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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7

(§17) [감각적 확신이 이렇게 우리를 자기 자리에 세워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 손가락 끝에 점같이 붙어있는] <바로 이 지금>을 보라고 한다.[1] {헤겔 왈: 어 근데 일이 이상하다.} 손가락 끝에 붙어있는<지금>이 보여주는 순간 이미 명을 다하고 사라지고 없다. 지금 있는<지금>은 보여준<지금>과 다른<지금>이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지금>이란 바로 이런 것, 즉 있는 순간 더 이상 있지 않는 것임을 본다. 감각적 확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식의<지금>은<한 때 그랬던 것[2]>이고, 바로 이것이 감각적 확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지금>이 담고 있는[3]것이다. [<지금>이 담고있는 것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으로서] <지금>은[존속하는] 있음을 담고있는[4]것이 아니다. 감각적 확신은 그렇게 따져보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지금>이 한때<지금>이었다는 것은 사실이[5]아닌가 할 수 있겠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나<한때 그랬던 것>은 따져보면[꼰대를 세우고 자기자리를 지켜 불변하는] 본질이라고[6]할 수 없다. 한때 그랬던 것은 지금 있지 않다. 그런데[애당초] [존속하는] 있음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1]구스타브 플로베르의 <구김 없는 마음/Un coeur simple>의 주인공 시녀 펠리씨테(Felicité)를 연상하면서 번역하였다. 펠리씨테는 뱃사람이 되어 하바나로 간 조카 빅토르를 뼈저리게 보고 싶어한다. 약사 부레가 지도를 펼쳐놓고 지도 읽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하바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한 점을 가리키면서 하바나라고 하자 펠리시테는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눈을 돌리지 못한다. 지도에서 빅토르가 살고 있는 집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Il atteignit son atlas, puis commença des explications sur les longitudes ; et il avait un beau sourire de cuistre devant l'ahurissement de Félicité. Enfin, avec son porte-crayon, il indiqua, dans les découpures d'une tache ovale, un point noir, imperceptible, en ajoutant « Voici. » Elle se pencha sur la carte ; ce réseau de lignes coloriées fatiguait sa vue, sans lui rien apprendre ; et Bourais l'invitant à dire ce qui l'embarrassait elle le pria de lui montrer la maison où demeurait Victor. Bourais leva les bras, il éternua, rit énormément ; une candeur pareille excitait sa joie ; et Félicité n'en comprenait pas le motif, - elle qui s'attendait peut-être à voir jusqu'au portrait de son neveu, tant son intelligence était bornée !” (강조 역자)

[2]원문 <ein gewesenes>

[3]원문 <Wahrheit/진리>

[4]원문 <die Wahrheit des Seins> 소유격을 목적소유격으로 처리했다.

[5]원문 <wahr>

[6]원문 <Wesen/본질>. 여기서 <Wesen>은 <머무르다, 존속하다>란 의미를 갖는 <wesen>이란 동사의 동명사로 사용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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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6

(§16)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와 같은 확신은 우리가 밤이 된<지금>이나 밤을 맞이한 자아가 있다고 주의를 환기하여도, 자기 자리를 떠나 이[우리]쪽으로 오는 법이 없으므로 우리가 그에게 다가가 그가 주장하는<지금>을 보여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보여달라고 하는 것 외 다른 방법이 없는 이유는 이와 같은{말로 표현되지 않는} 직접적인 관계가 담고있는 것은[1]자신을 깎아내려 하나의<지금>, 혹은 하나의<여기>에 자신을 묶어놓은 개별적인<나>를 고집/견지하면서<이것 보라>고 하는 자아가 존재하는 터전이기[2]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밤을 담고 있는<지금>을 나중에 다루거나 혹은 나무를 담고 있는<여기>와 동떨어진 곳에 서서 낮을 담고있는<지금> 혹은 집을 담고 있는<여기>를 제시한다면, 이것은[고정된] 감각적 확신이 담고있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대상과 자아로 구별되지 않고 한 묶음으로 고정되어 있는] 감각적 확신이 존재하는  터전이[3]되는 바로 그 직접성을 걷어치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고정된] <나>라는 자아가 자리하는[4]시간 혹은 공간적인 위치에 똑같이 들어서서 그 직접성을 보여달라고 해야 한다. 이 말은 아는데 있어서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는<나>를 고집하고 그 개별성을 내세우는 자아가 우리를 그와 똑 같이 만들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 그럼 우리를 이렇게 세워놓고 보라고 하는 직접적인 것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1]원문 <Wahrheit/진리>

