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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04
    정신현상학 서설 § 6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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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10/02
    정신현상학 서설 § 6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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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10/01
    정신현상학 서설 § 63, 64,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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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9/30
    정신현상학 서설 §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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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9/29
    정신현상학 서설 §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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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9/28
    정신현상학 서설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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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9/27
    정신현상학 서설 §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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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9/25
    정신현상학 서설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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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9/24
    정신현상학 서설 § 56, 57, 58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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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9/24
    정신현상학 서설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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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2 -수정

§62) 지금 말한 것을 설명하는 예로 <하느님이 유일한 존재다>[1]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여기서 술어는 <유일한>[2] 존재가 되겠다. 여기서 <존재>는 실체적인 의미가 있고, 이런 실체적인 의미로서의 <존재>에는[3] 주체가 [이미] 녹아 들어가 있다. 그래서 <Gott ist das Sein>이란 명제에서는 <존재>가 주어에 따라붙는 술어가 아니라, [즉 그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그저 있다는 것을 지양한] 본질이[4]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제[문장]상의 위치로 보면 [주체로서] 견고부동의 주어가 되어야 하는 하느님이 더 이상 그런 주어가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는 듯하다. — 이때 [자연 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본래] [과감하게] 주어에서 술어로 이행함으로써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런 이행의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주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소심하게 되어] 어찌할 줄 모르고 망설이다가 결국 주체로서의 주어를 잊지 못해 [주체를 개념운동의 주체로 파악하기 보다는] 인식주관으로 파악하는 [형식주의] 사상으로[5] 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유는 술어라는 것 그 자체가 주체의 속성을 남김없이 안고 있는 <유일한> 존재[6], 즉 [그저 있다는 것이 반성이란 부정을 통해서 지양된] <본질>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또한 술어에서 직관적으로[7]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 사유는, [술어로 이행했지만 그 안에서 주체를 인식하지 못하고/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해서??],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인식주관이라는 주체가 되어] 술어를 이리저리 따져보는 자유로운 입장에 들어가기보다는 아직 내용에 몰두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며 최소한 내용에 몰두해야 한다는 요구를 몸소 느끼는 상태에 있다. —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주어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그 술어 안으로 스며들어가 술어가 주체가 되게 한다. 이 명제에서 보편적인 것은 어떤 사실을 서술하는데 그치는 단지 술어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편적이란 것이 부정의 반성으로 지양되어 특수한 것이 되는] 본질이[8]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특수한 본질이 바로 실재적이란 것이다.] — 이렇게 사유는 변함 없는 부동의 토대라고 여겼던 주체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상실은 술어로 이행한 뒤에 주체로 다시 복귀하는데 있어서 자기 안으로 복귀하지 않고 내용의 주체 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주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9]



[1]원문 <Gott ist das Sein>. 헤겔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문장을 고른 것 같지 않다. 어떤 모양의 문장인지 한번 살펴보자. 주어인 <Gott>와 술어명사로 사용된 <das Sein>이 <sein> 동사의 변형인 <ist>로 연결되어 있다. <Gott>는 관사 없이 사용되고 <Sein>은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 문장을 다음 문장과 비교해보자. <Die Katze ist ein Haustier./고양이는 애완용 동물이다.>라는 문장에서는 주어가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모든 고양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고양이>란 낱말의 외연, 즉 <고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의미다. 정관사가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는 정관사대신 부정관사를 사용해도 문장의 의미가 바뀌지 않는다. <Eine Katze ist ein Haustier.> 여기서<eine>는<하나>라는 의미이지만 <고양이>로 구분된 것을 대표하는 <하나>라는 의미다. 술어명사로 사용된<Haustier>에는 부정관사가 딸려있다. 술어명사에 부정관사가 딸리면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데, <Einstein war ein sehr musikalischer Mensch./아인슈타인은 매우 음악적인 사람이었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단칭명사가 주어로 사용되면 그 단칭명사가 가리키는 개별자를 평가하는 의미가 있고, <Der Mensch ist ein lachfächiges Wesen./사람은 웃을 수 잇는 존재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일반명사가 주어로 사용되면 주어로 사용되는 일반명사가 적용되는 모든 개별자를 정의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근데 <Gott ist das Sein>이란 문장은 <Die Katze ist ein Haustier.>란 문장과 뭔가 틀리다. 우선 정관사와 부정관사 사용이 상이하다. <Gott>는 <Einstein>과 같이 부르고 청할 수 이름으로 사용되는 단칭명사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Gott>를 존칭을 표현하는 <님>이 따라붙는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그럼 <das Sein>은, 특히 여기서 사용되는 정관사는 무슨 의미인가? <Das Sein>이 <Gott/하느님>을 정의하는 술어명사는 아닌 것 같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의할 때는 <부정관사>가 사용되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그럼 <Er ist der Verbrecher./그가[바로] 범인이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개별자 확인/Identification>용으로 사용되는 정관사인가? 아니면 술어명사 <Sein>이 <Gott>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렇다면 <Er ist Arzt./그는 의사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관사가 와서는 안 되는데... 주어로 사용된 <Gott>가 <Einsstein>과 같은 단칭명사가 아니고 다른 것일까? <감자는 남미에서 유럽으로 도입되었다.>라는 문장을 독어로 번역하면 <감자>에는 반드시 정관사가 따라 붙어야 한다. <Die Kartoffel wurde von Südamerika nach Europa eingeführt.> 정의에서와 달리 부정관사가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관사는 <감자>란 것의 외연이 아니라 그 속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라면 <der Gott>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독어문법에 기대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Gott>가 <Einstein>과 같은 단칭명사이며 <Sein>도 주어를 정의하는 술어명사이기 보다는 어떤 특별한 개별자를 구별해내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뭔가가 결여된 문장이다. 예컨대 <Er ist der Verbrecher, den wir gesucht haben./그가 바로 우리가 찾았던 범인이다.>해야 완벽한 문장이 되듯이.

[2]원문<das>

[3]원문<Es hat substantielle Bedeutung.>에서 <es>가 앞 문장의 <Prädikat>를 수식하지 않고<Sein>을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번역했다. 

[4]원문<Wesen>. 여기서<Wesen/본질>은 정의에서와 같이 주어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 즉<essentiell>이란 의미가 아니라 <aufgehobenes Sein/지양된 존재>란 의미가 아닌가 한다.

