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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5

(§5) 그럼, [감각적 확신 자체 안에 드러나 있는] 대상을 우선 살펴보아 과연 그런지, 감각적 확신이 [이것이 나의 본질이야라고] 내놓는 [무매개적인 꼰대로서의] 본질이 실제로 감각적 확신 안에서 그렇게 [무매개적인 꼰대로]  존재하는지 알아보자. {근데 어떻게 가름하지?}[1]이것은 [감각적 확신이 대상이야말로 이런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상의 자기개념이란 [무개적인 꼰대로서의] 본질이 되는 것[2]이라고 하는데, 이런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대상의 개념이 정말 찍어 올릴[3]수 있게 감각적 확신 안에 있고 양자가 합치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목적을[4]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이란 <대상이란 참으로 무엇일까>라고 우리가 스스로 성찰하고 숙고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 눈으로 대상을 [직접]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감각적 확신의 표면에 그가 대상을 어떻게 움켜쥐고 있는가가 드러나 있는 것만을[5]살펴보는 것이다.



[1]<정신현상학> 서론 §10 ff. 참조.

[2]원문 <Wesen zu sein>. 이 표현에는 좀 당위적인 의미가 스며있다.

[3]원문 <vorhanden>

[4]원문<Ende>. 여기서는<목적>이란 의미. 쉴러의세계사강의제목<Zu welchem Ende studiert man Geschichte?>와 비교. <무슨 끝장을 보려고 역사를 공부하는가?>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5]원문 <wie ihn [Gegenstand] die sinnliche Gewissheit an ihr 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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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4

(§4) 이와 같이 꼰대를 세우고 있는 축과 거기에 들러리 서 있는 것, 즉 직접성과 매개성 간의 차이는[1] [등장하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만이 구별하는, 즉 우리만이 [억지로] 만든 차이가 아니라 감각적 확신에 [바짝 다가가] 그 자체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앞 단락에서 규정한 형식을 적용하지 않고 감각적 확신이 그 자체에서 스스로 그 차이를 보여주는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적 확신을 들어다 보자.] 그럼 그 내부의 한편은 <있다>는 것 외 아무런 주름이 없는 직접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꼰대로[2] 설정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은 감각적인 확신 내부에서 <자력으로>[3] 존재하지 못하고 타자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비꼰대적이고[4] 매개된 것, 즉 대상을 알기는 하지만 대상의 존재에 완전히 달려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지>로서의 자아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지와 달리 대상은 [항상] 존재하고, 이런 <있음>으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참다운 것과 꼰대로, 지가 알든 말든 이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대상은 지가 모른다고 해서 사라지는 법이 없고, 반면 지는 대상이 사라지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원문 <diesen Unterschied des Wesens und des Beispiels, der Unmittelbarkeit und der Vermittlung>. 여기서 <Wesen>과 <Beispiel>을 형이상학이 주조한 <본질>과 <부수적인 것>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헤겔 전후의 형이상학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1 전통 형이상학의 개념을 사용하면 사태를 두루뭉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래서 <Wesen>을 <꼰대를 세우고 있는 축>, <Beispiel>을 <들러리>로 번역하였다. 맑스의 <자본론> 첫 부분을 읽으면서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을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기대어 이해하고 들어가는 오류도 볼 수 있다.

[2]원문<Wesen/본질>

[3]원문 <an sich>

[4]원문 <unwesentlich/비본질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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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맑스의 자본론만이 유일한 예외라고 생각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3

(§3) [감각적 확신은 이렇게 순수한 존재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이 <순수한 존재>에 온통 기대고 있고[1], 또 <순수한 존재> 이상의 것을[2]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헤겔]가 <순수한 존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에게만 드러나는 것이[3]있다]. 즉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순수한 존재에 사실] 다른 것들이 다양하게 들러리하고[4]있다는 점이다. [이점을 감각적 확신이 실지로 하는 행위에서[5]살펴보자.] 이런 [수행적인] 감각적 확신은 [물론] [아무런 구별이 없는][6]순수한 직접성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감각적 확신은 동시에 순수한 직접성이 직접 <들러리>로[7]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8]이때 순수한 직접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들러리를 선다. 그래서 순수한 직접성안에 나타나는 차이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성이 어떻게 들러리를 서든지, [아무런 주름이 없다는] 순수한 존재에서 감각적 확신이 등장하는 그 순간[9]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지시적인 것>[10], 즉 <이사람>으로서의 <자아>와 <이것으로서의 대상>으로 주름지어지는 주요차이로 발견하다. <우리>가 이 차이를 성찰해 보면 전자, 후자 그 어느 것도 감각적 확신 안에서 <직접적>이지만 않고, 어디까지나 동시에 <매개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자아가 확신하는 것은 타자, 즉 대상이 되는 사물을 <통해서> 그렇고, 사물이 확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타자인 자아를 <통해서> 그렇다.



