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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22
    정신현상학 서설 § 54-수정
    ou_topia
  2. 2010/09/21
    정신현상학 서설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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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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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9/17
    정신현상학 서설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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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9/17
    정신현상학 서설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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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9/14
    정신현상학 서설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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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9/13
    정신현상학 서설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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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9/12
    정신현상학 서설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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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9/11
    정신현상학 서설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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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9/10
    정신현상학 서설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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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4-수정

{어제 올린 정신현상학 서설 §54 번역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원문에 대한 충분한 이해보다는 앞뒤가 맞는/읽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역자라도,  [원문이 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뭔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번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올린다.} 

 

 

§54) [이런 풍부한 내용이 뭔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통틀어서 이야기 하자면[1]앞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주어로 사용되는] 실체[2]그 자체에 [애당초부터] 주체가/[생동하는 주체로서의 힘이] 스며들어 있기[3]때문에 [모든 규정이 부정된 이 실체가 갖는] 형형색색의 내용은 [밖에서 누군가가 구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실체가 자기반성을 통해서 스스로 구별짖는 것이다.[4]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뭔가로 존재하는} 현존재에서 한번 살펴보자.] 현존재가 존속하는 터전/본질, 즉 실체는[5]자기동일성[6]이다. 왜냐하면, 자기자신과 동일하지 않는 현존재는 해체되기 때문에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7] 더 살펴보면[8]이런 자기동일성이란 순수한 추상이며, 그리고 바로[9]이런 추상이 사유가 되는 것이다.[10] 내가 여기서 질이라는 말을 사용할땐 [다른 모든 규정은 제쳐놓고 현존재를 {셀 수 있는} 하나로 규정하는] 단순한 규정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현존재는 이런 의미의 질을 통해서 다른 현존재와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란 것 자체가 성립된다. [하나로서의] 현존재란 독자성을 통해서, 달리 표현하면 [그것외 다른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다 추상한/ 아무런 분열이 없이 해맑은] 자기와 일체를 이루는 가운데[11]존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의 본질이 [사유의 산물인] 사상인 것이다.[12] — 바로 여기에 <존재는 사유다>라는 명제의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통찰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상투적이고 몰개념적으로 운운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 현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존속하고, 자기동일성은 순수한 추상성이기 때문에 [결국] 현존재의 터전/본질이란 현존재가 스스로 자기로부터 추상한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현존재의 터전/본질은 현존재와 불일치를 이루고 헤체되어 현존재를 바깥으로부터 거두어 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간 내면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존재가 생성되어가는 모습이다. [이젠 현존재를 떠난 존재자 전반을 살펴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은 [사상규정을] 본질로 하고 있다. 존재자의 본질이 이렇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본질이 지의 대상이 되다는 면에서 지가 하는 일이난 낯선 것을 다루는, 즉 반성하는 순간 내용에서 벗어나는 자위행위하는 반성이 아니라 [내용 안에 머무르는 반성이다.][13] 학문은 [내용적인 차원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다투기 만을 일삼는 독단론 대신 [단지 반성의 차원에서, 즉 데카르트와 같이 내용 안으로 침강하지 않고 편안하게 앉아서 자기 안으로만 들어가는 반성을 통한] 자기 확신과 같은 것을 단언하는 독단론을 운운하는 관념주의가 아니다. 학문은 이와 맥을 달리하는[14]것이다. — 지가 하는 일이란 [대상이 되는] 내용이 스스로 자기 내면으로 복귀하는 것을 관조하는 가운데 내용 안으로 침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운동하는] 자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지의 활동은 동시에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대상이 되는 내용인] 타자존재 안으로 침강하지만 또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견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가 하는 활동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듯해 보이는 간계와 같은 면이 있다. 여기서 지가 하는 일이란[자기동일성이란] 규정성이 자기보존이나 특수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삶을 전개해 가지만, 그 일의 결과는 정반대로 스스로를 해체하여 전체의 한 마디가[15]되는 행위임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1]원문 <dadurch überhaupt>

[2]원문 <Substanz>. <실체>란 것이 알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아리달송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본질/Ousia, To ti en einai>, <바탕/Hypokeimenon> 등에 이어 스피노자가 말한 <모든 부정을 앞서가는 그 무엇> 등 헷갈린다. 이런 헷갈린 상태로 이 문단을 다시 읽어 내려간다. 스피노자를 따라 실체를 <모든 부정을 앞서가는 그 무엇> - 스피노자는 이것이 신이라고 한다 – 으로 이해한다면 실체란 모든 규정을 부정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실체가 주체란 면에서, 그리고 주체가 하는 일이 부정운동이란 면에서 자기부정이 아닌가?

[3]원문 <Die Substanz [ist] an ihr selbst Subjekt.> <정신현상학> 서설 §17에서 이야기된 것이 재개되고 있다. <an ihr selbst>라는 표현과 관련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왜냐햐면, <ihr>가 주어인 <Substanz>를 가르키기 때문에 재귀대명사 <sich>가 사용되어야 한다. <an sich> 대신<an ihr>를 사용한 이유는Terminus Technicus로 사용되는<an sich>와 구별하기 위해서 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것이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실체가 주체다>라는 사실은 주어가 되는 실체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체로서의 주어라 할 수가 없다. 단지 실체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만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서론 §17에서 실체를 주체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an ihr>라는 표현에는 이렇게 실체가 주체라는 것이 처음에 외부에서만 파악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다. 실체가 스스로 주체라고 인식할 때, 즉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의 파악과 같아질 때 <정신현상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정말 같아지냐가 문제다.

[4]원문 <Aller Inhalt [ist] seine eigene Reflexion in sich.> 처음엔 <모든 내용은 내용이 스스로 행하는 자기 안으로의 반성이다.>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이 무슨 말인지, 번역해 놓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알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 문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헤겔이 소유대명사를 좀 헷갈리게 사용한다는 점에 기대어 소유대명사 <sein/그것의>이 이 문장의 주어로 사용된<aller Inhalt>를 가리키지 않고, 부속문장의 술어로 사용된 <Subjekt/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번역해 보았다. 이 문장을 이렇게 이해하니 스피노자가 했던 이야기를 헤겔이 반복하는 것 같다. <aller>는<allerlei>란의미로번역했다.

[5]원문 <das Bestehen oder die Substanz eines Daseins>. 실체가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Hypokeimenon/바탕>과 같은 것인가?