[2]원문 <dies Wahrheit dieses Ich>. 좀 장황하게 <개별적인 … 존재하는 터전>으로 번역하였다.

[3]원문 <Wesen/본질>. <존재하는 터전>으로 번역하였다.

[4]원문 <Punkt>. <점>. 역자는 여기서 롤랑 바르트가 “La chambre claire-Note sur la photographie”에서 이야기한 <Punktum>을 연상한다. 불행히도 이 책을 아직 읽지 못했다. <Studium>, <Punktum>을 알게 된 것은 데리다의 “Les morts de Roland Barthes”를 통해서 였다. 원본이 아니라 한겨울 조개탄냄새와 안개로 스산한 크로이쯔베르크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손에 쥐게 된 번역본 “Die Tode von Roland Barthes”를 통해서 였다. 롤랑 바르트가 누군지 데리다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죽음을 복수형으로 하여 “die Tode”한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고, 몰이해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가끔 보이는 이해의 섬을 기뻐하면서 읽어 내려간 책이었다. 이 책이 지금 옆에 없다. 한때 서너 권만 남겨놓고 책을 다 정리했는데 그때 함께 정리되어 버렸다.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다. 아무튼 <직접성>과 함께 사진,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Punktum>으로 헤겔을 맞설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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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이의 장미"

ES WAR ERDE IN IHNEN, und
sie gruben.

 

Sie gruben und gruben, so ging
ihr Tag dahin, ihre Nacht. Und sie lobten nicht Gott,
der, so hörten sie, alles dies wollte,
der, so hörten sie, alles dies wußte.

 

Sie gruben und hörten nichts mehr;
sie wurden nicht weise, erfanden kein Lied,
erdachten sich keinerlei Sprache.
Sie gruben.

 

Es kam eine Stille, es kam auch ein Sturm,
es kamen die Meere alle.
Ich grabe, du gräbst, und es gräbt auch der Wurm,
und das singende dort sagt: sie graben.

 

O einer, o keiner, o niemand, o du:
Wohin gings, da’s nirgendhin ging?
O du gräbst und ich grab, und ich grab mich dir zu,
und am Finger erwacht uns der Ring.

 

파울 첼란의 “Niemandsrose"(아무도 아닌 이의 장미)란 시집의 첫 시로 게재된 위의 시를 내키는 데로 번역해 본다.

 

옛날 옛적에 그들은 흙에서 나와 흙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니고 있는 흙과 땅을 갈았다.

언제인가부터 그들을 굴을 파고 들어가지 시작했다. 그들은 이렇게 굴을 파고 들어가면서 날을 보내고 밤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찬양을 멈추었다. 그들이 들었던바 이 모든 것을 원하고, 그들이 들었던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신을 더 이상 찬양하지 않았다.

그들을 계속 굴을 파고 들어가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지혜롭게 되지 않았고, 노래 한가락도 흘러 내보내지 않았고, 어떤 말도 지어내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그저 죽음을 향한 굴을 계속 파고 들어가기만 했다.

세미한 소리와 함께 온다고 하던 것은 오지 않고 다만 폭풍이 오고 모든 바다가 뒤따라 왔다. 나는 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을 뿐이고 너도 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을 뿐이구나. 그리고 저기 저 지렁이도 역시 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을 뿐이구나. 한가락 노래가 들리는듯하면서 말한다. 그들은 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다고.

