 옛적 그토록 지루하게 느끼고 격분했던, 그러나 이젠 애처로운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우매를 아직 입언저리에 지닌 채, 마차에 앉아있었다 … [이젠] 조국의 궁핍조차 돌연 보배롭고 값찐 것이었다. 고루한  속물근성과도 화해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그의 손을 욺켜 잡았다. 독일 해외 이민자들의 손을 욺켜 잡았다. 마치, 조국과 갱신된 사랑의 동맹의 악수를 하듯이. 그리고 우리는 독일말을 했다 ...

저 만남은 나로 하여금 깊은 비애에 빠지게 했다. 암흑같은 슬픔에 빠지고, 납처럼 무거운 마음이 무너졌다. 해도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승자처럼 취해서 오만하게 날뛰던 내가 이젠 허리가 꺽인 사람처럼, 맥이 풀린 환자처럼 엉금거렸다. 이건, 단언하건데, 갑자기 요동하는 애국심의 결과가 아니었다. 뭔가 더 고귀한, 뭔가 더 좋은 것이었다 …

애국심, 진정한 애국심은 묘하다. 조국을 사랑하면서 팔순이 되어도 조국사랑을 한번도 느끼지 못한 사람이 있다. 물론, 줄곧 고향에 머문 사람이 이렇다. 봄의 본질은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고, 난로 옆에서 가장 좋은 5월노래를 짖는다. 자유사랑은 감옥[에서 피는]꽃이다. 감옥에서야 비로소 자유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독일조국 사랑은 독일국경에서야 비로소, 특히 이국땅에서, 독일불행을 몸소 보았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

확언하는 바, 나는 애국자가 아니다. 내가 그 날 눈물을 흘린 것은 순전히 그 작은 소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미 날이 기울고 있었다. 한 작은 독일 소녀가, 이민자들 중에서 이미 본 적이 있는 작은 소녀가 해변가에 생각에 잠겨 서서 먼 바다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작은 소녀는 8살쯤으로 보였다 … 저게 대양이냐고 날 물었다 …

나는 밤이 깊을 때까지 해변에 서서 울었다. 나는 이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킬레우스도 해변에서 울지 않았던가. 그의 은빛 발의 어머니가 [테티스] 바다에서 나와 그를 위로해야 하지 않았던가.  나도 역시 바다로부터 한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이 음성은 위로를 주기 보다는 대려 깨워 일으켜 엄명하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게 아니라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지혜로운(grundweise) 음성이었다 ...

그 이후, 내 조색판에서 황금천사[빛] 색들은 [다] 바짝 말라버렸다. 함성을 지르는 붉은색만이 유동하고 있다. 피빛의 이 붉은색으로는 오로지 붉은 사자만을 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의 다음 책은 틀림없이 온통 붉은 사자가 될 것이다. 존경하는 독자들은, 앞의 고백을 감안하여, 이를 기꺼이 받아주기 바란다.
 
1833년 10월 17일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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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어이 동무, 자네의 방패에 [아름답게 노래하는] 황금천사를 그려 달라 하지 말고, 붉은 사자를 그리게 날 내버려 두소. 난 어쩔 수 없네, 내겐 그게 익숙해. 자 보게나. 내가 황금천사를 그린다해도 그 천사는 붉은 사자의 모습일거네.”

어는 한 존경할 만한 예술가 동지의 이 말을 이 책이 머리에 둘렀으면 한다.

(…)

이제 내가 아주 겸손해진 건가?

세간의 겸손은 항상 합당한 근거가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신은 자비로워서 보통 그의 사람들이 겸손이나 이와 유사한 미덕을 수행할 때 그걸 아주 쉽게 해 준다네. 예컨대, 원수에게 일침을 가할 만한 머리(Geist)가 없는 사람이 원수를 용서하는 건 – 그런 머리가 없는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 은총을 입어 너무 볼품없는 코를 갖게 된 사람이 여성을 유혹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쉽다네.

