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8 첫 문장

(§ 8) 의식은 결국 {시시포스의 되풀이/반복을} 필연적으로[1]재개하여 그 모든 과정을 처음과 똑같이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통과하게 된다. [길과 굴려야하는 돌은 똑같은데] 근데 뭔가 첫번째와 달라진 것이 있다.[2]



[1]왜 필연적이지? 의식이 시시포스처럼 무슨 벌을 받는다는 말인가?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서 다시 산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깔려면 까”라고 개길 수가 없단 말인가? 아니면 의식이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어떤 다른 필연성이 있단 말인가? 파란 하늘이 “천국”과 겹치지 않고, 단순하게, 파란하늘로만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의식이 파란 하늘을 파란 하늘로만 보는 것이 힘들어서 아니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비틀즈가  “Imagine there is no heaven … above us only sky.”라고 노래했던가? „Sysiphos“가 „sophos/지혜로운“의 비교급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이란 의미이고, 호메로스는 여기다 한술 더 떠서 시시포스를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으로 친다. 시시포스가 저지른 죄를 보면 신들을 엿 먹였던 죄밖에 없고 그 중 가장 큰 죄는 신이 인간을 다스리는 가장 큰 무기인 „죽음“에 족쇄를 채우고 다시는 죽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인데, 달리 표현하면 삶을 겁내지 않고 만끽한 죄를 지은 것이다. 돌을 반복해서 굴려올리는 시시포스를 영웅화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체제하 노동자의 일상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추상적인 노동의 반복으로 자본을 키우는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런 노동이 필연인가? 노동자해방과 함께 노동해방은?

[2]뭐가 달라졌단 말인가?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서 산밑으로 내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탓이요 내 탓이요” (mea culpa)했을까? 한스 마그누스 엔쩬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의1957년 시 “Anweisung an Sisyphos”가 생각난다.

 

anweisung an sisyphos

was du tust, ist aussichtslos. gut:
du hast es begriffen, gib es zu,
aber finde dich nicht damit ab,
mann mit dem stein. niemand
dankt dir; kreidestriche,
der regen leckt sie gelangweilt auf,
markieren den tod. freu dich nicht
zu früh, das aussichtslose
ist keine karriere. mit eigener
tragik duzen sich wechselbälge,
vogelscheuchen, auguren. schweig,
sprich mit der sonne ein wort,
während der stein rollt, aber
lab dich an deiner ohnmacht nicht,
sondern vermehre um einen zentner
den zorn in der welt, um ein gran.
es herrscht ein mangel an männern,
das aussichtslose tuend stumm,
ausraufend wie gras die hoffnung,
ihr gelächter, die zukunft, rollend
rollend ihren zorn auf die berge.

 

 

시시포스야 이렇게 해.

네가 하는 일은 가망이 없어. 정말 그래.
알아 먹었지, 그렇다고 해 응?
하지만 물러서지 마,
넌 짱돌을 든 남자야. 아무도
너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아. {아스팔트에} 분필로 그은 선{만}이,
지루하게 내리는 비가 그것을 핥아 먹는 가운데,
{네가} 죽어 쓰러진 자리를 표시하게{될 텐데.} 서둘러
좋아하지 마. 가망 없는 일이
장원급제의 길이 아니야. {그건 별볼일 없는} 자기
비참을 들고서 맞장구 치는 찌질이들이 하는 짓이야,
허수아비, 점쟁이들이. 넌 침묵을 지키고,
태양과 한마디 나눠,
바위가 밑으로 구르는 동안. 하지만
네가 무력(無力)하다는 허탈감에 빠지지 마,
그 보다 이 세상에 분노를 한 가마니 더해,
그게 안 되면 쌀 한 톨의 분노라도.
남자들이 부족해,
가망 없는 일을 하면서 말없이,
{모든} 희망을 잡초처럼 뽑아 던져버리고,
미래란 것을 폭소로 대하면서, 굴려
굴려 분노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남자들이.

 

추가자료: 홍세화가 당원에게 드리는 글

 

2012.2.17

 

여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13000개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에게 띄우는 편지
 
 
“시 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휴식 시간, 이 시간은 의식意識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에서
 

뒤늦은 새해편지
 
당원 동지 여러분.
 
 설 연휴가 지난 지도 오래고, 2월도 중순을 넘어가고 있으니 새해인사를 전하기엔 새삼스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디는 ‘신년사’라는 걸 통해 동지 여러분께도 말씀을 건넬 계획이었습니다. 오래된 관행도 그렇고, 새해의 첫걸음을 응원하고 희망어린 비전을 제시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는 사람들의 권고도 있었지요.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겠습니까만, 너나할 것 없이 강조하는 2012년의 중요성 때문에 더욱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솔직히 저는 신년사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순간 과장되고 거짓된 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무렵, 이른 아침 집을 나와 경의선 기차역까지 걷는 동안 문득 신년사를 편지글로 고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 에 쓴 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지 말라”고 어느 시인이 말한 적이 있지요. 결국은 못 부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경구를 이번에는 잊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저는 제 속에 깃든 진심을 차라리 드러내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늦은 밤에 쓴 이 편지를 아침에 읽지 않은 채 여러분께 곧장 띄웁니다.
 
시지프스를 떠올리다
 
모 든 사람이 행복하거나 그 반대인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너도나도 ‘위기의 시대’를 입에 올리지만, 하나의 위기가 지나고 나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범주는 급속히 좁아지고 불행을 감내해야할 사람들의 그것은 같은 속도로 확대되어왔습니다. 23년 만에 영구 귀국한 2002년 1월로부터 지난 10년 동안 그 격차라는 것이 이 정도까지였나 하는 점을, 고백컨대 저는 최근에서야 비로소 깊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당대표가 되고 나서 3개월 동안 저의 일상을 중요하게 차지한 것은 불안정 노동이라 부르는 비정규 노동자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 집회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3개월 동안 다닌 곳이 지난 10년 동안 갔던 곳보다 많지 않을까 싶네요. 그냥 다닌 게 아니었습니다.  발언 순서를 기다리면서는 왜 그리 긴장되는지, 또 마이크 앞에서는 다른 분들처럼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외치지 못하고 자꾸만 허둥대는 자신이 또 얼마나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세 상에 이리 많은 싸움이 있는데, 세상은 왜 이리 조용한가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의 끝을 대체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네 번의 겨울을 맞으며 1500일 가까이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거리농성장을 찾던 날이었습니다. 이 막막하고 외로운 싸움을 목도하고 나오면서 저는 문득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를 떠올렸습니다.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바위를 끝도 없이 되풀이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그래서 어쩔 건대?’라는 자본의 비정한 얼굴에 맞서 부르튼 두 손으로 기약 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부조리한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어찌 이분들뿐이겠습니까 마는.
 