아! 그 한 분은 어디로 가고 아무도 없단 말인가. 아무도 아닌 이여, 그대가 바로 너인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았는데? 아! 네가 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고 내가 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구나, 그리고 나는 내 안의 흙을 파헤치면서 너에게로 파고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흙을 긁어내는 우리의 이 손가락에 너와 나를 하나로 잇는 반지가 깨어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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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5

(§15) 그래서 이와 같은 순수한 직접성은 나무를 보고서<여기>하고 밤을 보고서<지금>할 때, 이<여기>와<지금>의 다른 존재양식[1], 즉 나무로서의<여기>가 나무가 아닌<여기>, 그리고 밤으로서의<지금>이 낮으로서의<지금>으로 이전하든 말든, 아니면 나무와 밤과는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자아가 있든 말든 그런 것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않고 또 동요되는 법도 없다. 이 직접성이 담고 있는 것은[2]<나>라는 자아와 대상간에[꼰대로서의] 본질과 들러리라는[3]차별을 두어 이쪽과 저쪽 중 그 어느 한쪽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관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 안에서는 양자간 어떤 차이도 스며들 틈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에 변화가 발생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이 순수한 직접성이 담고있는 것은[4]항상 자신을 지켜 유지하는 양자간의 한결 같은 관계다.[5]무슨 말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6]. 여기 이 자리에 서있는 나는[7]<여기>가 나무라고 주장하고 여기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 결과, <여기>가 나무가 아닌 것이 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나는 다른 자아가<여기>를 나무가 아닌 것으로 보고 있거나 또는 상황이 바뀌면[8]나 자신이<여기>를 나무가 아닌 것으로 또는<지금>을 낮이 아닌 것으로 취급할 것이라는[세상살이의 지식을] 모두 지워버리고[9]나는 오로지[내가 마주하는 것에 완전히 빠져들어가 그것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순수한 바라봄일[10]뿐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내 자신을 지켜 흔들림 없이[11]<지금은 낮이다> 아니면 이것과 무관하게[12]<여기는 나무다>라는 직관에서 벗어나지 않고[이런 직관 안에서] [서로 무관한] <여기>와<지금>을 비교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로지[마주하는 대상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13]하나만의 관계만을 붙잡고<지금은 낮이다>라고 할 뿐이다.



[1]원문 <Anderssein>

[2]원문 <Wahrheit>

[3]원문 <Unwesentlich>

[4]원문 <Wahrheit>

[5]원문 <sich selbst gleichbleibende Beziehung>.

[6]원문 <also>

[7]원문 <ich, dieser>

[8]원문 <ein anderes Mal>

[9]원문 <keine Notiz nehmen>. 현상학이 말하는 환원과 에포케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10]원문 <reines Anschauen>. 지금 그것을 바라보는 것 외 다른 것이 없는 직관 행위

[11]원문 <ich für mich>

[12]원문 <auch>

[13]원문 <unmittel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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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4

(§14) 감각적 확신은 결국 그가 말하는 [확신이라는] 본질을 대상이 담보하지도 않고 <나>라는 자아가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그가 말하는 [꼰대로서의] 직접성이 전자나 후자가 존재하는 양식이 아니다라는 것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자아가 양자에 다가서서 붙들려고 하는 것은[1][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양자에서 드러나듯이[2]오히려 들러리에 지나지[3]않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 확신은 그가 말하는] 대상과 자아가 보편적인 것이라고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보편성 안에서는 <지금>,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이 내가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는[4]대로 존속하거나 [그런 직접적인 순순한 존재로만]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럼 감각적 확신을 살리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면 우리는 자아에 대립하는 대상이 [확신의 모든] 물증을 담는[5]첫 경우와 <나>라는 자아가 확신의 모든 물증을 담는 다음 경우에서 그랬듯이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이 갖는 두개의 축에서 단지 한 축만을 확신을 담보하는 본질로 삼을 수 없고, 이젠 [감각적 확신을 두개의 축으로 구별하여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을 삼가고] 두개의 축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하나로 묶여있는 총체를[6]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확신의 본질로 삼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감각적 확식은 이젠 오로지 하나로 묶여 있는 감각적 확신만이[7]그가 말하는 직접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8]고집하고, 이렇게 앞에서 일어난 모든 대립은 감각적 확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배제한다.



