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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9
    정신현상학 서설 § 45
    ou_topia
  2. 2010/08/26
    정신현상학 서설 §44
    ou_topia
  3. 2010/08/24
    정신현상학 서설 §43
    ou_topia
  4. 2010/08/23
    정신현상학 서설 §42
    ou_topia
  5. 2010/07/23
    정신현상학 서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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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7/22
    정신현상학 서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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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7/21
    정신현상학 서설 §39
    ou_topia
  8. 2010/07/20
    정신현상학 §38
    ou_topia
  9. 2010/07/19
    정신현상학 서설 §37
    ou_topia
  10. 2010/07/16
    정신현상학 서설 § 36(1)
    ou_topia

정신현상학 서설 § 45

§45) 수학은 이와 같이 모자란 인식이 명료하다고 자랑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철학에게<너도 그럴 수 있어>하고 우쭐거리지만, 사실 그런 명료함은 수학적 인식의 목적이 빈약하고 그 소재가 불충분한데 근거할 뿐이다. 그래서 철학은 이런 유의 인식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 수학의 목적 또는 개념은 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사태의] 본질과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관계를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적 지의 운동은 표면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태 자체, 즉 사태의 본질이나 개념에 다다르는 법이 없어서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운동이라 할 수 없다. — 수학이 흐뭇해 하면서 이런저런 진리로 가득찬 보물창고를 의연하게 내놓는데, 그것의 소재는 <공간>과 <하나>라는 수다. 수학이 말하는 공간이란 공허하고 생명이 없는 터전으로서 [크기를 따지는]  개념이[크고 작음의] 차이를 새겨넣는 [종이쪽과 같은] 현장일 뿐이며, 이런 터전에 새겨진 차이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임도 생명도 없는 것이다. 공간의 실재는 수학에서 그러듯이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수학이 다루는 것들이 이와 같이 비실재적인 것들인데 구체적인 감각적 직관이나 철학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전전긍긍할 리가 없다. 이런 비실재적인 터전에 진리가 있다고 한들 이것 또한 단지 비실재적인 진리로서 박제한죽은 명제일 뿐이다. 그래서[인식의 운동을] 아무데서나 그만 둘 수 있다. 앞의 명제가 다음 명제로 스스로 전진하는 일이 없어서 사태의 속성 그 자체에 따른 명제와 명제간의 필연적인 연관이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명제로 넘어갈 때 앞의 명제와 아무런 상관없이 따로 새로 시작하게 된다. — 수학이 고수하는 공간과 하나라는 원리와 터전이 바로 형식적인 명료함이 존속하는 바탕이 된다. 여기서 수학적 지가 하는 일이란 일치라는 등식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렇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은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죽은 것이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 차이로 나아가 본질상의 대립 또는 불일치를 이루는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본질상의 대립관계에서] 대립자가 이편에서 다른 편으로 넘어가는 질적이고 내재적인 자기운동으로 나아가는 일이 없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이유는수학이 오직 크기, 즉 비본질적인 차이만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스스로 각 차원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개념이 운동하여 공간을 쪼개고 각 차원으로 나눔과 동시에 그들 간의 연관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의 연관을 규정한다는 사실은 사상해 버린다. 그래서 수학은 예컨대 선이 면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이런 수학적 개념을 넘어선 것들을 살펴보려고 해도] 원의 지름과 원주를 비교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 간에 불가양성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불가양성의 관계는[크기를 따지는] 수학적 개념에서 보자면<이것이다>라고 딱 잡아뗄 수가 없는 무한한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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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4