그 러다 또 문득 저는 진보신당 당원 동지 여러분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하루아침에 뒤로 하고 떠난 당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이 시대의 시지프스가 아닌가요? 냉소와 무관심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두 팔을 뻗어 당을 지탱하고 다시 산 아래로부터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있는 우리의 운명이 시지프스의 그것 아닌가요?
1% 대의 지지율, ‘통합’이란 이름표를 단 야당들의 틈바구니에서 소외된 원외정당의 설움, 언론의 외면, 고집불통이란 딱지, 명망 정치가들이 남기고 간 부정적 유산과 상처, 무정한 옛 동지들에게 ‘진보(신)당’이란 이름마저 도용당하는 비애, 이당 저당 가릴 것 없이 ‘좌클릭’이요 진보를 자처하는 현실, 조합원들의 민주적 선택권을 몰수하여 3자통합당에 대한 변형된 배타적 지지방침을 관철시키려는 민노총에 대한 울분……. 기나긴 지난 1년여의 통합논쟁으로 지치고 힘겨워 주저앉은 당원들과 지역당협이 적지 않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왜 여기에 남아있는 것일까요?
 
 

 
자존감自尊感에 대하여
 
당원 동지 여러분.
 
13000 개의, 저마다의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는 바로 여러분이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입니다. 알베르 까뮈처럼,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도,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만 한다”고도 차마 지금은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여러 글에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가 가야 한다.” 이 말도 지금은 잠시 유보해 두겠습니다.
 
그 러나 이 말 한마디는 반드시 해두고 싶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 <진보신당>입니다. 우리에겐 13000 개의 진보신당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정치적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문명 자체의 위기가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작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해야할 진보정당은 소멸의 위기에 처한 슬픈 역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여도 야도 ‘좌클릭’이 유행인데 우습게도 왼쪽에 있던 사람들마저 몸은 ‘우클릭’하는 이 역설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분열의 시대에 그저 목이나 어루만지며 안심하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정 치 혹은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자존감에 존립합니다. 자존감은 우선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지 않고 자기정체성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끊임없는 확인하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음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질문이 누락된 정당은 누군가의 말장난처럼 ‘가설정당’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당일 수 없습니다.
 
정 치가 자존감이 아니라 수數나 세勢에 존립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진보신당 13000 당원들은 불가사의한 존재들로 보일지 모릅니다. ‘끝없는 패배’가 두려운 이들에게 정치적 자존감이란 것은 그저 던져버리고 달아나고픈 거추장스런 시지프스의 바위로 비쳐졌을지 모릅니다. 두 가지의 아주 다른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산꼭대기만을 쳐다보다 바위를 버리고 달려가는 ‘상층연합’의 길이 있는가하면, 바위를 밀어 올릴 때나 바위를 찾기 위해 산 아래를 향해 걸을 때나 묵묵히 자신의 발끝이 향하는 길을 보고 걷는 ‘하층연합’의 길이 있습니다.
 
당 원 동지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당대표가 된 직후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진보신당 당원들과 저의 힘겨운 노력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즉시 ‘하방下放’을 선택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의 밀알이 되겠다는. 처음부터 패배주의로 시작하느냐는 지적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사실은 이것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1926년 <리용 테제>를 떠올리며 했던 말이었습니다.
 
한 때 사회당(PSI) 좌파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광풍 앞에서 반半합법적 존재로 탄압받으면서 궤멸의 위기에 처한 이태리 공산당(PCI)은 자국 내에서 당대회를 열지 못하고 프랑스 리용으로 당원들을 소집하지요. 그람시는 이 당대회의 테제에서 5만 당원에게 ‘하방’을 명령합니다. “북부의 노동자와 남부의 농민을 조직하고 그들의 혁명적 동맹을 공고화하라”는 이 테제에 따라 당원들은 민들레 씨앗처럼 공장으로 농촌으로 학교로 퍼져나가 삶의 근거지마다에서 진지를 구축하지요. 그리고 파시즘의 몰락 이후 당은 50만 당원을 가진 서유럽 최대의 대중적 좌파정당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동지 여러분.
 
벌 써부터 머지않아 다가올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살아남을 것인가 해산될 것인가를 놓고 말들이 분분합니다. 진보신당의 존재가 자신들의 뒷덜미를 잡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간절히 희구할지도 모르지요. 여기에 판돈을 걸어야 한다면 아마도 후자 쪽에 수북이 쌓이겠지요.
 
그 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렵게 존속시키려던 당은 해산되고 우리는 다시 시지프스처럼 산 아래로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민들레가 뿌리째 뽑혀도 갓 털을 단 씨앗들이 흩어져 큰 숲을 이루듯, 당이 해체되고 진보신당이란 이름이 사라져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13000개의 진보신당으로 남아있다면 머지않은 시간에 13만의, 130만의 진보정당이 출현할 것입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병사했지만, 그의 두뇌를 20년 간 작동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호언하던 파시즘 권력은 사라졌어도 그의 《옥중수고》를 우리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어 떻게 져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싸움은 승리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시라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13000개의 진보신당’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총선이라는 한 번의 전투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습니다.
 