[1]원문 <meinen>

[2]원문 <an beiden>

[3]원문 <ein Unwesentliches>

[4]원문 <meinen>

[5]원문 <Realität/현실>. §12의 <Beglaubigung/증명>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6]원문 <das Ganze der sinnlichen Gewissheit>. 여기서 <das Ganze/총체, 전체>를  독일문학의 가장 오래된 애가(Liebeslied)로 간주되는 시 한편에 기대여 <Geschlossenheit/아무것도 따로 구별되어 빠져 나올 수 없이 갇힌 상태>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Dû bist mîn, ich bin dîn:

Des solt dû gewis sîn.

Dû bist beslozzen in mînem herzen;

Verlorn ist daz slüzzelîn:

Dû muost immer drinne sîn.“

 

(너는 나의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다. 너는 이것을 확신해야 한다. 너는 나의 마음 속에 갇혀있다. {나의 마음은 온통 너 뿐이다.} 내 마음을 열 열쇠는 분실되어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너는 항상 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7]원문 <die ganze sinnliche Gewissheit>. 여기서 <ganz>를 <하나로 묶여있는>으로 번역하였다.

[8]원문 <an ihr als Unmittelbar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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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2, 13

(§12) 이제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확신을 담보하는[1]힘은<나>라는 자아, 즉[목전에 있는 것을] 보고 듣는 나의 직접성 속에 놓여있다. 우리가[애타게] 손을 뻗어 붙잡으려는[2]그때마다의 지금과 그자리 그곳의 여기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3]. 그러나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나서는 힘이 있다. 즉<나>라는 자아가 그들을 꽉 붙들어 잡는 힘이다. <지금은 낮이다>. 그 이유는 내가 낮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나무다>라는 확신도 똑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은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도 위와 똑 같은 변증법이 그가 하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의 존재양식을 취하는<나>라는[4]자아가 나무를 보고서<여기는 나무다>라고 주장할 때 똑 같은 존재양식을 취하는 다른<나>라는 자아는 집을 보고서<여기는 나무가 아니라 집이다>라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참말인가 판가름 할 수 없게 양쪽 다 똑같은 것을 증거물로 내놓는다. 즉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직접성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확언할 수 있다는 요지부동한 확신과 단언을 증거물로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병존할 수 없고 한편이 담고있는 것은[5]다른 편에 가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

(§13) 이런 완벽한 사라짐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이것>으로서의 직접적인 자아가 아니라] 보편적인 자아다. 이런 보편적인 자아의 보는 힘이란[6]이 나무나 저 집 등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매달려 있지 않는[이리저리 갈라지지 않는] 단순한 보는 힘이다. 이런 단순한 보는 힘은 이 집, 저 나무 등을 부정하는 힘을 통해서 매개된 것이다. [이렇게 매개되었다고 해서 보편적 자아의 보는 힘이 단순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자아의 보는 힘은 이런 매개 안에서도[아무런 굽힘과 쏠림이 없는 까닭에] 거기에 들러리 서는 것, 즉 이 나무, 저 집을[부정하는데 있어서 부정되는 것들에 개의치 않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단순한 보는 힘인 것이다.[7] <나>라는 자아는<이것>의 존재양식인[8]<지금>과<여기>와 마찬가지로 단지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내가<나>를 말할 때 개별적인 자아를 염두에 둔다[9]할지라도 상황은<지금>과<여기>에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나>라는 자아를 말로 표현하면 염두에 두었던 것과 다른 것이 된다. 내가 개별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면서<여기 이것>, <지금 이때>라고 말하면, 이때 표현되는 것은  <이것/이때>하고 지시하는 모든 지시행위, 즉 모든<지금>과  모든<여기>와 함께 모든<개별적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지시하면서<나>라고 말하는 순간 표현되는 것은 사실<나>라는 모든 자아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는<나>라는 자아라는 말은 모두가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런데 감각적 확신이 취하는 입장에 서서 이상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문에게[바로 목전에 있는 개별적인] <이 물건> 또는<이 사람>을 연역하라고,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성하라고[10]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것을 선험적으로 찾아내라는 요구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이런 요구를 학문의 시금석으로 하여 학문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한다면 거꾸로 그들에게 최소한 그 요구가 말하는<이것> 또는<이 자아>가 도대체 어떤<이것>과 어떤<이 자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말로 다 표현하라고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을 말로 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원문 <Wahrheit>