[6]원문 <die Sichselbstgleichheit>. 이<자기 동일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to ti en einai>와 같은 것인가?

[7]정말 해체되는가? 그리고 자기동일성이란 것이 정말 [애초부터 있는] 바탕/본질인가. 키에르케고르에 기대어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서술하자면 <자기가 아닌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또 자기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Zu sein, was man nicht ist, und nicht zu sein, was man ist.”/Michael Theunissen, Negative Theologie der Zeit, 참조)이 아닌가 한다. 해체되어 정신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은 자기, 또는 자기동일성의 해체라기 보다는 이런 미칠지경인 상황을<종합해 내는 능력/synthetische Leistung)이 결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자기동일성이란 애초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종합해 내는 능력>의 결과인 것 같다.

[8]원문 <aber>

[9]원문 <aber>

[10]오성이 하는 일이 원래 현존재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것, 곧 추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인데, 헤겔은 이 추상을 별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맑스가 <Grundrisse>에서 이야기한 <Abstraktionsverfahren>도 살펴봐야 하고…

[11]원문  <durch diese Einfachheit mit sich selbst>. 이건 정말 사유의 규정이지 현존재가 현존하는 모습은 아닌 것같다.

[12]원문 <Aber dadurch ist es wesentlich der Gedanke>.

[13]자위행위가 아니라고 하는데 맑스가 이야기한 <실천> 개념에 견주어 보면 자위행위인 것 같다.

[14]원문<sondern>

[15]원문<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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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4

§54) [이런 풍부한 내용이 뭔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통틀어서 이야기 하자면[1]앞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주어로 사용되는] 실체 그 자체에 [애당초부터] 주체가/[생동하는 주체로서의 힘이] 스며들어 있기[2]때문에[사물이 갖는] 형형색색의[3]내용은 [밖에서 누군가가 구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스스로 자기반성을 통해서 구별짖는 것이다.[4] 현존하는 뭔가의 실체, 달리 표현하면 뭔가가 [그것으로] 현존하는 터전은 자기동일성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자신과 동일하지 않는 현존재는 바로 해체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살펴보면[5]이런 자기동일성이란 순수한 추상이며, 그리고 바로[6]이런 추상이 사유가 되는 것이다.[7] 내가 질이라는 것을 말할땐 [현존재를 {셀 수 있는} 하나로서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단순한 규정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고 현존재는 이렇게 질을 통해서 다른 현존재와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란 것 자체가 성립된다. 현존재란 이런 [하나로서의] 독자성, 달리 표현하면 [그것외 다른 것이 아니고 또 내부에 아무런 분열이 없는] 자기와 일체를 이루는 가운데[8]존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는 또한 본질적으로 [사유의 산물인] 사상인 것이다.[9] — 바로 여기에 <존재는 사유다>라는 명제의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통찰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상투적이고 몰개념적으로 운운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 현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존속하고, 자기동일성은 순수한 추상성이기 때문에 현존재란 결국 스스로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추상하는, 달리 표현하면 [추상이전의??] 자신과 불일치를 이루고 해체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체된 현존재란 자기 내면성[만]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바깥으로부터 거두어 자기 안으로[만]  [기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현존재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 같은 존재자의 속성 때문에, 그리고 지에 대하여 존재자가 이런 [현존재의] 속성을 갖을 때, [이렇게 자기 안으로 기어 들어간 내면성인] 내용을 다루는 지는 낯선 것을 다루는, 즉 반성하는 순간 내용에서 벗어나는 자위행위하는 반성이 아니라 [내용 안에 머무르는 반성이다.][10] 학문은 주장만 일삼는 독단주의를 축출하고 자기 확신 등 뭔가를 관념적으로 확실하다고 단언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독단주의와는 완전히 다른[11]것이다. — 지가 하는 일이란 [대상이 되는] 내용이 스스로 자기 내면으로 복귀하는 것을 관조하는 가운데 내용 안으로 침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운동하는] 자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지의 활동은 동시에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지가 하는 활동은 [대상이 되는 내용인] 타자존재 안으로 침강하지만 또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견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가 하는 활동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듯해 보이는 간계와 같은 면이 있다. 여기서 지가 하는 일이란 현존재가 [자신을 자기동일성으로] 규정하고 자기보존이나 특수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삶을 전개해 가지만, 그 일의 결과는 정반대로 자기를 스스로 해체하여 전체의 한 마디가[12]되는 하는 행위임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1]원문<dadurch überhaupt>

[2]원문<Die Substanz [ist] an ihr selbst Subjekt.> <정신현상학> 서설 §17에서 이야기된 것이 재개되고 있다. <an ihr selbst>라는 표현과 관련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다. 왜냐햐면, <ihr>가 주어인 <Substanz>를 가르키기 때문에 재귀대명사 <sich>가 사용되어야 한다. <an sich> 대신<an ihr>를 사용한 이유는Terminus Technicus로 사용되는 <an sich>와 구별하기 위해서 일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것이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실체가 주체다>라는 사실은 주어가 되는 실체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체로서의 주어라 할 수가 없다. 단지 실체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만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서설 §17에서 실체를 주체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an ihr>라는 표현에는 이렇게 실체가 주체라는 것이 처음엔 외부에서만 파악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다. 실체가 스스로 주체라고 인식할 때, 즉 외부에서 관찰하는 [철학]자의 파악과 같아질 때<정신현상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정말 같아지냐가 문제다.

[3]원문<aller  Inhalt/모든내용>. <allerlei Inhalt>란의미로번역했다.

[4]원문<Aller Inhalt [ist] seine eigene Reflexion in sich.>

[5]원문<aber>

[6]원문<aber>

[7]오성이 하는 일이 원래 현존재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것, 곧 추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인데, 헤겔이 이야기하는 추상이란 것에는 별다른 것이 있단 말인가?

[8]원문<durch diese Einfachheit mit sich selbst>

[9]원문<Aber dadurch ist es wesentlich der Gedanke>.

[10]자위행위가 아니라고 하는데 맑스가 이야기한 <실천> 개념에 견주어 보면 자위행위인 것 같다.