[5]원문 <Gedanken des Subjekts>. 의미가 부동(浮動)하는 표현이다. 우선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주체에 관한 사상이란 의미와 함께 주체, 즉 인식주관이 갖는 사상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 같다. <부동>한다고 하는데 <부동>하는 가운데 역자의 생각도 뭔지 붕 떠있는 것 같다. 이성이 자신을 도려내는 칼을 빌려 헤겔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cogito [res] cogitans cogitum/나는 생각하는 실체로 생각대상을 생각한다>에서와 같이 사유는 <사유행위/cogito(나는 생각한다)>와 <인식주관/res cogitans>으로 구별된다. 라이프니츠에 이어 칸트는 사유행위(cogito)를 <Apperzeption/통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단순하고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내용이 전혀 없는 표상으로서의 자아“(„die einfache und fuer sich selbst an Inhalt gänzlich leere Vorstellung: Ich“)다. 이 자아가 „의식 외 아무것도 아닌 것“(blosses Bewusstsein), 즉 의식활동이전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개념을 동반하는 것이고, „[수학 공식에서의x와 같이 텅 비어있는] „미지의 선험적 주관“(„transzendentales Subjekt=x“)이 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B404 참조). 선험적 주관이 [의식의 내용물을] 하나로 엮어내는 가운데 하나로 머무르는, 다른 무엇을 전제하지 않는 „통각의 절대적 통일“ („die absolute Einheit der Apperzeption“)이 된다. 이렇게 „사유“(Denken/cogito)와 „사유주체로서의 주관“(das denkende Subjekt/res cogitans)은 „규정하는 자기“(„das bestimmende Selbst“=Denken)와 „규정되어지는 자기“(das bestimmbare Selbst=das denkende Subjekt/res cogitans)로 구별된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에서는 단지 통각에 의한 사상의 종합으로 나타나는 통일이 [개관적인 통일이 지각되어 사상의 주관에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칸트는 이런 가상(Schein)이 [단지 동반하는 행위일 뿐인] 의식을 [res cogitans와 같이] 사물로(„das hypostasierte Bewusstsein“/실체화된 의식) 여기는 한 자연스러운 것이고, 끌려가기에 알맞은 유혹과 „기만“(„Subreption“)이라고 한다.(칸트, 순수이성비판A 401, 402 참조).

[6]원문<das Sein>

[7]원문<unmittelbar>

[8]원문<Wesen>. 역자주4에서 이야기한<본질>이다.

[9]헤겔은<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칸트의 인식론을<자연 발생적인 생각/natürliche Vorstellu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통일철학/Identitätsphilosophie>이 대려 자연적인 표상이고 기만이라고까지 비판한다. 헤겔의 <논리학>은 이런 칸트의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헤겔의 개념논리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서설 §57 역자주에서 헤겔이 개념논리학을 사태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대인논증으로 쉽게 넘어간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대인논증이, 즉 형식적 사유가 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런 비판은 헤겔이 이성을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과 같이 순수(이론=Theoria)이성과 실천이성(praktische Vernunft)으로 구별하지 않고 플라톤을 따르는데 기반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제쳐놓고 헤겔철학과 칸트철학도 통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 단지<정신현상학> 서설의<문체/Textkörper>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자면 이 문단에서와 같이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Das Allgemeine soll das Wesen des Wirklichen ausdrücken.)는 당위성을 표현하는 „Sollen“이라는 낱말에서 단지 감지한 것뿐이다. 칸트의<통일철학>에 대한 비판이 헤겔의 논리학에도 적용된다면, 변증법에 대해서 숙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맑스의 실천개념과 칸트의 헤겔비판에 기대어 변증법을 실천이성으로 보다 정확하게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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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4 -수정

      {가면 갈수록 태산이다. 첩첩산중이다. 웬만큼 헤매고 나면 밝은 곳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한 것 같다. 헤겔이 독일 사람이라 그를 따라 들어간 숲도 당연히 독일식 숲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독일식 숲이라면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국당대회 광장에 당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위대한 존재자”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뚫어놓고 서 있듯이 반듯이 “Lichtung”이란 것이 있다. 나무를 다 베어 만든 툭 터진 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즐겨 걷던 길이다.

     헤겔이 인도한 숲은 원시적인 밀림인 것 같다. 그리고 밖으로 인도할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아니 밖으로 나가서도 안되고 밀림에 있는 나무 하나하나를, 그 속에 살고있는 생명체 하나하나를 다 보기 전에는 빠져 나갈 수도 없단다. <상한 갈대도, 꺼져가는 등불>(이사야 42.3)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야훼와 같이 되란 말인가?

      §66을 번역하다가 뭔가에 꽉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후진하게 되었다. 뭔가 알 것 같아서 죽죽 번역하고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게 아니다. 한번 본 것 같은 지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고, 결국 엉뚱한 데로 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이 없는 헤겔의 정신에게야 엉뚱한 곳이란 없겠지만...

      §64의 번역을 다시 올린다. 여기서 이야기된 내용이 어떤 지형에서 이야기되었는지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번역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64 논쟁구도를 보자면 <사변적인 방식>, <논변위주 방식>, 그리고 <입체적인 방식> 등 3자가 등장한다. 역자는 처음에 2인으로 생각하고 <사변적인 방식>과 <입체적인 방식>을 같은 선상에 놓았다. <사변적인 방식>은 아마 쉘링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입체적인 방식>은 헤겔 자신, 즉 <변증법적 방식>을 가리킨다. <변증법적 방식> 차원에서 <논변위주의 방식>과 함께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논점은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도 <논변위주의 방식>을 비판하는데, <변증법적 방식> 차원에서 보자면 둘 다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64) 이때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은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과 논변위주 방식이 [하는 짓이 둘 다 비슷해서] 둘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둘을 혼합하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 사변적인 방식에서는 [문장형식에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 주체의 개념이 되는 의미를 갖는데, 논변위주의 방식에서는 주체에 대하여 단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1], 즉 주체에 따라붙는 것[2]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 양쪽 그 어느 방식이든지 다른 방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명제의 부분인 [주어와 술어가 갖는] 일상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는바 이를 엄격하게 배제하는 철학적 드러냄만이[3] 비로서 입체적인 철학이 될 것이다.



[1]원문 <Prädikat/술어>

[2]원문 <Akzidens>. 따라붙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 있고, 우연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속성이란 의미와 우연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다.

[3]원문 <Exposition>. 어원의 의미를 살려 <드러내다>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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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3, 64, 65

§63) <철학서적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라는 불평은 대부분, 당사자가 철학서적을 이해할 만한 여타 조건을 교육을 통해서 갖춘 상태인 경우, 위와 같은[다른 학과의 서적에서는] 당해보지 못한 장애물 앞에서의 망설임에서 기인한다. 특히, [한두 문장도 아니고] 다수의 문장들을 [줄줄이] 반복해서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된다는 식의 철학 저서에 자주 가해지는 고질적인 비판은 지금 이야기된 내용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 이런 비난은[이젠 아무리 권해도 더 이상 듣지 않고 아예 책을 내 팽개쳐버리겠다는 식의] 무례한 행동과도 같은데, 이런 생각이 한번 곧추세워지면 달리 달랠 방법이 없다고 들 한다. — 이 비난의 정황은 위에서 거론한 것에 비춰보면 훤해진다. 철학적 명제도 역시 명제이기 때문에 이를 대하는 일반인은 일반명제에서와 같은 상투적인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떠올리고 이에 익숙해진 지의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런 지의 태도와 사념은 철학적 내용에 의해서 파괴된다. 여기서 사념, 즉 독자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의미하는 것이 자기가 사념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사념을 정정해야 함은 지로 하여금 명제로 되돌아가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달리 파악하도록 강제한다.

 

§64) 이때 꼭 피해야 할 일은 이해를 어렵게 하는데 장본인 역할을 하는 사변적인 방식과 논변위주 방식을 혼합하는 일이다. 사변적인 방식에서는 [문장형식에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 주체의 개념이 되는 의미를 갖는데, 논변위주의 방식에서는 주체에 대하여 단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1], 즉 주체에 따라붙는 것[2]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 양쪽 그 어느 방식이든지 다른 방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명제에서 주어와 술어가 갖는 일상적인 관계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변적인] 관계만을 밝혀낼[3] 때 비로서 입체적인 철학적 [내용이] 드러날 것이다.