하 나의 씨앗과 한 알의 밀알에 우주가 있듯이, 여러분이 각각의 존재가 진보신당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자존감의 두 번째 비밀입니다. 씨앗과 밀알이 썩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에서 보듯이, 자존감은 ‘자기다움’에 대한 치열한 물음이자 ‘자기해체’를 무릅쓰는 용기입니다. 이 두 가지는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다움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해체의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새 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지난한 진보좌파연석회의의 과정은 바로 이 ‘찾기’와 ‘만들기’의 동시적 진행과정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품고 있는 밀알의 자존감이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이번 임시당대의원대회의 주요 안건 가운데 하나인 사회당과의 통합문제도 그렇습니다. 긴 시간을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분투해온 사회당과의 통합은 총선에서의 유•불리를 따지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유사한 이웃 당은 소외시키면서 어제까지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다던 정당과는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손을 잡는 정치공학을 끝내고 이제 자존감의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실천이며, 보다 넓은 진보좌파정당 건설로 나아가는 정치조직의 자기정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창 당을 모색하는 녹색당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와 성장과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이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가치와 씨름해온 생태주의자들은 또 다른 시지프스들입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교리와 자본의 독재가 강요하는 삶이 결코 ‘올바르지도’ 않고, 앞으로 온전히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라면 자본주의 극복에 있어 좌파와 녹색은 전략적 동맹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 수는 물론이고 진보까지도 사로잡아온 ‘성장의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우리에게는 과감한 자기해체의 모험과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녹색과 좌파가 서로의 보완재로 보지 않고 내적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가치의 연대’가 이 시대 한국의 진보좌파 앞에 놓인 가장 중차대한 숙제라고 인식된다면, 우리는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겸허하고 섬세한 선거연대를 시도하되, 일시적인 비대칭성이 주는 난관 때문에 비관하지 맙시다. 시간문제일 뿐 ‘녹색좌파’의 새로운 전망은 기어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배제된 자들의 서사전략
 
불 과 얼마 전까지 평당원이었던 사람이 당대표의 역할과 업무를 파악하기에도 석 달이라는 시간은 넉넉지 못합니다. 그런 제게 총선과 대선이 있는 이 2012년의 초입은 일찍이 통과해 본 적이 없는, 캄캄한 입을 벌리고 있는 긴 터널의 입구에 서있는 것 같아 현기증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금 융자본주의의 위기에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까지 겹쳐 어수선한 정국에서 집권 보수세력의 재집권이 어려워지고 자유주의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야당의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2013년 이후의 미래가 밝을 것으로 이야기하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이들의 말처럼 그런 상황이 노동자들의 처지에, 진보정당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예 컨대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가 거대한 파고로 밀려올 때 수구적 보수세력인 새누리당만이 야당인 상황이 우리 사회에 유리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가리켜 “사라져가는 옛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의 출현이 지체되는 위기 국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병적 징후들” 가운데 하나로 규정한 바 있지요. 과거 어설픈 당근과 가혹한 채찍 사이에서 사회적 격차가 오히려 고착되었던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처럼 자유주의 정권 주도의 위기관리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파쇼적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거듭 강조하지만, 진보정당은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말한 이도 그람시였지요. “선장은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배를 떠난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사하게 된 후에만 배를 떠날 수가 있다”고 말한 이도. 기억들 하시는지요? 여러분께 드리는 첫 인사글 말미에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제가 인용했던 것을. 부조리한 운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시대의 시지프스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그 말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고통과 번민에서 곧바로 어떤 의미든 찾고자 하는 것, 이것은 아마도 의미 없는 고통을 하루하루 끝도 없이 이어가야 하는 이들의 삶에 오래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지식인적 사고가 지닌 허영 아니었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눈 물은 아래로 흐르고 숟가락은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천하를 논하는 ‘큰 정치’가 따로 있고, 삶의 고통을 다루는 ‘작은 정치’(혹은 민생 정치라 부르는 것)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정치’에서 말해지는 희망을 위해 목전의 삶의 불행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면 그것은 다만 거짓일 뿐입니다.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숟가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어야 하는 사람들의 생존의 최전선에서, 아래로 전가되는 불행의 크기를 가늠하고 그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보정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전략’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여 러 경로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저는 우리 당의 비례대표전략을 <배제된 자들의 서사 전략>이라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묵살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기업 노조 중심의 노동조직으로부터도 소외되거나 외면당해온 ‘배제된 노동’을 비례후보의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이 만들어온 삶과 사랑과 투쟁의 서사를 무기로 이 시대의 자본권력과 지배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것을 이번 총선의 중심전략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 러나 이번 총선은 진보신당이 맞이했던 다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조건에서 치르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명망정치인들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 무명의 척탄병들이 서 있습니다. 초라한가요? 패배가 너무 불 보듯 빤한가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당의 지역후보가 13000명이라면? 무명의 척탄병들 옆에 13000명이 나누어 선다면? 그렇다면 이번 선거가 이 시대의 난장이들과 시지프스들이 오만한 권력과 물신을 향해 돌멩이들을 쏘아 올리는 싸움의 장, 축제의 장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시는지요?
 
여 러분이 <진보신당>입니다. 우리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미리부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축소시키지 말아주십시오. 그저 부조리한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지프스는 까뮈를 통해 끝없이 패배하면서도 운명에 저항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시지프스가 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려는 순간이고, 고뇌에 찬 얼굴로 잠시 정지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운명을 응시하는 시간이고 운명을 밀어 올림으로써 운명보다 한 뼘씩 우위에 서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알베르 까뮈로 편지를 시작했으니 그가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머리에 쓴 구절로 끝을 맺겠습니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7 하부