[11]원문<sondern>

[12]원문<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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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3

§53) 학문이란 자기를 스스로 조직해 나가는 것으로서 생동하는 개념의 고유한 삶을 두루 거치면서 체계화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1] 그래서[자기 제한적인] 규정이[형식주의에서는] 도식이란 외부에서 골라내어 현존재의 외부에 갖다 붙이는 이름표와[2]같은 것이지만 학문 안에서는[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삶이] 내용으로 충만하게 하는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혼이다.[3] 존재자가[살아나가는] 운동이란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다른 그 무엇이[4]되는 것으로서[이렇게 자기 내재적인 운동으로 발생한 타자를 자기내용으로 갖는 것이고[5],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전개된 것, 즉 타자화된 자신의 현존재를 자기 안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걷어들이는 것으로서, [활짝 전개된 내용으로 충만한 자신의 현존재를 가다듬어 전체의] 한 마디를 이루는 것으로 응집시키고, 이렇게 하여[추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자신을[별것이 아니라 이렇게 제한된] 규정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부정성은, 타자가 되는 운동이라는 면에서, [분투하여 자신을 쪼개] 차이가 나게 하여 [자기]현존재를 정립하는[힘]이고, 자기 안으로 다시 걷어들이는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엄연하게 규정된 단순성이 생성되는[힘]이다. 이렇기 때문에 내용은[자기제한적인] 규정이 되는데 있어서, 타자로부터 뭔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름표로 붙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자기제한적인 엄연한] 규정을 스스로 부여하고, 외부의 힘으로 가지런히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다듬어 일개의 마디가 되어 전체 안에서 자기자리를 잡는 것이다. 일람표에 따라서 사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오성은 사물의 구체성, 즉 실재하고 생동하는 운동이 핵심이 되는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멋모르고[6]차리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자각하지는[7]못하고 있다. [목전에 있는 것만 감지하는] 오성이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 알 리가 없다. 왜냐하면, [감지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오성이 내용의 필연성과 개념을[느닷없는] 통찰력을 발휘해서 한번 보게 되었다면 분명 보여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오성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통찰이 필요하다는 욕구를 느끼지조차 못한다. 이런 부족함을 느꼈다면, 도식에 따라 사물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일은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도식을 따라 정돈하는 일이 내용의 목록을 표시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찰했을 것이다. 오성은 이렇게 내용의 목록만 제시할 뿐, [약속한] 내용 자체는 제공하지 않는다. — 오성이 다루는 규정성이란, 자기(磁氣)라는 규정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달리 표현하면 실재적인 규정성일 수 있다. 그리고 오성은 그렇다고 내세우지만 따져보면 사실 뼈다귀만 앙상한 죽은 퇴적물일 뿐이다.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규정성은 단지 타 현존재의 술어로 사용될 뿐, 그 현존재에 내재하는 생명으로, 달리 표현하면 그 규정성이 그 현존재를 터전으로 하여 그 토양에서 자라나고 거기에 어울리는 독특한 것으로 스스로를 산출하고 자기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8] 이것이 진정 해야 할 일이고 떠맡아야 할 일인데 형식적인 오성은 이것을 타자의 몫으로 내버려 둔다. — 오성은 사물의 내재적인 내용 안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항상 밖에 머물면서 겉모양만 한번 쓱 훑어보기 때문에 전체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9]언급의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현존재 위에 괴리되어 있다. 그래서 오성은 결국 현존재를 보지 못한다. 학문적 인식이 요구하는 것은 이와 반대로 대상의 살아 움직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으로서 바로 대상의 내적 필연성을 마주하고 이를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몰입하다 보면 학문적 인식은 내용 안에 머물지 않고 내용에 대한 자기 안에서의 자기반성에 지나지 않는 일람표의 일목요연성은 하나하나 잊어버리게[10]된다. 소재에 깊숙이 들어가/침강하여[자신을 망각한 체] 소재의 운동을 따라가는 가운데 학문적 인식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11]이런 학문적 인식의 반성으로서의 복귀는 형식적인 지의 반성과는 달리[인식이 알아서 하는 반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밖으로 힘껏 뻗어나가] 충만해진 내용이 자기를 다시 자기 안으로 거두어 들임으로써[12][엄연한 자기제한적인] 규정으로 단순화하고 자신을 낮춰 현존재의 일면을 이루는 자리로 들어가서 보다 높은 현존재의 진리로 이행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두루 거치는 가운데 단순한, 자신의 온갖 모습을 스스로 통찰하는[투명하고 겹침이 없는] 전체가 반성이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느꼈던 풍부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부상하는 것이다.