 

§65) [그렇다고, 철학왕국의 시민권이 없다고 해서 논변위주의 사유를 그냥 내쫓을 수는 없다. 이점이 어렵다.] 사실 사변적이지 않는 사유도 그 나름대로의 정당한 [존재]권리가 있다. 다만 사변적인 명제의 방식이 거들떠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주어와 술어를 따지는] 일반명제의 형식이 지양되어야[4] 한다. 이것은 단지 직접적인 방식으로, 즉 위에서와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명제의 형식이 그 내용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대들고 그 형식을 파기해서만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보다는 아래와 같은 엇갈리는 운동이 속속들이 표현되어야[5] 한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언급한 형식적 사유의 내적 망설임만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이 내적 망설임을 개념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렇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개념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서술해야 한다. [이런 서술이 완성될 때 비로서[6] 명제의 형식이 지양되는 것이다.] 이 운동이야말로 흔히 이야기되는 증명이라는 것이 진정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명제가 스스로 행하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오직 이 운동만이 실재적으로 사변적인 것이며 또한 오직 이 운동을 속속들이 표명하는 것만이 사변적인 서술이다. 명제에 그치는 사변적인 것은 단지 내적 망설임일 뿐이고 아직 본질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으로 등장하여 서술되지 않은[7] 그런 복귀일 뿐이다.그래서 우리는 어떤 철학서적을 들어다 보면 첫 장에[8] 이와 같은 내적 직관을 보란 듯이 내놓고 그것을 따르고 있고 또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명제의 변증법적 운동을 서술하는 [정작 걸머져야 할] 짐을 덜어보려는 작태다. —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표현하는 것이 명제라고 한다. 그러나 진리란 본질적으로 주체다. 그리고 이런 주체로서의 진리는 오로지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자기자신을 산출하고, 이끌어 나가고, 그리고 자기 안으로 돌아가는 발자취[9]다. — 여타 인식에서는 증명을 떠맡는 장본인이 이와 같이 내면성을 [내적 직관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 그렇지 않다. 증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변증법과 증명이 서로 분리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사실 증명의 개념조차 상실된 상황이다.



[1]원문 <Prädikat/술어>

[2]원문 <Akzidens>. 따라붙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 있고, 우연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속성이란 의미와 우연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다.

[3]원문 <Exposition>. 어원의 의미를 살려 <밝혀내다>와 <드러나다>로 번역하였다.

[4]원문 <aufheben>. <주어올리다>의 의미에서 <파기하다=주어올려 버리다>, <보존하다=주어올려 선반 등에 놓다>, 그리고 <발전하여 한단계 위로 올라가다=한층 북돋은 지위(aufgehobene Stellung)에서와 같이>란 의미가 있다. 사변적인 개념이다.

[5]원문 <aussprechen>. 여기선 <속 시원하게 내놓고 전부 말하다>란 의미인 것 같다.

[6]원문 <dargestellt sein>의 현재완료를 <비로소>로 받았다.

[7]원문 <nichtdaseiend>

[8]원문 <Exposition> 소나타의 첫 장을 <Exposition>이라고 하는 것에 기대여 번역했다.

[9]원문 <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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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2

§62) 지금 말한 것을 설명하는 예로<신은 존재다>[1]라는 명제를 살펴보면, 이때 술어가 되는<존재>에 실체적인 의미가 있고, 주어는 술어 안에서 흐물흐물 녹아사라진다. [명제가 실지로 주장하는 것은] <존재>가 주어에 따라붙는 술어가 아니라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제상의 위치로 보면 견고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신이 더 이상 그런 주체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 이때[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본래] [과감하게] 주어에서 술어로 이행함으로써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런 이행의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주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소심하게 되어] 어찌할 줄 몰르고 망설이다가 결국 주체로서의 주어를 잊지 못해[주체를 인식주관으로 파악하는 형식주의] 사상으로[2]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유는 술어라는 것 그 자체가 주체의 속성을 남김없이 안고 있는<존재> 또는<본질>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술어 그 자체 안에서 [본질뿐만 아니라] 또한 주체를 찾게된다. 이때 사유는, [술어로 이행했지만 그 안에서 주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자신이 인식주관이라는 주체가 되어] 술어를 이리저리 따져보는 자유로운 입장에 들어가기보다는 아직 내용에 몰두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며 최소한 내용에 몰두해야 한다는 요구를 몸소 느끼는 상태에 있다. — 실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주어로서의 현실적인 것은 그 술어 안에서 사라진다. 이 명제에서 보편적인 것은 어떤 사실을 서술하는데 그치는 단지 술어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 이렇게 사유는 변함 없는 부동의 토대라고 여겼던 주체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상실은 술어로 이행한 뒤에 주체로 다시 복귀하는데 있어서 자기안으로 복귀하지 않고 내용의 주체 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주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1]원문<Gott ist das Sein>. <Gott ist Sein>이란 명제와 다른가?

[2]원문<Gedanken des Subjekts>. 의미가 부동(浮動)하는 표현이다. 우선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주체에 관한 사상이란 의미와 함께 주체, 즉 인식주관이 갖는 사상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 같다. <부동>한다고 하는데<부동>하는 가운데 역자의 생각도 뭔지 붕 떠있는 것같다. 이성이 자신을 찢어내는 칼을 빌려 헤겔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데카르트의<cogito [res] cogitans cogitum>에서와 같이 사유는 인식행위 <cogito/나는 생각한다>와  인식주관/주체<res cogitans/생각하는 실체>로 구별된다. 라이프니츠에 이어 칸트는 사유행위(cogito)를 <Apperzeption/통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단순하고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내용이 전혀 없는 표상으로서의 자아“(„die einfache und fuer sich selbst an Inhalt gänzlich leere Vorstellung: Ich“)다. 이 자아가 „의식외 아무것도 아닌 것“(blosses Bewusstsein), 즉 의식활동이전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개념을 동반하는 것이고, „[수학 공식에서의x와 같이 텅비어있는] „미지의 선험적 주관“(„transzendentales Subjekt=x“)이 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B404 참조). 선험적 주관이[의식의 내용물을] 하나로 엮어내는 가운데 하나로 머무르는, 다른 무엇을 전제하지 않는 „통각의 절대적 통일“ („die absolute Einheit der Apperzeption“)이 된다. 이렇게 „사유“(Denken/cogito)와 „사유주체로서의 주관“(das denkende Subjekt/res cogitans)은 „규정하는 자기“(„das bestimmende Selbst“=Denken)와 „규정되어지는 자기“(das bestimmbare Selbst=das denkende Subjekt)로 구별된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에서는 단지 통각에 의한 사상의 종합에서 나타나는 통일이 지각된 통일이 사상의 주관/주체(res cogitans)에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칸트는 이런 가상(Schein)이[단지 동반하는 행위일 뿐인] 의식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das hypostasierte Bewusstsein“/실체화된 의식) 여기는 한 자연스러운 것이고, 끌려가기에 알맞은 „기만“(„Subreption“)이라고 한다.(칸트, 순수이성비판A 401, 4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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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1

§61) 방금 말한 것은 형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다. 판단이나 명제라는 것은 그 속성상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안에 주어와 술어라는 차이를 내포하는데, 이 속성이 사변적인 명제에 의해서 파괴되고, 이렇게 주어와 술어가 갖는 관계가 반격을 받음으로써 처음에 등장하는[표상적 사유의] 명제가 동일성 명제가 된다는 것이다. — [말로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주어와 술어란 차이를 갖춘] 일반명제의 형식과 바로 이런 형식을 파괴하는 개념의 [운동]에 의한 통일 간의 대립은 운율에서 박자와 악센트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비슷하다. 운율은 어느 한 쪽이 중심이 되는 통일이 아니라 그 중심이 부동(浮動)하는 양자의 통일에서[1]나타나는 결과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명제에서도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은 일반명제의 형식이 표현하는 그들의 구별을 말소해서는 안 되다. 이와 반대로 이 통일은 어디까지나 조화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 명제의 형식은 특정한 의미가 나타나는 모습으로서 그 의미가 [치우쳐] 규정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바, 이런 명제의 형식은 의미의 완성도를 강약으로 가르는 악센트와 같은 것이다.술어가 실체를 표현하고 [주관으로 일관하는] 주어/주체가 스스로 보편자의 위치로 뛰어들어감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통일은 악센트가 운율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과 같은 통일이다.



