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쥬세뻬 피오리가 쓰고 김종법이 옮긴 <안또니오 그람쉬>(이매진. 2004)를 읽었다.

 

안또니오 그람쉬는 1891년 1월22일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깔리아리주 알레스에서 프란체스꼬 그람쉬와 삐삐나 마르챠스의 일곱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꼽추와 성장부실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그람쉬는 1910년 병역이 면제됐고, 1911년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하는 알베르또 재단의 장학금으로 또리노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914년 이딸리아사회당에 입당, 사회당 주간지 <인민의 외침>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5년 대학을 그만뒀다. 1916년 사회당 기관지 <전진>에 '거탑 아래서'라는 칼럼을 정기 기고했다. 1917년 사회당 새 집행부 12인 위원 중 한 사람이 된 그람쉬는 1919년 5월 따스까, 떼라치니, 똘리아띠와 함께 사회당 내 좌파를 결성하고 <신질서>를 펴냈다. 이 시기 그람쉬는 또리노의 공장평의회에서 적극 활동했다. 1921년 이딸리아사회당이 분열, 이딸리아공산당이 창당됐고 그람쉬는 공산당 중앙위원이 됐다. 1922년 6월 코민테른 집행위원 자격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람쉬는 모스크바 근교 병원에서 휴양했다. 거기서 나중에 아내가 되는 줄리아 슈흐트를 만났다. 줄리아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러시아공산당원이었고, 그람쉬의 두 아들 델리오와 줄리아노를 낳았다. 1922년 10월 이딸리아파시스트당이 로마로 진격, 무쏠리니가 정권을 장악했다. 1924년 4월 베네토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람쉬는 5월 러시아를 떠나 이딸리아로 돌아왔다. 국회에서 파시스트와 정면 대결을 벌이던 그람쉬는 1926년 11월 로마에서 체포돼 1928년 20년4개월5일을 선고받고 바리 근처 뚜리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람쉬의 옥바라지는 처형 타티아나가 도맡았다. 줄리아의 언니 타티아나는 감옥에 갇혀 있는 그람쉬를 정기적으로 찾아가 필요한 물건들을 넣어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투병을 하는 그람쉬를 돌봤다. 그람쉬가 세상을 뜬 뒤에는 그람쉬가 감옥에서 쓴 3000쪽에 달하는 노트들(<옥중수고>)을 이딸리아 밖으로 안전하게 옮기는 일을 책임졌다. 뚜리 교도소에서 병이 악화된 그람쉬는 1933년 12월 포르미아의 개인병원으로 옮겼고, 1935년 로마의 뀌시사나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1937년 4월27일 뇌일혈로 숨을 거뒀다. 46세였다.

 

그람쉬가 쓴 <옥중수고>의 줄거리를 쥬세뻬 피오리는 이렇게 요약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으로 승리했지만, 부르주아지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지도(헤게모니)가 자유주의 국가형태를 통해 국민대중의 폭넓은 동의를 확보하고 있는 서유럽에서는 진지전을 펼쳐야 한다. '전방의 참호'를 점령하고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포대가 있는 요새' 즉 시민사회를 소유하기 위한 전략. 프롤레타리아 군대는 이데올로기 전쟁에 충분히 숙달돼 있어야 하고, 부르주아적 인생관을 대치할 또 다른 세계관, 새로운 도덕, 새로운 이상, 새로운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포대'는 함락되고 자유주의 국가형태에 대한 동의는 소멸된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인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피지배자의 동의에 의지해 탄생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 사회주의의 대의 아래 전통적 지식인을 획득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관을 상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지의 '포대(문화적 지도)'와 '전방의 참호(지배)'가 노동자계급에게 넘겨지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실현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지식인'은 당, 즉 '현대의 군주'다."

 

병약했던 그람쉬는 뚜리 교도소 안에서 척추가 차츰 파괴돼 근육을 따라 고름종기가 생기는 포트 병에 시달렸고, 오른쪽 가슴 위에 결핵을 앓았다. 두 차례 심한 각혈도 있었다. 동맥이 과도하게 긴장해 생기는 동맥경화와 발작에도 고통받았다. 정신을 잃고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했고, 경련이 며칠간 계속되기도 했다.

 

"최근까지 저는 말하자면 지성에 있어서 비관주의자였고, 의지에 있어서는 낙관주의자였습니다. 즉 제게 주어진 조건(일반적 측면에서 제가 처한 법리적 상황 때문에 주어진 조건과 세부적인 측면에서 제 직접적인 건강 상태 때문에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에 너무나 불리한 조건들을 모두 명확하게 파악하면서도, 얼마 되지 않는 유리한 요소들을 조직하는 동시에 수많은 불리한 요소들에 면역력을 갖추게끔 노력하는 데 결코 소홀함이 없이, 이성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인내심과 예지로 어느 정도 평가받을만한 결과들을 얻었고, 또 적어도 육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아울러 차츰 스러져가는 생명력을 유지할 에너지가 치명적으로 소모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고난에 항복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명확한 탈출구도 찾을 수 없고, 발휘할만한 힘을 비축하는 것도 고려할 수 없게 됐다는 뜻입니다."(타티아나에게 보낸 편지)

 

"저는 너무 피곤합니다. 모든 것, 모든 사람과 격리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제 면회 때 그렇게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면회가 고문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다고, 그리고 면회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솔직하게-어쩌면 잔인하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요-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에게도, 그리고 다른 어느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말할 게 없습니다. 저는 빈껍데기입니다. 살아가려는 최후의 의지, 마지막 생의 안간힘을 올 1월까지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모르고 있었죠. 움직이고 말하는 데 제한을 받는 이런 조건 속에서 내가 당신은 알지 못하게 했던 것이죠. 지금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한 이런 경험을 다시 겪는다면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삶의 또다른 이름입니다."(타티아나에게 보낸 편지)

 

"저는 반은 미쳐 있고, 머잖아 완전히 미치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없습니다...바라건대 제가 더 버틸 수 있다고 믿지 말아 주십시오. 소뇌와 두개골의 통증이 저를 미치게 합니다. 손을 마음대로 쓰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동맥경화 때문만은 아닙니다...저로서는 어느 곳이든 그다지 상관없습니다. 지금 제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이 지옥에서 어디든 밖으로 옮겨지는 것만이 중요합니다."(타티아나에게 보낸 편지)

 

이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그람쉬는 <옥중수고>를 계속 써나갔다. "이 사람의 의지력이 인간의 한계에 닿아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람쉬는 극심한 고통에도 꺾이지 않았고, 절망하지 않으면서 다가오는 육체의 파국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자신의 내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무엇, 즉 지성의 힘에 의지해서 연구와 저술을 이어갔다." 그렇게 쓰여진 노트가 모두 33권 2840여쪽이다.

 

그람쉬의 아내 줄리아와 두 아들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 온몸과 마음을 바쳐 그람쉬의 옥바라지를 했던 처형 타티아나의 그 뒤 삶도.

 

http://www.youtube.com/watch?v=T0gBHUXGq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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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9 10:51 2011/06/0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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