[2]원문 <meinen/사념하다>

[3]원문 <verschwinden>. <völlig vergehen/완멸(完滅)하다>

[4]원문 <Ich, dieser>

[5]원문 <Wahrheit>

[6]원문 <Sehen>. 아리스토텔레스적인 <Sehkraft/보는 힘>으로 번역하였다.

[7]애당초부터 동시에 직접적이고 매개된 것이라는 말인 것 같다.

[8]원문 <Jetzt, Hier oder Dieses überhaupt>. 역자는 여기서 <oder>를 설명하는 <oder>로 이해하고 번역하였다. 헤겔이 §6에서 개별적인 <이것>의 근본규정으로 <여기>와 <지금>을 제시한 것에 기댄 이해다. 칸트의 내외적 직관형식(Anschauungsform)이 연상되기도 한다.

[9]원문 <meinen>

[10]원문 <konstrui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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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9, 10, 11

(§9) <이것>의 다른 형식인 <여기>도 사정은 <지금>의 경우와 똑같다. 예를 들어 <여기>는 <나무>라고 하자. 그리고 돌아서보자. 그러면 그 진리는 사라지고, 대려 <여기는 나무가 아니다>라는 반대의 진리로 뒤집히고, <여기는 집이다>라는 진리로 대치된다. 그러나 <여기>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여기>는 집, 나무 등등의 사라짐에 딸려 함께 사라지지 않고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으로서 집이 되든 나무가 되든 거기에 아무런 쏠림이 없는 무관심한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이것>은 매개된 단순성, 달리 표현하면 보편성을 자신의 모습으로 하여 나타난다.

 

(§10) [감각적 확신은 그가 직접 관계하는 대상이 담고 있는 것을 순수한 존재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와보니 감각적 확신이 하는 [언사행위]에서 그가 말하는 대상이 담고 있는 것은 [1]보편성이란 것이 밖으로 드러났다. 때문에 그가 꼰대를 세우고 본질이라고 했던 <순수한 있음>은 이제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이 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가운데 집어 찍어 올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순수한 있음>이 아니다. <순수한 있음>이란 이제 직접적으로서가 아니라, 부정과 매개를 그 중심에 담고 있는[2]<순순한 있음>으로서 감각적 확신의 본질이 된다. 이렇듯 <순수한 있음>은 우리가 사념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것도 딸려 있지 않음[3],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보편자라는 규정을 갖는 <있음>인 것이다. {근데 감각적 확신의 구체적인 내용이 우리에게(!) 처음엔 풍성하고 참다운 것으로 보여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과 <여기>가 공허하고 그들이 담고 있는 <이것>이나 <저것>과 무관한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린 마당에 감각적 확신이 진정 담고 있는 것은[4]보편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담보하는 것은 우리의 사념일 뿐인가? 아니면 감각적 확신도 그렇게 사념하게 될까?}[5]