[1]원문<aus der schwebenden Mitte und Vereinigung beider>. 무슨 말인가? 헤겔이 피히테가 갈아논 밭에서 뭔가를 가져온 것 같다. 노발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Fichtisiren>하고 있다.1 <Schwebende Mitte/부동하는 중심>은 피히테가 <구상력/Einbildungskraft>과 관련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1794/95년<전 학문론의 기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에서 피히테는 구상력에 의해서 <직관/Anschauung>이 형성된다고 한다. „종합하는 능력은 대립하는 것을 통일하는, 양자를 하나로 사유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수행할 수 없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립하는 양자를 통일시킬수 없는 무능력과 그렇게 하라는 요구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다. 이런 갈등 안에 정신은verweilen/[하염없이 머무르다]하면서 양자 사이에, 그 과제를 수행하라는 요구와 그것을 달성할 수 없는 무능력 사이에 부동한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 이런 상태에서, 오로지 이런 상태에서만, 양자를 동시에 굳게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다.“(„Das Vermögen der Synthesis hat die Aufgabe die entgegengesezten zu vereinigen, als Eins zu denken, .... Dies vermag sie nun nicht; dennoch aber ist die Aufgabe da; und es entsteht daher ein Streit zwischen dem Unvermögen, und der Forderung. In diesem Streite verweilt der Geist, schwebt zwischen beiden; schwebt zwischen der Forderung, und der Unmöglichkeit, sie zu erfüllen, und in diesem Zustande, aber nur in diesem, hält er beide zugleich fest.“ 강조역자) 1804년 <학문론/Die Wissenschaftslehre>에서는 확신이란 대립하는 a와 b라는 양자 사이에서 „a 에서 b로 그리고 다시b 에서 a 로 [왔다갔다하면서] 부동하고, 이렇게 부동하는 가운데 양자에게서 모든 것을 퍼가는 것으로서 이런 [왔다갔다하는] 이중적인 부상 사이에 다시 부상하는 것“("schwebend von a zu b, und wiederum von b zu a, und erschöpfend durchaus beides, also schwebend wiederum zwischen dem zwiefachen Schweben." 강조 역자)이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부상>이 매개프로세스와 매개의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schwebedende Mitte/부상하는 중심>은<Vermittlung/매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다. (Christoph Asmuth, „Das Schweben ist der Quell aller Realität, http://www.jp.philo.at/texte/AsmuthC1.pdf 참조. 피히테 인용은 동 문서를 따름). <Vermittlung/매개>를 이렇게<부상하는 중심>으로 이해하면 우선 <중재/Mediation>와는 거리가 멀뿐만아니라 <중간> 등 어딘가에 자기자리를 갖는 것과도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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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맑스가 얼마나 <hegelisieren>하는지도 궁금하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헤겔과 맑스의 [학문적] 관계를 상상하면서 헤겔이 죽으면서 맑스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한 녀석만 나를 이해했는데, 그 놈도 나를 오해했다.” (Wolfgang Haug, Parteillichkeit und Objektivität, http://www.wolfgangfritzhaug.inkrit.de/documents/Parteilichkeit-und-Objektivitaet.pdf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서설 § 60

§60) 이것으로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논변 위주의 사유에 대한 고찰이 마무리 된 것이 아니다.[1] 위의 고찰에 덧붙여 논변 위주의 사유가 내용을 갖는다는 것 자체를[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때 논변 위주 사유의 다른 면이 부각된다. 그가 내용으로 하는 것을, 그것이 표상에 속한 것이든, 사상에 속한 것이든, 아니면 양자를 혼합한 것이든 하여간 그가 내용으로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로하여금[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면이 분명해진다. 논변 위주의 사유가 갖는 이런[서커스에서 어릿광대가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일로 불거지는지 모르는 체 뭔가를 계속 해서 관중을 웃기듯이] 가관할 만한 꼴은[2]사실 위에서 이념이라고 했던 본질[3]그 자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논변 위주의 웃기지도 않는 꼴이 바로 이념이 어떻게 운동으로 등장해서 파악하는 사유가[4]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논변 위주의 사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自己)가 되어 그 안에[모든] 내용을 함몰시킨다. 그런데 그가 여기선 앞과 달리 내용을 갖는 긍정적인 인식으로 등장한다. 이때 자기(自己)가[5]되는 것은[스스로 운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저] 앞자리에 갖다놓여진[6]주어와[7]같은 것이고, 내용이란 이런 주어에 따라붙는[8]술어일 뿐이다. 논변 위주의 사유에서는 이와 같은[주어로서의 막연한] 주체가 내용을 지탱하는 것이며, 여기서 나타나는 운동이란 내용을[술어로 하여] 이런 주체에 붙였다뗐다하는 것 뿐이다. 개념적인 사유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 여기서 자기란 대상 고유의 것으로서 대상이 생성되어가는 가운데 스스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가 바로 개념이[9]되기 때문에 여기서 자기란 딸린 것들을[10]묵묵히[11]그저 지탱하는 부동의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운동하고 자기에 딸린 규정들을[12]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운동 안에서는 논변위주의 사유가 기대고 있는 부동의 주체가 해체되어 정말 밑바닥으로 깔려 들어가[13]스스로 차이와 내용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때 주체는[따라붙어있는] 규정들 저편에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규정들을, 즉 구별된 내용과 내용에 구별을 주는 운동을 완성하는[동력인][14] 것이다. 이렇게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사유가 부동의 주체에 기대어 굳게 서 있다고 믿는 확고한 토대가 흔들리게 된다. 단지 이런 운동만이[개념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용으로 충만한주체는 더 이상의 내용을 찾아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Akzidenzen이나 술어로 채워질 여지도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내용이 이리저리 갈라지는 산만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통제아래 한묶음되어 있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게 어떤 주체에 묶여있기 때문에 속해있는 주체를 떠나서 여러 주체에 해당되는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내용은 사실 더 이상[주어에 갖다붙이는 술어가] 아니라[주체가 생동하는] 실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사유의 대상인 본질과 개념인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표상적 사유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그 사실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표상적 사유는 말 그대로[15]뭔가 떠올리는 것을[주어에] 술어로 갖다붙이는 행위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고, 또 이렇게 갖다붙이는 것이 술어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땅히[16]그런 것들을 넘어서서[본질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유는 쭉 나아가지 못하고 멈칫거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명제에서[본질이 아니라] 고작 술어 형식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 실체이기 때문이다. 술어를 고작 주어에 딸려붙어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사유가[실체를 맞이하고] 붙잡히게 되는 셈이다. 주체가 무슨 불변하는 토대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던 차에 표상적 사유가 발견하는 것은- 술어가 사실 실체가 되기 때문에- 주체가 술어쪽으로 넘어가[이젠 더 이상] 주체구실을 못한다는[17]점이다. 단지 술어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이렇게 내용의 전반을 이루고[어디에 붙었다떨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심점을 갖는] 독립적인 질량이 되기 때문에 표상적인 사유는 더 이상 자유롭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못하고 그 질량의 중력에 의해서 제동을 받게되는 것이다. — 앞서 이야기했듯이 형식적 사유는 주체를 대상화하여 고정된 자기(自己)라는 토대로 삼는다. 그리고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유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규정으로, 달리 표현하면 술어로 나아간다. 이때 앞에서 이야기된 [자기 운동하는] 주체의 자리에 자아가 지적 주체로[18]들어서서 술어를 엮어내고 그것을 지탱하는 주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표상적 사유가 주어라고 생각했던] 주체가 규정에[속속들이] 스며들어가 그것의 혼이 되는 상황에서 지적 자아인 형식적 사유의 주체는 표상적 사유가 말하는 주체를 빨리 처리하고 나서 다시 자기 안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만 표상적 사유의 주체가 아직 술어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지적 자아는 더 이상 표상적 사유가 주어로 삼는 주체에 이런저런 술어를 붙였다떼었다하는 운동으로 일관하는 논변위주의 사유로 남을 수 없고, 오히려[그런 술어의 운동 속에서] 내용에 내재하는 자기[das Selbst]를 접하고 있는바, 더 이상[운동의 힘을 발휘하는] 자기는[das Selbst] 자기 혼자라고[fuer sich] 우쭐하지 못하고 내용의 자기[das Selbst]와 그 자리를 공유해야하는 외압적인 수모를 당하는 꼴이다.