그런데 이렇게 절단되어 있는 일개에서 지각하는 의식은 다수의 Eingenschaft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간섭하기 보다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도 발견한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은 대상을  {Eigenschaft를 독립체라고 하면서 그것을} 배타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은 잘못 지각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상은 {다시}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두루뭉실한 연속성과[1]같은 것이 된다. 단지 대상이 이젠 다수의 Eigenschaft들이 Gemeinschaft를 이루는 보편적인 매체가[2]된다. {배타적인 Moment는 이런 {울타리} 안에 병존하는 다수의 Eigenschaft들에게 있게 된다.} 이런 울타리 안에 병존하는 다수의 Eigenschaft들은 감각적인 보편성으로서 각자 홀로 있고, 이렇게 {대자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배타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실로} 지각하는 것은 {무슨 보이지 않는 귀신과 같은 Gemeinschaft/공동체가 아니라} 단순하고 {훤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서[3]  보편적인 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따로따로 있는[4]하나하나의[5] Eigenschaft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Eigenschaft는 {속성으로서의??} Eigenschaft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규정된 존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각하는 따로따로 있는 하나하나로서의} Eigenschaft는 이제 어떤 일개에서 드러나는 것이[6]아닐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속성으로서의??} Eigenschaft란 오로지 일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고 오로지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규정되는[7]것이다. {내가 지각하는 따로따로 있는 하나하나로서의} Eigenschaft에는 이제 더 이상 부정[운동]이란 성격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순전히 자기자신과만 관계하는[8]것으로 머무르는 어떤 감각적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의식은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고 되고 단지 meinen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 안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고}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Meinen이 스스로 다시 지각행위에 들어간다는데 있다. 자아는 이렇게 {시시포스가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다 놓은 돌이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이}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함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처음부터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에[9]휘말려 들어가 {시시포스가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 처음의 경험을 되살려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듯이} 매 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을 맛보게 된다. 



[1]원문<die Kontinuitaet ueberhaupt>

[2]원문<ein 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

[3]원문<das Einfache und das Wahre>. 데카르트의 제3성찰에 나오는 <clara et distincta>란 표현이 연상된다. <wahr>를 하이데거의<aletheia/진리>해석에 기대어 번역해 보았다. <wahr>에 어원적으로<aletheia>란 의미가 스며있는지는 모르겠다. 

[4]원문<fuer sich>

[5]원문<einzelne>

[6]원문<an einem Eins>

[7]Strawson이 말하는 “Sortal”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8]원문<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

[9]원문<Kreislauf>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7 상부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은/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이 전개되는 과정과 또 그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에서 이미 의식이 하는 경험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의식이 어떤 모순에 빠지고 어떻게 [허기적 허우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지} 이런 의식의 경험[도정]에 널려있는[1]모순의 전개과정만 살펴보면 된다. —[2]지각으로서의 자아가 파악하는 대상은 순수한 일개의 것으로 제시된다. 의식은 또한 일개로 제시되는 대상에서 드러나는 {거기에 갇혀있는} 성질을 지각한다[3]. 그런데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개성[4]안에 머무를 수 없고 일개성을 넘어 밖으로 향한다. 그 결과 의식은 처음에 대상으로 자기 곁에 와 있는 것의[5] 존재가 하나로 분리된 어떤 하나의 존재라고 파악했는데, 그것이 대상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의식은 대상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긋나는 일은[6]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 짖고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의식은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7][일개라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두루뭉실한 공동체로[8]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다리 좀 쭉 펴려고 하는데 의식은 성질을 달리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자리에서[9]의식은 Eigenschaft를[10]다시 살펴보고 Eigenschaft는 이제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다른 것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는 독립체라고 지각하게 된다.[11]그 결과 의식은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다른 것들과의 공동체로,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들과 이어지는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사실 잘못 파악했다고 하고, 오히려 독립체로서의 성질을[12]담아내기 위해서는 연속성을 절단하고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1]원문<vorhanden>

[2]이하 내용은 지각하는 의식이 무대에 등장하여 독백하는 내용이다. 제대로 번역하려면 드라마를 쓰는 것이 좋겠다.

[3]원문<gewahrwerden/알아보다, 인식하다>. <gewahr>에 스며있는<Gewahrsam/보호, 구류>란 의미의 Moment를 <갇혀있는>으로 옮겨보았다.

[4]원문<Einzelheit>. <개별성>이라 하지 않고 <일개성>으로 번역하였다. 이 낱말이 통용되는지 모르겠다.

[5]원문<das gegenständliche Wesen>. 여기서<Wesen>을<Anwesenheit>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6]원문<das Unwahre>

[7]원문<das gegenständliche Wesen>. 위와 마찬가지로 <Wesen>을 <Anwesenheit>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Wesenheit>와 함께<귀신>이란 의미도 있는 것 같다.

[8]원문<eine Gemeinschaft überhaupt>

[9]원문<ferner>

[10]여기서<Eigenschaft>는 무슨 말인가?

[11]원문<Ich nehme nun ferner die Eigenschaft wahr als bestimmte, anderem entgegengesetzte und es ausschließende>. 알쏭달쏭한 문장이다. 여기서 <Eigenschaft>는 뭐고 또 <Eingenschaft als bestimmte>란 무슨 말인지, 그리고 뭐하고 어떻게 대립하고 배제한다는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성질과 다른 성질이 대립한다는 번역은 분명 오류인 것 같다. 문법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질과 성질이 대립한다고 하려면 <anderem>이 아니라 여성인<Eigenschaft>를 받는 여성형<anderer>나 복수형 <anderen>이 와야 한다. 근데 남성형 <anderem>이 와 있다. 그리고 <anderem>이 다시 중성 <es>로 받아지는 것을 보면 <anderem>은 <gegenständliches Wesen>을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Eigenschaft>가 <gegenständliches Wesen>과 대립한다는 말인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살펴보자. 현상학적 Epoché를 한 지각이 지각하는 것은 ‘뭔가 하얀 것’이다. ‘뭔가’가 두루뭉실한 공동체가 되겠고 ‘하얀 것’이 첫째 의미로서의 성질(Eigenschaft)이 되겠다. 다음 단계에서는 ‘하얀 것’이 첫째 의미로서의 다른 성질(Eigenschaft)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와 ‘하얀 것’이 종합된 ‘뭔가 하얀 것’이 다른 ‘뭔가 하얀 것’과 대립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단계에서의Eigenschaft는 ‘하얀 것’을 의미하는 첫째 성질이 아니라 ‘뭔가 하얀 것’을 다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역자는 앞서 <Eigenschaft als bestimmte>를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에 기대어, 미흡하지만, 대자적으로 규정된 ‘독립체’로 번역한 적이 있다. 아무튼 헷갈린다. 지각을 다 읽어본 다음 다시 돌아와서 살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12]원문<Bestimmtheit der Eigenschaft>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6