[1]원문 <Die Wissenschaft darf sich nur durch das eigne Leben des Begriffs organisieren.> 단어와 문장구조가 어렵지 않고 또 지금까지 이야기된 것을 종합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문장 같은데 뭔가 아리달송하다. 특히 <개념의 고유한 삶/das eigne Leben des Begriffs>이란 표현이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개념의 삶>이란 것이 개념도 먹고 싸고, 아침에 일어날 땐 몸이 뻐끈하고, 일하려 나가고, 섹스하고, 울고 웃고, 자식을 키우고, 등짝이 간지럽고 등등 이런 일을 하고 느끼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념의 삶>이란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란 것과 전혀 관계가 없고 그저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만은 또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학문은 논리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역자는 의식이 운동하는 힘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질문제기의 연장선에서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이 문제의식은 <개념의 삶>, 즉 논리학=학문을 이야기할 때 <정신의 삶/Leben des Geistes>, 즉 정신현상학에 기대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야 어떻든 이 문단에서 헤겔은 <정신의 삶>과 <삶의 이념/Idee des Lebens>에 기대어 <개념의 삶>을 서술하는 것 같다. 그럼 정신의 삶이란 것은 뭘 말하는 것이고, 또 삶의 이념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우선 이와 관련하여 헤겔이 논리학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밖의 것에 매달리는 자연적인 삶과 달리] 삶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즉, 개념의 고유한 삶에 따라] 서술하는 연관성에는 삶의 이념(Idee des Lebens)이 자리하고 있고, 정신의 이념(Idee des Geistes)이란 바로 이런 삶의 이념에서 생성되어 나온 것이다. [...]삶이란것은 [위에서] 알아본바와 같이 [명확하게 완성된] 이념인데, 살펴보니 아직 참된 서술 혹은 이념이 현존하는양식으로존재하지 않는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삶에서는 [밖으로 드러난] 이념의 현실이 [그저] 개별적인 것이고, 일반성 혹은 유적인 것 [역시 그저]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부정을 통해서 통일을 이루는] 절대적이고 부정적인 통일로서의 삶의 진실은 추상적인, 같은 말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직접적인 개별성을 지양하고 [밖으로 드러난 현실과 내적인 것이] 동일한 것으로서 [항상] 자신과 동일한 것, 즉 유적존재로 자기를 완성하여 [진정] 자신과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이념이 바로 정신이다. 지금 이야기된 것에 덧붙이자면 정신은 여기서 [즉, 논리학에서] 이와 같은 이념이 갖는 논리적인 형식에 따라 관찰되는 것이다. [삶의] 이념이 갖는 논리적 형식을 이렇게 따로 언급한 이유는 삶의 이념이 논리적 형식 외 다른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런 형태를 [논리적 형식에] 부수적인 것으로 대충 훑어보고 지나가겠다. 삶의 이념을 이런 부수적인 형태에 따라 다루는 곳은 구체적인 정신학문이 되겠는데, 혼, 의식, 그리고 정신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다.”(“In diesem Zusammenhang dieser logischen Darstellung ist es die Idee des Lebens, aus der die Idee des Geistes hervorgegangen. [...] Von dem Leben haben wir gesehen, daß es die Idee ist, aber es hat sich zugleich gezeigt, noch nicht die wahrhafte Darstellung oder Art und Weise ihres Daseyns zu seyn. Denn im Leben ist die Realität der Idee als Einzelnheit, die Allgemeinheit oder die Gattung ist das Innere; die Wahrheit des Lebens als absolute negative Einheit ist daher, die abstrakte, oder was dasselbe ist, die unmittelbare Einzelnheit aufzuheben, und als Identisches mit sich identisch, als Gattung sich selbst gleich zu seyn. Diese Idee ist nun der Geist. - Es kann aber hierüber noch bemerkt werden, daß er hier in derjenigen Form betrachtet wird, welche dieser Idee als logische zukommt. Die hat nämlich noch andere Gestalten, die hier beiläufig angeführt werden können, in welchen sie in den konkreten Wissenschaften des Geistes zu betrachten ist, nämlich als Seele, Bewußtseyn und Geist als solcher.“) 이어 헤겔은 혼(Seele)을 설명하는데 혼이란 [뭔가를 해부해서 찾아낼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Seelending“)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자각하면서 존재하는 개념“(der für sich selbst seyende Begriff „)이라고 한다. 그러나 혼은 필연적으로(!!)„직접적인 현존재 안“(in unmittelbarem Daseyn)에 있다고 한다. 직접적인 현존재 안에 있는 것으로서 혼은 삶과 실체적인 동일성을 이루며(„in dieser substantiellen Identität mit dem Leben“), 이렇게  자신의 외형에 푹 빠져 있는 것(„in seinem Versenktseyn in seine Aeußerlichkeit“)으로서 혼은 인류학이 다루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삶의 이념의 가장 낮은 단계이고 다음 단계인 의식은 정신현상학이 다룬다고 하고, 이런 정신현상학은 자연정신의 학문과 정신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의 중간에 있는 학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신 그 자체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자각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der für sich seyende Geist“)이지만 자신의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in seiner Beziehung auf sein Anderes/강조 역자), 즉 [다른 것이 아니라 온통] 자신의 부정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이렇게 자신을 스스로 서술하는 것(„erscheinend am Gegentheil seiner selbst sich darstellend“)이라고 한다. (논리학, 마이너 판2003년,  233쪽 이하 참조). 인류학이 다루는 삶과 정신현상학이 다루는 의식이 정말 부수적인(beiläufig), 마라톤에서 주자의 박자를 맞춰주기 위해서 잠깐 뛰는 들러리(Beiläufer)와 같이 없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헤겔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논리학과 정신현상학의 관계가 왠지 중세철학에서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 같다. 관련 <학과 간의 논쟁/Der Streit der Fakultäten>(1798)에서 칸트가 신학이 철학을 시녀로 보는 것이야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지만, 시녀가 안주인의 치마폭을 정리하면서 뒤따라 가는지 아니면 안주인을 앞서가면서 어둔 길을 밝히는지 이 문제는 따져봐야 한다고 한 대목이 생각난다 (학과 간의 논쟁, 1장, I, 2절). 헤겔이 폄하하는 인류학의 소재가 되는 삶이, 브레히트가 <독서하는 한 노동자의 질문/Fragen eines lesenden Arbeiters>에서 „만리장성이 완성되던 날, 이젠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 날 저녁에 장성을 쌓던 노동자들은 어디로 갖을까?/Wohin gingen an dem Abend, wo die chinesische Mauer fertig war, die Maurer?“라고 노래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삶이 이젠 학문의 대상이 아닌가 한다.

[2]원문<Bestimmtheit>

[3]원문<die sich selbst bewegende Seele des erfüllten Inhalts>. „삶에 충만해서“(“lebenssatt”) 죽었다는 아브라함의 삶에 대한 평가(창세기25.7)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맑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참조).

[4]원문<ein Anderes>. 존재의 운동, 즉 의식의 운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신 혹은 개념의 운동이라면 <sein Anderes>라고 해야 한다. 이 <ein Anderes>가 <sein Anderes>가 되어야 소위 변증법이란 것이 성립되는데, 관련 역자는 주인과 손님 간의 관계 등에서 언급하였듯이 좀 회의적이다.

[5]원문<zu seinem immanenten Inhalt>. 강조 역자. <내재적/immanent>을 원문과는 달리<내용/Inhalt>이 아니라 운동을 서술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6]원문<für sich>

[7]원문<für sich>

[8]이것이 바로 인류학이 하는 일이 아닌가?

[9]원문<übersehen>. 두 갈래 의미가 있다. <통틀어 보다>와 <간과하다>라는 의미다. 통틀어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10]원문 <vergisst es jener Übersicht>. 여기서 <jener Übersicht>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소유격(Genitivus partitivus)이 목적격으로 사용된 것 같다. 일람표를 다 잊어버릴 때까지 그 항목항목 하나하나를 잊어버리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11]원문 <aber>

[12]서론에서 언급된 <Reflexion des Gegenstandes in sich/대상의 자기 안에서의 반성>을 이야기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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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2

§52) 이렇게[1][칸트가 제시한 삼중성이란] 탁월한 것이[형식주의의 사냥거리가 되어] 생명과 정신을 박탈당하고, [형식주의의] 생명 없는 지가[살아있는 삼중성을 때려잡아 그] 외피를 짐승의 가죽처럼 벗겨서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둘러쓰고 있는 것을 눈뜨고 봐야 하는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삼중성이] 이렇게 운명을 다하고[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삼중성이] 이렇게 가죽으로 남은 상태에서 생명 없는 지가[우리시대의] 정신에 행사하는 폭력을, 정신이 아니라면 최소한 심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폭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삼중성이] 일반적이고 엄밀한[2]형식으로 다듬어져 나가는 것을 또한 인식할 수 있다.1 이런 형식을 갖춤으로써 삼중성이 완성되고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서 그 일반성을[어떤 원리를 완전히 깨닫고 난 후에는 그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적용하듯이] 표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1]원문<aber/그러나>. 뭔가 더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aber>다. 이 <aber>를 제대로 이해해야 이 문단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 같다.