[1]원문<aber>

[2]원문<merkwürdige Natur>. <특이한 성질/속성>. 좀 빈정대는 투가 들려서 위와 같이 번역했다.

[3]원문<Wesen der Idee>. 소유격을 성질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 이해하고 번였했다. 본질이 이념의 성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4]원문<denkendes Auffassen>

[5]원문<das Selbst/자기>. 이건 도대체 뭔가?

[6]원문<vorgestellt>. 관념적인 표상이라는 의미와 문장에서 주어를 앞에 갖다논다는<voranstellen>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낱말이 갖는 은유적인 의미와 직접적인 의미를 혼합봐여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subjekt>란 낱말에도 여러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Hypokeimenon>으로서 실체를 이루는<바탕>이라는 의미,  문장의<주어>란 의미, 주체란 의미가 있다.

[7]원문<Subjekt>.

[8]원문<Akzidens>. 어원<accidere>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9]원문<[…] der Begriff [ist] das eigene Selbst des Gegenstandes>. 강조 역자. <개념이란 대상 고유의 자기다.> <정신현상학> 서설 § 56에서 이야기된<die Natur dessen, was ist, in seinem Sein sein Begriff zu sein>를 뭔가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인 것 같다. 헤겔은 „개념이야말로 참으로 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사물이 그 사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안에 내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개념의 활동을 통해서이다./Der Begriff ist vielmehr das wahrhaft Erste, und die Dinge sind das, was sie sind durch die Tätigkeit des ihnen innewohnenden und in ihnen sich offenbarenden Begriffs.“ (헤겔, 철학엔치클로페디아, § 163, 첨언2, 글로크너 판)라고 한다. 사물이 이런 식으로, <자기>의 계시로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정말 힘들다. 키에르케고르의<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야기되는<자기>란 것에 기대어 사물에서 활동하는<자기>를 이해할 수 있다면<관계하는 가운데 하나로 통일되어 완성되는 것과 그렇게 하는 힘> 정도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아무튼<das Selbst>로 명사화하여 찍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헤겔의<개념>에 대한 개념을, 소유개념을 예로 삼아 설명하기도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소유개념에서 소유에 관한 규정을 연역하고 또 역으로 이런 내용을 소유개념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개념이<애당초부터 아무런 내용이 없는 형식/bloss eine an sich inhaltslose Form>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념이 그저 형식이라면 거기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또 그런 텅 비어 있는 형식뿐인 개념으로 내용을 환원한다는 것은 내용의 규정성을 빼앗을뿐이지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 („Man spricht von der Ableitung eines Inhalts, so zum Beispiel der das Eigentum betreffenden Bestimmungen aus dem Begriff des Eigentums und ebenso umgekehrt von der Zurückführung eines solchen Inhalts auf den Begriff. Damit wird aber anerkannt, dass der Begriff nicht bloss eine an sich inhaltslose Form ist, da einerseits aus einer solchen nichts abzuleiten wäre und andererseits durch Zurückführung eines gegebenen Inhalts auf die leere Form des Begriffs derselbe nur seiner Bestimmtheit beraubt, aber nicht erkannt werden.“ (같은 책 § 160, 첨언). 이것은 수긍이 가지만 사물도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참 힘들다. 헤겔이 논리학은 신학의 변신 아니면 자기모습을 감춘 신학[Kryptotheologie]인 것같다. 논리학의 바탕엔<신에 관해서 알고있는 인간의 정신은 단지 신의 정신 그 자체일 뿐이다./Der Geist des Menschen, von Gott zu wissen, ist nur der Geist Gottes selbst.>(종교철학강의, WW. [글로크너 판, 1927] XII, 496쪽)란 표현에 스며있는[기독교적 교리의] 운동이 깔려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변증법이<가만히 바라보기만/reines Zusehen>해도 되는 이론적인(theoretisch=spekulativ=가만히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실천적인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변증법이 이론=아리스토텔레스의Theoria=헤겔의speculatio=Zusehen의 이론인가 아니면 실천의 이론인가 하는 문제다. 맑스를 따른다고 하면서 변증법을 운운했던/운운하는 사람들이 이점을 간과했던/하는 것 같다. 맑스가 실천이라고 했던  <gegenständliche Tätigkeit>를 좀더 살펴봐야 하겠다.

[10]원문<Akzidenzen>

[11]원문<unentwegt>

[12]원문<Bestimmungen>

[13]원문<zugrunde gehen>의 이중적인 의미를 살려 번역하였다. <해체되어 멸망하다>란 의미가 있는가 하면<Hypokeimenon/바탕으로 침강하다>란 의미가 있다. 진정한<Hypokeimenon/바탕/실체>가 된다는 이야기다.