(§6) {무수한 <이것>들이 언어라는 포승에 결박된 채  끌려와} 이렇게 지각의 사물이 된다.[1] 그리고 이와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에 한해서 의식은 지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때 의식이 취하는 태도는 대상이 다가오는 대로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순수한 파악[2]이다. 이런 순수한 파악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순수한 파악으로서의 의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뭔가를 [자의적으로] 행한다면, 이런 행위는 [대상에] 뭔가를 더하거나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변경시켜 놓을 것이다. 그래서 대상이 진리이며 보편적인 것이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3] 된다. 반면 의식은 가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헤겔이 그렇게 파악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지각하는 의식이 스스로 자기자신을 그렇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4].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고 착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마디로 지각하는 의식은 착각의 가능성을 품고 또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의식이 왜 자기가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보편성이란 꼰대의 지배를[5] 받고 {온통 보편성으로 도배되어 있는} 지각이 그런 보편성 안에서 {감각적 확신이 보편성에 대항하려고 기대고 있는 <바로 이것>이라는 직접적인} 타자존재의 {질} 조차[6], {감각적 확신의 망각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지만} 자기에겐{지각하는 의식에겐} 곧바로 {쓸데없는 하루살이 존재로} 소멸되고 파기된다는 것을[7]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이 갖는 진리의 기준은 자기동일성이며[8], 그가 취하는 태도도 역시 [사물/대상의 자기동일성에 견주어]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 유지하고 파악하는 일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것이 동시에 지각하는 의식에 대하여 있으므로 지각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는 결국 그의 갖가지 파악이 갖는 다양한 계기들을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교에서 불일치가 발생하면, 비진리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에 있을 수 없고 지각행위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각하는 의식은 받아들인다.}



[1]원문<So ist nun das Ding der Wahrnehmung beschaffen.> <beschaffen>을<성상(性狀) 혹은 성질로 번역하지 않고(헤겔사전, 197-198쪽 참조) <가져오다, 조달하다>란 동사의 의미를 살려<어디 앞에 놓여있다>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2]원문<reines Verhalten>

[3]원문<das sich selbst Gleiche>

[4]원문<sich>. <das Bewusstsein [ist] sich das Veränderlicher und Unwesentliche.>에서<sich>를 이렇게 좀 장황하게 번역하였다.

[5]원문<das Prinzip>

[6]원문<das Anderssein selbst>

[7]원문<als das Nichtige, Aufgehobene>. 아도르노의<부정변증법/stw113, 19쪽 이하>에 기대어 번역해 보았다.

[8]원문<Sichselbstgleichheit>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5 하부

사물의 진리는{홀로 뚝 떨어져 하나의 점을 이루는 단독성이 아니라 이런 단독성에서 해방되어} 그 점이 그가 존립하는 {<또한>이라는} 매체 안에서 다양성으로 스며들어가 그 안에서 한가락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1] 이와 같이 {점철된} 차이들이 {<또한>이라는 긍정적인} 무심한 매체에 속한다는 면에서 그들도 역시 단지 [즉자적으로] 자기와만 관계하고,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무심한] 보편적인 것이다. 반면, {대자적인} 부정적인 통일에 속한다는 면에서 차이들은 동시에 서로 배타적인 관계를 갖는다. 단, 차이들은 이때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대립적인 관계를 <각각의 또한>에서 제거된 Eigenschaften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기 마련이다[2].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이것>이 사실 보편적인 것이라는} 감각적 보편성,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확신이 행해지는 순간 바로 그 행위 자체에서 나타나는[3]{<이것이다>라는} 존재와 {<이것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통일이 {개별적인 것을 찍어 올리는 것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Eigenschaft가 되는데, 이때 {이렇게 규정된} Eigenschaft에서는 하나라는 단일성과 순수한 보편성이 전개되어 구별되어야 하고 동시에 Eigenschaft가 이 둘을 다시 하나로 엮어야만 비로소 Eigenschaft가 되는 것이다. Eigenschaft가 이와 같이 {단일성과 보편적인 물질성이라는} 두 축으로 갈라지는 추상적인 꼰대와[4]관계할 때 비로소 <사물>이  완성된다.[5]



[1]원문<der Punkt der Einzelheit in dem Medium des Bestehens in die Vielheit ausstrahlend>.

[2]원문<haben aber diese entgegengesetzte Beziehung notwendig an Eigenschaften, die aus  i h r e m  Auch entfernt sind>. 뭔 말인지 아직 확실히 모르겠다. <aus ihrem Auch>에서 소유대명사<ihr>가 강조되었는데, 여기서<ihr>는<제각기>란 의미인 것 같다.

[3]원문<unmittelbar>

[4]원문<die reinen wesentlichen Momente>

[5]이 문단 정말 헷갈린다. 이런저런 성질이 있는 사물의 구성, 즉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존재론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각의 현상학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소금을 예로 든 것을 보면 이런저런 성질을 지닌 사물의 구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짠맛과 흰색이 대립되고 서로 배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런 짠맛과 저런 짠맛이 대립된다면 좀 이해가 가는데. 짠맛과 흰색이 대립된다는 것은 논리학 초보만 떼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걸 헤겔이 모를 리가 없고.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Eigenschaft는 „뭔가 하얀 것“이란 표현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헷갈리는 것은 „뭔가“도 Eigenschaft라고 하고 „하얀 것“도 Eigenschaft라고 한데 있는 것 같다.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뭔가“도 아니고 „하얀 것“도 아니고 „뭔가 하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달리 표현하면 지각의 대상은 "산"이 아니라 "mont blanc"이고, 절대정신의 유토피아는 모든 산이 "몽블랑"과 같이 자기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그런 보편성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런 "보편성"에 연대가 가능한 것인가? 말못하는 자연과의 연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5 상부