[2]원문<Allgemeinheit und Bestimmt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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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자가 보기엔 헤겔도 쉘링한테 뭔가 배운 것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51

§51) [자기 제한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규정은 내적 생명력을 갖고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인데, 형식주의가 말하는 단순한 규정은[1]그렇지 않고 다만 직관, [여기서는] 즉 감각적인 지에 의한 표면적인 유추를 통해서 표명될 따름이다. 그리고 이같이 공식을 외면적이고 공허하게 적용하는 것을 구성이라고[2]내놓는다. —[이 형식주의는 제법 의미심장하게 자기가 뭔가 별다른 것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것을 터득하는 일이란 다른 형식주의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질병을 무력증, 강력증, 간접무력증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이 각기 있다는 형식주의적인 이론을15분내에 주입시키지 못할 만큼 주름 없는 뇌가 있을까?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교과과정을 수료하면 평범한 의사가 충분히 이론에 정통한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그 과정이 어렵다고] 그것을 포기한 의사가 있다면 그는 과연 얼마나 멍청한 의사일까? 자연철학적 형식주의가 가르치는 내용을 한번 들춰 보면 지성은 전기니, 동물은 질소니 하는가 하면, {지성은?? 전기는??} 남[극], 북[극]과 일치한다는 등 이런저런 비교를 하는가 하면{무엇이??} 그것을{지성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3], 이런 형식주의는 위와 같이 허술하게 표현되든 아니면 보다 많은 전문용어를 첨부하여 뒤범벅 해 놓든 아무튼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이 뚝 떨어져 있어 보이는 것을 한 묶음으로 싸매는 힘이다. [자기가 직관하는 것에] 푹 빠져 있는[4]감각에게는 이런 한 묶음이 폭력으로 다가오고, 이런 힘은 또 개념이 무슨 증서라도 되듯 개념증을[5]발급할 뿐 개념 그 자체,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 표상이 갖는 의미를 표명하는 정작 해야 할 일은 방기하는 폭력이다. 이런 것을 처음 보는 사람이야 이런 힘과 폭력을 경탄한 나머지 감탄사를 터뜨릴 것이고, 그것이 마치 심오한 천재성이라도 되듯이 경의를 표할 것이며, 추상적인 개념을 직관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여 눈요기가 되는 것으로[6]만들기 때문에 그 힘과 폭력을 마치[자유자재 하는 그리스 신들의 조각된] 명쾌함을 보는 마냥 즐거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거침없는[7]행동을 어렴풋이나마 알겠다는 영감 속에서 그런 행동에 공감하고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듯한 기분이 되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찬(自讚)할 것이다. 이런 식의 영특함은 속임수와 같은 것으로서 금방 습득할 수 있고, 습득함과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속임수는 그 작동 방법이 한번 알려지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뻔한 요술로서 반복하기에 민망한 것이다. 이 단조로운 형식주의의 도구는 마치 두 가지 색깔, 예를 들어 빨간색과 녹색만을 가지고 인공적인 것을 그릴 때는 빨간색으로, 자연적인 풍경을 그릴 때는 녹색으로 화면을 칠하는 화가의 팔레트와 같은 것으로서 그 도구를 다루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여기서[우리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에 존재하는 만물을 두 가지 색으로 마음껏 범벅하고 덮어씌우면서 느끼는 자기만족과 이런 도구를 만능의 도구로 사용하는데 정말 하자가 없는 일품이라는 자만심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 그 어느 쪽이 더 큰지 가리기 쉽지 않게 서로 부추기면서 비등하게 작용하고 있다.천지간의 온갖 사물에, 그리고 자연적이거나 정신적인 온갖 형태에 일반도식의 양대규정[8]중 그 하나를 꼬리표로 붙이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그 어느 한쪽에 가지런히 정돈하는 방법이 산출해 내는 것이 우주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해맑은 보고>*라고, 아니 그 이하의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자만한다. 그러나 이런 보고는 사실 일람표와 같은 것으로서, 여기저기 쪽지를 단[교육용] 골격, 아니면 양념소매상 가게의 뚜껑 닫힌 양념통에 에티켓을 붙인 진열대와 흡사한 것이다. 이런[형식주의] 일람표는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구분하지만, 뼈에서 살과 피를 제거한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는 것을 통에 봉합하여 덮어버린 후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은 떼어 팽개쳐버리거나 은폐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판박이 수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대규정을 적용하다가 단색의 절대화로 발전하여 그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9], 이때 형식주의는 도식상의 차이까지 부끄럽게 여기는 가운데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반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여 이것 또한 절대의 공허 속으로 몰아넣어 아무런 형식이 없는 백색과 같은 순수한 동일성을 만들어낸다. 아무런 색상의 차이가 없는 도식과 이런 도식에 따라서 생명 없는 꼬리표를 다는 것과[10]절대적인 동일성, 그리고 어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진행하는 것 모두가 하나같이 죽어 있는 지성이며 외피적인 인식일 뿐이다.



[1]Bestimmtheit

[2]원문<Konstruktion>

[3]이부분 헤겔의 독어가 개판이다. 쉘링의 자연철학을 논평하는 것 같은데 문장구조와 함께 그 논평이 너무 막하는 논평인 것 같다. 쉘링의 철학체계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에 대한 사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쉘링은 피히테가 펼쳐 논 절대자아라는 지평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피히테식의 주관주의 철학이 도외시한 자연에 관심을 갖는 쉘링은 당시 자연과학이 달성한 성과에 주목하면서 죽어있는 물질과 살아있는 유기체간의 괴리를 자연철학으로 해결한다.  쉘링은 자연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것이 우리와 유사하게 정신으로 각인된 것이라고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자연의 체계>와<정신의 체계>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치하는 이유는 양 체계가 발전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물질에 스며있는 정신이 자기의식으로 발전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발전의 힘은 서로 대립하는 이중성, 혹은 양극성에서 기인한다. 쉘링은 이 양극성을 우주의 이치로 삼는데, 이 원칙으로 전기의 양극, 산성과 알칼리성 등 자연의 현상뿐만 아니라 의식의 주관과 객관 등도 설명한다. (칼 포랜더, 철학역사 참조 www.textlog.de/6565.html)

[4]원문<ruhend> <고정된>

[5]원문<Schein eines Begriffes> 명허증<Führerschein>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6]원문<erfreulich>

[7]원문<herrlich> <Herr/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주인>이란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8]원문<die paar Bestimmungen> 앞 내용, 즉 두 가지 색으로 모든 것을 칠한다는 내용의 연장선에서<몇 가지>로 번역하지 않고<양대규정>으로 번역하였다.