 

(§11) 지와 그 대상이 처음 등장할 때의 관계와 그들이 지금 이 결과에서 갖는 관계를 서로 비교해보자. 양자의 위상이 뒤집혀 버렸다. 처음엔 대상이 감각적 확신의 [자기자리에 우뚝 서있는 꼰대로서의] 본질이라고 했는데, 이젠 대상이 감각적 확신의 들러리가[6]되어버렸다. 왜냐하면, 보편자가 되어버린 마당에 대상은 이젠 더 이상 감각적 확신이 본질로 간주하는 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감각적 확신은 그가 말하는 본질을 대상의 반대편에서, 즉 지금까지 들러리에[7]지나지 않았던 지에서 건져야[8]할 판이 되었다. 감각적 확신을 담보하는 것은[9]이제 나의 대상으로서의 대상에, 즉 사념에 있게 되었다.[10]<대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식이다.[11]이렇게 감각적 확신은 대상에서는 쫓겨났지만 [그러나 아무런 매개가 필요 없는 직접적인 것을 추구하는 본래의 아집을 버리지 않고 이런 아집을 지닌 체] 지 안으로 [할 수 없이] 일보 후퇴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이젠 이렇게 새로운 현실에 처한 감각적 확신이 어떤 체험을[12]우리에게 보여주는지 살펴볼 차례다.



[1]원문 <Wahrheit>

[2]원문 <wesentlich>

[3]원문 <Abstraktion>

[4]원문 <das Wahre>

[5]이 부분의 논리전개, 즉 대화구도를 아직 분명하게 잡아내지 못했다. 

[6]원문 <unwesentlich/비본질적인>

[7]원문 <das Unwesentliche/비본질적인>

[8]원문 <vorhanden>

[9]원문 <ihre Wahrheit>

[10]원문 <als meinem Gegenstand, oder im Meinen>. 헤겍은 여기서 동음에 기대에 <내것>과 <사념>을 동선에 놓는다. 역자는 헤겔과 <감각적 확신>간의 다툼에서 <감각적 확신>을 최대한 강하게 하기 위해서 <meinen>에 스며있는 <몸을 기울려 어디에/누구에게 기대다, 사랑하다>란 의미를 살리고 싶다.

[11]호라티우스의 <me dicente>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것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12]원문 <Erfahr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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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8

(§8) [감각적 확신이 담고 있는 것이 이렇게 보편적인 것이 되는 것은 감각적 확신과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깊은 관계가 있다.] 말하는 순간 감각적 확신과 더불어 우리는 감각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언사행위를 보면, <이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1], 또 <이것이 있다>라고 할 때 사실 모든 것에 적용되는 <있음>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이때 <보편적인 이것>이나 모든 것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목전에 있는 뭔가 직접적인 것을 목적하고 있지만] 우리의 언사행위는 [결국] 이렇게 보편적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언사행위를 보면 우리가 감각적 확신 안에서 생각하는[2] 것이 절대 그대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참다운 것을 말하지 않는가?] 아니다. 대려 언어가 보다시피 감각적 확신보다 더 참다운 것이다. 언어 안에서는 우리도 감각적 확신과 다를 바 없는데, 언어로 우리의 사념을 표현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우리의 생각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보편적인 것이 바로 감각적 확신이 실로 담고 있는 것이기[3] 때문에, 그리고 언어는 오직 이것만을[4] 표현하기 때문에, 감각적인 확신 안에서 사념하는 있음/존재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젠가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아무리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남게 된다.



[1]원문 <aussprechen>. 다른 사람이 듣게 말로 표현하다.

