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어느 중소영세사업장의 기막히지만 너무나 일반적인 사연들 (1)

이인석 (노동자의 힘 회원)

12월 초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다. 나는 11월 초 첫 출근부터 2주동안은 몸이 죽어나는줄 알았고, 다음 2주간은 현장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한달이 지나고서야 조금 적응이 된 나에게 그런 조짐은 하나의 기회로 생각되었고 '얼씨구나' 싶었다. 그건 바로 '큰형님'이라 불리는 주임이 주관하던 조회에 난데없이 '밉새' 부장이 들이 닥치는 것부터 시작된다. 부장은 "불량 많이 나오고, 물량 적게 뽑는 경쟁하냐", "니들이 그런 올림픽 나가면 금메달이다" 등등 그야말로 진부하고 얍실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새끼' 전무가 조회를 주관하면서 어제 나온 '불량'들을 현장에 주욱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너희 새끼들! 일하기 싫으면 당장 때려치워, 밥 멕여줬더니만 배은망덕한 놈들 같으니라고"하면서 가슴팍에 콕콕 꼽히는 말들만 골라서 씹어 대는 것이었다. 동시에 '연말 상여금이 안나온다, 생산팀에서 반 정도 짤린다'라는 말이 사무실 쪽에서 솔솔 흘러나오면서 현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꽝꽝 얼어붙기 시작했다.

급기야 12월 23일, 그 가슴 설레이던 날에 우리는 '무급 휴가'라는 카운터 펀치를 맞아버렸다. 철없는 특례병 몇명은 나름의 휴가 계획을 짜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현장 동료들은 모두 우거지상이었다. 관례상 사흘만 일하면 '만근'이니 오죽했겠으며, 특히 종무식도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상여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12월 31일, 은행에 가서 확인해본 결과 수습사원에게 상여금 대신 지급되는 위로금 5만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카드값 막을 걱정과 회사에 대한 분노가 버무려지면서도 너무나 순박하게 '회사가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다'라면서 특유의 애사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본능',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삶의 터전에 대한 '애정(혹은 순응)' 그리고,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나란히 이어지고, 아니 버무려지고 있었다.

결코 편치만은 않았던 무급휴가가 끝나고, 시무식도 없이 시작되는 새해 첫날 조회에서 '*새끼' 전무는 "비상한 결단이 필요한 시기이니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선전포고'는 바로 사상과 검사를 하는 아주머니들 13명, 물량을 찍어내는 중국인 7명과 일반인 2명의 해고라는 핵폭탄이었다. 1월 5일 업무가 끝나는 시간에 해고자 명단이 현장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나랑 제일 친한, 그리고 부장에게 대들곤 했던 13년 근속의 '반장' 형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당연히 잔업은 모두 때려치우고(하긴, 그날 작업을 한것도 얼마나 우수운 일인가!) 중국인들은 식당에서, 나같은 일반인들은 근처 고기집으로, 특례병들은 역전앞으로(그리고 2차는 나이트 클럽으로), 아줌마들은 집으로 삼삼오오 흩어졌다. 내가 같이 모이자고 애를 써봤지만, 특례병, 중국인, 아줌마, 그리고 일반인들의 배타적인 분위기를 쉽게 극복할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고자 명단에 올라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한솥밥 먹었던 동료가 부당하게 해고된다는 것에 분개하는 존재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이중성'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노조를 만들자', '현장 작업자들이 이렇게 밀리면 안된다', '내가 만약 짤리면 민주노총에 고발(?)해버리겠다'라고 한마디씩 거들던 동료들도 그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수습기간을 넘기려면 한달이 남았지만, 여기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어눌하지만 진지하게 선동을 해댔다. 물론 모두들 수긍하고, 비명같은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쐬주만 내리 마셔댔다. '니가 말 안해도 안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할수 있겠니', 그리고 '살아남은 내가 미안하다, 그래도 어쩔수 없다는 건 너도 알지 않니'라는 정서들 속에서 암담한 전망에 대한 회한만이 켜켜히 쌓여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울분'이 어떤 것인지, 나도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절감하면서 말이다. 술자리에서 잠깐 자리를 떠서 회사 식당으로 중국인들을 보러 가면서 특례병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례병들도 분위기는 비슷했다고는 하지만, '시간만 때우면 된다'라는 정서들 때문인지 이내 나이트 클럽으로 뜰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형님들은 내가 와줘서(?) 반가워는 했지만, 내 주위 몇명의 '사교적' 발언 외에는 한국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과 이 회사, 그리고 한국사람들을 욕하고 있었으리라! '계급적 본능'과 '원한의 덫'이 교차하는 하루, 나에게는 너무나 큰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2/18 10:24 2005/02/18 10:24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plus/trackback/118