*) 이 표현은  피히테의 저작<최근 철학의 독특한 본질에 대한 독자에게 보내는 해맑은 보고>(1801)라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9]원문<sich vollenden>

[10]Bestimm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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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0

§50) [이젠 칸트가 제시한 삼중성에1 따른 학문 개념을 살펴보자.] 이 삼중성이 처음에는 그저 육감적으로2 재발견된 상태였었고 그러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죽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갖는 절대적 의미로 부상함으로써 [마침내] 참다운 형식을 갖춘 참다운 내용이 정립되고 동시에 학문의 개념이 부화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애석하게도] 삼중성의 형식을 생명 없는 도식으로 전락시켜 그것이 무슨 독특한 허깨비나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학문의 유기적인 체계3일람표로 전락시키는 삼중성의 활용을 볼 수 있다. 이런 삼중성의 활용은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일반적인 선상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이런 형식주의의 판박이 수법에 대하여 이제 좀더 자세하게 논의할 예정인데, 이런 형식주의는 어떤 형태의 속성과 살아 움직임을4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서술하는데 있어서 도식의 항목에서 한 규정을 골라 그 형태에 꼬리표로5 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은 주관성이니 객관성이니 하는 것들로 표현되거나 때로는 자기(磁氣)니 전기니 하는 것들로 표현되기도 하고, 수축과 확장 또는 동과 서 등으로 비교되는 것들인데, 이런 식이라면 [자기 제한성을 갖는] 어떤 성질이나6 형태라도 다른 성질과 형태의 서술에 사용하는 도식의 형식이나 요소가7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모두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알아서 기기 때문에 위와 같은 꼬리표는 끝없이 복제될 수 있다. 이렇게 끝없이 복제될 수 있는 꼬리표는 상호의존으로 엮어진 무리일 뿐, 이것이 사태 자체에 대해서, 의존관계의 이쪽과 저쪽에 대해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러 꼬리표달기가 어떤 행위인지 더 살펴보면8 [아주 모순적인데] 도식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직관에서 얻은 감각적인 규정들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것들은 말하는 것과는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내세우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 정작 그래야 하는 데에서는 정반대로] 주관, 객관, 실체, 원인, 보편 등과 같은 순수한 사상 규정들이 별도의 의미가9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아무런 숙고와 비판 없이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의미 그대로, 그런 것이 마치 강약, 신축과 같이 의미가 분명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사용한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감각적인 표상만 비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고 내놓은 것까지 비학문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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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관련 <순수이성비판> B 95이하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10 <순수오성개념 또는 범주>를 (B 102)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칸트는 논리학 가능성 그 자체를 따지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은 모든 내용이 사상되어 있는 일반논리학과는 달리 선험감성에 따른 다양한 내용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오성개념은 소재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사고의 자발성이 이런 다양한 것들을 하나하나 두로 통찰하면서 수용하고 결합시키면 인식이 된다고 한다. 이 활동을 종합(Synthesis)이라고 부른다. 이 종합과 관련하여 칸트는 인식을 3단계로 서술한다 (B 104). 일반논리학은 다양한 표상을 분석을 통해서 하나의 개념아래로 귀속시키지만 transzendentale Logik은 표상이 아니라 표상의 순수종합이 개념이 된다고 한다. 칸트가 제시한 인식의 3단계를 살펴보면, 첫째 순수직관에 의해서 주어진 다양한 것, 둘째 이런 다양한 것을 구상력(Einbildungskraft)을 통해서 종합하는 일이다. 이렇게 다양한 것을 종합하는 일로써 인식이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이 완성되려면 다음 행보가 필요한데, 셋째 이 순수종합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개념은 순수종합의 통일성이 필연이라는 관념에 따른 개념이다. 이렇게 하여 칸트는 12개 범주를 3개씩 4개의 영역으로 분류한 범주표를 제시한다 (B 106). 인식의 3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컨대 질이라는 영역을 보면 현실성(Realitaet), 부정성(Negation), 그리고 제한성(Limitation)이란 3단계로 구분되어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칸트가] 첫째 범주는 긍정이고, 둘째 범주는 첫째의 부정이며, 셋째는 양자의 종합이라고 말한 것은 개념의 지대한 본능이 나타난 것이다. 삼중성 형식이 여기서는 단지 도표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절대적인 형식, 즉 개념이 가려진 체 있다.“(Es ist großer Instinkt des Begriffs, daß er sagt: die erste Kategorie ist positiv; die zweite ist das Negative der ersten; das Dritte ist das Synthetische aus beiden. Die Form der Triplizität, die hier nur Schema ist, verbirgt in sich die absolute Form, den Begriff. (헤겔, Werke in 20 Baenden, 1979, Bd. 20 (철학역사강의), 345쪽)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Organisation>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Leben/생명>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Praedikat/술어>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Bestimmung/규정>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Moment>텍스트로 돌아가기
  8. 원문 <dabei>텍스트로 돌아가기
  9. 원문 <das an sich bedeutende>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9

§49) 개념의 필연성은 이런 방법들을, 즉 이런저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뭔가 확고한 것을 제시하는 탁상담론의 느슨한 진행, 그리고 학문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치장하고 그 위용이 쩔렁 거리는 군대식의 경직된 진행을 학문에서 추방하고 다시는 발 딛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때1 조심해야 할 일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 빈자리가 예감과 열광이라는 몹쓸 방법과2 예언자적인 말을 일삼는 임의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감을 높이 세우고 예언자 풍의 말을 일삼는 [낭만주의]자는 통념적인 학문성이 허섭스레기라는 것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경멸하는데, 문제는 그런 학문성만을 경멸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학문성이란 것 그 자체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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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aber>. 여기서 <aber>는 대립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Beeile dich, aber sei vorsichtig!/신중하게 서둘러라!>라는 문장에서와 같은 의미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Unmethode>. 독일 동포 인터넷 신문인 베를린 리포트게 게재된 번역(http://berlinreport.com/skin/board/news/mw.proc/mw.print.php?bo_table=news&wr_id=5431)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8