(…)

신에게 감사! 6월 혁명이 그토록 얼어있던 혀를 풀어 주었다. 물론, 하루 아침에 깨어 일어난 사람들이 여태 하지 못했던 말을 단숨에 털어놓으려고 한 결과 내 귀를 종종 불쾌하기까지 몽롱하게 한 아우성이 수없이 일어났다. 이럴 때마다 말해야 하는 의무(Sprechamt)를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이 날 사로잡은게 정말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예를 들어 장관직을 포기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런  요직이 공화국의 가장 높은 호민관의 수익보다 훨씬 더 짭짤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행하고 추구하는 일이 공허한 선택이고, 새로운 이상의 창고에서 우리가 대변하고 실행하고 싸우고 괴로워하기로 결단한 이상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한다. 마치 어떤 문헌학자가 그가 주해를 달면서 평생을 보낼 고전 한 권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상을 취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이상이 우리를 취하여 노예 삼고, 우릴 채찍질하여 투기장 안으로 밀어넣어  우리가 강요된 검투사처럼  그 이상을 위해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참다운 호민관 또는 사도직은 다 이렇다. 아모스가 아마지아 왕에게 “나는 선지가가 아닐뿐만 아니라 어떤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뽕나무 밭에서 따다 남은 열매를 줍는 양치기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이 날 양떼에서 불러 이렇게 말씀하였다. ‘가서 예언하라.’”라고 말한 것은 의기양양한1 자백이었다. 그 볼품없는 수도승이 그의 교리때문에 보름스의 제국회의에 기소되어 황제 앞에 서서, 마음의 겸손을 다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어떤 철회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이게 [이 교리가] 나의 바탕이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아멘!’하고 끝을 맺었던 것은 의기양양한 자백이었다. 너희들이 이런 성스러운 강제가 뭔지 알았다면, 우리를 더 이상 나무라지, 더 이상 비방하지, 더 이상 중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 우리는 주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말의 종일 뿐이다.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가 “나는 자유의 노예다.”라고 한 것은 의기양양한 고백이었다."

(하인리히 하이네, 살롱 1권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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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wehmütig 애처로운. 이건 흐름상 말이 안된다. 어원사전과 그림사전을 찾아봤더니 원래 의미는 '분노'와 관계가 있다. 1800년 즈음까지 이런 의미로 사용. 하이네가 이 서설을 쓴 건 1833년이다. 그래도 하이네는 옛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의기양양하다'란 의미가 왜 '의기소침하다'란 의미로 전복되었는지 모르겠다. 독일 혁명의 실패에 따른 독일 브루주아 비더마이어시대의 '내향성'(Innerlichkeit)과 상관이 있는걸까?텍스트로 돌아가기

고향과 실향

고향은 관습이 비교(秘敎)적인 코드로 암호화되어 [실재하는] 거주공간(Wohnung)이다. 이 공간에서는 관습이 신성화되어 있다. 고향에 뭍혀 사는 사람은(der Beheimatete) 그를 그곳의 사람과 사물에 은밀하게 묶어 놓는 그물망에 엮어져 있다. 이 그물망의 실은 깨어있는 의식을 넘어서 말못하는 갓난아이의,  태아의, 어쩌면 더 깊은 심령(Psyche)의 영역까지 이어져있다. 이 실은 대부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으로 장전되어 있다. [그래서] 고향의 사람과 사물은 사랑의 대상, 아니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 실이 산천초목, 주택,  혹은 기후와 같은 사물과 관계되어 있는 경우, 그 실을 끊어 버려야 하는 실로 인식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런 것들은 사물의 의인화, 즉 어떤 것과 어떤 이를 착오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물을 향한 사랑을 그리스 철학자들은 뮈투스로, 유대 선지자들은 이교로 하여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 실이 가족, 이웃, 그리고 이른바 이들의 ‘개성’과 관계되어 있는 경우, 그 실을 자유의 [발목]을 결박하는 관습으로 밝히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실은 [의인화의 경우처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주고 받는 말이 그 근간을 이루고(dialogisch), 고향에 뭍혀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포에(Mitmenschen) 대하여 책임을 지게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책임감은 자유를 동반하는 현상이다. 이런 실은 – 예컨대 구아타마가 그랬던 것처럼 – 거침없이 끊어 버릴 수 없는 실이다. 그래서 고향에서 강제로 뽑혀지는 게 (혹은 스스로 자신을 뽑아내는 게) 아픈 것이다.

(빌렘 플루서, Heimat und Heimatlosigkeit: Das brasilianische Beispiel, in: Dericum, Christa/Wambolt, Philipp (Hrsg.), Heimat und Heimatlosigkeit, Berlin-Neukölln 1987, S.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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