(§44) 수학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있어서 더 본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 [그 행위를 넘어서] 아예2 인식 그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과 함께 애당초부터3그가 소재라고 다루는 것에 결함이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인식 그 자체의 결함을 말하자면, 먼저 작도의 필연성이 오리무중이라 인식이 알아 먹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작도는 정리의 개념에서 나오지 않고 어디까지나 외부로부터 지시되는 것일 뿐이다. 무수히 많은 선 중에서 왜 꼭 그 선을 그으라고 애 손잡고 글 가르치듯 지시하는지 알 수야 없지만 그것이 증명을 진행하는데 적절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맹종하면서 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맹종한 데로 일을 다 보고 나야만그 합목적성이 드러난다.4 이 합목적성이란 단지 외피적인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바로 증명이 다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그 합목적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디. — 이와 마찬가지로 증명이라는 것도 어떤 길을 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길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그 길이 뒤에 나오는 결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직 모르는 상태다. 이런 증명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밑도 끝도 없이 불쑥5 [길 따라 쭉 널려있는] 특성이나 관계 중에서 이놈은 주워 먹고 저놈은 그냥 내버려 두는데, 도대체 어떤 필연성에 따라서 그러는지 전혀6 알아 먹을 수가 없다. 이것은 결국7 [마치 인민의 혁명을 통하지 않는 흠정헌법에서와 같이 군주가 인민에게 강요하듯]8 외부적인 목적이 증명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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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aber>를 이렇게 번역했다. 연장전 추가시간에 승부가 뒤집힌 흥미진진하게 진행된 축구경기를 보고 난 후에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Das war aber ein Spiel!” “진짜 재미있는 경기였다”는 의미다. 여기서 <aber>는 일반적인 경험에 기반하여 기대할 수 있는 경기에 대비되는 경기였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eigentlich>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ueberhaupt>텍스트로 돌아가기
  4. 전 독일 총리 콜이 즐겨 사용하던 문구가 생각난다. “Wichtig ist, was hinten rauskommt.” „중요한 것은 뒤에 나오는 것이다.“란 말인데 똥싸는 일을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diese Bestimmungen und Beziehungen>에서 <diese>가 의미하는 직접성을 이렇게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unmittelbar>. 여기서 <unmittelbar/직접>는 생성의 운동에서 후자와 전자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원문에 사용된 <regieren/정권을 쥐다/지배하다/다스리다>란 낱말에 기대어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이 문단은 유사한 단어가 등장하고 유사한 내용을 다루는 <순수이성비판>의 서설과 대비하여 읽어 볼 수도 있겠다. 수학적 인식에 대한 헤겔비판의 요지는 인민이 주체로 서지 못하고 단지 지배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이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43

(§43) 수학적 인식에서는 통찰이 사태의 외부를 겉도는 행위다. 그 결과 [사태에 침몰하여 사태/개념의 운동을 따라 잡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은[1] 이런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행위로 대치되고 변질된다. 그래서 [수학적 인식은 그가 사용하는] 작도나 증명 같은 수단이 [형식논리적으로] 다 맞는 말들만[2] [줄줄이] 포함하고 있다고 자긍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들의] 내용은 왜곡된 것이라는 점이다.[3] 앞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삼각형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그 찢어진 부분들은 작도하는 과정에서 [임의적으로] 그 삼각형의 언저리에 작도되는 다른 도형에 때려 붙여진다. 이렇게 인식이 전진하는 과정에는 원래 다루려고 했던 삼각형은 안중에서 사라지고 단지 조각난 상태로만 다른 총체에 예속되는 것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본래 다루려고 했던 삼각형이 복구된다. — 우리는 여기서도 역시 개념의 운동에서와 같이 내용의 부정성이[4] 발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거기서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확고한 사상이 사라지는 것을 놓고 [그 확고한 사상의 그릇됨을 이야기한다면] 여기서는 더욱더 [수학적 인식의] 내용의 그릇됨을 이야기해야만 할 것이다.



[1] 원문 . 서문 §1 에서 이야기된 내용과 비교할 수도 있겠다.

[2] 원문 . 역자의 귀에는 하면 <겉치레>라는 의미가 들린다.