[1]원문 <Wesen/본질>. 여기서 <Wesen>은 <감각적 확신>이 존재하는 터전을 의미하는 것 같다.

[2]원문 <Wahrheit/진리>. 여기서 <Wahrheit>는 참과 그릇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나는 더 이상의 것을 담지 않는다>라는 허위와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진리>인 것 같다.

[3]원문 <an dem reinen Sein>

[4]원문 <beiherspielen>. 헤겔이 여기서 <Beispiel>을 <부수적인 것>,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symbebekos=accidens>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매개/Vermittlung>에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5]원문 <wirklich>. 여기서 감각적 확신이 하는 행위는 자기수행적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wirklich/실재하는>를 <자기수행적>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6]원문 <diese>

[7]원문 <ein Beispiel derselben>. <Beispiel>을 <사례>, 혹은 <부수적인 것>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순수한 존재>에서 <이사람>, <이것> 둘 중 하나가 들러리로 등장한다는 말이다.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으로 이해한 번역이다. 이 문단에서 헤겔이 토론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댄 본질과 <symbebekos/beiherspielen>의 관계가 아닌 것 같다.

[8]이에 대한 대답은 헤겔과 직접지의 <대화>에서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9]원문 <sogleich>. 직접성과 매개가 동시에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맨처음부터 매개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10]원문 <di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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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수정

(§2) <감각적 확신>은 그가 갖는 구체적 내용 때문에 등장하는 순간[1]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한> 인식, 아니 그 풍부함이 무한한 인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 풍부함이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아무리 <넘어서고 또 넘어서려고> 해도, 아니면 그 충만한 내용에서 한 조각을 떼내어 이를 <쪼개고 또 쪼개어 들어간다고> 해도 한계에 부딪히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감각적 확신은 또한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대상에서 아직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대상을 고스란히 온전한 모습 그대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감각적 확신은 이런 것인데,] 감각적 확신은 실지로 자신이야말로 더없이 추상적이고 가장 가난한 진리라고 자신을 규정하고[2] 나선다. [그래서] 감각적 확신이 알고 있다고 하는 대상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다음뿐이다: 그것이 <있다>. 감각적 확신이 내놓는 진리는 다만 사물의 <존재>일[3] 뿐이다. 이와 같은 확신 안에 나타나는 의식을 살펴보면 그 역시 단지 순수한 <자아>[4]로만 존재할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 확신 안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존재양식이 대등하게 되어 결국, 대상은 집어 찍어 들어올려 보여주는 것[5] 이상이 아닌] 순수한 <이것>이[6]되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도 [사물화 되어] 단지 [찍어 지적하는] 순수한 <이사람>이[7]되다는 말이다.[8]이런 <이사람>뿐인 자아가 <이것>에 대하여 확신하는 이유는 [통각으로서의] 자아가 의식 안에서 다양한 사유운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펼쳐나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람>으로서의] 자아가 확신하는 <사물>이[9]구별된 성질의 집합체로서 그 안에서 풍부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10],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물과 다방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도 아니다.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위와 같은 양면에 매달려 있지 않다.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자아, 대상 할 것 없이 둘 다 다면·다층적인 매개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면·다층적으로 관념하고 사유한다는 의미를 갖는 자아도 아니고, 다면·다층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의미로서의 사물도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11]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사물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있다>라는 것이 감각적인 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존재>, 달리 표현하면 아무런 주름이[12]없는 직접성이 감각적인 지가 내놓는 <진리>란 것의 다다. 이와 마찬가지로 확신은 대상에 대한 확신으로서, 이때 대상과의 관계는 [덜 떨어진][13] 직접적인 순수한 관계다. 결론적으로[14]의식은 <나>라는 자아다. 더 이상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이사람>일 뿐이다. 이런 <개별자>가 순수한 이것, 달리 표현하면 <개별적인 것>을 아는 것이다.