(§5) 지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현단계에서 요구되는 범위까지만 전개해 보면, 이상의 두 가지  계기[1] 그 어는 한쪽에만 있지 않고 양쪽 안에 있을 때 비로서 지각의 진리로서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사물의 진리는 α) 아무런 구애를 주지않고 그냥 쭉 늘어져 있는[2] {온통 하얀 보와 같은} 보편성[3], 즉 다수의 Eigenschaft들이[4] 병존하는 <또한>이라는 테두리로서, 여기서 Eigenschaft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휠레(Hyle)와 같은} 물질 그 자체를 의미하고, β) 부정이지만 그 역시 아무런 접힘을 주지 않는 부정에 의한 통일[5], 달리 표현하면 대립적인 Eigenschaft들을 배제하는 {대자적인} 하나이며,[6] 그리고 γ) [마침내] 다수의 {개별성이 뚜렷한} 특별한 성질들Eingenschaften[7] 자체, 즉 α)와 β)로 갈라지는 두 가지 보편성의[8] 서로 관계함, 다시 말해서 <또한>이라는 무심한[9] 터전에서 그 안에 {마치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이 버리지 않고 간직한 헝겊 조각들을 호롱불 아래서 바늘로 손수 하나(!) 하나(1) 꿰매어 조각보를 만들었듯이} 서로 구별되는 [개별적인] 것들을 엮어내는 부정의 운동이다.[10]



[1]원문<Momente>

[2]원문<passive/수동적인>

[3]언어철학에서 이야기하는<외연>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 부분의 이해를 돕는 것 같다. 그리고 언어철학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헤겔과 감각적 확신간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터전은 언어다.  왜냐하면 감각적 확신이 표현(Ausdruck)하는 것은 그것이 말이든 손가락으로 지시되든 표현으로서 언어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존재적인 차원에서 사물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때 철학은 영 희한하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생물학이 해야 할 일에 나서는 것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지각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세상에 있는 물건을 지시하는<명사>와 그런 명사를 포함하는 문장/명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헤겔과 감각적 확신간의 진검대결 및 승부는 언어라는 터전이 아니라<생명>이라는 터전에서 비로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지만.

[4]여기서Eigenschaft를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헤겔이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사물의 구성되어감은 언어철학이 분석하는<표현>사용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가 있겠다. 예를 들어<고구마>라는 표현은 그 안에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고 고구마<휠레>를 갖는 모든 고구마를 포함한다(외연). 이때 고구마의 성질은 오로지<휠레>일 뿐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 아무튼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헤겔도<Eigenschaft>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부분적으로만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가, 아니면 역자가 알아서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분석해야 하고, 번역시 적당한 말을 찾아야 하는데 이 일이 쉽지 않다.

[5]원문<die Negation ebenso einfach>

[6]이것은<내포>와 관련해서 이해하면 도움이 되겠다. 한 개의 고구마가 내포하는 것으로서의 성질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내포>가 이야기하는 성질도 독특한 성질이 아니라 모든 감자가 내포하는[보편적인] 성질이다. 외연과 내연에서 이야기 되는 성질이 독특한 성질, 즉 해남 고구마이지만 그것도 현산면 미세마을에서 무주님이 재배한 고구마 맛이 되려면 규정이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한다. 

[7]헤겔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성질>이라는 한다. 배가 다 배가 아니라<나주 배>가 있듯이,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남 무주님의 고구마>, <대구 사과> 등이 있듯이 헤겔은 여기서 개별성으로서의 성질을 이야기하고 있다.

[8]원문<Momente>

[9]원문<gleichgültig>

[10]여기서 들뢰즈가 헤겔을 제대로 이해했나 물어볼 수 있겠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헤겔이 지향하는 조각보와 같은 보편성을 제대로 읽었는가라는 문제와 이런 조각보를 만드는 부정이 이중 부정, 즉 부정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는가라는 문제다. 들뢰즈는 단순한 부정만 읽은 것 같다. 그러나 헤겔이 지향하는 것과 들뢰즈가 지향하는 것이 똑같이 조각보와 같은 보편성인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헤겔은 이중부정을 통해서 이런 조각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고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라고 하는 것 같다. 이것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역자의 능력부족으로 우선 내비둬야 겠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4

(§4) [감각적 확신의 결과에 나타난 관계를 놓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보편성의 모습을 다 드러낸 것은 아니다.] 이 단계에선 오로지 {주체의 계기가 전혀 없는 실정성으로서의} 그저 있는[1]보편성의 성격만이 겨우 관찰되고 전개되었다. 그러나 보편성의 성격에는 {보편성의 [논리적인] 서술에} 포함해야 하는 다른 면도 드러나 있다. 이를 살펴보자.[2]다수의 {즉자적으로만} 규정된 성질들이 정말 그렇게 단순한 관계에서 서로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과의 관계 안에만 침몰되어 있다면, 그 성질들은 <규정된> 성질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규정된> 성질이란 다른 성질과 대립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서로 구별되는 {대타적으로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 대립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또한>이라는} 매체 안에 있는 다수의 성질들이 단순한 통일을 이룰 수가 없다. {즉자적으로 규정된 성질들에게는 <또한>이라는 추상적인 매체가 순수한 본질이었다.} 그런데 이젠 부정[운동]이라는 대립도 똑같이 성질들에게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일이 이렇게 되면 다수의 성질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함께 있는 것은 단순한 통일이 아니라} 이와 구별되는, 즉 다수가 너나 할 것 없이 아무렇게나 모여있는[3]그런 통일이 아니라, 배타적인, 다른 것을 부정하는 통일이다. 그래서 이 통일은 [<또한>이라는] 단순한 매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단순한 매체란 단지 <또한>이라는 아무런 구애와 속박이 없는 통일일 뿐만 아니라, 둘을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인 하나로서의 통일이기도 하다. — 하나, 이것은 부정의 힘으로서[4]자기와 단순하게[5]관계하는 가운데 다른 것을 배척하는 하나가 될 때 작용하는 힘이다. 이런 작용을 통해서 물성이 일개 사물로 규정된다. {An der Eigenschaft ist die Negation als Bestimmtheit, die unmittelbar eins ist mit der Unmittelbarkeit des Seins, welche durch diese Einheit mit der Negation Allgemeines ist; als Eins aber ist sie, wie sie von dieser Einheit mit dem Gegenteil befreit und an und für sich ist.}[6]{문제는 부정 인데} 성질Eigenschaft에서는 부정이 존재의 직접성과 직접적으로 하나를 이루는{즉자적인} 규정성으로 있다. 존재의 이런 직접성은 부정과의 이런 통일에 의해서 {모두가 자기 것만으로 꽉 채우는 대자적인} 보편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로서의 성질은 이런 [자기와만 관계하는 자위행위로서의] 통일에서 벗어나 대립하는 대상과 짝이 지어진[7]즉자대자적인 존재다.



