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어느 중소영세사업장의 기막히지만 너무나 일반적인 사연들 (3)

이인석 (노동자의 힘 회원)

해고가 단행된 다음 날, 내가 찾아간 ‘반장’ 형은 공고 3학년때 실습생으로 들어와서 10여년을 이 공장에서만 일했고, 그래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지독한 고무냄새와 함께 보냈다. 고치지 못하는 기계가 없고, 대단한 손놀림으로 불량하나 없이 제품을 찍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아무리 단순노동이라 해도 ‘짠밥’의 힘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10여년을 ‘고무쟁이’로 살면서 얻은 것이라곤 주야맞교대에서 오는 쾡한 눈빛과 허리디스크, 그리고 전세방 하나가 고작이다. 그리고 어떨 때는 극단적인 반동적(?) 발언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을 보면서 가끔 놀라기도 하는데, 그날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공장 안에서는 노동자이지만, 공장만 벗어나면 ‘리니지Ⅱ’와 ‘음주’말고는 할게 없는 그런 노동자라는 것이다.
저녁부터 마신 반주 탓에 벌써 알딸하게 취해있는 그 형은 대뜸 “너도 이제 노조 생각은 집어치우고, 거기서 크던지 아니면 큰 회사로 옮기던지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역정을 내면서 이런 저런 제안을 하자, “남자가 *팔리게 그렇게는 못한다. 깔끔하게 나가주는게 복수하는 거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시간 남짓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은 현재에 대한 절망적 상황과 복수심이 남정네 이데올로기와 보수적 감성을 타고 넘으면서 결과적으로 ‘자기방어’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도 포기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사는 이야기나 하면서 술만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생산 3과 아주머니들을 만나보려고 이러저리 알아봤다. 나의 작업조건상 아주머니들과는 친해질 수 없는 상황이라서 직접 만나보지는 못하고 ‘조장’ 아주머니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상황을 전해들을 수밖에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조장’ 아주머니도 관리자이니만큼 이미 정리가 된 상황에서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정 때문에 이러저리 이야기는 해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단 한달치 월급을 위로금으로 받았고, 몇 달은 실업급여가 나오는 상황에서 식당일을 하거나 쉬겠다는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사실 딱 최저임금을 받는 조건에서 여기보다 못한 직장은 거의 없다. 구정만 지나면 취업하기 쉬워질 터, 그때까지만 애들도 방학이고 해서 돌보면서 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짤린 중국분들인데, 연수기간이 끝나서 불법체류기간인 세분 말고는 일주일도 안되서 취업이 되는 것이 놀라웠다. 상황을 들어보니 브로커가 있거나 해서 취업을 알선해 주는 것 같았고, 불법체류자 분들도 몇주 안되서 취업을 했다. 하긴 그만큼 싼 값에, 그리고 우리말도 잘하는 조선족들이 대부분이니 만큼 재취업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 지역만 해도 이주노동자들이 정말 많은데, 선교사업을 하는 교회말고는 이주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조직될 수 있는 토대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런 조건에서 그들은 그렇게 부유하는 삶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나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왔는데, 이번에 나의 움직임들이 부장을 비롯한 전무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자주 내 주위를 서성거리면 돌아다니는 폼이 예전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노조 결성을 두 번이나 싹부터 뽑아본 자신감도 있고, 그나마 성실하게 일해주는 놈이라서 곧 정신을 차릴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똘똘해 보이는 것도 같고 하니, 일하는 것 봐서 품질관리 등의 사무직이나 조장 같은 관리자를 제안하면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통박을 굴리면서 말이다.
나도 일주일정도 긴장감있게 움직였으나,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소규모사업장 조직화라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구나 싶기도 하고, 나의 활동방식에 문제는 없었나 반성도 해본다. 일마치고 자리에 누우면 사실 절망감에 몸서리쳐지기도 하는데, 모든 것은 내가 극복해야할 문제다. 정리해고로 인한 노동시간과 강도의 강화, 전환배치 등등 불만들은 누적되고 있으며, 지금 추세라면 또 한번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아마도 여기 공장을 폐쇄하고 **지역으로 이전할 개연성이 커 보인다. 다음번에는 이렇게 미숙하게는 하지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노동의 새벽은 온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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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7 19:57 2005/03/0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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