[1]원문 <unmittelbar>

[2]원문 <sich ausgeben>

[3]원문 <Sein der Sache>

[4]원문 <reines Ich>

[5]아도르노의 <Abhub>

[6]원문 <reines Dieses>, 시오랑의 “객체의 이념까지 멀리하는 점까지 나아간 순수한 [상태]”가 연상되기도 한다. (전 글 “encore” 참조)

[7]원문 <reiner Dieser>

[8]데카르트의 <성찰>과 함께 훗셀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으로 가기 위한 [예비적] 이념/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특히 제2장 <현상학적 근본고찰/Die phänomenologische Fundamentalbetrachtung>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원문에는 <Ich>가 두 갈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우림체를 사용한다. 역자는 기우림체를 < >을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몇 번 언급하였듯이 데카르트의 성찰은 <Cogito res cogitans cogitatum/나는 생각하는 사물로서 대상을 생각한다.>요약될 수 있겠다. <res cogitans>가 바로 사물화된 의식이다. <Cogito>는 통각(Apperzeption)으로서의 의식이 되겠다.  

[9]원문 <Sache/사물>. 여기선 그냥 대상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물도 자아와 마찬가지로 두 갈래로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시 기우림체가 사용된다.

[10]원문 <eine reiche Beziehung an ihr selbst>. 또 머리 아픈 <an ihr selbst>라는 표현이다.

[11]원문 <:>

[12]원문 <einfach/단순한>. 역자는 들뢰즈의 <le pli/주름>에 기대어 번역하였다.

[13]덜 떨어진 갓난애기인가 아니면 모든 것에 회의적인 노인네의 의식인가?

[14]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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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encore

§2를 한번 더 살펴보자.

 

<정신현상학>이란 드라마를 보러 오는 우리 구경꾼은 <직접지unmittelbares Wissen>가 1막 1장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고있다.

 

역자는 이 <직접지>를 주객의 구별이 없는 <꿈 같은 상태>로 이해했다.

 

근데 §2로 넘어가면서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원문을 살펴보자.

 

„Der konkrete Inhalt der sinnlichen Gewißheit läßt sie unmittelbar als die reichste Erkenntnis, ja als eine Erkenntnis von unendlichem Reichtum erscheinen, [...]. Sie erscheint außerdem als die wahrhafteste [...].”

 

역자는 §2를 처음에 이렇게 이해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직접지>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어린아이가 자랑 삼아 내놓는 것이 따져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근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아니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덜 익은 생각으로 번역을 한 것 같다. 질문은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몇 가지 질문을 정리해 본다.

 

1.

우선 눈에 띄는 것은, §1에서 §2로 넘어가면서 아무런 구별이 없었던 <직접지>에 구별이 생긴다. <구체적 내용konkreter Inhalt>과 <감각적 확신 sinnliche Gewissheit>이 그것이다. 왜 이런 구별이 생기는가? <등장erscheinen>하기 때문에? 뭔가 석연치 않다.

 

2.

<erscheinen>하면 <무엇이> <누구에게> 등장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극장이라는 기본구도를 염두에 두어야 했었는데 역자는 처음에 이 점을 간과했다.

 

<무엇>의 문제는 §1에서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근데 뭔가 석연치 않다. §2의 주인공은 <감각적 확신>이 아닌가? <직접지>가 왜 <감각적 확신>으로 둔갑했는가?

 

<누구에게>라는 문제는 더 헷갈리게 만든다. <직접지>가 철학=헤겔=구경꾼에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감각적 확신>이 뭘 모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인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 <감각적 확신>에게도 자신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타나는가?

 

원문을 살펴보자.