[3] 명제가 맞더라도 그 명제의 개념에서 증명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개념의 운동에서 새로운 내용이 생성되는 과정은 수학적 인식에서와 다르다는 것이다. 서설 §18과 대비하여 읽을 수 있겠다.

[4] 원문 . 또 소유격이 문제다. 주격 소유격인지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구별해야 할 것 같은데, 좀 헷갈린다. 운동의 원동력이 <부정성>이라면 주격 소유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수학적 인식의 증명과정에서는 <부정성>이 운동의 원동력이 아닌 것 같다. 이 문단전체가 알듯하면서도 뭔가 좀 아리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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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2


(§42) [수학적 진리에서는 이와 같은 근거제시가 더욱 중요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를 달달 외어 겉으로만[1] 알뿐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을, 거꾸로 표현하자면 [그 정리가 왜 성립되는지] 속속들이[2] 알지 못하는 사람을 기하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단지] 여러 직삼각형의 변을 측정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세변이 갖는 관계를 제시하는 것에 만족스러워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수학적 인식에서는 증명이 이렇게 중요하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인식 역시 아직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도 이런저런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는 사실이 사상된 역사적인 진리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수학적 인식에서도 증명의 [노력과 과정이] 본질적이라고 하면서도, 그런 것들이 [지양되어] 결론 자체에 스며있는 계기를[4] 이룬다는 의미와 속성으로서의 본질이 되지는 않는다. 대려 결론에 이르면 증명의 노력과 과정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지나간 일이 된다. [증명의 노력과 과정을 통한] 결론이어야 비로서 참된 것으로 통찰된 정리가 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인식]주체와 정리와의 관계에서 뭔가가 달라진 것이지 [정리 자체에] 내용적으로 뭔가가 더해진 것은 아니다. 수학에서 증명이란 이름아래 행해지는 운동은 [대상에 파고 들어가 대상이 스스로 하는 운동을 따라 잡는] 대상에 속하는 운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태의 외부에 머무르면서 사태에 가해지는] 외면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증명을 살펴보면] 직삼각형이 스스로 자기 속성에 따라 자신을 해체하고 조각 내어 [a2 + b2 = c2 이라는] 변의 관계를 정립하는 명제를 증명하는데 필요한 작도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식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인식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럼 철학적 인식에서의 생성은 어떠한가?[5] 철학적인 인식에도 역시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대타적인] 현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생성이 있고 또 이런 생성은 사태의 본질, 혹은 내적 속성의 생성과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철학적인 인식은 수학적인 인식과 다르다. 철학적인 인식은 첫째 앞의 두 가지 생성을 다 포함하는 반면, 수학적 인식은 이와 대조적으로 현존재의 생성만을 기술할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수학적 인식행위는 사태의 속성이 사태 외부에, 즉 인식 내부에 [인식의 목적으로] 있는 것으로 하여 [이런 목적에] 짜맞춰 현존재를 생성하고 기술할 뿐이다.[6] 다음으로 철학적 인식과 수학적 인식이 다른 점은 철학적 인식은 특별한 양상으로 나타나는[7] 이 두 갈래 운동을 통일시킨다는 점이다. 이 두 갈래 운동은 떼어 놀래야 떼어 놀 수 없는 운동이다. 실체의 내적 발생 혹은 생성은 동시에 자기 외화를 이루는, 달리 표현하면 대타적인 현존재가 되는 운동이며, 현존재의 생성은 거꾸로 동시에 [과거의] 외화된 자신이 본질로 접어드는[8]운동이다. 이 운동은 이렇게 이중적인 프로세스로서 총체를 생성하는 운동이다. 이런 이중적인 프로세스 안에서는 [한 쪽이 다른 쪽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다른 쪽을 정립하는 동시에 그 다른 쪽을 통해서 정립되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양쪽이 지니는 이런 이중적인 운동이 두 개의 관점으로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양자가 어울려 총체를 이루는데, 이때 양자는 자진 해체하여 총체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

[6] 스피노자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유의 목적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대목이, 즉 신이 할 일이 없어서 무슨 기업의 매니저나 되는 모양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세상/현존재를 관리한다는 생각을 비판한 대목이 떠 오른다.