[14]원문<ausmachen>

[15]원문<seine Natur>

[16]원문<mit Recht>

[17]원문<aufheben>. 형식적 사유가<aufheben>의 변증법적 운동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사라지다>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18]원문<das wissende 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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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9

§59)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사유태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이 개념적인 사유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다 뚜렷하게 부각된다. — 논변 위주의 사유는 한편으로는 파악된 내용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이를 반박하고 무참(無慘)하게 만들기 일쑤다. 내용이 말하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식의 통찰은 한낱 부정적인 것이다. 논변 위주의 사유가 마지막으로 하는 행위는 이렇게 내용을 끝장내는 것으로서 자신을 뛰어넘어[1]새로운 내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용을 다시 갖기 위해서는 어디에선가 뭔가 다른 것을 데려다가 앞에 세워놓고 다뤄야만 한다.[2] [이렇게 내용에 종지부를 찍는 부정성일 뿐인 논변 위주의 사유가 [내용파악에서 하는] 마지막 행위는 공허한 자아로 [다시] 돌아가는 반성일 뿐이며, 이것은 텅빈 지가 [내용을 다 꿰뚫어 보았다고 자찬하고, 내용이 별볼일 없다고 뻐기는] 우쭐함일 뿐이다. — 이런 텅빈 지의 우쭐함에는 지의 내용이 공허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의 인식 그 자체가 공허하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이 공허함은 부정된 것에서 긍정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부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성은[자기가 내용에 행사하는 부정 자체를 대상화하여] [그 부정이 내용안에서 하는 운동을] 내용으로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 사태 안에 머무르는 법이 없고 항상 그 밖을 향하고 있다.[3] 그래서 이런 반성은 공허함을 주장하는 것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있는 통찰보다 더 앞서간다고 착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개념적인 사유에는 부정적인 것이 바로 내용 그 자체에 속하고 동시에 내용에 내재되어 있는 운동 및 [엄연한] 규정이 된다. 그리고 이런 운동과 규정을 통해서 완성되고 또 이런 운동과 규정이란 속성을 갖는 전체로서[4]긍정적인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결과로 파악하면 그것은[내용에 내재하는] 운동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자기를] 제한하는 엄연한] 부정이며[5]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다.



[1]원문<über sich hinaus>

[2]서론 §7, 8참조

[3]원문<darüber hinaus>. <über sich hinaus/[자신을 스스로 뛰어넘는] 내재적 초월성/immanente Transzendenz>과 형식적 사유의 밖에 매달리는 <초월적 초월성/transzendente Transzendenz>이 대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형식적 사유는 <정신현상학> 서설 §7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죽음에 맞서게 되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덜덜 떨면서> [빌립보2.12과 키에르케고르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뭔가 초월적인 위대한 존재자를 찾게 된다.

[4]원문<als Ganzes derselben>. 여기서 소유격을 행위주체를 나타내는 소유격과 성질을 나타내는 소유격으로 이해하고 번역했다. 전체를 이루는 것은 부정의 운동을 통해서이고 또 전체에는 부정을 통한 운동과 규정성을 속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5]원문 <das bestimmte Negative>. 서론 §7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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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8

§58) 그래서[위와 같은 작태를 멀리하고] 학문에 열중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씌우는 멍에를[1]마다하지 않고 몸소 걸머지고[황소가 논밭을 갈듯이] 노동해야 한다. 개념이 씌우는 멍에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는데는 개념 그 자체에Aufmerksamkeit[주의][2]하는 것이 요구된다. 즉Ansichsein [즉자존재], Fürsichsein [대자존재], Sichselbstgleichheit [자기동일성][3] 등과 같은[개념의 운동에 나타나는] 단순한 규정에 파뭍혀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정이[대상의 왜곡되지 않은 모습인]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순수한 자기운동이기 때문이다. 혼의 개념은 물론[정신이라는] 뭔가 더 높은 것을 지향하고 있지만 말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표상에 기대여 앞으로 나아가는[사유]습관에게는 개념에 의해 표상의 줄이 단절되고 정지되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이점은 비실재적인 사상들을 놓고 이리저리 한번 따져보는 형식적인 사유에도 마찬가지다. 전자의 사유습관은 물질적 사유라고도 칭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발적인 의식이 단지 어쩌다가 소재에 퐁 빠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식은[어쩌다가 양반이 된 놈이 지가 무슨 한얀 의복을 입고 태어난 양반이나 되는양  똥물에 빠지면 재수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기 급급하고 똥물을 씻어내고 체면을 차려 다시 하얀 의복만을 입는 양방행세를 하기 바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소재에서 다시 벗어나 자기란 것, [즉 자기는 순수한 의식이란 것]을 말끔하게 부상시킴과 함께 그런 자기란 것에 안주하기에[4]급급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이리저리 따져보는 사유는 이와 대조적으로[지가 무슨 도사나 되는 양 이젠 어떤 똥물도 더 이상 자기를 더럽힐 수 없다는 식으로] 어떤[천박한] 내용과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자유를 행사하고 자기가 우뚝 서있는 바 이젠 어떤 내용도 자기를 담글 수 없다고 우쭐해 하는 것이다. 이런 우쭐함에 젖어있는 사유를 다그쳐, 내용을 자의적으로 이리저리 뒤흔드는 동력이[5]되는 그 따위 자유는 갖다버리고, [그런 자유를 행사하는] 대신 그런 자유는 내용 속에 함몰시켜[죽여버리고 다시는 내용에 손대는 일이 없게 하여] 내용이 자신의 속성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내용이[운동의 주체가 되는] 자기를[6]자기 것으로 하여 스스로 운동하게 가만두고[7], 이러한 운동을 바라보기만 하게 하는 것인데, [우쭐함에 젖어있는 사유에게는 실재로 하기 힘겨운 일이다.] 개념을 능욕하여 그 안에 내재하는 리듬을 자기 멋대로의 박자로 대치하는 발상을 물리치고 개념에 자의와 어디에선가 취득한 지혜를 수단으로 삼아 침범하지 않는 것, 바로 이런 자제가[8]개념에Aufmerksamkeit를 온통 집중하는 하는데 빠질 수 없는 본질적인 동력이[9]된다.



[1]원문<Anstrengung des Begriffs>. 어원을 살펴보니<Anstrengung>에는<Strang/역어꼬은 줄>이란 의미가 어근이다. <멍에>로 번역했다. 개념의 필연적인 운동이<멍에>와 같다는 의미가 있고, 개념이 이런 멍에를 씨운다는 의미와 함께 이런 멍에를 또 달갑게 받아들인다는 변증법적 운동이<Anstrengung des Begriffs>란 표현에 스며있는 것 같다.

[2]<Aufmerksamkeit>를 담아내는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해서 원문을 그대로 두었다. <Aufmerksamkeit>에도 역시 변증법적 운동이 스며있는 것 같다. <Aufmerksam>하려면 우선 주의가 산만한 자신을 하나로 엮어꼬아[의식의] 힘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집중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려 이렇게 집중하는 가운데 자신은 사라지고, 이렇게 집중된 힘에 대상이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즉 대상의 힘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Aufmerksamkeit>는 사랑의 운동과 유사한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힘이 대상의 힘이 되게 하기 때문에<Aufmerksamkeit>은 또한<배려> 혹은<친절>이라는 의미가 있다.

[3]원문을 그대로 두었다. 전문용어이기 때문에<Ansichsein>을<즉자존재>라고 한다고 해서 더 이해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풀어 번역한다고 해서 더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면<정신현상학>을 새로 써야 할 것이다.

[4]원문<bei sich sein>

[5]원문<Prinzip/원리>

[6]원문<das Selbst>

[7]키에르케고르가<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한<자기/Selbst>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거기서 물론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렇다. 