 

„Diese Gewißheit aber gibt in der Tat sich selbst als die abstrakteste und ärmste Wahrheit aus.“

 

역자는 처음에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감각적 확신은 이런 <확신>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진리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자신을 더없이 추상적이고 빈곤하기 짝이 없는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철학=헤겔=우리가 이런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원문은 앞에서 제기한 질문에 기대여 완전히 거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직접지>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고 보는 것은 철학=헤겔=우리고, 자신은 추상적이고 텅 비어있다고 신분증을 제시하면서(sich ausgeben) 말하는 쪽은 대려 <감각적 확신>이 된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등장하는 주인공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면서 세상만사를 다 본 노인네다. 이 노인네에 한겨울 담요를 뒤집어쓰고 벽난로 앞에서 „cogito“하는 데카르트가 겹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에밀 시오랑(E. Cioran)이[1] 겹친다.

 

직접적이기는커녕 엄청난 반성을 한 지가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1]“Il existe une connaissance qui enlève poids et portée à ce qu'on fait: pour elle, tout est privé de fondement, sauf elle-même. Pure au point d'abhorrer jusqu'à l'idée d'objet, elle traduit ce savoir extrême selon lequel commettre ou ne pas commettre un acte c'est tout un et qui s'accompagne d'une satisfaction extrême elle aussi : celle de pouvoir répéter, en chaque rencontre, qu'aucun geste qu'on exécute ne vaut qu'on y adhère, que rien n'est rehaussé par quelque trace de substance, que la « réalité » est du ressort de l'insensé. Une telle connaissance mériterait d'être appelée posthume : elle s'opère comme si le connaissant était vivant et non vivant, être et souvenir d'être. « C'est déjà du passé », dit-il de tout ce qu'il accomplit, dans l'instant même de l'acte, qui de la sorte est à jamais destitué deprésent.” (출처: De l'inconvénient d'être né. 태어나 있다는 것의 모순[l'inconvénient/불편을 모순으로 번역했다], 3번째 단장;www.scribd.com/.../Cioran-De-l-inconvenient-d-etre-ne-Syllogismes-de-l-amertume-textes-integraux, 강조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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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공장

공장에 왔는데 일하기가 너무 싫다. 지겹다. 배아픈 척 하면서 십장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눌러앉아 브레히트의 시 한편을 읽는다.

 

Entdeckung an einer jungen Frau

 

Des Morgens nüchterner Abschied von einer Frau

Kühl zwischen Tür und Angel, kühl besehen.

Da sah ich: eine Strähne in ihrem Haar war grau.

Ich konnt mich nicht entschließen mehr zu gehen.

 

Stumm nahm ich ihre Brust, und als sie fragte,

Warum ich Nachtgast nach Verlauf der Nacht

Nicht gehen wolle, denn so war’s gedacht,

Sah ich unumwunden an und sagte:

 

Ist’s nur noch eine Nacht, will ich doch bleiben

Doch nütze deine Zeit; das ist das Schlimme,

Daß du so zwischen Tür und Angel stehst.

 

Und laß uns die Gespräche rascher treiben,

Denn wir vergaßen ganz, daß du vergehst.

Und es verschlug Begierde mir die Stimme.

 

내키는 대로 번역해 본다.

 

 

젊은 여자의 몸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

 

볼일 다 본 이른 아침, 여자는 썰렁하게 문을 열고 나도 썰렁하게 문턱을 밟으면서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나눈다. 잘 가 잘 있어. 그 순간 여자의 머리 한 가닥이 허옇게 새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다.

 

말없이 여자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여자가 질문 한다. “이제 밤이 지났으니 한밤의 손님인 그 쪽은 원래 정했던 것처럼 가야하지 않나? 왜 안 가? 뭘 더 원해?” 여자의 눈에 내 눈을 담고 말한다.

“안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더 있으려고 해도 하룻밤 이상 더 머무를 수 없어. 이 하룻밤만 더 있고 싶다. 근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내일 밤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그런 것 기대하지 않고 지금 이 시간을 놓치지 않는 네가 왜 그렇게 문턱에 서서 그런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이런 앞일에 대한 대화는 얼른 끝내자. 너도 그러고 나도 그러고 우리 둘 다 한 순간 네가 바쁜 사람인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네가 더 쇠약해지지 전에.” 그 순간 그녀를 온통 먹고싶은 욕망이 나의 목소리를 덮고 목구멍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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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헤겔읽기, 그리고 페이크 오르가즘

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아니, 엉뚱한 데로 미끄러졌는지 제대로 미끄러졌는지 알 수 없게 헷갈린다. 이놈의 헤겔.