§48) 이러한 운동, 달리 표현하면 학문이 거쳐가는 길에1 관해서 사전에 이런저런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길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담겨있고, 그리고 그에 대한 엄밀한 서술은 논리학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지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논리학 그 자체가 바로 학문이 가는 길은 그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자체가 학문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되는 이유는 전체의 구조를 [타자화가 소외로 나타나는 현상계는 사상하고 타자화가 자신의 다른 모습으로 넘어가는]2 순수한 본질의 형태만을 따라서 완성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간에 통용되는 방법론에 관하여 반듯이 인식하고 지나가야 할 일은 철학이 가야 하는 길에 관한 이런저런 관념을 체계화하여 내놓은 방법론이란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지난날의 교양수준에 속한다는 것이다. — 이 말이, 본인이 의도한 바와 달리, 좀 과시적이고 혁명적인 말투로 들린다면, 이런 말투는 제쳐놓고 설명이니 구분이니 공리니 일련의 명제와 그 증명이니 원칙이니 원칙에 따른 추론과 결론이니 하면서 이런 것들을 [체계화하여] 무슨 왕국이나 되는 모양 수학이 보란 듯이 내놓은 학문적인 체통이3 이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최소한 남루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돌렸으면 한다. 이런 식의 학문적인 왕국의 무용성이 아직 분명하게 인식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전혀 활용되지 않거나 활용된다고 해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일 뿐이다. 이렇게 아예 거부되지는 않지만 기꺼이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 제시하는 학문적 왕국을 평하는데 있어서] 다른 면을 지적하자면 우리는 어쩌면 월등한 것은 반드시 활용되기 마련이고 또 널리 퍼지는 법이라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이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명제를 내세우고 난 다음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또 그에 대한 반론 역시 근거를 제시하여 물리치는 식의 판박이 수법이 난무하는 형식을 짜놓고 진리보다 그런 판에 등장하라면 진리가 거기에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리란 [스스로 현존재로 현상하여 자신을 전개해 나가면서 자기 몫을 다하는]4 [타자의 운동이 전혀 스며있지 않는] 온통 자기에 속한 그리고 [전혀 타자에 가해지지 않고] 온전히 자기에게만 가해지는 운동인데5 위의 방법은 이와 반대로 소재 밖에서[진리를 이리저리 짜맞추는] 소재를 겉도는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방법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몰개념적인 크기상의 관계를 원리로 하고 죽어있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죽어있는 하나라는 수를 소재로 하는 수학에나 어울리는 것이고, 또 수학보다 그러라고 내버려 두어야 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에 임의와 우발성을 좀더 곁들어서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기교야 일상생활에서는 계속 활용될 것이다. 탁상담론, 또는 인식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적인 교훈,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서설 등에서 말이다. 일상생활상의 의식은 감각적으로 구체화된 상식이나 경험뿐만 아니라 사고나 원칙 등을 내용으로 하는데, 이것들을 통틀어 보자면 찍어 들어 올릴 수 있는 것6, 달리 표현하면 확고부동한 존재나 본질로 통용되는 것들이다. 의식은 이러한 것들을 징검다리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간의 연결을 내키는 대로 끊어 임의적으로 내용을 규정하고 다루기 때문에 내용에 대한 태도는 외피적인 것일 뿐이다. 의식은 이런 식으로 앞으로 나아가다가 뭔가 확실한 것, 그것이 비록 언뜻 느껴지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의식에게 확실한 것으로 다가오면 거기에서 내용이 기인한다고 확신하고 그 지점이 예전에 한 번 본적이 있는 지점이면 더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만족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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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Methode> <방법>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Methode>의 어원을 살려 번역하였다. 그리고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으로 이해하고, 운동에 어떤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거쳐가는 길이 바로 방법이라는 면을 살렸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이 부분에서 맑스는 헤겔과 전혀 다른 생각이다. 헤겔은 현상의 대립을 본질의 대립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맑스는 현상의 대립이 본질적인 대립이라고 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der wissenschaftliche Staat>텍스트로 돌아가기
  4. 여기서 앞 문단에서 진리와 관련하여 사용된 서술어 <durchsichtig>와 <einfach>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진리는 명제(proposition)의 값, 즉 옭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양식(Seinsweise)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정신현상학 서론 §1 첫 문단에 등장하는 <erkennen, was in Wahrheit ist>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진리를 해방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숙제를 남겨놓았는데, 진리는 <durchsichtig>하고 <einfach>한 것이라면 이것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진리개념, 즉 가려지지 않고 자기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것과 비교하여 읽어볼 수가 있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Die Wahrheit ist die Bewegung ihrer an ihr selbst.>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Vorhandenes>. 하이데거의 <Vorhandenheit> <Zuhandenheit>와 비교하여 읽어볼 수도 있겠다. 역자는 아도르노의 <Abhub/허섭스레기>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7