[2]원문 <meinen/사념하다>

[3]원문 <das Wahre/참다운 것>

[4]원문 <dieses Wah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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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7

(§7) 우리가 이렇게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것을 써서 보관한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듣고서 그를 그가 말한 데로 [그가 말한 것과 일치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지금은 밤이다>라는 말을 [써서] 보관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 <지금>을 <[목전에] 있는 것>[1]으로 취급하는 것에 합치하게 써서 보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경과하면서] <지금>이란 것이 사라져 버린다. [항아리란] <지금> 그 자체는 자신을 지켜 그대로 있는데, [그 항아리가 담고 있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밤이 아닌] 더 이상 밤을 담고 있지 않는 <지금>으로 지속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낮이 지금인 <지금>은 낮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그것과 결별하고 자신을 지켜 낮이 아닌 것으로 지속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지금>은 자신을 지키는데 있어서 어디까지나 부정적인 것으로 지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을 지켜 지속하는 <지금>은 [찍어 들어 올릴 수 있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매개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이 변함없이 존속하는 것이라는 규정성은 타자가 아니라는, 즉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개된 것이라고 해서 <지금>이 [단순성을 상실하고 주름진] <지금>이 된 것은 아니다. [이런 매개를 거치는 가운데 <지금>에 뭔가가 상처와 같이 응어리 지거나 딱지로 남아있지 않고][2]어디까지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주름이 없는 [매끈한] 단순한 <지금>일 뿐이고, 이런 단순성 안에서 <지금>은 그 안에서 들러리 하는 것에[3]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낮이나 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은 존재하는데 있어서 타자존재양식을 취해도 그것에 전혀 물들지[4]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이와 같은 [굽힘/주름이 없는] 단순한 것,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딱 찍어 잡아 들어 보여줄 수 없는 것[5], 그러면서도 여기에 개의치 않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가운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을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감각적 확신이 진리라고 담고 있다고 내놓는 것이 사실 [직접적이기는커녕] 보편적인 것이다.



[1]원문 <Seiendes>

[2]데리다의 <incision>, <Mal>

[3]원문 <bei herspielen>

[4]원문 <affizieren>

[5]원문 <Nichtdie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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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6

(§6) {그런데 그런 것이 어떻게 스스로 표면에 드러나지? 대답하게 물어보면 되지…} 그럼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닌 감각적 확신에게 직접 물어보자. 감각적 확신아, 너 <바로 이것, 이것>하는데 <이것>이란게 도대체 뭐냐? [말해봐.] <이것>이라는 [지시적인 것의] 이중적인 존재양식, 즉 <지금>과 <여기>라는 면을 차례로 살펴보면, 지시적인 <이것>이 [자기 모르게] 행하는 변증법이 밖으로 드러나[1],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는 자명한 <이것>못지않게, 쉽게 이해되는 형식을 취할 것이다. <지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예를 들어 <지금은 밤이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감각적 확신이 정말 자기가 말하는 것을 담고 있는가를[2] 조사하는 데는 그리 애쓸 필요가 없고 아주 간단한 실험만 해도 충분하다. [뭔가를 항아리에 담듯이] 감각적 확신이 하는 말을[3] 써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뭔가를 이쪽 항아리에서 저쪽 항아리로 옮겨 담았다해서 그 뭔가가 달라지지 않듯이] 우리가 감각적 확신이 하는 말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고 해서, 아니면 우리가 써놓은 종이를 [항아리를 선반에 올려놓듯이] 어딘가에 보존한다고 해서 감각적 확신이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사라질 리가 없다. 어, 바라보니 이제 어느덧 정오다. 지금 이때 우리가 써놓은 감각적 확신이 담고 있는 것을 다시 바라보니, 어찌된 일인지 삐적 마른 뼈다귀만[4] 남아있다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1]원문 <die Dialektik, die es [das Diese] an ihm hat>

[2]원문 <die Wahrheit dieser sinnlichen Gewissheit>. 여기서 <Wahrheit/진리>는 내용물의 참과 그릇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즉 <proposition>의 진리값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물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나아가 어떻게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3]원문 <diese Wahrheit>

[4]원문 <schal/맛이 간>. 그리스어 <skeleton/해골>과 어원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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