 

부럽다. 책 한 권을 마구 던지고 받고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한 줄을 못 넘기고 시달리고 있는데.

 

글도 혼이 있고 몸이 있는가 보다. 글의 혼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면서 뭔가 소통이 된다고 흐뭇해 하는데 가다 보니 그게 아니다. 혼이 아니라 페이크 오르가즘이었다.

 

글 읽는 즐거움이 <남근>의 쾌감이었다. 앎의 주인이 되는 글읽기가 어쩌면 이렇게 주인이 자신의 지배아래 놓인 대상이 느끼는 쾌감의 주인까지 되는 <남근>의 쾌감과 같은 것일까.

 

페이크 오르가즘, 이성의 간지?

 

글의 몸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살펴보자.

 

근데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추스려서 공장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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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

(§2) <감각적 확신>은 그가 갖는 구체적 내용 때문에 등장하는 순간[1]더할 나위 없이 <풍부한> 인식, 아니 그 풍부함이 무한한 인식인 듯이 등장한다. 그 풍부함이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아무리 <넘어서고 또 넘어서려고> 해도, 아니면 그 충만한 내용에서 한 조각을 떼내어 이를 <쪼개고 또 쪼개어 들어간다고> 해도 한계에 부딪히는 법이 없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감각적 확신은 또한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대상에서 아직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대상을 고스란히 온전한 모습 그대로 마주하기 때문이란다. 감각적 확신은 이런 <확신>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진리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자신이 더없이 추상적이고 빈곤하기 짝이 없는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는[2]것이다. 감각적 확신이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대상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다음뿐이다: 그것이 <있다>. 감각적 확신이 내놓는 진리는 이러듯 단지 사물의 <존재>일[3]뿐이다. 이와 같은 확신 안에 나타나는 의식을 살펴보면 그 역시 단지 순수한 <자아>[4]로만 존재할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 확신 안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존재양식이 대등하게 되어 결국, 대상은 집어 찍어 들어올려 보여주는 것[5]이상이 아닌] 순수한 <이것>이[6]되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도 [사물화 되어] 단지 [찍어 지적하는] 순수한 <이사람>이[7]되다는 말이다.[8]이런 <이사람>뿐인 자아가 <이것>에 대하여 확신하는 이유는 [통각으로서의] 자아가 의식 안에서 다양한 사유운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펼쳐나가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람>으로서의] 자아가 확신하는 <사물>이[9]구별된 성질의 집합체로서 그 안에서 풍부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10],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물과 다방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도 아니다.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위와 같은 양면에 매달려 있지 않다.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자아, 대상 할 것 없이 둘 다 다면·다층적인 매개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면·다층적으로 관념하고 사유한다는 의미를 갖는 자아도 아니고, 다면·다층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의미로서의 사물도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11] 감각적 확신 안에서는 사물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있다>라는 것이 감각적인 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존재>, 달리 표현하면 아무런 주름이[12]없는 직접성이 감각적인 지가 내놓는 <진리>란 것의 다다. 이와 마찬가지로 확신은 대상에 대한 확신으로서, 이때 대상과의 관계는 [덜 떨어진] 직접적인 순수한 관계다. 결론적으로[13]의식은<나>라는 자아다. 더 이상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이사람>일 뿐이다. 이런 <개별자>가 순수한 이것, 달리 표현하면 <개별적인 것>을 아는 것이다.



[1]원문 <unmittelbar>

[2]원문 <sich ausgeben>

[3]원문 <Sein der Sache>

[4]원문 <reines Ich>

[5]아도르노의 <Abhub>

[6]원문 <reines Dieses>

[7]원문 <reiner Dieser>

[8]데카르트의 <성찰>과 함께 훗셀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으로 가기 위한 [예비적] 이념/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특히 제2장 <현상학적 근본고찰/Die phänomenologische Fundamentalbetrachtung>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원문에는 <Ich>가 두 갈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우림체를 사용한다. 역자는 기우림체를 < >을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몇 번 언급하였듯이 데카르트의 성찰은 <Cogito res cogitans cogitatum/나는 생각하는 사물로서 대상을 생각한다.>요약될 수 있겠다. <res cogitans>가 바로 사물화된 의식이다. <Cogito>는 통각(Apperzeption)으로서의 의식이 되겠다.  