§47) 철학은 [유한자의] 규정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찍어올려 보여줄 수 있는] 비본질적인 규정을 고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제한으로 나타나는]1 본질적인 규정만을 고찰한다. 철학의 터전과 내용이 되는 것은 추상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비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으로서 [제한을 뛰어넘어] 스스로 자신을 정립해 나가고 그것을 쫓아 살아 움직이는 내적 생명력을 지니면서 자기개념에 따라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현존재이다.2 이런 현존재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는] 자신의 마디마디를3 만들어내고 이 모든 마디마디를 하나도 빠짐없이 두루 거쳐나가는 프로세스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는 운동이  [가시화된] 긍정적인4 [완성된] 개념이며 현존재의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리는[가시화된] 긍정적인 것 못지않게 [가시화된 것을 뛰어넘는 동력이 되는] 부정적인 것을 내포하는데, [혹자는] 부정적인 것 그 자체만을 따로 놓고서 사상(捨象)의 대상이 되는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것으로서 가시화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사상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가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고찰되어져야 한다.5 이런 고찰은 부정적인 것을 진리와 단절된[엉뚱한] 요지부동한 규정으로 간주하고 진리 밖 그 어딘가에 내버려두어도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고찰하는데 있어서도 진리를 부정의 저편에서 안주하는 죽어있는[보란 듯 내놓을 수 있는] 가시화된 그 무엇으로4 여기지 않는다.7 현상계는 발생과 소멸을 통해서 뭔가가 끊임없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발생과 소멸 자체는 발생하거나 소멸되지 않고 애당초부터8 있는 것으로서 살아있는 진리의 힘과9 운동의 실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진리라는 것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열광에 휘말린 무리와 같은 것으로서 그 무리 안에서는 그 누구도 신들리지 않는 자가 없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열광에 만취된 무리 안에서는 [제멋대로 춤을 추는] 따로 노는 운동이 아무런 매개 없이 그대로 [무리 안으로 녹아 들어가는] 자신을 해체하는 운동이 되기 때문에 이런 열광, 곧 진리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해되는] 투명하고 [아무런 겹침이 없는] 죽 펼쳐진 평온의 장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10 생멸운동이 내리는 판결 앞에 정신의 개별적인 형태나 특정한 사상이 따로 존속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부정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는 만큼 그들은 또한 긍정적이고 필연적인 계기를11 이루는 것들이다. — [생멸운동에 휩싸인 개념은 끊임없이 요동하지만] 그 전체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12 이렇게 끊임없이 요동하는 운동의 과정에서 자기자신을 분리하여 차이를 두고 [그때그때] 특수한 형태로 현존하는 정신은13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 속에 보존하는 형태로 현존한다. 이때 그 현존형태는 자기자신을 [자기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아는 것이고 또 [과거의] 자기자신을 아는 것이 그대로 정신의 현존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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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래서 <제한된 부정/bestimmte Negation>이 성립되는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das Wirkliche, sich selbst Setzende und in sich Lebende, das Dasein in seinem Begriffe>. 이 부분을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 기대어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 헤겔은 여기서 개념의 운동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말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seine Momente>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das Positive>텍스트로 돌아가기
  5. <Totalitaet>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das Positive>텍스트로 돌아가기
  7. 예수가 이야기하는 진리 개념이고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진리 개념이다(참조: 로마서 8.2).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원문 <an sich> 텍스트로 돌아가기
  9. 원문 <Moment>텍스트로 돌아가기
  10. 사도행전 2장에 기술된 오순절 사건이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무런 통역 없이 곧바로 베드로의 설교를 이해하는 사건에 기대어 이 대목을 이해할 수 있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원문 <Momente>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참조: „Diese Bewegung in sich selbst spricht das absolute Wesen als Geist aus; das absolute Wesen, das nicht als Geist erfasst wird, ist nur das abstrakte Leere, so wie der Geist, der nicht als diese Bewegung erfasst wird, nur ein leeres Wort ist. Indem seine Momente in ihrer Reinheit gefasst werden, sind die ruhelosen Begriffe, die nur sind, ihr Gegenteil an sich selbst zu sein und ihre Ruhe im Ganzen zu haben.“ (PhdG, Felix Meiner 판 535쪽, 강조 역자) 텍스트로 돌아가기
  13. 여기서 정신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개념이라고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구별하여 번역하지 못하겠다.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면서 역자는 의식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있다. 이 문제는 개념의 운동을 정리한 <논리학>이 의식(정신)의 운동을 서술한 <정신현상학>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46

§46) 수학은 선험적인 것을1 다룬다고 해서 순수수학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시간을 공간에 대치하여 제2의 고찰소재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역시 시간 그 자체가 다루지는 것은 아니다. 이동이나2 그밖에 실재적인 것을 다루는 응용수학의3 경우 시간 그 자체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은 복합적인 명제를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개념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이 갖는 성질에5 관한 명제를, 경험에서 추출하여 전제로 사용하고 이렇게 전제가 되는 이런 명제에만 [수학]공식을 적용할 뿐이다. 수학에서는 이런 유의 명제를 증명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지렛대의 평형에 관한 명제나 낙하운동에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 관한 명제 등을 증명하는 일 따위를 증명이라고 내놓고 또 그렇게 통용되는 사실은 인식에게 증명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수학적 인식에서 볼 수 있듯이[참다운] 증명이 없는 곳에서는 그것의 껍데기라도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붙들고 안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증명을 비판하는 일은 방기할 수 없는6 일로서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 비판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수학의 매끈하지만 거짓된 화장을 깨끗이 씻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학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수학과는 다른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밝힐 수가 있겠다. — 공간에 대치되는 다른 소재로 순수수학 제2부의 소재가 된다는 시간은 사실 시간 그 자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면7 개념이[운동하고] 현존하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개념 없는 차이만을 들추어내는 크기라는 원리와 추상적이고 생명이 없는 하나됨일 뿐인 일치라는 원리로는 살아있는 것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동요로서의 시간과[그런 시간의 동요에서] 절대적인 차이로[나타나는 대립을] 포착할 수가 없다. 수학에서는 이와 같은[생명과 개념의] 부정성이 단지 마비된 것으로, 다시 말하면 분절된 하나라는 것으로8 인식의 제2 소재가 되는데, 이때 인식은 단지 사태의 외면을 겉도는 행위로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을 소재로 떨어뜨리고, 이렇게 하여[시간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외면적이고 생명이 없는 내용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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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immanent>. <immanent>를 <내재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번역하였다. 칸트는 시간을 경험적인 개념이 아니라, 필연적인 관념이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참조: 순수이성비판 B46)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Bewegung>.텍스트로 돌아가기
  3. 여기서 응용수학은 역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칸트는 시간이 유개념과 같은 <보편개념>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저런 시간이 공유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이 유일하고 동일한 시간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래서 시간에 대한 관념은 유일한 대상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유일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직관이라고 한다. 시간은 직관의 대상이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명제는 복합적(synthetisch=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이 짬뽕된 것)인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서로 다른 시간이 [공간과 달리]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는 일반적인 개념에서만 추출해 낼 수 없고 시간에 대한 직관과 관념에 뗄 수 없이 붙어있는 (unmittelbar) 것이라고 한다. (참조: 순수이성비판 B 47) 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Verhaeltnisse> <관계>로 번역하지 않고 <성질>로 번역하였다. 동사 <verhalten>에 기댄 번역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merkwuerdig>. <이상하다>란 의미이지만 옛날에는 <의미 있는>이란 의미로도 사용됨.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was die Zeit betrifft>텍스트로 돌아가기
  8. McTaggert의 물리적 시간과 비교해 볼만하겠다. 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