[1]원문<positiv>. 어원<ponere>을 살려 번역하였다. 청년헤겔의 사상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실정성/Positivität>에 관해서는<헤겔철학사전, 실정성, 240쪽 참조>.

[2]원문<nämlich>

[3]원문<gleichgültig>

[4]원문<das Moment der Negation>

[5]원문<auf eine einfache Weise>. 빈켈만이 말하는<edle Einfalt>가 이런 것인가?

[6]원문을 올려 보았다.

[7]원문<von dieser Einheit mit dem Gegenteil befreit>. 재미있는 표현이다. <befreien/해방시키다>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즉 무엇으로부터(von) 무엇으로(zu) 해방하는 것이다. 근데 헤겔은 여기서<von>과<zu> 대신<von>과<mit>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mit>는 지금까지 이야기된 내용에 비춰보아 수단이나 도구의 의미일 수 없다. 그럼 여기서<mit>는 어떤 의미인가. 헤겔이 사용한<befreien/해방하다>에는<freien/짝을 찾다, 아내를 구하려 다니다>라는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다. 참고로<frei/자유로운>는<보호하다>란 의미에서<사랑하다>란 의미까지 있는<prāi>라는 인도게르만 낱말에 그 어원을 두고있다. <Liebe>에는 순수한 사랑뿐만 아니라 몸으로 성행위/성관계를 맺는 의미가 있는바, <von dieser Einheit mit dem Gegenteil befreit>은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적쾌감을 자위행위에서 알게 되지만 짝과의 성관계에서 정말 알게 되는 것과 비교될 수 있겠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하부

— 이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매체를 하여간 물성[1] 혹은 {감각적인 것이 말하고/지시하는 <이것>에 보편성이란 가상으로 항상 따르는?} 순수한 존재라고[2] 할 수 있겠다. 이 매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감각적 확신이 말하고자/지시하고자 했던 것에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난 <여기>와 <지금>이다. 즉,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지시하는} 다수의 <여기> 혹은 <지금>이 [서로 무관하게] 단순히 [한데] 모여있는[3] 것이다. 근데 문제는[4] 이런 다수가 스스로 {즉자적으로만 규정된} 규정성에 머물기 때문에  {감각적 확신이 구체적인 것이라고 하는 여기 <이것>도  역시} 제각기 그저 {가상에 불과한??} 보편적인 것이란 데 있다[5].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 손끝에 있는 소금을 예로 하여 설명해 보자.} 여기 이 소금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여기>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접힘을 갖는 다층.다각적인 것이다.[6] 그것은 하얗고 또한 찌르듯이 짜고, 또한 입방체이며, 또한 일정한 무게를 갖는 등 이렇게 계속 <또한>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다수의 성질들은Eigenschaften 모두 단순한 <여기>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7] 있는데, 이때 각 성질은 그런 하나의 일부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온통 두루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소금이 일정 부분만 짜지 않고 온통 짜다.} 어떤 성질도 이 <여기>외 다른 <여기>를 갖지 않고, 모두가 이 <여기>안 어디에나 있고, 이 성질이 있는 곳에 다른 성질 또한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여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각 성질이 하나의 <여기>에 온통 꽉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 없다. 흰색이 입방체에 영향을 주거나 변형을 가하는 일이 없다. 또 흰색과 입방체가 짠맛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다. 이렇게 어떤 성질도 다른 성질에 영향을 주는 법이 없고, 저마다 {아무런 구김 없이 순진하게 자기만을 드러내는,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단순한 자기와의 관계 속에 침몰되어 있기[8] 때문에, 다른 성질을 가만히 놔두고, 관계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구애가 없는 <또한>에[9] 의해서 일뿐이다. {이렇게 쭉 살펴보니 물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또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이 <또한>이 바로 순수한 보편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매체이며 갖가지 성질을 앞에서 이야기한데로 총괄하는 물성이다.



[1]원문<Dingheit>

[2]원문<das reine Wesen>. „헤겔이 말하는 본질이란 변화하는 유한한 사물을 통해서 자기와 관계하는 존재이며,최종적으로는 절대자의 부정적인 운동이다. 그때 절대자는 가상으로서의 직접적인 존재로부터 내면적인 자기로서의 개념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 다양한 존재의 구별은 그 다양성 때문에 진리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으로서 부정되며, 동시에 그것들을 매개로 함으로써... 본질이 다양한 구별을 총괄하는 내면적인 것으로서 분명하게 한다.“(헤겔사전, 본질(156쪽) 참조.)