[9]원문 <Sache/사물>. 여기선 그냥 대상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물도 자아와 마찬가지로 두 갈래로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구별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시 기우림체가 사용된다.

[10]원문 <eine reiche Beziehung an ihr selbst>. 또 머리 아픈 <an ihr selbst>라는 표현이다.

[11]원문 <:>

[12]원문 <einfach/단순한>. 역자는 들뢰즈의 <le pli/주름>에 기대어 번역하였다.

[13]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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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4- 한스 위르겐 크랄

[출처: www.krahlstudien.de/texte/bemerkungen.htm]

 

자본론과 헤겔의 본질논리학의 관계에 대한[몇 가지] 지적 (Bemerkungen zum Verhältnis von Kapital und Hegelscher Wesenslogik)

(aus: Aktualität und Folgen der Philosophie Hegels, Hrsg. O. Negt, Suhrkamp 1970)

 

마르크스 정치경제학비판의 기본개념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생산물의 상품형식은 헤겔의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레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상품이란 개념은 마르크스 시스템비판의 가장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그 시스템비판의 출발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상품형식은 헤겔 본질논리학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논리학의 범주들을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풀어내어 정치경제학에 옮겨놓은 것이 바로 정치경제학비판의 핵심이라고 한다. 마르크스를 따르자면 헤겔 논리학은 자본이 하는 자기운동의 코스프레다. 마르크스는 본질과 현상의 차이를 그의 비판이 기대고 있는 전형으로 삼았다. 그리고 나서 가치범주에서 다시 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별하고 교환가치를 가치의 현상형식이라고 명한다. 이 점을 전통 경제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물화는 고사하고[이를 바탕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허위의식, 물신화, 신비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비판이 기대고 있는 전형으로서의 본질과 현상의 변증법에  과학Wissenschaft으로 등장하려는 학문Wissenschaft의 자기이해가 달려있다. 이것은 생시몽에서 콩트를 망라한 일명 실증주의를 겨냥하는 프로그램이고 오늘날의 현대 실증주의자들에게도 적중하는 프로그램이다. 헤겔 논리학의 학습은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마르크의 정치경제학비판에 시간적으로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전제되는 것이다.

존재는 곧 있다는 것이고, 있다는 면에서 존재는 가상이다. 구체적인 자연은 단지 이념의 타자존재, 즉 이념의 외화다. 현존하는 것은 자기가 정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정신, 달리 표현하면 자기가 가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상이다. 존재는 자기가 가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상이다. 반성으로서의 본질은 반면 자기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가상이다. 반성은 자기를 아는 가상이다. 이와 같은 한도 내에서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지양하고, 말하자면 그의 물질적 중력을 상실한 것이다. 존재는 이렇게 순수한 사상이 된다.

마르크의 혁명이론 형식은 그의 관념주의 비판에 기반하는데 그 관념주의 비판에는 둘 갈래 축[Momente]이 있다: 인식론적인 관념주의 비판과 추상이라는 개념의 수용이다.

초기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 테제에서 두드러지게 서술되었듯이 원칙적인 관념주의 비판을 전개한다. 요지는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 역시 아직 전통적인 유물론의 결함을 안고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Realität을 주체적인 실천이란 관점, 즉 인간의 행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객체의 관점아래, 관조, 즉 그저 감각적인 것의 관점아래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데모크리크 이후 전수되어온 전통적인 유물론이 관념주의와 대립되게 물질적인 현실을 실재하는 것Wirklichkeit으로 인정하고 이념을 본래적인 실재로 추대하지 않지만 물질적인 현실을 단지 관조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한 아직 관념주의 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유물론은 물질적인 현실과 관계하는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바라보는kontemplativ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현실을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은 그 앞에 바뀔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관념주의 비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태도는 노예를 두는 사회 아니면 농노사회에서 불거지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회형식의 생산자는 자신을 생산자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하나는 생산수단이 대체적으로 토착적인naturwüchsig 공동체의 구성요소로만 드러나고 인간의 생산물로 자명해지기 않기 때문이고2) 다른 하나는 토지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조직형식에서 노예와 농노는 자유로운 임노동자와는 달리 노예주 혹은 봉건영주에 육신 혼 할 것 없이 몽땅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오로지 객체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다시 유물적인 현실이 생산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철학하는 주인의 의식에[그대로] 반영된다.