[7] 원문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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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1

(§41) 여기서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고 싶은 것은 [이렇게 비철학적인 진리를 운운하는 사람들도] 역사적인 진리에 관해서는 [그런 독단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를 순수한 사건으로만 제한해서 살펴보면 역사적인 진리라는 것은 [사건을] 개별적인 존재로 다루는 것이고 그 내용은 우발성과 자의성에 의한 특수한[1] 것이고, 그리고 이런 우발성과 자의성이 개별적인 존재에서 규정하는 것은 [태어난 날과 같이] 필연적이지 않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진리는] 앞 문단에서 예를 들어 보여주었다시피 앙상한 진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진리라도 자기의식의 운동이 없으면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유의 진리 하나를 알기 위해서도 많이 비교하고 서적들을 참고해야 하며 또한 어떤 식이든지 간에 연구도 진행해야 한다.[2] [역사의 앙상한 진리 하나를 알기 위해서도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데, 직관이라고 해서 다를 수가 있을까?] [직관을 운운하는 사람이야 다른 것은 다 팽개쳐버리고] 앙상한 결론만을 놓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취득하려고 노력해야 할 알맹이라고[3] 말하겠지만 뭔가를 직관하고 있다고 해도[4] 그에 관한 지식에 근거가 곁들어져야 비로소 참다운 값어치가 있는 진리로 인정받기 마련이다.



[1] 원문 <einen Inhalt> 강조 역자. 번역에서 부정관사에 주목했다.

[2] <토아즈/Toise>가 뭔지 사전도 뒤적거려보고 인터넷검색도 해 보았다.

[3] 원문

[4]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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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0

(§40) 철학적인 지와 그를 둘러싼 노고에서도 독단적인 사고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를 한마디의 명제로 담아낼 수 있다는 사념에서[1]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독단이 말하는 명제란 [직관에 의한] 요지부동한 결과라고 불쑥[2] 내놓는 것이다. [요지부동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케사르가 언제 태어났으며 1 슈타디온은[3] 정확하게 몇 토아즈인가[4] 라는 따위의 질문에는 물론 똑 부러지고 매끈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런 대답은 직각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을 합한 것과 같다는 틀림없이 맞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진리라고 운운할 수야 있겠지만 철학적 진리는 이런 유의 진리와는 궤를[5] 달리하는 진리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 희랍에서 사용하던 길이 단위. 달리기하던 반원 모양 운동장(Stadion)의 길이로서 약 190미터. 을 라틴화한 것임.

[4] 원문 . 혁명이전의 프랑스에서 사용된 거리 단위. 2 미터.

[5] 원문 <자연>, <속성>. <>는 임석진 교수의 번역에서 훔쳐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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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9