[8]원문<Enthaltsamkeit>. 훗셀의<Epoché> 혹은<eidetische Reduktion>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9]원문<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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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6, 57, 58 첫 문장

§56) 이렇게 존재하는 가운데 자신의 개념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하는 것의 속성이[1]바로 논리적 필연성이 성립되는 근거다.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이성적인 것이며, 유기적인 총체를 그 마디마디의 리듬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논리적 필연성은 내용[자체가] 개념과 본질이 된다는 것과 더불어 그런 내용이 지가 된다는 것이다. — 한마디로, 오로지 이 논리적 필연성만이[전체를 꿰뚫어 보는] 사변적인[2]것이다. — 구체적인 형태는 자신을 스스로 움직이는 가운데 자신을 단순한 규정성[3]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논리적 형식으로 승화하여 본질성만 갖춘 것으로 존재한다. 구체적인 형태의 구체적인 현존재는 오로지 이런 운동이며 바로[4]논리적인 현존재가[5]된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밖으로부터 형식주의의 형식을 덮어 씌울 필요가 없다. 구체적인 내용이 거기에 애당초부터 스며있는[6]형식주의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이 형식주의는 외피적인 형식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형식이란 구체적인 내용이 자기 터전에서 거기에 어울리게 생성되어 가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57) 이 같이 한편으로는 내용과 분리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자신을 분절하여] 리듬을[7]규정해야 하는 학문적 방법의 속성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은, 위에서 상기한  바와 같이, 사변적 철학에서 이루어진다. — 지금 이야기된 것은 학문적 방법의[껍데기]개념은[8]표현하고 있지만, 지금상황에서는 뒤에 가서 완성되는 것을 앞당겨 단언하는 것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단언의 진부를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이야기식으로 역어진 개요를 가지고 따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그것은 그렇지 않고 그와 반대로 이렇다>라고 단언하는 식으로, 상투적인 관념들을 확드러나고 모두에게 알려진 진리인양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나열하는 식으로, 아니면 신적인 내적 직관만 꿰뚫어 볼 수 있는[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성스러운 갑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양 보란 듯이 내놓고 단언하는 식으로 [여기서는 단언일 수 밖에 없는 학문적 방법에 대한] 단언에 대한 반론을 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뭔가 모르는 것을 대하는 지의 첫 반응을 보면, 살펴본 바와 같이 의례 우선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여 자신의 자유와 통찰력, 다시 말하면 외부의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위를 사수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 지가 여기서 대하는 것은 처음엔 외부 권위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반항의 또 다른 목적은[직관이라고 내놓은 것이 구구절절 습득한 것임을, 영특한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멍청해서] 애써 습득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려는데 있다. 이와 같은 작태는 정치극장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박수갈채로 받아들이는[자기의 무식이 뽀록날까봐/아니면 숙청될까봐 무서워 같이 박수치는] 행위와 똑 같은 유의 반응인데, 여기서 직관은 극단적인 혁명적 언사, 그리고 행동과 같은 것이다.[9]

 

§58) 그래서 학문에는[위와 같은 작태를 멀리하고] 개념의 힘겨움/노동[10]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떠맡는 일 없이는 열중할[11]수 없다.



[1]원문<In dieser Natur dessen, was ist, in seinem Sein sein Begriff zu sein>. 뭔 말인가? 이 문장 구조가 왠지 하이데거가<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제기와 관련해서 현존재[여기서는 인간을 의미한다.]를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하고, 그 근거로 제시한 „Diesem Seienden {dem Dasein} [geht es] in seinem Sein um dieses Sein selbst/현존재에게는 존재하는 가운데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에[무관심하지 않고] 그것을 움켜쥐려는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데거는 여기서<in seinem Sein>을<실존/Existenz>이라고 하고 현존재는 실존하는 가운데 이미 이런 실존으로서의 자기존재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현존재, 즉 인간은 존재론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실존의 차원에서 행한다는 말이다. 참다운 자기 모습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이어 실존이란 현존재가 선택하든 그렇지 않든 현존재가 이미 그속에 빠져있는 것으로서 현존재의 가능성 중 그 하나이며, 현존재가 존재하는 모습은 이렇게 실존으로서의 자기존재와 관계하는 가운데 존재하든지 아니면 그런 존재와 관계하지 않는 가운데 존재하든지 아무튼 양자택일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es selbst oder nicht es selbst zu sein“). (하이데거, Sein und Zeit, 12쪽 참조).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에 기대어 윗 문장을 살펴보면 „존재하는 것은(was ist) 존재하는 가운데(in seinem Sein) 자기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번역될 수가 있겠다. 여기서 부정형 „zu sein“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자가 존재하는 가운데 자기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가?

[2]„사변적인 철학이란 모든 것이 이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의식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념이란 사상 속에 있는 참다운 것으로서, 단지 직관이나 관념이 아니다. 사상속에 있는 참다운 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구체적인 것이고, 그 자체가 대립을 빗고 둘로 갈라져 있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이 각기 갖는 양면이 사유규정이며, 이런 사유규정을 통일한 것을 이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변적인 사유란 현실을[둘로] 해체하여 이런 차이들이 사유규정에 따라서 대립관계들을 빗게하고, 둘로 갈라진 것의 통일로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Spekulative Philosophie ist das Bewusstsein der Idee, so dass alles als Idee aufgefasst wird; die Idee aber ist das Wahre in Gedanken, nicht als bloße Anschauung oder Vorstellung. Das Wahre in Gedanken ist näher dieses, dass es konkret sei, in sich entzweit gesetzt, und zwar so, dass die zwei Seiten des Entzweiten entgegengesetzte Denkbestimmungen sind, als deren Einheit die Idee gefasst werden muss. Spekulativ denken heißt ein Wirkliches auflösen und dieses in sich so entgegensetzen, dass die Unterschiede nach Denkbestimmungen entgegengesetzt sind und der Gegenstand als Einheit beider aufgefasst wird.“) (헤겔, 종교철학강의I, stw Bd. 16/20, 30쪽)

[3]원문<Bestimmtheit>

[4]원문<unmittelbar>

[5]온갖 사물도 실존하는 인간과 같이 존재론적이란 말인가?

[6]원문<an ihm selbst>

[7]서설 §26에서 언급된 헤라클리트가 말한<리듬과 절/metra>이란 의미로 번역했다.

[8]원문<Begriff>. <bloßer Begriff>이란 의미로 번역햇다.

[9][개념]논리학이 헷갈리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헤겔 자신이 수긍하는 것 같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는데, 그것은 두고봐야 할 일이고 여기선 단지 <대인논증/argumentum ad hominem>으로 너무 쉽게 넘어간다.

[10]원문<Anstrengung des Begriffs>.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과 동시에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성질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개념을 따라가는 것이 힘겨울 뿐만 아니라 개념이 스스로 힘겹게 운동한다는 것이고 노동과 개념[운동]은 성질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11]원문<studium>. <노력하다>라는 어원의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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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5