이와 똑 같은 지적이 감각적인 직관의 자리에 이념을 갖다 놓는setzen 전통적인 관념주의에도 적용된다. 포이에르바흐 테제1번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전통적인 유물론에 대립하여 부르주아-신시대 관념주의는 행위라는 면, 즉 실천이란 것을 찾아냈으나 그 실천을 인간의 감각적인 행위로 전개하지는 않았다. 부르주아는 정통 봉건영주와 달리 생산에 관여verstrickt하게 되었지만, 그러나[직접 그런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단지 순환에[상품의 유통에] 관여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노동을 인간과 자연간의 구체적인 물질대사Stoffwechsel로 파악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순수한 정신 노동으로, 물질대사가 추상된 추상적인 노동으로 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 임노동자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거두어 들이고diskreditiert 정신노동[만을] 실재하는 노동으로 내 놓게 되었다. 여기서는 봉건성과는 달리 생산수단 자체가 생산물이 되었고, 그리고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본가와 맺는 관계가 노예 또는 농도와 같이[전]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계약으로 규정되는 관계로 나타나기 때문에 생산의 원리는 인식되었다.

[이렇게] 생산수단과 자유롭게[이동하는] 노동자간 분리되어 그 결과 이런 식으로 비로서 물질로부터 추상된 순수한 주관성reine Subjektivität, 자연으로부터 추상된 생산력으로서의 순수한 노동reine Arbeit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신노동의 개념(독일 관념주의가 말하는 개념의 활동Tätigkeit des Begriffs)은 한편 자유롭게 이동하는 노동자를 이상화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개별자본가를 Unternehmerperson 이상화한 것이다.

전통적인 유물론은, 물론 그것이 물질적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는 것을 내포하지만 사회적인 객관성에Objektivität 대해서는 수동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사회적 객관성을 생산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객관성에 대한 이런 개념이 마르크스에 이르러서는 정신노동이라는 개념과 종합되어 사회적인 객관성이 능동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단지 철학 내재적인 바탕에만 근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포이에르바흐의 실천개념과 현실적인 계급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행된 물질성과 이상성의 종합, 정신노동과 생산되지 않는 객체의 종합을 근거로 하여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에 속하는 개념을 획득한다. 즉 구체적인 노동이라는 개념이다.

헤겔에게는 인간이 그 위에서 그를 지배하는 의식의 꼭두각씨일 뿐이나 마르크스는 인식이 유한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술어와 성질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저서에서 헤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데 앞서 전제하는 것이며 헤겔을 뒤집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는 다시 헤겔의 본질논리학을 수용한다.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적인 의식은 가상에 속하지만, 현실성을 갖는 가상이다realer Schein. 즉 자본이다. 자본은 정신현상학이 현존하는 모습이다(Das Kapital ist die daseiende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자본은 현실적인 형이상학이다. 자본은 현실적인 사물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상이지만[현실적인 가상으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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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4-파울 첼란 <편도 씨를 세어라>

편도 씨를 세어라…

 

편도 씨를 세어라,

쓰디쓰고 너를 잠 못 이루게 했던 것을 세어라,

나도 세어 거기에 넣어라:

 

네가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았을 때 나는 너의 눈을 찾아 헤맸고,

아무도 모르는 한 가닥 줄을 꼬았고

네가 생각했던 이슬은 그 줄을 따라

그 누구의 마음도 찾지 못한 단창구(短唱句)를 지켜 보호하는  

항아리들로 미끄러지듯 흘러 내려갔다.

 

거기서 비로서 너는 온통 너의 것인 이름으로 들어갔고,

흔들림 없게 발을 내디디고 너에게로 당당하게 걸어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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