(§39) 참과 거짓은 [사유행위와 사유된 것을 구별하는 오성으로서의] 사유가 하는 행위의 산물인 명제에[1] 속한다. 오성이 하는 일이란 사유된 것들간에 [참과 거짓을 나누는] 엄격한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들이 마치 독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통용되는 양 그들을 그 경계선의 이쪽저쪽으로 갈라놓고 그들을 서로 교통하는 법이 없는[2] 요지부동하고 고립된 것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진리를 주조된 동전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바, 우선 진리는 [진짜] 동전마냥 서로 주고 받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가해져야 할 것이고, 이어서[3] [위조된 가짜 동전이 있듯이] 거짓된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악이 특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듯이 거짓된 것도 역시 특수한 형태로[4] 존재하지는 않는다.[5] 거짓된 것과 악한 것이 특수한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악하고 거짓된 속성을 지닌] 악마와 같은 것이 되는데, 그들이 악마와 같이 [그런 속성을 지니고 그 무게에 눌려] 삐딱하게 한쪽으로 치우쳐[6] 존재한다면 좀 웃기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저 악한 것, 거짓된 것으로서 [어디에다가도 갖다 붙여놓을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악한 것과 거짓된 것은 서로 구별되는 [유령이 아무 곳에서 들어앉지 않듯이] 저마다의 고유한 기질(氣質)[7]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은 여기서 차치하고 거짓만을 살펴보겠다. 거짓된 것이 [독자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지의 내용인 실체의 타자, 즉 실체에 부정적인 것이 되겠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 그렇지 않다.[8] 실체란 본질적으로 스스로 부정적인 것으로서 [거짓된 것에 속한다는 부정적인 것은] 사실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을 통해서 실체는 스스로 내용을 구별함과 동시에 규정하는가[9] 하면, 또 애당초[10] 자기와 지를 확실히[11] 구별한다. 사람인 이상 뭔가를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은 지가 그의 [대상인] 실체와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불일치가 [실체에 스며있는] 본질적인 힘이 되며[12], 그렇기 때문에 실체에 실체 자체를 통해서 구별이 생겨나는 것이다.[13] 이런 구별에 [따른 분열은] 틀림없이[14] [통일을 이루는] 일치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일치가 진리인 것이다. 이때 일치가 진리가 되는 것은 마치 슬래그를 제거하고 순수한 금속만을 취득하듯이, 아니면 완성된 항아리에서 도구로 사용된 틀을 떼어내듯이 하는 불일치를 내팽개쳐버림으로써 남게 되는 그런 진리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부정으로서의 불일치는 [실체의] 자기로 [앞서 불일치를 거쳐서 생성된] 진리에 [아직 움트지 않은 단순성의 형태로][15] 보존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된 것이 참된 것의 한 마디가[16] 되거나 심지어 진리의 한 구성요소를 이룬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거짓된 것이든지 간에 뭔가 참다운 것이 있다는 식의 표현에서는 참과 거짓이 마치 서로 융화될 수 없는 기름과 물처럼 단지 겉으로만 어울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과 거짓이라는 표현이 뭔가가 서로 완벽하게 달리 존재한다는 면을 가리킨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완벽하게 구별된 존재양식이 지양된 상태라면 참과 거짓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주관과 객관, 유한과 무한, 존재와 사유 등의 통일이라는 식의 표현이 어정쩡한 표현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관과 객관 등등의 통일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사용되는 <주관><객관> 등등의 표현이 통일되기 이전에 가졌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통일된 상태에서는 그런 표현이 다른 의미를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된 것도 더 이상 거짓된 것으로서 [생성된] 진리의 한 계기가[17] 되는 것이 아니다.



[1] 원문 . 사유가 이렇게 구별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함으로써 사유된 것을 사유한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는 사상>을 사유결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한 것 같다. 사유결과로서의 , , 그리고 언어분석철학이 이야기하는 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명제>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는 이런 명제에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이 적용된다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뭔지 몰라 사전을 뒤적거려 <보리수>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그러나 Lindenbaum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리수>란 말을 듣고서 Lindenbaum이 뭔지 알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ein Falsches> 그리고 <ein Boeses>. <개별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부정관사에 주의해야 한다.

[5] 하나 사유에 총력을 기울인 플로틴에 이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그노시스의 이원론에 대항하여 </malum>이 독자적인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선의 전제아래 존재한다고 한다. “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선의 결핍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Quid est autem aliud quod malum dicitur, nisi privatio boni?) (출처: Enchiridion de fide, spe et charitate Liber unus/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안내서 1, 3.11). 악을 이렇게 이해하는 전통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까지 이어진다. “[선과 악은 관련되어 있는데], 악에 의해서 선의 결핍이 이루어지는 것에 한해서 그렇다. 여기서 자명한 것은 악이란 것이 있다면 이것은 선의 결핍이란 것이다.”(… inquantum per malum privatur bonum. Ex hoc autem ipso est aliquid malum, quod est privativum boni.) (출처: 신학대전 2 1 질문 42)

[6] 원문 악한, 나쁜>. 한쪽으로 기울어진>란 본래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7] 원문 . 하면 역자는 꼭 <귀신>이 떠오른다.