§55) [오성의 의미는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1]], 실체가 자기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그 의미가 이미 이야기되었다.[2] 여기서 이야기된 바로는 그 의미가 실체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면에서 밝혀진 것이다. — 현존재는[본]질, 즉[다른 것이 다 추상된] 자기동일적인 규정, 달리 표현하면[하나로] 규정된 단순성이며, 이렇게[사유의 산물인] 규정된 사상이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 안에 작용하는 오성의[힘]이다.[3] 그래서 아낙사고라스가 처음으로[우주와 현존재의] 본질을 규정할 때 그랬던 것처럼[본]질은 누스가[4]되는 것이다. 아낙사고라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에이도스 혹은 이데아라는[5]개념 등으로 현존재의 본질을[6]보다 더 명확하게 파악했는데, 이런개념들은 규정된 보편성으로서<종>개념이다[7]. 혹자는<종>이라는 표현이 이 시대에 난무하는 아름다운 것, 성스러운 것, 영원한 것 등등의 이념을 담기에는 너무나 비속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할 수야 있겠지만, 이런 이념은 실로 종개념 그 이상의, 그 이하도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표현은 멸시하고 다른 표현을 선호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때 사용되는 표현은, 외래어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겟지만, 아무튼 개념을 자욱한 안개 안에 두루뭉실하게 만들어 놓고 그럴수록 아직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표현들이다. — 현존재가 바로 종[개념]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현존재는 단순한 사상인 것이다. 이런 단순성으로서의 사상, 즉 누스가[현존재의] 실체다. 실체는 이런 단순성과 자기동일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자기동일성은[자기긍정못지않게] [자기]부정성이다.[8] 그리고 이 부정성으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현존재는 자신이 해체되는 상태를 맞이한다. 현존재가 현존재가 되는 것은[제한된] 규정성으로서 그런데, 이런 규정성이 첫눈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또 이런 규정성의 운동은 알 수 없는 폭력이[외부에서] 가해진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사유와 현존재의] 규정성은[다른 현존재의 규정성과 관계하기 보다는] 애당초부터[인식되지 못한 상태로]  자기안에[9][자기의] 타자존재를 두기때문에[타자존재와 관계하는 운동이 자기와 관계하는] 자기운동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사유의 단순성에 바로 이런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유의 단순성이란 스스로 운동하고 자기 안에 차이가 나게 하는 사상임과 동시에 자기 고유의 내면성으로서 순수한 개념이다. 오성은 이렇게 분별하는 힘으로[10]생성되고 이런 생성으로서 정도를[11]아는[12]이성과 부합하는 것이 된다.



[1]이성과 함께 오성이란 개념의 형성과정을 보면 두 갈래의 의미로 생성되었다. 하나는 감각적 지각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인식능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와 함께 그 안에 존재하는 것에 작용하는 원리 자체가 누스, 즉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철학개념사 사전  Artikel „Verstand/Vernunft“ 참조).

[2]서설 §17 이하에서 다뤘다. 의식의 운동, 즉 정신현상학의 주제다. 그럼 오성과 함께 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개념]논리학인가? 의식의 운동은 이해가 가는데, 오성/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 헷갈린다. 뭔가 신비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이 점이 이해가 안 되는 이유의 근간에는 우주에 작용하는 원리가 이성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고, 칸트가 이야기한<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e> 이상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그렇다치고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면 어떤 식이든지 목적론을 제시해야 하는데, 스피노자의 목적론 비판 이후 어떤 목적론이 가능할까? 아무튼 앞에서<인식론>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존재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 언어분석철학 입장에서 보면 둘 다 같은 것이고 부족한 것이지만 – 여기서 이야기되는 ‚존재론’은 이해하기 힘들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고 뭔가 이상야릇한 이야기를 듣는 것같이 힘들게 만든다. 요즘에 들어선 사람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조차 수긍이 안가는 판인데, 연필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여 뭔가를 스스로 쓰고 지운다고 하면 광적인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원문<Verstand des Daseins>.이 소유격은 주격 소유격임과 동시에 목적격적 소유격이다. 그러나 오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서에서 규정하는 여기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겠다.

[4]원문<Nus>. <noein/인식하다>의 명사<noos> 혹은<nous>를 이야기하고 있다.<noema>도 역시<noein>에서 파생된 낱말로서<사상>을 의미한다.

[5]원문<Eidos oder Idea>.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Idea>를 플라톤이 이야기한<이데아론>과 연결시키고, <Eidos>는 플라톤의<이데아론>을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의<형상론>에서 이야기된<Eidos>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Eidos>와<idea>를 동일선상에 놓는<oder>가 이해안된다. 그리고 왜 순서를 지켜<Idea oder Eidos>라고 하지 않았을까? 플라톤의<이데아론>이 플라톤 자신이 만들어 논 것이 아니라 후세대가 만든 것이고, 플라톤은<이데아>와 관련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사용된<Eidos>는 플라톤이<이데아>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낱말에 속하는 것 같다.

[6]원문<Natur>

[7]원문<[Eidos oder  Idea, d.h.] bestimmte Allgemeinheit, Art>. <규정된 보편성, 즉 종>이다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제시한<형상론>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플라톤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이데아>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현상의 본질을 묻는<정의/Definition>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doxa/사견>과 <Episteme/“학문“)간의 관계를 다루는 차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고늘어지는 차원은 두번째 사견과 학문을 다루는 차원의 맥락에서 이야기된 개별자와 이데아간의 관계다. 플라톤에 따르면<Episteme>는 혼이 태어나기 전에 보았지만 몸으로 태어나면서 다 잊어버린 본질을 상기<Anamnesis>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기론>의 신비성은 제쳐놓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여기서 이야기된<이데아>는 칸트가 이야기한<선험적인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선험적인 것으로서<이데아>는 개별자의<참다운 존재근거/to aition to onti>가 되고 개별자는 이런 참다운 존재근거에<분유(分有)/Methexis>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한다. 플라톤이 정말 개별자와 이데아가 따로 논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가<개별자와 따로 노는 것/para ta kath’ hekasta choris>이라고 비판한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는<질료/hyle/Materie>에 대립되는 개념으로<형상/Eidos/Form>을 도입하여 사물의 모든 성질은, 그것의 인식가능성, 규정성, 제한성을 포함하여<Eidos>의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고, 바로 이<Eidos>가<개별자가 그런 개별자가 되게 하는 개별자에 속한/내재하는 본질/to ti en einai hekastou>이고<첫(!) 본질/he prote ousia>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따로 노는<이데아>가 본래적인 본질이 되는 첫째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hyle>와<eidos>는 개별자를 구성하는 양대원칙이고 서로<떼어놀 수 없는 것/ou choriston>이라고 한다. <hyle>와<eidos>의 관계는<dynamis/가능태>와<energeia/실재태>와 비교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능태>로서의<hyle>는  <유/gene>와 같은 것이고, <eidos>는 모든<차이/diaphorai>를 거쳐서 규정된 것이 된다. 즉 종차(differentia specifica)를 통한 종(Art)과 같은 것이다. 이런 종으로서<eidos>는 보편본질이 된다. (철학개념사사전4권55쪽 이하 참조). 근데 문제가 되는 것은 헤겔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을 따르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플라톤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양자를 동선에 놓고 거론한다. 아니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따로 논다는 생각이 애당초 잘못된 생각인지,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정 말하는 것이 같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8]원문<Aber diese Sichselbstgleichheit ist ebenso Negativität>. 이것 정말 이해안된다. 이 부정의 힘이 어디서 온다는 것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보편적 본질로서의<eidos>, 즉<종>으로서의 본질보다는 개별자의 본질(to ti en einai)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지 않는가 한다. 그리고 여기서 부정성이란 것을 뭔가 더 참다운 것이 있어서 덜 참다운 것을 부정하여 거기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건 플라톤이 이야기한<원본/paradeigma>을 따라가는<Methexis/분유>가 아닌가? 이것이 또 참다운<분유>의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개별적인 것과 이데아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이<Methexis>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부정은 뭔가 부족한 것의 부정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헷갈린다.

[9]원문<an ihr>

[10]원문<die Verständigkeit>

[11]<Maß>란 개념을 적용하여 번역하였다.

[12]원문<die Vernünftig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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