[3]원문<ein einfaches Zusammen von vielen>. <Zusammen(함께)>이란 부사를 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4]원문<aber>

[5]원문<aber die vielen sind in ihrer Bestimmtheit selbst einfach Allgemeine.>

[6]원문<vielfach>

[7]원문<in Einem einachen Hier>

[8]원문<einfaches Sichaufsichselbstbeziehen>

[9]언문<das gleichgültige Auch>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 중중부

이와 같은 일개의 독립체(Eigenschaft)가 정립됨과 동시에 {중세 독일 땅에 수많은 “Eigenschaft”가 널려있었던 것과 같이} 다수의 이런 독립체들이 정립된다. 이때 이들은 {부정 운동을 하는 감각적 확신이 meinen하는} 서로 부정하는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의 언사/지시행위의 결과를 보면} 이 모든 독립체들이 [아무런 접힘/주름이 없는] 보편이라는 단순성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1] {대타존재적인} 규정이[2] 하나 더 추가되어야만 {단일체를 넘어서 진정한} 독립체가 되는, {그런데 아직 즉자존재적인 규정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 단일체일 뿐이지 다른 단일체와 경계를 이루는 독립체가 아닌} 이런 규정성들은[3] 각기 자기와만 관계하고[4] 서로 무관하고[5], 홀로[6] 다른 이로부터 자유롭게[7]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아무런 접힘이 없이 자기동일을 유지하는 보편성도 역시 그 안에 포함된 {즉자존재적으로만 규정된 단일체란} 규정성들과도 구별되고 그들에 얽매어 있지 않다[8]. 이 보편성은 순수한 자기자신과[만]의 관계함[9],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은 [즉자존재적으로만 규정된] 규정성들이 모두 함께 널려있는 매체다. 그래서 이런 규정성들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단순한 통일체인 보편성 안에서 {자기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오직 자기만을 이 보편성 안에서 두루 펼쳐 몽땅 자기 것으로 찬탈하는 식으로} 제각기 두루 속속들이 꽉 차있지만[10] 서로 접촉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참여하는 보편성이란 순수한 자기자신과의 관계함일 뿐이기 때문에 그 안에 서로 무관하게 각기 홀로 있기 때문이다.



[1] 원문 <eigentlich>

[2]원문<Bestimmung>. 헤겔사전, 이신철 역, 49쪽 참조

[3]원문<Bestimmtheiten>. 같은 책 같은 곳 참조

[4]원문<auf sich selbst>

[5]원문<gleichgültig gegeneinander>

[6]원문<für sich>

[7]원문<frei von der andern>

[8]원문<unterschieden und frei>

[9]원문<das reine Sichaufsichbeziehen>

[10]원문<durchdringen>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3 중부

— {그럼 이제 이 보편적인 직접성이[1]뭔지 논리적인 필연성에 따라 전개해 보자.}[2]존재란 매개를 거쳐서, 달리 표현하면 [언사/지시행위가 meinen하는 <이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이것>의 흔적을 담고 또 그 흔적이 밖으로 드러나는[3]일개의 보편적인 것이 된다. {존재의 직접적인 면을 보면} 존재는 그가 말하는 직접성에 나타나는[4]이런 매개 혹은 부정의 운동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것>과 어우러진 상태에 있고, 그럼으로써 다른 <이것>과} 구별되는 [자기 규정으로] 규정된 일개의 [독립] 체가[5] 된다.



[1]원문 <eine allgemeine Unmittelbarkeit>

[2]원문 <aber>

[3]원문 <an ihm>

[4]원문 <an seiner Unmittelbarkeit>

[5]원문<eine unterschiedene, bestimmte Eingenschaft>. 여기서 <Eigenschaft>를 <성질>로 번역하지 않았다. 역자는 „Eigenschaft“를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에 기대에 번역하였다. 그는 <Von der Leibeigenschaft zu den Menschenrechten: eine Geschichte der Freiheit in Deutschland/농도제도에서 인권들로: 자유의 유래에 대한 독일역사를 달리 보는 시각>이란 책에서 중세의 체제를 „한정된 지역“(„Eigen“)의 „독립체제“(„Eigenschaft“)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Eigen“이란 전근대적인 개념이 아직 학문적으로 철저히 연구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이어 법학과 역사학이 사용하는 <Grundherrschaft/장원제도>란 개념은 단지 학문적인 상위개념일 뿐 중세가 스스로 사용하지 않은 개념이며, 중세 문건에서 볼 수 있는 „Eigenschaft“란 개념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페터 블리클레는 „Eigen“이란 것이 무엇인지, 관련 자세한 연구의 대상이 된 바이에른과 슈바벤의 근접지역의 과거현실을 근거로 하여 설명한다. 특히 로텐부흐(Rottenbuch)에 있는 „Chorherrenstift“(대성당 참사회가 관리하는 재단)에 딸린 „Eigen“에 대한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이 „Eigen“은 수백 년 동안 존속하였는데 1400년 이후의 기록에 따르면 약 200내지 250개의 농경지+농가(Hof)가 속해 있었다. „Eigen“에 딸린 농경지를 일구는 농민들에게는 대성당 수석신부(Propst, 보통 참사회 최고 대표자)와 재단에 농경지 사용의 대가로 일정량의 수확물과 현금을 납부할 의무 및 „Scharwerke“이란 부역(Frondienst)을 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Eigen“에 딸린 농부들은 „Eigenleute“라고 불렸다. 그들은 그 „Eigen“내에서 [대성당 수석신부의 허락아래] 결혼했어야 했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일정한 의무가 부과되었다. 중세에 살았던 독일 농부들은 이렇게 농경지+농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런 관계의 총체가 중세에 사용되었던 개념인 "독립체제"로서의 „Eigenschaft“란 것이다. 참사회 혹은 대성당 수석신부가 수장이었다는 면에서 „Eigenschaft“는 지배와 관련하고 있지만, 여기서 지배란 „Eigenschaft“를 보충하는 요소일 뿐이다. 구체적인 „지배행위“는 매년 추수가 끝난 다음 소집되는 „Bauding“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날 „Eigenleute“들은 납부할 곡물과 세금을 갖다  바쳤다. 그리고 이듬해 일굴 농경지의 규모를 당년 실적을  감안하여 새로 책정하였다. 병, 사망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즉 이듬해 누가 농경지를 일굴 것인가 등의 문제도 다루어졌다. 그 외 „Bauding“에서는 실정법을 낭독하여 그것을 공포하거나, 혹은 그것이 불분명한 경우 대성당 수석신부가 모인 „Eigenleute“들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물어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렇게 실정법을 확인한 후 „Dinggericht“가 열렸다. „Eigenschaft“는 이렇게 일정한 사람과 일정한 땅과 함께 거기에 속한 물건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관철되는 동일한 법현실의 공간이 도려져 구별되었다는(markieren) 것을 의미한다. (같은 책19쪽 이하 참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