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스승의 옥편
 
한문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어려서 서당에 다녔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한문 공부를 처음 시작한 것은 대학 4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이기석 선생님과 그 때 처음 만났다. 선생님이 물으시면 덜렁대다 틀리기 일쑤였다. 그 후 작고하실 때까지 8년을 모시고 공부 했다.
뜻을 몰라 여쭈면 사전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사전에 이런 뜻으로 나와 있다고 말씀드려도 당신 눈앞에서 기어이 다시 찾아보게 하셨다. 무슨 뜻이 있느냐고 물으셔서 이런 저런 뜻이 있노라고 말씀드리면 “봐! 거기 있잖아.”하셨다. 의미는 항상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 숨어 있곤 했다. 지금은 나도 대학원생들과 공부하면서 이 방법을 쓴다. 사전 찾아봐. 무슨 뜻이 있지? 거기 있잖아!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댁에 갔을 때, 하도 많이 찾아서 반 이상 말려들어간 민중서림판 한한대자전을 보았다. 12책으로 된 한화대사전도 손때가 절어 너덜너덜했다. 선생님도 찾고 또 찾으셨구나. 둥근 돋보기로도 한 눈을 찡그려가면서 그 깨알 같은 글씨를 찾고 또 찾으시던 모습이 떠올라 참 많이 울었다.
사모님의 분부로 선생님의 손때 묻은 그 책들을 집에 가져왔다. 헐어 바스라지고 끝이 말려들어간 사전을 한장 한장 다리미로 다려서 폈다. 접착제로 붙이고 수선해서 책상 맡에 곱게 모셔두었다. 지금도 사전에 코를 박으면 선생님의 체취가 또렷이 느껴진다. 내 조그만 성취에도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던 어지신 모습도 생전처럼 떠오른다.
한한대자전은 너무 낡아 쓰지는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고, 한화대사전은 지금도 자주 애용한다. 그때마다 더 열심히 찾아야지, 더 열심히 찾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집에서 쓰는 내 한한대자전도 너무 낡아 선생님께서 쓰시던 사전과 비슷한 몰골이 되었다. 학교 연구실에서 쓰는 사전도 많이 낡았다. 이제는 가로쓰기로 된 한한대자전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앞으로 나는 몇 권의 한한대자전을 더 너덜너덜하게 만들 수 있을까?
선생님이 세상을 뜨신 후에는 김도련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했다. 나를 앉혀 놓고 예전 공부할 적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하루는 서당 앞에서 어떤 사람이 헌책을 가져 나와 팔고 있었다. 우리말로 풀이한 논어를 그때 처음 보았다. 황홀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십여 리 길을 걸어 논어를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쌀을 내주라고 하셨다. 놀러온 아버지의 친구 분이 헌 책인데 너무 비싸다고, 시내 책방에 가면 그보다 싸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저 아이가 저 책을 만 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만 냥짜리 책이 될 게고, 한 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한 냥짜리 책이 될 걸세. 책값을 깎겠는가?” 어머니가 쌀을 퍼줄 때 뒤주 밑바닥을 박박 긁는 소리를 들었다. 일제 말 공출이 심해 끼니도 잇지 못하던 때였다.
선생님은 그때 그 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못해 평생을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떨어지면 풀칠해서 읽고, 더 낡으면 다시 제본해서 읽었다. 그렇게 읽은 논어를 훗날 당신 손으로 꼼꼼히 풀이해서 간행했다. 지금도 이 책을 보면 뒤주 바닥을 박박 긁던 소리가 들린다며 누더기가 다 된 낡은 논어를 어루만지며 굵은 눈물을 떨구시던 그날 오후를 잊을 수가 없다.
조선 후기의 명필 이삼만은 서예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벼루 세 개 쯤 먹을 갈아 밑창 낼 노력이 없이는 글씨를 쓸 생각도 말라고 했다. 학문의 길에 무슨 왕도가 있겠는가? 단지 단순무식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 지금도 마음이 스산하면 선생님의 사전을 쓰다듬고 냄새를 맡는다. 많이 힘들 때는 무작정 포천에 있는 산소로 달려가 한참을 혼자 앉아 있다 오곤 했다. 김도련 선생님은 벌써 여러 해 째 병석에 누워 계신다. 가까이에 여쭤볼 스승이 안 계시니, 오늘도 나는 사전을 찾고 또 찾는다.
 
정민의 옛사람 내면풍경에서 http://hykorea.net/korea/jung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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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8 10:12 2005/02/1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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