[8] 원문

[9] 언어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sortal predicate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이것이 바로 헤겔이 이야기하는 개념의 운동이다.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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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38

{§37-§38에서 <정신현상학> <논리학>이 다루는 것을 개요하고 양자간의 관계를 설명한 다음 §38이하  §35에서 제기된 문제, <정신현상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재개하여 다룬다.}

(§38) 정신이 경험하는 것과 동시에 정신에 대한 경험을[1] 체계화하는 것은 정신의 현상만을 다루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체계화한 <정신현상학>에서 진리의 [완성된] 형태를 갖춘 진리를 다루는 [논리학이란] 학문으로 나아가는 것은 한낱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정신현상학>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을 거짓된 것으로 이해한 나머지 그런 것으로 귀찮게 하거나 뜸들이지 말고 바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다. 무엇 때문에 거짓된 것을 보듬고 버둥거려야 하는가? 그럴듯한 질문이다. — 왜 바로 학문으로 들어가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요구는 위에서 제기된 바 있는데 여기서는 부정적인 것을 거짓된 것으로 보는 행위가 과연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과 요구에 다시 한번 답변해 보겠다. 특히 부정적인 것에 관한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2] [의기양양하게][3] 진리에 입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철학적인 지가 숭배하는 수학적 인식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다. 비철학적인 지는 수학적 인식을 철학의 이상으로 삼고 달성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철학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아니면 철학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들 지금까지 거둔 성과가 아무것도 없는 헛수고였다고 핀잔하기를 일삼는다.



[1] 원문 . 여기서 소유격은 동시에 주격 및 목적격 소유격이다.

[2] 원문

[3] 원문 . <특히, 무엇보다>. 역자의 귀에는 <잘난 체하는/vornehm>의미로도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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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7

(§37) 의식 안에서 발생하는 자아와 자아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실체로서의 정신[1] 간의 불일치는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이 행사하는 부정의 힘으로서 본래 [자기 안에] 분열을 일으키는 힘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은, [분열되어 대립하는 양자에게 각기 그 부정적인 것이 모자란], 결핍으로 간주될 수 있겠지만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에 스며있는 혼, 달리 표현하면 그 혼을 운동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여기에 몇몇 고대 철학자들이 공허함을 운동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공허함과 무(Nichtsein/비존재)를 같은 것으로 보고] 부정적인 것을 운동하게 하는 힘으로는 파악하였지만 바로 이 부정적인 것이[2] 자기라는 것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 부정적인 것이란 이런 것인데 [부정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분열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불일치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런 불일치는 또한 실체로서의 정신이 [부정의 힘에 의해서 분열을 일으키고] 자신과 관계하는 가운데 발생한 불일치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와 지의 대상이라는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차이는[3]] 실체로서의 정신 외부에서 그것과 무관하게 일어나고, 실체에 反하는 활동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행위이다. 이런 맥락에서 실체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주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실체로서의 정신이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줄 때 비로소 정신은 자신이 현존하는 양식과 그 본질 간의 일치를 완성하게 된다. 이때 정신은 [왜곡되지 않고 완성된] 자기 모습을 대상으로 갖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덜 떨어지고 지와 진리를 따로 떼어놓던 행위가 왕성했던 추상적인 터전이 극복된다. 이때 모든 것은 [더 이상의 매개가 필요 없는] 절대적으로[4] 매개된 양식으로 존재한다. 무슨 말인가?[5]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우선] 실체로서 [정신의] 내용임과 동시에 이젠 아무런 매개 없이 그대로[6] 자아의 재산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내용 자체가 자기 운동하는 주체이며[7], 곧바로 [완성된] 개념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 정신현상학은 약속된 목적을 달성하고 완성된다. 정신이 정신현상학에서 마련한 것은 지의 경지로서 정신에 깃들어 있는 갖가지 계기들에[8] 의해서 전개되는 정신이 [이젠 더 이상 대립과 분열을 빚지 않고] 대상과 자아로 갈라지는 않는 단순성 형식을 띠면서 확장되어 나가는 그런 경지다. 이때 정신의 계기들은 더 이상 존재와 지 사이의 대립으로 갈라져 뻗어나가지 않고, 지의 단순성 안에 머무르면서 참다운 형식을 갖춘 참다운 것이 된다. 그들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용상의 차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정신에 깃들어 있는 계기들의 운동을 단순성의 형태로 전개하여 유기적인 총체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논리학 또는 사변철학이다.



[1] 원문 . 이 문단에서 를 그냥 <실체>로 번역하지 않고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번역하였다. 앞 문단과 이 문단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의식과 정신 간의 관계이며, 나아가 <정신현상학> <논리학> 간의 관계다. 이와 관련 제기되는 문제는 의식이 자기의 힘으로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정신현상학>이 헤겔이 이야기하는 <학문>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이다.

[2] 부정의 힘에 의해서 타자가 된 것을

[3] Bewusstseinsdifferenz

[4] 원문 . 여기서 역자는 스피노자의 영원의 관점아래>를 듣는다. 

[5] 원문 <>. 파렌테시스를 이렇게 번역하였다.

[6] unmittelbar

[7] 원문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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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36

(§36) 정신의 덜 떨어진[1] 존재양식인 의식은 반드시[2] 지와 지에 부정적인[3] 대상이라는 두 축을[4] 갖는다. 정신은 이런 의식의 터전에서 자신을 현상화하고[5] [의식이 갖는 두 축의 이편저편에] 자기 안에 엉겨져 있는 것들을[6] 전개하여 줄줄이 늘어놓기[7] 때문에 이것들간에는 앞서 말한 대립이 성립하고, 그것들 모두 의식이 취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줄줄이 이어지는 도정에 관한 학문이 바로 의식이 체험하는 경험에 관한 학문이다. 정신이 이렇게 학문의 대상이 되는데 여기서는 다만 정신의 실체와 정신의 운동이 어떻게 의식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점에 제한하여 다루어진다. 의식은 그의 경험 안에 있는 것을 그저 알 뿐이지 그가 경험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파악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경험 속에 나타나는 것은 단지 정신적인 실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완성된 정신의 모습이 아니라] 단지 대상화된 정신의 실체만이 [의식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신이 이렇게 대상이 되는 이유는 정신이란 바로 스스로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다른 것이 되는, 달리 표현하면 자신을 대상화하는 운동이고, 이어서 자기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8] 지양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운동이 바로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런 운동 안에서 덜 떨어진 것[9], 그것이 감각에 매달려 존재하는 자가 말하는 [코앞에 있는] 직접적인 것이든 아니면 사유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단순성이란 [요지부동의] 직접적인 것이든 하여간 추상적이고 전혀 경험되지 않은 것은 [붙어 있는 것에서 뚝 떨어져 나와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는 행인이 되어] 자기가 뭔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낯선 것이 되고, 그 다음 이러한 자기소외로부터 다시 자기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운동이 완성될 때 덜 떨어진 것은 비로소 그 실재와 진실이 완전히 서술되고 드러나 드디어 의식이 이젠 더 이상 상실할 수 없는 재산이 된다.



[1] 원문

[2] 원문 정관사를 이렇게 옮겨보았다.

[3] 원문

[4] 원문

[5] 원문 <사진을 현상하다>란 의미도 있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타자존재

[9]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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